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010, 드디어 고대해 마지 않던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되었다.

 

스마트폰으로 그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예상했던 하루키는 이번에도 수상을 하지 못했다. 사실 작년에 중국 출신의 모옌이 받았는데 2년 연속으로 아시아권 작가에게 노벨문학상을 수여하는 건 아마도 부담이 됐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떤 기사에서는 하루키의 소설이 순수문학이 지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순수문학 지향성을 지닌 스웨덴 한림원의 간택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 섞인 내용을 다뤘다. 일견 일리가 있는 분석이라고 생각한다. 기사에서는 좀 더 노골적으로 다뤘지만 이만하고 패스하자.

 

 

캐나타 온타리오 주 출신으로 1931년생인 올해 우리 나이로 83세의 앨리스 먼로가 영예의 주인공이 되었다. 부랴부랴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당장 살 수 있는 책은 웅진씽크빅의 문학계열 임프린트인 <>에서 나온 그녀의 데뷔작 <행복한 그림자의 춤>(1968, 2010년 뿔)이 유일하다. 그나마 나온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은 품절 상태란다.

 

그리고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에 실린 마지막 단편 <곰이 산을 넘어오다>를 영화화한 <어웨이 프롬 허>가 우리나라에서도 20083월에 개봉했었다고 한다. 놀랍군!

 

 

앨리스 먼로의 수상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산본 램프의 요정 재고를 검색해 봤다. 그리고 딱 한 권,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을 스택에서 찾아냈다. 그리고 폐점을 코앞에 두고 램프의 요정에 안착해서 구매에 성공할 수가 있었다. 이렇게 절실하게 책과 만난 적이 있었던가.

 

관심은 현재 시중에 유통 중인 책은 앨리스 먼로의 데뷔작이 유일한데, 웅진에서 이 책을 품절의 상태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가이다. 나야 뭐 어제 사서 걱정이 없지만. <행복한 그림자의 춤>을 살까 아니면 도서관에서 빌려다 볼까 생각 중이다. 현재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 많아서 일단 빌리기부터 해야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라네. 아무래도 그녀 작품 세계의 효시부터 읽는다면 더 의미가 있지 않을까.

 

 

아마 이 책이 품절된 상태라 더더욱 절실하지 않았나 싶다.

 

그녀의 데뷔작은 현재 판매 중이라 주문만 하면 만날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렇게 절판/품절의 운명에 처한 책들은 중고서점이나 도서관에 가야 만날 수 있으니까. 사실 도서관 책들은 너무 너덜너덜해서 잘 손이 가지 않는다. 물론 어제 빌린 <파과> 같은 신간은 그나마 낫지만 말이다.

 

 

 

어느 기사에서 보니 앨리스 먼로 할머니는 올해 1월에 가진 인터뷰에서 이제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겠노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아직도 여전히 글을 발표하실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닌가? 아직 10권도 넘게 그녀의 책이 출간되지 않았으니 이제 노벨문학상의 파도를 타고 출판사들이 그녀의 책을 경쟁적으로 내게 되겠지. 아마 장편보다는 단편에 집중하는 것으로 보여지는데, 아직 한 편의 글도 읽어 보지 않아서 이렇다 저렇다 평하기에는 이른 것 같다. 우선 이 책부터 읽은 다음에 리뷰로 말해야겠다.

 

 

 

마지막으로 가장 최근에 나온 앨리스 먼로의 작품인 <디어 라이프>. 반즈앤노블의 미리읽기를 통해 검색해 보니 모두 14개의 단편이 실려 있다. 타이틀인 <디어 라이프>는 맨 끝에 달려 있구나. 이 단편들은 모두 그전에 <그란타>, <하퍼스 매거진>, <뉴 요커> 그리고 <틴 하우스>라는 잡지에 게재된 글을 모은 것이라고 한다.

 

어서 빨리 판권을 가진 출판사들이 이 호재를 놓치지 말고, 앨리스 먼로 작가의 글을 출간해 주었으면 좋겠다. 부디 서둘러 주시길. 이상 끝.

 

[추가정보] 최신작이자 어쩌면 앨리스 먼로의 마지막 작품이 될지도 모르는 <디어 라이프>가 다음달 문학동네에서 출간된다고 한다. 역시나 발빠른 행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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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미시간 주 입실란티, 때는 20064.

 

독자는 부활절 토끼가 쇼핑몰에 출몰하는 것으로 미루어 부활절 즈음이라는 것을 유추해낸다. 그리고 꼬마들을 현혹시키는 온갖 것들로 넘쳐나는 쇼핑몰에서 5살 난 소년이 납치됐다.

 

아들 로비를 능동적인 아이로 키우고 싶어하는 엄마 다이너를 주차장 게임을 고안해냈다. 그 와중에 납치범은 다이너를 둔기로 가격하고 아들을 빼앗아 달아났다. 황망한 가운데 다이너를 납치법이 탄 밴을 막기 위해 맞섰다가 15미터나 끌려가는 수난을 겪었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결정적 순간인 로비의 납치 장면을 반복해서 독자에게 주지시킨다. 그리고 소설의 중심은 납치사건에서 납치사건을 주도한 괴물 순회목사에게로 이동시킨다. 무대를 뉴저지의 외딴 곳으로 옮겨 납치한 아이가 매력을 잃을 때까지 달콤하면서도 이중적인 대디 러브의 모습을 보여준다. 자 과연 이제 로비에서 기드온이 된 소년은 부모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아마 납치된 로비도 그리고 로비의 부모도 잃어버린 자식이 돌아온다고 해도, 그 전과 같은 삶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상상하고 싶지 않은 악몽이 현실이 되었을 때, 과연 인간의 본성은 어떻게 반응할까. 마지막 장에 이르기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하는 대가의 테크닉을 기대해 본다.

 

그리고 올해 노벨문학상은 그녀가 받았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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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라 문서
파울로 코엘료 지음, 공보경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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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들어가는 말을 읽으며 바로 떠오르는 책이 하나 있었다. 움베르토 에코의 그 유명한 소설 <장미의 이름>. 중세에 어느 수도사가 남겼다는 책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스토리텔링이 파울로 코엘료의 <아크라 문서>에서도 그대로 반복된다. 적당한 사실(나그함마디 문서)에 배합되어 양조된 작가만의 이야기가 노도와 같이 들이닥친 프랑크 십자군의 공격 앞에 그야말로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운명에 처한 성도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이 현자로 추앙하는 콥트인과의 질의응답으로 현현된다.

 

개인적으로 나와 파울로 코엘료의 서술 양태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 왔고, 이번 <아크라 문서>를 읽으면서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됐다. 사실 이번 <아크라 문서>를 읽기 전에 나의 기대는 십자군 원정과 관련된 어떤 역사적 사실 그게 아니라면 그저 당시 함락을 목전에 둔 예루살렘 사람들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코엘료는 나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현세를 사는 이들이 원하는 대답이 아닌, 아포리즘으로 가득한 은둔자의 현답이 중심을 이룬다. 그것은 마치 동양의 고승들의 선문답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어쩌면 이 책을 읽는 대개의 독자가 이미 아는 답이 아니었던가.

 

각각의 다른 의미를 가진 성도 예루살렘 거주민을 대표하는 랍비, 이맘 그리고 사제가 모여 아테네 출신 콥트인에게 묻는다. 바로 내일이면 성도에 들이닥쳐 마구잡이 학살을 일삼을 대적을 앞에 두고 어찌 패배, 고독 그리고 고독과 짝을 이룬다는 사랑, 아름다움 그리고 섹스에 대해 이렇게 무사태평하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던 스피노자의 철학관이 시대를 앞서 투영된 느낌이랄까.

 

고대 기독교의 그노시즘(영지주의)을 떠올리게 하는 코엘료의 신비주의는 절대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그 실체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회피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책의 초반부터 콥트인이 굳게 믿는다는 모이라(미지의 신, 신성한 힘)에 대한 언급은 정확하게 그노시즘의 정수를 관통한다. 불가지론과 영지주의를 오가며 현란한 수사를 보여주는 작가의 의도가 과연 무엇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코엘료는 콥트인의 입을 빌려 사랑에 대해서도 논한다. 사랑을 신의 영역으로 그리고 고독은 인간의 영역으로 나누면서, 존재하지 않는 내면의 공허가 고독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무관심이 부유하는 세상에서 노인들은 비로소 자신이 호되게 배운 삶의 지식 혹은 진실을 젊은이들과 공유하려고 하지만 그들은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누굴 원망할 것인가? 세상은 변화시키겠다고 종교에 귀의해서 신자, 전도사 그리고 광신자의 길을 걷는 이들에 대해서도 조심할 것을 권유한다. 세상만물은 제각각 존재의 이유가 있다고 하는데, (virtue)에 대해서는 공감하지만 그렇다면 그 대척점에 서 있는 악(evil)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한 것인가? 코엘료의 서술대로라면 히틀러와 홀로코스트도 역시 그 존재의 이유가 설명된단 말인가.

 

상인의 아내가 던진 섹스에 대한 질문도 흥미롭다. 난 질문 자체보다 누가 그 질문을 했는가가 더 궁금하다. 왜 하필이면 상인의 아내일까? 나그네의 아내도 있을 것이고, 내일이면 전장에서 피를 흩뿌릴 전사의 아내도 있을 것인데 말이다. 성에 대한 일반론은 차치하고, 어김없이 등장하는 신성한 힘이 내게는 허무맹랑하게만 들린다. 그는 이 신성한 힘을 독자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저 모이라라는 게 있다. 세상 만물의 운행이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모이라의 질서와 규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주장한다면 동의할 수 있는가. 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코엘료가 주장하는 정체불명의 신비주의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지만, 공동체와 단순함 그리고 매일매일의 노동에 대한 이야기는 수긍할만하다. 공동체 구성원의 한계, 두려움과 편견의 고리를 공격해서 표준화된 행동과 사고를 요구하는 것이 바로 공동체를 위협하는 요소라고 그는 지적한다. 올바른 지적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가장 경계해야할 것이 바로 이런 전체주의적인 발상이다. 멀리갈 것도 없이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그렇지 않은가. 시대를 역행하는 듯한 사건사고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세태를 꼬집어 말하는 것 같은 느낌에 통쾌함마저 들었다. 소수의 의견에 대해서도 그 가치를 인정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 사회가 미숙하다는 반증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씁쓸해졌다.

 

시간을 팔아 돈을 버는 노동에 대해서도 코엘료는 일침을 가한다.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 다 그의 말대로 도전의식을 가지고 모험에 나설 수 있는 건 아니잖은가. 엉뚱하게도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노나니라는 노래 가사가 떠올랐다. 나이가 어느 정도 들고 나니 그 말처럼 와 닿는 것도 없더라. 젊어서는 돈이 없어 놀지 못했고, 어느 정도 경제적 여유가 생기자 시간이 부족해졌고, 그 두 가지가 다 충족되니 이젠 체력 때문에 놀 수가 없더라는 지인의 말이 떠올랐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인간은 누구나 다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외면하며 살고 있다는 사실도 새삼스럽지 않은 이야기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라는 걸 다시 한 번 상기시켜준다. 다양한 불안의 장막은 인간 최대의 적인 강박과 상통한다고 말했던가. 제어가 불가능한 시간의 포로가 되어 아등바등하는 삶의 진실 앞에 다시 한 번 숙연해질 따름이다.

 

 

<아크라 문서> 곳곳에 보이는 성경 구절을 보며 이런 생각이 불현 듯 들었다. 만약 성경에 대한 저작권이 있었다면, 바로 코엘료 작가는 피소당했겠지? 그 정도로 <아크라 문서>에는 성경에 나오는 다양한 구절들의 패러프레이징(paraphrasing)이 차고 넘친다. 난 그에게 이야기를 원했다. 이런 아포리즘의 지리한 행렬은 내가 코엘료에게 기대한 게 아니었다. 여전히 나와는 가까워질 수 없는 작가의 책 속에서 길을 잃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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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훈 작가 작품의 팬이다.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최고의 데뷔작은 천명관 작가의 <고래>라고 만나는 이들에게 그렇게 말하곤 했는데, 그 뒤에 한 자락 더 붙여야 할 것 같다. 그 다음에는 최제훈 작가의 소설집 <퀴르발 남작의 성>이라고 말이다.

 

모두 8개의 단편으로 구성된 이 책을 읽으며 참으로 기발한 발상에 신기해 하던 기억이다. 사실 오래되서 구체적인 기억은 나지 않는다. , 앞으로 이 작가의 책은 찾아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 정도.

 

후속타 역시 빠질 수가 없다. <일곱 개의 고양이 눈>으로 1년간 연재된 네 편의 중편이 모여 장편소설을 구성하는 픽스업 방식의 책이라는 설명이다. 이 책도 물론 읽었는데 읽는 동안 몰입도가 보통이 아니었다. 2년 전의 독서인데도 이렇게 기억이 가물가물하다니. 이 책 때문에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를 아마 찾아 들었었지.

 

그리고 2년만에 소설 <나비잠>으로 다시 돌아왔다. 웹진문지에서 <몰락-전래되지 않은 동화> 제목으로 연재되었다고 하는데, 이제는 해당 사이트가 폭파되었는지 어쨌는지 당최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가 없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20127월 중순께부터 월수금 연재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지전능한 구글이 이 정도 정보밖에 꺼내주지 않을 줄이야. 작가는 불완전한 인간의 이야기이니 불완전한 인간이 쓸 수밖에라는 말로 연재를 시작했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책과 만나기 전에 맛보기라도 보려는 나의 생각은 여지없이 무너져 버렸다. 암튼 퇴고를 거쳐 더 멋지게 재탄생했다고 하니 어서 빨리 만나보고 싶다. 이번 와우북페스티벌에 선을 보였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난 시간이 없어서 갈 수가 없어서 작가와의 만남 시간도 그리고 책도 만나지 못했다.

 

최대한의 공력으로 빨리 만나 보고 싶은 책이다.

 

[뱀다리] 왜 퇴고 과정에서 원래 제목과 전혀 다른 제목으로 바뀌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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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r 2013-10-09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 새책이 나왔어요? 저도 이 작가 팬인데, 일곱개의 고양이눈이랑 퀴르발 남작의성
읽고, 눈 빠지게 기다렸는데, 이 작품도 얼른 읽어봐야겠어요.

레삭매냐 2013-10-10 14:23   좋아요 0 | URL
지난 주말 와우북페스티벌에서 아마 첫 선을
보인 것 같습니다.
온라인 서점에는 이번 주부터 아마 판매에 들
어간 것 같네요.
 
타이니 스토리 Tiny Stories
야마다 에이미 지음, 김수현 옮김 / 민음사 / 2013년 4월
평점 :
절판


 

누구나 사랑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지고지순한 사랑을 꿈꿀 것이며, 울고불고 싸우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는 사랑도 있을 것이며, 철저하게 계산된 사랑이라는 미명을 동원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며, 우리의 영미 씨처럼 쾌락을 동반한 육체적 사랑이야말로 사랑 중에 으뜸으로 치는 있을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사랑은 누구나에게 다른 얼굴로 찾아온다는 말이다. 그러니 사랑에 옳고 그름이 있을 리도 없겠다. 모두가 그저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할 뿐.

 

개인적으로 작가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5권 이상의 책은 읽어봐야 그 작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지 않나 하고 생각한다. 이번 경우에는 독서모임 때문에 그럴 여유가 전혀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루이스 세풀베다나 혹은 로베르트 볼라뇨라면 또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암튼 내가 처음으로 읽은 영미 씨의 <솔뮤직 러버스 온리>에 이어 바로 비교적 근간인 <타이니 스토리>를 읽었다. 작가가 독자에게 선사하는 달달하다가도 여지없이 뒷통수를 때리는 그런 흥미진진한 이야기들로 가득한 한 다발의 사랑에 관한 단편소설 종합세트다.

 

<솔뮤직 러버스 온리>만으로는 영미 씨가 남자밝힘증의 대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타이니 스토리>에서는 딱히 또 그런 것만도 아니라고 토로한다. 그렇지, 아무리 연애소설로 먹고 사는 작가라지만 그럴 리가 있나.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주무기를 내려놓은 건 아니다. 저자 후기에서 밝혔다시피 어떤 특정한 주제를 가지고 쓴 게 아니라 그야말로 붓 가는 대로 쓴 이야기들의 집대성이다. 이렇게 자유로운 글쓰기를 하고, 그 글을 꾸준하게 소비할 수 있는 두터운 독자층을 가지고 있다는 게 영미 씨의 자랑이 아닐까.

 

언제나 그렇듯, 단편소설은 다른 것에 우선해서 특별한 캐릭터가 필요하다. 긴 호흡의 장편처럼 시간과 공간 같이 부수적인 요소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설명한 겨를이 없다. 그러니 독자의 시선을 집중할 만한 보통을 능가하는 캐릭터가 필요하단 말이다. 그래서 전신주 씨가 등장하고, 유명 소설가와 친해지지만 그 소설가가 자신이 들려준 비운의 자전적 이야기를 소설의 소재로 써먹는 그런 비열한 캐릭터도 무시로 등장한다. 우리의 경우도 비슷하겠지만, 일본 열도에서도 역시 주둔 중인 미군 GI와 화끈한 사랑을 꿈꾼 묘령의 아가씨들도 많이 있는가 보다. 어쭙잖은 도를 내세우는 이율배반적인 나라에서라면 손가락질 받을만한 그녀들의 무용담이 이웃 나라에서는 흥미진진한 문학의 소재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이 놀랍다. 어째 우리나라에는 영미 씨 같은 작가가 없단 말인가, 오호 통재라.

 

어린 시절의 자신에 대한 왕따를 주동하던 친구에게 복수하기 위해 접근했지만, 그 친구 역시 전학가서는 왕따 당했다는 말에 치솟아 오르던 분노가 수그러드는 상황에 당황해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어쩌면 우리네 일상의 그것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항상 옳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면서도, 막상 상대성은 철저하게 부인하는 내 모습을 그녀의 소설에서 보게 될 줄이야.영미 씨의 모든 소설의 내용과 부합할 수는 없겠지만 이야기의 모퉁이에서 순간마다 마주치는 삶의 진실은 왜 그녀가 이런 작은 이야기에 정성을 들였는지 알게 해준다.

 

영미 씨가 의도대로 쓴 것이 분명한 두 개의 연작 단편도 인상적이다. 미국 유학 출신의 페미니스트 강사는 역시 교수로 재직 중인 미국인 남편과 떨어져 살면서 자유연애를 만끽한다. 평소의 페미니스트답지 않은 행동을 일삼으며 복종의 쾌락을 추구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남학생 제자와의 일탈을 즐긴다. 두 개의 이야기가 동전의 양면처럼 딱 들어맞는 장면에서는 감탄할 수밖에. 영미 씨에게 포 트웬티(four-twenty)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 수 배웠다.

 

군인이었던 남편을 배려하는 마음이 오히려 상대방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새삼스럽게 깨닫는 일본인 배우자의 이야기도 새겨 들을만하다. 너무 올바른 삶은 나 뿐만 아니라 주변인들까지도 힘들게 할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에 도달한다. 배려가 누군가에게는 성가시고 짜증나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다는 걸 이 책을 통해 다시 한 번 깨닫게 됐다. 여러 면에서 영미 씨의 <타이니 스토리>는 읽을 만한 책이다.

 

나중에 오래 시간이 지나고 나서 누군가 영미 씨의 <타이니 스토리>에 대해 이야기해 보라는 말을 듣게 되면 나의 뇌리에서는 어떤 기억이 남아 있을까. 첫 경험이었던 <소우루>만큼의 강렬함은 없겠지만, 그와는 대척점에 서 있는 그야말로 작은 이야기들이 기억나지 않을까? 영미 씨는 무책임하다고 말하지만, 작은 이야기에도 나름의 소리와 울림이 있다는 걸 이 책을 통해 알게 됐다. 그래서 반가워, <타이니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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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혜윰 2013-10-07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섯 권까지는 아니더라도 특히 작가에게 나쁜 평가를 내릴 때에는 더더욱 몇 권 읽어봐야할 것 같아요. 그나저나 저 책은 표지가 원서인 줄 알겠어요^^;;

레삭매냐 2013-10-08 10:41   좋아요 0 | URL
항상 하는 생각이지만, 읽어야할 책은 너무 많고
불완전한 존재가 읽는 속도는 너무 더디기만 한 것 같습니다.

저도 책 처음에 보고 원서라고 착각했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