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공포 소설/추리 소설의 창시자이자 대가인 포의 단편 작품을 엮은 책이다.나는 그 중에서 ‘검은 고양이‘와 ‘어셔가의 몰락‘을 읽었는데 과연 최고의 공포소설이라 칭할 만큼 무시무시했다. ‘검은 고양이‘는 인간성의 공포를 조성했고 ‘어셔가의 몰락‘은 엄청난 우울감을 조성했다. 특히 ‘검은 고양이‘는 내가 중학생 때 처음 읽었던 작품으로 다 읽고 나서 그날 밤 잠을 거의 못 잔 것으로 기억한다. 그 경험 때문일까? 개인적으로 나는 포의 작품 중에서 ‘검은 고양이‘가 제일이라고 생각한다. 동물을 사랑하고 온화했던 한 남자가 어느 순간 술과 악에 받쳐가는 모습이 검은 고양이가 만들어 내는 기괴한 일들과 어우러져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이다. 두번째로, ‘어셔가의 몰락‘은 공포보다는 깊은 우울감이 특징이다. 여기서 어셔가의 마지막 자손 로더릭을 관찰하며 그의 분위기, 즉 우울한 분위기를 관찰해 나가는 ‘나‘의 관점은 아마 포가 느꼈던 우울감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정신적 우주와 물질적 우주의 온갖 대상에 어둠을 마치 영혼 자신의 내재적인 성질인 것처럼 쏟아부어 대상들이 끊임없이 우울감을 뿜어나게 만드는 그런 영혼˝이 구절은 우울의 본질, 그것들이 뿜어내는 어떠한 분위기를 표현한 것이리라. 사실 이 작품이 큰 반전은 죽은 줄만 알았던 로더릭의 여동생이 관에서 나온 것과 어셔 가의 저택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이다. 그러나 무시무시했지만 로더릭니 어째서 살아있는 여동생을 무슨 생각으로 생매장시킨 것인지, 그리고 저택에 남아있는 하인들은 어떻게 됬는지 제대로 나와있지 않아 아쉬웠다. (그리고 거의 직역에 가까웠던 번역도 ;;)우울과 공포.포는 이 둘을 전부 가지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나는 아직 진정한 공포를 느껴본 적은 없고 한 번은 지독한 우울에 빠진 적은 있었다. 모든 것이 허무해지고 이렇게 계속 살아가는게 과연 옳은 일인가 하면서 진지하게 도민해 본 적도 있다. 그 감정이 비록 한 순간이고 일생에서 그냥 지나가는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때의 감정은 지금 생각해보면 내면에 깊은 잔상을 남긴 것 같다. 그 점에서 포의 소설을 읽으면 원초적이고 순수한 우울과 공포를 경험 할 수 있어서 좋았다. 읽으면 우울하겠지만 드것을 똑바로 바라보아야만이 극복할 수 있기에 앞으로도 가끔씩 읽어야겠다 생각한다.
이 책은 내가 읽은 몇 안되는 현대 문학 중 하나인 작품이다. 그런 의미에서 읽기엔 좀 도전적이었지만 읽어보니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이야기의 첫 부분은 해리엇과 데이비드가 파티에서 만나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데이비드와 해리엇은 당시 젊은이들이 즐기는 화려한 파티, 누군가를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것, 그리고 그들 사이에 은밀하고 문란한 성생활 등을 거부하고 파티에서도 둥 뜬 채 서로 만난다. 둘은 금새 사랑에 빠지고 커다란 집 한 채를 사 후에 태어날 아이들과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는 꿈을 가진다. 그러나 시어머니와 친척들은 옛날처럼 아이들을 많이 낳고 행복한 가정을 이꾸는 일들이 지금은 어려운 일이라며 둘을 만류하지만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포기하지 않았고 그들 소원대로 4명의 아이를 낳고 부활절과 크리스마스 때마다 집에서 파티를 여는 등 행복하게 산다. 그러나 해리엇이 다섯째 아이를 가지기 시작하면서 가정은 점차 파괴되어간다. 뱃속에서부터 불길한 기운을 낸 '벤'은 마치 고대 원시인들이 가졌을만한 힘과 야성을 내뿜었으며 생후 몇개월도 안되 개를 죽이거나 생닭을 갈가리 찢는 등의 잔인성을 보인다. 그 기괴함에 데이비드와 친척들은 그를 따로 격리 시설에 맡기지만 해리엇이 다시 되찾아오면서 상황은 더 심각해진다. 4명의 아이들은 각각 친척집에 살게 되었고 남편도 점차 집에 들어오지 않게 된다. 그리고 '벤'이 15살 즈음이 될 무렵 해리엇은 파괴된 가정에 허무감을 느끼며 집을 팔기로 결심하고 부엌의 커다란 식탁을 보며 자신과 가정, 그리고 '벤'에 대해 생각하면서 이야기가 끝난다. 이 작품은 처음에 그저 평범한 가정소설 비슷한 평화로운 분위기였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이 '벤' 때문에 공포로 바뀐다. 작가가 이 소설을 쓰게 된 계기 중 하나로 빙하시대에 있었던 야성적인 인류의 유전자가 아직 남아있는가 하는 궁금증이었다고 한다. 이에 부응하듯이 소설 속의 '벤'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저것이 과연 인간인가?'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호러스럽다. 그리고 작중 해리엇처럼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사이코패스라던가 신체적으론 멀쩡하지만 무언가 우리와 '다른' 사람이 어떻게, 또 어디서 태어났는지 고민하게 되었다. 비슷한 작품으로 제라르 드 세르발의 공포 소설 '초록색 괴물'이 있다. 귀신이 출몰한다는 저택에 출동한 한 경찰은 그곳에서 각종 가구들과 식기들이 춤을 추는 것을 목격하고 그 중 포도주 하나를 훔쳐온다. 얼마 후 결혼을 하게 된 그 경찰은 결혼 축하 기념으로 저택에서 훔친 포도주를 마신다. 그 후 아내가 아이를 낳았는데 마치 악마 같은 외모에 성격까지 악마 같았다. 이에 부부는 나날이 괴로워했지만 아이는 13살이 될 무렵 홀연히 사라지고 꿈에서 저택의 귀신이 비웃으며 이야기가 끝난다. 이 소설에서 나온 아이는 한마디로 '저주' 때문에 태어난 아니다. 그렇다면 다섯째 아이인 '벤'도 저주를 받아서 태어난 것일까? 아님 어쩌다 운 않좋게 걸려든 변수일까? 도대체 그 유전자는 어디서 온 것일까?책의 서문에서는 행복한 가정에 대한 환상이라고 나와있었지만 나는 그것보다 이 알수 없는 유전자의 유례가 이 작품의 중요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물론 '벤'이 태어나면서 분유대신 모유를 먹이거나 아이를 산부인과가 아닌 집에서 낳는 등 전통적인 양육방식을 고집하던 해리엇 부부가 분유를 먹이거나 병원에 가는 등의 전통적 가정을 점차 벗어나는 모습을 보이기는 한다)만약 내가 해리엇이고 태어난 아이가 '벤'과 같은 아이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나 같았으면 남편 데이비드가 그랬던 것처럼 격리 시설에 계속 맡겼을 것 같다. 부모가 된 도리로서 자식을 그런 곳에 보냈다는 것은 가슴아프지만 아이의 행동을 보면 너무 도가 지나쳤다. 이건 가정의 화목 때문만이 아닌 사회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예를들어 악질 범죄자나 사이코패스를 정부가 석방시킨다면 그게 과연 옳은 것일까? 사람들이 환영할까? 결론적으로, 현대소설인 만큼 현실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게 해준 소설이었다. 가정소설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독하게 마음먹고 읽어야 하고 특이하지만 공포 소설을 좋아하시는 분들에게도 추천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