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도련님 ㅣ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2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평점 :
(개인적인 생각이 있을 수 있음)
'나쓰메 소세키'는 내가 도스토옙스키 다음으로 제일 좋아하는 작가이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소세키 특유의 분위기와 문체가 마음에 들어서 시간이 날 때마다 꾸준히 애독하고 있다.
사실 '도련님'은 예전에 읽었던 작품이다. 그때는 도련님의 호탕한 태도에 대해서만 통쾌해하고 즐겁게 읽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흑역사가 아닐 수 없다. 물론 그렇게 자학할 것 까지는 없지만, 다소 1차원적인(?) 글이었기 때문에 아쉬운 감이 들었다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이 작품을 다시 읽게 된 건 단순히 흑역사 때문만이 아니다. 내가 다시 '도련님'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최근에 근처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다나구치 지로' 작가의 '도련님의 시대'라는 만화를 보고 나서부터였다. 방대한 등장인물과 시대 배경으로 인해 읽기 힘들었으나 소세키가 어떤 심정으로 '도련님'을 썼는지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달까? 다시 한번 '도련님'이 나를 부르는 것만 같았다.
古池や
오래된 연못
蛙飛び込む
개구리 뛰어드는
水の音
물보라 소리
'도련님'을 읽기 전에 책의 표지를 보면 하이쿠 시인으로 유명한 '바쇼'의 하이쿠가 적혀 있다.
오래된 연못, 즉 고여서 썩은 물에 '개구리가 뛰어드는' 모습을 그린 본 하이쿠는 작중 주인공인 '도련님'이 처한 상황을 제대로 보여준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불같은 성격을 가진 주인공은 마치 싱싱한(?) 개구리와 같다.
몸집은 작지만 자기보다 높이 뛰는 모습하며, 비가 오면 우렁차게 울어대는 개구리의 모습은 팔팔한 주인공 그 자체다. 그러나 주인공이 마냥 무데뽀인 건 아니다.
성미가 급해도 공정하고 정의로운 면이 있어서 설령 본인에게 이득이 있는 일이 있어도 그 방식이 정의롭지 않으면 거절한다. 그런 도련님의 진면목을 제대로 본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하녀인 '기요 할멈'이다. 그녀는 주인공을 구박하는 부모님과 친형과 다르게 그를 애지중지하며 아낀다.
여기까지 보면 기요 할멈은 그저 도련님을 응원해 주는 사람 같지만, 실제로 보면 전혀 아니다. 기요는 원래 지체 있는 가문의 딸이었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 신분제가 폐지되고 근대화가 진행되자 몰락해 도련님의 집에서 하녀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양반 가문의 딸인 기요는 작중 주인공의 '정의로운 면'을 끊임없이 칭찬한다. 물론 자식 같은 애정도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도덕적인 면을 특히나 좋아했는데, '도련님은 분명 높은 관직에 오르실 거예요'라고 입에 닳도록 말하고 다닐 정도였다. 나는 이런 기요의 구시대적인 생각(즉, 농사나 장사가 아닌 글공부와 도덕관념을 통해 출세했던 과거 유교 사회)을 통해 그녀가 '구시대적 인물'을 대표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는 결코 기요가 시대에 뒤떨어진 바보라는 걸 뜻하는 게 아니다. 그저 기요가 메이지 유신 이전의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기에 그녀가 칭찬하는 주인공의 정의로운 부분 역시 구시대에서나 먹히는 일임을 보여주고 있다는 거다.
바꿔서 말하면, 주인공이 추구하는 '정의'는 이미 유신(개화)이 시작된 당대 일본에선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이제 일본은 정의가 통하지 않은 사회가 되어버린 거다.
이런 상황을 전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주인공이 시골 학교의 수학선생으로 부임하게 된 일이다.
말이 시골이지 도시 사람보다 더한 인간들이 많았기 때문에 주인공은 제대로 당한다. 가령 그곳 여관에서 돈이 없어 보이니까 볼품없는 방을 제공하고 불친절하게 대하다가 주인공이 홧김에 팁을 어마어마하게 주자 단번에 허리를 굽힌다든지, 겨우 잡은 하숙집 주인은 다도를 핑계로 짝퉁팔이를 시전한다든지(원래 일본에서 다도는 차를 마시는 동안 진심 어린 얘기를 나누라고 있는 건데, 깡그리 무시함), 학교 학생들은 주인공이 단순하다는 이유로 따돌리고 놀린다든지 등등 전부 나열하면 끝이 없다. 보통 일본 하면 친절함을 떠올리지만 작중 주인공이 불평했듯이 사실은 그 친절함도 그들 특유의 이중적인 행위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앞에서 친절했다가 뒤에서 자기들끼리 험담하는 행위).
어쩌면 주인공이 있는 시골 자체가 당시 일본이라는 나라를 나타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주인공인 도련님은 앞에선 할거 다하면서 정작 잘못을 논할 땐 발뺌하는 비열한 사람들을 향해 거침없이 '정의'의 잣대를 휘두른다.
특히 다른 학교 선생님들에겐 별명까지 붙인다. 그중에서 주인공은 '빨간 셔츠(교감)'와 '알랑쇠(미술 선생)'를 제일 싫어하는데, 이들은 그가 제일 싫어하는 부류, 즉 앞에선 고고한 척하지만 실제로 보면 비열한 부류의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교감인 빨간 셔츠는 배운 사람(개화인)으로서 말빨은 뛰어나다. 그러나 잘 곱씹어 보면 그가 내뱉는 말들 대부분은 전부 본인에게 유리하도록 끼워 맞추는 내용뿐이다. 상황에 따라 옳고 그름을 바꾸려는 교감의 모습에 주인공은 분개한다. 무엇보다 자기한테는 교사의 자질을 운운하면서 본인은 저녁에 게이샤랑 놀아나고, 심지어는 착한 끝물 호박(국어선생)의 약혼자까지 빼앗으려고 하니, 정의로운 주인공이 폭발하는 건 당연한지도 모른다.
이런 교감과 비열한 선생들의 모습은 훗날 일본이 제국주의에 물들어 끊임없이 자기들을 정당화하려는 조짐을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닐까. 하지만 주인공은 한낱 신입 교사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교감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산미치광이는 정의감에 불타는 그에게 '속세의 정의'에 대해 이야기해 준다. 산미치광이가 말한 '속세의 정의'는 바로 '힘'이었다. 교장과 교감을 비롯한 교원들이 저렇게 부도덕해도 세상에 떵떵거리며 살 수 있었던 것은 이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높은 관직에 있으니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던 거다.
주인공은 산미치광이가 말한 속세의 정의에 대해 분개하면서 점차 세상에 대해서도 비판하기 시작한다.그런데 교장인 너구리와 빨간 셔츠(교감)은 이런 도련님 주인공을 가만히 내버려 둔다.
딱히 주인공에게 호감이 있어서가 아니라 정의감에 불타는 단순한 성격이라 이용해 먹을 수 있다 여겼기 때문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정의'를 대표하는 주인공이 비열한 사람들에 의해 이용당할 뻔한 것을 통해 정의란 의외로 단순하기 때문에 악한 자들에 의해 변질되기 쉽다는 점이다.
반면에 주인공은 쉽게 휘둘리지 않고 '세상은 힘'이라면 권력의 힘이 아니라 '진짜 힘'으로 제압하기로 결심한다.
작중 주인공이 워낙 무데뽀적인 행동과 말투를 가졌기 때문에 몇몇 독자들 중엔 '너무 무식하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힘을 힘으로 제압하겠다는 재치는 무척이나 통쾌하다. 그렇게 개구리 같은 도련님인 주인공은 흙탕물인 학교 전체를 뒤흔들기 시작하며 몸소 정의를 보여준다.
하지만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도련님'이라는 작품 상황과 달리 실제 현실에선 결말이 다르다.
다나구치 지로 작가의 '도련님의 시대'에서 소세키가 중얼거린 것처럼, '도련님'은 결국 질 게 뻔하다. 왜냐하면 도련님이 추구하는 정의는 옳지만 시대가 변화한 오늘날에는 그러한 정의가 더 이상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누가 도련님처럼 정의만을 위해 살 수 있을까. 앞에서 기요와의 관계에서 알 수 있듯이 도련님의 사상은 옛 시대의 잔재임과 동시에 구시대적이다.
아마 21세기 오늘날에도 도련님처럼 행동했다간 똑같이 순진하다거나 단순하다, 또는 너무 선비질을 한다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나쓰메 소세키는 도련님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아마도 내 생각엔 정의를 상실한 현 상황을 비난하기 위함과 동시에 그런 정의가 통하던 옛 시대의 잔재를 그리워하고자 했던 건지도 모른다. 한 마디로 '도련님'은 소세키만의 정의로운 세상(이상적인 세상)에 대한 진혼가였을 수도 있다.
나 또한 '도련님'을 읽으면서 유쾌한 청춘소설 같은 느낌이 들면서도 뭔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도련님 같은 사람이 과연 있을까?'하는 의문과 함께 '에이 설마, 요즘처럼 흉흉한 시대에 그럴 리가...'하는 안타까운 심정 또한 든 게 사실이니 말이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앞뒤 가리지 않는 성격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나는 손해만 봐왔다.
스스로가 한 짓을 말 못 할 바엔 처음부터 아예 하지를 말았어야지.
한 것은 한 것이고 안 한 것은 분명히 안 한 것이다. 거짓말을 하고 벌을 피할 생각이라면 처음부터 장난 같은 건 아예 하지 말아야 한다. 거짓말과 벌은 붙어 다니기 마련이다. 벌이 있기에 장난도 기분 좋게 칠 수 있다. 장난만 치고 벌은 싫다는 비열한 근성은 대체 어느 나라에 유행한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무슨 이유에선지 이 할멈이 나를 끔찍이 귀여워해 주었다. 신기한 일이다.
‘도련님은 올곧고 고운 성품을 지녔어요‘ 기요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나는 입에 발린 말은 싫다고 대답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면 할멈은 그러니 고운 성품이라며 기쁜 듯이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힘으로 나를 만들어 냈다며 자랑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학생들과 같은 자들로 이루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사과를 하거나 용서를 빌 때 진지하게 받아들여 용서하는 사람은 지나치게 정직한 바보라고 할 것이다. 용서를 비는 것도 가짜로 하기 때문에 용서하는 것도 가짜로 용서하는 거라고 생각해도 된다. 만약 정말 용서받기를 원한다면, 진심으로 후회할 때까지 두들겨 패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언변이 좋은 사람이 꼭 좋은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다. 끽소리 못하는 사람이 꼭 악인이라고 할 수도 없다. 표면적으로 빨간 셔츠의 말이 아주 타당하지만, 겉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마음속까지 끌리게 할 수는 없다. 돈이나 권력이나 논리로 사람의 마음을 살 수 있다면 고리대금업자나 순사나 대학교수가 사람들에게 가장 호감을 사야 한다. 사람은 좋고 싫은 감정으로 움직이는 법이다. 논리로 움직이는 게 아닌 것이다.
이렇게 교장이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여 자신의 허물이라느니 부덕이라고 할 정도라면 학생에 대한 처분은 그만두고 우선 자신부터 사직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남의 허물을 자신이 떠맡고 내 허물이다, 내 허물이다, 하고 떠들어대는 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산미치광이의 주장에 따르면 혼자 아무리 불평을 늘어놓아도 통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는 "Might is right(힘이 정의다)"라는 영문을 인용하여 나를 일깨우려 했지만 요령부득이어서 다시 물었더니 ‘강자의 권리‘라는 의미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나빠지는 일이 장려하고 있는 것 같다.
나빠지지 않으면 사회에서 성공하지 못한다고 믿고 있는 듯하다. 간혹 정직하고 순수한 사람을 보면, 도련님이라는 등 애송이라는 등 트집을 잡아 경멸한다. 그렇다면 초등학교나 중학교에서 윤리 선생님이 거짓말을 하지 마라. 정직하라고 가르치지 않은 편이 낫다. 차라리 큰맘 먹고 학교에서 거짓말하는 법이라든가 사람을 믿지 않는 비법, 또는 사람을 이용하는 술책 등을 가르치는 것이 이 세상을 위해서도 당사자를 위해서도 좋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