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네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
로라 리프먼 지음, 홍현숙 옮김 / 레드박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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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 베네딕트는 소위 잘 나가는 남편 피터, 딸 이소 그리고 아들 앨비와 함께 교외의 삶을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엘리자가 한 통의 편지를 받으면서 베네딕트 가정에 잔잔한 파문이 일기 시작한다. 만병통치약이라고 할 수 있는 오랜 시간이 지나서 엘리자가 잊고 싶어 하던 과거의 끔찍한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나는 네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의 저자 라우라 리프먼은 테스 모너핸 시리즈로 유명한 미국 볼티모어 출신의 작가다. 이 책에서 작가는 1985년 십대 소녀만을 골라 살해한 연쇄 살인마 월터 보먼에게 납치되어 39일간 악몽 같은 고통을 겪다가 구사일생으로 생환한 소녀 엘리자베스 러너의 이야기를 마치 르포 기사처럼 재구성한다. 한 번은 현재 엘리자의 이야기를 그리고 다른 한 번은 과거를 거슬러 올라간다.

마지막 희생자를 폭행하고 끔찍하게 살해한 죄목으로 버지니아 주에서 사형 선고를 대기하던 월터 보먼은 범죄자를 구호하는 사회운동을 하는 바버라 라포투니를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전한다. 잘 나가는 남편을 좇아 참석했던 파티 사진에서 과거를 지우고 살고 있던 엘리자를 월터가 발견한 것이다. 바로 이런 개연성에서 소설은 시작된다.

납치 당시에도 가족을 모두 죽이겠다는 협박 때문에 탈출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어린 엘리자베스는 이 악랄한 시리얼 킬러로부터 도망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런데 월터가 어떻게 알아냈는지 자신에 대해 너무 방대한 것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점증적으로 다가오는 월터의 위협 앞에 마침내 엘리자는 정면으로 맞서기로 결심한다.

소설은 처음부터 한 가지 사실을 감춘다. 범인 월터는 왜 예외적으로 엘리자만을 죽이지 않았던 걸까? 잘난 인물에도 불구하고 이성 관계에서는 젬병이었던 월터는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워나간다. 물론 사회에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방법을 이용해서 말이다. 월터는 프랑스 출신 철학자 자크 데리다를 뺨치는 실력으로 자신의 행위를 변명하고, 정당화한다. 십대소녀 엘리자에게 이런 일탈을 일삼는 월터는 확실히 버거운 상대였다. 라우라 리프먼은 어찌 보면 조금은 장황한 전개를 통해 1985년 여름에 발생한 끔직한 사건의 진실을 한 꺼풀씩 벗겨낸다.

충실한 남편 피터에게도 엘리자는 자신이 겪은 악몽의 전부를 알려 주지 않는다. 그녀가 남편 피터에게 말한 대로 23년이라는 세월 뒤에 다시 비극을 떠올려 보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알 수가 없단다. 선택적 기억상실이라는 표현이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네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에는 많은 가치들이 서로 충돌하고 있다. 연쇄 살인마로부터 가정과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지키려는 엘리자의 노력, 비록 자신들의 딸이 월터에게 피해를 입었지만 원칙적으로는 사형 제도에 반대하는 러너 부부의 대의, 피해자에게는 괴물로 낙인찍힌 월터를 구호하는 바버라 그리고 ‘눈에는 눈’식의 복수를 원하는 피해자의 부모의 호소가 복잡하게 마주한다. 모두를 만족시킬 해결책이란 과연 존재하는 걸까?

1985년이란 시간적 배경을 구체화하는 팝차트를 석권했던 팝가수 마돈나와 왬의 히트곡 제목을 소설의 각장의 부제로 올리는 라우라 리프먼의 센스가 돋보였다. 꾸준하게 등장하는 새로운 캐릭터는 소설의 긴장감을 유지하는 장치로 멋지게 작용했다. 간만에 서스펜스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문학의 ‘저글러’를 만나 즐거운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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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에서 빈둥거리다 길을 찾다 - 명문가 고택 편 이용재의 궁극의 문화기행 시리즈 3
이용재.이화영 지음 / 도미노북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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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가 쓴 글을 읽었다. 글쓴이 이용재 씨는 건축학 전공자로 건축평론가로 활동하며, 사업을 말아 먹고 지금은 택시 운전을 생업으로 삼았다고 했던가. 조선시대 양반의 후예임을 자부하는 글쓴이는 전국 곳곳에 널려 있는 우리 선조의 숨결이 배어 있는 고택으로 독자를 인도한다. 아, 먼저 이용재 씨의 글 솜씨는 다소 파격적이다. 그러니 어느 정도는 유념할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로 색다른 그의 글이 마음에 들었지만, 모두에게 적용되는 건 아니니까.

아주 오래전 답사로 찾았던 강릉 선교장이 1번 타자로 등장한다. 너무 오래 전의 추억이라 기억조차 희미한 선교장의 자태를 글쓴이의 사진과 글로 되새김질하기 시작한다. 어느 고택이던지 스토리텔링이 있기 마련이다. 선교장의 내력에는 태종의 아들로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양보(?)한 양녕과 효령대군의 이야기가 배어 있다.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효령대군 자손이 거처를 옮긴 곳이라고 하던가. 왕의 권위에 버금가는 99칸 위용을 자랑하는 선교장이다. 아마 그것도 왕의 후손이니 가능했던 게 아닐까?

다음은 연경당이다. 사실 연경당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 궁금한 마음에 인터넷 검색을 다해봤다. 바로 지척인 서울 창덕궁에 위치해 있다고 한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격렬해지는 당파 싸움의 중심에 서 있던 정조의 아들 순조시대 이야기다. 정조의 죽음으로 정조의 총애를 받던 다산 선생을 비롯한 개혁파, 천주교도들에 보수 세력의 대한 대박해 그리고 다시 순조의 친정이 이뤄지면서 엎어지는 대반전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스토리텔링이 끊이지 않는다. 역시 단순하게 건물 이야기뿐이 아니라 그런 이야깃거리가 있어야 건물도 새롭게 다시 보이는 모양이다. 글을 보면서 주말에 시간을 내서 창덕궁 연경당 투어에 나설까 하는 생각도 잠깐 해본다.

요즘 한창 인기몰이 중인 드라마 <공주의 남자>에도 나오는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으로 된서리를 맞은 사육신 성삼문의 후손으로 살아남은 외손주 엄찬 고택에 대한 일화도 빠지지 않는다. 절개와 지조의 상징으로 영조 대에 이르러 신원을 회복한 성삼문과 변절의 상징으로 변하기 쉬운 숙주나물의 기원이 되었다나 어쨌다나 하는 신숙주의 세계관에 대해 글쓴이는 조용조용하게 묻는다. 다만 그 선택은 각자의 몫이란다.

이 책에서 내가 가장 박장대소를 하며 웃었던 대목 하나를 소개하고 싶다. 바로 성주 백세각 편에 나오는 우암 송시열에 관한 이야기다. 송희규 선생의 후손으로 남인이라는 사실이라는 자처하는 종손의 말이 한 번 걸작이다. 우암을 싫어하지 않느냐는 글쓴이의 질문에 대차게 이렇게 받아친다. “안동에서는 똥개 이름이 전부 시열”이라고(115쪽).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노론의 영수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니 그야말로 속이 다 시원했다.

국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곳곳의 고택을 지키는 사대부 가문의 후손들이 맡고 있다는 작금의 세태가 안쓰럽기 짝이 없다. 스러져 가는 고택을 중건하고 새롭게 꾸민다는 짓이 오히려 조상의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이라는 유가적 인문 교양의 미덕을 망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안타깝다.

조정의 권력투쟁보다 차라리 낙향해서 후세를 가르치는 것이야말로 군자의 도락 중에 으뜸이라는 말도 피부에 와 닿는다. 그래서 조선의 선비들은 쉴 틈이 없었다. 요즘 같은 천민 자본주의식 자본의 축적이 아니라 정도를 유지하면서 가세를 일으켜 세우고, 진정한 의미의 상생을 구현한 사대부들의 의기는 정말 본받아야할 것이다.

지난달에 휴가로 전주를 다녀왔는데 아쉽게도 <학인당>에는 미처 가보지 못했다. 슬로시티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한옥마을답게 전주에서 보낸 시간은 정말 거북이 걸음처럼 느리게 가는 것 같았다. 무얼 특별하게 하지 않아도, 그렇게 느릿하게 흘러가는 시간을 만끽할 수 있는 즐거움이야말로 우리 조상이 우리에게 물려준 선물이 아닐까 싶다. 오래전에 무턱대고 다니던 답사의 추억이 다시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이번 가을에는 고택을 좀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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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쿠스 전쟁 - 야만과 문명이 맞선 인류 최초의 게릴라전
배리 스트라우스 지음, 최파일 옮김 / 글항아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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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 조금씩 읽고 있던 배리 스트라우스 교수의 <스파르타쿠스 전쟁>을 다 읽었다. 이 작품으로 저자는 <트로이 전쟁>, <살라미스 해전>으로 이어지는 고전 3부작을 완성했다고 하는데, 다른 작품도 곧 읽을 계획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는 커크 더글러스와 32세의 감독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그리고 최근에는 동명의 미드로 잘 알려진 노예검투사 출신의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소재로 다룬 역사서다. 다만, 원체 오래전의 사건이다 보니 사료(史料)의 절대적 부족으로 저자는 추측과 짐작을 적절하게 섞은 스토리텔링 전략을 구사한다.

스트라우스 교수는 지금까지 남아 있는 플루타르코스와 아피아누스의 기록을 통해 그리스 트라키아 출신의 이 노예검투사를 재조명한다. 저자는 스파르타쿠스가 한 때 로마군단의 보조병으로 군역을 이행한 피정복민이었을 거라고 추정한다. 그래서 그는 로마에 반기를 들었으면서도, 로마군의 장단점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로마군이 장기로 삼는 평원에서의 회전 대신 기습과 매복 같은 게릴라전으로 정규 로마군을 괴롭혔을 거라고 썼다. 로마인의 관용(클레멘티아)은 세계 제국을 건설하는데 있어 큰 도움이 되었을 진 모르겠지만, 로마 세계를 잘 아는 이들의 내부 반란에는 상대적으로 취약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닌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우구스투스의 게르마니아 정복을 토이토부르크에서 좌절시킨 25세의 아르미니우스 역시 로마군 출신이었다.

빵과 서커스(bread & circus)로 대변되는 로마 공화정 말기, 아레나에서 피와 살이 튀는 검투사 간의 목숨을 건 결투에 로마인들은 열광했다. 일찍이 무장한 검투사의 위험을 간파한 로마인들은 검투사들을 로마 밖에서 양성했다. 로마 시민 렌툴루스 바티아는 캄파니아 지방의 카푸아에서 시합에 소용될 검투사를 길렀는데, 바로 여기서 반란의 싹이 텄다. 경기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의 조롱거리가 되느니 차라리 영예로운 죽음을 택한 스파르타쿠스의 전설이 시작됐다. 배리 스트라우스는 바로 이 전설적 영웅을 관통하는 영혼의 위대함에 방점을 찍는다.

저자는 변변치 않은 무기로 봉기한 검투사들의 지도자 스파르타쿠스와 함께한 것으로 알려진 이름 모를 트라키아 여인의 존재에 주목한다. 주신(酒神) 디오니소스를 숭배하던 이 여인은 예언이라는 형식을 통해 반란에 어떤 신성성을 부여했다. 켈트족과 게르만족 그리고 트라키아족으로 구성된 다국 반란 집단의 ‘족장’ 스파르타쿠스는 트라키아 여인의 예언대로 해방자로 전면에 나서게 된다. 한편, 기원전 73년 로마는 공화국의 동쪽과 서쪽에서 양면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로마 정예군은 모두 동쪽에서 벌어진 미트리다테스 전쟁과 에스파냐의 세르토리우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해 있었고, 본국은 치안 부재의 상태였다. 이런 시기에 로마는 남부를 휩쓴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진압할 여력이 없었다. 그 결과, 급조한 로마 군단은 반란군에게 연전연패한다. 이런 스파르타쿠스가 이룩한 초기의 성공이 바로 그의 파멸의 전주곡이었다는 참 역설적이다.

뛰어난 현실감각을 지닌 전략가였던 스파르타쿠스는 비록 초반의 승리로 반란군이 승기를 잡았지만, 로마 정규군을 상대로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 고향 트라키아로 탈출하려는 대담한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동과 서 양쪽 전선에 방대한 병력을 투입한 로마가 노예 반란에 대처할 새로운 대규모 병력을 모집할 수 없으리라는 판단도 하지 않았을까? 그런 점에서 스파르타쿠스의 이탈리아 탈출 작전은 매우 성공 확률이 높은 도박이었다. 하지만, 이탈리아에서 나고 자란 많은 수의 반란군은 그들이 성공할 수 있는 도박 대신 손쉬운 약탈에 더 매력을 느꼈다. 역사에서 가정이란 정말 무의미하다고 하지만, 스파르타쿠스가 알프스 돌파작전에 성공했다면 기원전 216년 한니발의 칸나이 전투(Battle of Cannae)만큼이나 로마에게 치욕적인 사건이었으리라.

조직과 규율로 유명한 로마군에게 비정규 게릴라전의 위력을 유감없이 과시한 스파르타쿠스 앞에 마침내 유력한 맞수가 등장한다. 우리에게는 공화정 말기 삼두정치의 일원으로 잘 알려진 크라수스가 바로 주인공이다.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특별 명령권을 부여받은 사령관 크라수스는 로마군에서 그동안 사문화되었던 ‘데키마티오’라는 혹독한 처벌 방식을 부활시켜 군의 기강을 다시 잡는다. 한편, 스파르타쿠스는 킬리키아의 해적과 제휴해서 시칠리아 원정을 계획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그들의 배신으로 어쩔 수 없이 크라수스가 이끄는 진압군과 숙명의 대결을 펼치게 된다.

결국 스파르타쿠스는 실라루스 전투에서 결국 장렬한 최후를 마친다. 스트라우스 교수는 당대의 폼페이우스나 카이사르와는 비교할 수가 없지만, 단순하게 로마 최고의 재력가로만 알려진 크라수스의 지휘관으로서의 역량을 냉철하게 재평가한다. 로마군의 장단점을 잘 알고 있던 스파르타쿠스가 크라수스가 지휘하는 로마군과의 정면 대결을 끝까지 피하면서 알프스 돌파작전에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로마로 귀환한 폼페이우스와 루쿨루스의 끈질긴 추격을 따돌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고대시대에 인간의 자유라는 고귀한 가치를 위해 끝까지 싸운 영웅 스파르타쿠스의 실패한 반란 이야기는 현대에도 여전히 매력적인 스토리텔링의 전범이다. 그래서 샘 레이미는 섹스와 폭력으로 점철된 새로운 스타일의 드라마 <스파르타쿠스>로 시청자를 유혹하고 있다. 드라마나 영화가 스파르타쿠스 전설 속에 담긴 거친 폭력 코드라는 오락거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스트라우스 교수는 노련한 역사가답게 노예검투사들의 반란이 발생한 시대적 배경, 문명과 야만의 충돌이라는 시점에서 노예 반란 전쟁의 진행과정 그리고 비로소 스파르타쿠스 개인에 대한 심층적 분석이라는 요소를 균형감 있게 다룬다. 저자는 실존인물인 스파르타쿠스의 행적을 밝혀줄 역사 기록이 부족하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이천년 전에 자유와 복수를 외치며 로마인들의 압제에 대항해서 분연히 일어선 트라키아 출신 노예검투사의 투쟁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오고, 사실을 뛰어넘어 이제는 신화가 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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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소도시 여행 - 올리브 빛 작은 마을을 걷다
백상현 글 사진 / 시공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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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참 좋아졌다. 이제는 세계 어디라도 가 보고 싶은 곳이 있다면, 블로그나 구글맵 같은 인터넷 서비스를 이용해 맛보기를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검색창에 보고 싶은 곳의 이름만 탁탁 처넣으면, 바로 새로운 별세계가 열린다. 어쩔 땐, 직접 가서 봐도 이 정도는 아니겠지 싶을 정도로 멋진 사진들이 우수수 쏟아진다. 아무리 그래도 발걸음으로 직접 한 여행에 비할 수가 있을까? 백상현 작가가 이탈리아 32개의 크고 작은 도시를 돌며 남긴 기록인 <이탈리아 소도시 여행>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

32개 도시 중에서 가장 먼저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도시는 바로 포시타노였다. 미국 출신의 작가 존 스타인벡의 여행 에세이로 그 유명세를 탔다는 지중해 티레니아 바다가 바로 정면에 보이는 포시타노는 그야말로 환상 그 자체였다. 바닷가의 기암괴석이 품은 어느 동화에나 나올 법하게 아기자기하고 원색적인 가옥의 행렬에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책에 소개된 것만으로는 부족해 블로그를 통해 더 많은 사진을 보고서, 소렌토와 아말피 어디쯤에 있다는 이 환상의 마을은 가히 죽기 전에 꼭 가봐야할 곳이라는 말이 절절하게 다가왔다. 스타인벡이 1953년에 하퍼스 바자에 기고했다는 <포시타노> 에세이는 구해놨는데 영어라 언제 읽을지 모르겠다.

<소렌토와 아말피> 편에서는 제대로 구경하지는 못했지만 카프리 섬을 구경하고 나폴리로 돌아가는 길에 들른 아말피와 소렌토의 추억이 오롯하게 떠올랐다. 소렌토의 사진을 보는 순간 왜 생뚱맞게도 이탈리언 식당인 <소렌토>가 떠오른 걸까. 이제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탈리아식 스파게티, 아니 파스타 식당 때문인가 보다.

백상현 씨의 시칠리아 경험은 나도 로마에서 똑같이 경험했다. 신부님으로 이탈리아에서 유학하던 사촌형이 기거하던 수도원에 가서 점심식사를 한 적이 있는데,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수도사님 중에 베네치아에서 오신 분에게 이탈리아 사람이냐고 묻자 대번에 자기는 베네토 사람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던 기억이 난다. 고작 100여년 남짓한 통일 시대에 사는 이들에게 자신이 나고 자란 지역이야말로 자부심의 상징이 아니었을까 뭐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볼거리만큼 중요한 여행의 빠질 수 없는 즐거움은 바로 식도락이다. 그래서 움브리아와 토스카나 지방을 여행하면서 작가가 먹고 마신 음식의 향연을 들을 적에는 정말 마음만이라도 당장 이탈리아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티라미수가 페루자에서 후식으로 등장했을 때, 그리고 피렌체식 비프 스테이크인 피오렌티나를 조리하는 방법을 정말 자세하게 설명할 때는 군침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솔직히 말해서 너무 부러웠다.

시에나에서는 캄포 광장(piazza)에 아무렇게나 드러누워 망중한을 즐기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래, 바로 이게 삶이야’라는 생각도 들었다. 미국의 자유로움과는 또다른 양식이라고나 할까. 역시 디저트에 관심이 많아서인지 어쨌는지 계속해서 디저트에 눈길이 간다. 그래서 시에나가 자랑하는 천상의 맛을 가진 판포르테 이야기를 읽을 적에는 마치 그 맛을 음미하기라도 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볼로냐 특산 살라미를 맛볼 수 있는 셀프 리스토란테 <탐부리니>에도 꼭 한 번 가보고 싶다.

책을 읽으면서 한 가지 궁금한 점이 들었다. 아니 어떻게 이 책의 저자는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이런 멋진 환대를 받는 걸까? 자신을 한낱 배낭여행자로 소개한 실체와는 다른 무엇이 있는 게 아닐까?하는 의문이 끊이지 않는다. 백상현 씨는 이렇게 많은 이탈리아 도시들을 순전하게 대중 교통수단만을 이용해서 여행했을까? 쉽지 않은 일일텐데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린 걸까? 궁금하다 궁금해.

나의 이탈리아 여행과 비교해 보면, 백상현 씨의 이탈리아는 정말 하나같이 모든 곳이 아름답고, 흠잡을 데 없는 그런 낙원(paradiso)로 들린다. 그런데 실상이 과연 그럴까? 소매치기를 당하거나 혹은 관광지에서 바가지를 쓰거나 그런 체험은 하나도 없다. 너무 완벽해도 이상하다. 홀로 하는 여행이란 모름지기 교통편과 숙소를 모두 혼자서 정해야 하는 나그네의 고행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긴 다년 간의 여행 경험으로 그 모든 걸 셋팅하고 여행을 했다면 할 말이 없겠지만.

어쨌든 자신의 눈과 마주하는 모든 것을 허투루 놓치지 않고 예리하게 기록한 작가 덕분에 우리는 이렇게 이탈리아까지 직접 가는 대신 방안에서 편안하게 대리 이탈리아 여행을 했다. 이런 간접 체험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직접 문지방을 걷어차고 떠날지라. 항상 그렇지만 말은 쉽다. 이렇게 멋진 이탈리아 여행을 한 작가가 마냥 부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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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마처럼 비웃는 것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5
미쓰다 신조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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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1년 만에 다시 미쓰다 신조의 소설과 재회했다. 전작 <잘린 머리처럼 불길한 것>은 비채의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로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된 미쓰다 신조의 작품이었는데, 산속을 밀실로 한 트릭과 지벌, 연쇄살인 그리고 산마 같은 기담을 통해 간토 지방에 벌어진 미스터리였다. <산마처럼 비웃는 것>에서도 전작에서의 스타일이 투영된 듯한 기시감이 소설의 곳곳에서 느껴졌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작품을 우려먹는다는 악평을 들을 수도, 또 다른 편으로는 꾸준한 성과라는 호평을 들을 수도 있는 양날의 칼이 아닌가 싶다.

전작에서 쿠비나시라는 산마를 등장시켰던 미쓰다 신조는 도쿄 인근의 울창한 산림으로 유명한 오쿠타마의 고도 고지로 독자를 안내한다. 초반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하도 출신으로 도쿄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고키 노부요시다. 고키 가의 넷째 아들로 형들과는 달리 병약했던 그는 가문 전래의 성인 참배를 드리기 위해 고향을 찾았다가 기이한 체험을 하게 된다. 쉽게 진행될 줄 알았던 성인식 과정에서 길을 잃고, 부름산이라는 흉산에 들었다가 산마/산녀를 만난다. 게다가 간신히 찾은 외딴집에서는 정말 해괴하기 짝이 없는 일가족 증발 사건의 중심에 놓인다. 그리고 노부요시는 자신의 이런 기이한 체험을 원고에 기록한다. 아, 이 철저한 기록정신이란!

고키 노부요시의 이 원고가 기이한 이야기라면 사족을 쓰지 못하는 우리의 진짜 주인공이자 탐정소설가 도조 겐야의 손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이야기는 굴러가기 시작한다. 그렇지 않아도 일전에 기이한 사건을 해결한 공로로 자신의 단편소설을 발표하는 괴상사를 통해 사건 의뢰가 끊이지 않는다고 했던가. 아마추어 민완 탐정으로 손색이 없을 정도로 빼어난 솜씨를 자랑하는 도조 겐야는 아버지와 형제에게 인정받지 못한 자신의 페르소나 같은 노부요시의 원고와 산마라는 마물의 매력에 그만 이 엄청난 사건에 발을 들여 놓는다.

자, 드디어 구마도에 모습을 드러낸 도조 겐야는 면식이 있던 가지토리 가의 당주 리키히라의 호의로 그의 집에 베이스캠프를 차린다. 항간에 떠도는 지장보살의 동요를 냉철하게 분석한 도조 겐야는 구마도와 부름산에 거쳐 모종의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고 판단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소설의 작가가 개입해서 독자를 전형적인 방법을 전개하는데, 바로 곧이어 살인사건이 일어날 거라는 예고를 날린다. 도대체 노부요시가 본 것은 무엇일까?

미쓰다 신조의 소설 <산마처럼 비웃는 것>은 불가사의한 사건에 대한 합리적 해석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불가사의한 사건의 재구성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 교고쿠 나쓰히코의 <항설백물어> 시리즈에서와 마찬가지로 미쓰다 신조는 자신의 대리인 도조 겐야를 통해 이 세상에 불가사의한 일은 없노라고 주장한다. 특히 그가 좋아하는 공간인 울창한 산속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사건에 대한 논리 정연한 설명에는 정말 당해낼 재간이 없다. 아니 어쩌면 ‘불가사의’가 충분히 침투할 수 있는 산속이라는 공간과 소설탐정가의 논리적 재구성이야말로 그가 창조한 산속 밀실 트릭을 더 흥미롭게 만드는 요소들이다.

우리가 현재 사는 헤이세이 시대에 한참 전의 쇼와 시대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는 것도 눈여겨볼 점이다. 한국전쟁이 시작된 쇼와 시대에도 CCTV 같은 감시카메라와 휴대전화가 있었다면, 산림이 울창한 시골마을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의 단초를 충분히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어느 시대에 어떤 이야기를 하느냐도 그래서 중요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해결사 도조 겐야가 앞으로 맞닥뜨리게 될 진정한 기이와의 대치가 기대된다. 그의 놀라운 추리력으로 도대체 설명가능하지 않은 기이가 존재할까?

추리물을 리뷰할 때마다 느끼는 애로사항이지만, 스포일링을 피하면서 앞으로 이 책을 읽을 미래의 독자에게 호기심을 유발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다. 나름 스포일러가 되지 않게 조심했지만 입이 간질간질해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 끝까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복잡한 스토리의 얼개를 뒤쫓는 독자에게 마지막으로 이 말 하나만큼은 꼭 해주고 싶다. 책의 제목에 들어 있는 “비웃음”을 주목하라.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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