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문학 걸작선 1
스티븐 킹 외 지음, 존 조지프 애덤스 엮음, 조지훈 옮김 / 황금가지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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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구 종말의 시대는 오래전부터 매혹적인 문학 소재였다. 그래서 많은 장르 소설 작가들이 앞 다투어, 지구 종말과 인류 멸망 이후의 어떤 세계가 펼쳐질 지에 대해 수많은 작품을 발표해 왔다. 이번에 황금가지를 통해 선보이는 <종말 문학 걸작선>에서는 거장 스티븐 킹의 단편을 비롯한 모두 22편의 지구 종말을 주제로 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지구 종말이 다가왔을 때,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일까에 이 소설 선집의 키포인트가 있지 않을까 싶다. 그건 바로 생존이다. 인류는 진화 단계에서, 어떤 식으로 생존에 집착해왔다. 후손에게 자신의 유전인자를 물려주고, 보존하는 것이야말로 인류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간단하게 말해서, 지구에 종말이 닥쳐와도 인류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남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류뿐만 아니라 모든 동물마저 사라진 종말시대에 진짜 동물을 본 기계 인류의 이야기는 흥미롭다. 유기물이 아닌 무기물로 생존하고, 자유자재로 재생이 가능한 시기에 구시대의 유물로 등장하는 개의 존재는 그들에게 이질적으로 다가온다. <모래와 슬래그의 사람들>에서 파올로 바시갈루피는 신인류에게는 없는 다른 생명체와의 교감의 중요성을 슬쩍 내비친다. 거창하게 왜 우리에게 종의 다양성이 필요한가를 말하기보다 종말 이후의 삭막한 지구의 현실을 통한 우화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모티프를 얻었다는 <빵과 폭탄>에서는 나와 다른 이들과 함께 사는 법에 대한 M. 리케르트의 사고를 엿볼 수가 있다. 9-11 사건 이후, 전 미국을 휩쓸었던 반 이슬람 분위기에 대한 냉소적 시선을 아이들 사이의 갈등으로 풀어내가는 솜씨가 여간 아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웜바이러스 때문에 순식간에 지구의 시스템이 파괴되는 과정을 그린 <시스템 관리자들이 지구를 다스릴 때>에서는 저자 코리 독토로의 네트워크 환경에 대한 전문적 지식에 감탄했다. 사랑하는 아들과 아내를 잃은 주인공 펠릭스(역설적으로 주인공의 이름이 “행운아”라니!)는 인류 삶의 터전인 지구와 가족이 붕괴되는 과정을 목격하면서, 희망을 잃지 않고 문명의 보존과 재건을 위해 안간힘을 쓰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전통적인 오프라인 관계 상실의 시대에, 네트워크로 연결된 공동체의 생존 방식에 대한 작가의 문제제기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개인적으로 이 단편들이 어쩌면 작가들이 나중에 그 외연을 확대해서 장편으로 개발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점에서 희미하나마 보이는 희망의 끈이 인상적이었다.

<종말 문학 걸작선> 첫 번째 권에 실린 소설 중에서 역시 가장 관심을 끄는 작품은 1번 타자이자 가장 널리 알려진 작가 스티븐 킹의 <폭력의 종말>이었다. 프리랜서 작가인 하워드 포노이의 마지막 원고로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작가의 천재 동생 바비 포노이가 어떻게 인류를 종말로 이끌었는지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다. 어려서부터 천재성을 드러낸 바비는 인류의 폭력성과 비열함에 절망하고, ‘특수한 물’의 심판을 내린다. 문제는 그의 극단적 치료제가 가진 부작용이었다. 선의가 언제나 좋은 결과를 가져 오는 건 아니라는 방증이다.

스티븐 킹의 단편을 보고 나서 바로 미국 케이블 채널인 TNT에서 제작된 동명의 텔레비전 영화를 구해서 봤는데, 원작을 그대로 구현한 콘텐츠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큰 차이점은 원작에서는 주인공 하워드가 바비의 전동타자기로 기록을 남기는 것으로 나오는데, 텔레비전 영화에서는 비디오카메라로 좀 더 비주얼적인 측면을 다룬다는 점 정도. 나머지는 정말 환상적으로 원작을 재현해내는데 성공했다.

마지막으로 <종말 문학 걸작선>을 읽고서 두 가지 아쉬운 점을 말하고 싶다. 하나는 존 조지프 애덤스가 “들어가는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아포칼립스 문학에서 빠질 수 없는 좀비 창궐과 외계인의 지구 정복이라는 소재의 글이 빠진 것이다. 후자는 차치하고서라도,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로 지구 문명이 파괴되고 죽어도 죽지 않는 좀비와의 사투야말로 종말 문학 중에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는데 아쉽기 짝이 없다. 두 번째로는 책의 곳곳에서 보이는 오탈자와 아귀가 맞지 않는 전후관계 설명이다. 책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교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좀 엉뚱한 질문이지만, 포스트 아포칼립스 시대에도 문학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 그러기 위해선 문학의 생산자와 소비자인 인류가 꼭 필요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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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데이
김병인 지음 / 열림원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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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작품들의 공통점을 찾아보자. <사람의 탈>, <아버지의 길> 그리고 <디데이>. “노르망디의 코리안,” 딩동댕이다. 오래전 어느 방송사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식민지 조선 출신 일본군에서, 소련군으로 그리고 다시 독일 동방대대 소속으로 최전방 서부전선에서 미영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투입된 기구한 운명의 주인공과 만났다. 그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이것 참 이야깃거리가 되겠다고 생각한 이가 나만은 아니었나 보다. <디데이>의 저자 김병인 씨의 시놉시스를 바탕으로 강제규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마이 웨이>가 개봉 대기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위에서 언급한 세 개의 소설에서 조금씩 디테일은 다르지만, 일본군-소련군-독일군으로 죽음의 전장을 전전한 주인공이라는 큰 줄기를 공유한다. <사람의 탈>과 <아버지의 길>이 그런 주인공에 초점을 맞췄다면, <디데이>는 그 위에 하나의 토핑을 더 추가한다. 주인공 한 대식의 라이벌로 일본 제국주의의 화신 후지와라 요이치가 등장한다. 소설은 그래서 대식과 요이치의 시선에서 동일한 사건을 다루는 구성으로 진행된다. 그래서인지 책의 가독성은 그야말로 몰입되는 순간, 폭발해 버린다.

일본의 조선 지배에 항거하다가 불령선인으로 몰려 일본 헌병의 손에 죽은 대식의 아버지의 비극은 그대로 묻혀 버린다. 아들 대식은 후지와라 가의 호의로 남작당에 둥지를 튼, 대식네 일가가 보기 싫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안쓰러운 마음을 품는 요이치. 육상 트랙 경주를 시작으로 대식과 요이치 간의 보이지 않는 경쟁은 막을 올린다. 때마침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 선수의 쾌거로 대식은 자신이 최고로 잘하는 달리기를 통해 집안의 간난을 일소에 해결하려는 꿈을 꾼다.

하지만, 일본 지배하의 피지배민족인 조선인이 일본 제국의 신민을 이기는 용서할 수가 없었던 이들은 대식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고 간다. 결국 아버지의 원수인 일본군이 되어 대식은 전장으로 끌려간다. 다른 작품에서 주인공들이 강제로 징병되었다면, <디데이>에서 주인공은 현재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방법으로 일본군에 지원한다. 피 끓는 제국의 청년이었던 요이치 역시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군에 입대한다. 그 둘이 투입된 노몬한 전투로부터 그들의 파란만장한 삶의 드라마가 펼쳐지기 시작한다.

뭐 좋다. 이런 기가 막힌 이야기를 그대로 방치한다는 건 아마 문학인으로서 결계일 테니까. 그런데 문제는 식민지 조국의 민족해방이라는 현실적 문제의식보다, 올림픽 대회에 나가 개인의 영달을 이루겠다는 대식의 욕망이다. 대식이 피와 살이 튀던 노몬한의 전장에서, 비참한 소련 굴라크에서 그리고 스탈린그라드에서 살고자 했던 이유는 오로지 올림픽 제패라는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그 꿈을 가슴팍에 일장기를 달고 이루고 싶었던 걸까? 그건 아니었을 것이다. 바로 그 점에서 소설 <디데이>는 암울한 식민지 현실과 개인의 꿈이라는 가치를 교환해 버린다.

“인공적인 느낌이 완전히 배제된 원초적인 질주. 비본질적인 것들을 모두 제거한 순전한 본질로의 회귀, 바로 그것이었다 (179쪽).”

작가는 대신 “명백하고 즉각적인 인과관계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골수 제국주의자이긴 하지만, 전장과 기나긴 포로생활을 통해 갱생의 길을 걷게 되는 또 다른 주인공 요이치를 취사선택한다. 대식과 요이치가 펼치는 애증의 관계는 좀 진부하긴 하지만 소설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극적 요소로 멋지게 작용한다. 할리우드 영화사의 투자가 결렬되면서, 어쩔 수 없이 적과의 공존이라는 주제를 택한 탓일까. 어떤 면에서 본다면 <디데이>는 한국의 관객들에게도, 그리고 일본의 관객들에게도 환영받지 못하게 되는 게 아닌가 싶다. 둘 사이의 어중간한 설정이 위태로워 보인다.

다음으로 “노르망디의 코리안”은 모두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라고 하는데, 제발 좀 적극적으로 그 ‘실화’의 비밀을 시원하게 벗겨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외국의 경우에는 아무리 소설이라도 하더라도, 그 소설을 쓰게 된 원전을 밝히기 마련이다. 달랑 미군이 노르망디 해변에서 찍은 사진 한 장으로 일본군-소련군-독일군 출신 조선 사람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아무래도 신빙성과 설득력이 떨어진다. 사실에 풍설이 너무 많이 들어가면 원래 있던 사실마저도 그 빛을 바래기 마련이 아니던가.

대식과 요이치의 마지막 관문이었던 스탈린그라드 탈출기를 위해, 요이치의 독일 유학 설정이 매우 유효했다고 본다. 요이치가 독일어로 대식과 자신이 동맹국 일본 출신이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면, 소련군 까레이스키로 몰려 죽었을 테니까 말이다. 엽기적인 굴라크 수용소장 페트로프의 심리전도 인상적이었다.

자,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노르망디의 코리안”의 문학 3부작과 다큐멘터리를 모두 섭렵했으니 다음 달 크리스마스 무렵에 개봉예정이라는 <마이 웨이>만 보면 된다. 어디까지가 실화이고, 어디까지가 영화적 상상력의 소산인지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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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너무 사랑한 남자 - 책 도둑과 탐정과 광적인 책 수집가들에 대한 실제 이야기
앨리슨 후버 바틀릿 지음, 남다윤 옮김 / 솔출판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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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책을 사랑한다. 책이 좋아서, 책을 사는 데 쓰는 돈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인터넷, 홈쇼핑을 통해 다양한 물건을 구입하듯이 나도 그렇게 다양한 루트를 통해 책을 구입한다. 인터넷은 물론이고, 오프라인 서점, 헌책방, 북페스티벌 등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다양한 방법으로 책을 수중에 넣는다. 나의 책 구입 행동에 하자가 있을까? 그건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름대로 애서가를 자처하는 독서가로서 <책을 너무 사랑한 남자>에 나오는 반쪽 주인공 존 길키의 절도/사기가 이해할 수가 없다.

이 책의 저자 앨리슨 후버 바틀릿은 존 길키를 ‘책 도둑’이라고 부르지만, 나는 그를 책 도둑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사기꾼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의 절도/사기 행각은 인터넷 시대에 아주 고전에 속한다. 미국 유명 백화점에서 임시고용인으로 일한 바 있는 길키는 신용 사회 쇼핑에 있어서 꼭 필요한 신용 카드 정보를 직장을 통해 얻는다. 그리고 자신이 사고 싶은 고서, 희귀 서적에 자신이 불법적으로 탈취한 정보로 책을 주문한다. 타인을 가장한 픽업이나 혹은 호텔로 책 배달을 시켜서 마침내 자신의 컬렉션에 넣는다. 문제는 길키가 이런 방식을 통해 훔친/사기 친 책의 가격이 10만 달러를 훌쩍 뛰어넘는다는 사실이다. 놀랍군!

사회에서는 언제나 작용, 반작용의 법칙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51개 주의 연합체인 미국 주(州)간의 허술한 사법 공조 체계의 빈틈을 노린 길키를 잡으려는 정의의 사나이가 빠질 수 없다. 자신이 직접 희귀서적상을 운영하는 켄 샌더스가 바로 주인공이다. 서적상 협회의 보안담당을 맡게 된 샌더스는 북부 캘리포니아 일대에서 벌어진 길키의 유사한 범죄에 주목하고, 범인을 쫓는다. 이렇게 책을 너무 사랑한 ‘두 남자’의 맞대결을 저널리스트 출신으로 이제 막 서적광(bibliomania)의 세계에 발을 디딘 저자 바틀릿이 이 책의 삼각 축을 형성한다.

저자는 길키가 계속해서 범행을 저지르면서도, 자신의 행위가 타인에게 심각한 경제적 손해를 끼치는 범죄행위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길키는 인류에게 다양한 정보를 전달해 주는 도구로서의 책이 아니라, 오로지 수집을 통한 개인적 만족 때문에 불법 행위도 마다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훔친 책을 읽지도 않는다! 절도와 사기의 연이은 성공으로 인한 쾌감이 길키를 희대의 책 도둑으로 만든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책을 너무 사랑한 남자>는 우리에게 생소하지만, 무척이나 흥미로운 미국의 희귀 고서적 수집의 세계로 독자를 인도한다. 왜 그렇게 서적 수집가들이 저자의 서명이 들어가 초판본에 열광하는지, 그리고 그런 희귀한 책을 사는데 가히 천문학적인 돈을 쓰는 이유를 저자는 멋지게 추적해냈다. 개인적으로 책의 존재 이유는 바로 ‘독서’라고 생각하는데, 책에 소개된 등장인물의 생각은 나와 다른 것 같다. 그들은 책을 자본 증식을 위한 투자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보통 책을 살 때도 오프라인 매장에서 살펴보고 사는 게 제일 좋다고 생각하는데, 온라인 판매로 해당 책의 상태나 판본 같은 걸 어떻게 믿을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물론 요즘에는 디지털 사진 기술의 발달로 그런 비주얼적인 측면에 많이 해소되긴 했지만 길키와 샌더스가 쥐와 고양이 싸움을 벌이던 시절은 벌써 십년 전이 아니던가. 저자가 세계 최고의 장물 사이트라고 표현한 이베이 상의 거래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 나도 오래전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도의 마지막 유혹> 하드커버를 이베이 경매를 통해 구매한 적이 있는데 책을 받고 보니, 어느 도서관의 관인이 떡 하니 찍혀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사실을 확인했을 때의 낭패감이란 정말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아주 평범한 질문으로 이 책의 리뷰를 끝내야할 것 같다. 도대체 책을 수집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책 도둑 길키에게 책 수집은 평생의 임무이자 강박이었다. ‘제리’ 길키를 잡으려는 “톰” 샌더스에게 책 수집은 밥줄이었다. 나같이 무심한 독자는 초판본이나 저자 사인본에 집착하지 않지만, 그래도 ‘그런 책이 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은 한다. 그전에 기껏 수집했지만 읽지 못하고 있는 책부터 읽어야겠다. 그런 책이 너무 많아서 걱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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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프
파울로 코엘료 지음, 오진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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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진 독서 악취미 중에 하나는 베스트셀러에 대한 기피다. 남들이 다 읽는 베스트셀러는 한사코 읽지 않으려고 한다. 그에 대한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래서 파울로 코엘료의 <알레프>가 시중에 나왔을 적에도 단호하게 읽지 않겠노라는 그런 터무니없는 결심을 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뒤늦게 작년에 나온 코엘료의 <브리다>를 읽고 책에 등장하는 마법과 전승에 대한 이야기에 슬슬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십대 시절에 자그마치 정신병원을 세 번씩이나 들락거리고, 좌파 지식인으로 브라질 독재정권의 핍박을 혹독하게 받았다는 파울로 코엘료의 특이한 경력이 눈에 띄었다. 한 때 신비주의와 악마주의(satanism)에 경도되었던 코엘료가 1980년대 중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길을 통해 비로소 어려서부터 꿈꿔 오던 작가로 비상하게 되었노라는 그야말로 판타지 소설에 가까운 성공기는 더욱 매혹적이었다. 순례 후, 전 세계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작가 중의 한 명으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솔직히 <알레프>를 읽기 전에 파울로 코엘료 작품 세계의 시원이 되는 <순례자>를 읽어 보려고 도서관에서 그 책을 빌렸다. 그리고 어느 신문 기사를 통해 알게 된 <11분>도 구했다. 하지만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간 때문에 <알레프>를 읽는 것만도 버거웠다. 다른 작품들도 읽었다면 코엘료가 그의 소설에서 줄기차게 들려주는 마법과 전승에 대한 근원적 이해에 도달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코엘료 문학의 특질을 이루는 정신세계에 대한 희구, 영성, 신비주의 그리고 믿음과 진리를 찾는 인생 여정은 그의 자전적 소설 <알레프>의 핵심이다. <알레프>에 작가로서의 자신의 본 모습이 가장 적나라하게 투영되어 있지 않았나하는 느낌을 받았다. 소설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영적 전승의 테두리 내에서 끊임없이 성장하기를 원하는 59살의 저명한 작가에게 마스터 J.는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일상을 떠나 자신의 왕국을 재정복하라는 충고를 들려준다. 그리고 전생에서 자신이 저지른 비겁한 죄악 때문에 희생된 이들에게 용서를 구하라는 잠언을 남긴다. 주인공 “나”의 선택은 북페어에서 우연히 만난 러시아 편집자들과 독자사인회를 빌미로 한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철도여행이다.

나같이 코엘료를 잘 모르는 독자에게 소설 초반의 불친절함은 생경하게 다가온다. 마법과 전승 그리고 마스터 같이 낯선 낱말의 유희에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이런 단서만으로 어쩌면 이미 작가가 모두 깨달은 신비주의의 본질을 억지로 이해하려는 노력 자체가 난센스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런 고비를 욱여넣고 이 멋진 작가의 순례길에 동행이 된다면 <알레프>에 숨겨진 알쏭달쏭한 신비함은 하나씩 문학적 재미로 치환된다.

코엘료가 시공을 초월해서 과거의 벌어졌던 사건과 장소 그리고 인연을 매개하는 비밀병기이자 소설의 제목으로 삼은 ‘알레프’는 특별한 공간인 동시에 지극히 일상적으로 묘사된다. 황석영 선생이 <낯익은 세상>에서 다뤘던 “일상의 위대함”이라는 주제가 코엘료에게도 공명한 것일까? 작가의 여행에 억지로 동행하게 된 미지의 캐릭터인 힐랄이라는 이름의 아가씨와 수많은 대화를 통해 함께 “알레프”를 체험하고, 묘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면서 현생에 환생하기 전, 삶을 공유했었다는 비밀에 도달한다. 그렇게 비밀의 문이 열리는 순간, 소설 <알레프>의 핵심인 사랑과 용서라는 주제가 독자의 가슴을 뒤흔들기 시작한다.

전생에 미처 다하지 못한 용서의 숙제는 생을 거듭하면서 반복된다. 신비주의자가 시간의 수레바퀴라고 부르는 억겁의 연은 보다 명징하게 다가온다. 책의 어느 곳에서 중세 스페인에서 가장 무시무시했던 종교재판소장 토마스 데 토르케마다의 이름과 마주치자, 힐랄과 작가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얼핏 짐작이 가기 시작했다. 혹시 그 사건의 설한(雪恨) 때문에 두 주인공이 지금의 생에서는 반대로 태어난 건 아닐까 하는 상상까지 될 정도로 코엘료 이야기의 매력에 푹 빠져 버렸다.

한편, 자기희생을 통한 구원이라는 기독교 정신의 전형은 전생의 업(業)을 이생에 풀어야 하는 전래하는 불가의 그것과 충돌한다. 기차 여행을 하다 말고, 기차에서 내려 아이키도 도장에서 통역가 야오와 벌이는 대련 과정에서 보여주는 화(和)의 도(道)는 또 어떠한가. 시베리아 샤먼이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작가가 생각하는 신비주의의 극치가 보이는 것 같다.

열차가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면서 소설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순례자와 함께 한 신비와 마법의 여행은 때로는 즐거움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그리고 외로움이라는 변용으로 다가왔다. 자연스럽게 그 끝에서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질문이 순례길 내내 따라 다녔다. 그래서 종착역의 장미꽃을 건네주는 ‘강물 같은 사랑’은 못내 통속적이다. 작가의 명징한 대답을 고대하던 독자에게 코엘료는 다시 한 번 일상의 위대함으로 도전한다. 모든 것을 이해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저 책을 통해 작가와 동행하고, 참여한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자아의 신화’는 그것으로 충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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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11-16 0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고 싶군요..잘 읽고 갑니다. ^^ 주문넣고 ^^
 
한 권의 책
최성일 지음 / 연암서가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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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다, 이렇게 멋진 책을 남긴 이가 이제는 더 이상 우리와 만날 수가 없다니. 지난 성하(盛夏)에 뇌종양으로 작고한 저널리스트이자 서평가 최성일 선생의 책을 풍경은 가을이지만, 날씨는 따뜻한 봄날에 접하게 됐다. 그가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긴 <한 권의 책>이 서평책이라는 사실에 기대보다 두려움이 앞섰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또 얼마나 많은 책을 사게 될까하는 걱정이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책의 곳곳에서 책을 대하는 저자의 마음가짐을 엿볼 수가 있었다. 그것이 타인의 생각이건 아니면 저자의 생각이건 그건 중요하지 않다. 어느 일본 작가의 말대로 최종 원고가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 텍스트는 저 나름대로의 여행길에 나서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이 리뷰의 제목도 “책을 읽기 전에 손을 씻으라”로 정했다. 아무리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라도 자식에게도 권하지 않았던 고인의 말이 들리는 것 같다는 느낌이다. 최근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책을 읽고 싶어 하지 않는 이에게 책을 권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더더욱 그의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워낙 많은 책을 소개하다 보니 리뷰를 쓰는 지금 솔직히 말해서 저자의 말인지, 아니면 저자가 다른 책에서 인용한 말인지 헷갈리기까지 하다. 어쨌든 날마다 수도 없이 쏟아지는 책의 홍수 속에서 잡서를 읽을 시간이 없다고 말한 이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리고 책을 추천해 달라는 말처럼 실속 없는 말도 없다고 했던가. 어찌 개인의 주관적 체험이 타인에게 고스란히 전달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아무리 감동 깊게 읽은 책이라고 해도, 타인에게는 그저 그런 잡서일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독서의 상대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최성일 작가의 서평은 정말 정갈하다. 그동안 많은 책을 읽고, 리뷰를 써오면서 진짜 좋은 리뷰는 읽는 이로 하여금 해당 리뷰의 책이 아직 그가 만나지 않았다면 독자가 책을 사게 만드는 서평이 최고의 리뷰라고 생각해왔다. 저자는 역시 고수였다. <한 권의 책>을 읽으면서 오래전 군대시절에 읽은 안동림 선생의 <이 한 장의 명반>이 바로 떠올랐다. 한참 클래식에 미쳐 있던 시절, 안 선생의 책을 그야말로 신주단지 모시듯 했던 기억이다. 그 신주는 이 책으로 당분간 대체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책에 씌여 있다고 모두 믿지 말라고 일갈했던 일본 작가 다치바나 다카시의 글로 <한 권의 책>을 시작한다. 짧지만 강렬한 몇몇 문장이 애서가의 심장을 뒤흔든다. 모름지기 책을 살 때 돈을 아끼지 말 것이며, 책을 고르는데 있어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책을 읽으면서 의심을 거두지 말라는 계언이다. 독서가의 실증적 자세에 대한 주문이다. 나는 그의 애서가 리트머스 시험지 중에 어느 정도에 와 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아무래도 그 수많은 책 중에서 먼저 눈길이 가는 건, 그래도 한 번 읽은 책들이었다. 드디어 만화 <십자군 이야기>의 연재를 다시 시작한 김태권 작가 그리고 닉 혼비의 <닉 혼비 런던스타일 책읽기>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책을 읽다가 계속해서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에서 해당 책들이 있는지 여부를 찾게 된다. 열악한 우리나라의 출판사정상, 수년만 지나면 품절, 절판의 운명에 처하게 되는 책이 얼마나 많던가. 아자르 나피시의 <테헤란에서 롤리타를 읽다>도 그런 운명의 책이었다. 저자는 세상의 모든 근본주의는 나쁘다고 선언한다. 시중에서 구할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한 권의 책>은 애서가에게 자성의 기회도 부여한다. 오래 전에 구입했지만 여전히 읽지 못하고 있는 업튼 싱클레어의 <정글> 서평을 보면서 한없이 부끄러워지는 자신을 볼 수가 있었다. 로버트 A. 존슨의 <신화로 읽는 남성성 He> 같은 경우에는 최성일 작가가 아니었다면 평생 존재조차 모를 뻔한 책도 있었다. 항상 서평책을 보면서 후회하지만, 한편으로는 개인적 독서의 지평을 넓혀 준다는 차원에서 환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김태권 작가의 십자군 전쟁에 대한 공정한 시각만큼이나,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책은 바로 오늘 도서관에서 바로 빌려온 타리크 알리의 <석류나무 그늘 아래>와 이거야말로 진짜 문학이라고 다른 서평가(최성각)의 말을 빌어 소개한 <드리나 강의 다리>였다. 급한 마음에 도서관에 가서 빌려 오긴 했는데, 아마 이 두 책은 조만간에 구입하게 될 것 같다.

부족한 리뷰의 마무리를 하며, 다시 한 번 책읽기 전에 손을 씻는다는 말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누구에게나 책을 읽는 백만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우리의 벗으로 평생지기 같은 책을 대하는 최소한의 정갈한 예의의 시작이다. 그렇게 책과 만났으면 좋겠다. 참 좋은 책들을 알게 돼서 <한 권의 책>을 만난 보람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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