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사에서 나온 한국단편문학선 2편엔 김동리의 '황토기', 황순원의 '비바리', 이호철의 '나상', 장용학의 '비인탄생', 박경리의 '불신시대' 등 저마다 시대를 아우르고 가슴을 아리는 작품들이 즐비하지만, 대학 때 읽은 이 책을 다시금 손에 들게 만든 것은 뭐니뭐니해도 정한숙의 '전황당인보기' 때문이었다. 

정한숙과 '전황당인보기'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낯설다. 안에서보다 밖에서 모든 우수함을 찾으려 했던 근대화의 폭격은 문학에도 예외 없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황당인보기'를 말하려는 이 순간 소설의 줄거리에 대한 소개를 먼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하인 강명진과 석운 이경수는 오래전 가깝게 지내던 친구였다. 특히 석운이 자신의 능력을 펼치지 못하고 힘들어 하던 시절 수하인 강명진은 그의 벗이자 지필묵, 문방사우의 우아한 취미를 함께 논하던 품격 높은 스승이었다. 그러던 석운이 정부의 고위 관료로 임명되자 수하인은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수하인은 석운에게 기념이 될만한 정표를 선물하고 싶었다. 그러던 중 시장바닥에서 우연히 전황석을 발견한다. 전황석이란 같은 무게면 금 값의 10배가 한다는 귀하디 귀한 돌이다. 그는 달라는 대로 값을 치르곤 설레는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이런 석재를 거저나 다름 없는 가격에 구했다는 것 보다는 친구 석운에게 비로소 어울리는 선물을 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 줄곧 수하인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뛰어난 인장 예술인이었던 수하인은 그 돌로 석운의 도장을 만들어 주기로 결심했고 혼신을 다해 작업을 시작한다. 드디어 전황석 인장 한방이 완성되자 수하인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자신의 작품중 실로 최고였던 것이다. 인장 한방을 곱게 싸들고 나서는 수하인의 가슴에 새로운 싹이 돋아오는 것 같았다.

석운은 때마침 출타 중이었다. 그런데 석운의 부인은 수하인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석운이 벼슬을 한 뒤로 여기저기 부탁을 하러 온 사람들이 잦은 탓도 있었지만 특히 수하인은 궁핍함을 면치 못하는 초라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석운의 처가 보기에 수하인이란 그저 아쉬운 부탁을 하러 온 사람 이상의 위인이 아니었다. 그러니 돌아서는 수하인이, 가슴 속에서 곱게 싼 선물을 내밀었을때 그녀의 마음속에 적잖이 미안한 마음이 들은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미안한 마음은 이내 싹 가셨다. 선물이라고 펼쳐보니 쓰잘데 없는 돌조각이요 가지런히 찍어 놓은 붉은 도장은 무슨 부적인 듯 불길한 느낌마저 들게 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석운에게조차 그 선물은 눈에 들지 않았다.  

시장의 도장방 주인이 전황석 인장 한방을 수하인의 눈 앞에 내놓았을 때 수하인의 가슴은 와르르 무너졌다. 이유인즉 전황석의 가치를 알바 없는 석운이 그것의 처분을 친구 오준에게 맡긴 것이오 역시나 그 가치를 알지 못하는 오준이 도장방 주인에게 고작 상아 도장 하나를 받고 팔아 넘긴 것이다.  

그날 밤 서울에는 눈이 내렸다. 뻥 뚫린 수하인의 가슴 위로 사박사박 차가운 눈이 쌓였다.

이튿 날 수하인은 눈길을 뚫고 참지 한 권을 사와 자신의 작업실 앞에 펼쳐 놓았다. 그리고는 참지를 접어 한 권의 책을 맨 뒤 하나 하나 자신이 만들어온 인장을 찍어 나갔다. 물론 전황석 한방도 맨 나중에다 찍어 놓았다. '그와 더불어 살아온 인보(印譜)를 보는 순간, 그는 처음 자기가 살아온 보람을 느꼈다.' 수하인은 황모필 가는 붓으로 '전황당인보기'라 표지를 쓴 뒤 책을 덮었다.

전황당인보기의 문장 하나하나는 사박사박 내려 쌓이는 눈 같은 서정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세속적인 어떠한 것도 침범할 수 없는 순백의 고결함이요 동시에 이 작품이 뿜어내는 고고한 향취이기도 하다.  

전황석 인장 한방이 저자거리의 도장방 주인의 손에 들려 왔을 때 수하인은 마음은 어땠을까? 이 가슴 아린 비극 앞에서 수하인은 더 이상 칼을 들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시대를 숨가쁘게 살아가는 바쁜 현대인들의 앞에서 우리를 풍요롭게 만들었던 가치들은 언제나 아스라히 사라져 간다. 우정, 믿음, 대가를 바라지 않는 선행. 이런것들을 소리 높여 논하는 사람들을 철 없는 낭만주의자라 부르며 비웃은 것이 언제부터였던가. 

수하인 강명진은 효율과 속도가 판을 치는 이 사회에 쓸데 없는 멋을 지닌 고루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 쓸데 없는 멋 때문에 수하인은 품격 높은 예술인이요, 사랑넘치는 친구요 그리고 진정한 '인간'일 수 있었다.  

깊어가는 이 밤 수하인이 도장을 새기듯 '전황당인보기'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곱씹고 있는 이유는 그것을 즐기거나 그것에서 배울게 있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오늘 밤 그저 인간이 되고 싶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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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던학생 2011-09-05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문학 수행으로 이번에 읽게된 책인데. 도무지 무슨 내용인가 했어요. 이 글 읽고 나니 이해가 되네요.리뷰 잘 읽고갑니다^^

한깨짱 2011-09-06 22:09   좋아요 0 | URL
줄거리를 띄엄띄엄 써놔서 읽기 힘드셨을텐데 이해가 잘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

지나가던학생2 2013-02-12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소설 조사중이었는데 우연히 좋은글보고 많이 배우고 갑니다^^ 큰 도움이 되네요 감사합니다^^

한깨짱 2013-02-13 17:19   좋아요 0 | URL
학생분들에게 무슨 숙제가 나온 모양이군요.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움이 되셨다니 더 감사하네요.
 

'김성모'는 우리나라 만화계에서 유래를 찾아 보기 힘든 독특한 작가다. 우선 작품수가 무척 많다. 엄청 많다. 놀랄 정도로 많다. 

김성모는 한 달에 적어도 5권 이상의 단행본을(서로 다른 만화) 찍어 내면서 동시에 스포츠 일간지에 만화를 연재한다. 그에게 창작의 고통이란 다른 우주의 언어처럼 보인다. 나는 그의 작업 방식에 틀림없이 비밀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다음과 같이 분석했었다.

우선 문하생 중 하나가 원고에 배경을 그려 넣는다. 배경은 다양하지 않기 때문에 미리 복사해둔 건물 그림이나 자연 풍광을 붙여 뚝딱 만들어 낸다. 그럼 인터넷 서핑을 하며 새로운 만화 소재를 찾던 김성모가 천천히 일어나 그의 도장들을 꺼낸다.   

 

<현란한 배경>

이 도장에는 캐릭터의 표정이 새겨져 있다. 김성모 만화의 주인공은 모두 '강건마'라는 이름으로 생김새가 똑같고 표현해내는 감정은 손에 꼽을 정도로 압축된다. 대략 10-15개 정도의 도장만 있으면 자신이 연재하는 모든 만화 캐릭터들의 표정을 소화해낼 수 있다.   

 

 

<다양한 표정>

자 이제 김성모가 만화에서 보여주듯 현란한 손놀림을 보이며 도장을 찍기 시작한다. 도장이 찍힌 원고를 받아든 다른 문하생은 자와 펜을 들고 몇개의 직선을 그어 캐릭터의 몸체를 완성한다. 마치 컨베이어 벨트에서 자동차가 생산되듯 김성모의 작업실에서는 밤새 만화가 생산된다.

어느 사회든 공산품은 수공예품보다 많은 돈을 벌어들인다. 물론 예전같지야 않겠지만 몇년 전만해도 전국적으로 2만여개의 만화 대여소가 성업 중이었다. 이 시절 수백 권이 넘는 만화를 전국에 보급하면서 김성모는 미국 금괴 보관소 '포트 낙스'를 능가하는 부를 축적했을 것이다. 그를 만화가보다 뛰어난 비지니스맨으로 평가하는 이유다.

하지만 이런 만화도 대중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왔다는 것은 참 희한한 일이다. 특히 '럭키 짱' 원, 투, 쓰리, 포는 학기말 자습 시간에 요긴하게 소비되던 주요 컨텐츠였다.

'럭키 짱'은 무협 만화의 무공, 비기 등을 학원물에 이식한 만화로 여기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저마다 한가지 씩의 필살기를 지니고 있었다. 문제는 필살기가 시전될 때 김성모가 동작 모두를 한 페이지씩 구성했다는 것인데 이런 연출의 원조인 '붉은 매'가 '한국 무협 만화의 계보' 1편에서 밝힌대로 갑론을박의 논쟁 거리를 제공했다면 '럭키 짱'의 경우 지면 낭비라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는 데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40계단 108콤보'같은 필살기를 시전하고 나면 만화의 반 이상이 대사 없는 그림으로 채워졌다. 필살기를 온 몸으로 맞아준 주인공은 '너의 공격 패턴을 알아냈다. 그것은 강 약 약 강 강 강 약 강 중 약이다.'라는 선문답 같은 대사를 하고 난 뒤 정확히 그 다음 권의 반을 자신의 필살기로 수 놓았다. 한달 단행본 5권의 신화는 이렇게 탄생하는 것이다.  

<드디어 콤보 시작> 

학원물 하면 또 조운학의 '니나 잘해'가 떠오른다. '니나 잘해'는 학원 주먹계를 정파와 사파로 나누고 그들끼리 연맹을 구성하는 등 무협 만화에서나 볼 수 있는 정통성 대결, 정치, 음모 등의 요소를 적극적으로 껴안았다.  

그래서 캐릭터들은 각각의 '류파'를 형성하며 개성있는 싸움을 벌였고 마치 강호를 연상케 하는 패싸움, 1:1 대결, 납치, 암살(실제 죽이는건 아님) 등이 판을 치는 다소 황당한 학원계를 만들어 냈다.  

 

<니나 잘해의 장보고와 반토막>

물론 말도 안된다. 이런 일들은 학생 수준에서 벌일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설정이야 말로 '니나 잘해'를 만화 답게 만든다. 동시대의 만화 '짱'이 보다 현실적인 폭력을 그리는데 비중을 뒀지만 오히려 '니나 잘해'에 비해 흥미가 덜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무협이 현대로 배경을 옮긴 만화는 이 밖에도 '무림수사대'같은 웹툰을 꼽을 수 있다. 웹툰에 대해선 아마 나중에 따로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자 이제 무슨 만화가 남았을까? 나는 지금까지 여덟 편의 만화를 소개했지만 사실 우리 손을 거친 만화는 이것 말고도 수없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무협 만화와는 궤를 좀 달리했지만 '팔용신전설', '나우', '천랑열전'의 박성우가 생각나기도 하고 학원 폭력물의 원조라 볼 수 있는 이명진의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것 같은 저녁'이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대다수의 만화들은 이제는 제목조차 기억나지 않는 작품들이다.

언젠가 어머니가 흉하게 각진 구형 '그랜저'를 보시면서 '그랜져가 못나진건지 내 눈이 각박해진건지 모르겠다'는 말씀을 하셨드랬다. 하지만 내가 서글퍼지는 이유는 예전에 그렇게 재밌게 보던 만화책이 더 이상 재미가 없어졌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앞으로 기억할 만화에 한국 무협, 아니 한국 만화 조차 없을 것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한국의 옛 만화를 추억하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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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한국 무협 만화의 계보는 열혈강호의 독보적 행진과 용비불패의 등장으로 이어진다.

열혈강호는 설명이 필요없는 만화다. 1994년 부터 지금까지 무려 50권이 넘는 단행본을 발행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이 만화가 아직도 연재 중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꾸준한 인기를 누린 만화는 근 십년, 아니 한국 만화계를 통털어 봐도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다.  

 

<돈은 참 많이 벌었을 만화 열혈강호>  

열혈강호의 성공 요인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특히 므흣한 여자 캐릭터들이 제공하는 은밀한 성적 판타지는 당시 소년에서 청소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있는 남아들에게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것은 열혈강호가 지금에 와서 그렇게 특별한 작품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기도 한다. 열혈강호가 재미 없어진 이유는 작품의 수준이 떨어졌다기 보다는 그것을 보는 내가 너무 나이가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은 강한자가 살아 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 남는 자가 강한 것이라 했다. 오늘날 열혈강호가 온갖 비난을 받더라도 세월이라는 무심한 고수에 대항해 오랫동안 버텨온 생명력 만큼은 인정해 줘야 할 것이다.

문정후의 '용비불패'는 웰메이드란 무엇인지 보여주는 교과서적인 작품이다. 이 만화는 그림, 스토리, 캐릭터 어디 하나 빠지는게 없다. 특히 결코 가볍지 않은 이야기를 풀어 나가기 위해 사용하는 적절한 유머는 이 작품을 좋은 작품에서 위대한 작품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결정적 요소가 된다.  

 

<용비는 결코 지지 않는다>

용비불패는 열혈강호가 이미 자리를 잡은 1998년에 혜성같이 등장해 23권의 단행본을 남기고 유유히 사라졌다. 앞으로 10년 안에 용비불패와 견줄만한 만화를 만날 수 있을지 나는 모르겠다. 자신들의 영상 미학을 능가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자신들 밖에 없다는 '매트릭스' 시리즈의 워쇼스키 남매의 말처럼 용비불패를 능가할 만화는 다시금 문정후의 손에서 만들어지지 않을까? 그러니 제발 괴협전이나 용비불패 외전좀 연재해 달라고!

한국 무협 만화의 전통은 용비불패 이후로 사실상 끊겼다고 봐도 무리가 없다. 특히 개방과 소림사가 등장하고 강호를 유유히 방랑하는 주인공이 나오는 정통 무협은 이제 정말 황성, 사마달류의 만화가 아닌 이상 찾아 보기 힘든 소재가 되버렸다.  

대신 판타지와 SF와 결합된 '칼 싸움'이 무협 만화를 대체하기 시작했고 그 정점은 윤인환, 양경일의 '신 암행어사'가 아니었나 싶다. 물론 양경일은 오래전 소마신화전기라는 잊지 못할 만화를 통해 이미 판타지 칼 싸움을 보여준 바 있다. 그 밖에도 '천추'라던가 '단구'라는 강신술사 칼잡이들이 나오는 만화가 있었다. 이 만화들은 역사와 판타지가 적절히 혼합되 꽤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지만 아무래도 '무협'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실 '무협'이란 칼, 강호, 문파 삼요소로 이뤄져 있는 황당무개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뿌리에는 힘과 권력에의 의지를 본능적으로 추구하는 남성들의 판타지가 깔려 있다. 그러다 보니 비록 배경은 달라도 무협의 '구조'를 따르는 이야기는 강호와 칼 없이도 충분히 만들어질 수 있다.  

강호라는 무대가 도시의 뒷골목으로 대체되면 조직폭력배 만화가 등장하고 이것이 학교로 바뀌면 학원 폭력물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무대에서 절대무적의 독보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있다. 이 사람을 만화가라고 봐야 하는지에 대해선 아직도 이견이 있지만 적어도 한국 만화계에서 이 만큼 성공한 사람도 드물다. 혹자는 그의 이름을 프로 또는 화백으로 알고 있지만 그는 엄연히 이름 석자를 가진 유명 만화가다. 나는 그의 이름을 '김성모'로 기억하고 있다.  

이야기는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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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보학이란 연구자의 끈질긴 탐구 정신과 방대한 자료 조사를 양분으로 자라나는 괴물이다. 따라서 자료 조사의 방편으로 구글 검색 엔진만 사용하는 내가 계보학이란 이름으로 글을 쓸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니 오늘의 계보학은 전적으로 나의 기억에서 재구성된 것이다. 이는 어떠한 증거도 증명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한국 무협 만화라고 하면 일단 두 부류가 떠오른다. 그 중 하나는 하승남(꼴통 시리즈), 황성(작품이 너무 많다), 사마달(이 사람도 많다)로 대변되는 성인 무협 만화가들이다. 요즘에도 만화방이 성행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 만화방은 시험 후 즐길 수 있는 주요 컨텐츠 중 하나였다. 그 때 만화방에 가면 한 쪽에 이런 성인 무협물이 가득했는데 권수로 보면 그 외 모든 만화들을 합쳐야만 비교가 될 정도였고 경제력을 갖춘 아저씨들이 많이 본 탓에 수익면에서도 단연 으뜸이었다.   

젊은 세대라면(나를 포함하여) 이 사람들을 전혀 모를 수도 있으나 이 작가들의 인기는 30-40대 사이에서 압도적이다. 메가패스존 무료 만화방이나 30-40대 커뮤니티를 가보라 이 작가들에 대한 그들의 광신이 어느 정도 인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 역시 이런 만화에는 별 관심이 없다. 내가 즐겨보고 열광한 만화는 역시 아이큐 점프, 챔프, 영챔프 등으로 대변되는 청소년 만화 잡지의 대표작들이었다.

가깝게는 소주완, 지상월의 '협객 붉은매'가 생각난다. 물론 이 만화의 호불호는 극명하게 갈린다. 불과 몇 초에 불과한 고수들의 동작을 0.1초 혹은 0.01초 단위로 끊어 컷을 구성하는 것이 이 만화의 특징이었는데 쓸데 없이 지면을 낭비한다는 의견과 극적 효과가 두드러진다는 의견이 맹렬히 충돌하곤 했다.  

사실 1부만 따지고 보면 이야기와 작화의 완성도는 당시 어떤 무협 만화도 따를 수 없는 존재감이 있었다. 그러나, 동백꽃단의 간부 12명을 해치워야 형을 구할 수 있는 주인공 정천이 서열 11위에 불과한 대대붕과의 싸움에 너무 많은 시간을 쏟아 부은게 문제였다.  

이 한명의 적을 죽이기 위해 붉은매 1부는 거의 30권 정도를 할애했고 그 후 스토리 진행에 한계를 느낀 작가가 오랜 휴재에 들어감으로써 만화는 일단락 되었다. 몇년 뒤 붉은매 2부로 돌아왔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다음은 비주류로 분류할 수 있는 권가야의 '해와 달'이다. 점프인지 챔프인지 어쨌든 '해와 달'이 처음 등장했을 때 소년인 나는 정말 충격이었다. 이렇게 난해하고 지저분한 만화가 소년 잡지에 나올 수 있는 걸까? 줄거리 또한 범상치 않았다. 최강의 내공을 보유했다는 어머니와 최강의 검술을 창시했다는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정신병자같은 아들이 딱 칼 한 자루를 허리에 차고 거대 문파들에 대항하는 이야기.

주인공 백일홍은 강력한 무공을 지녔으나 마음 속에 혼돈과 불안 그리고 알 수 없는 슬픔을 간직한 채 방황하는 고독한 남자였다. 무협 세계의 인물이란 정파 혹은 사파의 편에 서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마련인데 백일홍은 그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았다. 철저히 고립된 개인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 일홍의 답은 죽음(부재)이었다. 거대 문파를 향해 겨누고 있던 일홍의 칼 끝은 실상 그 자신을 향해 있었던 셈이다.  

존재와 관계에 대해 이렇듯 모던한 주제의식을 드러낸 만화는 그 후 십 수년이 지난 오늘날에 와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었다. '해와 달'은 만화가 아니라 철학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권가야는 주인공 백일홍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고자 했던게 아닐까? 만화 안의 주인공도 그리고 그 만화를 그리는 작가 자신도 철저히 주류 밖의 세계로 내몰았던 권가야. 어쨌든 당시로선 흔히 볼 수 없는 그림체와 이야기,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과묵한 주인공이 인상적인 이 만화는 고작 5권으로 마무리 되고 만다. 듣자하니 인기가 최하위를 달려 근근이 연재를 했다는 소문. 그래도 차기작 '남자 이야기'로 그럭저럭 이름을 얻게 됐으니 권가야로선 참 다행이었다.

이야기는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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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규 2011-08-22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한국무협만화의 계보란 제목을 붙이려면 해방후 부터 거론해야 마땅한거지..처음을 툭자르고나서 최근 것만 나열한다면
이게 무어란말인가? 차라리 제목을 90~2000년대 만화 계보로 하던지.. 무협만화는 김찬씨를 빼고는 논하지 말라..

한깨짱 2011-08-22 19:43   좋아요 0 | URL
네 제가 연륜이 모자라다 보니 최근 것을 위주로 할 수 밖에 없었네요. 한국무협만화의 계보란 제목으로 한 수 가르쳐 주시면 보고 잘 배우겠습니다.
 
베리타스 Veritas 10 - 완결
윤준식 외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이 만화가 처음 나왔을 때 나는 두 가지를 생각했다. 첫째는 '간만에 볼만한 무협 만화가 나왔구나'라는 것이었고 둘째는 Oh! Great(오구레 이토)씨의 일본만화 '천상천하의 카피 버전이네'라는 것이었다.  

확실히 이 만화는 '천상천하'에 빚진 것이 많아 보인다. 우선 둘다 학원물이라는 점. 게다가 갈등의 주체가 {(학생회vs비학생회) vs (어른들로 구성된 외부세계)}라는 점 등 세세히 따지고 들면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하지만 '베리타스'가 이 작가의 데뷔작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만화는 꽤 훌륭했다. 특히 그림이 좋았고 '천상천하'처럼 웬지 재는 듯한 무거운 분위기가 없어서 참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이게 겨우 열 권에서 끝이란다. 아무래도 10권이 늦는다 싶어서 조마조마했는데 역시나였다. 한 달에 2페이지라도 계속 연재해 주면 안될까? 나가노 마모루의 파이브 스타 스토리도 5년에 한권 씩 나오는데. 원래 대작이란 독자의 간절한 기다림을 도도히 외면하며 유유히 살아가는거 아닌가.

아직 10권을 보지는 못했지만 안 봐도 뻔하다. 9권의 내용으로 볼 때 한 권으로는 도저히 이야기를 마무리 지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10권이 한 1,000페이지 쯤 되면 어느 정도 수습은 가능하겠지만
보아하니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설마 '협객 붉은매'처럼 2부를 염두에 둔건 아닐테지. (다행히 300 쪽이 넘는 분량이기는 하다)

이 만화의 강점은 한국 전통 문화를 재구성하는 독특한 해석이었다. 예를 들면 남사당 패의 꼭두쇠, 곰뱅이쇠 등이 가진 버나, 살판 등의 기술이 사실은 무술에서 시작한 것으로 백성들이 무기를
소지하거나 무술을 익히는 것을 금했던 지배층의 억압을 피해 교묘히 '놀이'로 탈바꿈 했다는 식이다. 그래서 접신을 시도하여 액땜을 막거나 길흉화복을 점치는 살풀이는 '강신술사'로 남사당 패의 후예는 각자의 기예에 맞는 전통 무예로 되살아 난다.

물론 주류 무공은 이런 전통 무예 보다는 여주인공 '베라'를 중심으로 한 '리 유니온'계 무공이다.  

   

<베라>

'리 유니온'이란 인공 '기(氣)'를 합성하는데 성공한 거대 기업의 무술 연구소다. 이 연구소가 설립한 학교에는 세계 각지에서 뽑혀온 무술 인재들이 다니고 있는데 여기서 무술 인재란 무술을 익힐 재능을 갖춘 자와 이미 전통 무예를 전수 받은 전승자까지 포함된다.  

'일인전승 비인부전'의 금기를 수 천년 동안 지켜왔지만 인공 기라는 달콤한 유혹에 빠진 전통 무예 전승자들은 무공의 비전을 리 유니온에 공개한다. 그리고 이렇게 수집된 전통 무예는 리 유니온의 손에서 혼합되고 보완되어 '리 유니온계'라는 다양한 무공을 탄생시킨다. 물론 이 무공은 리 유니온 학교를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배울 수 있다.

얼핏 봐도 전통 무예 전승자와 리 유니온계 학생들 사이의 갈등이 예상되지 않는가? 예상대로 이 만화의 축은 전통과 현대의 대결이자 지식의 독점과 공개의 대립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만화의 특성상 이런 쟁점이 진지하게 다뤄지지는 않는다.  

이야기 속에서 읽어 낼 수 있는 것이야 다양하겠지만 역시 손에 땀을 쥐고 가슴을 뛰게 만드는 건 주인공 마강룡과 아이들이 '베라'의 학생회와 격돌하는 장면이다. 특히 '신암행어사', '아일랜드'의 양경일, '니나 잘해'의 조운학의 문하생을 포함하여 도합 7년을 수련했다는 김동훈의 작화는 여기서 빛을 발한다.  

 

<마강룡> 

삼국지, 수호지를 읽으며 등장인물을 줄줄이 외우고 장비가 무슨 무기를 썼는지 노지심이 어떤 무공을 사용했는지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베리타스'는 현대판 삼국지이자 수호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개성있는 캐릭터를 즐기는 사람에게 다양한 인물과 기술의 등장은 심장을 쿵쾅거리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베리타스와 삼국지와 수호지는 그런 면에서 쌍둥이다.

만약 작가에게 건강과 시간 그리고 여유가 좀 더 주어졌더라면 '베리타스'는 한국 무협 만화의 고전이 됐을 수도 있다. 겨우 10권으로 마무리된 이 만화에 깊은 애착과 아쉬움이 남는 이유가 이것이다.  

나는 이제 무슨 만화를 기다리며 살아야 하는걸까. 이제 우리 나라의 무협 만화라면 이미 백만년 전에 성장을 멈춰버린 열혈강호 말고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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