그가 돌아왔다
티무르 베르메스 지음, 송경은 옮김, 김태권 부록만화 / 마시멜로 / 2014년 10월
평점 :
절판


70년 만에 총통이 귀환했다. 아, 어느 총통을 이야기 하냐고? 우리 모두가 죽었다고 믿어온 바로 그 문제적 인간, 아돌프 히틀러다. 독일 출신의 작가 티무르 베르메스는 “자연과학적으로 설명하기 힘든”이라는 표현으로 1945년 4월 베를린 방어전에서 자살한 것으로 알려진 문제적 인간을 문학적으로 소생시켰다. 사실, 히틀러의 사후 그의 유해가 발견되지 않아 독일제국의 총통은 죽은 것이 아니라 사실 유보트 잠수함을 타고 남미 혹은 미지의 남극 대륙으로 망명해서 제4제국의 부활을 꿈꾸고 있다는 식의 음모론이 횡행하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그런 음모론에 비해 베르메스 작가의 선택은 훨씬 탁월하다. 그것도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그의 부활에 대한 잡다한 논란을 틀어막고 이야기를 출발시킨다.

 

 

 

 

그렇게 21세기 독일의 정치적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베를린에서 부활한 히틀러는 정확하게 자기가 지난 세기에 죽던 시점의 복장 그대로 돌아왔다. 개인적으로 베르메스 작가가 이 풍자 소설에서 그린 히틀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악(great evil)의 근원자이자 전쟁광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는 그런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냉혹하고, 자기가 내린 결단에 있어서는 추호도 망설임도 없는 그런 독재자라기보다 현실에 직면한 문제들을 끝없이 사유하는 철학자 같은 이미지라고나 할까. 물론 우리의 총통은 예나 지금이나 독일 민족의 가능성을 끝까지 믿으며, 제국의 부흥이야말로 민족의 유일한 목표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은 변하지 않았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주변 인물들은 모두 진짜 히틀러를 텔레비전 코미디물에 등장하는 메소드 배우라고 생각한다. 항상 그들은 정도를 지나치지 않았냐, 얼마나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으면 이 정도의 연기가 가능하겠냐고 상찬을 보낼 지경이다. 문제는 1930년이나 21세기나 그를 제외한 모두가 히틀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결과는 엄청난 인명이 사상된 2차 세계대전의 발발이었으며, 그 결과로 독일 민족과 국가는 파멸 직전까지 몰렸었다.

 

1930년대에도 히틀러는 이제 막 도래한 라디오 방송 시절의 일약 라디오스타였다. 패전과 살인적인 인플레 그리고 상상을 초월하는 실업률도 실의에 빠져 있던 독일민족의 각성을 이끌어 내는데 한몫 단단히 했던 나치 선전상 닥터 괴벨스의 선전술도 빼놓을 수 없지만, 히틀러 자신의 카리스마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요인이었다. 현실세계에 다시 등장한 히틀러는 이번에도 최첨단 미디어를 이용해서 단박에 스타 반열에 오른다. 인터넷 시대의 총아로 등장한 유튜브는 인터넷에 올려진 동영상을 철저하게 타자화시키는 전략으로 대중의 눈과 귀를 사로 잡아왔다. 히틀러를 닮은 코미디언이 동영상 하나 정도는 독일연방공화국에 아무런 해가 되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을 행간에서 읽었다면 무리일까.

 

이렇게 거칠 것 없이 달리던 히틀러에게도 최대의 약점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홀로코스트였다. 그를 발탁해서 일약 방송스타로 키워준 플래시라이트 사의 여걸 벨리니도 신신당부한 것이 있으니 절대로 방송에서는 유대인에 관련된 것은 안된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비서로 열심을 다해 돕던 베라 크뢰마이어 양의 할머니가 연관된 에피소드는 변신에 변신을 거듭한 독재자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는 사실을 독자에게 일깨워준다. 바로 이 지점에서 소설은 좌충우돌 부활한 독재자의 본모습을 잊지 말라고 경고한다. 이 정도의 균형도 잡아주지 않는다면, 소설 <그가 돌아왔다>에는 레드라이트가 들어왔을 지도 모르겠다.

 

한편 다시 태어나 현실세계에 빛의 속도로 적응한 희대의 독재자는 민주적 절차가 확고하게 자리 잡은 독일연방공화국에서 기존의 우익테러 같은 방식은 씨가 먹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모양이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이나 발언을 들을 때마다 자신을 호위무사처럼 옹위하던 게슈타포와 친위대를 그리워하는 걸 보면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세상을 맞은 독재자는 여전히 자신의 인종차별주의적 이데올로기와 슬라브 민족을 2등 국민으로 삼아 에너지 자원의 획득을 위한 정복전쟁에 대한 망상을 저버리지 않는다. 문제는 70년 전에는 그의 망상이 엄청난 폐해를 초래했다는 점일 것이다.

 

<그가 돌아왔다>의 재미를 더해 주는 작은 에피소드들도 눈여겨 볼만하다. 예를 들어, 뉴스 프로그램 중에 계속해서 화면에 등장하는 자막과 단신들은 뉴스 진행자가 전해 주는 뉴스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히틀러식 텔레비전 분석의 정점이다. 선진국병이라 불리는 저출산과 낙태 문제를 극렬하게 비난하면서, 이런 식으로 하다가는 훗날 동부전선에 투입될 정예 사단 수가 줄어들 거라는 식의 사고는 정말 못말릴 정도다. 공원에서 비닐봉지를 들고 다니면서 뒤처리를 하는 애견인들을 미친여자라고 부르는 장면도 빼놓을 수 없다. 마케팅 천국의 시대에 비용이 안드는 선전술의 방식으로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지지자를 규합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으로 덧글배틀도 마다하지 않는 총통사령부의 문제적 인간은 역시나 히틀러다운 발상이다.

 

소설의 말미에는 히틀러의 집권기를 다룬 만화를 그린 김태권 작가가 그린 서울에 나타난 히틀러라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작가는 히틀러가 구사하는 독일어 대신 외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영어를 해야 한다고 하면서, 코스프레한 히틀러로 한껏 희화화한다. 하지만 한 때 모든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독재자가 요즘 우리 사회 갈등의 현장 곳곳에 준동하는 우익과 결탁했을 때 과연 어떤 식으로 발전할지에 대해서는 의문점으로 남겨 두었다. 과연 우리 사회가 독일처럼 표현의 자유라는 미명으로 어떤 가치까지 관용적으로 대할 수 있을지 그게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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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는재로 2014-11-17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의외로 제대로 된 인간으로 그려진다는게 솔직히 그가 한 행동만 알고 있지만 어떤 배경이 있는지 왜 했는지는 솔직히 외면하고 있는 뭐 워난 큰 잘못을 저질렀으니
책 자체는 재미있께 읽었습니다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비망록
조 사코 지음, 정수란 옮김 / 글논그림밭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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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오래 전에 조 사코란 미국 만화가이자 저널리스트의 <팔레스타인>을 읽었다. 그 책을 읽고 나서 당연히 리뷰를 썼으리라고 생각했는데 미처 쓰지 않았나 보다. 그 후에 읽은 <안전지대 고라즈데>에 대한 리뷰는 있는데 말이다. 어쨌든 우리나라에서 소개된 지 10년만에 다시 나온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비망록>을 읽게 됐다. 전편에 대한 기억이 가물가물한지라 아무래도 이번에는 새로운 이야기에 집중할까 한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조 사코의 작품에 대한 촉발점은 기 들릴의 <굿모닝 예루살렘>이었다. 예의 작품에서 기 들릴은 <팔레스타인>을 다룬 조 사코의 작품을 언급했고, 나의 관심이 그쪽으로 돌려졌다. 조 사코는 현재 팔레스타인의 상황보다 그 상황을 있게 한 1956년 수에즈전쟁 당시 벌어졌던 칸 유니스와 라파에서의 학살 사건에 주목한다. 저자가 말한 대로, 과거를 캐내는 편이 상대적으로 용이해서였을까. 그가 만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 체험한 이스라엘 독립전쟁으로부터 비롯된 아랍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를 들려 주고자 하지만, 작가는 자신이 목표로 삼은 주제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미국 저널리스트의 옹고집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만약 그였다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역사로 관심을 넓히지 않았을까 싶다.

 

조 사코는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페다이로 알려진 전직 반유대 게릴라 전사들을 비롯해서 현재 이스라엘의 추적을 받고 있는 칼레드라는 인물에 이르기까지 1956년 11월 가자지구 남부의 칸 유니스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한 사실을 들려줄 수 있는 모든 사람을 인터뷰한다. 현재에도 가자 지구에서 이스라엘의 점령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박해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에, 인터뷰이들은 본명을 밝히길 거부한다. 그 점 때문에, 사실을 추적하는 과정은 난망하기만 하다. 그리고 기록된 정보가 아닌 구술과 증언으로 과거를 재구성하다 보니 아무래도 엇갈리는 진술들이 눈에 띄기도 한다. 어쨌든 조 사코는 최대한 자신이 접한 사실을 가감 없이 다루기로 작정하고 있는 그대로 독자에게 전달한다.

 

작가가 밝혔듯이 칸 유니스 사건의 중요성은 그동안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사람들간의 분쟁이 수에즈전쟁을 계기로 이스라엘 정부군이 직접 개입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가자 지구를 점령한 이스라엘 군인들이 페다이 게릴라를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저항하지 않는 비무장 팔레스타인 성인남자들을 무차별학살했다는 것이 칸 유니스 사건의 핵심이다. 그 이면에는 당시 아랍세계의 맹주로 자처하던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과 2차 중동전쟁(수에즈전쟁)의 기원이 자리한다. 북아프리카와 시리아까지 아우르는 아랍제국을 표방했던 나세르가 정력적으로 추진하던 아스완 댐 건설을 지원하기로 했던 미국, 영국, 프랑스가 나세르 정권이 무기금수조치에 대항해서 체코와 소련에서 전투기를 비롯한 각종 전쟁물자를 수입하기로 결정하자, 이에 앙심을 품고 지원을 철회하기에 이르렀다. 상황이 더 복잡해진 것은 나세르가 영국이 그동안 지배권을 행사해오던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고, 알제리 전쟁에서 알제리 반군을 지원하자 본때를 보여주기로 결심한 영국과 프랑스는 이스라엘과 비밀협상을 벌여 수에즈 운하를 포함한 시나이 반도 전체를 점령한다.

 

이런 국제 정세 가운데, 나세르의 관심은 가자 지구에 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운명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서방 세계는 물론이고, 같은 아랍권의 맹주라고 볼 수 있는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조차 신생국 이스라엘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거주지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동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불법적인 유대인 정착촌 건설로 조성된 민족 간의 긴장을 아예 해소하기로 결정한 이스라엘 군부를 대표하는 모셰 다얀 참모총장과 벤구리언 전 총리 같은 강경파들은 이참에 가자 지구를 무력으로 정복하는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조 사코가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비망록>의 전반부에서 다룬 칸 유니스 사건의 배후에는 이런 복잡한 역사적 배경이 자리잡고 있었다.

 

행간마다 조 사코는 불도저를 앞세운 이스라엘 정부의 강제철거를 비롯해서, 이스라엘이 세운 분리장벽과 점점 수를 늘려가는 정착촌 유대인의 테러 위협에 노출된 팔레스타인 현지인들의 참상을 자신의 만화를 통해 증거한다. 최소한의 거주에 필요한 집을 잃어버린 아이들의 트라우마를 토끼처럼 아이들을 많이 낳아서 싸우겠다는 어느 팔레스타인 엄마의 절규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이슬람 율법에 따르면, 어린이와 여자 그리고 노인을 해치면 안된다고 하는데 그런 사실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군인이라며 공격해대는 팔레스타인 무장단체의 주장이 과연 합리적인가 하는 의문도 들었다. 얼마 전 읽은 허핑턴포스트에 실린 아랍 청년의 하마스의 자살폭탄 공격과 인간방패 전략에 대한 비판도 일견 이해가 갔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실질적인 지지를 받는 하마스를 서방과 이스라엘에서는 테러집단으로 규정하고 대화 상대로조차 인정하지 않지만, 교육과 의료를 통해 지지를 획득하고 선거를 통해 선출된 그들을 부정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또한 아이러니다. 이런 정치적 상황이야말로 꼬일 대로 꼬여서, 가자지구를 포함한 모든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두 민족의 공존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조 사커는 책의 두 번째 이야기인 라파 사건에 대해 좀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여전히 그와 동료 아베드는 여전히 1956년 11월 12일 가자기구 라파에서 이스라엘군에 의해 행해진 폭력행위와 무차별적인 학살 사건의 진상을 캐기 위해 증언할 사람들을 수소문한다. 저널리스트답게 저자는 증언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크로스체크를 통해 몇 번이고 재확인하는 과정을 거친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근 50년 전에 일어난 일에 대한 정확한 진상을 파악하기란 난망하기만 하다. 게다가 사건의 핵심인 이스라엘 정부는 UN에 의해 드러난 라파 사건을 왜곡 축소하는데 여념이 없다. 그러니 저자가 책의 중간에 기술한 대로, 사실이 조금 옆으로 샜다면 사과하겠노라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나치 독일의 끔찍한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대민족이 다른 민족(팔레스타인 사람)에게 그들이 체험한 것 이상의 극단적 폭력을 행사하는 조 사커의 묘사를 받아 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피해자의 뇌리에 각인된 충격과 공포 때문에 적대적 환경에 둘러쌓여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다는 논리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게다가 중무장한 이스라엘군의 상대는 저항을 포기한 비무장한 민간인들 아니었나. 민간인 사이에 잠입한 페다이 민병대와 이집트 패잔병을 체포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는 설명으로는 부족하다.

 

조 사커의 전작처럼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비망록>에서도 어떤 특정한 결론에 도달하지 않는다. 독자는 저자가 인도하는 1956년 11월의 칸 유니스와 라파로 여행하고 스스로 판단을 내릴 뿐이다. 전작에서도 궁금했던 점이지만, 조 사커는 왜 오늘날의 비참한 팔레스타인 현실 대신 집요하게 1967년도 아닌 1956년에만 유독 관심을 보이는 걸까. 그의 주변에서 다른 이야기도 들어야 한다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주장이 내 귀에만 들리는 걸까. 사건의 원형 구성을 위해서라면,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직후 발생한 1차 중동전쟁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보다 정확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스라엘 측의 끝없는 가옥 파괴에 맞서 자신의 모든 것들을 잃으면서도 조상 전래의 땅에서 떠나지 않고 모든 것은 신의 뜻이라며 끝까지 맞서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모습이 기묘하게도 신의 뜻에 따라 약속의 땅에 마침내 거주하게 된 유대민족의 그것과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매일 같이 이스라엘측의 공격으로 수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죽어 나가지만, 2003년 국제연대운동 회원으로 이스라엘의 불법 가옥파괴에 맞서 싸우다가 죽은 미국 출신 레이철 코리의 죽음만큼 국제적 관심을 끌지 못한다는 조 사커의 지적도 눈여겨 볼만하다. 그들이 악이 축이라고 믿는 미국, 영국 그리고 이스라엘에 맞서 싸운 이웃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영웅시 되는 장면도 못내 충격이었다. 그동안 우리는 후세인이야말로 중동 평화를 위협하는 악당으로 알아오지 않았던가.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모르는 중동평화를 위한 로드맵이 무슨 이유 때문에 어려운지 조 사커의 만화를 통해 다시 한 번 깨닫게 됐다.

 

[리딩데이트] 2014년 10월 15일 수요일 오후 1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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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재미 문학과지성 시인선 320
문태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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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시집을 읽었다. 언제 마지막으로 시집을 읽었는지 기억조차 할 수가 없다. 오래전 군대 있을 적에 최영미 시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읽은 것이 아마 마지막이지 싶은데, 사실 그것조차 제대로 다 읽었는지 아니면 표제작만 달랑 읽었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그리고 먼 길을 떠나면서, 백석 시인의 시집을 가지고 갔었는데 오랜 시간 동안 읽지 않고 다시 가지고 돌아온 기억이 난다. 그러니 어제와 오늘 이틀에 걸쳐 읽은 문태준 시인의 <가재미>는 정말 나에겐 기념비적인 시집이 아닐 수 없다.

 

소설과 인문서적, 여행기 등등 독서에 있어 탐닉하는 편인 나에게 시집은 왠지 금기의 대상처럼 다가왔다. 아마 그 대부분은 학창 시절 시적 의미를 분석하고 외워서, 평가를 하는 학교교육의 폐해라고 말하고 싶다. 그 시절에는 시를 즐길 수 있는 여유가 도통 없었다. 그저 나에게 시는 평가의 대상으로서 텍스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지겨움의 발로에서였을까 나이가 먹고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지만, 여전히 시를 읽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또 한편으로는 시인이 구사하는 시적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자괴감도 있지 않았나 추정해 본다.

 

그렇게 오랜만에 읽은 문태준 시인의 <가재미> 역시 그런 나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어떤 구절들은 읽어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고(아마 내가 시를 멀리 하는 직접적인 이유일 것이다), 간신히 따라 잡은 구절들 역시 자의적 해석으로 마무리하기 일쑤였다. 그리고 조백(早白)이니, 중음(中陰)이니 굿당이니 하는 말들은 솔직히 난생 처음 듣는 표현들이었다. 그런 표현들의 해석을 위해 굳이 표준국어대사전을 뒤적이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아야 했다. 역시 시를 소화하기 위해서는 즐겨 읽는 소설보다는 좀 더 수고가 필요하구나 싶었다. 최근 시집을 읽어 보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상당히 많은 부분을 해석도 달지 않은 한자를 시인을 구사한다. 다행히 누군가 그 한자풀이에 약간의 감상을 적어 넣어 나같은 시에 대한 문외한에게 도움을 제공해 주니 고맙지 아니한가.

 

시는 역시 독자에게 무궁한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과연 그것이 가능한가라는 질문보다 그 광경을 이미지화해서 상상해 보는 능력을 요구한다. 어미 기러기가 새끼 기러기를 업고 나는 장면을 그려본다. 현실에서 그것이 가능한가? 시를 읽다 보니, 머리와 꼬리는 다 사라져 버리고 한 구절들이 뇌리에 와서 들어와 박힌다. 그리움의 곡면이라니. 그런 표현을 창조해내는 것이야말로 시인 본연의 임무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 세상에 나를 보내준 어머니가 풍상에 젖어 나이 드는 것을 얼굴에 골짜기가 생겼다는 말로 형상화해내는 문태준 시인의 감수성이 인상적이다. 영원히 젊을 것만 같았던 나의 어머니 역시 세월을 이길 수 없구나.

 

표제작인 <가재미>에서는 암으로 죽음을 목전에 둔 환자와 보호자의 관계가 부상한다. 죽음을 물속이란 말로 대치한 걸까. 병실에서 환자 옆에 누운 이를 한 마리 가재미로 형상화해서 그 옆에 나란히 배치한다. 그녀의 거칠어져 가는 숨소리, 야윈 두 다리 따위가 죽음의 사자가 가까이에 와 있음을 암시한다. 그 사이를 좌우로 헤엄치는 나는 가재미다. 슬픔의 감정을 가재미에게 이렇게 효과적으로 이식할 수 있다니 역시 시인답다. <평상이 있는 국숫집>에서는 지기와 떠난 담양여행에서 먹었던 국수 생각이 났다. 그 집 역시 평상이 있었다. 국수는 역시 한 여름날 평상에서 먹어야 제 맛이던가. 시의 한 구절마다 떠오르는 추억에 대한 사모가, 사연이 과거로 나를 돌려보낸다.

 

문태준 시인의 <가재미>를 읽으면서, 시집은 역시 단발성으로 한 번 읽고 말 것이 아니라 좋은 시집이라면 곁에 두고 계속해서 곱씹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또 시간이 지나 세월의 풍상이 더께처럼 삶 속에 둥그런 고요처럼 침잠하면 그 땐 또 다른 느낌으로 나에게 깨달음을 전해주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해본다.

 

[리딩데이트] 20141011~ 12일 오전 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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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 예루살렘
기 들릴 지음, 해바라기 프로젝트 옮김 / 길찾기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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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예루살렘이다. 국경없는 의사회 소속인 부인 나데즈를 따라 이번에는 세계의 화약고라 불리는 이스라엘 그 중에서도 기독교, 무슬림 그리고 유대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기 들릴은 그린다. 캐나다 출신(퀘벡) 아티스트로서 중립적인 입장에 서서 나름대로의 객관적 견지에서 1년간 예루살렘에서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것들을 바탕으로 생생한 이야기를 전달자의 역할에 작가는 충실하다. 이제는 절판돼서 구할 수도 없는 그의 출세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평양>(2003)이 아쉽다.

 

내가 처음으로 만난 작가의 <굿모닝 버마>보다 아무래도 최근작(2011)이어서 그런지 데생의 깊이와 스케치 그리고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 따위가 일취월장했다는 느낌이다. 뭐랄까 전작에서 버마의 외부에 머물렀다는 느낌이 들었다면, <굿모닝 예루살렘>에서는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내부에 좀 더 깊숙하게 침투했다고나 할까.

 

아내를 외조하는 전업주부로 육아를 맡은 작가의 삶에 다분히 공감이 간다. 아이들이 놀만한 놀이터와 동물원을 찾아 나선 성실한 주부아빠의 모습이 이젠 낯설지 않다. 아티스트로서 작가의 작업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시작된다. 처음에는 예루살렘의 곳곳을 도보로 누볐으나, 차까지 사서 기동력을 높여 예루살렘의 다양한 곳들을 독자에게 소개하고 있다. 개인적인 소용의 차원에서 구매한 자동차 덕분에 독자가 호사를 누렸다고나 할까. 그의 작품은 어쩔 수 없이 미국 출신 저널리스트 조 사코의 <팔레스타인>과 비교될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 조 사코가 상당히 정치적인 차원에서 팔레스타인 이슈에 접근한다면, 캐나다 사람인 기 들릴은 상대적으로 비정치적인 접근 방법을 택했다.

 

나치에게 홀로코스트라는 어마어마한 박해를 받은 이스라엘 민족이 팔레스타인 원주민들을 핍박하면서 중동의 깡패로 떠오른 이면에는 큰형 미국과 미국 내 유대인들의 적극적 지원이 있었다. 지금도 중동의 패권을 잡기 위해 사사건건 미국과 대결하고 있는 이란에 대항하는 이스라엘은 미국의 강력한 동맹국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은 점점 더 병영국가화되고 있다는 느낌을 이 책을 통해 받았다. 외국인들은 이스라엘에 출입국할 때마다, 여행 목적과 체류지에서 어느 호텔에 묵었는지, 심지어 조부가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해 이스라엘 국가에 설명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한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테러에 대비한 상시적인 검문검색은 일상이고, 분리장벽까지 세워 예루살렘을 그야말로 결딴내 버렸다.

 

유엔에서 불법으로 규정한 정착촌에 대한 작가의 미묘한 시선도 빼놓을 수 없다. 정착촌에는 다양한 서방 물품들을 살 수 있는 마켓이 있지만, 거기서 물건을 사는 건 정착촌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라며 단호하게 물건사기를 단념한다. 하지만 오히려 아랍 사람들이 그게 무슨 상관이냐며 물건을 사는 장면을 그리기도 한다. 여전히 메시아의 재림을 기다리며, 세 번째 성전 건축을 희망하는 극정통파 유대인을 비롯해서 다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정착촌 건설을 정당화하고 있다. 물론 그 이면에는 팔레스타인 원주민에 대한 무차별적인 테러와 차별이 깔려있다. 군인도 아닌 정착촌 사람들은 위협적인 상황에 대비해서 총기로 무장하고 조깅을 하기도 한다. 가이드 역시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총알에 대비해서 총을 가지고 다닌다. 극정통파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선민의식에 젖어, 21세기 문명을 거부하고 각종 율법과 규례에 따라 생활한다. 심지어 같은 유대인 내에서도 차별이 존재한다. 동유럽 출신 유대인(아쉬케나즈)들은 예멘 출신 유대인들과 말도 섞지 않는다고 했던가. 겉모습만으로는 흑인인 에티오피아 출신 유대인은 또 어떤가.

 

그렇다고 해서 모든 유대인들이 그런 편협한 사고에 젖어 있는 건 아니다. 텔아비브나 야파에 사는 개화된 유대인들의 삶의 모습은 우리네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무슬림과 기독교 양대 종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은 통곡의 벽을 비롯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선지나 무함마드의 행적을 쫓는 많은 외국인 관광객과 더불어 여전히 그들을 거부하는 극정통파 유대인과 자신들만의 삶을 추구하는 극소수의 사마리아인들도 있다고 한다. 기독교라고 해서 다 같은 기독교도가 아니고, 다양한 형태의 분파들이 존재하는 곳이 바로 신의 땅 예루살렘이라는 것이 기 들릴이 말하고 싶은 핵심 포인트가 아닐까.

 

이야기는 돌고 돌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만화의 말미에 기 들릴은 두 번의 가이드 투어 체험을 소개한다. 하나는 Breaking the Silence(BTS)라는 팔레스타인의 비참한 현실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전직 유대인 군인들이 조직한 NGO 단체의 투어이고, 후자는 정착민이 소개하는 가이드 투어이다. 특이한 점은 자기들에게 불리한 사실에 대해서는 가리고, 자신들이 알리고 싶은 사실만을 관광객들에게 보여준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헤브론 정착민들이 제공하는 투어에서는 1994년 골드스타인이 패트리아크 동굴에서 저지른 만행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반면, BTS 투어에서는 1929년 학살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현재 진행 중인 강제철거와 이주 투쟁에 대해 보여주기를 원한다. 아이러니 중의 하나는 관광에 나선 투어리스트들과 정착민들이 서로의 모습을 비디오카메라에 담는 장면이었다. 그래도 BTS에서는 균형 잡힌 시선을 위해 헤브론 정착민들이 실시하는 투어를 해보라는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바로 이 부분이야말로 캐나다 출신 만화가 기 들릴이 이 책에서 전하고 싶은 메시지였다고 확신한다. 편견 없이, 균형 잡힌 시각으로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 이슈를 보라.

 

최근 부패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전 이스라엘 총리 에후드 올메르트의 온건 노선이야말로 오늘날 시한폭탄이 된 팔레스타인 해법 중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예루살렘 시장을 역임한 정치인 올메르트는 사임 연설을 통해 위대한 이스라엘을 꿈꾸는 이들에게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성도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들도 함께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조만간 이뤄지기 힘들겠지만, 비정상의 정상화와 중동평화를 위해 그의 바람이 꼭 이뤄지길 희망해본다.

 

[리딩데이트] 20141010일 금요일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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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세이
가레스 하인즈 글.그림, 황윤영 옮김 / 보물창고 / 2012년 1월
평점 :
절판


 

원전 읽기가 부담스러운 사람에게 그래픽 노블만한 게 또 있을까. 이십대에 세계정복에 나선 알렉산드로스가 즐겨 읽었다는 <일리아드>, <오디세이> 두 편 모두 대강의 이야기는 알고 있으나 너무 어려서 읽은지라 이젠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트로이 전쟁 전편에 해당하는 것이 <일리아드>라면, 이타카의 영웅 오디세우스가 20년간의 험한 여정 끝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일련의 과정을 그린 것이 바로 <오디세이>란다. 이천년이 훨씬 지난 지금에도, 험난한 대모험을 가르켜 오디세이라 부르는 걸 보면 역시 서구 문화의 원류가 얼마나 대단한지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그리스 고대영웅 서사시로만 알려졌던 <트로이 전쟁>이 독일 출신 슐리만의 발굴로 비로소 역사의 단계로 진입하게 된 것을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스 최고의 미녀 헬레네를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납치하게 되면서 발발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실상은 그리스 세계와 동방 트로이 간의 무역전쟁이 원인이 된 10년 전쟁이었다고 한다. 아가멤논과 오쟁이진 스파르타의 메넬라오스가 주축이 된 그리스 원정군은 막강한 트로이를 상대로 10년이나 전쟁을 질질 끌다가 결국 오디세우스의 지략을 이용한 트로이 목마 전략으로 트로이를 멸상시키게 된다. 그리고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 잘 먹고 잘 살았으면 좋았겠지만, 그리스 신들은 언제나 그렇듯 인간의 운명을 뒤바꾸어 놓았다.

 

성경에도 나오지만, 갈대아 우르 지방에 살던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계시에 따라 낯선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다시 말해 지금의 팔레스타인 지방으로의 이주를 결정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고대시대에 자기가 속한 씨족을 떠나 물설고 낯선 땅에서 새로운 기업을 구축한다는 건 어쩌면 죽음을 각오한 결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아브라함은 물적 토대라도 있었지만, 이타카의 왕 오디세우스는 그런 것 하나 없이 트로이를 떠나 생사를 넘나드는 모험에 뛰어든다. 물론 자발적인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아들이자 외눈박이 거인 괴물 키클롭스 족의 폴리페모스의 눈을 찌르고 달아나면서, 굳이 밝히지 않아도 되는 자신의 본명을 밝히면서(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해서 신인 포세이돈이 몰랐을 지도 없겠지만) 스스로 화를 자처한다. 그래서 제우스를 비롯한 신들이 그의 귀환을 허락했을 때도, 유일하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바닷길을 지배하고 있던 포세이돈은 오디세우스의 귀환을 갖은 방법을 사용해서 방해한다.

 

한편, 이타카에서는 오디세우스의 아름다운 아내 페넬로페에게 부군인 왕은 이미 죽었고 자신과 결혼해 달라는 수많은 구혼자들에게 둘러 쌓여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 뻔뻔하기 짝이 없는 무리들은 오디세우스의 재산을 축내면서 매일 같이 축제와 같은 날들을 보내고 있다. 도대체 당시 이타카의 왕권은 그 정도 밖에 안되었다는 말인가. 어디 왕위계승권자도 아닌 자들이 나서 왕비를 위협한단 말인가. 어쨌든 그런 상황 속에서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장으로 떠나던 시절 젖먹이였던 아들 텔레마코스는 장성해서 아테나 여신의 도움을 받아 오디세우스를 찾아 나선다. 참고로 아테나 여신은 트로이 전쟁 이래, 오디세우스의 수호신으로 그를 몇 번이고 죽음의 위험에서 구해낸다.

 

신들의 시기와 질투, 그리고 수호를 동시에 받는 오디세우스는 숱한 난관을 겪으면서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 꿈을 저버리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판도라의 상자에 마지막으로 남은 인류의 소망인 희망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어느덧 2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 영웅 오디세우스의 얼굴에는 영욕의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나타났지만 그런 시간조차 영웅의 기개를 꺾을 순 없었다. 초한대전에서 유방에게 처참하게 패한 항우는 마지막 전투였던 해하싸움에서 지고, 다시 오강을 건너 강동으로 건거나 권토중래하라는 촌로의 권고에 어찌 강동의 자제 8,000명을 잃고 무슨 낯으로 그들의 부형을 만나겠냐며 자결하는데, 이타카의 젊은이들을 이끌고 트로이 전쟁에 나갔다가 단신으로 귀환한 영웅에게는 그런 수치심도 없었던 모양이다. 그의 안중에는 오로지 자신의 무사귀환만이 목적이었으니 말이다.

 

<오디세이>를 비롯한 모든 영웅서사시와 신화에 등장하는 것처럼 무엇을 하지 말라는 금기, 즉 터부는 모두 깨지게 되어 있는 모양이다. 트리나키아 섬에서 태양의 신 헬리오스(아폴론?)의 신성한 소를 절대 건드리지 말라는 금기 역시 오디세우스 부하들이 굶주림 때문에 결국 깨지게 되고 결정적으로 그 숱한 고난의 시절을 함께 했던 동지들이 한 순간에 바다의 제물이 되고 만다. 어느 금기고 인간의 부주의함 때문에 깨지게 되어 있고, 그에 따른 고난의 수순은 이미 예정된 대로 진행된다. 아이들이 하지 말라는 일은 기를 쓰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우리네 삶의 서사 가운데 일부는 고대 신화에서 비롯된 금기와 절제의 미덕을 지키지 못해 생기는 갈등의 연속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영웅서사시 <오디세우스>의 전반부가 그런 고난의 기록이었다면, 후반부는 마침내 신들로부터 고향으로의 귀환을 허락 받아 마침내 이타카에 도착한 오디세우스의 복수로 점철된다. 아들 텔레마코스와 자신에게 여전한 충성을 맹세한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와 필로이티오스 같은 노병을 이끌고 마지막 승부에 나선다. 역시 신의 수호를 받는 오디세우스는 파리떼처럼 달려드는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을 특유의 기지와 녹슬지 않은 용맹함으로 물리치고 마침내 기나긴 서사시를 완성한다. 그리고 이타카의 영웅 오디세우스는 문학을 통해 마침내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

 

<오디세우스>에는 후세에 수없이 반복되는 다양한 형태의 문학적 클리셰이의 원형들이 차고 넘친다. 세이렌의 치명적인 유혹, 로터스의 열매를 먹고 모든 것을 잊고 현재에 만족하게 된다는 되는 마법, 마녀 키르케가 알려준 죽은 자들의 땅에서 망자 테이레시아스의 예언, 금기(터부)를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신의 처벌, 영생을 주겠다는 칼립소의 유혹에도 굴하지 않는 오디세우스의 인간의지 등 우리네 삶의 원형적 서사의 가히 모든 것이 그대로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미국 출신의 그래픽 노블작가 가레스 하인즈는 바로 이런 다양한 서사의 보물창고인 영웅서사시 <오디세이>를 원전보다 훨씬 이해하기 쉬운 스타일로 독자들에게 풀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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