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엄마 찬양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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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전작주의에 도전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작가 중의 한 명인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새로운 책 <새엄마 찬양>이 출간됐다. 지난겨울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가 나왔다는 소식에, 그날로 총알 배송을 해서 단숨에 읽어 버렸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도 우연히 <새엄마 찬양>이 나왔다는 소식이 비슷한 코스를 거쳐서 읽었다. 해체된 가족의 흐뭇한 회복을 예상케 하는 제목과는 달리 발칙하고 도발적인 바르가스 요사의 신화와 그림 이야기 그리고 에로티시즘을 적절하게 반죽한 <새엄마 찬양>은 모름지기 글쓰기는 이래야 한다는 전범(典範)처럼 그렇게 나에게 다가왔다.

페루의 아레키파 출신인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십 대의 끝 무렵에 자신보다 무려 13살이나 나이가 많은 훌리아 아주머니가 결혼해서 가족을 경악시키기도 했던 범상치 않은 커리어의 보유자다. 타고난 작가인 그가 이 좋은 소설의 소재를 그대로 썩힐 리 있겠는가. <나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라는 제목으로 1950년대 페루 라디오 방송국을 휩쓸었던 드라마 열풍과 자신의 러브 스토리를 조합한 창작을 선사한 바 있다. 1957년부터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바르가스 요사는 1990년에 페루 대통령 선거에 나서기도 했다. 수많은 라틴 아메리카의 작가 중에서 그만큼 파란만장한 삶의 굴곡을 경험한 작가도 많지 않을 것 같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그리고 카를로스 푸엔테스와 같은 라틴 아메리카 문학계의 거장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새엄마 찬양>(Elogio de la madrastra)을 1988년에 발표했다. 이 책에 실린 모두 14개와 하나의 에필로그는 서로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중층적으로 연계되어 있어, 에로틱한 상상의 경계를 넘나든다. 은근하면서도, 때로는 도발적이고 발칙하기까지 한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글에 책장을 넘기는 손길이 분주해진다.

아내를 잃고 최근에 새장가를 든 리고베르토 씨, 그의 새로운 여신이자 삶의 활력소인 루크레시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를 사랑하는 의붓아들 알폰소(폰치토)가 <새엄마 찬양>의 세 주인공이다. 이 세 명의 캐릭터는 제 나름대로 선이 굵은 특징을 독자에게 선보인다. 우선 아버지 리고베르토 씨는 일주일에 매일 자신의 신체 부위를 사랑하는 마음에 세정식이라는 이름의 일면 경건해 보이는 의식을 엄숙하게 진행한다. 그의 이 의식은 자신의 에로틱한 상상에 불을 지르는 음화를 몰래 보면서 새로 얻은 아내와의 뜨거운 밤에 대한 즐거운 상상에 전초전이다. 리고베르토 씨는 이제 막 마흔 살이 된 아내 루크레시아의 둔부, 특히 궁둥이에 대해 리디아의 왕 칸다울레스 만큼이나 주체할 수 없는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뭐 여기까지는 좋다, 법적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 상상일테니까.

문제는 당장에 죽을 지도 모르고 달려드는 주변의 나방을 유혹하는 듯한 아름다움의 화신 루크레시아다. 완전하게 실패로 끝난 첫 번째 결혼의 트라우마를 가진 그녀에게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 알폰소의 존재는 껄끄럽기만 하다. 하지만, 폰치토의 거침없는 새엄마를 받아들이겠다는 사랑 고백으로 한시름 놓는다. 그러던 어느날, 하녀 후스티니아나의 어처구니 없는 고변을 듣고 루크레시아는 충격에 빠진다. 어린 천사 같은 얼굴의 폰치토가 자신이 목욕하는 장면을 훔쳐 본다는 게 아닌가! 그야말로 마른하늘의 날벼락 같은 소리에, 루크레시아는 후스티니아나의 고발을 애써 무시한다. 사실은 언젠가 밝혀지기 마련인 법, 폰치토의 가늠할 수 없는 욕망의 그림자를 알게 된 그녀는 분노와 수치심으로 뒤범벅이 된 가운데 미래에 파국을 불러올 관능의 고갱이를 뽑아 올린다. 그리고 예정된 수순대로 이야기는 점점 그 흥미를 더해간다.

리고베르토 씨와 루크레시아 그들이 얽힌 삼각관계에 정점을 찍는 것은 바로 아들 폰치토다. 책을 읽으면서 놈은 천사의 얼굴을 한 타락천사 루시퍼의 환생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게 됐다. 제목만 보고 파편화된 가정의 화목한 재구성을 상상했었는데, 이야기는 그 반대로 치닫기 시작한다. 결국 한 여자를 사이에 둔, 아버지와 아들의 파워게임은 이 ‘앙팡 테리블’(enfant terrible)의 치밀한 계산과 조종에 의해 일탈을 거쳐 파국을 정조준한다. 은밀한 에로티시즘의 행복은 그 누구와도 나눌 수 없다는 권력의 본질을 슬쩍 건드린다. 캐릭터 중에서도 특히 공을 들여서 창조해낸 폰치토는 모든 상황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철저하게 통제한다. 이 오만한 녀석에 대한 작가의 묘사는 경이롭다 못해 외경감이 들 정도다.

훔쳐보기 다시 말해서 관음증(voyeurism)으로 시작된 관능에로의 유혹은 아슬아슬한 경계마저도 훌쩍 뛰어넘는다. 요즘 한창 유행인 막장드라마는 저리가라 할 정도로 자제의 울타리를 부순 주체할 수 없는 관능은 활화산에서 지금 막 터져 나온 용암처럼 뜨겁게 분출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금기(taboo)는 깨어지기 마련이고, 그럴수록 더 자극적이지 않은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바로크 혹은 로코코 양식의 회화에 나타난 에로티시즘의 본질을 해석하고, 전설과 신화의 이야기를 들줄과 씨줄로 엮어서 명징하면서도 곤욕스러운 중층적 텍스트를 빚어낸다. 그렇게 얼기설기 짜인 텍스트의 이중성(duality)은 참 매혹적이다. 손대면 그 빛나는 아름다움에 타버릴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얼핏 들 정도로.

<새엄마 찬양>의 고갱이는 은근한 즐거움으로 귀착된다. 너무 재밌어서 당장에라도 주변 사람들에게 추천해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또 한편으로는 날것 그대로의 생생한 에로티시즘 미학이 주는 당혹감 때문에 주저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양가적 감정이 상충하는 <새엄마 찬양>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에, 번역을 맡아준 송병선 교수의 깔끔한 번역까지 어우러져 그야말로 최고의 재미를 선사해줬다. 초강력 슈퍼울트라 추천해 주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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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트 로커 - The Hurt Locker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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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를 하기에 앞서 솔직히 괜찮은 영화라고 생각은 하지만, 영화 포스터에서 말하는 대로 “전 세계를 전율시킨 위대한 걸작”급의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난 아카데미 수상식에서 최우수 작품상과 최우수 감독상으로 연출을 맡은 캐서린 비글로우가 전 남편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던 문제작 <허트 로커>를 이제야 보게 됐다.

70년대 월남전이 미국에게 큰 상처를 안겨 주고, 영화소재로 줄창 우려먹게 했다면 새로운 천년에 비슷한 역할을 이라크 전쟁이 맡게 됐다. 이제 더 이상, 미국의 명분도 없는 비도적적인 전쟁의 발단과 원인에 대한 성찰은 보이지 않는다. <허트 로커>에서는 그렇게 이라크에 파견된 폭발물 처리반에 대한 일상을 그린다.

최첨단 시대의 전쟁답게, 군인이 직접 폭발물에 접근하지 않고 로봇을 사용해서 폭발물을 점검하는 영화 초반부가 인상적이다. 하지만, 땅개가 고지에 깃발을 꽂아야 비로소 전투가 완료되는 것이라고 했던가. 결국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은 사람이 해야 한다. 로봇이 끌고 가던 폭발물 수레바퀴가 부서지자 브라보 중대 폭발물 처리반의 톰슨 하사가 직접 방호복을 입고 현장에 투입된다. 거의 완료하고 돌아오려는 순간, 이라크 저항군으로 보이는 거수자가 핸드폰으로 폭발물을 날려 버린다.

현장에서 폭사한 톰슨의 후임으로 윌리엄 제임스 하사(제레미 레너 분)가 부임되어 온다. 그는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샌본 병장(안소니 마키 분)과 스페셜리스트 오웬 엘드리지(브라이언 게러티 분)와 함께 이라크 곳곳에서 벌어지는 폭탄 테러 처리에 나선다. 감독 캐서린 비글로우는 왜 저항군들이 미군에 저항하기 위해 폭발물을 설치하고 저항에 나서는지에 대한 이유를 캐기 보다는 그들의 일상에 초점을 맞춘다.

일반 병사들의 순찰도 그렇지만, 항상 죽음의 위험이 도사린 폭발물 처리반의 엄청난 스트레스 가운데서도 제임스 하사의 일견 무모해 보이는 도전에 샌본 병장은 분노의 주먹을 날린다. UN 건물 앞에 이중으로 교묘하게 설치된 폭발물을 솜씨 좋게 처리해낸 제임스를 찾은 대령은 그의 노고를 치사한다. 아프간에서부터 자그마치 837건에 달하는 폭발물 처리 기록은 아무나 세우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부대 앞에서 짝퉁 DVD를 파는 이라크 소년 베컴과 친해진 제임스는 소년과 축구를 하며 내기를 하기도 한다. 한편, 제임스의 팀원인 엘드리지는 톰슨 하사의 죽음에 자신이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고 죄책감을 느낀다. 군의관 존 캠브리지(크리스찬 카마고 분)는 엘드리지에게서 그런 생각을 떨쳐 버리게 하기 위해 노력한다.

제임스 팀은 작전 중에 현상수배 중인 이라크 포로들을 잡은 일단의 용병들을 만난다. 타이어가 펑크났다는 팀 리더(랄프 파인즈 분)의 말을 듣고 그들을 돕던 중에, 보이지 않는 이라크 저항군 저격수의 총격을 받고 3명이 KIA(killed in action) 당한다. 저격용 총인 바렛으로 그들을 소탕하는데 성공한 제임스와 샌본 그리고 엘드리지는 비로소 팀으로 서로를 인정하기에 이른다.

계속되는 임무 중에, 군의관 존 캠브리지도 작전에 함께 합류하게 된다. 제임스는 어느 버려진 건물에서 인간폭탄으로 사용되기 위해 죽은 소년 베컴을 발견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저항군의 교묘한 위장 폭탄으로 존 캠브리지가 폭사하고, 그의 헬멧만이 나뒹군다. 제임스는 베컴의 복수를 하기 위해, 그의 집을 찾아가지만 다음날 다시 부대 앞에서 베컴을 만나고 자신이 죽은 소년과 베컴을 착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음 작전에서 원격으로 폭발을 유도한 저항군을 잡기 위해 무모하게, 적진에 뛰어 들었다가 엘드리지가 다리에 총을 맞게 되고 또 마지막 미션에서는 인간폭탄이 된 이라크 민간인을 구하려다 죽을 뻔하기도 하면서 샌본은 더 이상 스트레스를 참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365일 로테이션을 마치고 이혼한 와이프와 아들에게로 돌아온 제임스는 다시 이라크를 찾는다.

역설적이지만 적어도 독재자 후세인의 통치 하에서는 이 정도로 극심한 혼란을 겪지 않았던 이라크는 미국의 침공 이래 거의 내전에 가까운 수준의 폭력이 일상화되었다. 미군을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으로 인식한 저항군의 끊이지 않는 총격과 폭탄공격에 민간인을 비롯한 미군의 인명 손해는 날로 치솟고 있다. 이라크에 독재를 종식시키고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겠다는 미국의 공언은 공염불이 되어 버렸다.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출구전략을 세우겠다는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대선공약 역시 요원하기만 하다.

극심한 사회혼란과 무질서 그리고 세계 2위의 원유대국이 물자부족으로 시달리는 이라크의 참담한 현실 대신 캐서린 비글로우는 현지 미군의 일상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미군 험비 차량에 돌을 던지는 이라크 아이들의 모습이 오히려 더 현실적이다. 잘못 시작된 이라크 전쟁에 대한 성찰 대신 국가와 할리버튼  같은 군수업체를 위해 오늘도 이라크에서 피 흘리고 있는 미군 병사들을 통해 우회적으로 반전 메시지를 던지려고 했던 걸까? 하긴 연출자가 누구나 다 마이클 무어처럼 노골적일 필요는 없을 테니까.

진짜 메시지는 집에 돌아온 제임스가 아들래미를 얼르면서 한 말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장난감이나 동물인형 같은 것에 반응하는 아들을 보며, 어렸을 적에는 자신에게 의미 있는 것들이 참 많지만 자신처럼 나이가 들게 되면 그런 의미 있는 것들은 한두가지로 줄어 들게 된다고. 제임스 자신처럼, 가족이나 따분한 일상보다도 전쟁에 미친 전쟁광(warmonger)에 더 동정을 하게 된다고 암시한다. 그리고 가족을 뒤로 하고 다시 군복에서 방호복으로 바뀌면서 폭발물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장면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전체보다는 다시 한 번 개인주의적 관점에서 전쟁을 바라볼 수 있는 그네들의 관점이 부러웠고, 반전 메시지를 담은 영화가 인정받는 현실은 더 감명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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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적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김현균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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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책들에서 로베르토 볼라뇨 전집이 나온다고 해서 참 오래 기다렸다. 지난 2월에 열린책들에서 아후벨이라는 탁월한 일러스트레이터까지 동원해서 표지 작업을 하고 666원 짜리 버즈북으로 한껏 분위기를 내서 곧 그의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으리라고 기대를 했었는데, 볼라뇨 전집의 제2탄인 <부적>을 만나기 위해 넉 달을 기다려야 했다. 세 번째인 <먼 별>도 이번 주 안으로 받아보게 되길 기대한다.

내가 처음 읽었던 볼라뇨의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사실과 가상의 세계를 오가는 그의 뻔뻔하기 짝이 없는 작법에 그만 매료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칠레의 밤>은 피노체트 독재정권 아래서 부역했던 어느 신부와 비밀조직의 고문장소로 씌인 파티하우스 이야기 말고는 사실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에 나온 <부적>과 <먼 별>을 주문하면서도 우려가 됐다.

솔직히 말해서 <부적>은 재밌는 소설이 아니다. 얄팍한 책의 두께에 쉽게 읽겠거려니 하고 달려들었다가 거의 일주일이나 걸려서 간신히 다 읽었다. 멕시코시티에서 올림픽이 열리던 1968년 9월, 멕시코 국립 자치 대학교(UNAM) 습격사건 당시 대학에 있었던 주인공 아욱실리오 라쿠투레의 잊을 수 없는 체험을 바탕으로 한다. 보수 우파가 장악하고 있던 멕시코 정부군이 올림픽을 앞두고 민주화를 요구하던 학생과 시민 200여명을 무참하게 학살했던 역사적 사건이 로베르토 볼라뇨에 의해 문학적으로 재구성된다. 그런 면에서, <부적>은 증언문학의 기능도 가지고 있다고 볼 수가 있겠다.

우루과이 출신 아욱실리오는 대학 부근에서 근근하게 임시직으로 일하면서, 레온 펠리페나 페드로 가르피아스 같은 대시인들의 허드렛일을 해주면서 그들과 교류한다. 그녀는 1968년의 학살사건을 경험하면서 그 이전의 삶과 결별하게 된다. 그 체험은 마치 1973년 피노체트의 쿠데타나 1980년 광주를 연상시킨다. 실존적 삶은 시대의 전환을 이루게 하는 일대 사건을 통해 단절을 통한 의식과 사고의 총체적 변화를 강요당한다.

이 때, 아르투로 벨라노가 등장한다. 이 십대소년은 명백하게 ‘틀라텔롤코광장 학살사건’ 당시 멕시코에 살던 작가 로베르토 볼라뇨의 페르소나다. 벨라노는 50년대에 태어나 백척간두에 선 살바도르 아옌데의 인민연합을 지지하기 위해 조국 칠레로 갔다가 피노체트의 쿠데타를 경험한 세대를 상징한다. 아옌데를 지지한다는 이유만으로 삶을 마감했던 혁명동지의 죽음을 뒤로 하고 벨라노는 다시 멕시코시티로 돌아온다.

시대정신의 붕괴를 체험한 벨라노에게 죽음은 더 이상 공포의 존재가 아니다. 멕시코시티에서 또래 친구 에르네스토 산 에피파니오를 남창들의 왕으로부터 구해내는 무모한 짓도 서슴지 않는다. 이 장면에서도 아욱실리오는 등장해서, 목숨을 건 모험에 동참한다. 그녀와 화가 레메디오스 바로와  체 게바라의 옛 연인으로 알려진 릴리안 세르파스의 교류도 빠지지 않는다.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쿠바 혁명에 투신하기 전에 멕시코를 전진기지로 삼았다고 했던가. 그런 점을 고려해서 볼라뇨는 카스트로와 면담하기 원하는 이태리 로맨티스트의 이야기도 슬쩍 끼워 넣는다.

칠레에서 태어나 멕시코, 프랑스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페인에서 생을 마친 로베르토 볼라뇨는 평생 이방인의 운명을 지고 살았다. 짧은 소설 <부적>에서도 그는 철저하게 이방인의 시선으로 68년의 전설을 해부하고, 재구성해서 독자에게 들려준다. 당시 사회적 정의와 변화를 추구하던 젊은이들은 이제 나이가 들어, 사회를 주도하는 계층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주장하던 빈부의 격차, 실업문제 그리고 민주화 요구는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라틴 아메리카 청년들의 멕시코에서 시작된 변혁에 대한 갈망은 5년 후 칠레에서 일어난 군부 쿠데타로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맞이한다. 아욱실리오를 괴롭히는 트라우마는 바로 이런 일련의 정치적 사건을 그 저변에 깔고 있다. 로베르토 볼라뇨는 과거의 참담한 실패와 고통을 복기하면서, 놓을 수 없는 희망의 끈에 대해 진중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잃어버린 영웅적 위업에 대한 사랑, 욕망 그리고 쾌락에 대한 부적이 필요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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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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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에로티시즘 소설이다, 그야말로 아름다움에 불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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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의 역사 한홍구의 현대사 특강 2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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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 교수의 <특강> 시리즈 제2탄이다. 오리지널인 1탄 <특강>에서 대한민국 사회에서 현재 진행형인 이슈들을 돌아보았다면, 이번 2탄에서는 지금으로부터 딱 30년 전인 1980년 5월의 광주에서 시작되는 우리나라 현대사를 관통하는 역사의 현장에 초점을 맞춘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읽다가, 그냥 잠깐 집어 들어서 읽기 시작했는데 책이 가진 마성 때문일까? 이 책을 다 읽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부랴부랴 다 읽어 버렸다.

모두 6장으로 구성된 한홍구 교수의 특강을 순서대로 읽지 않고, 그야말로 ‘역주행’하면서 읽어 가기 시작했다. 작년에 서거한 노무현 대통령 이야기가 가장 궁금했다. 마지막으로 개천에서 난 용이 될 거라는 작가의 말이 왜 이렇게 가슴이 와 닿는지 모르겠다. 한홍구 교수는 모름지기 역사학자란 역사의 공간을 채워야 하는 법이라고 하셨는데, 요즘에는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누리꾼들이 노무현 대통령 서거 후 그의 모습이 담긴 사진들을 통해 그가 쓴 역사를 재조명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말이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시작에서부터 우리 사회의 비주류였던 노무현 대통령은 정치판에 뛰어들어서도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고, 김영삼의 3당 합당에 육탄으로 저항했고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손쉬운 길 대신 그야말로 가시밭길을 간 정치인이었다. 극적인 대선 레이스 끝에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나서도, 보수와 진보 모두에게 욕을 먹게 그의 상황이 참 안타까웠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민주화가 보수 세력이 재집권한 지 몇 년이 되지 않아 다시 되돌려지는 작금의 상황이 참 먹먹하게 다가왔다.

온갖 욕망을 부추기는 이명박 정권 아래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한홍구 교수는 작년에 발생한 용산참사를 통해 재조명한다. 그리고 무슨 일만 터지면 법치를 내세우면서도 정작 자신들에게 법치를 적용하지 않으려는 그들을 한홍구 교수는 ‘법비’(法匪)라는 말로 에둘러 표현한다. 자신들의 유리한 법원의 판결에 대해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조금이라도 정치적으로 불리한 판결은 그들이 즐겨 사용하는 “떼법”으로 저항하고 매도하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 아니던가.

그리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한국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광주를 만난다. 광주에 대해서는 그저 영화 <화려한 휴가> 정도로 밖에 알지 못하는 사실에 대한 알파와 오메가를 한홍구 교수는 차분하게 설명해 준다. 헌법을 고쳐 가면서까지 최고 권좌를 포기하지 못했던 박정희 유신독재의 결말이 잉태하고 있던 비극은 전두환 일당의 군사반란과 5-18 민주화항쟁(광주항쟁)과 그에 대한 폭력적인 진압으로 귀결됐다. 저자는 그렇게 광주를 경험한 이들이 새로운 시대의 주역이 되었다고 한다. 비록 미완이기는 했지만, 전두환 시대를 끝낸 1987년의 6월 항쟁과 그 후에 이어지는 일련의 정치 역정을 나열한다.

한 때는 민주화를 주창하는 탁월한 야당지도자였다가 집권욕에 어두워 야합을 통해 이상하게 변해 버린 전직 대통령에 대한 강의도 흥미로웠다. 한때 엄청난 국민의 지지를 받으면서 개혁 드라이브를 구사하던 문민정부는 어느 순간, 아무런 권한도 없는 대통령의 아들이 소통령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면서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다. 집권 말기에 벌어진 단군 이래 최악이라는 국가 부도 사태는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치러진 1997년의 대선으로 마침내 선거를 통한 평화적인 정권 교체를 체험하기도 했다.

마지막 보론에서 한국 야당사와 진보정당사를 다루면서, 한홍구 교수는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한다. 비록 역주행을 경험하고는 있지만, 독재정권 하의 몸으로 뛰는 민주화 운동과는 다른 젊은 대중에게 호소할 수 있는 어젠다를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까 자문하게 된다.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이야기할 거리가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구닥다리 시절 경험주의나 일방통행이 아닌, 서로 충분한 대화와 소통을 통한 실천 가능한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지금 이 순간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우리의 지상과제라는 것을 이 ‘특강’을 통해 다시 한 번 깨닫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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