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리사 펠드먼 배럿 지음, 최호영 옮김 / 생각연구소 / 201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전적 견해에 따르면 감정은 보편적이다. 지역, 나이, 문화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은 슬픔과 기쁨과 분노와 기타 등등 우리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을 똑같이 느낀다. 예를 들어 이혼 숙려 캠프에 빌런이 등장하면 '분노 뉴런'이 활성화되어 심박수와 호흡, 혈압을 상승시킨다. 그들의 아픈 과거사를 듣고 나면 이제 '슬픔 뉴런'이 켜질 차례다. 우리 뇌는 우리가 이런 감정들을 느낄 수 있도록 특별하게 배선되어 있다. 웨이퍼에 감광 용액을 바르고 EUV로 깎아 회로를 그리듯, 뇌는 정교한 설계도에 따라 제작되어 새 생명에 탑재된다. 이것이 미국 영화와 한국 음악과 유럽 소설이 전 세계인에게 먹히는 이유다. 감정은 보편적이니까.


이 책은 감정에 대한 고전적 견해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저자가 '구성된 감정 이론'이라고 부르는 견해에 따르면 이혼 숙려 캠프의 빌런을 봤을 때 우리에게 닥친 일은 매우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빌런이 미친 짓을 했을 때, 그 장면이 내 안의 분노 회로를 촉발해 앞서 언급한 전형적 신체 변화를 일으킨 것이 아니다. 내가 그 순간 분노를 느낀 까닭은 특정 문화 속에서 성장한 나의 입장에서 볼 때, 특정한 신체 감각이 미친 짓을 목격한 것과 동시에 일어날 경우 '분노'가 생길 수 있다는 점을 이미 오래전에 '배웠기' 때문이다.


'배웠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쉽게 말해 우리가 분노라는 개념을 배우지 않았다면 동일한 신체 변화가 분노로 해석될 일은 없었을 것이란 말이다. 이 글을 읽는 순간 당신의 머릿속엔 아주 즉각적인 반론들이 들이닥쳤을 것이다. 그럼 지금 이 순간 내가 느끼는 이 기분들은 다 뭐란 말인가? 내가 분노를 배우지 않았다면 이런 기분들도 없었을 것이란 말인가? 내가 머릿속에서 분노라는 개념을 지우면 분노는 사라지고, 신체는 평화를 찾고, 나는 비로소 해탈하게 되는 것인가? 그럴 리가! 우리의 신체가 감각 기관으로부터 수집한 신호, 그것이 촉발한 신체의 변화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핵심은 그걸 해석하는 게 뇌고, 뇌는 문화적으로 학습한 개념을 따른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이 임의로 결합한다는 언어학 이론을 연상케 하면서 동시에 그냥 말장난 아니야? 하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예민하게 느낀다는 '눈치'에 대해 생각해 보자. 눈치가 없는 사람을 우리가 뭐라고 불렀지? 개념이 없는 사람 아닌가!!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에서도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분위기가 촉발한 기류의 변화를 포착할 만큼 '감정의 해상도'가 높지 않은 것이다. 왜? 그 변화를 해석할 개념을 배운 적이 없으니까. 연애하는 동안 이성으로부터 이런 말을 자주 들어본 사람이라면 구성된 감정 이론의 핵심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많이 가르쳤지. 내가 사람 만들었어.'


나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중 하나는 거짓말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중 하나는 거짓말이다.


- 이 소설의 장르는 판타지다.


- 등장인물 중 하나는 곧 죽을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을 가졌다.


- 모든 소설가는 우울증 환자다.


- 소설에는 세 개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중 하나가 아니라, 그 모든 게 제발 거짓말이길 기도할 만큼 우울하다.


- 이야기를 참고 또 견디다 보면 마법 같은 정화의 순간이 온다. 우리 손을 잡은 고난이 눈에 선명한 현실임에도,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용기가 생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컨드 브레인 - 우리 몸과 마음을 컨트롤하는 제2의 뇌, ‘장(腸)’
에머런 마이어 지음, 서영조 외 옮김 / 레몬한스푼 / 202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위가 뒤틀린다.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뒤틀린다. 누군가 위를 찢어버릴 목적으로 쥐어짜는 것 같아 잠에서 깰 정도다. 이상한 일이다. 스트레스는 정신의 영역일 텐데, 어떻게 물리적인 기관들이 영향을 받는 걸까?


생각이 모든 걸 좌우한다는 말, 일체유심조라는 이야기에는 가해자의 논리가 숨어있다. 마음의 평온이 결국 나에게 달린 문제라면 외부 조건을 바꾸기 위한 노력은 모두 헛수고이지 않은가.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것들은 아무 잘못이 없다. 내가 내 마음을 잘 다스렸다면 아무 감정도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이런 생각은 행동이 필요할 때 명상이나 하자는 비겁한 사람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한다. 어리석은 중생들이여, 모든 것은 마음에 달린 일일지니, 다투지 말고 자신의 마음이나 돌아보라. 정말 불쉿이다.


<세컨드 브레인>은 우리의 감정이, 생각이, 마음이라는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장 내 미생물이라는, 눈에 보이는 물리적 실체가 만들어낸다고 주장한다.


장과 장 내 미생물군은 밀접한 상호작용을 통해 우리의 감정과 통증 민감도,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에 영향을 줄 수 있고, 의사결정을 좌우할 수도 있다. (p.22)


영어로 직감을 gut(내장) feeling이라고 하는데 괜한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장과 뇌는 정보를 '양방향'으로 전달할 수 있는 굵은 신경다발과 혈류를 이용해 소통한다. 이 신경절달경로를 통해 호르몬과 염증성 분자가 부지런히 오가며 뇌와 장을 밀접하게 연결하는 것이다. 장은 고유한 신경계를 갖고 있는데 약 5천만~1억 개의 신경세포로 구성된다. 이는 뇌-신체 연결의 중추라 불리는 척수와 맞먹는 수치다.


장 신경계가 수집하는 풍부한 감각정보는 뇌에 전달되고, 뇌는 이를 분석해 장의 기능을 조절한다. 우리 몸은 이 과정에서 '감정을 느낄 수'있다. 감정을 감각정보 그 자체로 볼 것이냐, 아니면 뇌가 해석한 결과로 보느냐는 흥미로운 논쟁이긴 하지만 별 의미가 없다. 이는 물질이 먼저냐 생각이 먼저냐를 놓고 수천 년간 싸워온 낡은 유물-관념 전쟁을 연상케 한다. 해봐서 알겠지만 이는 헛수고일 뿐이다. 둘은 미묘하게 얽혀있다. 분명히 밖이라고 생각했는데 걷다 보면 어느새 안이되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정말 놀라운 건 장 내 메생물의 관점에서 이 '연결'을 바라볼 때 발생한다. 미생물도 우리 인간과 마찬가지로 생존이 최대 과제이며 자신의 DNA를 가능한 많이 남기는 것이 목적이다. 그렇다면 이 미생물들이 번식에 유리한 음식물을 달라고 뇌에게 조르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아이스크림이나 초콜릿을 먹고 우울감이 감소하는 걸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만약 그 당분이 장 내 어떤 미생물의 주요한 먹잇감이라면, 이 미생물들이 특정 신경전달물질을 만들어 지속적으로 우리를 우울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게 지나친 상상일까?


과학이 발전해서 좋은 점은 호기심이 해소되서가 아니다. 새로운 질문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콘클라베 (영화 특별판) - 신의 선택을 받은 자
로버트 해리스 지음, 조영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로멜리는 교황이 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니, 되고 싶어도 될 수가 없었다. 요직인 국무원장을 역임했으나 이제는 뒷방으로 밀려나 허울뿐인 추기경단 단장직을 맡은 게 전부였다. 국무원장에서 내려올 때 사직서를 제출했으나 교황은 거절했다. 아직 바티칸에는 관리자가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로멜리는 그 말이 달갑지 않았다. 대단한 평가를 바란 건 아니었다. 그래도 관리자라니. 고작 그 정도 크기였을 뿐인가. 하나님의 품 안에서 크고 작은 그릇은 없는 법이지만 그래도 사람이었다. 사람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조차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렇게 원망하지 않았던가.


주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후보는 아데예미, 트람블레이, 테데스코, 그리고 벨리니였다. 몸놀림이 신중하고 저음의 목소리가 매력이었으며 늘 품위를 챙겨 '교회의 왕자'라 불리는 아데예미에게는 아프리카의 동족들이 있었다. 그는 마음속에 우주 역사 최초의 '흑인 교황'이라는 불꽃을 지닌 남자였다.


트람블레이. 프랑스계 캐나다인. 잘생긴 외모에 날씬한 몸. 북미인 특유의 가식만 제외하면 괜찮은 남자였다. 그에겐 아시아를 비롯한 비주류의 지지가 있었다. 아! 비주류. 영원히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 이들은 늘 자신을 대신할 대표자가 필요했다. 트람블레이는 그들의 열망을 연료로 콘클라베를 달릴 준비를 마쳤다.


테데스코는 여러모로 추기경답지 않았다. 우선 돼지 같은 외모가 그랬다. 열 다섯 남매 중 막내로 자랐기 때문일까? 게걸스러운 식성은 안 그래도 떨어지는 품위를 짓이겨 밟았다. 그래도 전통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추종자가 적지 않았다. 그는 가톨릭 극우파의 수장이었다.


로멜리는 벨리니를 노골적으로 지지했다. 교황이라는 성좌보다는 신학자의 책상이 더 어울렸지만 현직 국무원장이 아닌가. 흑인 교황은 너무 급진적이었고 캐나다인 교황은 어딘가 우스꽝스러웠으며 테데스코는 꼴통이었다. 벨리니의 강점은 딱히 결격 사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정치란 무엇인가. 끌어내릴만한 손잡이를 달지 않는 것이다. 로멜리는 벨리니야 말로 진정한 교황의 자격이 있다고 믿었다. 로멜리는 자기 이름이 적힌 투표용지에 늘 벨리니의 이름을 썼다.


로멜리는 첫 투표에서 5표를 얻었다. 테데스코 22표, 아데예미 19표, 벨리니 18표, 트람블레이 16표, 기타 38표였다. 처음에 로멜리는 감개무량했다. 이중 다섯 명이나 자신에게 최고의 영예를 얻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 아닌가. 그런데 두 번째 투표에서 9표를 얻자 점점 무서운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그의 손에는 이상하리만치 운이 좋은 카드들이 계속해서 들어왔다. 앞선 주자들을 나락으로 끌어내릴만한 비밀들이.


여섯 번째 투표에서 로멜리는 40표를 얻었다. 일곱 번째에는 52표였다. 로멜리가 선두였다.


주님의 가여운 양, 바티칸의 관리자는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로의 늦여름
이와이 슌지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2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와이 슌지의 소설은 영화보다 못하다.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를 처음 봤을 때를 잊지 못한다. <러브레터>의 '오겡끼 데스까?'가 너무도 오겡끼한 덕분에 이 영화 말고는 기억하는 게 거의 없어 이와이 슌지를 말랑말랑한 멜로 영화 전문 감독으로 아는 사람이 많은데, 원래 이 남자는 빛바랜 필름 사진이 전하는 따뜻함 속에 약간의 B급 감성, 그 부조화가 마음속에 씻어도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잔상을 남기는 독보적 영화를 만드는 인간이다.


역시 모르는 사람이 많은데 이와이 슌지는 소설도 꽤 썼다. 대부분은 영화를 옮긴 것으로 기억한다. 이것도 참 특이하다. 보통은 그 반대로 하지 않나? 아무튼 <러브레터>도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도 소설로 있다. <러브레터>는 그렇다 쳐도 '그' 소설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않은가?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누워있던 나를 벌떡 일으켜, 다시는 잠들지 못하게 만들었으니까.


그런데 소설은 평범했다. 지독히도 평범했다. 이와이 슌지의 글 솜씨가 형편없는 건지 상대적으로 그의 영화가 너무 뛰어난 건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소설은 별로 오겡끼하지 않았다.


나는 <제로의 늦여름>도 그러리라는 걸 알았다. 책장을 손에 대는 순간 알았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을 들고 타임스퀘어 교보문고에서 집까지 걸어왔다. 책은 비닐포장 되어있었다. 한 문장도 읽어볼 수 없었다.


그냥 아주 친했는데, 살다 보니 이런저런 시간에 치여 한 동안 잊고 살다, 먼지 덮인 창고에서 발견한 옛날 앨범, 잠자코 앉아 몇 시간이고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등 뒤에선 이와이 슌지 특유의 태양광이 쏟아져 들어오고, 세상은 뿌옇게 흐려지다 적당한 농도에 멈춰 아스라이 눈에 남는다.


요즘 어떻게 사는지 한 두 마디 물어본 뒤, 뒤따르는 정적 속에서 가만히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는 줄곧 옛이야기뿐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와는 상관없이, 우리의 공백이 얼마나 컸는지는 상관없이, 우리가 나눈 과거는 너무나 크고 아름다웠기 때문에. 그걸로 충분하다. 무언가를 더하지 않아도 좋다. 지난 것만으로도 마음은 넘쳐난다. 꺼내고 또 꺼내도, 줄지 않는다.


아, 책 얘기는 거의 할 게 없다. <제로의 늦여름>은 화가에 대한 얘기다. 일본 사람들이 흔하게 찍어내는 미스터리 장르다. 다시 옛이야기로 돌아가자.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에는 아게하라는 여자가 나온다. 그리꼬가 나오고, 그리꼬는 노래를 잘한다. 암살자들도 등장한다. 폭력단 두목이 있는데, 나쁜 놈인데도 불구하고 무지하게 멋있다. 마지막엔 줄이 끊기듯 툭하고 끝난다. 암전과 함께, 내 마음도 툭, 떨어진다.


이 장면은 설산을 향해 수백만 번 오겡끼를 외쳐도 눈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