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블랙홀과 시간여행 (보급판) - 아인슈타인의 찬란한 유산
킵 손 지음, 박일호 옮김, 오정근 감수 / 반니 / 2019년 3월
평점 :
그래, 타임머신 얘기가 657페이지부터 나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제목이 <블랙홀과 시간여행>이니까, 그래도 중반부터는 시작될 거라 생각했다. 이 책은 707페이지가 끝이다.
앞에서 무슨 얘기를 한 걸까? 시간과 공간의 상대성이 나오고 백색왜성의 신비를 풀어내고 곡률의 잔물결을 설명한 뒤 블랙홀의 증발과 안쪽의 상황을 전해준다. 그러니까 핵연료를 소진한 별이 내폭파하여 블랙홀이 되는 과정을 이런저런 얘기에 태워 보내는 게 이 책의 임무다. 기대했던 이야기를 만나기에는 너무 먼 여행을 가야 한다. 사건의 지평선을 건너 영원히 박제된 광자처럼, 기다림은 영원에 가깝다.
저자 킵손이 대중에 알려진 건 영화 <인터스텔라> 덕분일 것이다. 모든 걸 실제로 구현하는데 미친 남자 크리스토퍼 놀란은 단순한 블록버스터 하나를 만드는 데에도 세계적인 물리학자 킵손의 감수를 받았다. 그는 놀란에게 웜홀의 비밀과 시간여행의 가능성을 얘기해 준 것 같다. 이 책을 읽고 나니 그 노력을 들인 <인터스텔라>도 사실은 다 뻥이라는 걸 깨달았다.
50페이지 밖에 없는 이야기를 짜낼 대로 짜보자. 우선은 웜홀이다. 웜홀은 우주에 난 구멍이다. 이 구멍 하나가 이 쪽 우주에, 다른 하나가 10광년 떨어진 곳에 있다면 이 구멍을 통로로 이용해 우리는 10광년의 거리를 단숨에 이동할 수 있다. 문제는 이 웜홀이 완전히 상상에 근거한 산물이라는 점이다. 세상 모든 것을 빨아들여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 그 존재를 의심할 법한 블랙홀조차 생성에 관한 한 지극히 타당한 물리 법칙을 따른다. 우리 우주의 법칙에 의하면 블랙홀의 존재는 필연적이다. 하지만 웜홀은 그렇지 않다. 우리 우주는 웜홀을 만들 이유가 없다.
그래도 킵손은 두 개의 전략을 제시한다. 하나는 중력 진공요동 속에서 웜홀을 낚아채 원하는 크기로 늘리는 양자전략이다. 중력 진공요동은 아주 작은 공간 안에 존재하는 용광로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안에서 시공간은 무한한 방식으로 존재했다가 소멸하기를 반복하는데 말 그대로 모든 게 가능하다 보니 그중 하나가 웜홀일 확률도 생각보다 낮지는 않은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공간을 구부리고 늘린 뒤 찢어 이어 붙이는 것이다. 그림으로 보면 이 말은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다. 그러나 나는 공간을 구부린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도대체 어떤 힘을 이용해 그걸 한다는 건지는 도저히 상상이 안 된다. 이 우주는 모든 공간이 하나로 연결된 풍선 같은 게 아닌가? 어디서부터 어디를 구부린다는 건가? 풍선에서 우리가 원하는 만큼의 공간을 잘라내는 게 우선일지도 모른다. 커다란 2절지를 접기보다는 색종이가 훨씬 쉬울 테니까 말이다. 구부린 공간에 존재하는 별들은 어떻게 되는지도 궁금하다. 외계인이 구부려 놓은 공간에 재수 없게 지구가 걸리면 우리 몸도 같이 구부러지는 걸까? 평소에 요가를 해뒀으니 다행이다. 나마스테! 물론 우주의 법칙은 우리 눈에 반듯해 보이는 공간도 사실은 엄청나게 휘어져 있다는 걸 증명한다. 중력이라는 게 휘어진 공간 그 자체 아닌가! 질량이 커질수록 공간은 더 많이 휜다. 공간을 구부린다고 해서 별이 접히거나 그 안에 사는 우리가 접히는 건 아니다. 그렇다 해도 공간을 구부려 이어 붙이는 걸 구현하는 기계와 힘을 상상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이런저런 문제를 극복한 뒤 어쨌든 웜홀을 만들었다 치자. 그다음은 이 웜홀을 늘려 쪼그라들지 않게 유지하는 게 관건이다. 이 역할을 하는 게 바로 이름부터 신뢰하기 힘든 '이상 물질'이다. 그래도 이상 물질은 존재할 가능성이 웜홀보다는 높은 것 같다. 이 물질은 음의(-) 평균에너지 밀도를 갖는데 그게 뭔지는 모르겠고, 아무튼 수축하는 공간을 밀어내는 역할을 한다. 미래에 고도로 발달한 문명이라면 이 에너지를 자유자재로 활용해 웜홀을 우주선이 통과할 정도의 크기로 유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토성 옆에 웜홀을 만든 <인터스텔라>의 머피 쿠퍼처럼 말이다.
자 그럼 이제 시간 여행이 남았다. 여기까지 읽어서는 도대체 이게 시간여행이랑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의아할 것이다. 공간과 공간을 연결한 통로 따위가 어떻게 시간여행을 가능케 한단 말인가? 아마 이 얘기를 다 듣고 나면 당신은 킵손이 제시한 시간여행도 우리가 원하던 형태는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우선 웜홀이 연결한 두 입구가 웜홀의 내부에서 볼 때는 서로에 대해 정지해 있고, 그래서 하나의 기준좌표계를 공유하며, 따라서 동일한 시간 흐름을 경험할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다만 외부에서 바라볼 때 두 입구는 다른 기준좌표계에 있으므로 시간의 흐름은 서로 다르다. 나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해했지만 이게 왜 그렇게 되는 건지는 알 수 없었으므로 여러분에게도 그냥 받아들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자, 이제 진짜 시간여행을 할 차례다. 당신은 30cm 길이의 웜홀로 연결된 두 개의 입구를 만들었고 하나는 당신의 집 거실에 다른 하나는 마당에 주차해 놓은 우주선의 내부에 놓아두었다. 권태기에 빠져 우울해하던 아내는 새로운 자극을 위해 우주선을 타고 광속 여행을 하기를 원했고 당신은 마음속으로는 환호를 질렀지만 굉장히 서운해하며 그 여행을 허락했다. 대신 변치 않는 마음을 증명하기 위해 여행 내내 웜홀을 통해 손을 잡고 있기로 했다.
2024년 1월 5일 오전 10시 당신의 아내는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지구를 떠났다. 6시간쯤 우주를 여행하다 그녀는 다시 방향을 바꿔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의 기준에서 여행은 총 12시간이었고, 이는 손을 잡고 있었던 당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웜홀을 통해 바라본 우주선의 창문에는 당신의 집이 보였기 때문에 당신은 손을 놓고 아내를 맞으러 마당으로 나갔다. 그런데 웬걸, 마당은 비어있다. 우주선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고성능 천체망원경으로 관측하니 당신 아내의 우주선은 아주 빠른 속도로 지구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지구의 관점에서 봤을 때 아내의 여행은 10년이 지나야 완료될 것이다(움직이는 속도에 영향을 받는 시간의 상대성을 떠올려보자).
12시간인 줄 알았는데 10년이라니. 얼마나 기쁜가!! 당신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10년을 기다렸고 마침내 아내가 돌아왔다. 우주선에 들어가 웜홀을 통해 집을 바라보니 이제 막 아내의 손을 놓고 마당으로 뛰쳐나갔으나 텅 빈 마당을 보고 어리둥절해하는 나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 당신은 웜홀을 기어들어가 10년 전의 나에게 아내의 여행은 10년 뒤에나 끝날 것이라 얘기해 준 뒤, 그의 환호를 뒤로한 채 다시 웜홀을 거쳐 나와 10년 전의 아내의 손을 잡고 2034년을 살아간다. 물론 아내에게는 선택권이 있다. 우주선 내부의 웜홀을 통해 10년 전으로 돌아가 젊은 나와 함께 살지, 아니면 혼자서만 10년의 세월을 맞은 늙은이와 함께할지. 이러나저러나 나에게 큰 손해는 없는 것 같다.
이해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확실한 건, 10년 전의 나, 지금의 나, 그리고 아내 중 그 누구도 웜홀이 처음 생겼던 2024년 1월 5일 오전 10시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상상하는 타임머신과, 이론적으로나마 가능하다고 알려진 타임머신의 가장 큰 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