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나의 마나님
다비드 아비께르 지음, 김윤진 옮김 / 창비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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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주제는 무지하게 간단하다, 이 세상의 평화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바로 아내에게 순종하고 살라는 거다. 잘 나가는 스포츠카나 4X4 랜드로버 같은 것은 꿈도 꾸지 말고, 안전하게 아이들을 태우고 다닐 수 있는 미니밴을 타고 다니며(물론 과속은 절대 금물), 맛좋은 육류 대신에 녹색 빛이 들어간 야채들을 먹을 것이며, 나이트클럽? 잊으라! 아내의 권위와 명령에 무조건 복종한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맛볼 수 있는 지고한 평안과 안락이 남편 그대의 것일지라. 뭐 이 정도로 요약이 되겠다.

옮긴이는 책의 말미에서 1968년 프랑스 학생혁명 이래 부권이 몰락하고 여성권의 신장이 놀랄만하게 진전되었다는 사회분석학적 입장을 친절하게도 설명해 주고 있다. 뭐 그러지 않아도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에는 이 소설/에세이의 마지막 등장하고, 원래 제목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인간/남자박물관에 등장하는, 우리의 조상들이라 간주되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시절 가족의 안위와 생존을 책임지던 시절의 남자들의 의무들을 이제는 여성들도 다 할 수가 있게 되었단 말이다.

<오, 나의 마나님>의 저자 다비드 아비께르의 현실에 대한 접근방법은 자신(남성)의 희화화다. 젊어서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로 멕시코와 터키를 누비던 젊은이였었지만, 아내와 만나고 가정을 꾸리고 더더군다나 두 명의 딸내미들을 낳아 기르게 되면서부터는 여느 중년 남성들이 걷게 되는 과정을 경험하게 된다. 아내의 게(gay) 남자친구를 질투하고, 게이 잡지에 흥미를 느끼게 되고, 멋진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묘령의 아가씨들을 흘끔거리게 되는 전형적인 남성상을 담담하게 그려 내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일전에 읽은 에프라임 키숀의 <세상에서 가장 멋진 아내>라는 책과 비교를 안할래야 안할 수가 없었다. 키숀의 글에서는 가정의 일상사에서 엿볼 수 있는 재치 넘치는 그만의 골계미를 느낄 수가 있었다. 한편 아비께르의 글에서는 앞치마를 직접 두르고 요리라고는 계란 반숙 정도 밖에는 못하는 아내를 대신해서, 아내의 친구들에게 그럴싸한 요리를 대접하는 21세기 남편 상에 대한 구구절절한 묘사들이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동시대를 살면서도 너무나 다른 환경 속에서, 같으면서도 다른 삶의 모습을 관조하는 맛이 이 책 <오, 나의 마나님>에는 담겨져 있다. 특히 자신보다 직장에서 더 인정을 받고 무려 120명이나 되는 팀원을 이끌면서, 월급도 더 많이 받는 아내에 대한 보이지 않는 열등감을 경외감으로 치환시켜 유머를 빚어내는 작가의 솜씨는 가히 일품이었다.

주인공은 아내와 가정이라는 울타리에서 계속해서 탈출하려는 시도를 하지만, 결국에 자신이 돌아가야 하는 곳은 가정이라는 것을 소심하게 보여 주고 있다. 더 나아가서 본다면 아마 자신의 가족을 그 누구보다도 사랑한다는 고백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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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 1권
굽시니스트 지음 / 애니북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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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 우연히 디시갤에서 몇 편 본 굽시니스트라는 양반의 <본격 제 2차 세계대전 만화> 1권 출간 소식을 듣고 바로 내지르게 됐다. 소위 말하는 서브컬처를 표방하는 만화라고 하는데, 서브컬처에 오덕후에서 진화된 밀덕후 양반들이 좋아하는 주제인 히틀러와 2차 세계대전이 결합해서 탄생한 소품이다.

일단 1권에는 어떻게 해서 오스트리아 출신 히틀러가 독일에서 권력을 잡고, 1차 세계대전 후 패배감과 대공황으로 비롯된 엄청난 인플레와 살인적인 실업에 시달리던 독일인들을 전쟁으로 내몰았는가에 대한 간단한 분석과 함께 바로 전쟁이 시작된다. 물론 그전에 잠깐 히틀러가 집권 후에 중부 유럽에서 벌인 팽창주의가 소개된다.

책에 소개되는 이야기들은 아마 세계대전 팬들이라면 거의 다 아는 ‘빤한’ 이야기들이다. 그래서 어쩌면 참신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이미 퍼갈리온들이 사방팔방으로 퍼나른 그림들이라 그런지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가장 재밌었던 폴란드 전격전 당시 판지로 만든 전차라는 엉뚱한 루머에 속아 당시 유럽 최강을 자랑하던 폴란드 기병 소위 “윙드 후사르” 창기병들이 전차를 향해 돌격했노라는. 그것조차 이탈리아군 종군기자의 조작이라고 했던가.

역시 히틀러의 실제적인 패망을 불러온 재앙이었던 독소전 편에서는 역시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포스를 보여 주었다. 자본주의 시스템의 옹호를 받으며 성장한 국가사회주의, 즉 나치즘과 소비에트 볼셰비키의 공산주의는 서로 병존할 수가 없는 불구대천의 이데올로기였다. 그 결과 니가 죽지 않으면 내가 존재할 수 없다는 식의 전멸전에 돌입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바로 에피소드 끝나고 나서 등장하는 본문에서 패러디된 각종 애니들에 대한 소개. 지극히 불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그 공간을 이용해서 내용을 늘리는 게 낫지 않았을까. 전문가들에게 너무 깊이가 얕은 느낌이었고, 딱히 말할 순 없지만 무언가 뒤죽박죽이었다. 소장할 생각이라면 다시 한 번 재고해 볼 것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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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내게로 왔다 - 이주향의 열정과 배반, 매혹의 명작 산책
이주향 지음 / 시작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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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그렇게 무더웠던 여름이 저 멀리 스러져 가고, 가을이 다가 왔다. 그리고 이주향 선생의 동서고금의 사랑을 다룬 러브 에세이 <사랑이, 내게로 왔다>와 만나게 됐다. 그런데 제목에서 보여 주듯이 사랑은 어디까지나 객체인 것일까? 그 관계는 너무나 명확하다. 나에게 사랑이 왔다는 바로 그 선언. 사랑이 그렇게 나를 찾아 왔다고 “메신저”인 <사랑이, 내게로 왔다>가 말하고 있다.

이 책에는 모두 33편의 문학 작품 혹은 신화, 구전설화 등 인류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이야기들에 등장하는 각양각색의 다양한 사랑의 이야기들이 흘러넘치고 있다. 책을 읽는 이들이라면 그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중에 하나인 <오셀로>에 나오는 오셀로와 그의 아리따운 아내 데스데모나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에서 시작을 해서, 헤세의 <데미안>과 그 짝을 이루는 막스 뮐러의 <독일인의 사랑>, 중세 시성이라 불렸던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베아트리체의 사랑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이들에게 읽혔다는 초대형 베스트셀러 성경에 이르기까지 너무 많은 사랑의 텍스트들이 쉴 새 없이 전개된다.

각각의 사랑 이야기들이 그들 고유의 아우라를 가지고 있듯이, 그 사랑의 이야기들을 읽어내고 자기에게 맞게 체화시키는 것도 모두 읽는 이들에게 달려 있을 것이다. 아주 어려서 영화로 봤고, 이제는 그 기억마저 희미해져 버린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의 주인공 라라와 지바고의 사랑은 영화의 맨 마지막에 나오는 러시아의 민속악기 발랄라이카 연주가 빚어내는 진한 페이소스 속으로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대학교 교양국어 시간에 어느 교수님의 사랑의 정의가 지바고를 떠나는 라라의 모습에서 떠올랐다. 진정한 사랑은 소유로부터의 해방이었노라고...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성 프란체스코>를 통해 그린, 성자 프란체스코의 신에 대한 사랑은 또 다른 차원에서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였다. 신산하기 그지없는 우리네 삶 가운데 변화될 수 있는 것과 변화될 수 없는 것을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번뇌 때문에, 프란체스코는 하나님에게 그 지혜를 달라고 간구한다. 진실한 신의 사랑을 깨닫는 순간,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주저 없이 내던지고 ‘절대가난’을 선택하고 세상의 고통 속으로 뛰어드는 프란체스코의 모습에서, 너무나 풍족한 현대문명의 혜택을 받으며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삶의 궁극적인 방향을 제시해 주는 듯싶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에로스와 프시케의 이야기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함축하고 있다. 인간의 신분으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견주는 교만으로 죽음과 결혼하게 되는 저주 받은 운명을 지게 된 프시케. 하지만 프시케에게 죽음이라는 남편은 바로 사랑의 신 에로스였고, 프시케는 숙명적인 타나토스(죽음)로부터 현세적인 낙원 즉 다시 말해서 사랑을 얻게 된다. 물론 프시케는 금기였던 자신의 남편의 존재를 알려고 하다가 다시 한 번 위기를 맞는다. 프시케(자아)는 계속해서 사랑을 의심하고 확인하려고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신화에서 보이는 인간과 신들의 사랑이, 오늘날 현세의 그것과 너무나 비슷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작가가 공을 들여서 썼다는 각 에피소드 말미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가상 인터뷰는, 식사 후에 후식으로 제공되는 감칠맛 나는 매실차 같다.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혼란스럽거나 혹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에 대해서 마치 실존 인물들에게 하는 듯한 멋진 인터뷰로 명쾌한 해설로 보는 이의 속을 시원하게 만들어 준다.

각자가 만들어 가고 있는 사랑의 방정식은 너무나 미묘하고 복잡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얄팍한 정보만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가 없는 것 같다. 그 부족한 부분들을 보충하기 위해서라도, 이주향 선생의 에세이 <사랑이, 내게로 왔다>는 안성맞춤인 것 같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충고하고 싶은 점은, 이 책을 보게 되면 또 보유도서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 같다. 그동안 미처 보지 못한 너무 좋은 책들이 소개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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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더미의 유산 - 한국전쟁에서 이라크전쟁까지 세계 역사를 조종한 CIA의 모든 것
팀 와이너 지음, 이경식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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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나오기 전에 미 중앙정보부(CIA)에서 이 책의 출간에 대해서 항의를 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미 50년도 더 지난 일들에 대해 비밀등급 해제가 된 마당에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장장 1000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전 세계 도처에서 미국의 대외관계 비밀업무를 관장하고 있다는 CIA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전략사무국(OSS)을 그 모태로 해서 탄생이 되었다. 사실 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대외 첩보 및 정보를 다루는 국가기관이 전무했고,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그 필요성이 대두되게 되었다. 물론 세계대전이 끝나고, 소련과의 치열한 첩보전과 세계 패권을 다투던 상황에서 비밀 정보기관의 필요성은 긴급을 요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정보기관의 업무 계획과 장기적인 플랜 없이 거의 급조되다시피 한 CIA는 그 태생에서부터 라이벌 소련의 KGB에 적수가 되지 않았다. 그전은 물론 지금까지도 CIA의 대외 정보부 의존은 여전한데, 결국 1947년 9월 CIA의 정체성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던 트루먼 대통령 치세 하에서 CIA는 출범하기에 이른다. 연이은 공산주의 소련의 위협에 대항해서 CIA는 서유럽 각지에서 국회의 승인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비밀 업무에 뛰어든다.

예나 지금이나 비밀정보 업무를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했다. CIA는 전후 서유럽 경제부흥 계획으로 엄청난 자금이 투입된 마셜 플랜으로부터 비밀리에 무한정의 자금을 지원 받아(그 소용 처를 밝힐 필요도 없었던), 서유럽 각지에서 공산주의 활동에 대한 각종 비밀 업무에 준군사적 활동까지 아우르는 광범위한 활동에 돌입하게 된다. 특히 CIA는 동독과 동유럽을 석권한 소련군에 대항하기 위해, 나치 전범들과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 협력했던 우크라이나 유격대 출신의 난민들을 포섭해서 소련의 배후에 낙하시켜 후방을 교란시키려는 부단한 하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던 활동에 소모적인 자금과 인력을 투입했다.

비밀리에 진행되었다고는 하지만 거의 공개적으로 들어났던 CIA의 그 어느 활동도 전혀 효과적이지 못했으며, 정말 중요했던 사실들이었던 소련의 핵무기 개발 상황 그리고 냉전 무력 충돌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전의 발발 조차도 CIA는 예측해 내지 못하면서 비등하는 국내의 비난에 직면해야 했다.

하지만 CIA 조직은 트루먼이 이끄는 민주당 정부를 대신해서 들어선 아이젠하워 정부 하에서 비로소 빛을 보게 된다. 실질적으로 CIA의 모든 비밀활동을 주재했던 프랭크 와이즈너와 앨런 덜레스 국장 아래서 CIA는 미국의 국익과 전 세계의 헤게모니 장악을 위한 발걸음을 내딛게 됐다. 게다가 CIA 조직은 인원과 자금 면에서 해가 갈수록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우선 1953년 석유 국유화 조치를 단행하면서 점점 소련 측으로 가까워져가고 있는 징후를 보인 이란의 모사데드 정권을 무차별 금품살포와 준군사적 활동 다시 말해서 폭력에 근거한 테러를 부추기는 가운데 정부를 전복시키는데 성공했다. 그 후 팔레비 샤는 20여 년간 폭압적인 독재정치를 펼친 끝에 결국 1979년 회교혁명으로 권좌에서 내쫓기는 신세가 되고, 이 근본주의 무슬림 혁명은 CIA와 미국에게 또 다른 재앙으로 다가오게 되는 계기가 됐다.

또 다른 CIA의 성공신화는 소위 “성공작전”으로 불리는 과테말라의 아르벤스 정권을 전복시킨 사건이었다. 점점 사회주의화 되어가는 과테말라는 미국의 안마당으로 간주되던 중앙아메리카에서 그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결국 CIA는 유언비어와 역시 뇌물 그리고 카스티요 아마스라는 반정부 인사와 반군을 지원하면서 과테말라에 합법적으로 수립된 정부를 전복시키는데 전력을 다하게 된다. 막판에 가서는 과테말라는 고사시키기 위해 해상봉쇄를 하고  미공군기까지 동원해서 과테말라를 폭격하는 등 그야말로 갖은 방법을 동원해서 마침내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는 했지만 그 성공신화는 행운의 연속이었다.

일본에서도 전범으로 기소된 기시 노부스케를 공공연하게 지원하면서, 새로 창당된 자민당과 야심찬 젊은 정치인들에게 막대한 자금을 제공하면서 맥아더 방식의 군정으로 일본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CIA가 창조해낸 새로운 방식으로 미래의 일본을 지배하고 동아시아에서 최대한의 미국의 국익을 확보하기 위한 밀월관계를 조성하기에 이른다.

물론 냉전 초기에 이런 성공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중근동에서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시리아에서의 공작실패와 제3세계 론을 주창했던 수카르노를 제거하기 위해 지원했던 인도네시아 작전과 동베를린에서 소련의 정보를 얻기 위해 역시 많은 자금을 들여서 준비했던 땅굴작전들은 그야말로 처참한 결과를 불러 일으켰다. 게다가 아이젠하워 치세 막판에 벌어진 소련 영내에서 벌어진 U-2기 격추사건과 카스트로가 이끄는 쿠바혁명은 미국과 소련을 극한 대립으로 몰고 가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카스트로가 이끄는 쿠바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한 소위 몽구스 작전의 일환으로 계획된 1961년 4월의 쿠바 피그스만 침공 사건의 처절한 실패는 CIA 비밀공작 작전의 최대의 실패 중의 하나였고, 뒤이어 전개된 미사일 위기 사건은 그에 대한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때에도 CIA는 정확한 정보에 근거한 예측을 하지 못함으로써 제 3차 세계대전의 위기를 몰고 왔다. 게다가 1963년 11월 JFK가 오스왈드의 총격을 받고 사망하게 되는데, 당시 CIA는 오스왈드와 쿠바/소련의 연계설을 은폐했고 그에 대한 의혹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

CIA의 강력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던 전쟁이었던 베트남 전쟁에 1964년 8월 가공된 정보 조작으로 미 의회가 베트남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개입을 하게 됐고, 부패한 남베트남 정권에 막대한 경제 및 군사원조를 퍼부었지만 그들의 패망을 저지하는데 결국 실패하고 인도차이나가 도미노 이론처럼 차례차례 공산화 되가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이런 CIA의 계속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1967년 볼리비아에서 체 게바라의 사살과 1973년 칠레의 합법적으로 선출된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을 몰락시킨 비밀공작은 CIA 최고의 작품 중의 하나였다. 닉슨 행정부를 결국 좌초하게 만든 워터게이트 사건을 통해 미국의 정치지도는 크게 훼손되었고, 그 하수인 역할을 했던 CIA 역시 카운터펀치를 먹고 비틀거리게 됐다.

하지만 80년대 들어서 신보수주의 반공노선을 표방한 레이건 행정부 하에서 CIA는 다시 한 번 화려한 비상을 하게 된다. 아프간을 침공한 소련군에 대항해서 미국은 아낌없이 무자헤딘 전사들을 지원하고(나중에 자신들에게 큰 해가 되는), 이란-이라크 전쟁을 통해 양쪽 편에서 교묘하게 줄타기를 하면서 중앙아메리카 콘트라 반군을 지원하기 위한 비밀자금을 마련하는 등 세계각처에서 수많은 비밀공작들을 다시 한 번 CIA가 화려하게 장식하게 된다.

CIA는 정작 중요한 소련의 붕괴를 예측해내지 못하면서 급작스러운 붕괴를 맞이하게 된다. 이후 등장하게 된 테러조직과의 싸움에서도 전혀 예측 불허한 상황들에 민감하게 대처해내지 못하고 다시 한 번 2001년의 9-11과 2003년 이라크 전쟁에서 존재하지도 않았던 대량살상무기(WMD)를 천명하면서 그 위상은 급전직하하게 되었다.

<잿더미의 유산>에 등장하는, 2차 세계대전이라는 인류 미증유의 재난 후에 설립된 CIA는 미국의 전후사와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CIA는 기본적인 자신들의 본연의 임무였던 국가의 수반인 대통령에게 장기적 전략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국익을 도모한다는 취지보다, 무소불위의 통제되지 않는 권력과 막대한 예산을 통제하면서 초법적인 존재로 군림해 왔다. 그리고 미국의 국익을 위한다는 전제 하에, 많은 나라들에서 선전선동, 쿠데타 지원, 요인암살 등과 같은 불법적인 행위들을 서슴지 않고 저질러 왔다. 그것은 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한다는 정보기관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역대 대통령들과 CIA 국장들의 계속된 개혁 의지에도 불구하고 CIA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얼마 되지 않는 유용한 정보들조차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서 숱한 위기들을 자초했다. 그들의 잘못과 실수를 은폐하기 위해 역대 대통령들은 미국 사람들과 세계에 거짓말을 해야 했고, CIA 내부에서는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덮어가는 관행이 수립되어졌다.

결국 CIA가 정보 권력을 놓고 국방부와 벌인 지난 60년간의 치열한 경쟁은 국방부의 일방적인 KO승으로 끝이 났지만, 앞으로도 계속해서 국가 안보와 국민들의 안위를 위한 정보수집의 중요성은 그 가치를 잃지 않을 것이다. 팀 와이너의 역작 <잿더미의 유산>은 새로 거듭나게 될 과거의 ‘실패한 조직, CIA의 슬픈 묘비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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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먹으러 가자! - 간사이(오사카, 고베, 교토)편
까날 지음 / 니들북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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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많은 나라들은 아니지만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그곳의 유명하다는 곳들을 거의 다 가봤고, 많은 경험을 할 수가 있었다. 다시 말해서, 볼 것 할 것들은 다 해봤다는 거다. 그런데 나는 많은 이들이 여행의 즐거움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그 나라 혹은 그 지방 특유의 음식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 같다. ‘아니 싸돌아다니기에도 바빠 죽겠는데 뭔 놈의 음식, 그냥 대충 때우고 말지’식의 여행이었다는 사실을 이 자리를 빌려 고백한다.

그런데 <일본의 먹으러 가자>의 저자 “까날”(필명이 특이하기도 하다)은 그런 나의 경험에 의거한 고루한 여행관을 이 책을 통해 산산이 부수어 주고 있다. 작가는 순전히 먹으러 여행지를 찾은 것 같이 철저하게 특히 일본의 간사이 지방의 대표적인 도시들이라고 할 수 있는 오사카-고베-교토를 누비면서 별난 맛집들을 소개하고 있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적어도 음식문화에 있어서는 일본 최고라는 자긍심을 자랑하는 간사이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음식 속으로 들어가 보자.

아무래도 첫 이야기가 가장 인상 깊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 책의 지은이 까날은 바로 일본 음식을 대표하는 스시로 시작한다. 오사카의 “스시 긴”이 바로 그 주인공인데, 사실 스시는 도쿄에서 시작된 요리라고 한다. 개인적으로 회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일 수 도 있지만, 예전에 같이 살던 룸메이트 형이 스시맨이어서 그랬는지 일본어로 생선 이름을 많이 들어서 익숙한 말들이 많았다. 특히 이 책을 통해 니기리가 쥠 스시를 뜻한다는 것도 새삼스럽게 배웠다. 역시 선도를 위해 최고의 재료들을 사용하고, 맛에 있어서는 절대 타협을 하지 않는다는 소위 말하는 장인 정신이 느껴졌다.

그 외에도 서양요리들이지만 일본에 들어와서 일본의 전통과 만나 일본화된 음식들은 물론이고, 일본 차 문화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내가 좋아하는 화과자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한 음식들이 소개되고 있다. 게다가 음식들을 소개할 적에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한 페이지짜리 사진들은 식전에 보게 되면 바로 배시계에 경종을 울릴 것만 같다.

오사카에서 소개된 음식 중에서는 역시 오코노미야키와 타코야키가 인상적이었다. 지난 가을 찾았던 인사동에서 무턱대고 입에 넣었다가 제대로 입천장이 모두 데게 고생했던 타코야키의 문어맛이 문뜩 떠오르기도 했다. 다음으로는 서부 일본 최초의 개항장이었다는 고베가 등장한다. 고베는 역시 외래 문화의 유입이 많았던 탓인지 서양음식과 결합된 퓨전 스타일의 음식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이진칸과 모토마치에 주로 포진해 있다는 레스토랑들의 소개를 보면서 도대체 난 고베에 가서 뭘 먹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하도 오래 전의 일이라 기억이 잘 나지도 않지만 말이다. 자매 식당이라는 루세트와 레시피 편에서 일품 농어 요리에서 소개된 그 바삭바삭한 농어 껍질과 긴 유리잔에 담겨 나온 티라미슈를 보면서 다음번에 고베에 가게 되면 반드시 한 번 찾으리라는 결심을 다졌다.

확실히 서양식 디저트와는 달리 부드러우면서 달착지근한 맛의 일본식 디저트가 더 끌리는 것 같았다. 저자의 모토마치 디저트 투어와 천년왕도 교토에 등장하는 마르브란슈 몽블랑, 마치 주술처럼 그 이름을 외운 비타메르의 케이크들의 위용이 내뿜는 포스들은 정말 대단했다. 게다가 저자의 맛깔나는 글쓰기도 독자들의 미감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던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얻게 된 최고의 수확을 꼽자면, 앞으로 여행을 하게 되면 시간을 쪼개서라도 한두 번쯤은 반드시 그 곳의 최고 맛집에 도전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는 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음식에 있어서도 전통과의 단절이 아닌 전통과 현대의 조화와 창의적인 재해석으로 멋진 음식들을 만들어내며, 무엇을 하든지 간에 최선을 다해서 만들겠다는 일본 셰프들의 멋진 장인의식에 경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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