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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락 ㅣ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19
알베르 카뮈 지음, 이휘영 옮김 / 문예출판사 / 2015년 12월
평점 :
높은 곳에서 순식간에 낮은 곳으로 떨어진 한 변호사의 고백록이다.
실은 모든 게 '계획적'이긴 하지만 그가 내뱉는 고백은 종교적 고백록을 뛰어넘어 인간 본질에 다가서는 훌륭한 고백이었다. 한 사람의 장황한 설명으로 가득한 책이지만 200페이지 이하의 짧은 분량에다가 마치 도스토옙스키 소설에 등장하는, 발작적으로 마구 대사를 날리는 주인공이 매력적이다(심판자로 가득한 현대 사회 속 주인공 클라망스가 주장하는 인간의 이중성 또한 흥미롭다).
철학적이거나 카뮈를 다시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적극 추천드린다!
인생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에겐 부족한지도모릅니다. 죽음만이 우리 감정을 깨우쳐준다는 사실을 주목한 적이 있으십니까? 그런데 왜 우리가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 더 정당하다고 관대한지 아십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의무가 없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들은 우리의 자유를 구속하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무슨 의무를 짊어지운다면, 그건 추억을 요구하는 일일 텐데, 우리 기억력은 짧거든요. 그러니 친구들 속에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갓 죽은 고인, 마음 속에 고통을 주고 있는 고인뿐으로서, 결국 그건 우리의 감동을 사랑하는 것이요,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거예요! - P35
권력이란 모든 것에 해결을 지어줍니다. 이제야 우리 늙은 유럽은 좋은 철학을 갖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옛적의 소박했던 시대 사람들처럼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당신의 의견은 어떻습니까‘하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총명해졌어요. 대화를 코뮈니케(정부의 공식 성명서 따위)로 바꿔놓았지요. ‘그것이 진리이다. 너희들은 얼마든지 그것을 논의할 수 있지만, 그건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옳다는 것은 훗날 경찰이 증명하게 될 것이다‘ - 이렇게 우리는 말합니다. - P47
나는 모든 일을, 무엇보다도 먼저 내 결심을 잊어버렸어요, 결국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었지요. 때로는 내 일상생활에 관계없는 일에 열렬한 관심을 갖는 체하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실상은 내 자유가 구속당하는 경우가 아니면 정말 그 일에 참여하진 않았습니다. 뭐랄까요? 그저 스치며 지나갈 뿐이었어요.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나를 스치면서 흘러가기만 했던 겁니다. - P51
그러니 자진해서 죽어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자기에 대해서 남이 가져주었으면 하는 그 관념에 자신을 희생시켜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말입니다. 당신이 죽어버리고 나면 녀석들은 당신의 행동에 어리석은 동기, 아니면 저속한 동기를 붙여서 이야기할 겁니다. 여보세요, 순교자는 결국 잊혀져버리든지, 비웃음을 받든지, 이용당하든지, 그중 어느 것을 선택할 수 밖에 없어요. 남이 자기를 이해해 준다는 건 결단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 P77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우리를 심판할 구실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심판받아야 할 그 무엇이 내게 있자나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 때부터, 요컨대 그들에게는 억누를 수 없는 심판 버릇이 있다는 것을 나는 꺠달았습니다. 행복이나 성공을 너그럽게 나우어주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걸 용서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행복해지려면 너무 남의 일을 걱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행복을 붙들고 심판을 받든지, 용서를 받고 비참하게 살든지 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 P81
인간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생각, 마치 인간 본성의 밑바닥에서 솟아오르듯 천연하게 떠오르는 생각은 자기에겐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를 호소하고자 합니다. 누구나 모두 기어코 자기의 결백을 요구하려 들고, 그러기 위해서는 전 인류와 하늘이라도 고발하기를 서슴지 않습니다. 요는 자기들에게는 죄가 없고, 자기들의 덕성이 선척적이기 때문에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그리고 자기들의 과오는 어쩌다 닥친 불행으로 야기된 것으로서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 P83
대게는 그와 반대로 자기와 비슷하고 자기와 같은 약점을 가진 사람에게 마음을 털어놓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제 결점을 교정하고 싶어하지도 않고, 남에게 교정받고 싶어 하지도 않는 겁니다. 그러자면 우선 잘못이 있다는 판결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동정을 받고, 자신이 걷고 있는 길에서 격려를 받고 싶어 할 뿐이에요. 결국 죄를 짊어지기도 싫고 결백해지려고 노력하기도 싫은 겁니다. 충분한 시니시즘도 없고 충분한 용기도 없어요. 우리에겐 악의 에너지도 선의 에너지도 없습니다. - P85
우리는 어느 누구의 무죄도 단언할 수 없는 반면에 모든 사람의 유죄를 확실히 단언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른 모든 사람의 죄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죄를 만들어내고 벌을 주고 하는 데 신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인간들이면 족하고, 더구나 우리 자신이 그걸 돕습니다. 심판관들이 우글거리고 있어요. 우리는 모두 심판관이니까, 모두 서로 남의 눈에는 죄인이고 우리 식으로 졸렬하게 그리스도여서 하나씩 십자가에 못 박히게 마련인데, 여전히 까닭을 모르지요. - P117
남을 심판할 권리를 얻기 위해서 우선 자신을 통렬히 비판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인의 직책을 다하여 나중엔 심판자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했어요. -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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