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나의 남자들! 문학동네 청소년 10
이현 지음, 이지선 북디자이너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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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문학은 읽기 편하고, 부담이 없어서 즐겨 읽는다. 이제 더는 청소년이 아니기에 그 시절의 고민을 들을 때면 안드로메다만큼의 거리감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하지만 시절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성장 과정의 고민의 본질은 여전하다는 동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어느 때고, 누구나 나름의 고민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니까.

<오, 나의 남자들!>의 주인공 나금영은 노래방집 딸내미로 방년 17세의 발랄한 소녀다. 인문계고 대신 조리사의 꿈을 안고, 전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그리고 학교의 떡 만들기 동아리인 “떡실신”에서 평생을 같이할 친구들을 만난다. 백현지, 은마루 그리고 최강태진. 금영이의 종횡무진 고교 시절을 이야기를 들으며, 야자로 하세월을 보내던 고딩 시절이 떠올랐다. 내 학창시절은 금영의 그것만큼 앗싸라한 맛이 없었다. 부럽다.

노래방을 운영하는 집안내력으로 한글과 수를 모두 노래방 기계를 통해 깨친 금영의 가정사는 복잡하기 짝이 없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쿠데타를 일으켜 헌정질서를 파괴한 전두환에게 이의를 제기했다가 군복을 벗었고, 그녀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소원대로 육사에 입학하려 했으나 신체적 조건의 결함으로 역시 실패했다. 그래서 금영의 오빠 금호에게 육사 입학이라는 집안의 갈망이 집중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을까. 자유로운 금영에 비해 부모님 말씀에 순종하고, 내신 1등급을 자랑하는 금호는 범생이의 전형으로 그려진다.

한편, 아직 사랑보다는 우정을 편애하는 금영에게 빠진 남자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같은 학교에서 장학생으로 뛰어난 성적을 자랑하는 완오빠다. 금영과의 달달한 로맨스를 꿈꿔 보지만 그녀 스타일이 아니란다. 그래서 모질게 내치지만, 완오빠는 바다와 같이 넓은 이해심으로 그녀를 거두려고 한다. 물론, 금영 입장에서 미치고 팔짝 뛸 일이다. 동아리 “떡실신”을 배경으로 그려지는 선생님의 게이 소동, 그리고 절친 현지의 파란만장한 과거 등 책장을 넘기는 손길을 분주하게 만드는 이야깃거리가 떨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아버지와 어머니 부모세대와의 갈등 그리고 그들이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사회에서 벌이는 이전투구에 이르기까지 소재의 스펙트럼은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다.

물론 청소년 문학에서 빠질 수 없는 그네들의 일탈도 들어 있다. 지난번 어느 책모임에서 그런 선을 과감하게 돌파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주장을 들었는데, 역시 이제는 꼰대가 되어 버려서인지 아무래도 그건 무리라는 생각이다. <오, 나의 남자들!>의 이현 작가는 그런 파격적 서사는 기술적으로 슬쩍 빗겨 나가는 운영의 묘미를 보여준다. 그 부분에서 안도하는 걸 보면 역시나...

솔직히 금영이가 반한 강동원에 대해 잘 모른다. 아니 관심이 없다는 표현이 맞겠지. 그의 이기적 외모를 찬양하고 싶은 건 금영이 아니라 작가가 아닐까 하는 미필적 고의성 심리작용이 의심된다. 이럴 때, 노래방을 즐긴다면 금영처럼 숫자로 대신 표현했을 텐데 아쉽다. 만약 실제 상황에서도 17살 금영처럼 주어진 모든 상황을 노래방 선곡을 의미하는 숫자로 치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이 책을 읽는 동안 들었다.

여전히 입시라는 관문을 넘어야 하는 엄연한 현실이 버티고 있지만, 예전처럼 대학에 가는 것만이 전부다라는 식의 도식이 사라지고 있다는 현상이 고무적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물론 쉽지 않겠지만. 대학에 가지 않고서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다면 아마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그 하고 싶은 일이 밥벌이의 수단으로 전락하는 순간, 또 다른 이야기가 되겠지만. 워워, 너무 현실적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청소년 문학에서 어느 정도 사실을 왜곡하는 판타지의 개입은 불가피한 걸까? 적당한 긍정의 힘은 용인해야 할까 보다.

푹 쉬면서 그동안에 쌓인 피로를 날려 버리고 충전하는 기회가 되었던 이번 연휴의 대미를 <오, 나의 남자들!>로 장식할 수 있어서 유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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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 관한 짧은 이야기
토미 바이어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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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인터넷 기사에서 한국의 이십대 청년들의 탈출 통로가 고시와 로또라는 말에 당혹스러운 기분을 느꼈던 적이 있다. 그런데 사실 그 통로 중의 하나인 로또에 대한 환상은 그들뿐만 아니라 경제관념을 가진 보통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한편으로는 뜨끔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때 내 지갑 속엔 주말에 당첨확인을 위해 고이 접어놓은 로또가 들어 있었으니 말이다.

독일 출신의 작가 토미 바이어의 <행복에 관한 짧은 이야기>의 표지에는 고양이 일러스트와 모두 8개의 동그라미에 들어 있는 숫자가 등장한다. 이거 애완동물에 관한 소설인가? 아니다. 프리랜서 카탈로그 제작자로 의사 아내에게 얹혀사는 남자 로비 알만의 로또 당첨에 관한 이야기다. 말이 좋아 프리랜서지, 로비는 사실 백수다. 그나저나 ‘로또 당첨’이라는 표현이 바로 뇌세포 속의 시냅스를 자극한다. 이거 재밌겠는걸.

그런데 문제는 이 로비라는 사내가 보통 사람보다 못한 삶을 산다는 점이다. 아마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사는 이라면 또 다른 이야기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하긴 소설의 주인공이 너무 평범하면 안 되겠지. 불행(?)하게도 로비가 죽도록 사랑해 마지않는 베스페(진짜 이름 레기나의 애칭이란다)는 개인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다. 어, 이 남자 셔터맨인가? 부럽네 부러워. 그렇게 잘난 아내에다가 로또까지 맞았으니 더 바랄 게 없겠구먼.

요렇게 이야기가 되면 소설 구성의 맥이 빠지겠지? 로비가 로또에 당첨된 순간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아니, 어쩌면 레기나와의 관계는 이미 그전부터 언제 터지기만을 기다리던 시한폭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연인 사이의 폭발은 어느 특정한 사건의 발생 때문이 아니라 그동안 누적된 불만 때문이라고 하니까. 이들 역시 예외는 아니다. 이제 그들의 삶을 옥죄어 온 모든 경제적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순간에 로비는 비참한 결별의 순간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물론 모든 것은 타이밍의 문제이고, 그놈의 말이 화근이었다.

작가 토미 바이어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어떻게 로비가 레기나를 만나게 되었으며, 그녀가 원래 있었던 애인 대신 자신을 선택한 것이야말로 자신 생애 있어서 최대의 행운이었다고 조용한 회상조로 고백한다. 아, 그럼 로또는? 그녀와 듣기만 해도 사랑이 퐁퐁 솟을 것만 같은 남프랑스의 따사로운 햇볕 속에서 아무것도 가지지 않아도 세상을 모두 얻었던 시절에 대한 로비의 절절한 사연이 이어진다.

다시 현실로 돌아오자. 620만 유로, 계산기가 바쁘게 돌아간다. 지난 금요일자 환율로 계산해 보니 자그마치 우리 돈으로 95억에 달하는 거액이다. 그중에 1/10만 있어도 한평생 남부럽지 않게 살 재산이 생긴 로비는 사랑하는 아내와의 결별이라는 위기 속에서도 보통의 사람들처럼 그 돈을 어떻게 쓸까 하는 고민을 빠뜨리지 않는다. 거리의 걸인들에게 10유로짜리 지폐를 뿌리고, 돈이 없어서 곤경에 빠진 사람을 도우며, 그동안 사고 싶었지만, 경제적 곤궁 때문에 미처 사지 못했던 첨단 음악 장비며 음반, 아이팟을 사는데 흥청망청이다. 아, 물론 때깔 좋은 우주선 같은 BMW도 목록에서 빠지지 않는다.

이렇게 물 쓰듯 돈을 쓰면서도 한편으론 갑자기 졸부가 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점잖은 척하는 쁘띠부르주아 속물근성을 내비치기도 한다. 자신이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달라는 말로 그들을 시험하는 장면에서는 정말 기가 막혔다. 연금생활자로 인색을 모토로 사는 아버지를 찾아가 보려고도 하지만, 보나마나 핀잔이나 받을 게 뻔하다는 생각이 들자 발길을 돌린다. 물론 곧바로 나중에 후회하게 되지만. 자신과 함께 로또 당첨의 영예를 안은 전 동료 에키 에게는 축하보다는 골탕을 먹이기 위해 재산분할 신청을 하지 않은 에키의 아내 클라우디아에게 이 놀라운 사실을 알리는 기민함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모든 일은 사랑하는 레기나와의 파탄으로 치닫는 관계에 비하면 부수적일 뿐이다. 예정된 파경을 두려워하듯, 로비와 레기나는 전화보다는 문자수신이라는 방식으로 상대방의 의중을 타진하고, 자신의 주장을 전달한다. 이렇게 전화 혹은 직접 대면 대신 이런 간접 전달의 방식이 회복 불능의 단계로 접어든 로비-레기나 관계를 상징한다는 것을 독자는 깨닫게 된다. 거의 도달했다고 믿은 낙원에서 강제 추방된 느낌이라고나 할까. 역설적이게도 상상을 초월하는 돈이 깨진 관계의 만병통치약이 아니라는 사실 앞에 로비는 망연자실하다.

카탈로그 제작 의뢰로 나선 로비의 북이탈리아 여행은 레기나를 잃어버린 자책과 반성, 그리고 자아탐색을 위한 로드무비 촬영이다. 로비는 자신이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뭘 봐도, 뭘 먹어도 온전하지 않고 즐겁지 않다는 차가운 현실을 깨닫는다. 우주선 같은 BMW 속에서 레기나의 미친 존재감은 더욱 황량하게 다가온다. B.C.와 A.D.처럼 레기나와 함께 있을 때와 그녀의 존재를 상실한 뒤의 차이는 이루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다. 그래서 낙원에서의 추방은 더 괴로운 법이다.

<행복에 관한 짧은 이야기>의 본질은 역설적이게도 엄청난 금액의 로또 당첨자를 덮친 불행에 대한 서사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돈이 생겨서 그동안 사고 싶었지만 살 수 없었던 물건들을 사대고, 값비싼 와인을 물 마시듯 마시지만 틀어져 버린 사랑의 갈증은 깊어만 갈 뿐이다. 간단한 진리지만 그런 물적 소비욕구의 해소가 심리적 행복을 담보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로비가 로또에 당첨되지 않았더라면, 레기나와 계속해서 행복했을까? 그것도 아닌 것 같다. 로또에 당첨되기 전에 이미 그들의 관계는 부서졌으니까. 레기나는 그렇게 로비의 곁을 떠나 버리고, 그저 자신을 위로해줄 고양이 한 마리만 남았을 뿐.

지난주에 샀던 로또는 휴짓조각이 됐다. 어쩌면 로비 같이 엄청난 행운을 가져다주었을지도 모를 작은 종잇조각의 행복한 유효기간은 달랑 일주일이었다. 단돈 오천 원으로 그 정도의 행복을 살 수 있다면 그 가치는 괜찮은 것 같다. 10만 원 이상은 당첨되어 본 적이 없으니 알 수가 없다. 오늘 일주일치의 행복을 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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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왕을 모셨지
보흐밀 흐라발 지음, 김경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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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누군가에게 추천을 받았는데 그동안 인연이 안돼서 못 읽고 있다가 어제서야 읽게 됐다. 헌책방에 들러서 서가에 꽂혀 있는 녀석을 보고는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바로 집어 들었다. 체코 출신의 작가 보후밀 흐라발의 <영국 왕을 모셨지>, 제목부터 호감이 간다. 2차 세계대전이라는 시대적 배경부터 시작해서 주인공 디테라는 캐릭터 다 마음에 든다.

우리의 주인공 디테는 15세 소년이다. 체코의 프라하 호텔에서 수습 웨이터로 사회에 첫발을 디딘 디테는 인격이 아니라 돈이 모든 것을 말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정수를 목격한다. 천국 같은 라이스키 창녀촌에 출입하기 위해 디테는 어렵게 핫도그를 팔고, 손님들이 건네주는 팁을 받아 돈을 마련한다. 이거 어린 녀석이 이거! 한편, 디테는 부자들의 허위와 위선이 거래되는 호텔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듣지 말라는 교육을 받는다. 피를 튀기는 집시들의 난동이 호텔에서 벌어져도 방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안정을 추구하는 호텔에서의 삶에 디테는 매료된다. 이 책이 쓰인 1970년대 초반 공산주의 체코의 시대상을 반영하듯, 격동의 프라하의 봄을 보낸 이들에게 보내는 오마주로 읽힌다.

라이스키 출입이 빈번해지면서 이 꼬마는 독창적인 아가씨를 꼬시는 법까지 개발해낸다. 호텔 생활을 통해 배운 직관과 관찰이 유용하게 쓰인다. 세일즈맨으로부터 부정직한 방법으로 돈을 버는 것까지 통달하지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직장을 옮기게 된다. 호텔이 부자들의 욕망 배출구라는 점은 첫 직장에서 이미 알았지만, 전직하면서 일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행동도 돈만 있으면 뭐든지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디테.

디테는 자신이 일하게 된 세 번째 호텔 파리에서 비로소 임자를 만나게 된다. 바로 영국 왕을 모셨다는 서비스의 달인 스크르지바네크 지배인을 만나면서, 디테는 본격적인 서비스에 눈을 뜨게 된다. 그렇다, 강호에는 언제나 고수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제까지 수습 기간이었다면 영국 왕을 모신 지배인은 역시 범인과 다른 아우라를 내보인다. 겉모습만으로도 손님이 어떤 음식을 원하고, 어디 출신인지를 단박에 파악해내는 탁월한 능력에 어린 디테는 번번이 내기에 지면서도 그의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디테에게도 기회가 왔다. 아비시나아 황제를 봉사하란다!. 자존심 강한 호텔 주방장을 몰아낸 황제의 요리사들이 동물원에서 영양을 사들이고, 산 낙타를 호텔 정원에서 도살해서 요리하는 장면에 대한 묘사는 가히 이 소설의 압권이다. 진짜 소설에나 등장하지 싶을 정도로 유쾌한 이야기다. 자, 이제 어린 꼬마 디테도 왕년에 황제를 모셨었지라는 말을 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전반전을 꼬마 디테가 성장해가는 멋진 호텔리어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그렸다면, 후반전에서는 보후밀 흐라발 작가는 영욕의 체코 현대사를 은근슬쩍 집어넣는다. 이웃 나라 독일 영도자의 체코 합병 야욕이 현실화되어 가던 1930년대 후반, 디테는 독일 출신의 아가씨 리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본의 아니게 애국자의 길이 아닌 부역의 길을 걷게 된다. 다수의 독일인이 살던 수데텐란트가 뮌헨회의에서 히틀러의 협박으로 독일에 할양되자, 그동안 핍박받던 디테의 시대가 도래한다.

디테 개인의 이야기는 어느 시점을 계기로 해서, 파란만장한 역사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기 시작한다. 체육교사에서 고위당원으로 변신한 리자와 결혼하기 위해 하자가 없는 슬라브인이라는 점을 검증받는 모욕적인 과정을 디테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 이 과정에서 디테는 동료 호텔리어로부터도 그리고 아내 리자의 동료로부터 무시당하는 현실을 무감각하게 받아들인다. 적국의 친위대 장교는 물론이고, 나치 민족우월주의로 건강한 아이들을 생산하기 위한 인간양성소에서 임신부에게 보이지 않는 존재로 봉사하면서도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는 그의 인식 세계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한편, 나치 게슈타포에 볼셰비키로 몰려 모진 옥고를 치르고 출소한 장면에서는 나치의 보헤미아, 모라비아 총독으로 체코 출신 특공대에게 암살당한 하이드리히의 보복으로 마을이 쑥대밭으로 변한 리디체 출신의 남자와 만난 장면은 정말 전율이었다. 오래전에 본 영화 <새벽의 7인>에 소개된 리디체는 마을의 성인 남자 전원이 학살당하고, 여성들은 모두 강제수용소로 소개된 체코 현대사의 잊을 수 없는 현장이었다. 이 암살 사건에 대한 잔혹한 보복 때문에 연합국은 나치 요인 암살을 꺼리게 되었다고 했던가.

전쟁이 끝나고 부역 혐의로 반년형을 살고 나온 디테는 폭격으로 죽은 리자가 남긴 우표책을 밑천으로 삼아 채석장 호텔을 차린다. 이어지는 공산주의 시대에 부자들과 어울려 자발적으로 정신교화 시설에 수감되기도 하지만, 디테는 놀라운 현실 적응력으로 시련의 세월을 이겨낸다. 처음 네 편의 이야기와 달리 마지막 백만장자 이야기는 몰입이 떨어지는 약점이 있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디테의 이야기는 만족스러웠다.

보후밀 흐라발은 호텔이라는 공간을 통해 고상한 척하는 부르주아 계급의 위선을 남긴 없이 드러내고 있다. 대통령이나 장군 같은 정치가, 사회지도층 역시 예외는 아니다. 호텔이 청구하는 돈만 지급할 수 있다면, 그들을 위한 호텔에서 제공하지 않는 서비스는 없다. 어린 소년은 그렇게 보고 배운 대로, 삶에 적용한다. 물론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적용 과정을 거치다 보니 승승장구한다.

게다가 아비시니아 황제까지 모셨던 경험은 디테의 귀중한 자산이다. 비록 디테는 그가 평생 받고 싶어하던 부자들이나 동료 호텔 경영인들에게 인정은 받지 못했지만, ‘한 때 황제를 모셨었지’는 그의 삶의 지표로 작동한다. 인간과 상황에 대한 냉정한 판단은 전 유럽을 석권했던 독일 제국이 러시아 침공을 하면서 몰락을 맞이하고 결국 패전하게 될 것이라는 정확한 예측에 도달한다. 역시 황제를 모셨던 통박의 위력은 대단하다!

성장소설, 흥미진진한 캐릭터의 진화 그리고 체코 현대사라는 세 가지 요소를 능수능란하게 조율하면서 이렇게 멋진 소설을 쓴 작가 보후밀 흐라발이 얼마나 대단한 작가인지 맛보기를 한 기분이다.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재밌게 읽어서 아주 기분이 좋다. 보후밀 흐라발의 다른 작품도 읽을 기회가 생겼으면 참 좋겠다. 아, 그리고 영화도 있다고 하는데 구해서 한 번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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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성탈출 SE : 스틸북 DVD (2disc)
팀 버튼 감독, 마크 월버그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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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름 <혹성탈출>의 새로운 이야기가 개봉한다는 소식에 십년 전에 나온 팀 버튼 감독 마크 월버그 주연의 <혹성탈출>을 다시 봤다. 찰턴 헤스턴 주연의 원작에 비할 바 아니지만, 리메이크로 이 정도면 괜찮지 않나 싶은 생각이다.

우주시대에 미공군 소속의 리오 데이비슨(마크 월버그 분)은 벌써 2년째 우주공간을 떠돌고 있는 중이다. 세이모스라는 이름의 침팬지가 사람을 대신해서 우주공간을 비행하는 훈련을 맡고 있던 리오는 엄청난 자기장을 만나 세이모스가 탄 알파비행선이 사라지자, 상부의 명령에도 스스로 비행선을 몰고 자기장 속으로 돌입한다. 초반에 나중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한 영상이 등장하는데, 구조요청을 하는 시퀀스다.

리오가 불시착한 행성은 원숭이 아니 유인원이 지배하는 행성이다. 예전 아프리카 대륙에서 자유롭게 살던 흑인들을 사냥하듯 유인원들은 인간을 노예로 잡아들인다. 유에스 에어 포스 소속의 리오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받아들일 리가 없다. 유인원 사회에서 하등동물 취급을 받는 인간옹호론자인 아리(헬레나 본햄 카터 분)의 도움을 받아 우주모선인 오베론의 신호를 찾아 나선다.

한편, 리오의 숙적으로 등장하는 쎄이드 장군(팀 로스 분)은 유인원 사회의 존속을 위해 아예 인간을 말살해야 한다는 강경론을 펼친다. 리오의 정체를 알아본 쎄이드는 그를 끝까지 추격한다. 오리지널에서 주인공으로 나왔단 찰톤 헤스톤은 죽어가는 쎄이드의 아버지이자 세이모스의 직계 후손으로 등장해서 아들에게 놀라운 비밀을 알려준다. 그것은 바로 유인원이 인간의 노예였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던 쎄이드는 리오를 반드시 찾아내 죽어야할 또 다른 이유가 생겼다.

리오 일행은 칼리마라는 인간 금지 구역이자 고대 유적을 찾아 나선다. 그런데 알고 보니 칼리마는 CAution LIve aniMAls의 약자였다. 그제야 리오는 모선 오베론이 자신이 우주공간에서 실종된 후, 이 행성에 불시착해서 유인원에게 습격당하고 전멸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팀 버튼은 시간을 교묘하게 조종하면서 관객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인간과 유인원 군단의 대격돌이 임박한 순간, 우주에서 유인원의 위대한 조상 세이모스가 도착하면서 가까스로 파국을 모면하게 된다.

아리와의 적당한 로맨스를 뒤로 하고 리오는 지구로 귀환을 서두른다.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지구로 돌아온 리오는 역시 불시착한 워싱턴 DC에서 놀라운 걸 발견한다. 그것은 바로 위대한 영웅 쎄이드를 기념하는 동상이었다. 곧이어 도착한 유인원 경찰과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영화는 끝을 맺는다.

이번 여름에 개봉하는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은 원래 20세기 폭스에서 전작의 상업적 성공으로 속편을 제작하려고 하다가, 비슷한 모티브를 가지고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만들었다. 이번에는 시저라는 이름의 뛰어난 재능의 침팬지를 가지고 실험을 하던 중에 거의 인간지능에 가까운 발전을 이루고, 동료 유인원들을 선동해서 인간에게 반항한다는 줄거리라고 한다. 원시적인 무기로 무장한 유인원이 어떻게 첨단장비로 무장한 인간에게 대항할지 궁금하다. 어떻게 보면 <터미네이터3>에서 본격적으로 인간에게 반항하기 시작한 기계의 모습이 연상되기도 한다.

기계문명이 고도로 발전하게 되면 유토피아가 오리라는 과거의 보랏빛 전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됐다. 기계와 컴퓨터가 대신하게 된 사무자동화의 영향으로 작금의 생활이 더 편리하고 윤택하게 바뀌었을 진 몰라도, 인간의 노동도 마찬가지로 예전처럼 필요하지 않게 된 점을 주목해야할 것이다. 인간이 노동으로부터 소외되면서 우리가 꿈꾸던 유토피아는 디스토피아로 변하기 시작했다. <혹성탈출>에 나오는 인간과 동물의 관계 역전은 미래사회에어쩌면 인류가 직면할지도 모를 그런 경고가 아닐까.

내심 쎄이드가 어떻게 지구에 오게 됐고, 지구에서 영웅대접을 받게 된 과정을 설명해줄 속편을 기다리던 팬의 입장에선 외전격의 새로운 버전을 썩 마음에 들진 않는다. 10년이 지나는 동안, 영화제작 환경이 광속으로 바뀌다 보니 뭐 그럴 수도 있겠지. 과연 어떻게 만들어졌을지 궁금하다. 새로운 외전의 개봉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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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1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최종술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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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진, 조지프 콘래드 그리고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공통점은? 바로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작품활동을 했다는 점이다. 우리에게는 <롤리타>로 널리 알려진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절망>을 읽었다. 그전에 <롤리타>와 <사형장으로의 초대>를 샀지만, 정작 나보코프의 책을 읽기는 처음이다.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모국어인 러시아어는 물론이고 영어와 프랑스어를 사용했다고 하는데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나보코프 특유 언어유희의 원천이 되지 않았을까 추론해 본다. 볼셰비키 혁명과 내전의 와중에 세바스토폴을 떠난 나보코프 가족은 영국에 정착한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슬라브어와 로망스어를 전공한 나보코프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나보코프 가족은 1920년에 베를린으로 이주했는데 2년 뒤, 러시아 군주주의자에게 아버지가 암살당하는 비극을 겪는다. 1937년 프랑스로 그리고 1940년에는 미국으로 계속되는 망명을 해야 했던 나보코프는 1955년 영어로 발표한 <롤리타>의 대성공으로 유럽으로 돌아가게 된다. <절망>은 1936년에 처음 발표되었으며, 작가에 의해 1937년 그리고 1966년에 영어로 번역되었다.

<절망>은 독일계 망명 러시아인으로 초콜릿 사업을 하는 부르주아 사업가 게르만 카를로비치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게르만이 사업 때문에 방문한 프라하 인근에서 자신과 똑같이 생긴 분신, 펠릭스라는 부랑자를 만나게 되면서 빚어지는 사건에 초점을 맞춘다. 나보코프는 자신의 페르소나로 추측되는 게르만을 내레이터로 삼아, 소설에 직접 개입한다. 작가의 다른 소설을 읽어 보지 않아, <절망>만으로 그의 스타일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자신의 주변 상황에 대한 모호한 설명과 묘사는 소설이 진행될수록 줄기를 잡아간다.

게르만의 위태로운 삶의 한 축에는 자신을 끔찍하게 사랑하지만, 어리바리하고 경박하다고 평가하는 아내 리다가 있다. 그리고 아내와의 관계가 의심스러운 사촌이자 형편없는 실력의 화가 아르달리온이 있지만, 게르만은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다. 게르만의 관심은 오로지 파산으로 치닫고 있는 작금의 위기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그가 고른 방법은 실재했던 이류 보험사기의 재구성이다. 완벽을 꿈꾸는 범죄가 언제나 그렇듯 게르만의 어이없는 실수로 바로 꼬리가 잡힌다.

시인이자 작가라고 자부하는 주인공 게르만의 삶에 대한 자전적 서술은 독자에게 모호하게 다가온다. 소설의 곳곳에 등장하는 나보코프가 구사하는 러시아어 특유의 언어유희는 주석이 없었다면 독해할 수가 있었을까? 게르만은 분명히 펠릭스에게 무언가 목적을 가지고 접근하는데, 그 목적은 펠릭스의 예상대로 자신에게 좋은 방향이 아니라는 짐작을 가능케 한다. 소설 <절망>에는 마치 암실에서 인화지에 상이 맺히듯이 조금씩 자신의 계획을 은근하게 드러내는 게르만의 행동과 사고를 쫓는 깨알 같은 재미가 있다.

당대의 석학인 장 폴 사르트르도 이 책을 오독했을 정도로 나보코프의 <절망>은 독자에게 친절하지 않다. 나보코프는 게르만이 자신의 도플갱어라고 굳게 믿는 펠릭스의 이야기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는 바람에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러시아 문학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일체의 도덕적 교훈을 배제한 서사의 마법을 좇다 보면 어느새 이야기는 종착역에 도달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말미에 실린 역자의 친절한 해설은 소설의 모호함과 혼란을 식혀 주는 시원한 청량제처럼 다가온다. 대개 해설은 잘 읽지 않는 편인데 <절망>의 경우엔 꼭 읽어야만 했다. 해설의 도움으로 러시아의 국민 시인 푸시킨, 도스토옙스키으로 대표되는 러시아문학에 대한 나보코프의 생각을 읽을 수가 있었다.

나보코프의 <절망>은 1978년에 독일 출신의 영화감독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가 <절망:양지로의 여행>라는 제목으로 영화로 만들었다. 영국 출신의 배우 더크 보가드가 게르만 역을 맡은 영문판 결말을 그대로 재현한 영화는 어떨지 궁금하다. 나름 열심히 읽었는데 다 읽고 나서도 과연 나보코프의 소설을 제대로 읽었는지 찜찜하다. 조만간 그의 대표작 <롤리타>의 험버트를 만나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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