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정 문어발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33
다나베 세이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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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침 출근길에 어느 커플이 지나가는 걸 봤다. 그런데 둘이서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었는데 여자친구로 보이는 사람의 인상이 아주 못마땅해 보였다. 그러면 맛있는 걸 같이 먹으면서, 이유에 대해 같이 이야기해 보면 좀 풀리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침이다 보니 토스트나 김밥 혹은 샌드위치로 해결해야 하니 그것도 좀 난망해 보였다. 가능하면 고즈넉한 저녁 시간에 팔팔 끓는 국물 요리라도 앞에 두고 이야기를 시도해 보면 한결 낫지 않을까 싶은데 말이다.

 

며칠에 걸쳐 다나베 세이코 여사의 <춘정 문어발>을 읽었다. 다 읽고 나니 예의 커플의 남자친구에게 추천해 주고 싶은 생각이 불쑥 들었다. 사실 다나베 세이코 여사의 필명은 오랫동안 들어왔으면서도 정작 처음으로 읽은 책이 바로 <춘정 문어발>이었다. 인간사 오욕칠정 중에 애욕과 식욕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그런 관계일까. 아무래도 여성 작가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다양한 맛을 자랑하는 요리와 재료에 대한 세밀한 관찰을 바탕으로, 남녀 간의 애정(愛情)의 형태를 유쾌하게 들려준다. 모두 8편의 에피소드가 실린 이 소설집은 읽을수록 감칠맛(우아미)이 난다.

 

여성작가이면서도 에피소드의 모든 화자는 하나 같이 다른 건 몰라도 먹는 건 양보 못한다는 사고로 단단하게 무장한 남정네들이다. 그런데 다나베 세이코 여사는 그들이 추구하는 식탐의 이면에 또 애정 전선을 구축한다. 모름지기 음식의 코드에는 나눔이 빠질 수 없다는 반증일까?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홀로 먹는 것은 궁상스러워 보인다. 그렇다고 주인공 남자들이 가이세키나 일류 회요리 같은 고급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어떻게 보면 천박(?)해 보이는 길거리 음식인 다코야키, 오코노미야키 혹은 제대로 만든 일본 계절요리를 원한다.

 

문제는 그들의 파트너들이 손품이 많이 간다는 둥, 요즘에는 누가 그런 구식 음식을 먹느냐면서 타박을 하고 음식 기행에 동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결과, 남자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까지 감행하면서 자신이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기쓰네(유부) 우동 같은 자칭 천박한 음식에 탐닉한다. 바로 그 지점에서 다나베 세이코 여사는 그럼 연인보다 음식을 택한 건가라는 질문도 빼놓지 않는다. 초년의 불꽃 같이 타오르는 사랑이야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녀가 고른 주인공들은 모두가 중년 혹은 초로의 신사들로 “크림” 냄새 나는 서양식 보다 정통 일본식을 고집한다. 이런 음식에 대한 집착이야말로 그들이 당면한 갈등의 단초가 된다.

 

또 하나 주인공들의 희구하는 음식은 추억의 요리들이다. 그냥 끼니를 때우기 위해 배를 채우는 그런 음식이 아니라, 과거를 떠올리고 회상하는 특별한 매개체로 작용한다. 그러니 손품이 많이 간다는 이유로 제작을 거부하는 부인들에게 반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 게다가 어처구니없이 불륜을 저지르면서도 요상한 도치법까지 사용해 가면서 그런 상황에서 남자는 그럴 수밖에 없노라는 핑계까지 대지 않는가. 산더미 같이 쌓인 고래 고기를 스테이크로 요리해서 먹거나 미즈나를 넣은 고래 스키야키를 ‘아작아작 냄비’라고 부르며 끓여 먹던 시절은 오롯하게 개인적인 것인데, 고로나 오바케에 대한 남자의 집착을 어떻게 현재의 아내와 딸이 이해해 줄 수 있겠는가. 다나베 세이코 여사는 반복해서 그야말로 초코파이 정(情)이 담긴 남자들의 요리에 대한 추억을 상기시킨다.

 

 

반전의 재미도 일품이다. 다코야키 애호가로 대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한 노총각 나카야는 홀로된 어머니와 같이 살 신붓감을 구하다가 그만 혼기를 놓쳐 버렸다. 자신에게 거침없이 대하는 요즘 처녀들에게 눈살을 찌푸리고, 천생연분 짝을 만나기 위해 노력하지만 ‘죽어버려, 대머리’ 같은 소리나 듣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러다 우연히 만난 데루코라는 처자와 다코야키 인연으로 무언가 잘되어 간다고 싶었지만, 알고 보니 그 끝자락이 불륜이었다는 외통수에 직면한다. 자신에게 딱 맞는 짝이라고 생각했던 데루코는 그저 다코야키 메이트가 되길 원하는 연상의 뻔뻔한 아줌마였다는 사실에 대머리 노총각은 경악을 금할 수가 없다.

 

재밌는 건 요리가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헤어진 전처와 우연히 만나 화해하고 갈등을 풀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하긴 정 중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밥정이라고 했던가. 그래서 처음 데이트를 시작하는 연인들이 그렇게 무섭게 먹는 것에 매달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모름지기 인간은 본능적으로 상대방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 밥정을 쌓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미리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한 가지 다나베 세이코 여사는 이 맛깔스런 소설집에서 은연중에 일본 요리에 대한 자긍심을 곳곳에 심어 두고 있다는 점이 느껴졌다. 팔팔 끓는 복지리 요리에는 맥주보다는 도쿠리에 담아 데운 니혼슈가 어울리고, 적생강이니 흰된장 같이 전통 방식을 고수하는 간사이 지방 그 중에서도 특히 일품요리로 유명한 오사카의 서민 요리에 방점을 찍는다. 이와 더불어 가정과 직장에서 소외 받는 중년 남성들의 대체 취미로 말하기 부끄러운 ‘방정하지 못한’ 식도락을 추천하기도 한다. 날이 쌀쌀해지는 초겨울 퇴근길에 자신만의 단골집을 찾아 돼지고기 기본 오코노미야키를 주문해서, 시원한 맥주 한 조끼를 걸치며 상상력이 가미된 요리를 즐기는 재미도 없이 도대체 무슨 낙으로 사느냐고 다나베 세이코 여사는 묻는 것처럼 들린다.

 

한동안 진지한 책들을 읽는 통에 그냥 무턱대고 가벼우면서도 재밌는 소설을 읽고 싶었었는데 다나베 세이코 여사의 <춘정 문어발>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제 시작하는 작가의 작품세계에 대한 출발이 산뜻해서 너무 기분이 좋다. 선택지가 많으니 배스킨 라빈스의 31가지 아이스크림처럼 골라 읽는 재미를 느껴보고 싶다.

 

리딩데이트 : 2014년 7월 22일 ~ 7월 26일 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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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조의 바다 위에서
이창래 지음, 나동하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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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던 이창래 선생의 신작, 6월도 한참 넘어 7월에 간신히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기존의 작품과 달리 찬반, 호불호가 갈린 작품이라고 하는데 우선 읽고 나서 이야기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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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 (무선) - 개정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9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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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을 읽었다. 아주 오래 전이었다. 그런데 왜 내가 레이먼드 카버의 책을 읽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오래 전이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표제작인 <대성당>이 맹인 이야기였다는 점 정도 밖에는.

 

이번에 팟캐스트에서 누군가 낭독한 버전과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영어 원서를 비교해 가면서 듣고, 읽었다. 처음에는 원서 없이 두 번을 들었다. 아무래도 직접 책 읽는 것과 타인이 읽는 것을 듣는 것은 천양지차였다. 오래 전에는 낭독이 독서의 대세였다고 하는데, 언제부터인가 책은 혼자 읽는 묵독으로 바뀌었다고 했던가. 묵독만 하다 보니, 낭독으로 서사를 쫓아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대신 귀에 착착 감기는 어느 특정한 에피소드들은 머릿속에 각인되는 느낌이었다.

 

소설 <대성당>에는 모두 세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어느 부부에게 아내의 오랜 친구 맹인(the blind man)의 이름은 로버트다. 소설의 화자 나는 로버트 대신, 맹인이라는 호칭을 더 좋아한다. 그리고 아내 친구의 방문이 못마땅하다. 자기 스스로 맹인에 대한 편견을 영화를 통해 얻게 되었노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맹인 로버트의 방문을 통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편견들과 직접 마주하는 체험을 겪는다.

 

화자의 아내는 이미 다른 사람(공군 장교)과 한 번의 결혼 경력이 있다. 아내는 십년 전, 시애틀에서 로버트에게 고용되어 일하게 된 후 지속적으로 “테이프”를 통한 연락을 가져 오고 있다. 테이프라, 상당히 고전적인 방법이고 맹인에게 보다 확실한 음성을 통한 전달이라는 방식에서 소통에 제격이다. 공군 장교의 아내로 어쩔 수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아내는 다량의 수면제와 진을 먹고 자살을 시도하지만, 그것조차 실패하고 어찌어찌하여 지금의 나와 잘 살고 있다.

 

이어지는 대화와 서사를 통해 아내와 맹인 로버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사항을 알게 되었지만 정작 나 자신에 대해서는 알게 된 것이 별로 없다. 그저 지금 3년째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별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술이나 마약 혹은 마리화나를 즐기며 늦게까지 안잔다는 것 정도 밖에는. 이렇게 아주 평범한 사람의 일상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인 맹인 로버트가 나타나, 나는 생뚱맞게도 그에게 ‘대성당’을 설명해 주려다 아예 로버트의 제안으로 그림까지 그려 주게 되는 상황을 맞이한다. 그게 마치 목숨이 걸린 중요한 일인 것처럼 말이다.

 

뉴욕에 갈 때는 기차의 오른편에서, 되돌아 올 때는 기차의 왼편에 앉아야 한다는 것 따위가 무슨 중요한 일일까 싶다. 식전주로 스카치를 마시고, 식탁에서의 어색한 분위기 때문에 마치 식탁을 뜯어 먹기라도 할 기세로 큐브 스테이크와 스캘럽 포테이토 그리고 녹색 콩 등을 무섭게 먹어 치운 세 사람의 균열은 먼저 아내에게 수마(睡魔)가 다가오면서 찾아온다. 균열은 위기인 동시에, 새로운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대화에서 자신의 소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대화에 끼어 보려고 노력하지만 그조차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최악의 결과로 이어진다. 대화 도중에 텔레비전을 켜다니. 하지만 또 역설적으로 그렇게 텔레비전에 등장한 대성당(cathedral)이 아내가 자리에서 빠진 가운데, 나와 맹인 로버트를 이어주는 묘한 매개체로 작동한다.

 

꽁한 스타일의 “나”와는 달리 담배도 씩씩하게 잘 피고 스스로를 스카치파(派)라고 부르며, 화자를 젊은 양반(bub)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맹인 로버트는 암웨이 판매업에도 종사했고, 아마추어 무선사로 활동하면서 세상의 누구와도 친구 먹을 수 있는 그런 캐릭터로 등장한다. 초대 받은 집의 낯선 호스트에게서 마리화나를 권유받고서도, 모든 걸 배울 수 있다는 그런 자세로 임하는 로버트야말로 우리가 생각하는 장애물을 뛰어넘은 그런 사나이가 아닐까. 주변에서, 특히 영화에서, 보고 들은 (왜곡된) 정보를 가지고 상대방을 재단하는 속좁은 편견을 가진 나야말로 대부분의 소시민의 자아를 대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보이지도 않는 로버트 앞에서 졸음에 겨워하는 아내의 탐스런 허벅지를 가리려는 나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캐치해낸 레이먼드 카버의 찰나의 미학 또한 일품이다.

 

시기 혹은 질투라는 감정에 휩싸인 화자가 맹인 로버트와 함께 직접 대성당을 그리며 화해해 가는 과정은 <대성당>의 하이라이트다. 소통을 거부하는 화자에 비해, 열린 마음으로 ‘나’의 이야기를 구하며 대성당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부탁하고, 더 나아가 아예 한 번 그려봐 달라는 진심 어린 부탁으로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는 맹인의 자세는 고의적으로 자신을 무시하는 젊은 양반보다 우월한 인격체의 발현으로 다가온다.

 

김연수 작가의 번역과 팟캐스트 방송의 낭독에는 상당한 괴리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후자의 경우, 감정이 실리지 않은 조금은 메마른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물론 서사와 컨텐츠에 집중하기에는 상대적으로 좋았지만 감정이입 차원에서는 아쉬웠다. 작가인 김연수 씨가 직접 번역을 맡았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들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무래도 본인 작가이다 보니, 원작자의 충실하기 보다는 매끄러운 번역에 치중한 느낌이다. 가령 예를 들어 본문 중에 나오는 “strange”를 ‘이상하다’라고 번역하기보다 ‘신비하다’는 표현을 사용한 예를 보자. 그냥 딱 보기에도 이상하다와 신비하다는 너무 거리가 멀지 않나? 성당 곳곳에 장식하는 괴물 석상인 가고일(gargoyle)이 이무기란다. 맹인 로버트가 화자를 호칭할 때 사용하는 “bub”를 젊은 양반이라는 표현도 상당히 우리 식 아닌가. 그냥 젊은 친구라고 했다면 너무 건방져 보여서 굳이 ‘양반’을 고른 걸까.

 

예전에 읽을 적에는 <대성당>의 서사에 방점을 찍었다면, 이번에 오디오와 원서로 대조하면서 접했을 땐 등장인물들 간의 관계와 소통, 내면의 심리 등에 중점을 두면서 읽었다. 역시 좋은 글은 사골 국물 우리듯 몇 번이고 읽어도 그 맛이 줄어들지 않는다. 문득 존 치버의 단편과 레이먼드 카버의 다른 단편들을 이번 기회에 만나봐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의 참맛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삶의 진실과 마주하는 순간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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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1 - 역사평설 병자호란 1
한명기 지음 / 푸른역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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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전성시대에 창비에서 만드는 라디오 책다방을 즐겨 듣는다. 비디오가 아닌 오디오로 만나는 책에 대한 정보가 참 쏠쏠하다. 얼마 전, 한명기 교수의 <병자호란> 방송을 듣고 바로 이 책 사서 읽어야지 결심했다. 분량은 두툼한데, 한 번 읽기 시작하니 다 읽지 않고서는 배겨날 재간이 없었다.

 

아주 오래 전에 한명기 교수의 또다른 역사평설 <광해군>을 읽고 나서, 그동안 서인정권이 극악한 폭군으로 매도한 광해군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됐다. 그 후에 나온 영화 <광해>는 말할 것도 없고. 한명기 교수의 역작 <병자호란>은 바로 그 광해군 시대를 종결하고,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 시대에 벌어진 시대의 비극 병자호란에 대한 역사평설이다. 지금으로부터 378년 전에 일어난 병자호란이 새로운 천년에 또 다른 관심을 갖게 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잠자는 사자에서 팍스 아메리카나에 도전할 정도로 굴기한 이웃 중국을 바라보는 우리의 미묘한 시각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은이가 이 책을 G2 시대의 비망록이라고 부른 이유를 비로소 책을 읽으면서 깨닫게 됐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난 17세기 전반은 조선이 개국 이래 상국으로 사대하던 중국의 명나라에서 만주족 청나라로의 교체가 진행되던 파란의 시기였다. 어느 왕조가 그렇듯, 동아시아의 패권국 명나라는 내우외환의 이중고를 겪고 있었다. 내부적으로는 환관의 엄당과 사대부의 동림당으로 나뉘어 국론의 분열, 정치에 직접 개인한 환관들의 만연한 부정부패 그리고 민생고에 시달린 백성들의 연이은 반란에 시달리고 있었고, 외부적으로 만주에서 발흥한 만주족 후금의 공세에 바람잘 날이 없었다. 만주족의 지도자 누르하치가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의 승리를 바탕으로 서정을 감행하면서 명나라의 동북 국경은 비상사태로 돌입하게 된다.

 

한편, 이런 국제정세 가운데 병자호란의 무대였던 조선에서는 임진왜란 후 광해군의 집권 이래 가까스로 안정을 찾아가던 차에 훗날 인조가 능양군을 추대한 이귀와 김류 등 서인 세력이 주도한 쿠데타(1623년)로 정권을 뒤집어지고, 광해군 시절 이래 명청교체기에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던 외교정책 역시 부정되면서 화이론에 입각한 서인 강경 척화파들이 정권을 이끌면서 조선 정국은 파국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문제는 누르하치에 뒤를 이어 후금의 지배자가 된 홍타이지는 자신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신복(臣僕)을 거부하며 오로지 명나라의 재조지은(再造之恩)만을 앵무새처럼 되뇌는 조선 정벌을 구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1629년 황성(북경) 기습과 1631년 대릉하성 공략으로 대륙 정벌이라는 원대한 꿈을 꾸고 있던 대칸 홍타이지는 투항한 범문정 같은 한족 출신 이신(貳臣)들을 활용해서 만주족의 후금을 다민족국가로 거듭나게 만드는데 성공한다. 자신의 아버지 누르하치를 영원성 전투에서 패퇴시키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최신 무기 홍이포 도입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는 한편, 후금군의 약점으로 지적된 수군과 전함 확보에도 열심이었다. 이렇게 명나라가 지배하고 있던 만주는 물론, 요동과 차하르 몽골까지 정복해서 바야흐로 세계 대제국으로 발흥하고 있던 후금에게 도대체 조선은 무슨 깡으로 도전했던 걸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광해군 시대의 폭정을 규탄하며 집권에 성공한 인조정권은 광해군 정권의 모든 것을 부정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위한 개혁을 약속했지만 반정에 공헌한 서인정권은 그럴 만한 능력도 그리고 개혁을 수행하기 위한 의지와 도덕성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격변의 시대에 대국적 견지에서 국가 보존을 위한 정책도 전무했다. 우선 노골화되는 후금/청나라의 침략에 대비해서 위해서 국가 재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으나 임진왜란 이후 실시되지 못한 세수 확보를 위한 양전사업과 군대를 기르기 위해 필수적인 인구 조사를 위한 호패법의 실시는 민심을 교란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무산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이괄의 반란 이후, 연이은 역모 때문에 강화된 인조정권의 기찰로 지방 수비군들은 의심 때문에 제대로 된 훈련조차 실시할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외부세력이 침략을 감행한다면, 그 결과는 명약관화했다.

 

인조정권의 정당성 문제는 명나라에서 파견하는 환관 칙사들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인조의 정권 인수 문제와 소현세자 책봉사로 파견된 명의 환관 사절들은 은 징색에 그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그들은 명나라에서 출발하는 순간에서부터 조선에서 한 몫 잡겠다는 생각으로 서울로 이어지는 사행로에서 인삼과 은을 조선 조정으로부터 뜯어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정권의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는 조선 조정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이 원하는 내줄 수밖에 없었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전가되었다. 명에서 인조의 공식 책봉사로 파견된 호양보와 왕민정은 자그마치 13만 냥에 달하는 은을 착취해 갔다고 하는데, 이는 조선 연간 국가 경비의 1/3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상국으로 모시는 명나라가 자신의 정권을 인정해 주고, 자신의 핸디캡 중의 하나인 아버지 정원군의 원종 추숭 문제까지 명나라의 승인을 받고 감지덕지하는 인조의 모습에서 이것이 과연 주권국가의 수반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를 더 까다롭게 하는 점 중에 하나는 가도에 진주한 명나라 패잔병 모문룡 집단이었다. 조선 땅에 있으면서 후금을 후방에서 견제한다는 이유로 군량과 각종 물자를 끝도 없이 요구했다. 정당한 왕위계승을 하지 못한 인조정권의 약점을 파고들면서 모문룡은 가도에서 밀수왕초 혹은 해외천자로 행세하면서 조선 백성에게 행악을 마다하지 않았다. 후금은 후금 대로, 정묘호란으로 조선을 제압한 다음 가도의 모문룡에 대한 원조를 끊으라고 다그쳤지만 여전히 조선은 명나라에 대한 사대정신과 후금은 오랑캐의 나라라는 중화적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인 의식의 전환이 불가능했다. 언관을 중심으로 한 조선의 사대부들과 정권 지도부는 명에 대한 의리와 대의명분만을 강조하면서, 점증하는 전란의 위기에 대한 아무런 대책도 마련하지 않았다. 그 결과, 병자호란으로 수많은 조선의 죄없는 백성들이 목숨을 잃었고 정부의 무책임한 견벽청야(堅壁淸野) 전략으로 국토가 유린되었다.

 

기본적으로 인조 정권은 서인 반정공신의 주도하여 능양군(인조)을 추대한 군신복합체였다. 이들은 광해군의 실정을 지적하면서 집권했지만, 실제로 전대의 문제들을 개혁하는데 실패했고 격변하는 국제정세에 둔감했으며 대처할 능력도 없었다. 오로지 인조를 중심으로 한 정권안보에만 유능했던 김류와 이귀를 중심으로 한 서인정권은 그야말로 운명공동체였다. 훗날 강화도 함락 당시 멸공봉사(滅公奉私) 정신의 화신이었던 정권최대의 실세 김류의 아들이자 반정공신이었던 김경징에 대한 처벌을 두고 인조가 주저했다는 사실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아무리 과거가 현재의 거울이라고 하지만, 실패한 역사가 반복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이다. 17세기에도 그랬듯이 서북의 중국(후금/청나라)과 동남의 일본 사이라는 지정학적 위치는 21세기에도 변하지 않고, 우리에게 냉정한 선택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재조지은이라는 명분으로 미국은 미래의 가상 적국 중국을 포위하는 한미일 삼각 미사일 디펜스 대전략에 우리나라를 포함시키기 위해 매진하고 있다. 최근 우리를 방문한 중국의 시진핑 주석은 과거에 전쟁까지 불사했던 적국에서 친척이 되었노라고 선언하면서 우리의 최대 무역파트너가 중국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었다. 동남 일본의 아베 정권은 고노담화를 포기하고, 집단자위권 행사라는 해괴한 논리를 동원해서 노골적으로 무장국가로 가는 우경화를 견지하고 있다. 이런 변화무쌍한 국제정세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 역사평설 <병자호란>은 우리에게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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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경보 2021-01-17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현재 미국은 경제와 패권전쟁서 명 처럼 패배한게 없으니 패권을 내어줄리 만무.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
최민석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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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 독서 취향에 대해 말해 보자면, 때로는 고상한 고전 순수문학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으나 대개의 고전문학이 지루하기 때문에 너무 읽기 어려우니 B급 취향이라고 솔직히 자수해야 하나 망설여지는 게 사실이다. 다수의 우리 문학 창작가들이 그래도 순수문학 계열을 추구하다 보니 어쩌다 등장하는 오늘 이야기할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의 최민석 작가 같은 양반은 문단의 이단아라는 느낌이 든다. 그의 대선배에 해당하는 미국의 찰스 부코스키가 있지만, 그의 19금 필력에는 조금 미치지 못한다고나 할까.

 

소설에 문득 나오는 필자의 창작 수준이 역행 혹은 퇴행하는 게 아닌가라는 데 대한 자신의 직접적인 설명이 나오는데, 늦깎이로 문단에 데뷔해서 전업작가로 먹고살기 위해(여전히 그의 행적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 써제낀 단편소설들을 끌어 모아 이제야 소설집을 발표하게 되었단다. 그리고 보니 <능력자>, <쿨한 여자> 같은 경장편에 이어 소설집이 나온 점이 요사스러웠으나, 작가의 변을 듣고 나니 절로 이해가 갔다.

 

총 6편의 단편과 보너스 트랙으로 구성된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 중에서 혈기방장한 수컷의 본색을 숨기지 못한 나의 눈길을 가장 먼저 사로잡은 것은 <독립운동가 변강쇠>였다. 마치 오래 전 즐겨 보던 양영순의 <누들누드>의 소설판이라고나 할까? 대물을 자랑하는 한국의 변강쇠 아니 변강석이 독립운동의 현장에 뛰어 들어 중국 마적떼와 친일 변절인사 노무라와 서방 변강쇠 스티글리츠와 한판 대결을 벌이는 장면은 황당하기 그지 없지만, 묘한 카타르시스를 지어내는 그런 촘촘한 재미를 선보인다. 아직 그의 소설을 읽지 않은 독자 제하들에게 경고하노니, 너무 기대할지 말지어다. 기대는 보다 큰 실망을 불러 오는 법이니.

 

<국가란 무엇인가>에서는 좀 더 큰 국가 담론에 대해 말할 것이라고 기대했다면 그것 또한 끔찍한 오산이리라. 그가 처음부터 까놓고 말했으니 이것은 대하(大蝦:길이 30~36cm에 달하는 보릿새우)를 막장에 찍어 먹는 그런 황당무계를 기반으로 한 서사다. 오, 작가의 재기 넘치는 이 따위 말장난이란 정말. 소시의 제시카야말로 국내 걸그룹 중에 독보적인 존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지질하거나 횡설수설을 삼가지 않는 예의 작가는 이북의 리혁수 동무를 터무니없는 계기로 귀순시켜(개연성이나 도덕성 따위는 강아지에게나 줘 버리라고), 수구정당국회의원으로 둔갑시키고 나아가 이북에서 남파된 “그들”에게 납치되어 ‘손시’(손녀시대)의 요리와 함께 갇히게 된다는 설정은 그들이 나중에 대하를 찍어 먹는 막장 뺨치는 전개였다. 아, 과연 어쩌면 정말 이 의미 없는 소설에서 나름의 의미를 찾는 나의 노력이야말로 부질없는 게 아닐까 싶어진다.

 

그에 비해 <이방인 부르스의 말로>는 좀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외계인의 신분으로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한국 땅에서 한국어를 배웠다. 문제는 그가 배운 한국말이 로버트 할리 뺨치는 부산말이었다는 점이다. 중앙무대, 다시 말해 서울 바닥에서 뜨기 위해서는 표준 서울말이 필요했다. 그래서 볼펜을 깨물고 표준어를 배우기 위해 침을 질질 흘리며 사투를 벌이는 우리의 주인공 부르스. 그런데 우리의 부르스는 그 흔하디흔한 할리우드 영화 한 편 안본 모양이다. 외계인의 표준어는 우리의 언문이 아니라 영어란다 영어. 자신에게 표준 서울말을 가르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던 야매 한국어교습소의 원장마저 필상의 생존을 위해 클래스에 앉아 있는 것을 본 부르스는 그야말로 좌절한다. 이 부분에서 살아남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통해 대학이라는 관문을 통과하고, 예의 관문을 지나면 그 다음 목표인 취업을 위해 각종 스펙을 쌓는 우리네 청년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스펙 중에서도 으뜸이라는 어학실력을 입증하는 토익 점수를 따기 위해, 막상 입사한 다음에는 그다지 필요 없는 스펙쌓기에 오늘도 여념이 없는 그들의 모습이 요사하게 겹치고 있었다. 이 스펙쌓기에는 외계인도 열외 없다는 표현이려나.

 

리뷰의 제목으로 달았지만, 최민석 작가의 글이 지질하거나 횡설수설해도 난 좋다. 근엄하거나 젠 체 하지 않으니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지 않은가. 그냥 그가 갈긴 그대로 읽으면 될 듯 싶다. 의미없다고 목놓아 외치는 작가의 횡설수설을 지나치게 분석하거나 그럴 필요도 없지 않은가. 또 그게 아니라고 한다면 말고. 어쩌랴, 책은 필자의 손을 떠나는 순간 그 나머지 부분, 해석이나 오독 모두 오롯하게 독자의 몫이지 않은가 말이다.

 

자, 일필휘지로 갈기는 리뷰의 대단원을 장식할 시간이 됐다. 오리지널과 속편으로 구성된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를 이야기하지 않고 끝낸다면 혹시라도 작가가 섭섭할지도 모르니 잠깐이라도 언급하고 마치기로 하자. 어느덧 우리나라도 백만명 이상의 외국인들이 합법적 혹은 비합법적으로 사는 그런 거대 공동체가 되었다. 이제 더 이상 백의민족, 순수혈통 따위는 유효하지 않는 표어가 됐다. 주인공은 키르기스스탄 출신의 외국인 노동자 초이아노프스키다. 원래 이름이 훨씬 더 길지만 그대로 인용했다간 리뷰를 늘려 먹으려는 수작이라고 할테니 간단히 그가 일하던 가발공장의 악덕기업주 안면몰수 씨가 붙여준 최 씨라 부르기로 하자.

 

얼마 전 무려 집권여당의 사무총장이 무슨 박물관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의 임금을 착취하고 혹사시켰다는 뉴스가 있었는데, 어쩌면 우리의 횡설수설 작가는 바로 그 사건에서 이 이야기의 모티브를 취한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어쨌든 우리의 초이아노프스키 아니 최 씨는 부조리한 현실세계의 억압과 착취, 무엇보다 콩고에서 온 동료 주글리레 주씨가 안면몰수 사장이 제공한 떡을 그야말로 게눈 감추듯이 허겁지겁 먹다가 허무하게 죽어 버린 사건을 계기로 자신이 처한 주변의 부당함을 깨닫고 분연하게 의거를 도모하게 되면서 걷잡을 수 없이 돌아간다. 몽골 엘리트 출신 바타르 박씨와 쿠마리 구씨와 작당해서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해서 자신들의 주장을 알리기 위해 버스에 불을 붙이고 청와대로 돌진하자는 그들의 무(모)한 도전은 허무하게 사그라진다.

 

뭐 사실 최민석 작가가 농 혹은 유머로 담아 낸 이야기의 밑바닥에는 그저 웃고 넘어갈 수만은 없는 그런 층위의 서사들이 녹아있다. 아마 그런 본질적인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면, 타이핑을 날리는 나의 손가락들이 매서운 혹사를 당할 지도 모르겠다. 진짜 이야기는 그렇게 다 웃고 난 뒤에, 비로소 자각하게 되어 생각하게 되는 지점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작은 빗방울이 모여 강을 이루어 바다로 나가는 듯이, 일면 지질하거나 횡설수설해 보이는 이야기를 통해 세상에 도전하는 이 B급작가의 도전이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 글을 읽는 재미까지 있으니 더 바랄 게 없다.

 

[뱀다리] 그의 전작 어디에선가 본 심이(心耳)라는 표현을 이번 소설집에서도 만나볼 수가 있었다. 그냥 마음의 귀로 듣는 소리인가 싶어서 표준국어대사전을 뒤적여 보니 ‘심이’는 의학용어로 “심장에서, 좌우 심방의 일부를 이루는 귓바퀴 모양의 돌출부”라는 뜻이란다. 에이, 설마 그런 뜻에서 작가가 쓴 건 아니겠지. 그러니 그냥 내 맘대로 마음의 귀로 듣는 소리로 규정할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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