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강유원 옮김 / 이론과실천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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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은 칼 마르크스의 친구이자 이념적 동지였던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년 11월 28일 - 1895년 8월 5일)'가 쓴 독일 관념론 비판서이다. 원래 본 책은 1845년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의 서문에서 자신들의 사상이 이전의 독일 고전 철학과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밝히고 이를 비판하기 위해 쓴 것을 시작으로 만들어질 예정이었다. 하지만 당시 사정으로 인해 미처 출판하지 못했고, 마르크스 사후 전 세계로 퍼진 마르크스의 사상이 왜곡되고 이론화되어가는 과정을 보다 못한 엥겔스가 다시 한 번 이 주제를 다룰 필요성을 느껴 1886년에 새롭게 출판하게 되었다. 


또한 엥겔스는 같은 시기에 잡지 <새로운 시대>의 편집부로부터 포이어바흐에 대한 비평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아 앞의 관념/이론의 비판과 함께 포이어바흐의 비판 역시 같이 수록하기로 결정한다. 이 포이어바흐 비판은 독일 관념론 비판서처럼 과거 마르크스가 미완성 초고로 남긴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마치 성경의 십계명을 연상시키는 아주 간략한 이 글은 우리가 잘 아는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라는 구절로 끝난다.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은 총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기존의 독일 고전철학에 대한 비판이다. 여기서 엥겔스는 과거 독일을 휘어잡았던 헤겔 철학을 시작으로 독일 관념론의 단점과 오류를 지적한다. 두 번째는 포이어바흐를 향한 비판이다. 엥겔스는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적 입장에 대해선 좋은 평가를 내리지만 그가 여전히 추상적인 부분에 머물러 있음을 지적한다. 세 번째는 변증법을 통한 국가와 사회,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사고 과정을 다루고 있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인상 깊었던 것은 첫 번째 부분에서 독일 관념론을 비판하면서 궁극적인 철학적 진리란 없다는 주장이었다. 엥겔스는 헤겔이 말한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다"라는 명제를 가지고 변증법적 논리를 펼친다. 겉으로 보면 현실에 순응하라는 것 같지만 엥겔스는 헤겔에게 있어 '현실적'인 것은 '필연성'이라고 덧붙인다. 즉, "현실성은 자기의 전개 과정에서의 필연성임이 입증된다"라는 것이다.


'자기 전개 과정에서의 필연성'이 곧 현실성이다. 그렇기에 현실은 어느 한 가지 진리나 사상에 의해 확립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발전 '과정' 중의 하나일 뿐이다. 이를 통해 엥겔스는 학문이나 종교에서 말하는 진리란 없다고 말하는데,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궁극적인 것, 신성한 것의 해체가 파격적이면서도 흥미로웠다. 


다음으로는 포이어바흐를 향한 비판이었다. 나는 예전에 포이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과 <종교의 본질에 대하여>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리고 종교를 철학적으로 비판하는 모습에서 신선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종교의 비밀을 폭로한 것 같았달까?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비판적인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엥겔스와 마르크스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이들 역시 한때 포이어바흐를 추종했으나 나중에 비판적 입장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본 책에서는 그 이유가 적나라하게 나온다.


포이어바흐는 종교의 비밀을 폭로함으로써 인간이 관념이 자연과 세상을 움직인다는 오류를 지적했으며, 오히려 현실(자연)이 인간의 생각을 만들어낸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포이어바흐가 마지막에 가서는 결국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덕에만 머물고자 했으며, 사실상 그의 책에는 '현실적 인간'이 보이지 않는다고 맹비판한다. 아마 인간이란 사회적 동물이자 사회적 유산 - 사회의 영향을 잘 받는 존재라고 생각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사회적 현실 대신에 홀로 숲 속에서 은거하며 추상적 인간 - 무한한 사랑을 얘기하는 인간에게 질렸던 것 같다. 너무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던 건지도 모른다. 이 부분은 왠지 훗날 마르크스가 '진정한 사회주의'와 같은 추상적 사랑과 정에만 호소하는 사회주의자들을 비판하는 모습과 겹쳐 보였다.


그 외에도 마지막에 국가와 이데올로기적에 대해서는 국가 권력의 기초란 그 사회의 기득권층에 기인하며, 정치권력 또한 이런 경제적 이해관계에 달려있음을 말하는 부분이 인상 깊었다. 정신이 물질을 지배하는 게 아니라 물질이 정신을 지배한다는 유물론적 사고와도 비슷해 보였다.


결론적으로 보면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은 철학, 종교, 사회, 경제, 그리고 이데올로기에 대한 마르크스, 엥겔스의 관점을 간략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앞서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고 했지만 마냥 그렇지만 않다. 사실상 이 책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이론에만 머물지 말고 현실을 쟁취하라'라고 할 수 있겠다. 세상을 바꾸는 건 너희들의 머릿속 생각에만 있는 게 아니라 사회적 현실에도 있으니, 변화하고 싶다면 앉아만 있지 말고 사회 현실에 적극 참여하라는 것이다. 물론 마르크스, 엥겔스의 사상이 전부 맞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런 부분만큼은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아닐까 싶다. 


마르크스 / 엥겔스의 사상을 간략하게 알고 싶은 분, 혹은 최근 포이어바흐의 책을 읽은 사람, 그리고 비슷한 종류의 책에 관심이 많은 분들에게 추천드린다. 


국가가 우리에게 악으로 보이는데도 그것이 계속해서 존속한다면, 정부의 악은 그 악에 상응하는 신민의 악으로써 정당화되며 설명된다. 당시의 프로이센 사람들은 그들에게 합당한 정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 P13

인류 역사에서 현실적이었던 모든 것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비이성적인 것이 된다. 따라서 그것은 규정 자체로 보아 이미 비이성적인 것이며 처음부터 비이성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인간의 두뇌 안에 있는 이성적인 모든 것은 그것이 아무리 현존하는 외견상의 현실성과 모순되는 것이라해도 현실적인 것이 될 운명을 지니고 있다. 헤겔 철학이 인간의 사유 및 활동의 결과가 궁극적인 것이라는 생각을 끝장난 데 있다. - P14

그러니 학문은 이른바 어떤 절대적 진리를 발견함으로써, 더이상 나아갈 수 없다거나, 팔짱을 끼고 이미 획득된 이 절대적 진리를 놀라운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되는 지점까지는 결코 이르지 못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정은 철학적 인식의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인식과 실천 활동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역사도 인식과 마찬가지로 인류의 완전한 이상적인 상태에서 완결될 수 없다. 완전한 사회, 완전한 ‘국가‘는 환상 속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 이와 반대로, 이어지는 역사적 상태들은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상승하는 인간사회의 끝없는 발전과정의 일시적 단계들일 뿐이다. - P15

변증법 철학은 궁극적 의의를 가지는 절대적 진리와 이에 상응하는 인류의 절대적 상태에 대한 모든 표상을 해체한다. 이 철학 앞에는 궁극적인 것, 절대적인 것, 신성한 것이 아무 것도 성립하지 않는다. - P15

세계사는 더 할 일이 남아 있지 않은데도 계속되어야 한다 - 그러므로 이것은 해결할 수 없는 새로운 모순이다. 이렇게 설정된 철학의 과제는 한 사람의 철학자가 수행해야 할 과제가 아니라 전 인류가 전진적 발전 속에서 수행할 수 있는 것임을 통찰하기만 하면, 우리가 이것을 통찰하기만 하면 지금까지의 의미에서의 철학은 끝난다. 우리는 이러한 방식으로 그리고 개인들이 개별적으로는 도달하지 못할 ‘절대적 진리‘는 내버려두고, 변증법적 방법을 매개로 실증과학의 방법과 그 성과의 총괄에 의하여 도달할 수 있는 상대적 진리를 추구한다. - P20

개별 영혼의 불멸이라는 지루한 상상을 하게 된 것은 종교적 위안의 필요에서가 아니라, 영혼의 존재는 인정하면서도 일반적인 한계 때문에 죽은 후에 그 영혼이 어디로 가버리는지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곤란함 때문이다. - P28

데카르트에서 헤겔에 이르는, 그리고 홉스에서 포이어바흐에 이르는 오랜 기간에 걸쳐 철학자들을 움직여 온 것은 그들이 생각한 것처럼 순수사유의 힘만은 결코 아니었다. 그와는 반대였다. 실제로 그들을 앞으로 밀고간 것은 주로 위력 있고 더욱 더 급속하고 급격한 자연과학과 산업의 발전이었다. - P32

물질은 정신의 산물이 아니며 정신이 물질의 최고 산물일 뿐이다. 우리는 자연 속에서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사회 속에서도 살고 있고, 인간 사회는 자연 못지않게 발전사와 학문을 가지고 있다. - P38

우리가 지금 그 안에서 생활하지 않을 수 없는 사회, 즉 계급대립과 계급지배에 기초하고 있는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과 교류하면서 순수하게 인간적인 감정을 느낄 가능성이 본래 매우 적다. 우리는 이 감정을 종교라는 높은 자리까지 받들어 올림으로써 이 가능성을 더욱 적게 할 이유는 조금도 없을 것이다. - P47

행복추구는 관념적인 권리만으로는 아주 불충분하며, 그것은 무엇보다도 물질적 수단을 더 많이 요구하지만, 자본주의적 생산은 동등권을 가진 대다수의 개인들이 극빈한 생활을 유지하는 데 극히 필요한 것만을 겨우 가질 수 있도록 하고, 그에따라 자본주의가 일반적으로 행복에 대한 다수의 동등권을 존중한다해도 노예제나 농노제도보다 더 존중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 P53

우리는 항상 모든 획득된 인식의 필연적인 한계, 모든 획득한 인식은 그것이 획득된 상황에 의해서 제약된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다. 지금 진리로 인정되고 있는 것은 지금은 숨어있으나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나타날 오류의 측면을 가지고 있으며, 또 그와 꼭 마찬가지로 지금 오류로 인정되고 있는 것도 진리의 측면을 가지고 있으며 그 때문에 이전에 참된 것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는 것, 또 필연적인 것이라고 확인되고 있는 것은 순수한 우연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우연적인 것이라고 간주되는 것은 필연성이 감추어져 있는 형식이라는 것 등을 알고 있다. - P62

역사의 진행이 어떠하든지 사람들은 자신이 의식적으로 수립한 자신의 목적을 추구함으로써 자신의 역사를 창조하며, 서로 다른 방향으로 활동하는 수많은 의지와 외부세계에 대한 이러한 의지의 다양한 작용의 결과가 바로 역사인 것이다. - P67

불철저함은 관념적인 충동의 힘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만 머무르고 더 나아가서 그러한 충동의 힘을 움직이게 하는 원인을 찾으려 하지 않는 데 있다. - P68

무엇보다도 먼저 경제적 이해관계가 중요했고, 정치적 권력은 이 경제적 이해관계를 관철하는 수단에 불과하였다는 점도 명료하다. 현대 역사에서는 모든 정치투쟁이 계급투쟁이며, 또한 모든 계급 해방투쟁은 필연적으로 정치적 형태를 띠기에 결국은 경제적 해방에 달려있다. 여기서 국가, 정치질서는 종속적인 요소이며 시민사회, 경제적 관계들의 영역이 결정적인 요소이다. - P72

대공업과 철도의 시대인 오늘날조차 국가는 전체적으로 볼 때 생산을 지배하는 계급의 경제적 요구를 포괄적 형식으로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다. - P73

인간에 대한 최초의 이데올로기 권력은 우리에게 국가로 나타난다. 이 기관은 생겨나자마자 사회에 대하여 자립성을 가지게 되며 또 그것이 특정 계급의 기관이 되면 될수록, 이 계급의 지배를 직접적으로 실현하면 할수록 사회에 대한 자립성은 더욱 더 강화된다. 국가는 사회에 대하여 자립적인 권력이 되는 즉시 그 이상의 이데올로기를 낳는다. - P78

인간은 실천 속에서 진리, 즉 현실성과 힘, 자신의 사유의 차안성을 증명해야만한다. 사유 - 실천이 고립된 - 의 현실성이나 비현실성에 관한 논쟁은 순전히 스콜라주의적인 문제이다. - P86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며,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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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지 않는 기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9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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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소설 같은 책이다. 존재하지 않는 기사 ‘아질울포‘는 속이 텅 빈 갑옷의, 말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 인간(?)이다. 작가는 아질울포와 그 주변 인물들의 방황을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인간의 존재 의의를 생각해보게 만든다. 이야기가 끝으로 갈수록 다소 흐지부지했지만 재밌으니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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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지마 노래하면 집이 파다닥 1
콘노 아키라 지음, 이은주 옮김 / 미우(대원씨아이)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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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학교의 별>, <가라오케 가자!>로 유명한 와야마 야마 작가님이 추천하길래 한 번 읽어봤다. 그림체가 왠지 정감 가고 스토리도 일상 개그물이라서 즐겁게 읽었다. 러시아에서 온 정체불명의 새 ‘쿠지마‘와 평범한 중학생 ‘아라타‘의 우정도 훈훈했다. 다음 권도 시간이 되면 읽어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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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8
나쓰메 소세키 지음, 노재명 옮김 / 현암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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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는 내가 좋아하는 나쓰메 소세키 작품 Top 3 안에는 드는 작품이다. 예전에 정말 재밌게 읽었는데 그때 그 기분을 다시 느껴보고 싶어서 이참에 재독하게 되었다. 그렇게 다 읽어 본 결과, 정신병 오는 줄 알았다. 장편 소설을 읽을 때마다 찾아오는 신체적 병(어깨 결림, 목 아픔, 엉덩이 아픔 등등)을 잊을 정도로 정신적으로 타격이 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정도는 아니다. 거긴 거의 지옥불 수준이지만 다행히(?) <그 후>는 거기까진 아니고, 다만 주인공인 '다이스케'가 서서히 파멸해가는 순간이 괴로울 뿐이었다.

작중 다이스케는 30살 먹고서도 아무 직업도 가지지 않은 '백수'이다. 그나마 잘 사는 집안의 둘째 아들이라 매달 집에서 주는 생활비로 덕분에 유유자적한 생활을 한다. 사회적 의무를 멀리하고 오직 자기 자신만의 안위를 위해 살아가는 다이스케는 저자 나쓰메 소세키가 말한 '고등유민(高等遊民, 고등교육을 받고도, 취업을 하지 않고 일정한 직업이 없이 먹고사는 사람을 일컬음)' 그 자체다. 그러던 어느 날 다이스케의 옛 친구인 '히라오카'가 그가 사는 곳으로 이사 오게 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히라오카는 취직한 직장에서 빚을 지고 생활고에 시달린 채 초라하게 도쿄로 왔는데, 그의 곁에는 아내 '미치요'가 있다. 사실 히라오카, 다이스케, 미치요 이 셋은 학생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다. 미치요의 오빠 '스기누마'는 다이스케와 히라오카의 친구인데, 미치요를 두 사람에게 맡기고 병으로 죽었다. 다이스케는 친구와의 우정을 위해 본인이 직접 히라오카와 미치요의 결혼을 주선한다. 그렇게 해서 결혼한 히라오카와 미치요. 하지만 몇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재회한 세 사람의 관계는 변해 있었다.

특히 다이스케는 미치요에게 강한 끌림을 느낀다. 갑작스레 끌린 건 아니고, 옛날부터 다이스케는 미치요에게 마음이 있었으나 사랑보다 우정을 택해 그녀를 히라오카에게 순순히 넘겨준 것이다. 그러나 히라오카의 생활고 문제와 아내 미치요를 향한 푸대접(?)을 보고 다이스케는 점차 미치요를 향한 이루지 못한 사랑을 키우게 된다.

그러나 다이스케는 생활력 제로에 백수이다. 더욱이 남의 아내를 좋아한다니! 사회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용서할 수 없는 짐을 지고 있는 셈이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도망치겠지만 작중 다이스케는 굉장히 고집 있는 인물이라 파멸될 게 뻔한데도 그 길을 걷기로 한다.


여기까지가 <그 후>의 대략적인 줄거리이다. 이 작품엔 소세키가 생각한 근대인의 고뇌가 잘 녹아들어가 있다. 대표적으로 관념과 현실, 정신과 물질 사이에서 방황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정확히는 '자아'와 '현실'의 대결인데, 주인공인 다이스케는 물질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것(자아)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생활고 때문에 어떻게든 현실에서 아득바득 살아가고자 하는 히라오카 앞에서 재수 없게 '빵(현실)보다 고귀한 것(정신, 자아)이 더 중요하다'라고 말한 것이 이런 이유다. 예전엔 이런 다이스케가 잘난 척하는 것 같아서 별꼴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잘난 척이라기보단 현실을 외면한 채 자기 자신에게 매몰된 '병든 인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이스케는 자기 본위와 고상한 인간을 대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중 타락했다고 표현되는 여느 현실적인 사람들보다 나은 인간으로도 나오지 않는다.


이는 결국 나쓰메 소세키 본인의 모습이라 본다. 그 역시 근대인의 불안을 몸소 겪은 적이 있고(영국을 유학하면서 큰 정신적 불안을 겪음), 다른 작품에서도 근대인보다 과거의 인간(정신적 인간)이 근대의 문명개화에 괴로워하는 모습이 빈번하게 나오기 때문이다. 어쩌면 다이스케도 그런 인물로 나온 게 아닐까. 히라오카와의 불화도 그렇고, 현실의 관계를 무시한 채 미치요와의 사랑이라는 탐미적인 관계만을 쫓던 다이스케가 처참하게 파멸해가는 과정은 도덕적인 걸 떠나서 강렬한 자아(정신)를 고집하던 한 인간이 현실적 문제에 부딪혀 소멸해가는 걸 나타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도 섬뜩하게 말이다.

이런 정신과 현실의 문제는 작품에서는 다이스케와 미치요의 관계를 다룰 때 '자연의 인간'과 '의지의 인간'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사회의 관습과 타산적인 현실에 순응하는 '의지의 인간'이 되어 안전하고 평범한 삶을 영위할 것인가, 아님 자연스러운 감정과 자기 본위적(어찌 보면 이기적)인 일에 온몸을 바치는 '자연의 인간'이 되어 정신적 안정을 찾을 것인가. 결국 앞서 말한 고뇌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다이스케가 겪는 불안은 근대인의 불안이라고 하지만 개인적으론 21세기의 현대인의 불안과 별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저렇게 극단적이진 않을지라도 누구라도 현실을 살아가다 보면 자아와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는 일이 한 번쯤 생기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내가 부제목으로 '백수가 읽으면 안 되는 책'이라고 한 것도 비슷한 이유다. 백수를 비하하고자 한 게 아니라 취업이나 기타 사회적 의무의 압박감이 심한 상태에서 섬세한 심리를 가진 사람은 능히 자기 자신의 존재 이유를 생각하기 마련인데, 그 과정에서 오는 불안과 고통은 작중 다이스케가 느끼는 불안과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기까진 괜찮을지 몰라도, 작품은 마지막에 정신(자기 본위, 자아)을 선택한 다이스케의 파멸을 그리고 있기에 비슷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이 봤다간 맨 처음에 말했듯이 정신적 괴로움이 더 심해질 수도 있다(주인장 경험상 그렇다 ㅎ....).


그치만 카타르시스 or 이열치열이라는 말처럼 마음속에 담아뒀던 부정적인 감정을 되려 부정적인 걸 보면서 해소하는 것도 좋다. 분명 <그 후>는 우울하고 때로는 답답한 소설일지는 몰라도 작중 다이스케의 심리 묘사와 근대인의 불안을 다루는 면에서는 소세키의 여느 작품들 중에서 단연 최고다. 비슷한 처지의 사람이라면 무척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 <행인>과 함께 읽는 걸 추천드린다!

그 밖에도 이 작품은 '붉은색'과 '푸른색'의 대조가 인상적이다. 다이스케는 탐미적이고 심미적인 인간이라 푸른색을 선호한다. 고요하고 물속에 잠긴 득한 차분함을 좋아하는 다이스케는 처음엔 붉은색의 존재를 이해할 수 없어한다. 하지만 미치요와 만나면서 점차 붉은색에 먹혀가는데, 뜨거운 햇빛은 물론이고 도리이와 우체통, 장미 등등 붉은색으로 된 것이라면 그게 뭐든 다이스케를 괴롭게 한다. 파멸의 비유라고 할 수 있겠다. 작품을 읽을 때 이 점을 생각하고 읽으시길 바란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여러 꽃들이 등장하는데, 이것도 등장인물의 심리를 반영하고 있는 걸로 보이니 참고하시길!

빵과 관련된 경험은 물론 절실하겠지만 사실 그건 저열한 것이지. 빵을 떠나고 물을 떠나서 고상한 경험을 해보지 않는다면 인간으로 태어난 보람이 없지.

다이스케는 모든 도덕의 출발점은 사회적인 사실밖에 없다고 믿고 있었다. 처음부터 머릿속에 굳어진 도덕관념을 가지고 그 도덕관념에서 반대로 사회적 사실로 발전시키려 하는 것만큼 본말이 전도된 일은 없다고 믿고 있었다. (중략) 다이스케는 인류의 일원으로서 마음속으로 서로를 모욕하지 않고서는 서로 접촉할 수 없는 현대사회를 20세기의 타락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이는 근래 급격히 팽창된 물질에 대한 욕심의 큰 압력이 도덕의 붕괴를 초래한 결과라고 해석했다. 또한 그것을 신구 세대의 가치관의 충돌로 간주했다. 결국 눈에 띄게 심해진 물질 욕의 발전은 유럽에서 밀어닥친 해일이라고 결론 내렸다.

자연의 아이가 될 것인지, 아니면 의지의 인간이 될 것인지 다이스케는 헤맸다. (중략) 처음부터 왜 자연스러운 흐름에 저항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빗속에서, 백합 속에서, 다시 살아난 과거 속에서 순수하고 평화로운 생명을 발견했다. 그 생명 어디에서도 욕망은 없었다. 이해관계도 없었다. 자신을 압박하는 도덕도 없었다. 구름과 같은 자유와 물과 같은 자연이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행복했다. 따라서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이윽고 꿈에서 깨어났다. 이 순간의 행복에서 비롯된 영원한 고통이 갑자기 다이스케의 머리를 침범했다. 그의 입술은 색깔을 잃었다. 그는 말없이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손톱 밑으로 흐르고 있는 피가 부들부들 떠는 것 같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백합 쪽으로 다가갔다. 입술이 꽃잎에 닿을 정도로 바짝 붙어서 현기증이 날 때까지 진한 향기를 밭았다. 그는 이 꽃에서 저 꽃으로 입술을 옮기며 달콤한 향기에 숨이 막혀 정신을 잃고 방 안에서 쓰러지고 싶었다.

인간은 열정을 가지고 대할 정도로 고상하며 진지하며 순수한 동기나 행위를 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보다 훨씬 열등한 존재다. 그런 열등한 동기나 행위에 열정적인 사람은 무분별하고 유치한 두뇌의 소유자 거나 열정을 가장해서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사기꾼에 불과하다.

따라서 다이스케의 냉정함은 진취적인 태도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인간을 깊이 분석한 결과임에는 틀림없다. 그는 평소 자신의 동기나 행위(사회적 행위)를 깊이 음미해 본 결과 교활하고 진지하지 못하고 대개는 허위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열정적으로 그 일에 매달릴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다이스케는 단눈치오처럼 쉽게 자극을 받는 사람에게 지극히 자극적인 색깔인 빨간색이 왜 필요한지 불가사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이스케 자신은 이나리의 도리이만 봐도 그다지 기분이 유쾌하지 않다. 가능하다면 자신의 머리만이라도 좋으니 푸른빛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편히 잠들고 싶을 정도다. 자신도 그렇게 가라앉아 차분한 분위기에서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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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 지구의 운동에 대하여 8 - 완결
우오토 지음, 하성호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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