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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영
장다혜 지음 / 북레시피 / 2025년 5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평생 웃을 일 없이 산 이가 어찌하여
저토록 맑게 웃을 수 있을까,
한 겨울 눈꽃처럼 새하얗게."

탁영/ 장다혜/ 북레시피
책을 읽다 보면 유독 떠나보내기 힘겨운 인물들이 있다. 장다혜 작가의 신작 [탁영] 속 백섬이 그렇다. 역병에 부모 잃고 매골승에게 의탁하게 된 다섯 살 때부터 수어의 최승렬 대감의 구곡재에서 구계로 살아가게 된 열 여덟 살까지 그는 참으로 기구하고 박복한, 짧디짧은 삶을 살았다. 그럼에도 원망과 분노 대신 향기로운 꽃을 품고 정갈히 사는 게 중하다 여기는 이였다. 본디 영혼이 결곡하고 영롱하였으리라. 그에게 행해진 악행을 활자로 읽는 이조차 마음이 먹먹해 목이 메고 눈시울이 시큰거려 읽기가 버거웠건만 백섬은 마지막 순간까지 순수했다. 이루지 못한 애틋한 사랑, 희제와의 연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하였다.

시대극을 좋아하고 서스펜스를 즐기는 이라면 ‘장다혜’ 이름 석 자를 새겨야 할 듯. [탄금] - [이날치, 파란만장]에 이어 [탁영]까지 작품 모두 흔들림 없는 필력과 눈을 뗄 수 없는 서사와 주제의식을 담고 있다. 신분과 성별의 벽 그리고 재력과 권력을 쫓아 스스로 인간임을 포기하는 캐릭터의 폭주로 참혹한 파국에 이르게 되는 흐름에서도 주인공들은 흔들림 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절절한 그 마음에 손을 모아 간절히 힘을 보태게 된다.
조선시대를 동경하는 장다혜 작가는 작품의 배경이 전부 조선시대다. 비록 양반, 중인, 천민 등 신분의 차이가 분명한 시대라 하더라도 마음과 마음이 통해 서로에게 전해지는 한 사람, 정인에게 끌리는 것은 하늘도 어찌할 수 없다. 그러니 인간이 어이 막을 수 있으랴. 금와당 주인 희제는 속수무책으로 종 백섬에게 이끌리고 만다. 마음 주는 이들을 차례로 떠나보낸 후 허한 마음에, 누구에게도 다시는 주지 않겠다 다짐했던 마음에 불씨를 지펴 다정한 온기를 불어넣는다.

풍요는 우리네 생활을 윤택하게 해줄 수는 있겠지만, 결핍은 우리네 정신을 윤택하게 해준다. 무언가를 누리지 못하거나 갖지 못한 이는 작은 것에도 감사하며 만족감,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은 내일을 상상하고 이는 삶에 대한 고찰과 열정으로 이어진다. 백섬은 벗 한번 사귀지 못해본 피폐한 삶, 피가 아닌 마음씨와 성정이 닮은 누이 막단을 허망하게 떠나보내야 했던 퍽퍽한 삶 속에서도 온기를 꺼트리지 않고 품고 살아왔다. 그를 만나 금박장 희제는 비로소 삶을 달리 보게 되었다.

사람이 사림을 만나 마음을 열고 사귀어 ‘벗’이라 부를 수 있는 관계에 이르기를 소설 [탁영]은 잘 보여주고 있다. 서로에 대한 지극하고 진지한 마음을 나누는 시간이 쌓여 비밀을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진정 듬직한 기둥이 되어주는 것이다. 이런 벗을 만나는 일은 백섬이, 희제가, 칼두령 마도진이, 익위 방호가, 복순 어멈 원영이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게 만들었다. 팔딱거리는 심장처럼 절로 눈이 가고, 손이 가 마음이 머물러 자신보다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게 하였다.

서늘하고 탐욕스러운 권력 투쟁의 장에서 우정과 연모와 사랑 그리고 정을 나누는, 선한 이들이 진실을 밝히고 잘못을 바로잡으려 사력을 다하는 여정이 숨 가쁘게 펼쳐진다. 진실을 파헤치려는 측과 왜곡하려는 측의 쫓고 쫓기는 싸움, 죽고 죽이는 혈투를 벌이는 가운데 인물들의 감정선이 섬세하게 그려져 흡입력을 한층 더 높여준다.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혀버린 인생사 소용돌이 속에서 진실이 가져온 고통을 감내하며 기꺼이 바로잡고자 애쓰는 아름다운 사림들의 분투기에 가슴을 부여잡게 된다. 어느새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고 애통한 탄식이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온다. 제목이 ‘탁영’이라 슬픈 결말을 예상했지만, 너무나 비극적이다. 꽃그늘을 바라는, 의미 없이 살고자 한다는 그를 보내기가 참으로 아리다.

사회에서 정한 신분이 아니라 타고난 성정과 갈고닦은 심성으로 곁을 내어주고픈 벗을 사귀고, 마음을 나누는 고운 이들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가 바로 여기 있다! [탁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