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탈 - 개정판
조정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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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다큐멘터리 <노르망디의 코리안>을 보고 리뷰를 남긴 적이 있다. 지금 보니 장황하게도 썼다. 이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이런 극적 이야깃거리를 소설로 쓰면 좋겠다 싶었는데 조정래 선생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책이 바로 오늘 단박에 읽은 <사람의 탈>이다.

1944년 6월 6일, 나치 독일 제3제국이 지배하고 있던 서유럽 해방을 위해 고대해 마지않던 제2전선이 열렸다. 이날 잡힌 나치 동방대대 소속의 병사 사진과 그에 대한 기록이 조정래 선생의 <사람의 탈>의 모티프로 작용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소설은 1939년 만소국경의 노몬한에서 벌어진 소련과 일본의 충돌을 이야기의 발화점으로 삼는다.

한 때 천하무적이라 불리던 일본 관동군은 소비에트의 주코프 장군이 이끄는 기계화 병단과 맞붙었다가 참혹한 패배를 당한다. 중국에서 군벌집단을 상대해온 관동군은 오로지 황군 정신으로 소비에트의 전차대에 도전했다가 낭패를 당한다. 계속되는 침략전쟁으로 병력 부족에 직면한 일본은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을 사지에 몰아넣기 시작한다. 조선에만 주둔하고, 돌아오면 면 서기직은 준다는 달콤한 제안을 남발한다.

그렇게 노몬한 전선에 파견된 주인공 신길만은 보급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열악한 상황에서 무지막지한 소련군을 상대한다. 황군에게 항복이나 포로가 되는 것은 수치라고 외치면서 수많은 일본군이 옥쇄를 감행하지만, 신길만과 일단의 조선 청년에게는 모두가 부질없는 짓일 뿐이다. 아버지가 전장으로 향하는 길만에게 화두처럼 던진 총알을 피하는 살아남는 게 최고의 선이다. 동귀어진하자는 옥쇄 파트너를 찌르고 길만은 소련군의 포로가 된다.

기미독립선언으로부터 20년이 지난 세대에 해당하는 신길만은 소작농의 자식이라는 계급적 이유로 인해 징병당한다. 예나 지금이나 무산계급은 희생의 대상일 뿐이다. 일본의 통치가 영원할 것 같았던 변절의 시기에 그들이 과연 조국 독립의 꿈을 꿀 수가 있었을까? 소련군의 포로가 된 길만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대신 소련 군복을 입고 나치 독일의 마수에 맞서 모스크바 방어전에 투입된다. 이 드라마 같은 이야기는 그가 다시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혹독한 포로수용소 생활 끝에 동방대대라는 이름으로 노르망디 전선으로 파견되고 미군의 포로가 되는 일련의 과정을 조명한다. 어쩌면 이렇게 기구한 팔자를 타고났을까.

역사적 사실에 소설적 개연성과 상상을 더하긴 했지만, 정말 그럴 법한 이야기가 아닌가. 이 모든 역경을 거쳐 살아남은 길만네를 기다리고 있는 비극은 참으로 가혹했다. 일본, 소련 그리고 독일은 모두 주인공 신길만을 필요에 따라 철저하게 이용했을 뿐이다. 처음부터 그들은 지키지 못할 약속을 했고, 나라 없는 백성은 어쩔 수 없이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소설 전반에 흐르는 비애를 조정래 선생은 예리하게 짚어낸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소재라 그런지 확실히 책은 재밌게 읽었다. 하지만, 왠지 결혼식 피로연에 가서 뷔페를 먹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무언가 많이 먹은 것 같긴 한데, 헛헛한 느낌이 든다. 노몬한 전투, 모스크바 공방전 그리고 노르망디 상륙작전 같은 역사의 큰 흐름에 저항할 수 없는 개인의 기구한 운명이 묻혀 버렸다는 느낌이랄까. 속도감 넘치는 전개가 마음에 들면서도, 2% 부족함 느낌이다.

엉뚱한 상상력을 발휘해서, 독일군의 포로가 된 신길만네가 포로수용소를 만드는 장면에서는 홀로코스트를 떠올렸다. 그랬다면 이야기가 더 복잡해졌을까? 주인공 신길만의 개인적 고뇌와 간난을 좀 더 다뤘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계속되는 투항 그리고 연이은 적(敵)으로의 변신 때문에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식민지 청년의 애환에 보다 방점을 찍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느꼈다.

소설을 읽던 중에 문득 “인두겁”이란 말이 떠올랐다. 보통 부정적으로 사용되는 이 말이, 총탄이 빗발치고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 그야말로 종이 한 장처럼 갈리는 순간에 오로지 생존을 위해 몇 번의 서로 다른 인두겁을 뒤집어써야 했던 어느 무국적자의 비운과 공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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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밤 세계문학의 숲 4
바진 지음, 김하림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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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사에서 “세계문학의 숲”이라는 제목으로 출간 중인 시리즈의 한 편인 바진 선생의 <차가운 밤>을 읽었다. ‘인민작가’라는 호칭으로, 격동의 중국현대사를 모두 체험하며 101세까지 천수를 누리고 영면한 노작가 바진이 문학적 완숙기에 발표한 <차가운 밤>(1947)은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 임시수도 충칭을 무대로 한 작품이다.

바진은 소설의 중심축에 기존 왕조중심의 봉건질서를 타파하고 공화정으로의 이행을 촉발시킨 신해혁명 이후, 표출된 전통가치와 신문화의 충돌을 배치한다. 여자는 모름지기 집에서 육아와 가사를 담당하며 지아비를 내조해야 한다는 전통적 사고를 하는 주인공 왕원쉬안의 어머니와 그의 아내 청수성이라는 각각 구세대와 신세대를 대변하는 캐릭터가 정면대결을 벌이면서 중국판 ‘사랑과 전쟁’을 엮어낸다.

만주에 이어 중국 전토를 집어삼키려는 일본의 폭력적 제국주의 침략 앞에, 전시 임시수도 충칭은 그야말로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 지경에 처해있다. 죽음을 상징하며 일상화된 적기의 공습경보는 이제 친근하기까지 하다. 시대의 불안을 이보다 더 적확하게 표현할 수가 있을까.

반 국영기업의 출판사 편집부에서 교정을 담당하는 왕원쉬안은 빈곤과 가난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은행에 다니는 아내 청수성은 애당초 집안일에는 관심이 없다. 아이가 자라면서 교육비 부담은 날로 느는데, 그들의 생활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한편, 왕원쉬안은 아이들 교육에 중국의 미래에 달렸다고 생각하고 후진양성을 위한 교육사업의 꿈을 키우지만, 아내와 어머니의 심각한 불화로 자신의 꿈 따위로 고민할 여유가 없다. 수성에 대한 애정과 어머니에 대한 효도 사이에서 갈등하는 우유부단한 지식인의 그림자가 얼비친다.

대학교육을 받고 전문직에 종사하는 수성은 지금보다도 앞으로의 삶이 더 걱정이다. 신여성답게 그녀는 남편과 아이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늦은 시간까지 파티를 즐기고, 브리지 게임을 하지만 그녀 역시 전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녀의 시어머니는 이런 수성의 자유분방한 모습에 질색하고, 며느리를 비난한다. 대략 요즘 우리나라 막장 드라마를 연상하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바진은 대척점에 서 있는 이 두 여성을 통해 당시 중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모순을 꼬집는다. 근대화를 지향하면서도, 과거의 유산에서 탈출할 수 없는 새로운 세대의 고민을 왕씨 가족의 불화를 통해 담담하게 그려낸다. 두 여자 사이에 끼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무능력한 인텔리의 모습은 조금은 진부한 설정이 아닌가 싶다.

원쉬안은 가정 내부의 모순을 항일전 탓으로 돌린다. 그리고 그저 무조건 참아내면, 지금의 불행을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오판이었다. 결국, 원쉬안은 치명적인 병에 걸리고, 사랑하는 그의 곁을 떠나면서 불행의 열차는 폭주를 시작한다. 이런 구조는 외세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항할 수 없었던 장제스가 이끌던 국민당 정부의 무능력을 왕씨 집안의 가장인 원쉬안에 대입시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승전의 순간에 맞는 죽음은 비극 그 자체로 다가온다.

중국 현대사의 산 증인이었던 바진의 글은 인간 내면에 대한 깊은 성찰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상당히 정치적인 암시와 복선을 제시한다. 세 주인공에 대한 치밀한 심리묘사와 일본과의 전쟁이라는 최악의 폭력 상태를 통해 당시 중국 민중이 가지고 있던 불안의 본질을 조명한다. 중년으로 접어든 혁명세대의 희망과 좌절을 원쉬안과 수성의 갈등 속에 바진은 멋지게 녹여낸다.

이 소설에서 ‘차가운 밤’은 사랑하지만 떠나보낼 수밖에 없는 아내와의 이별의 순간이며, 마지막에는 비극의 조종을 상징하는 시간이다. 무정부주의를 꿈꾸면서도 인간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대작가 바진과의 첫 만남은 만족스러웠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우리나라에서 소개된 그의 다른 작품에 호기심이 생겼다. 조만간 바진과의 새로운 랑데부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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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란도란 2010-11-18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헤르메스님!^^ 알찬 서재 잘 구경하고갑니다
저는 이음출판사에서 나왔어요~
저희가 이번에 미국에서 베스트셀러를 연일 차지하여 화제가 되고있는 도서
<모터사이클 필로소피> 한국판 출판 기념으로 서평단을 모집하고있거든요^^
책을 사랑하시는 헤르메스님께서 참여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 이렇게 덧글남기고가요
저희 블로그에 방문해주세요~! :)

레삭매냐 2010-11-18 22:15   좋아요 0 | URL
먼저 부족한 제 서재에 들러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서평단을 신청하고 그 중에서 선정하는 방법인 것 같군요.
좋은 제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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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참 무엇을 해도 좋은 계절인 것 같다. 좋은 사람과 만남을 갖는 것도, 없는 짬을 내서 그동안 가보고 싶은 곳을 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역시 그 중에서도 가장 추천하고 싶은 건 바로 책읽기다. 많은 이들이 가을을 독서의 계절이라고 하는데 아마 그만큼 책읽기에 적합한 계절이 바로 가을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어서가 아닐까.

이럴 즈음에 문학동네에서 책도둑 프로젝트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참 특이하면서도 재밌는 이벤트라는 생각에 거침없이 그전부터 욕심을 내던 책들을 조합해 봤다. 그동안 이름은 너무 많이 들어봤지만 미처 만나 보지 못했던 작가의 책은 물론, 이미 영화로도 제작이 되었던 원작 소설 그리고 올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에 이르기까지 문학의 세계는 정말 광활하다는 것을 장바구니에 담으면서 다시 한 번 느낄 수가 있었다.

자, 이제 6권의 선정이 모두 끝났다. 마치 로또를 맞추는 기분으로 합계에 슬며시 눈길을 건네 본다. 어려서 담벼락에 동전치기를 해본 기억이 있는가? 동전을 담벼락에 던져 가장 가까이 떨어진 사람이 이기는 그 게임 말이다. 많은 분들의 응모로 선정이 어려울 것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우선 첫 번째 관문을 통과했다는 즐거움에 슬며시 미소가 떠오른다.

[1] 브리다 / 파울로 코엘료 : 10,800원
[2] 육식 이야기 / 베르나르 키리니 : 10,800원
[3] 렛미인 1 /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 : 9,900원
[4] 렛미인 2 /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 : 9,900원
[5] 리고베르토씨의 비밀노트 1 /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 4,500원
[6] 리고베르토씨의 비밀노트 2 /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 4,140원
합계 50,040원

너무나도 유명하지만 아직도 만나 보지 못하고 있는 파울로 코엘료 선생의 신작이 나왔다. 달랑 표지만 보고서는 도대체 무슨 내용일지 모르겠지만, 녹색 드레스에 휘날리는 머리의 주인공 브리다가 타이틀 롤을 맡았겠지 하고 예상해 본다. 이름이 같은 베르나르 베르베르과의 환상 문학일까? 모두 10개의 단편 구성과 편지글-희곡-편지글 그리고 일기라는 다양한 형태로 시전되는 베르나르 키리니의 작품 세계가 마냥 궁금하다.

언젠가 지인이 <트와일라잇> 시리즈를 뛰어넘는 역사상 최고의 뱀파이어 영화라고 극찬을 마지 않았던 <렛미인>의 원작 소설이다. 이번 가을에 할리우드산 리메이크 작으로 돌아온다고 하는데, 그는 결단코 음울한 북구의 오스카와 일라이의 뱀파이어 스토리를 할리우드에서 만든 짝퉁이 따라갈 수 없을 거라고 단언을 했다. 아직 영화도 원작도 못본 상태라 그런 편견 없이 오리지널을 대해 보고 싶은 마음이다.

마지막으로 2010년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선생의 작품 <리고베르토씨의 비밀노트>다. 설마 <새엄마 찬양>에서 아들내미에게 오쟁이 진 그 “리고베르토씨”가 다시 주인공으로 나오는 건 아니겠지! 요사 선생의 정치문학과 에로티시즘 문학 중에서 후자의 범주에 들어가는 작품이라고 한다. 전자가 좀 더 보편적 객관성에 입각한 상상력을 소재로 한다면, 후자는 주관적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것 같다. 요사 선생의 전작주의에 도전하는 길목에서 버티고 있는 작품이다.

두 번째 로또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짧은 글을 마무리한다. 사실, 로또 당첨보다도 글을 쓰면서 나름대로 즐거웠다. 뭘 더 바라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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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은 다른 곳에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김현철 옮김 / 새물결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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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신문의 칼럼에서 많은 작품을 발표한 작가의 작품 세계를 알기 위해서는 초기작, 대표작 그리고 최근작을 읽는 것이 첩경이라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난다. 올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거의 반세기 동안 꾸준하게 다양한 작품을 발표해왔다. 위의 공식에 요사 선생의 작품 세계를 대입해 보면, 초기작으로는 <녹색의 집>, 대표작으로는 <세상 종말 전쟁>과 <염소의 축제> 그리고 마지막으로 최근작으로 바로 이제부터 소개할 <천국은 다른 곳에>를 꼽을 수가 있겠다.

우선 그동안 꾸준하게 우리나라에 소개되어왔지만,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더불어 남미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면서도 대중적인 인지도는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미출간 작품들이 노벨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해서 다투어 소개되고 있다. 물론 그의 팬으로서 반가운 소식이다. <천국은 다른 곳에>가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국내에서 가장 빨리 요사 선생의 신간으로 출간되었기에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바로 주문 클릭을 눌렀다.

전작 <염소의 축제>에서 선보였던 서로 다른 층위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스토리텔링에 플래시백을 추가한 서사 구조는 <천국은 다른 곳에>서 단순해졌지만, 더욱 정교해진 형식으로 집중력을 높였다. 리얼리즘과 허구(픽션)의 조화 역시 인상적이었다. 실존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은 한 ‘평전 소설’의 재미와 감칠맛은 여전하다. 아마 번역을 맡은 역자 김현철 씨의 문학적 체화가 한몫하지 않았나 싶다.

이번에 요사 선생의 부름을 받은 역사 인물은 바로 19세기 중엽, 여성해방운동과 노동조합 운동을 통해 인류의 구원을 제창했던 플로라 트리스탄과 그녀의 외손자로 화성(畵聖)으로 추앙받는 고흐와 프랑스 남부의 아를에서 한 때 이상적 예술 공동체를 꿈꾸다가 야만과 원시 그대로의 예술혼을 불사르기 위해 폴리네시아 타히티로 갔던 외젠 앙리 폴 “코케” 고갱이다.

<염소의 축제>에 주인공 중의 한 명으로 등장한 상원의원의 딸이자 미국에서 교육받은 엘리트 여성의 한계에 대한 비평을 의식한 탓일까?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전작에 등장한 여자 주인공의 캐릭터에서 한참 앞서나간 여성운동가 플로라 트리스탄을 <천국은 다른 곳에>의 주인공으로 캐스팅했다. 19세기 중반 급격한 산업화로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비참한 현실을 목격한 플로라는 노동자와 여성의 연대를 통한 이상사회 건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던진다. 부르주아 계급의 귀부인을 “아리따운 기생충”이라고 부르며 플로라는 인류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경찰과 종교계의 지속적인 탄압에도 프랑스 전역을 순례하면서 <노동조합> 설립을 통한 노동자/여성의 권익 신장과 아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자고 주장한다. 작가는 1844년이라는 플로라의 인생 마지막 해의 강렬했던 투쟁에, 신산한 개인의 삶을 플래시백으로 다루고 있다.

여자 메시아 플로라 트리스탄의 이야기가 <천국은 다른 곳에>의 한 축이라고 한다면 그녀의 외손자로 전 세계를 누비던 선원에서 부르주아 계급의 유능한 주식 중개인에서 중년에 전업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폴 ‘코케’ 고갱이 다른 한 축을 맡고 있다. <천국은 다른 곳에>는 이렇게 플로라 트리스탄과 폴 고갱에 대한 교차 서사로 구성되어 있는데 별개의 소설로 읽더라도 무난한 정도의 개별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정치과 예술이라는 서로 다른 장르에서 나름대로 ‘천국’을 지향했던 인물을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가 상상력이라는 물감으로 재창조해낸 문학적 초상화다.

플로라와 코케 모두 어쩌면 자신이 편입되어 편안하게 여생을 보낼 수 있었던 부르주아 계급의 허위와 위선을 배격하고, 각각의 분야에서 냉정과 열정을 오가는 치열한 삶을 살았던 캐릭터다. 이 책을 읽으면서 오래전, 에릭 홉스봄의 원서강독을 하면서 들었던 공상적 사회주의자 생시몽-푸리에-프루동의 이름이 먼지 쌓인 기억의 창고에서 주술처럼 그렇게 소환됐다. 샤를 푸리에와 로버트 오언의 천민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사유재산제의 부정이라는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플로라는 기존의 결혼제도를 여성의 남성에 대한 구조적인 종속이라는 악의 근원으로 보고, 완벽한 남녀평등을 주창한다. 당시 산업화 과정에서 빚어진 착취와 불평등이라는 시대모순에 대한 새로운 인식 그리고 그에 따른 행동과 실천이라는 서사적 논거를 한때 사회주의자였던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양심은 정확하게 짚어낸다.

플로라 트리스탄의 삶이 냉정함을 담보한다면, 그 대척점에는 열정의 사나이 폴 고갱이 서 있다. 고갱의 파트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미친 네덜란드 놈”에 대한 언급에서는 이 화성에 대한 애증과 그의 죽음에 대한 고갱의 죄의식을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다. 고갱의 할머니 플로라가 이상적 공동사회에 대한 꿈을 꿨다면, 고갱은 예술 공동체로서의 아르카디아(Arcadia)의 건설을 희망했다. 하지만, 화성은 정신병으로 비참한 최후를 마쳤고, 고갱은 야성과 문명을 허물기 위해 폴리네시아의 타히티로 또 더 나아가 마르키즈 제도에까지 도달했지만 끝내 자본에 종속된 화가의 숙명(마몬 신의 노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한편, 기독교 문명인의 허울을 벗고 스스로 야만인/이방인이 되고자 한 고갱의 모습에서 1990년대 초반 페루 대선에서 후지모리에게 패한 후, 조국 페루를 떠나 스페인 국적을 취득한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얼터 이고(alter ego)가 읽혔다.

<천국은 다른 곳에>는 과거 역사 서술의 ‘마스터’라고 할 수 있는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후기 작품세계의 걸작이라고 단언하고 싶다. 정치와 예술의 변증법적 결합을 통해 ‘천국’이라는 이상향을 모색한 거장의 문향에 그만 흠뻑 취해 버리고 말았다. 이제 <세상 종말 전쟁>에 도전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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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노벨문학상의 위력을 실감할 수가 있었다. 작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루마니아계 독일작가 헤르타 뮐러의 경우에는 그동안 국내에 제대로 소개된 단독 작품이 없어서, 그녀의 작품을 읽기 위해서 몇 달을 기다려야만 했다.

하지만, 올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페루계 스페인 작가인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원래 페루 아레키파 태생이지만, 후지모리와의 대선에서 패배한 후 스페인 국적을 취득했다고 한다)의 경우에는 기존에 소개된 책들이 있어서 헤르타 뮐러 같은 갈증은 겪지 않아도 됐다. 물론 전작은 아니지만 <세상 종말 전쟁> 같은 그의 대표작이 이미 출간돼 있다.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과 함께 그의 저작에 대한 판권을 가지고 있는 출판사에서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미출간 작품의 소개를 서두르고 있다. 가장 먼저 발빠른 움직임을 보인 곳은 바로 새물결 출판사로 이미 그의 대표작인 <세계 종말 전쟁>을 비롯해서 <리고베르토씨의 비밀노트>와 <젊은 소설가에게 보내는 편지>를 소개한 바 있다. 이번에 국내 출판사 가운데서는 가장 빠르게 그의 2003년 작품인 <천국은 다른 곳에>를 이번 주에 출간한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작가의 팬으로 아주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천국은 다른 곳에>는 실존 인물은 후기 인상파 화가 폴 고갱과 그의 할머니 플로라 트리스탕에 대한 이야기로 모두 11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남태평양의 타히티에서 작품활동을 한 것으로 유명한 폴 고갱이야 다들 아는 작가이지만, 페미니즘 운동 창시자 중의 한 명으로 추앙받는 플로라 트리스탕의 이야기는 금시초문이다. 확실히 일반 독자가 잘 알지 못하는 소재로 삼아 ‘구라’를 풀어내는 탁월한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글솜씨에 다시 한번 경탄할 뿐이다. 다음달에 출간될 최신작 <켈트의 꿈>에서도 아일랜드 독립운동가 로저 케이스먼트를 소설의 주인공으로 삼았다고 하는데, 벨기에령 콩고와 페루 아마존 정글에서의 생활을 기록한 로저 케이스먼트의 일대기가 벌써부터 기대된다. 이 작품 역시 국내에서 출간될 것으로 믿는다.

다음은 뉴욕타임즈에서 <세상 종말 전쟁>과 더불어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대표작으로 소개한 <염소의 축제>다. 이 책을 발간한 문학동네는 작년에 세계문학전집 시리즈로 페루 아마존 정글에서 펼쳐지는 기상천외한 특별 작전을 그린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와 올해 그전에 <궁둥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던 <새엄마 찬양>을 소개하면서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붐을 조성했다.
 

 

 

 

 

 

 

 

 

'엘 헤페’라는 별칭으로 31년간 카리브해의 섬나라 도미니카 공화국을 철권통치한 독재자 라파엘 레오니다스 트루히요 몰리나의 암살 사건이라는 실제 사건을 소설의 소재로 삼았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특유의 현실과 상상의 세계를 넘나드는 특유의 작법 스타일이 그 빛을 발한다. 아직도 ‘푸쿠’라는 이름으로 도미니카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독재의 공모자로서의 죄책감과 자유의지를 박탈당한 인간의 맹목적인 충성이 어떤 결과를 불러 왔는지에 대한 작가의 냉철한 시선이 무척이나 인상적인 소설이다.

특히 이 소설의 번역은 개인적으로 국내에서 스페인 문학 번역에 있어 최고라고 생각하는 송병선 교수님이 맡아 주셔서 더 반가웠다. 책이 출간되기 전에 송병선 교수님의 개인 블로그를 찾아 <염소의 축제>에 대한 사전 정보는 물론이고, 번역에 대한 교수님의 의견도 알아보는 좋은 기회를 가졌다. 


 

 

 

 

 

 

 

희대의 독재자 ‘엘 헤페’ 트루히요를 퓰리처상에 빛나는 주노 디아스의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에서 만났던 독자라면, <염소의 축제>에 다시 등장하는 이 웃기는 짬뽕 같은 엉터리 독재자와의 해후가 반가울 것이다. 노벨문학상의 열기를 타고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다른 작품들도 빠른 시일 내에 국내에 소개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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