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에 왔지만
다카기 나오코 지음, 고현진 옮김 / artePOP(아르테팝)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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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난 금요일 퇴근길에 다와다 요코 작가의 책을 빌리러 도서관에 들렸다. 평일인에도 주차장은 만차였고, 도서관에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 평일에도 이렇게들 책을 열심히 읽는가 싶어 보니 휴대폰을 하는 사람, 태블릿으로 무언가를 시청하는 사람 그리고 자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었다. 물론 책 읽는 사람들도 많았고. 그날 우연히 얻어 걸린 책이 바로 타카기 나오코의 <도쿄에 왔지만>이었다. 올해 처음 읽은 그래픽 노블, 그러니까 만화였다.

 

아주 오래 전에 <뷰티풀 라이프> 서평을 하지 않았었나 싶다. 그래서인지 작가의 그림체가 낯설지 않다. 물론 아주 세련된 건 아니지만, 뭐랄까 일본 특유의 그런 푸근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미에 현 출신의 타카기 씨가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겠다는 청운의 꿈을 안고 도쿄로 상경해서 고군분투하는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장하다 타카기 씨.

 

어려서 관광으로 방문한 일본 제일의 도시와 정작 거창한 생존투쟁을 위해 상경한 도쿄는 달랐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내가 오래 전에, 교토에 관광 갔을 적에 나는 아침부터 니조조 구경을 하겠다고 부리나케 나섰고, 거의 잠에 취해 비틀거리며 출근하는 일본 직장인들을 보며 내가 느낀 그런 감정이라고나 할까. 놀이와 생존투쟁은 엄현히 다르지 않은가 말이다.

 

늘 그렇지만 서설이 길었다. 당연히 타카기 씨의 일러스트레이터 도전을 쉽지 않다. 도쿄의 물가는 살인적이다. 방값부터 시작해서, 모든 게 비용의 연속이다. 종잣돈이 떨어지고 일러스트레이터의 푸른 꿈도 지지부진해진다. 결국 타카기 씨는 프리터(?)로 변신해서 스시 공장에 투입된다. 아마 스시 공장에서 일하면서 이런 자괴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아니 내가 고작 스시 공장에서 후토마키 따위나 말기 위해 이 고생을 하면서 도쿄에 왔나하고 말이다. 하지만, 미에 현과 도쿄의 분위기는 엄연히 다르다.

 

일단 작가가 좋아하는 미술관과 볼거리들이 차고 넘치지 않은가. 그리고 고향 사람들과는 다른 성향의 이들과 교류하면서 다음 단계로 발전해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작가의 고생은 그런 기회를 위한 비용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물론 말이 그렇지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미에에서 휴가를 받아 상경한 아버지는 타카기 씨와 도쿄의 조그만 아파트에서 지내며, 여름 더위를 막아줄 발도 설치해 주시는 단란한 모습도 보여 주신다. 역시 내리사랑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그리고 텔레비전 콘센트 문제도 해결해 주시고, 결정적으로 돌아가시면서 타지에서 고생하는 딸에게 용돈 봉투도 내미신다. 참 멋진 아부지가 아닐 수 없다. 멀리서 응원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졌다고나 할까.

 

타카기 씨의 귀성 이야기도 재밌다. 신칸센은 당연히 편하고 빠르고 좋지만, 가격이 비싸다. 신칸센 탑승이 4시간 정도라면 버스는 반값이지만 대신 시간이 7시간 정도 걸린다고 한다. 항상 비용이 작가의 뒷목을 잡는다. 게다가 작가는 버스에서 잘 못잔다고. 그러니 즐거운 귀향길이 이러저러한 계산으로 머리부터 아파 오기 시작한다.

 

다음은 옷에 관한 에피소드다. 후줄그래한 입성으로 집에 오니, 가족들과 친구들이 모두 걱정이다. 그네들의 걱정을 잘 알기 때문에, 한 번 데인 다음부터는 귀성길에 괜찮아 보이는 옷을 사 입고 온다. 역시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다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누가 무슨 옷을 입고, 뭘 먹는가로 그 사람을 판단하는.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그게 차가 아닐까 싶다. 무슨 차를 타고 다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을 판단하는 거지. 진부하지만, 좋은 외제차를 타고 다닌다고 해서 그의 인격이사 성공의 척도가 되는 건 아닐 텐데 말이지.

 

그래도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겠다는 꿈을 계속해서 유지하는 우리의 타카기 씨. 어쩌면 이런 에피소드들이야말로 나중에 성공했을 때, 하나의 소재가 되지 않을까 싶다. 결론적이긴 하지만 이렇게 책으로도 나오지 않았나 말이다. 결국 그녀의 노력을 결실을 맺어, 긴자 거리에 윈도우에 전시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이번에도 그놈의 비용 문제로, 재료들을 사서 차로 배송시키지 못하고 낑낑 대면서 그걸 직접 집까지 나르는 가난한 일러스트레이터의 비애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뭐랄까 좀 구질구질한 면도 없지 않지만, 그게 또 현실의 반영이라고 하니 이해가 안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마냥 살이가 신산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각 에피소드의 말미에 행복 인 도쿄라고 해서 즐거운 이야기들도 간간히 소개된다. 그것은 마치 우리네 일상에 대한 저격이라고나 할까. 누구나 다 항상 행복할 수도 그리고 또 불행한 것만은 아니니까 말이지.

 

명절을 앞두고 있다. 다본 책들은 속히 반납하고, 도서관에 있는 타카기 나오코 씨의 다른 책들을 빌려다 볼까 어쩔까 싶다. 왜냐구? 뭐 재밌으니까. 타자의 삶을 잠시나마 이렇게 엿볼 수 있는 혹은 나의 삶을 투영해 볼 수 있는 재미야말로 우리가 책 읽는 이유 중의 하나가 아닐까나.

 

[뱀다리]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이 책은 아쉽게도 절판되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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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런 제닝스 지음, 권경희 옮김 / 비채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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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 피드인지 스레드에서 작년에 반응이 좋았다는 평을 듣고 캐런 제닝스 작가의 <>에 대한 호감이 생겼다. 그리고 작년 말에 수원 리브로 서점에 들렀다가 실물책을 영접하고 거의 살 뻔(?)하는 그런 순간도 맞이했었다. 하지만, 왠지 오기가 발동해서 구매 대신 대출하기로 마음 먹고, 살며시 책을 다시 서가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지난주에 의왕 책마루도서관 원정에서 드디어 빌려다 읽었다. 지나고 나서 보니 대출해서 보기를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소설 <>의 주인공은 현재 등대지기로 일하는 중인 칠십대 노인으로 오랫동안 빵살이를 한 새뮤얼이다. 이 십몇년을 홀로 섬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일상이 부서지는 걸 혐오한다. 그가 사는 섬에는 시신이 자주 떠내려 오는 모양이다. 어느 날 난민으로 보이는 한 남자의 시신을 발견하고, 그 시신을 수습하면서부터 새뮤얼의 일상이 파괴되기 시작한다. 죽은 줄 알았던 남자는 살아난다.

 

왠지 소설 <>은 현재의 이야기보다 새뮤얼의 과거에 대 중점을 두고 있지 않나 싶다. 그렇다면 그의 과거는 어떤가 살펴보자. 캐런 제닝스 작가는 정확하게 어느 나라라는 점이나 공간을 밝히지 않는다. 백인 식민주의자들이 조상 대대로 평화롭게 살던 새뮤얼의 땅에 침입해서, 그들을 내쫓고 땅을 차지해 버린다. 어쩔 수 없이 새뮤얼의 가족은 도시로 이주해서 구걸로 생활을 영위한다. 새뮤얼의 아버지는 조국의 독립운동에 참가했다가 총에 맞아, 불구자가 되었다고 했던가. 오랜 감옥생활을 했다는 새뮤얼 역시 그렇다면 아버지의 정신을 이어 받은 후예란 말인가.

 

이야기는 그렇게 만만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다시 현재에서 섬에 홀로 살면서 자신만의 작은 왕국의 건설한 새뮤얼은 낯선 타자의 등장이 불편하기만 하다. 자신이 제공한 음식을 게걸스레 먹는 그의 모습에서 자신도 한 때 난민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타자는 새뮤얼의 일상을 끊임 없이 파괴하고, 또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그런 존재다. 당연히 그런 새뮤얼의 태도는 나중에 망상과 피해의식을 만들게 되는 원천으로 작용한다.

 

소설의 서사는 새뮤얼의 더 깊은 과거로 또 그 과거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 방점을 찍는다. 그의 조국은 백인 식민주의자들로부터 해방되었지만, 곧바로 독재자의 등장으로 자유를 억압받고, 식민지 지배시절과 달라진 게 없는 그런 상황이 되어 버렸다. 이에 독재자에 대한 시민들이 저항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 아니던가. 친구들 사이에서 댄디한 멋쟁이 아메리칸이란 별명으로 불리던 새뮤얼은 우연한 기회에 메리아와 그의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특히 새뮤얼의 애인 아니 동지가 되는 메리아는 폭력을 수반한 혁명으로 독재를 끝장내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을 펼치는 인민당 소속이다. 새뮤얼 역시 운명적으로 메리아들과 합류하게 되고, 독재 투쟁의 선봉에 거의 떠밀리듯 그렇게 서게 된다.

 

아니 인류 역사는 언제 어디서나 비슷한 궤적을 그리게 되는 건가. 우리나라에서도 예전에 유사한 상황이 전개되지 않았던가. 다시 한 번 위대한 문학의 힘을 느끼게 된다. 인간이 공유하게 되는 정신세계의 패턴은 동서를 떠나, 공유하게 되는 무언가가 있지 않나 하는 사유에 도달하게 된다.

 

새뮤얼은 독재자를 타도하기 위한 시위대에 합류해서, 독재를 상징하는 동상을 부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동상에서 결국 떨어져 버렸고, 그들에게 총탄 세례를 날린 군인을 죽이려고 했다가 체포되어 장기형을 살게 된 것이다. 얼떨결에 그렇게 민주화 투사가 된 것인가. “왕궁이라 불리는 교도소에서 그는 고문을 피하고 살기 위해 자신의 동지들과 자식 레시를 낳은 메리아에 대한 정보를 죄책감 없이 불어 버렸다. 어쩌면 훗날 섬에서 보여주는 새뮤얼의 셀프-고립은 이 무렵부터 시작된 게 아닌가 싶다.

 

긴 수형 생활을 마치고 출소했지만, 자신을 반겨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시대는 바뀌었고, 자신의 여동생 메리 마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그런 신세가 된 새뮤얼. 레시는 열병으로 어려서 죽었고, 메리아에 대한 소식은 들은 지가 오래다. 그리고 부두가에서 만난 메리아의 처지는 참 그랬다. 청소부 일자리 제안도 받지만, 그가 전과자라는 이유로 철회된다. 새뮤얼의 삶은 실패의 연대기에 다름 아니다.

 

육지에서의 파란만장한 삶에 비하면, 섬에서 난민 아저씨와 벌이는 긴장관계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억측에서 출발한 새뮤얼의 망상은 결국 비극적 엔딩을 예고한다.

 

새뮤얼은 섬에 스스로를 고립시킨 고독한 영혼이었다. 그는 사회에 적응할 수 없는 그런 부적응자였다. 그래서 섬은 고독한 영혼에게 완벽한 피난처가 아니었을까. 다만, 그가 좀 더 타자들과 같이 지낸 경험이 있었다면 엔딩인 확연하게 달라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 <>은 중반까지는 나름 괜찮게 진행이 됐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동력을 잃어버린 채 표류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 이러다가는 계속해서 쏟아지는 신간에 밀려 완독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막판 스퍼트로 마저 읽을 수가 있었다. 좀 더 실제 역사를 다루었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르포가 아닌 문학이 실제 역사를 다루어야 한다는 그런 의무는 없지만 말이지.

 

어쨌든 다 읽었고, 비슷한 경로로 알게 된 김숨 작가의 <오키나와 스파이>도 마저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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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5-01-19 23: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려주신 내용으로 봐서는 흥미로운데 끝까지 유지되는 소설적 힘이 부족한가 봅니다.
저도 이런 책들이 많아 읽다가 다른 책으로 넘어 가곤 합니다.
어쩌면 저의 집중력 부족이 문제인 것도 같아요 ㅎㅎ

레삭매냐 2025-01-20 08:03   좋아요 1 | URL
처음에는 참 흥미로웠는데...
뒷심 부족이랄까요.

물론 저의 집중력 결핍도
한몫했구요. 그래도 다 읽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그렇게 읽다만 책들이 너무
많아서요 ㅠㅠ
 
목욕탕
다와다 요코 지음, 최윤영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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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레드를 통해 다와다 요코라는 작가의 이름을 알게 됐다. 그리고 검색해 보니 제법 책들이 나와 있네. 그리고 일본 출신의 다와다 요코 작가는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러시아문학을 전공하고 나서, 독일로 건너가 석사와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고. 그리고 이중언어자로서 현재 베를린에서 글을 쓰고 있다고 한다.

 

어제 당장 근처 도서관으로 달려가 가장 만만(?)해 보이는 <목욕탕>을 빌렸다. 어라, 분량이 꼴랑 100쪽 밖에 안되네 그래. 그런데 어제와 오늘 이틀에 걸쳐 읽고 나서 바로 한숨이 나왔다. 이 책의 리뷰를 어떻게 쓴다니 그래.

 

사실 일본어도 그리고 독일어도 못하는 일개 독자로서의 다와다 요코 작가의 이중언어자의 본질에 도달하지 못했노라고 솔직하게 말해야 할 것 같다. 번역된 한국어 책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이 작가와는 첫 만남이 아니던가.

 

아무래도 내가 느낀 점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이어 나가야지 싶다. 소설의 화자는 혀를 잃은 동시통역사라고 한다. 그게 가능한가? 인간은 계속해서 자신의 형태를 바꾸는 모양이다. 나는 계속해서 화자가 잃었다는 혀의 상징성에 주목한다. 모국어 대신, 타국에서 다른 나라의 언어로 말하면서 산다는 것의 의미란 무엇일까. 간단한 의사소통까지는 몰라도 작가처럼 글을 쓴다면 또 다른 이야기가 아닐까. 계속해서 소설에 등장하는 "비늘"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나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런데 또 생각해 보면, 나의 생각들은 다와다 요코 작가가 구사하는 문자들을 내 자의적으로 해석한 게 아닌가 싶다. 1960년생으로 전후 세대인 작가의 어머니는 전쟁을 경험한 세대인가 보다. 그 세대의 전쟁 트라우마의 흔적을 살짝 내치비기도 한다. 소설의 초반에 등장하는 자식을 위해 비늘에 둘러 인 채 암석을 부수다가 피를 흘리며 죽었다고 했던가. 부모는 자식을 위해 뭐든 할 수 있다는 식의 진부한 해석이 맞나 싶기도 하고. 다와다 작가의 기묘한 서사를 접하면서, 자식이 나와는 다른 별개의 독립된 객체라는 사실을 나는 과연 인정할 수 있을까에 대해 문득 생각해 보게 된다. 자식과 적당한 거리두기가 과연 가능할까.

 

처음에는 사진사인 줄 알았던 크산더가 독일어 선생이었다가, 나중에 다시 목수라고 말하는 화자의 말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우리 인간은 어떤 하나로 정의되기를 거부한다는 건가. 그렇다면 나도 독서가인 동시에 사진사이기도 하고 뭐 다른 무엇으로 불릴 수도 있지 않을까. 무엇보다 빛의 유희를 즐기는 사진사이고 싶다. 나중에 누군가 이 소설에 대해 이야기해 보라고 한다면 아마 나는 그렇게 "빛의 유희"라는 구절만 기억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동시통역사였다가 혀를 상실한 화자는 다시 타이피스트라고 스스로를 규정한다. 어쩌면 그것도 매력적인 직업이 아닐까? 이 소설에서 혀를 상실했다는 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이방인으로서 독일어 구사에 대한 자신 없음 혹은 동조의 기능 상실을 의미하는 걸까? 이 짧은 소설을 접하면서 너무 많은 궁금증이 생겼다. 작가에게 이런 점들을 묻는다면 정말 속 시원하게 대답해 줄 수 있을까 과연. 책을 읽는 내내 삶은 고구마를 삼킨 그런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고 고백한다. 옮긴이기 말미에 단 해제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역시 독서는 주관적인 것인가 보다. , 목욕탕은 단 한 번도 소설에 등장하지 않는 것 같다. 아니면 말구.


[뱀다리] 소설의 어딘가에서 만난 "석관"의 이미지는 며칠 전에 개봉한 영화 <노스페라투>의 올록 백작의 안식처를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보니 쥐떼에 대한 언급도 있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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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 속의 여인 캐드펠 수사 시리즈 6
엘리스 피터스 지음, 최인석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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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찾아 삼만리 아니 몇 킬로미터에 나섰다. 요즘 한창 읽는 재미에 빠진 엘리스 피터스 작가의 캐드펠 수사 시리즈를 구하기 위해 인접한 의왕 도서관으로 원정을 떠났다. 떠난 김에 캐런 제닝스의 <>도 같이 빌렸다. 정말 오랜 만에 들른 도서관은 아늑하고 뭐 좋았다. 시간 여유만 있다면 앉아서 책도 읽고 싶었다. 생각과 달리 분주한 마음에 책만 빌려서 냉큼 튀어 나왔지만.

 

<얼음 속의 여인>에서도 엘리스 피터스 작가는 독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아니 이번 편은 지금까지 읽은 TCBC 시리즈 가운데 스케일 면에서 가장 압도적이지 않나 싶다. 113911월 초,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우스터 시가 모드 황후파에 선 글로스터 일당에게 약탈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리고 부모를 잃은 에르미나와 이브 위고냉 남매가 난중에 실종된다. 이들을 찾아 보호해야 하는 미션이 이번 <얼음 속의 여인>의 주된 줄거리다.

 

내전의 상흔은 가혹했다. 황후 편에 선 악당들은 우스터 일대를 약탈하고, 무고한 이들을 살해했다. 이런 와중에 위고냉 남매가 과연 살아 있을지 그리고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우리의 해결사 캐드펠 수사가 나설 차례다. 아니 원래 그는 브롬필드 수도원에 심각하게 부상당한 엘리어스 수도사를 간호하라는 명령을 받고 출동했었나.

 

황후파 가운데 한 명인 로랑스 당제가 위고냉 남매의 외숙이다. 앙주 출신의 기사는 자신이 직접 남매를 찾겠다고 하지만, 슈롭셔의 행정 장관 길버트 프레스코트는 그걸 허용할 수 없는 상황이다. 더군다나 지금은 내전 상태가 아닌가. 상대방의 유력한 기사 한 명을 빼앗는 게 아주 중요한 상황인 것이다. 게다가 당제가 스티븐 국왕의 영토에서 밀정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이런 복잡한 정치 상황을 배경으로 해서 서사는 출발한다.

 

우스터와 클레 산지를 중심으로 한 불한당들의 습격을 받아 중상을 입은 것으로 보이는 엘리어스 수도사를 긴급처치한 캐드펠은 다음 수순으로 위고냉 남매를 찾아나선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손쉽게 13세 소년 이브를 찾아낸다. 그리고 그를 데리고 돌아오는 길에 그녀의 누이로 보이는 어린 여성이 꽁꽁 언 강의 얼음 속에 갇혀 있는 장면을 발견한다. 일단 이브를 브롬필드 수도원에 맡긴 캐드펠은 행정 보좌관 휴 베링어의 도움을 받아, 얼음 속에 갇힌 시신을 수도원으로 데려온다. 그리고 이브는 시신이 자신의 누이인 에르미나가 아닌 우스터 탈출 당시 동행했던 힐라리아 수녀라는 사실을 밝힌다.

 

힐라리아 수녀를 죽인 진범을 밝히는 일과 행방을 알 수 없는 에르미나를 찾는 두 가지 미션 수행이 진행된다. 한편, 힐라리아 수녀의 죽음을 알게 된 엘리어스 수사가 수도원을 뛰쳐 나가고, 그를 간호하던 이브마저 그와 함께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동생 이브를 찾아 수도원에 온 에르미나에게 동행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캐드펠 수사.

 

오두막에서 하룻밤을 보낸 이브는 클레 산지의 은거지에 숨은 왼손잡이 알랭 일당에게 인질이 되어 끌려간다. 캐드펠은 에르미나와 함께 있던 삼림감독원의 아들 로버트가 사실은 로랑스 당제의 가신 올리비에 드 브르타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의 정체는 알면 알수록, 캐드펠로 하여금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든다. 거의 일본 자객을 뺨치는 침투력과 용맹을 가진 올리비에는 동방 출신이라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시리아 안티오키아 출신 과부이고, 그의 부친은 잉글랜드 출신의 십자군 전사였다고 한다. 기독교도로 개종해서 예루살렘과 세인트시메온을 떠나 앙주를 거쳐 현재 우스터까지 온 것이다. 역시 영국 소설에서도 출생의 비밀이라는 소재는 정말 기가 막힌 그런 게 아니던가.

 

천하의 악당 왼손잡이 알랭은 귀족 꼬마 이브가 자신들이 그동안 약탈한 것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엄중하게 이브를 감시하라고 수하들에게 명령한다. 우리의 꾀바른 이브는 가지고 있던 브로치를 이용해서, 포도주가 담긴 자루에 구멍을 내서 눈길에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 어라 이건 헨젤과 그레텔의 과자부스러기 에피소드랑 비슷하잖아.

 

휴 베링어는 캐드펠 수사의 탐문으로 지역을 초토화시키는 악당 외손잡이 알랭들을 처치하기 위해 조세 드 디낭과 연합해서 병사들을 이끌고 그들을 치러 나선다. 하지만 더 이상 자신들을 공격하면, 인질로 잡은 이브를 없애겠다는 알랭의 협박에 휴과 조세 연합군은 하는 수 없이 전력상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그들의 노력은 무산되는 걸까? 아니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올리비에 드 브르타뉴가 등장해서,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절벽 방향으로 잠입시도에 성공하고 이브 구출에 성공한다.

 

그동안 다른 TCBC 시리즈들이 살인사건과 관련된 치밀한 두뇌게임이었다면, 이번 <얼음 속의 여인>은 미스터리와 더불어 12세기 잉글랜드 내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 그리고 내전으로 황폐화된 우스터 지역에서 벌어진 약탈집단에 대한 전투에 이르는 그야말로 스펙터클한 내용들이 줄을 잇는다. 그리고 그동안 베일에 쌓였던 캐드펠 수사의 동방에서의 행적에 대한 내용도 아주 잠깐 소개가 된다. 무엇보다 올리비에 드 브르타뉴의 등장은 휴 베링어에 버금가는 캐드펠 수사의 조력자가 되지 않을까 싶다. 엔딩에 등장하는 출생의 비밀에 대한 이야기는 또 어떠한가. 아주 버릴 게 하나 없는 그런 구성이었다.

 

억울하게 죽은 힐라리아 수녀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 캐드펠 수사의 노력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선의를 가지고 모든 이들을 공정하게 대하는 그의 모습이야말로 그 시대 신앙인의 모범이 아닌가. 무고하게 희생당한 힐라리아 수녀를 두고, 삶과 죽음에 대한 문제에 대답을 구하는 장면은 오래 기억될 것 같다. 어떤 게 과연 신의 뜻인가? 신이 창조한 세상에 정의는 존재하는지. 모두가 선의를 가지고 타인들을 대한다면, 힐라리아 수녀 같이 억울한 죽음은 없지 않을까. 더 나아가, 미래 권력을 두고 치킨 게임 양상으로 흐르는 잉글랜드 내전에서도 대화로 해결가능한 일들이 있지 않았을까.

 

TCBC 시리즈는 읽을수록 팬이 되어 간다. 앞으로 3권만 더 읽으면 2차분까지 모두 읽게 된다. 나머지 시리즈들을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했다. 수급을 좀 빨리 해줬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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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5-01-14 23: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쪽 취향이 아니어서...
12세기 잉글랜드의 복잡한 정치상황과 내전이란 말이 눈에 들어오네요.
전 요새 랭카스터 왕조를 봤거든요.^^

레삭매냐 2025-01-15 07:23   좋아요 1 | URL
그러시군요 ^^

저도 잉글랜드 역사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었는데 주경철 선생의
책도 읽고 또 캐드펠 수사 시리즈
같이 읽다 보니, 뭐랄까 가닥이
잡히는 느낌이랄까요.

TCBC 완전 팬이 되어 버렸네요.
 
평원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19
제럴드 머네인 지음, 박찬원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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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럴드 머네인. 정말 처음 들어보는 작가다. 호주 출신으로 고로크라는 곳에서 거의 은둔자의 삶을 사는 그런 작가란다. 그런데,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된다고. 이런 마케팅이라면 또 책을 사서 보지 않을 수가 없지. 작년 가을에 산 책을, 을사년 소한 강추위가 불어닥친 와중에 다 읽었다.

 

호주 대륙의 "평원"에 대한 영화를 찍겠다고 결심한 작가는 평원의 모처에서 자신의 프로젝트를 완성하는데 도움을 줄 대지주, 후원자를 기다린다. 아티스트가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물적 토대가 필요하다. 고대 로마에서 발원한 파트로누스와 클리엔테스의 관계는 현대에도 계속 이어지는 모양이다. 하긴 그 위대한 미켈란젤로도 메디치 가의 후원이 없었다면, 그런 걸작들을 생산해낼 수 있었을까 싶지만.

 

제럴드 머네인 작가는 거대한 평원이라는 이미지가 부여하는 풍경에 집착한다. 아니 소설 <평원>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 같이 모호하고 정의할 수 없는 평원의 풍경에 경도된 느낌이다. 그렇다고 해서 미래의 후원자가 될 대지주들이 노골적인 예술가들의 평원 찬양을 환영하는 것도 아닌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멀지도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은 거리감을 유지하는 그런 선수들을 원한다.

 

후원자인 대지주들과 화자로 대변되는 예술가들 간의 시소 게임을 보다가 문득 어려서 호주 배낭여행을 하던 시절 생각이 났다. 그들에게 산은 세모꼴의 무엇이 아닌 그냥 지평선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만큼 산은 거대하다는 말이겠지. 그리고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가려면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48시간을 달려야 했지. 그래서 장거리 버스에는 운전사 양반들이 두 명 타고 있었다. 휴게소에 샤워실이 있는 것도 그 시절 나에겐 충격이었다. 그리고 붉게 타오르던 석양을 등지고 이름도 모를 어느 휴게소에서 프렌치 프라이와 맥주로 끼니를 때우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난 그 때, 장 자크 베넥스의 <베티 블루> 같은 대평원이 품은 황혼의 이미지라며 황홀해 하곤 했었지.

 

작가가 구사하는 종잡을 수 없는 내러티브를 따라가기가 사실 버겁다. 도대체 이 양반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내가 읽을 바에 따르면(이조차 확신할 수가 없다) 결국 외부인들은 평원인들의 삶을 알 도리가 없다는 걸까. 여기에 시간이라는 개념까지 더해진다면 제럴드 머네인의 서사는 더 닿을 수 없는 그 무엇이 되지 싶을 정도다.

 

평원에서 나고 자라지 않은 철저한 외부인인 화자가 평원인들 사이에서 과연 자신들과 동류의 인간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어디까지나 한 명의 대지주에게 고용된 "클리엔테스"일 뿐이다. 다만 고대의 종속적인 관계와 달리 조금은 너그럽고 자유로운 상태의 피후견인 정도로 보면 되지 않을까.

 

그리고 풍경에 집착하는 작가의 스타일로 봤을 때, 소설의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그런 풍경의 일부분으로 보여진다. 후원인의 아내와 딸 그리고 그의 동료 지주들, 평원이라는 어떻게 봐도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공간을 채우는 요소라고나 할까. 단언할 수 없는 '시간'이 부여하는 공허함과 기억의 부재는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소중하다고 생각될 법한 일들은 일어나지 않고, 그대로 흐르는 시간으로 구성된 세월이 특별한 이유는 무엇이고.

 

몇 해 동안이나 대지주의 후원을 받지만, 화자에게 후원인은 어떤 성과를 내라고 특별하게 요구하지 않는다. 가끔 하는 발표도 연례행사 같은 의식으로 다가온다. 물론 화자도 그전의 실패했던 예술가들처럼, 평원의 이미지들을 카메라에 담고 후원인의 딸들을 자신이 구상하는 영화의 엔딩에 담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마치 필름이 들지 않은 카메라로 대지주와 가족들의 사진을 찍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설사 그런 빛의 흔적들이 남길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나중에 흑백으로 박제된 사진들의 이미지를 보고 무엇을 느낄 수가 있었을까.

 

어쩌면 사진가가 의도한 이미지들이 자신의 그것과 다른 방식으로 세상에 공개되는 것처럼, 작가의 글도 비슷한 궤적을 그리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이번에 제럴드 머네인의 <평원>을 읽으면서 하게 됐다. 길지 않은 소설을 읽다가 마치 소설의 주인공처럼 어디에선가 길을 잃었다고 해야 할까. 아니 나는 어쩌면 기존의 정통적 서사의 개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기준에서 본다면 제럴드 머네인의 <평원>은 참 쉽지 않은 도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럴드 머네인의 내러티브가 너무 사변적이어서 내가 소설의 상당 부분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하기에, 빅토리아 주의 고로크(Goroke)에 산다는 작가는 너무 현지에 최적화된 그런 인물이 아닌가 싶다. <평원> 한 권으로,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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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5-01-12 2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가, 예술가의 작품 모두 세상에 나오는 순간 의도와 달리 해석이 되지요.^^
궁금하네요.
사진작가의 시선과 작업의 내러티브라!

레삭매냐 2025-01-13 08:52   좋아요 1 | URL
처음 만나는 작가라 그런지,
어떤 스타일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완독한 것으로 만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