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완벽한 하루
멜라니아 마추코 지음, 이현경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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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책읽기는 그 책에 대한 단서 찾기로 시작을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태리 출신 여류작가 멜라니아 마추코(Melania Mazzucco)의 <어느 완벽한 하루>를 읽기 위해 우선 책의 처음에 나오는 노래 가사의 주인공인 루 리드가 부른 <Perfect Day>를 찾아서 들어봤다. 글램록 밴드답게 몽롱한 사운드가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작년 베니스 영화제에 출품되었다는 동명의 영화에 대해서도 알아봤다. 소설을 읽을수록 과연 24시간 동안 로마에 거주하는 이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들이 어떻게 그려졌을지 궁금했다.

<어느 완벽한 하루>는 1996년 작가로 데뷔한 멜라니아 마추코의 5번째 작품으로 (2001년. 마릴린 맨슨의 체포사건으로 추정한) 5월 4일 금요일 만 하루 동안 이탈리아 로마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캐릭터들과 사건들을 시간단위로 파헤친다. 작가는 캐릭터보다는 사건에 중점을 두고,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한다.

5월의 어느 날 밤, 로마의 밤거리에 총성이 들린다. 그리고 총소리를 듣고 주민은 경찰에게 신고를 한다. 그 사건이 발생한 24시간 전으로 돌아가 이야기는 시작된다. 24시간 단위로 세밀하게 나뉘어진 시간 속에, 작가는 부오노코레 가족과 피오라반티 가족들을 밀어 넣는다. 매력 넘치는 아내 엠마에 대한 지독한 편집증세로 결국 이혼한 안토니오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녀를 스토킹한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자신의 무엇보다 소중한 자식들인 발렌티나와 케빈마저 빼앗겨 버린다. 그에 대한 증오를 자신의 장모인 올림피아에게 맹렬하게 내뿜는 안토니오. ‘저러다 일내지’란 생각이 절로 든다.

한편 그런 안토니오를 수호천사로 생각하는 성공한 변호사이자 잘 나가는 정치인 엘리오 피오라반티와 그의 아내 마야 그리고 그들의 사랑스러운 딸 카밀라가 있다. 아, 그들의 삶에 잉여물처럼 따라 붙은 전처에게서 낳은 아들 제로/아리스가 있다. 세속적 성공과 물질적 풍요 모두를 갖추고 있는 피오라반티 패밀리는 부오노코레네들에 비하면 훨씬 행복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왜 마추코는 이렇게 대조적인 가족들을 소설에 배치했을까. 그건 아마도 너무나 상반되는 이들을 배치함으로써 생기는 리얼리즘의 극대화를 위한 노림수가 아니었을까.

안토니오의 딸 발렌티나는 한창 발랄한 십대소녀로 아버지의 부재에서 오는 물질적 결핍으로 고통 받고 있다. 물론 그건 엠마와 케빈 역시 마찬가지다. 불타는 사랑만으로 결혼했던 엠마는 안토니오와의 재결합을 원하지 않는다. 거의 의처증 수준에까지 다다른 안토니오는 증오로 똘똘 뭉친 채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다. 그런 그가 국회의원인 엘리오를 경호하고 있는 경찰이자 서민들의 영웅이라는 사실이 믿겨지지가 않는다.

훌륭한 백그라운드를 가진 엘리오의 젊은 부인인 마야는 어느 모로 보나, 뛰어난 재원이지만 남편의 그늘에 가려 자신의 진가를 펼쳐 보이지 못한다. 어느새 30세가 된 그녀는 초조해하며, 결혼생활의 끝을 향해 달려 나간다. 그 틈사이에 비집고 들어오는 이십대 초반의 제로/아리스는 도시 게릴라 같은 삶을 살면서도, 자립하지 못하고 언제나 경제적으로 아버지에게 의존하는 자신의 모습에 진절머리를 낸다.

여기에 발렌티나의 국어 선생님인 동성애자 사샤까지 등장하면 이 복잡하기 그지없는 인물군은 완벽하다. 자 이제 캐릭터들이 준비되었으니, 사건에 불을 당길 성냥 한 개비만 있으면 되는 건가? 유럽 선진국 중에서도 참 얄궂은 이탈리아 그 중에서도 로마의 거리들을 배경으로 진정한 가족애에 대한 변주곡이 느릿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어느 완벽한 하루>를 읽기는 쉽지가 않다. 우선 뉴욕이나 도쿄 같이 우리에게는 생소하기 그지없는 로마라는 배경이 그렇다. 로마 제국의 유적들이 흐르는 천년 도시 로마는 너무나 낯설기만 하다. 대도시치고는 형편없이 좁아터진 미로 같은 골목길들이 상상이 가지 않는다. 판테온 옆의 가게에서 자신의 앞으로의 미래를 모른 채 하염없이 아이스크림을 즐기는 부오노코레들의 모습이 상상이 가는가.

7살 난 엘리오와 마야의 딸 카밀라의 동화 속에나 나올법한 호화판 결혼식은 동떨어진 세상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오히려 유혈과 폭력이 난무하는 안토니오와 엠마의 치열함이 더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참 카밀라가 어떻게 해서 케빈에게 반하게 되었지? 어떤 부분들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 없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어느 주인공들의 관계에 대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세밀한 묘사가 이어진다.

결말로 달려갈수록 독자들은 설마 했던 일들과 접하게 된다. 어쩌면 책을 읽으면서 그 일만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그에 대한 반대급부적인 일이 벌어지길 바라지만 작가는 독자들이 가진 일말의 희망마저 산산이 부숴 버린다. 그리고 모두가 끝이라고 생각한 시점에서 새로운 희망을, 너무 작아서 후하고 숨을 내쉬면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 그런 희망의 불씨를 되살려 놓는다.

솔직히 책을 읽으면서, 작가가 다루고 있는 콘텐트들을 비주얼하기가 쉽지가 않았다. 책을 다 읽고 나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터키 출신의 감독 페르잔 오즈페텍이 이 소설을 영화화한 <운수 좋은 날>을 보고 싶다는 거였다. 현진건의 동명의 소설 제목처럼 참 역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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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 핫 캘리포니아 - 미드보다 짜릿하고, 리얼 버라이어티보다 스펙터클한 미국놀이
김태희 지음 / 웅진리빙하우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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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도전 작가 출신의 김태희 씨가(아, 어쩔 수 없이 탤런트 김태희를 떠올리게 되는구나!) 근 10개월간의 미국 캘리포니아 생활을 담은 <쏘 핫 캘리포니아>를 읽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책의 공공성과 대중성 그리고 왜, 누가 책을 쓰는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냉정하게 이 책에 대해 평가를 하자면, 이십대의 마지막을 그냥 보낼 수 없다고 주먹 불끈 쥐고 도미해서 좌충우돌하며 보낸 어느 처자의 질풍과 노도 같은 유람기라고 할 수가 있겠다. 이건 마치 타인의 싸이월드 홈페이지를 들여다보고 있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중에 글쓴이의 싸이월드 홈페이지를 들어가 보니 책에서 본 것과 똑같은 사진들을 볼 수가 있었다.

역시 어느 곳을 소개하는 책에서 비주얼만큼 중요한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게다가 작가 출신이니 얼마나 재밌게 이야기를 풀어가겠는가. 책의 재미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김태희 씨는 솔직하다. 그녀는 왜 미국에 갔을까? 그것도 50개나 되는 제 각각 다른 특성들을 가지고 있는 미국의 주들 중에서 캘리포니아일까? 그건 바로 캘리포니아만큼 놀기 좋고, 오픈마인드를 가진 사람들이 넘쳐 나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UCLA 부속 어학원에서 짧은 영어 배우기를 마친 후에, 열심히 놀러 다닌다. 우선 기동성을 위해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차를 구입한다. 그것도 자기가 캘리 체류기간 동안 쓰려고 준비해간 돈의 2/3나 되는 돈을 사용해서. 그 다음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디제이가 하는 파티에 가기 위해 6~7시간 운전을 마다하지 않고 샌프란시스코로 달려간다. 사실 난 그들이 하는 파티문화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진 몰라도, 그렇게까지 하면서 놀고 싶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우스 파티며 할로윈 페스티벌 등 미국 하위문화를 관통하는 ‘해프닝’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열의를 보여 주기도 한다. 태양이 작렬하는 캘리 바닷가에서 태닝을 하고, 이렇게 저렇게 알게 된 친구들과 즐겁게 보낸 시간들이 주르르 나열된다. 크리스마스 즈음해서는 친구들을 엮어서 라스베거스로 로드트립을 떠나기도 한다. 겁나 싸게 하는 쇼핑 또한 빠질 수가 없는 아이템이다. 그렇게 저렇게 책을 읽으면서, 왜 내가 이 책을 이렇게 읽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 그냥 재밌으니까.

색다른 체험이 대해 재밌게 보면서 마음 한 편으로는 주제 의식의 결여가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방인으로 미국 사회의 특정한 단면을 보는 시선 그것도 부촌이라는 웨스트우드에 살면서 미니 쿠퍼를 타고 다니는 여피 스타일이 미국의 전부일까라는 생각이 계속해서 들었다. 보통의 미국 사람들은 고유가로 인해 즐겨 마시던 스타벅스 커피마저 던킨으로 바꾼다고 하던데, 이방인에게는 자신과는 전혀 상관 없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뭐 글쓴이가 놀러 갔으니, 최선을 다해서 노는데 집중했다라고 말하면 또 할 말 없지만 말이다.

지난해 초 시작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미국의 중산층이 붕괴하고, 그 어느 때보다 홈리스들이 급증을 하고 멀쩡한 일자리를 잃고 실업자들이 넘쳐흐르는 미국의 현실보다 그녀가 그려내는 디즈니의 판타지 같은 미국의 모습이 전부라고 이 책을 보는 이들이 생각을 하게 될까봐 걱정이다. 그리고 오바마 대통령이 당선될 때, 분명 미국에 있었을 텐데 이런 커다란 정치 사회적 변화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이 없다. 하우스파티 하시느라 시간이 없으셨나 보다.

아, 그리고 궁금한 게 한 가지 있다. 작년 3월 달에 캘리에 가면서 6개월짜리 관광 비자를 받았다고 하는데, 어떻게 12월달까지 체류할 수가 있었을까. 김태희 씨의 신변잡기성 글을 보면서, 나도 한 일년 정도 놀러 다른 나라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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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달을 쫓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4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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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연상시키는 토끼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여행 가방을 가진 여인이 서 있는 책 표지를 보면서 과연 이번에는 온다 리쿠 아줌마가 무슨 이야기를 풀어낼지 궁금했다. 사람의 키보다 훨씬 커 보이는 토끼의 심상치 않은 시선이 느껴졌다. 토끼의 귀 옆으로 보이는 달은 제목에서 말하는 그 “한낮”의 달일까? 온통 머릿속에는 궁금증을 한가득 안고 책을 열었다.

책의 내용은 간단하다. 도쿄에 사는 나(시즈카)는 이복오빠인 겐고의 애인인 유카리의 제안으로 나라에서 연락이 두절된 겐고를 찾아 나서게 된다. 거의 대면이 없던 유카리의 거침없는 행보에 소극적인 인생을 살던 시즈카는 불안하면서도 한편 기대감으로 설레는 나라와 아스카의 유적들을 둘러보는 리프레시 휴가에 나선다. 이 여행길 도중에 밝혀지는 그네들의 삶의 비밀들을 작가는 자전적으로 보이는 이야기틀을 통해 술술 풀어낸다.

문득 책을 읽다가 왜 온다 리쿠는 나라를 책의 배경으로 삼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는 교토 이전에 일본 국가의 시초를 닦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수년 전에 가본 나라에 대한 나의 인상은 도다이 사의 엄청나게 큰 불상, 나라공원과 그 주변의 민가들에까지 어슬렁거리며 사슴 과자를 덥석 덥석 받아먹는 덩치 큰 사슴 그리고 호류 사 정도?

책의 진도가 나가면서, 나의 이런 의문들은 슬슬 풀리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화자인 나(시즈카), 겐고, 유카리 그리고 또 다른 주인공 다에코의 과거로 작가가 배열한 기억들, 사진, 수첩, 운전면허증 등의 단서를 통해 서로 엇갈리는 관계들 그리고 애틋한 가족애 보다는 소외된 유년시절의 추억의 편린들이 다가온다.

그리고 각 장의 말미에 겐고가 수집한 것으로 보이는 짧은 동화나 민담들은 그런 이들의 관계를 해석하는 키워드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달 토끼> 이야기는 겐고, 유카리 그리고 다에코의 20년 애증에 얽힌 이야기들의 축소판처럼 다가온다.

온다 리쿠는 낯선 이와 함께 하는 기묘한 여행길에 나선 시즈카의 불안정한 심리를 탁월하게 묘사한다. 개인적으로 여행을 좋아하는데, 작가의 심리묘사에 상당 부분 공감할 수가 있었다. 여행에 대한 기대와 또 한편으로는 잘 알지 못하는 이와 여행길에 나서는 불안감, 하긴 글의 하이라이트는 이들의 여행길에서 마주하게 되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극적인 반전이지만 말이다.

다양한 부분의 글을 발표하는 온다 리쿠 아줌마의 다른 책들을 많이 접해 보지 못해서 잘은 모르겠지만, <한낮의 달을 쫓다>는 지극히 일본적인 배경인 나라와 아스카를 바탕으로 해서 이혼을 하고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여인의 자전적인 이야기다. 작가의 소설 작법이 뛰어나서인지 어쩐지 자꾸만 작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모르게 소설의 주인공 시즈카와 함께 나라를 여행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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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을 쏴라 -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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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 사뭇 도발적이다. 내 심장을 쏘라니? 마치 갑갑하기 그지없는 이 세상을 저격하라는 선언처럼 그렇게 다가왔다. 책 표지에서부터 무슨 내용이 펼쳐질지 아주 적나라한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었다. 파란 줄무늬가 들어간 환자복을 입은 두 명의 남정네들의 비현실적인 움직임이 글의 대략적인 얼개를 말해 주고 있는걸까.

2000년 <열한살 정은이>라는 작품을 세상에 내놓은 정유정 작가의 다섯 번째 작품인 <내 심장을 쏴라>는 전직 간호사 출신인 작가가 대학시절 정신병원 실습 후, 폐쇄병동을 직접 체험하고 나서 마치 세상에 무언가 진 빚을 청산하려는 마음을 글을 썼다고 했던가.

나에게는 어린 시절, ‘언덕 위의 하얀 집’으로 통하던 정신병원이 이 소설의 무대다. 주인공인 나 이수명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받은 정신적 충격으로 환청과 공황 장애 진단으로 로뎀병원 신세를 지게 된다. 퇴원 한 후, 불의의 사고로 다시 수리 희망병원에 수감되게 된 수명은 25살 동갑내기 류승민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아마 영화 장르로 구분을 하자면, 버디 무비 정도가 되겠다.

수명과 승민은 병원에 들어온 첫 날부터 폭력이 수반된 탈출을 시도하게 되고, 병원의 진압조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끔찍한 약물치료까지 덤으로 받게 된다. 덤 앤 더머라는 부제가 더할 나위 없이 어울렸다. 약물치료를 받고 난 후, ‘나무늘보’가 된다는 화자의 말이 실감이 가지 않았다. 폐쇄병동은 치료기관이 아니라, 교육기관이라는 설명은 더더욱 현실적으로 들리지 않았다.

오노레 발자크의 소설처럼 첫 60페이지가 힘들다고 누가 말했었나. 하지만 작가 정유정이 그리는 폐쇄병동의 직시하고 싶지 않은 현실들은 수리 희망병원에 ‘수감’된 환자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은 가열차게 굴러 가고 있었다. 역시 작가의 직접 체험을 바탕으로 해서 그런 진 몰라도, 리얼리티가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작가의 상상만으로 창조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수명은 방짝인 승민의 사연에 주목한다. 어쩌면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들의 핵심은 모두 그들의 사연을 풀어나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나 수명은 어머니의 죽음으로부터,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폐쇄병동으로 도피하고 싶어 했는지도 모르겠다. 출생의 비밀을 안고 있는 승민 역시 마찬가지다. 그에게는 글라이더를 타고 하늘을 나는 활강이 삶의 유일한 낙이자, 목표였을지도. 하지만 그에게는 시간이 없다. 그에게서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끼는 나는 그를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다. 물론 나의 이성은 골치 아프고 물리적 제재가 따르는 위험을 감수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진 전인적인 인격체이다. 전적으로 타의에 의해 영어의 몸이 된 그들은 자유를 꿈꾸고,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한다. 그들에게 동정적인 시선도 물론 존재하지만, 그들을 찍어 누르는 억압의 굴레에 언제나 압도당한다. 바로 그 시점에서 우리를 옥죄고 있는 사회라는 시스템을 ‘쏘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모터보트를 타고 수리 호를 질주하고, 글라이더를 타고 창공을 훨훨 나는 수명과 승민의 눈에는 오히려 우리가 사회라는 틀에 갇힌 수인들의 모습이 아닐까. 탈출과 일탈을 꿈꾸는 모든 이에게 갈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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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위원회 모중석 스릴러 클럽 20
그렉 허위츠 지음, 김진석 옮김 / 비채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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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미국 사법 시스템에 대해 지인들과 이야기를 하던 중에, 아주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는 미국 시민권자로 미국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자라온 친구였는데, 미국의 사법체계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법 자체와 사회의 시스템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법이 우리 보통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니! 하지만 이민자 사회인 미국의 현실을 떠올리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제각기 다른 사고와 문화 관습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통일된 하나의 사회적 규율로 통제를 하기 위해선 강력한 사법체계가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하바드와 옥스퍼드에서 수학한 <살인위원회>의 저자 그렉 허위츠는 바로 그 미국 사법체계의 틈새를 파고드는 법범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가상의 “위원회”를 창조해낸다. 우리의 주인공 팀(티모시) 맥클리는 연방경찰 소속의 부집행관으로 전직 특수부대 출신으로 강인한 체력과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냉정한 판단력을 보유한 전인적인 인격체로 그려진다. 당연한 귀결로 군복무 당시 받은 무공훈장은 보너스다. 그의 아내 드레이(안드레아) 역시 보안관으로 근무하고 있다.

이런 맥클리의 평화로운 가정에 끔찍한 사고가 터지고 만다. 그들의 사랑하는 딸인 지니(버니지아)의 7번째 생일날, 주인공 지니가 성폭행을 처참하게 살해된 채로 발견이 된다. 자, 이제 스릴러와 미스터리로 짬뽕이 된 <살인위원회>는 폭주하기 시작한다. 팀의 동료들은 지니의 살해범으로 지목되어 잡힌 킨델을 사로잡아 팀에게 복수의 기회를 주지만, 팀은 사적인 복수를 거부하고 법원에서 정당한 판결을 받게 한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하지만 법원에서는 킨델이 청각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미란다 조항과 자신의 권리를 충분히 고지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해서 사건 자체를 기각시켜 버린다. 누가 봐도 명백한 사건에 대한 처벌이 법집행 절차상의 문제로 해서 무산이 되어 버린 것이다. 사랑하는 딸의 죽음으로 맥클리 가정에는 그늘이 지기 시작하고, 팀의 결혼생활 역시 위기를 맞게 된다. 하지만 그를 정말 괴롭히는 것은 딸의 죽음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상황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팀은 업무 중에 마약상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과잉진압을 이유로 해서 견책을 받게 된다. 모든 이들이 그의 결백을 알고 있지만,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자 팀은 분연히 자신의 배지를 반납하게 된다. 사랑하는 딸을 잃고, 직장마저 잃어버린 그에게 프랭클린 듀몬이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이가 방문을 한다.

그는 위원회 소속으로 팀과 비슷하게 가족들을 범죄자들에게 희생을 당한 이들이 사법체계가 갖은 이유로 처벌할 수 없어 방면된 이들을 응징하려는 초법적인 비밀결사조직이다. 자금력과 실천력을 모두 갖춘 이들은 팀이 무엇보다 알고 싶어 하는 지니 사건의 비밀 파일을 미끼로 팀을 위원회에 가입시킨다. 천사들의 도시 로스앤젤레스에서 횡행하는 범죄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윌리엄 라이너 교수가 준비한 파일들을 검토하고 표결에 의해 징벌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과연 그들은 자신들이 목표한 일들을 무리 없이 처리할 수 있을까? 역시 미스터리 스릴러답게 후반부에 놀라운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일단 소설의 시작은 매우 긴박하게 돌아간다. 어떻게 해서 평범해 보이는 한 아이의 아버지가 이런 엄청난 사건에 휘말려 들게 되고, 법 체계 전반에 대해 그동안 수없이 논의되어져 온 핵심적인 문제-과연 우리 사회의 법 시스템이 공정하게 집행되고 있는가-에 대해 팀 맥클리의 냉철한 시각을 통해 한 발자국씩 다가선다.

아울러 희생자 부모의 쓰라린 경험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해 내고 있다. 지금까지 모두 9권의 책을 쓴 작가 그렉 허위츠는 글쓰기에 앞서 철저한 리서치와 준비작업을 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아마 이 책 <살인위원회>를 쓰기 위해서 자신이 접할 수 있는 최대한의 범위에서 노력을 했을 것이다. 팀과 드레이 사이의 미묘한 감정의 대립으로부터 시작을 해서, 아이의 죽음에 대한 책임 소재에 대한 논쟁에 이르기까지 소설 전개에 있어서 중요한 주인공의 감정 표출에 대해 탁월한 묘사를 보여준다.

아이를 잃은 아버지의 애끓는 감정을 슬며시 독자들에게 전이시키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위원회의 초법적인 행동에 ‘할 수만 있다면 나라도 당연히 그렇게 했을거야’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주인공의 냉철한 이성과 판단력이 작동을 하기 시작한다. 이런 감정과 이성의 대결구도는 소설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대립에서도 지켜볼 수가 있다.

소설 후반부로 갈수록 지니의 죽음에 관한 미스터리가 숨겨져 있다는 암시와 통제불능의 상황에 빠진 위원회 활동과 자신을 옥죄어 오는 경찰의 움직임(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전직 경찰을 쫓는 자신의 동료들)에 책을 읽는 독자들의 아드레날린 수치는 높아져만 간다. 물론 700쪽이 넘는 분량이 적잖이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극적인 후반부의 반전과 스릴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전혀 아깝지 않을 시간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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