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어가 제철 트리플 14
안윤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트리플 시리즈 14번째 이야기 『방어가 제철』을 만났다.

'작가 - 작품 - 독자'의 아름다운 트리플을 향한 멈추지 않는 도전이 우리를 들뜨게 한다.

3편의 단편과 1편의 에세이로 얇지만 단단한 구성으로 독자를 찾는 트리플 시리즈.

이번에는 '안윤' 작가의 『방어가 제철』[달밤 - 방어가 제철 - 만화경 - 없는 것들이 있는 자리]를 만날 수 있다. '20장 정도의 짧은 글로 자신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할 수 있는 이는 참 행복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읽고 나서 굳이 장수를 세어보았다. 분명 술술 읽히는데도 강한 여운을 남기며 곱씹게 만들어 다시금 펼치게 만드는 글이었다. 그래서 세어보았다. 12장, 20장, 20장. 얼굴도 제대로 모르는 '안윤' 작가에게, 작가 소개에 옆모습만 남긴 그에게 시기의 눈초리를 보내게 된다.



방어가 제철/안윤/자음과모음




'상실'을 경험한 이들이 세 편 모두 등장한다. 상실이 사랑하는 이의 죽음일 수도 있고, 관계의 끝일 수도 있다.

1인칭 시점에서 서술된 [달밤][방어가 제철]은 지인과 가족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을, 3인칭 시점에서 전개되는 [만화경]은 '이혼'으로 인한 상실이 타인의 죽음과 연결되고 있다.

'나'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점차 애도의 대상이 확대된다.

'나'가 사회에 나와 관계를 맺고 좋아하고 사랑하게 된 언니의 죽음(달밤)에서

'나'는 선택할 수 없었지만 삶의 소중한 부분인 가족인 오빠와 엄마의 죽음(방어가 제철)으로 이어지고,

이혼 후 이사한 집에 살았던 바로 전 입주민이 죽었다는 사실(만화경)을 알게 됨으로써

상실의 아픔은 분명해지고, 애도의 대상은 보편화된다고 생각한다.

[만화경] 속 등장인물 '나경'이 '이미리내'라는 타인을 알게 된 순간부터 애도는 시작되었다.

상실을 경험한 인물들은 한결같이 그 상실을 수용하기까지 유예의 시간을 두었다. [달밤]에서는 1년 후의 시간을 그리고 있고, [방어가 제철]에서는 14년 후의 시간이 펼쳐진다. [만화경] 또한 이사 오기 전에는 알지 못한 사실이었으니 유예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상실을 받아들이기까지 각자에게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적당한 시간을 가진 후 다시 마주 볼 수 있어야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방어가 제철] 소설집 등장인물들은 어둠을 뚫고 빛을 마주할 수 있는 치유의 시간을 잘 보낸 듯하다. 눈부셨다.



'애도'를 하는 방식은 다 다를 테다. 죽음이 삶과 분리되지 않은 연장선상에서 존재한다고 본다면, 죽은 이를 보내고 다시금 살아있는 이들이 일어서야 한다고 본다면, 이 소설에서처럼 '음식'과 '식사'를 통해 몸과 마음의 허기를 채우는 방법이 좋을 듯하다. 따뜻한 온기를 나누는 자리로 죽은 이를 추억하고, 살아있는 이에게는 힘을 나눠줄 수 있으니 말이다.


[달밤]

좋아하는 동생의 생일상 육개장이 떠난 이의 제사상에 올려지는 시간의 단차는 주인공 '나'에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힘이 되어줄 것이다.

아프지 마. 안 아픈 게 최고야. 안 아픈 게 돈 버는 거야. _달밤 14쪽

그 애가 살아온 내력이 보이더라고요.

노동에 숙련된 몸, 어떤 환경에든 자신을 기꺼이 끼워 맞출 줄 아는

마음 같은 거요.

그건 네가 그런 사람이라서 보이는 거야.

아마 언니는 그렇게 말하려나요. _달밤 21쪽

좋아하고 사랑했던 언니가 떠난 후 언니가 본인에게 했던 말을, 소애에게 똑같이 하는 것처럼 마음이 이어졌다. 스스로 없기를 원한 언니를 무참히 떠나보낸 '나'는 살아있기에 살아갈 것이고, 언니와 그랬던 것처럼 소애와 마음을 나누며 살아갈 것이다.


너무 쉬워요. 버리고 버려지는 게요. _달밤 22쪽

말이 별로 없다는 소애가 설거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나에게 했던 말이다. 버려지는 음식에 대한 상념이 꼬리를 물고 늘어져 꿈꾸지만 고단한 삶에 대한 푸념을 내비친다. 소애도, 나도 꿈꾸는 삶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도움 되지 않는 응원만 전할 수밖에 없어 무력하다.

축하해, 전소애. 태어난 거, 살아온 거, 살아 있는 거, 다. _달밤 26쪽

삶의 고단함과 무게 그리고 사랑이 느껴졌다. 소애의 '버리고 버려진다'라는 말을 포근하게 덮어줄 수 있는 응답처럼 들려와서 좋았던 구절이다. 우리는 이렇게 매 순간 축하할 일이 넘치고 축하받아야 할 일이 가득한 삶을 살고 있다.

[방어가 제철]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어긋나기 시작한 밤, '어디서부터'가 되기 가장 알맞은 밤에 있던 4명 중 이제 2명만이 남았다. 오빠를 떠나보내고 잊어왔던, 아니 잊지 못했던 그에게 엄마를 떠나보내는 장례식 소식을 전했다. 그렇게 살아있는 '나'와 '정오'가 만났다. 그리고 계절마다 만나 맛있는 제철 음식들을 3년 동안 먹었다. 나는 그 3년의 시간 동안 먼저 떠난 오빠를 애도하고자 했던 마음만큼 그리웠던 '나의 정오'를 떠나보내는 준비를 했다.

그가 툭, 하고 무언가를 내려놓거나 구길 때마다

나는 날카로운 것에 할퀴인 상처를 마주하는 것처럼

마음이 불편했다. _방어가 제철 42쪽

아무도 잘못한 이들이 없는 듯한데 꼬여버린 삶이었다. '세상사 맘대로 되는 거 하나 없는데 반찬이라도 맘껏 고르면 좋지 않냐'라며 반찬가게를 했다는 엄마의 말을 나는 뒤늦게 이모한테 전해 들었다. 아이고, 불쌍해서 어떡해, 불쌍해서.

마음대로 되지 않은 세상사라 원망했던 삶이었건만 어느새 엄마의 반찬가게를 물려받아 이모들과 운영하면서 정오에게 순탄한 삶이라고 말하는 나를 보면서 묘한 기분을 느꼈다. 행복이란 과연 무엇일까? 꿈이란 과연 무엇일까?

오빠의 죽음 이후 자신을 벌주듯 살아온 나는 정오 또한 고통받기를 바라면서도 잘 살아주기를 바랐다. 정오 또한 그런 마음이었으리라. 나와 정오의 끝맺음으로 나는 추억하는 순간을 오롯이 그리워할 수 있게 되었다. 돌이킬 수 없지만 눈부신 순간이었다. 모든 것이 진심인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

행복이란 과연 무엇일까? 질문에 답을 넌지시 건네는 단편이었다.

이혼 후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나경에게 정신과 의사는 "일상을 뒤흔드는 큰 불행이나 걱정거리가 없는 상태, 조금은 단조롭게 느껴지는 날들이 행복에 더 가까워요."라고 말한다.

이혼 후 관심이 싫었던 나경이 연락하는 친구가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 수진이었다. 나경과 수진의 상황은 대비되지만, 정답은 없다. 아니 각자가 짊어지는 삶의 무게와 형태가 다를 뿐이다. 나경은 가볍든 무겁든 자기 살기 바쁜 요즘, 자신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집주인 숙분 할머니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납득할 수 없는 행동들의 이유를 알게 되면서 그리고 새로 이사 온 숙분의 지인 단심 할머니를 만나게 되면서 나경도 차츰 마음을 열고 세상을 바라본다. 그리고 주위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런 분은 진짜 처음 봐. 진짜 그렇다. 우리는 다 다른 존재들이다. 비슷할 수는 있지만 똑같을 수는 없다. 처음 겪어본 사람처럼 느껴지는 기분은 진심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관심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알게 된 후 알기 전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나경은 이제 행복의 문을 열었다. 서른세 개의 야광별이 뜬 베란다에서 행복을 채워나갈 일이 기대된다.

'안윤' 작가의 『방어가 제철』은 감각적인 소설집이다. 미각, 청각, 시각, 촉각 등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는 장치들을 곳곳에 잘 배치하였다. 그래서 작가의 의도와 등장인물의 감정이 깊숙이 파고든다.

단편마다 '음식'이 중요한 매체가 되어서 등장한다. 음식에 대한 묘사는 온기와 사랑 그리고 관심을 우리에게 불러일으켰다. 사람들 간의 관계에서 '음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달았다. 마음이 투영된 음식이 고스란히 흡수되어 소화되었다. 또한 계절의 변화와 반짝이는 별, 모양이 바뀌는 달 그리고 파도가 치는 바다에 대한 시청각적인 묘사가 배경처럼 스며들었다.

떠난 존재들을 추억하며 다정한 인사를 건네고, 하루를 진심을 다해 살아가는 그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들 곁에 그들의 안부를 걱정하는 이들이 함께 해서 다행이고 고마웠다. 그들의, 우리 모두의 안온한 하루를 기대해 본다.

<출판사에서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서평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코딱지 송 고래책빵 어린이 시 5
백승찬 지음 / 고래책빵 / 202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코딱지 송/백승찬/고래책빵




제목부터 유쾌한 <코딱지 송>의 작가는 초등학교 4학년 백승찬 어린이입니다. 어린 학생이지만 벌써 자기가 쓴 책이 있는 멋진 시인입니다. 시어 구사력이 흥미롭습니다. 소재는 어린이다우면서도 현실적인 표현에 웃음이 묻어나고, 주제와 어휘력, 표현력에 깜짝 놀랍니다.

 

'왜? 어째서? 어떻게?' 같은 질문을 만들고 상상으로 답을 하며 시를 짓는다는 백승찬 작가의 글이 인상적입니다. 일상에서 쉽게 접하는 소재들로 구상하고 질문을 던지며 즐거운 상상의 나래를 펼쳐 시를 지었을 모습에 대견하기도 하고 멋지네요.

 

우리를 반기는 첫 번째 시 <지퍼왕의 행차>

이 시를 읽고 백승찬 시인의 '생각의 깊이'에 놀랐습니다. 쭈욱~욱 지이~직 소리에 집중할 줄 알았던 어린이의 시선이 왕, 법, 정치, 이산가족에 이르다니요. 도도한 지퍼왕과 화난 백성들의 표정을 잘 담은 그림이 완성도를 높이는데 한몫 톡톡히 합니다.

 

 

<코딱지 송> 지퍼왕의 행차

 


총 4부로 묶은 시집은 풍성한 시와 귀여운 그림과 다채로운 생각들이 조화를 잘 이루었습니다. 재미가 주렁주렁 - 글자가 수군수군 - 수업이 들썩들썩 - 생각이 몽글몽글

 


<코딱지 송> 전학 온 친구 & 수영장

 


독특한 배치로 순간 '어떻게 읽어야지? 아, 글자 쓰는 순서대로 읽으면 되겠구나.' 당황하게 한 <전학 온 친구> 시가 재밌었어요.

 


 <코딱지 송> 수박의 패션쇼 & 제멋대로 농구공

 


어린이 특유의 재기 발랄한 생각이 돋보이는 <수영장>, <수박의 패션쇼>, <제멋대로 농구공> 같은 시들은 읽으면 재밌고 흥겹습니다.

 

그리고 팬데믹으로 많은 제약을 겪은 어린 세대들의 생각을 잘 표현한 <코로나-19의 생일파티> 시는 코끝을 시큰거리게 만들고 가슴을 무겁게 합니다. 맘껏 만나고 뛰놀고 웃으며 생활할 수 있는 날이 얼른 왔으면 합니다.

 

<코딱지 송> 코로나-19의 생일파티 & 수학 올림픽

 

 


공부하는 학생으로 느끼는 솔직한 마음이 전해져 학부모로써 더 애틋한 마음이 들었던 3부. 수업이 들썩들썩

학교생활의 다양한 모습과 공부에 대한 부담 그리고 배움을 향한 열정을 백승찬 시인만의 참신한 언어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피식피식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한답니다.



시인이 경험하고 바라보고 이해하는 세상이 '시'를 통해 다시 재구성되는 마법을 함께 하면서 행복해졌어요. <동시집이 나오기까지> 백승찬 시인 어머니의 글을 읽으면서 그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이 한 권의 시집에 담긴 온 마음이 읽는 독자까지 즐겁고 행복하게 만들었다는걸요.

 

<출판사에서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울어진 미술관 - 이유리의 그림 속 권력 이야기
이유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서리가 매끄럽고 둥글게 커팅 된 작은 사이즈의 책.

하지만 강렬한 표지가 그 안에 담긴 글의 무게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의미심장한 말을 건네는 듯,

당신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다는 듯,

당당한 그녀의 눈빛과 자세에 압도된다.

 

 

기울어진 미술관/이유리 지음/한겨레출판



저자 이유리는 '미술' 카테고리 안에서 안전하게 꽈리를 튼 '권력'을 세상의 시선이 닿는 밖으로 과감히 끄집어내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불편하고 꺼려지는 이 행위의 정당성은 이 글을 읽고 반응하는 우리 독자가 부여할 것이다.

 

'그림'이 제작된 시대를 벗어날 수 없다는 자명한 진실에서 출발하는 저자의 비판이 껄끄러운 이유가 단순히 현대적 사고관으로 이해되지 않은 과거의 시대적 한계와 무지만은 아닐 것이다.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과거를 되돌아보고 같은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함과 더 나은 내일을 위한 결정과 선택을 내릴 수 있는 지혜를 배우기 위함이다. <기울어진 미술관> 또한 이 책을 통해 순수한 예술로서 미술을 바라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안에 녹아든 시대의 공기를 살펴보고 현실에 투과해 보는 자세를 기르는 데 그 의미가 있다. 그리고 예술의 참모습을 지향하는 예술가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힘을 실어주기를, 곁에서 지지해 주는 벗이 되어주기를 갈망하고 있다.

 


<올랭피아의 하녀> 장 미셸 바스키아, 1982년

 

바스키아는 '미술관에는 흑인이 없다'라며 흑인이 미술관에 들어올 수 있게 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는 뼈 있는 말을 남겼다.

 


<기울어진 미술관>은 권력의 입맛에 맞게 그려진 그림들을 비판하고 있다. 권력자의 의도대로 그려진 그림들은 우리가 잘 아는 명화들이며, 널리 알려지고 추앙받는 대 화가가 그린 작품들이다. 주문 제작하는 시대에 자본과 권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을 예술가들은 놀라운 솜씨로 고객의 의도를 잘 담아내었다. 그리고 화가 또한 그 시대의 일부이기에 사상적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회색과 검정의 조화>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 1871년

 


여성, 흑인, 질병, 성소수자, 모성, 페미니즘, 어린이, 노화, 인디언, 동물 등 수많은 대상과 관념들이 권력의 과녁이 되어 기울어지고 비딱하고 뒤틀려진 결과물로 생산되었다. 그렇게 수 세기에 걸쳐 소비되어 이어져온 미술사 속에서도 사회가 규정한 '정상성'을 벗어나 온전한 자신이 되기 위해 싸워 마침내 해방에 이르는 존재들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저자 이유리는 그들의 험난하고 고단한 투쟁기를 주제별로 엮어 잘 풀어놓았다.

 

권력에 예속되는 것을 거부하며 끝까지 자신의 소신을 지킨 조선 시대 화가 최북의 일화를 들려주며, 이 책과 자신의 소명을 밝히고 있다.

 

"그림은 내 뜻에 맞으면 그만입니다. 세상에는 그림을 아는 자가 드뭅니다.

100세대 뒤의 사람이 이 그림을 보면 그 사람됨을 떠올릴 수 있겠지요.

저는 뒷날 저를 알아주는 지음을 기다리렵니다."

 

 

권력자가 자신에게 그리기 싫은 그림을 요구하자 스스로 눈을 찌르며 저항했다는 화가 최북이 남긴 말이다. 뜨거운 덩어리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 온몸을 달구는 듯 강렬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의 말을 따라 읊조려보면 그림을 사랑하고 귀히 여기는 이가 덤덤하게 말하는 듯하여 더 가슴 아리다.

 


<기울어진 미술관>을 읽으면서 관성에 젖은 나의 사고를 직시하면서 충격을 받았다. 같은 그림을 보면서도 표면적이고 보여주는 주제에 심취하거나 그들의 명성과 자본으로 환원된 그들의 가치에 놀라서, 숨겨진 의도와 아픔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1도 하지 못했다.

여성의 시각에서 바라본 불편한 진실이 주제였던 <불편한 시선(이윤희 저, 아날로그 출판, 2022.07.10)>을 먼저 읽은 후라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권력의 영향력은 깊고 넓고 어둡고 끈적거려 파장이 컸다. 그렇기에 그에 저항하여 더디게 내딛는 발걸음이 더 무겁게 느껴졌다.

 


<샤를마뉴의 대관식> 세부 라파엘로 산치오, 1516~1517년

 

 


<기울어진 미술관> 속 권력으로 뒤틀린 미술사가 고전, 중세, 근대를 지나 현대로 가까워질수록 더 피부에 와닿는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의 모습을 담고 있기에 잘 전달된다.

 

한국의 메디치가, 삼성가 '이건희 컬렉션'의 기증으로 묻혀버린 기업의 예술 후원에 관한 실상도 생각거리가 가득하다. 이번에 국립현대미술관과 LA 카운티 뮤지엄이 <사이의 공간: 한국미술의 근대> 전시를 개최하는데 방탄소년단 RM이 오디오 작품 해설 참여해 화제가 되고 있다. 그리고 그 전시회에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이건희 컬렉션 21점이 포함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국 근대미술사에 대한 관심과 반향이 커질 수 있는 반가운 소식이건만 마음 한편이 불편하여 마음껏 기뻐할 수 없어 답답한, 묘한 기분이다.

 

저자는 네덜란드 공화국 튤립 값 거품에서 NFT 시장으로 자연스럽게 투기의 '광기'를 바턴 터치한다. 이런 광기를 뒤로한 채 튤립 자체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소중히 여길 우리와 그 가치를 위해 농사짓는 농부를 기억하고자 한다. 그림을 그 자체가 가지는 아름다움과 가치로 순수하게 감상하고자 한다.

 

캔버스를 감상하면서 표면적인 이미지와 색채에 한정되지 말고,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살펴볼 수 있는 성숙한 시선이 필요하다는 자각을 심어준, 의미 있는 책이다. 끌려다니지 말고 깨어있는 자가 되고 싶어졌다.

 

한겨레출판 하니포터4기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키워드 동남아 - 30개의 주제로 읽는 동남아시아의 역사, 문화, 정치
강희정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30개의 주제로 읽는 동남아시아의 역사, 문화, 정치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교수진들이 가까우면서도 생소한 '동남아시아'에 대해 핵심 주제를 선정하여 상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는 책 『키워드 동남아』




키워드 동남아/강희정·김종호 외 지음/한겨레출판



지리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비슷한 면이 많은 데도 별다른 감흥을 갖지 못했던 동남아시아였다. 하지만 올해 시사프로와 책('우리가 몰랐던 동남아 이야기' 신일용 저/밥북 출판/2022년 1월 21일 발매)을 통해 동남아시아의 험난한 역사를 알게 되면서 '동남아시아'에 관심이 생겼다. 『키워드 동남아』책은 알듯 모를듯하지만 우리나라와 친숙한 동남아시아를 다각적으로, 심층적으로 조명해 주고자 기획된 책이다. 관광지로서의 동남아만이 아닌, 경제 협력·문화 교류의 영역까지 전문가의 상세하고 친절한 설명이 이해를 돕는다.



태생적으로 지리에 약한 나는 같은 아시아 대륙에 살고 있지만,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남아시아 등의 구분에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도 세계 지도의 도움을 받았다. 동남아시아에 있는 11개국, 그중 동티모르를 제외한 10개국(미얀마, 라오스, 타이, 베트남, 캄보디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브루나이, 필리핀)이 동남아시아국가연합, 즉 아세안(ASEAN)을 결성해 국제 사회에서 그네들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데 힘쓰고 있다. 지리, 경제, 정치, 종교, 언어와 문화 거의 대부분의 분야에서 제각각 특징을 지닌 동남아시아이기에 '아세안의 가치와 역할이 중요할 것이다. 이 책에서도 '정치' 보따리를 통해 중요하게 다루고 있어서 흥미 있게 살펴보았다.



정치학, 역사학, 인류학, 미술사를 전공한 동남아 연구자들이 풀어낸 동남아시아의 거의 모든 것, 『키워드 동남아』 통해 각양각색, 만인만색인 다채롭고도 복잡한 '동남아시아'로 깊숙이 들어가 보는, 생생한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무지했는지, 무심했는지를 직접 경험해 보길 바란다.



역사 : 지워지지 않는 제국의 유산

지지 않는 태양처럼 찬란하게 유럽을 비추고 있던 제국주의 열강에 의한 '대항해 시대'가 동남아에게는 커다란 비극의 시초가 되었다. 제국의 눈에 들어온 동남아는 너무나 매혹적인 땅이었다. 자원의 축복이 도리어 화가 되어 그들의 운명을 뒤흔들었다. 제국의 필요와 시선에 의한 사회, 경제, 정치의 변화는 아직도 동남아 곳곳에 남아 근대화의 시초로 평가되기도 하고, 갈등의 발판이 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민지에서 벗어나 다양성을 유지한 채 독립국가로 자리 잡은 동남아만의 저력을 인상 깊게 실감했다.

제대로 된 문명이 자리 잡지 않은 미개한 역사로 뭉뚱그려 치부해온 동남아시아의 과거도 재조명되고 있었다. 동남아 문명의 형성과 수준을 연구하는 데 중점이 되는 부분은 지리적 여건으로, 여러 교역의 중개 지역이었기에 상업과 화폐를 주목했다. 많이 발견되는 화폐를 통해 동남아시아 문명이 이룩한 상업적 발전 정도를 가늠할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놀랍게도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돼지 저금통 대부분이 자바 섬에서 대량 발견되었다고 한다. 자본주의와 상업적 요소는 서구 문명의 성과라 여겨졌던 지라 동남아에서 발견된 '저금'의 흔적은 우리의 선입견과 편견을 깨부순다. '동남아'에 대한 정확한 평가와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동남아의 현지인들은 어떤 제국도 그들 공동체와 운명을 함께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혹한 착취와 방임으로 깨달았다. 싱가포르의 최초 빈민 병원은 중국계 상인에 의해 세워지고 운영되었으며, '바나나 머니'와 군표를 포함한 일본 점령기에 발행된 화폐는 전쟁의 끝과 함께 사라졌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제힘으로 스스로 일어서야 한다는 자각의 계기가 된 것이다. 이것은 강대국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한 동남아시아 특유의 '독립적인 행동 외교'와 '다자외교'의 양분이 되었을 것이다.



문화 : 섞임과 스밈이 빚은 아름다움

동남아시아 하면 떠오르는 장면은 계단식 논과 커피, 후추를 비롯한 다양한 향신료, 길거리 음식들이다.

세계유산이 된 계단식 논은 그 이국적인 풍경으로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눈으로 보기에는 장관이지만, 인간의 강고한 의지와 지난한 노동을 상징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다.

육두구, 정향, 후추, 팔각 등 다양한 향신료의 땅. 풍성한 자원이 부를 가져다주기는 했지만 유럽의 식민지화를 부추겼다는 점에서 축복이자 저주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는 인간의 탐욕이 부른 결과로, 향신료는 여전히 향기롭고 감각적인 맛을 선사할 뿐이다.






문화를 다루는 장은 음식·종교·혼례·의상·음악·영화·인형극 등 방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각 장마다 제각각 종족과 종교에 따라 다르기도 비슷하기도 한 생활양식과 특징들을 접할 수 있다. 유명한 베트남 커피 이야기와 다양한 종족으로 구성된 미얀마에서 버마족 전통의상을 입은 정상 수치에 대한 내용이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현재는 베트남에서만 볼 수 있는 수상 인형극이 전승자가 줄어 명맥을 유지하기가 점차 힘들어지고 있다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간 전통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전통도 생명처럼 자라고 죽을 수 있으니 부디 귀히 섬김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








정치 : 약육강식의 세계를 살아가는 기술

작년 2월 미얀마에서 들려온 끔찍한 소식이 있었다. 군부 쿠데타가 다시 일어난 것이다. 6년여의 짧은 민주화 시대에서 다시 군부 독재 시대로 돌아간 미얀마에 아직까지 봄은 찾아오지 않고 있다. 5·18 민주화 항쟁을 겪은 우리들은 그들의 고통이 남일 같지 않다. 군화발에 짓밟히고 차여도 다시 일어나 거리로 나오는 학생, 청년, 민중의 저항 의지가 부디 꺾이지 않도록 국제적인 지원과 관심이 필요할 것이다. 표현의 자유를 잃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젊은이들은 '밀크티 동맹'과 소셜미디어를 활용한 21세기 전략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들이 그들의 목소리를 지키기 위한 전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일제 강점기가 끝나고 친일파들이 그대로 사회 지도부로 흡수된 것처럼 타이 군부와 왕실의 제휴와 밀월은 새로운 시대를 반기며 희망에 부푼 국민들을 철저히 배반하는 것이었다. 강대국(미국)의 입김과 권력욕이 부른 결과였다. 그 결과 왕은 민주주의의 영웅으로 추앙받았고, 국민들은 머리를 바닥으로 수그렸다. 하지만 이제는 당당히 머리를 들고 "자유, 평등, 우애"를 상징하는 손가락 세 개를 펼치고 군주제 개혁을 주장하고 있다. 왕실모독 죄로 강요된 침묵의 벽에 금이 가고 있다.

아세안으로 강대국 사이에서 '독립적인 행동 외교'와 '다자 외교'를 펼치고 있는 동남아시아의 외교 전략을 분석하고 있다. 미·중·일 강대국과의 외교뿐만 아니라 북한과의 견제까지 고려하는 특수한 한반도 정세에서 살펴보자면 동남아의 외교 전략은 다분히 매력적이다.



"태양이 여러 개일 때야말로 작은 행성들은 항해의 자유를 더 확보할 수 있다."

- 싱가포르 외교가 라자라트남 장관


전문가들이 작정하고 풀어낸 『키워드 동남아』를 통해 동남아시아의 과거와 현재를 이해하고, 동반자로써 더 나은 내일을 향해 함께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한겨레출판 하니포터4기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다
정세진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허를 찌르는 작품

사회의 숨겨진 이면을 날카롭게 파고드는, 충격적인 전개가 매력적인 소설이다.



나는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라/정세진 소설집/고즈넉이엔티




정세진 작가의 소설집 『나는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다』에는 총 7편의 단편이 수록되었다.

표제작인 《나는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다》를 필두로 펼쳐지는 이야기들은 현실에 뿌리를 두었지만 작가의 비범한 상상력으로 상식을 깨부수는 다른 세계의 이야기로 바뀌었다. 여우에게 홀린 듯 화자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정의인가? 불의인가? 옳고 그름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회색 지대 같은 세계가 현실인지 비현실인지 판단 내리기 어렵다. 작가가 던진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꼼짝없이 매료되고 말았다.





1. [나는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다]에서 나는 자신의 범죄를 허무맹랑한 억설로 아무 일이 아니라고 포장한다. 높은 담장 안 요새같이 감춰진 저택 안에 숨겨져 있는 치명적인 비밀을 듣고 싶은 욕망이 먼저인지, 돈이 먼저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아홉 살 아이를 유괴하고 아무도 모르는 끔찍한 방법으로 유기하고, 이를 빌미로 부모에게 돈과 그만큼의 가치를 지닌 비밀을 털어놓게 하는 '나'는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자신한다.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행복한 결말이라 다행이란다. 유괴범인 '나'의 궤변을 듣고 있자니 기분이 불쾌해졌지만, 이 이야기의 씁쓸한 뒷맛은 높은 담장 안에 자리 잡은 한 가정의 이중적이고 추악한 진실과 부부가 털어놓는 비밀에 그 정도는 약하다 도발하는 '나'로 대변되는 부정과 불의를 묵인하고 외면하는 사회이다.

"여보…… 우리 다 잘 될 거야." (p.34)

 

 

타임 루프를 다루는 대부분의 이야기는 반복되는 삶 속에서도 의미를 찾으려는 주인공을 그려내면서 희망을 전한다. 하지만 2. [인터뷰]는 그 공식을 깨고, 반복되는 삶을 빈틈없는 일정 대로 살아가며 사회적으로는 성공한 인생을, 개인적으로는 허무한 인생을 살아내야 하는 인물을 보여주고 있다. 3만 년이 넘는 시간을 살아내면서 겪었을 환희와 열정 그리고 회한과 고뇌는 어느새 사라지고, 껍데기 같은 삶을 보내는 강 대표의 공허한 눈빛을 상상하며 읽어내려갔다. 단 한 번뿐인 인생의 무게를 감사히 여기며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 [어쩌면 운이 좋아 우연처럼]는 마냥 좋을 것만 같은 행운을 소재로 풀어내는 이야기가 이리도 우울할 수 있다니 놀라웠다. 행운을 저어하던 주인공이 어쩌면 운이 좋아 우연처럼 만나기를 바라는 마지막이 인상적이었다.

 

 

6. [나를 버릴지라도]는 기도를 실현해 주는 이가 종교인들이 아닌 하청업체라는 황당무계한 설정이다. 폭력을 싫어하지만 정의로운 인물인 동철이가 입사 면접 차 영문도 모른 채 납치되어 섬으로 끌려가 노예로 살아가는 어린 소녀들을 구해내는 이야기이다.

법의 사각지대, 인권이 사라진 지옥 같은 공간을 그려내고 있는 작가의 펜은 자신들의 편의와 안위를 위해 눈을 감아버린 경찰과 섬마을 주민들을 꿰뚫어 보고 기록하고 있다. 자신의 기도는 들어주지 않았다고 항의하던 동철이가 안정적인 일자리가 생겼다고 기뻐하는 현실적인 그림에 작가에게 통쾌한 한방을 먹은 것 같았다.

"어쩌면 너는 스스로 벗어날 힘이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쟤들은 누가 봐도 도와줄 사람이 없잖아. 기적이 일어난다면 모를까." (p.209)

 

 

7.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가지만 나의 시간은 멈췄다]로 마무리되어서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허무하고 공허한 이야기로 헛헛한 느낌으로 끝나지 않고, 훈훈한 이야기로 온몸에 흐르는 피가 잘 돌아 따뜻한 느낌에 절로 미소 지을 수 있었다.

거꾸로 가는 벤자민 버튼의 시간과는 달리 삶의 빈 곳이 충족된 찰나에 멈추길 바라는 주인공의 소망이 기적처럼 이루어지길 바란다. 무엇이든 가능한 이 안에서는 이루어지리라.

"미안해……." (p.243)

 

 

이야기꾼이 들려주는 이야기 모두 근사한 시간을 만들어주었다. 언제든지 기꺼이 시간을 내어 듣고 싶은 이야기들이다.

 

<출판사에서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