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혼 을유세계문학전집 37
니콜라이 고골 지음, 이경완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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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고골의 <죽은 혼>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러시아 소설에 대해 트라우마를 앓고 있다고 고백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그 유명한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도 작년에야 비로소 읽을 수가 있었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도 도전할 계획인데, 머뭇거리고 있던 차에 러시아 사실주의의 대가라고 불리는 니콜라이 고골의 <죽은 혼>을 주말 동안에 다 읽었다.

우크라이나 폴타바 부근 출신의 니콜라이 고골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죽은 혼>은 19세기 러시아 사회를 관통하는 주제를 담고 있다. <죽은 혼>에는 프랑스혁명의 여파로 전 유럽에 퍼진 계몽주의 사상의 전파는 물론이고, 나폴레옹 전쟁 이후 새로 재편된 메테르니히 체제의 보수적 사회 분위기, 러시아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 그리고 어느 시대에서나 빠지지 않는 일확천금을 꿈꾸는 야심가의 모험담이 전개된다.

그 당시에도 일반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작가가 직접 소설에 개입해서 독자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주인공의 활동을 기술하는 고골의 작법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지방도시 N에 사륜마차를 타고 수행원과 함께 등장한 우리의 주인공 파벨 이바노비치 치치코프는 정중한 매너와 백만장자라는 소문을 등에 업고 일약 N 도시의 유명인사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도시의 고위층이 다투어 그를 파티에 초대하고, 귀부인들 역시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전력투구하는 모습이 사실적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치치코프라는 이름의 귀족이자 6등 문관은 이상한 것을 매집하는데 정성을 쏟는다. 그것은 바로 죽은 농노다. 아직 근대화의 세례를 받지 못한 19세기 러시아에서 토지와 그에 예속된 농노는 사회 주류 기득권층의 물적 토대였다. 그들이 흥청망청 벌이는 파티와 산해진미의 음식들 그리고 파리에서 유행하는 최신 패션 따라잡기를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귀족이 보유한 영지에서 나오는 소출과 농노의 노동이었다고 고골은 증언한다. 그런데 살아 있는 농노도 아닌 죽은 농노를 치치코프는 왜 사는 걸까?

죽은 농노에게도 인두세를 부과하는 러시아 정부의 모순을 파고들어, 치치코프는 죽은 농노를 사들여 담보로 삼아 거액의 대출을 받으려는 계획을 세운다. 자, 바로 이 지점에서 독자는 치치코프의 정체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책의 300쪽이 넘어가서야 비로소 고골은 독자에게 치치코프가 누구인지 소개한다. 몰락한 귀족 출신으로 재무국, 건설위원회 그리고 세관원이라는 요직을 거치면서 부정한 방법으로 축재한 전력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런 작자를 선량하다고 부를 수 있을까?

법의 틈새를 교묘하게 파고들어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치치코프를 대하는 등장인물들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그를 진정한 친구로 생각하고 극진히 대접하는 마닐로프, 무상으로 농노를 제공하다시피 하는 코로보치카, 어떻게 해서든 한 푼이라도 더 뜯어내려는 거래를 시도하려는 소바케비치에게서 농업국가 러시아의 현실을 엿볼 수가 있다. 치치코프의 사기 행각이 거의 성공할 단계에서 불한당 노즈드료프의 폭로 때문에 치치코프는 그만 나락으로 추락한다.

여기까지가 1842년에 발표된 1권의 주된 내용이라면, 1845년에 발표된 2권에서는 재기에 몸부림치는 치치코프의 활약이 그려진다. 2권에서는 종교적 귀의를 연상시키는 고골 만년의 모습을 읽을 수가 있었다. 구제받지 못할 사기꾼의 길을 걷던 치치코프는 러시아 농촌 사회에서 건전한 영농사업을 통해 수익을 올리는 지주의 영향으로 한때 정직한 사업가의 꿈을 키우는 장면에서 기독교적 구원이라는 모티프에 영향을 받은 작가의 면모가 보인다. 하지만 악당의 선량한 주인공으로의 극적인 변신은 19세기 소설에서 무리한 시도였을까? 치치코프는 정상적 삶의 궤도로 안착할 수 있는 여러 기회를 걷어차 버리고 미망인의 유산을 가로채기 위해 유언장 위조를 시도한다.

19세기 러시아 농촌사회와 상류사회에 대한 고골의 사실적 묘사에는 당시의 모습을 바로 눈앞에서 보는듯한 현장감이 흐른다. 치치코프가 찾은 시골 마을에서 돼지가 병아리를 냉큼 집어삼키는 장면에 대한 묘사나 치치코프가 사실은 나폴레옹 전쟁에서 팔과 다리를 잃은 코페이킨 대위 아니 적그리스도일지도 모른다는 대중의 상상은 혁명과 계몽주의 사상의 전파로 어수선하던 시대상의 반영으로도 읽힌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의 레빈처럼 코시카료프 대령의 계몽주의적 개혁은 전통을 고수하려는 농민들의 반발로 무위로 돌아간다. 지식인이었던 고골은 이런 시도가 러시아 농촌사회에서 아직은 시기상조였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고골이 세상을 뜬 후, 9년 뒤에야 러시아는 농노해방령을 선포한다.

한편, 나폴레옹과의 조국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의 민족주의 성향도 소설의 곳곳에서 엿볼 수가 있다. 유럽의 후진국으로 간주되던 러시아가 여러 내부의 모순에도 열강의 하나로 성장하던 시기에 프랑스 스타일로 대변되던 유럽문화는 동경이자 극복의 대상이었다. 상류층 귀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국어인 러시아어보다 프랑스어 사용을 선호한다. 이런 움직임에 대한 반발로 고골은 건전하고 근면한 러시아적 가치와 노동의 신성함을 은근하게 강조한다.

2권에서는 소실된 부분이 많아 가독성이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맹점이 있긴 하지만, 소설의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기에는 무리가 없어 보인다. 당시 러시아에서 통용되던 다양한 관용적 표현은 확실히 주해가 없었다면, 현대의 독자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 같다. 미주보다는 각주가 더 보기 쉬운데, 미주 표시가 나올 적마다 책장을 뒤로 넘겨야 했다는 점이 아쉬웠다.

지난달에 읽은 안톤 체홉과 이달에 읽은 니콜라이 고골의 책을 통해 그동안 줄기차게 괴롭히던 러시아 소설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부풀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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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하 진 지음, 김연수 옮김 / 시공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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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하진 선생의 장편소설을 처음으로 읽었다. 이달 들어 집중적으로 하진 선생의 책에 빠져 있다. 요즘은 좀 뜸하지만, 그동안 그의 책이 넉넉하게 출간이 돼서 당분간 하진 선생 앓이에는 전혀 문제가 없을 것 같다.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하진 선생의 첫 번째 장편소설로 퓰리처상 최종 후보에까지 오른 <기다림>과의 만남은 황홀했다.

소설 <기다림>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하진 선생이 창조한 가상의 공간 무지시에 사는 군의관 쿵린은 간호사 우만나를 사랑한다. 그리고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린은 유부남이고, 특별한 이유 없이 조강지처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겠다는 그를 인민법정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별거한 지 18년이 되어 자동으로 이혼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하진 선생은 실제로 있었다는 일화를 바탕으로 18년의 오랜 기다림 속에 사랑 그리고 결혼이라는 주제를 진지하게 다룬다.

린의 아내 수위는 시골 마을 어춘에서 병든 시부모를 봉양하고 딸 화를 홀로 키운다. 부모의 설득으로 마음에 없는 결혼을 한 지식인 쿵린은 전족을 한 시골뜨기 아내 수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발이 예뻐야 미인으로 인정받던 구시대의 상징으로 작가는 전족을 선택한다. 구습을 딛고 찬란한 미래를 향해 나가야 하는 신국가 중국이지만, 과거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을 매끄러운 문장으로 하진 선생은 꼬집는다.

이런 수위와는 대조적으로 직장인 군병원에서 만난 우만나는 젊고 건강한 매력의 소유자다. 첫사랑으로부터 시련을 당한 만나는 유부남 쿵린에게 마음이 끌려 결국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한다. 고지식하고 우유부단한 쿵린은 주위의 따가운 시선과 유부남이라는 자신의 처지 때문에 만나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서지 못한다. 하진 작가는 주인공 쿵린의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심리에 대한 절묘한 묘사를 통해 가정도 지켜야 하고, 동시에 만나와의 사랑도 갈구하는 지식인의 고뇌를 기술한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합리적이고 이성적 판단은 오히려 해가 되는 걸까? 그래서 쿵린인 조강지처 수위와의 이혼에 적극적이지 못하고 그저 ‘기다림’이라는 지극히 수동적인 방법을 선택한다. 어쩌면 쿵린과 만나에게 기다림 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문화혁명이라는 시대의 파도를 아슬아슬하게 넘어가는 두 불량남녀의 이야기가 자못 흥미진진하다.

결국, 쿵린은 오랜 기다림 끝에 수위와 이혼하고 만나와 새살림을 차리고 아이도 낳지만, 피곤하고 짜증나는 결혼생활에 염증을 내기 시작한다. 오랜 기다림의 세월은 만나와의 사랑마저도 휘발시켜 버리고, 린은 불타는 사랑보다는 평안을 더 선호하는 중년이 되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자각한다. 그리고 시골을 떠나 무지시에 새로운 삶을 꾸린 수위와 장성한 딸 화를 찾는다. 이 부분에서는 작가의 조강지처를 버릴 수 없다는 유교적 사고가 읽혔다. 일종의 클리셰이라고 해야 할까?

<기다림>의 성공으로 하진 선생은 비로소 미국 문단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는데, 과연 서구인의 눈으로 본 쿵린과 우만나 그리고 류수위의 삼각관계는 어땠을지 궁금하다. 한 때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간주되던 이혼이 이제는 일상이 된 마당에, 18년이나 기다린 주인공을 이해할 수 있을까. 잡히지 않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신기루를 쫓던 이들이 마침내 그 사랑의 결실을 손에 넣었을 때, 남은 건 뻑뻑한 현실뿐이었다. 하진 선생의 담백한 문장이 엮어내는 소박한 삶의 비밀은 참 매력적이다. 그러니 그의 책에 점점 더 빠질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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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책중독자의 고백
톰 라비 지음, 김영선 옮김, 현태준 그림 / 돌베개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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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래 고백한다, 나는 책중독자다. 하지만, 굳이 톰 라비가 구분한 분류법에 의하면 장서광(bibliomania)이라기 보다는 애서가(bibliophilia)에 가깝지 않을까? 어쨌거나 모든 경제활동의 단위를 책값에 비유하고, 다른 비용에 우선해서 책을 사는 데 돈을 아끼지 않는 걸 보면 애서가와 장서광의 중간 정도에 어중간하게 서 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보통 책에 대한 책은 잘 보지 않는 편이다. 나만의 독서를 하기에도 바쁜 데 다른 이가 책에 대해 쓴 글을 볼 틈이 어디 있나 그래. 이 얼치기 애서가/장서광은 꾸역꾸역 그렇게 책을 사댄다. 애서가와 장서광을 나누는 결정적인 기준이 되는 그 책을 읽었느냐는 질문에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비슷한 증세의 책쟁이들과 항상 하는 말이 우리가 읽을 책이 없어서 책을 사냐는 자조적인 말이 있다. 그렇다, 우리가 책이 없어서 책을 사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책을 사서 누리는 즐거움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그렇다고 마니아적 기질의 장서광처럼 초판본이나 희귀본에 대한 애정은 부족한 것 같다. 그러니 직접 책을 먹는다는 식서가 정도 되면 이건 중증이라고 불러야 할까? 우리의 동지 톰 라비는 익살스럽게 유사 이래 책중독자의 다양한 면모를 유감없이 동지들에게 전달한다. 특히, 18세기 프랑스 변호사 출신의 불라르의 책에 대한 욕심은 가히 환상적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얼마나 책을 모았던지 그가 죽고 나서 시장에 풀린 책 때문에 한때 파리의 책값이 다 싸졌었다고 했던가.

할인판매를 하는 대형마트의 책코너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똑같은 찰스 디킨스의 전집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사들이고, 온라인 구매로 아낀 돈으로 다시 책을 사는 책중독자에 대한 묘사를 읽으면서 마음이 마냥 푸근해졌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책을 펴드는 책중독자에 대한 묘사를 읽으면서 흠칫흠칫 놀라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위안을 얻기도 했다. ‘이 세상에 나를 닮은 동지가 있군’하는 위로감 말이다.

톰 라비는 그런 위로뿐만 아니라 고수 사이에 통용되는 은근한 기술도 알려준다. 좀 있어 보이는 서가처럼 보이기 위해 가짜 나무책을 만들었던 선인들의 지혜는 물론이고,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책을 임기응변으로 지어내 제 자랑을 일삼는 책중독자를 골탕먹이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책중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기발한 방법을 전수해준다. 책중독자를 위한 꼭 필요한 지침서라고 할까.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이나 고대해 마지않던 책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을 때, 책중독자들이 누리는 열락의 즐거움을 톰 라비는 다양한 방법으로 진단한다. 심지어 자신의 책중독을 진단할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도 은근슬쩍 제공한다, 멋지다! 대부분의 책중독자들이 그렇듯 부정의 단계를 피할 수가 없다. 어쩌면 솔직해야 할 책중독 테스트에서 결과를 예상해서 몇 개 정도는 슬쩍 피하는 센스를 발휘할지도 모르겠다.

책의 끄트머리에서 톰 라비는 언제부터인가 유사 이래 계속되어온 책의 존재를 위협하는 전자책을 소개한다. 책이 품고 있는 콘텐츠를 사랑하는 애서가에게는 희소식일지 모르겠지만, 책 고유의 향기마저 사랑하는 책중독자에게는 비보일지도 모르겠다. 전통 출판시장에서 하루가 다르게 조금씩 그 지평을 넓혀가고 있는 전자책의 도전은 거세다. 개인적으로 톰 라비의 말마따나 전자의 움직임으로 구성된 전자책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신속한 구매와 편리성이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여전히 구식 아날로그 방식으로 제작된 책이 마음에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두꺼운 책을 읽어가며 남은 분량을 가늠하는 즐거움을 어떻게 전자책에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진짜 책중독자가 느끼는 죄책감에 대해 톰 라비는 멋진 면죄부를 발행한다. 결국, 어떻든 간에 우리의 증세는 고칠 수가 없단다. 그러니 책을 사고 읽기 위해 경제활동을 하고, 그렇게 번 돈으로 아낌없이 책을 사라는 것이 톰 라비식의 화끈한 처방전이다. 고칠 수 없으면 차라리 즐겨야 하는 걸까? 브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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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의 볼리비아 일기
체 게바라 지음, 김홍락 옮김 / 학고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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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에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의 최후를 다룬 글을 리더스다이제스트를 통해 읽었다. 보수적인 성향의 리더스다이제스트는 예상대로, 혁명수출을 위해 라틴아메리카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볼리비아에서 무장 게릴라 활동을 벌인 공산주의자 체 게바라의 약식재판도 없는 처형을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게 서술했다. 모든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고려한다면, 과연 어느 한 쪽의 이야기만으로 지난 세기 가장 완벽한 사람이라고 칭송받은 인물을 너무 단편적으로만 그린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러던 차에 다년간 외교사절로 활동한 김홍락 볼리비아 대사의 세심하면서도 유려한 번역으로 만나게 된 <체 게바라의 볼리비아 일기>는 어느 혁명가의 최후를 균형 잡힌 시선으로 보게 해주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준다.

<볼리비아 일기>는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게릴라 전사 에르네스토 게바라가 1966년 11월부터 이듬해 10월 볼리비아 유로계곡 전투에서 볼리비아 정부군에 잡혀 처형되기 전까지의 기록을 담고 있다. 쿠바에서의 성공 후, 어떻게 보면 전 세계의 억압받는 모든 인민을 해방하겠다는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에 호응하는 열혈 혁명전사로 거듭난 체는 아프리카 콩고를 거쳐 볼리비아를 다음 혁명의 전초기지로 결정한다.

쿠바에서의 게릴라 활동이 체의 생애 가장 빛나는 성공의 순간이었다면, 볼리비아에서의 그것은 역설적으로 대척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가 육필로 쓴 볼리비아에서 일기에는 무장 게릴라 투쟁 성공에 대한 확신과 30대 후반 게릴라 전사의 신념이 고스란히 배어있다. 외부와의 연락 두절, 볼리비아 공산당과의 반목, 현지 농민 계급의 밀고 그리고 식량 부족으로 인한 끝없는 보급투쟁의 과정은 볼리비아에서 체의 실패에 대한 어두운 그림자로 다가온다.

바티스타 독재정권 타도와 외세축출이라는 뚜렷한 목적으로 투쟁의 대오를 이뤘던 쿠바에서와는 달리, 나름대로 국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선출된 바리엔테스 정권의 토대는 체 게바라와 마닐라(쿠바의 암호명)의 예상과는 달리 강건했다. 게릴라 활동의 필수적인 민중의 지지와 지원도 거의 받을 수가 없었다. 볼리비아 공산당과의 헤게모니 다툼도 한몫했다. 설상가상으로 쿠바, 볼리비아, 페루 같이 다양한 국적으로 구성된 체의 게릴라 부대는 활동 초기부터 불화와 반목으로 지도자 체에게 걱정거리를 안겨준다.

그들이 주로 활동하던 리오그란데 강 유역의 정글의 기후와 지형에 적응하지 못한 게릴라 부대는 그 지역 농민의 길 안내에 의존해야 했고, 친정부적인 성향의 길라잡이들은 그들의 활동을 그대로 미국 군사고문단의 지원을 받는 볼리비아 정부군에게 전달했다. 식량이 떨어져 야생동물을 잡아먹으면서 게릴라 부대의 사기는 바닥에 떨어졌고, 기강 해이와 부주의로 대원들이 희생되면서 이탈자도 속출했다. 한 때 정부군을 상대로 그야말로 신출귀몰하는 활약을 벌이던 체의 게릴라 부대는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투쟁을 계속한다. 8월 말 바도 델 예소 전투의 패배와 호아킨 부대의 전멸로 에르네스토 게바라는 다가오는 자신의 최후를 예감한다.

번역을 맡은 김홍락 대사는 최후의 유로계곡 전투와 라이게라에서의 처형으로 갑자기 끝난 체 게바라의 마지막 일기를 친절하게도 에필로그와 볼리비아 게릴라전에 참가했던 게릴라들의 약력으로 보충 설명해준다. 원래 에르네스토 게바라를 생포할 때만 하더라도, 처형계획이 없었지만 그에 동조하는 세력의 준동을 우려한 볼리비아 정부는 복잡한 재판 과정을 생략하고 그를 처형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체와 그의 동지들이 꿈꾸던 라틴아메리카 해방의 꿈은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대신 라틴아메리아 곳곳에서 우익 군사독재로 인한 부정부패와 쿠데타의 악순환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자신에게 엄격했던 게릴라 지도자답게, 에르네스토 게바라는 냉정하게 매일매일의 사건을 기록하고 월말에는 냉혹한 평가로 자신과 혁명과정을 비판했다. 동시에 피할 수 없었던 동지들의 희생 앞에서는 문학가를 능가하는 예민한 감성의 소유자였음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특히, 쿠바와 콩고에서 사선을 넘으며 투쟁했던 카를로스 코예요(투마)와 엘리세오 레예스 로드리게스(롤란도)의 죽음을 애도하는 장면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게릴라 지도자가 아닌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체 게바라가 마지막을 맞았던 볼리비아의 라이게라와 리오그란데 유역은 이제 유명 관광명소가 되었다고 한다. 볼리비아 사람들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다 최후를 맞은 체 게바라의 후광이 여전히 낙후된 지역에 살고 이들에게 비추고 있다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21세기에 다시 읽는 한 시절을 풍미했지만, 실패한 게릴라 전사의 마지막 기록은 그래서 더 멜랑콜리한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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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의 상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6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이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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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이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던 제국주의 시절의 향수가 물씬 풍기는 발언의 주인공인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을 읽었다. 이런저런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었지만, 또 <베니스의 상인>은 처음인 것 같다. 2004년에 발표된 알 파치노가 부자 유대인 상인 샤일록으로 열연한 영화 버전을 봤는데, 이제야 원작과 만나게 됐다.

16세기 말 셰익스피어가 발표한 <베니스의 상인>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전 세계에 상단을 파견해서 향료와 비단 사업을 벌이는 앤토니오에게 그의 절친 바싸니오가 벨몬트에 사는 아리따운 포오셔에게 청혼하기 위해 군자금으로 3,000 다가트를 융통해 달라고 하면서 문제가 시작된다. 당장 현금을 가지고 있지 않던 앤토니오는 자신의 신용을 걸고(요즘 식으로 하면 신용담보대출 정도가 되겠다) 천하의 수전노 유대인 샤일록에게 돈을 빌린다.

그런데 이 샤일록이라는 유대인이 건 계약위반 시 조건이 해괴하다. 앤토니오의 신체 부분 중에서 자신이 원하는 살 1파운드를 달라는 거다. 나름대로 사업에 자신이 있던 앤토니오에게 3,000 다가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기에 그는 흔쾌히 이 조건을 수락한다. 하지만, 신화에 등장하는 금기가 모두 깨지게 되어 있듯 앤토니오의 계약 역시 위반의 운명에 처하게 된다. 프랑스와 영국 해협에서 그리고 트리폴리스와 세계 각국에서 베니스로 향하던 앤토니오의 선박들이 모두 침몰한다. 자, 이제 위기다.

한편, 두둑한 군자금을 얻은 바싸니오는 포오셔에게 구혼하고 수수께끼 같은 상자 뽑기 미션에 나선다. 금상자, 은상자 그리고 납상자 중에 포오셔의 초상화가 든 상자를 뽑는 것이다. 항상 이런 미션에게는 조건이 걸리기 마련인데, 상자를 뽑은 사람은 이후에 일체 상자 뽑기의 비밀에 대해 말하지 말 것과 이후 홀아비로 사는 약속을 해야 한단다. 거 참, 당대에 포오셔가 얼마나 대단한 신붓감인진 모르겠지만 가혹한 조건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샤일록의 그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미션을 무사히 수행한 바싸니오는 포오셔의 사랑도 얻고, 이제 법정에 서게 된 앤토니오를 구하러 나선다.

셰익스피어는 악마의 탈을 쓴 유대인 샤일록이 증오와 복수심으로 똘똘 뭉쳐 법정에서 공개 살인을 하겠다고 칼날을 가는 장면까지 섬세하게 묘사한다. 고리대업을 통해 이윤(이자)을 얻는 행위를 극도로 경멸한 당시 시대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요즘처럼 금융업이 발달한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만 벌면 장땡이라는 게 작금의 세태가 아니던가.

책을 읽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잉태된 반유대주의의 유서 깊은 증오의 흔적을 보는 것 같아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앤토니오는 물론이고, 그의 친구들 역시 거리낌 없이 샤일록을 모욕하고 저주한다. 셰익스피어가 창조해낸 살 1파운드를 요구하는 파렴치한 캐릭터 이상의 혐오가 중세 이래 유럽에 뿌리내린 반유대주의와 공명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이윤에 대한 서로 다른 시선의 차이일지도 모르겠다. 앤토니오와 그 친구들은 그렇게 얻은 이윤을 경멸하지만, 샤일록은 정당한 수익이라고 항변한다. 아직 근대적 자본주의가 발달하지 않은 베니스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대의 가치관 충돌일까. 당대에는 앤토니오가 승리했을진 모르겠지만, 현재라면 샤일록이 이겼을지도 모르겠다. 신체 포기각서가 횡행하는 마당에 그깟 살 한 덩이 쯤이야.

법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포오셔와 니리서는 자신들이 배우자에게 준 사랑의 증거인 반지를 교묘하게 얻어내 남자들의 맹세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조롱한다.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 같은 이야기의 작은 반전이라고나 할까. 깨지지 않으리라고 목숨을 걸고 한 사랑의 맹세는 하나같이 깨질 수밖에 없는 숙명이라는 것이 신화가 보여주는 엄연한 사실을 그들은 미처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앤토니오와 바싸니오의 묘한 우정도 관전 포인트다.

책을 읽으면서 란슬럿트 고보와 아버지 샤일록을 배신하고 로렌조와 사랑의 도피를 택한 제시커의 등장이 궁금해졌다. 후자야 샤일록의 비극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로 이해할 수 있지만, 간간이 등장하는 어릿광대 란슬럿트의 역할은 무엇일까? 희극으로 무대상연을 전제로 쓰인 만큼 관객의 웃음을 위한 장치였을까? 이런 모호함이야말로 셰익스피어 문학이 오늘날까지도 많은 학자의 연구 대상이 된 이유가 아닐까 추론해 본다.

위키피디아로 <베니스의 상인>을 검색해 보니 희비극이라고 소개가 되어 있는데 그런 분류가 이해가 간다. 희극과 비극을 한 드라마 속에서 저글러처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대가의 실력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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