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 인터넷이 우리의 뇌 구조를 바꾸고 있다
니콜라스 카 지음, 최지향 옮김 / 청림출판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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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생각하지 않고 살아온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이겠냐만은 그렇다고 너무 당연시 여기며 살아가기엔 시큼시큼한 썩은 내가 나는 것 같아 견딜 수 없다. 그런데 생각이 없다는게 도대체 뭐야? 거기엔 두 가지 상태가 존재한다. 

첫째, 무념(無念)


하지만 이런 건 오히려 장려해야 할 상태 아닐까? 무념이란 깊은 명상이나 오랜 시간 도를 구해온 사람이나 얻을 수 있는 극강의 정신적 체험이니까, 오히려 이런 경지에 오른 사람을 칭찬해 줘야지. 


둘째, 산만(散漫)


생각이 없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생각이 너무 많아서일 수도 있다. 어떤 생각도 의식에 깊은 흔적을 남기지 못하고 휙휙 지나가 버리는 상태. 문제는 바로 이거다. 쏟아지는 정보에 흠뻑 젖어 더 이상 사색도, 깊은 사고도 할 수 없는 사람들. 우리는 그저 화려하게 빛나는 네온사인 속에서 살아가는 거야. 불이 꺼지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아.







'산만함'하면 떠오르는 철학자는 기술복제시대의 예언가 발터 벤야민이다. 그가 태어난 시절은 신문이 눈을 뜬지 이미 반 세기가 지났을 때였고 한창 젊은 시절이 되자 영화와 라디오가 출격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이른바 매스미디어의 시대였던 것이다.


사람들은 매스미디어가 쏟아내는 정보에 속수무책이었다. 그것들은 벌처럼 날아와 바람처럼 사라졌다. 벤야민은 기술 진보의 거인이 한 발을 내딛고 나면 어떠한 방법을 쓰더라도 그 방향을 바꿀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수 많은 영상과 텍스트에 적응하는 방법은 '산만함'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현대인의 지각 특성은 산만함이 될 것이다'


벤야민은 예언자가 됐다.


재밌는건 과학의 속도가 철학을 따라잡지 못했다는 것이다. 1960년대 말 까지만 해도 인간의 뇌는 고착화 이후 절대로 변하지 않는 다는 것이 과학계의 정설이었다. 하지만 머제니치를 비롯해 수 많은 신경과학자들이 연구를 거듭한 결과 뇌는 가소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성인의 뇌는 단순히 변하는 정도가 아니라 매우 잘 변한다. 또는 머제니치가 말했듯이 대대적으로 변한다.'(p. 50)


흔히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인생이 바뀐다는 말을 하지 않나. 여기에 하나 덧 붙이자면, 세상은 결국 개별 인생이 맺는 상호작용의 결과이므로 생각이 바뀌면 세계가 바뀐다. 이것은 기술의 변화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어째서 그토록 광범위한지, 왜 기술에의해 세계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거듭나는지를 알려주는 좋은 힌트가 된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건 기술 그 자체 뿐만이 아니라 기술에 의해 변화된 사고다. 기술은 사고를 변화시키고 변화된 사고가 또 다시 기술의 진보를 촉진하는 순환 구조. 상전벽해, 환골탈태는 두 변화의 상호작용을 통해 극대화 된다. 







그리고 인터넷 시대가 왔다. 하이퍼 텍스트는 현대인의 산만함에서 힌트를 얻은 코드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만큼 우리의 지각 특성을 그대로 닮아있다. 인터넷에서 우리는 정보와 정보 사이를 널뛰기 하며 빠르게 이동한다. 중요 기사를 읽는 중에도 우측의 실시간 검색 순위에 눈이 가고 다 읽기도 전에 관련 기사로 넘어가며 수 없이 깜빡대며 유인하는 배너 광고를 클릭하고 만다. 이제 하이퍼 텍스트는 단순히 텍스트만의 연결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음악, 비디오같은 멀티 미디어를 직접 품거나 링크를 제공하고 링크로 이동한 순간 수 없이 많은 관련 미디어들이 물샐틈 없는 포위를 마친다.


인간이 정보를 지식으로 변환하는 과정을 알게 되면 이 산만함이 지식 형성에 얼마나 악영향을 끼치는 지 알 수 있다. 뇌의 기억 구조는 크게 작업 기억과 장기 기억으로 나뉜다. 작업 기억은 실시간으로 입수되는 정보를 잠시 저장해 두는 역할을 하는데 이 정보는 긴 사색을 통해 점차 장기 기억으로 옮겨진다. 이 과정에서 우리 뇌는 새 정보를 기존에 갖고 있던 정보들과 통합하면서 이른바 '스키마'라고 부르는 거대한 배경 지식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눈치챘겠지만 작업 기억의 용량은 매우 작다. 정보가 한 방울 한 방울 똑똑 떨어질 땐 그것을 음미해 장기 기억으로 옮길 시간이 충분히 주어지지만 콸콸콸 쏟아지는 정보 앞에선 아주 짧은 시간만이 주어질 뿐이다. 우리가 그렇게 많은 정보를 보고 살면서도 결코 똑똑해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현대의 예능 프로는 우리의 산만함이 어디까지 왔는지 알려주는 좋은 지표가 된다. 요즘 예능은 수 십대의 카메라가 출연자를 끊임없이 쫓아다닌다. 이렇게 생산된 막대한 컷들은 전광석화처럼 뿌려진다. 후다다닥 지나는 컷들 위로 쉴새없이 자막이 흐르고 효과음과 애니메이션이 추가된다. 이 산만한 시청자를 잡아 두기 위해선 그들의 작업 기억에 들어있는 이미지를 끊임없이 갈아줘야 한다. 


벤야민은 우리가 산만함을 배움으로써 정보의 홍수에 적응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여기서 적응이라는 말은 더 나은 시대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희망을 내포한다. 현대인이 산만함을 배우게 될 것이라는 그의 예언은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그러나 그 적응이 희망을 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을까? 더 천천히 읽고 더 깊이 생각하던 그 시절로 말이다.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생각은 행동을 지배한다.


어쩌면 이런 말이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산만함은 세계를 지배했다. 그렇다면 산만함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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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oddony 2014-12-28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사색의 시간이 필요하네요. 모든 연결을 끊고 저만의 동굴에 틀어박힐 시간...

한깨짱 2014-12-30 13:37   좋아요 0 | URL
면벽수련이 필수 교육 과정에 포함됐으면 좋겠어요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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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대단한 책은 난생 처음 읽어 본다. 김영사는 '지식인 마을' 시리즈 이후 최고의 걸작을 만들어 낸 게 분명하다.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센델. 극동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선 교과서에 나오는 철학자가 아닌 이상 이름을 얻기 쉽지 않지만 이 남자는 단 한 권의 책으로 소크라테스와 맞먹는 명성을 거머쥐었다. 철학이 빈약한 이 나라에선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인기를 끌기 시작한건 EBS 방송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하버드대 20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로 꼽히는 마이클 센델의 정치 철학 강의는 비가 오면 건물이 통째로 잠기기도 하는 열악한 방송국의 전파를 타고 한국에 퍼지기 시작했다.


나도 그 전파에 노출된 적이 있다. 샌델의 강의는 끊임없는 질의 응답으로 진행되는데, 질문을 받은 학생들은 하버드생 답게 자신의 주장을 똑똑히 전달하지만 이어지는 샌델의 질문에 결국 딜레마 상황에 빠지게 된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법! 게다가 그는 언제나 명확하고 구체적인 예시로 우리를 몰아 세운다. 우리가 그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하는건 교수의 권위나 지식의 무게에 짓눌려서가 아니다. 'To be, or not to be' 딜레마는 구조의 문제고 마이클 샌델은 그 구조를 완벽하게 설계한다. 







삶은 수 많은 행위가 축적되어 톱니바퀴처럼 굴러가는 것인다. 그리고 행위란 나름의 가치와 기준을 근거로 행해진다. 쉽게 말해 개가 똥을 먹는데도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말이다. 자기 기준을 통하지 않는 것은 숨쉬기나 고통 인지같은 반사적 행동이거나 행위자가 심각한 싸이코패스일 때나 존재 가능하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바로 이 대목에서 그 필요성이 입증된다. 

모든 행위엔 이유가 있지만 이유가 있다고 해서 모두 옳은 것은 아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라고 따져 물을 수도 있다. 옳고 그르고 복잡하게 따지지 말고 저마다 생긴대로 꼴리는대로 살면 될거 아니냐고. 만약 인간이 살 수 있는 땅을 전 세계 인구로 나눠 똑같이 배급하고 주변에 높다란 울타리를 쳐 서로 상호작용할 기회를 원천적으로 봉쇄한다면 이렇게 살아도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너와 내가 함께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받아 들인다면, 우리는 반드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내려야 한다.







마이클 샌델은 우리 사회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한 세 가지 이론적 근거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첫째, 공리주의. 벤담과 밀로 대변되는 이 사상은 철학이 굶어 죽기 직전인 한국에서도 높은 인기를 갖고 있는 사상이다. 이유는 그 핵심이 너무 명쾌하다는 건데, 오직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명제 하나로 모든것이 설명될 정도다. 


예를들어 우리 동네에 화장터가 들어선다고 가정해 보자. 공리주의 원칙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화장터를 건립해야 하느냐 마느냐하는 문제를 간단한 공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 


if (주변 동네 사람들의 행복 지수 > 우리 동네 주민들의 불행 지수) = 화장터 건립 

else 화장터 건립 취소


너무나 명쾌하고 깔끔하다. 우리는 논쟁이 격렬할 수록 공리주의의 유혹에 빠져드는데, 그건 골치 아프게 따질 필요없이, 언성 높일 필요 없이 그저 다수의 행복이 무엇인가만 따지면 모든 것이 완벽하게 해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단순 명쾌함이 바로 공리주의 최대 약점이다. 뭔가가 극도로 단순하다면 작지만 소중한, 혹은 결코 훼손되서는 안되는 까다로운 가치들이 배제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심을 품어봐야 한다. 


공리주의 원칙을 신봉하는 당신이 쿨하게 화장터 건립을 찬성했더라도 그 원칙을 철저하게 지키고 싶다면 당신은 다음 사례가 지극히 도덕적이라는 사실에 동의해야만 한다. 


당신이 살고있는 마을에 어느 날 신이 내려와 모든 사람이 영원히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아무런 죄를 짓지 않은 순수한 아이를 고른다.

2. 이 아이를 지하실에 가둔 뒤 평생 동안 고문을 한다. 

3. 신은 이 아이가 고문을 받는 동안에는 모든 마을 사람들의 행복을 보장한다. 


한 아이가 평생동안 받을 고통의 합은 결코 마을 주민 전체 행복의 합보다 크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공리주의자라면 이런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않을 것이다. 




재건에 드는 비용보다 이라크 침략을 통해 얻는 이익이 더 크다면 

9.11 테러는 결과적으로 정의로운 일이 될 수 있다.



둘째, 자유! 자유! 자유! 이 논리 또한 우리에게 친숙하다. 우린 이 핵심을 초등학교 바른생활을 통해 배운 바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자유 추구는 언제나 선하다'는 주장이다. 

그렇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내 자유는 언제나 선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내 자유를 침해해선 안된다. 근대 사회를 거쳐오면서 자유가 인간의 천부적 권리로 인정되온 탓에 이 주장은 별다른 반박의 여지가 없어보인다. 하지만 여기에도 몇 가지 반박이 존재한다. 


합의된 식인 행위는 과연 옳은 일인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한 내가 내 몸을 어떻게 사용하든 남들이 상관할 바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내 몸을 고기로 제공할 용의가 있고 옆집 사내가 그것을 얌얌 맛있게 먹어줬다면, 자유지상주의자인 우리는 과연 옆집 사내를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식인 행위는 주변 사람들의 혐오감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에 자유 추구의 제1 원칙에 위배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도 모르게 식인 행위를 저지른건 도덕적이고 다른 사람이 알게된 식인 행위는 비도덕적이란 말인가? 이 같은 주장은 이 논쟁의 본질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것이 진정한 자유인가라는 의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1785년, 이 의심에 답을 내려주기 위해 임마누엘 칸트가 등장한다.







칸트가 생각한 자유는 확실히 까다롭고 어려운 면이 있지만 대충 '정언명령'으로 요약할 수 있다. '정언'이라는 말은 조건이 없으며 절대적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정언명령은 "그 자체로 절대적이며 다른 어떤 동기도 포함하지 않은 명령"이다. 칸트는 우리가 진정한 자유를 추구하려면 정언명령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정언명령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명령하는가? 그것은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라'고 명령한다. 인간은 도구가 아니며 그 자체로 절대적인 목적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과 도구의 근본적 차이이며 인간이 존엄한 이유이기도 하다. 


앞의 예로 돌아가보자. 나와 옆집 사내가 식인 행위에 동의한 것은 맞지만 그건 자유로운 행동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존재를 고기로 제공함으로써 나를 수단으로 전락시켰기 때문이다.


물론 칸트의 주장에도 반박은 존재한다. 게다가 마이클 샌델은 자유만으로는 정의를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유지상주의는 개개인에게 도덕 지침을 제공하는데는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할 수 있지만 좋은 삶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무력하다. 우리가 왜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하는가, 왜 소수민족우대정책을 실시해야 하는가? 왜 독거 노인을 돌봐야 하는가? 가난한 사람을 돕든 말든 소수민족을 우대하든 말든 독거 노인을 돕든 말든, 그것은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라는 자유의 원칙에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다.




중립, 중립, 중립



마이클 샌델은 정의를 가르는 마지막 기준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제시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의란 사람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는 것이다. (263p)


하지만 누가 마땅히 받을 자격을 갖추고 있는가? 여기 최신형 스마트폰이 있다고 하자. 이 스마트폰을 가질 자격이 있는 사람은 누굴까? 전화나 SMS만을 이용하는 사람에게 이 스마트폰을 주자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 그 이유는 우리가 스마트폰의 목적을 그것이 가진 다양한 기능을 파악하고 충분히 활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받아 마땅한 사람이란 그 재화의 목적을 충분히 발휘해낼 수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우리는 재화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그 목적을 가장 잘 발휘할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 분배하면 된다. 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 합의된 식인 행위는 정의로운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나라는 존재의 목적은 내가 가진 고유한 능력과 미덕을 개발해 사회의 공동선에 이바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유한 능력과 미덕을 개발하지 않고 공동선에 이바지하기위해 노력도 하지 않는다면 나는 나라는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서 살아갈 자격이 없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은 사회가 임의적으로 만든 가치를 대의로 포장해 개인을 억압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결함이 있어 보인다. 예를들어 앞에서 언급한 '나라는 존재의 목적'은 과연 누가 정한 것이란 말인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운 나라에선 매일 아침을 국민교육헌장 낭독으로 시작해 국기에 대한 맹세로 일과를 마감해야 할 판이다. 이런 생각은 군부독재 시대의 한국에서나 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은 매우 명확하다는 강점이 있다. 그의 정의론은 가치 판단이라는 애매한 비난을 피해 점잖은 척 중립의 뒤에 서는 비겁함을 보이지 않는다. 여기 동성혼 논쟁이 벌어졌다고 가정해 보자. 공리주의자들은 그것에 찬성했을 때와 반대했을 때의 이득을 따지기 위해 되지도 않는 계산기를 두드릴 것이고, 자유주의자들은 동성혼은 옳은 일도 그른 일도 아니니 오로지 개인의 선택에 맡겨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따라 결혼의 목적을 '출산'으로 정의한다면 동성혼에 반대할 강력한 근거를 얻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정의론이 위대한 점은 그것이 어떤 미묘한 사안을 맞이해서도 언제나 명쾌한 시비를 가릴 수 있다는 것이다.



옛날 사람이라고 만만히 봐선 안된다.

라파엘로의 프레스코화 <아테네 학당>에 등장하는 아리스토텔레스.



이 책이 위대한 점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과 닮아있다. 샌델은 여타 지식인들이 그렇듯이 정의에 대한 여러 의견을 구구절절 풀어 놓은 뒤 '자 이제 판단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알아서 정의로운 삶을 살도록 노력해 보세요.'라며 도망치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중립을 지키는 일이 교양있고 유식한 사람들이 지켜야 할 마땅한 의무라는 환상에 빠져 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치가 난립하고 혼란에 빠져 있는 시대에 고상한 척 중립을 지키겠다는 것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마이클 샌델은 책의 후반부에서 자신이 지향하는 정의론을 매우 강한 어조로 두둔하며 그것을 현실 세계에서 펼쳐나가기위한 구체적인 정치 담론까지 제시하고 있다. 


정의로운 사회는 단순히 공리를 극대화하거나 선택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만으로는 만들 수 없다. 공정한 사회를 달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좋은 삶의 의미를 함께 고민하고, 으레 생기게 마련인 이견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문화를 가꾸어야 한다. (p.361)


그는 우리 시대의 어딘가에 분명 커다란 구멍이 나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 옛날, 마을 사람들이 모두 친구였고 공동체의 가치에 대해 토론하던 시절을 그리워하는게 분명하다. 이런걸 보면 그는 영락없이 흘러가버린 세월을 한탄하는 노인네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노파심이 나에겐 귀찮게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저층 주공아파트 78동 203호에 살았을때, 78동 사람들은 101호에 살든 510호에 살든 상관없이 나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나는 그들 모두에게 인사를 하며 지냈다. 그들은 일 주일에 한 번 반상회를 열어 사는 얘기를 공유했고 당면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다함께 고민했다. 1층 엄마들은 주차장에서 뛰어 노는 모든 아이들을 돌봤고 우리는 다함께 한 집에 몰려 들어가 AFKN에서 하는 프로레슬링 경기를 봤다. 그 동네에서 일어나는 가장 험악한 일은 한창 타다 낡아 버린 자전거를 누군가 훔쳐가는 것 정도였다. 


그 시절이 아름다울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 모두가 '좋은 사회'란 무엇인지에 대해 거의 동일한 이상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견은 생길 수 있었지만 그건 충분히 해결될 수 있는 문제였다. 불과 20년 만에, 세상이 너무 많이 변해 버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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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책 - 행복할 경우 읽지 말 것!
아르튀르 드레퓌스 지음, 이효숙 옮김 / 시공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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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고등학교 졸업 시험 문제를 요약하면 대충 다음과 같다. 


1장 인간(Human) 
Q1-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행복이 가능한가? 
Q2-꿈은 필요한가? 

...


2장 인문학(Humanities) 
Q1-우리가 하고 있는 말에는 우리 자신이 의식하고있는 것만이 담기는가? 
Q2-철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


3장 예술(Arts) 
Q1-예술 작품은 반드시 아름다운가? 
Q2-예술없이 아름다움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가? 

...


4장 과학(Sciences) 
Q1-생물학적 지식은 일체의 유기체를 기계로만 여기기를 요구하는가? 
Q2-우리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만을 진리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


5장 정치와 권리(Politics&Rights) 
Q1-권리를 수호한다는 것과 이익을 옹호한다는 것은 같은 뜻인가? 
Q2-자유는 주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싸워서 획득해야 하는 것인가?

...


6장 윤리(Ethics) 
Q1-도덕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반드시 자신의 욕망과 싸운다는 것을 뜻하는가? 
Q2-우리는 좋다고 하는 것만을 바라는가?

...


물론 모든 고등학생들이 다 훌륭한 답안을 내는건 아니겠지. 그건 불가능해. 하지만 이것 만큼은 확실하다. 대한민국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 건, 단지 좋은 대학을 갈 수 있는 면허증을 땄다는 의미야. 하지만 프랑스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 건, 그 사람이 이미 철학자가 됐다는 얘기야. 


'행복을 만들어 주는 책'. 이 책을 지은 사람은 아르튀르 드레퓌스. 20대라고 한다.





사실 이런 책을 읽고 그 순간, 바로, 금방, 번쩍하고 행복을 찾는다면 세상에 걱정할 게 뭐 있겠냐고 코웃음 치는 사람이 많겠지만은, 행복이 지극히 소소한 경험에서 온다는걸 아는 사람도, 파랑새는 저 멀리 첩첩 산중이 아니라 내 집 앞 마당에 앉아 있다는걸 아는 사람도, 그래, 이 모든걸 아는 사람도 실제론 행복하지 않잖아. 그러니까 좀 너그럽게 봐주자는게 내 생각.


이 책은 150페이지 밖에 안된다. 그마저도 대부분이 그림에 여백, 총 글자수를 긁어 모아 빽빽하게 페이지를 채운다면 30페이지나 될까? 어이없을 정도로 단순하다. 하지만 그 대담함에 허를 찔리고 말지.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을 하려고 하니까. 그런데 그 침묵 속에서 갑작스럽게 '뜩'하고 튀어나오는 것들이 있다. 거칠게 요동치던 파도들이 고요 속으로 침몰해 가는 느낌. 불교의 선종에서는 이걸 돈오점수라고 부르던가?


행복? 미간을 잔뜩 찌뿌리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해석에 허색을 덧붙이며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침묵은 메시지고 여백은 의미라는 사실을 깨달아봐.

저자의 말대로 굳이 행복한 사람이라면 이 책을 볼 필요는 없어. 하지만 공원에 나가, 어렵지 않은 책 한권을 읽으며, 나른한 봄 햇살에 스믈스믈 세상 속으로 녹아드는 나를 발견하는 것도 좋아 보인다. 한 시간이면 다 읽을 수 있어. 한권 봤다고 생색내기에도 참 좋은 책이야.


아르튀르 드레퓌스의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책'은 이 리뷰처럼 두서없이 진행된다. 의식의 흐름에 따라 기술하는 소설처럼, 잡담과 의미없어 보이는 글들이 릴레이를 이루지. 


나도 이런 책을 쓸 수 있을까?


무리야 무리. 나는 대한민국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남자라고.


p.s - 이렇게 쉽게 써보긴 처음이다. 나 지금 행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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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절대로 답할 수 없는 몇 가지 - 악의 시대, 도덕을 말하다
샘 해리스 지음, 강명신 옮김 / 시공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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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사실과 가치가있다. 사실은 객관적, 과학적 검증을 통해 참, 거짓을 명확히 내릴 수 있는 것이고 가치는 상황, 문화, 주관에 따라 옳고 그름이 변할 수 있는 것. 예컨대 '태양은 항성이다'라는 진술은 사실 판단, '태양은 아름답다'라는건 가치 판단인 것이지. 바쁜 시간에 왜 이런 싱거운 정의를 내리고 있느냐고? 나도 동의해. 하지만 어쩌겠어 앞으로 소개할 이 책이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는 그 사실, 가치 판단의 주관성이 완전한 헛소리라고 주장하는 것을! 그러니까 사실과 가치에 대한 우리의 지난 믿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필요가 있었던거지.







가치 판단의 주관성이 헛소리라는 주장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이렇다. 미국인들이 청국장을 먹는 한국인을 시체를 먹는 좀비라고 매도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산업 문명의 시민들이 아마존의 원시 부족을 야만적이라고 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굳이 초딩 시절의 도덕 교육을 상기시키지 않더라도 현대인 대다수는 문화적 상대성을 인정하는 것이 교양인의 덕목이라 믿는다. 저자 샘 해리스는 문화적 상대성을 존중하는 것이 현대인의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완전 헛소리. 참과 거짓의 칼날이 사실을 정확히 자를 수 있듯이 가치 또한 '보편적 옳고 그름'으로 완벽하게 판단할 수 있다는 주장. 다시말해 청국장을 먹는 한국인의 음식 문화가 비도덕적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이런 무시무시한 주장을 할 수 있을까? 개소리는 집어쳐!라고 말하기 전에 그 근거를 한 번 들어보는 관용을 베풀어 보자. 


저자가 봤을 때 도덕과 비도덕을 가르는 기준은 행복이다. 어떤 현상이 전체 인류의 행복을 증진시키는데 기여하는가? 기여한다면 그것은 도덕적! 그러나 백번 양보해 이 주장이 맞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하나의 문제가 남는다. 과연 행복과 불행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가? 이 난공불락의 질문을 돌파하기 위해 저자가 선택한 방법은 통계적 추론도 - 대다수의 사람들은 보통 이러이러한 것에 행복을 느끼더라 - 서구 문명 사회를 기준으로 한 독단적 판단도 아니다.


인간은 왜 행복을 느낄까? 우선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는 행복을 불러일으키는 외부적 사건이 있어야 한다. 우리 뇌는 이 외부 사건을 인지적으로 처리한 뒤 그 결과로 행복 또는 불행의 불을 켜는데, 그렇다면 행복과 불행은 결국 뇌의 상태인 것이고, 이 말은 우리가 현재 뇌의 상태를 관찰할 수만 있다면 인간이 어디에서 행복과 불행을 느끼는지 알 수 있다는 얘기다. 물론 현대의 뇌 과학이 이것을 명확하게 관찰할 수 있을 만큼 발전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시간의 문제지 논리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정리해보자. 


첫째 도덕은 결국 인간의 행복에 대한 문제다.

둘째 행복은 뇌의 현재 상태에 다름아니며 뇌 과학의 발전에 힘입어 우리는 뇌의 상태를 정확하게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셋째 이 말은 결국 어떤 가치가 선하고 악한지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가치 판단의 선악을 정확히 구분할 수 있다면, 매 선거때마다 누구를 찍어야 할지 걱정할 필요도 없고 어떤 정책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인류 전체의 행복 증진을 위해 보수가 옳은가 진보가 옳은가? 이것은 더 이상 토론의 주제가 아니다. 그것은 과학으로 참 거짓을 밝힐 수 있는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 샘 해리스의 멋진 신세계!


논리적 타당성을 떠나 저자의 주장은 우생학, 유대인 학살, 히틀러 같은 이미지를 떠올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전체주의적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라면 한국인은 청국장이라는 식문화를 만들어냄으로써 인류 전체의 행복을 저해한 비도덕적 국민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영리하게도, 샘 해리스는 이런 애매한 사례 대신 '여자에게 베일을 강요하는 중동 문화' 내지 '여자의 음부를 꼬매는 아프리카의 관습' 등을 예로 들어 가치 판단의 선악 구분이 명확히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가 이런 주장을 하는 이유는 그가 네오 나치스트거나 뇌과학 성애자기 때문은 아니다. 그는 선악을 확실히 구분함으로써 인류 전체에 불행을 가져다 주는 명백한 비도덕적 행위를 이 세상에서 몰아내고자 한다. 모든것이 뜻대로 이뤄졌을때 뇌과학은 저자가 주장하는대로 '악의 치료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악을 치료한다는 개념은 정말 참신하고 멋진 생각이다. 이것저것 다 떠나 샘 해리스가 가진 이 순수한 열정만큼은 존중해 주고 싶다. 하지만 뇌과학이 우리가 원하는 모든걸 가감없이 완벽하게 드러내 준다 하더라도 이 세상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게 내 생각이다. 왜 그럴까? 만약 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비도덕이라는게 증명됐다면 과연 미국이 아프간, 이라크 전쟁을 벌이지 않았을까? 샘 해리스의 뇌과학이 할 수 있는 일은 최신형 폭격기를 이끌고 민간 지역을 공습하는 미국을 향해 '당신의 부도덕함은 과학적으로 증명되었습니다!'라고 외치는 것 뿐이다. 


나는 뇌과학의 불합리함이 아닌 바로 이 무능력함을 토대로 샘 해리스를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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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부터의 도피 - 진정한 의미의 자유와 일련의 사회현상을 심층 분석 고전으로 미래를 읽는다 5
에리히 프롬 지음, 원창화 옮김 / 홍신문화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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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먼 옛날 기사들이 용 사냥을 다니고 영주들이 초야권 따위 얼토당토 않는 권리를 주장하던 중세에는 인간의 머리 속에 '개인'이란 개념이 없었다. 워낙 개념이 없는 세상이다보니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필리핀의 원시 부족 '아이타'를 보면 특정 개념없이 산다는게 무슨 말인지 정확히 알게 된다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수렵과 채집으로 먹고사는 이 부족은 '내일'이라는 개념을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뭐? 어쨌냐고? 이들에겐 '내일'이 없기 때문에 내일에 대한 불안과 걱정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개인'이라는 개념이 없다는건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중세에는 개인이 없었다. 따라서 어떤 직업을 구할지 무엇을 공부할지 어떻게 성공할지 어디로 이사갈지 누구와 경쟁할지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 


흔히 중세를 암흑기로 부른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퍽 행복해 보이지 않는가? 무슨 걱정을 할 필요가 있을까? 비록 배는 곯겠지만 그저 주어진 곳에서 주어진 삶을 살면 될뿐이다. 복잡한 의사결정을 할 일도 정신을 피폐하게할 경쟁도 없다. 걱정과 고민이 없는 전원 라이프! 이것이야말로 모든 현대인들이 꿈꾸던 유토피아 아니던가!?


강제된 억압 속에서 노예로 살아가는건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다면, 해라. 자유는 근대 사회의 최고 가치이며 그 누구도 뺏을 수 없다고 주장하고 싶다면, 해라. 하지만 우리가 이 자유의 세상에 오롯이 선 하나의 주체이며, 진정한 자유인이라고 주장하는건 삼가해주기 바란다. 싫다고? 그렇다면 묻겠다. 


우리는 그토록 자유를 갈망하면서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사회 시스템안에 종속되길 원하는가? 우리는 왜 남들이 바라는 학교에 들어가지 못해 안달하고 선망하는 회사에 취직하지 못해 불안해 하는가. 우리가 봉건시대의 노예가 아니라는 안도를 만끽하는 동안 사실은 교수의, 사장님의, 언론의 노예가 됐다는 사실을, 정녕 모르겠는가?





사실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불안과 동의어다. 사람들은 선택할게 너무 많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선택하지 못한다. 우리는 위대한 자유인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스스로 선택해야하는 불안 위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것은 굉장한 아이러니다. 근대 역사는 사실상 대중이 특정 소수로부터 자유를 쟁취해 온 투쟁의 역사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목숨을 걸고 지킨 그 자유가 오히려 고독과 불안을 증대시키고 있다니,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싸운걸까? 자유가 독이 든 성배였을 수도 있고, 우리가 그저 돼지에 불과했던 걸지도 모른다. 


다행인건 우리가 이 대답을 얻기 위해 인류 역사에 걸친 자유의 의미 발달 과정을 처음부터 연구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뉴턴이 말했던가? 자신은 그저 거인의 어깨 위에 앉아 있었을 뿐이라고. 1941년, 유태계 독일인이었던 심리학자 한명이 우리의 질문에 대답하기위한 명저 한 권을 내놓는다. 그의 이름은 에리히 프롬, 등장하는 저서는 '자유로부터의 도피'.




무한한 자유가 부여한 압도적 무력감 앞에서 현대인이 취한 반응은 '자유의 반납'이었다. 불안을 선사하는 자유로부터 탈출해 삶에 의미와 질서를 부여해준다고 선전하는 절대 권력에 복종하는 것. 이것이 말로 현대인이 최고로 여기는 '안정된 삶'의 실체다. 여기서 우리는 고대 노예와 현대 노예의 섬뜩한 차이를 알게 되는데, 그것은 복종이 과거의 노예에겐 강제된 억압인반면 현대의 노예(현대인)에겐 매우 자발적이라는 사실이다. 만약 당신의 친구가 목에 걸고 있는 진주 목걸이를 벗어 자신을 가둘 족쇄와 바꾸려 한다고 하자.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이 아주 좋은 거래이므로 그대로 두고 볼 것인가? 아니면 정신차리라고 따귀를 한대 때려줄 것인가?


1940년대의 독일은 이미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진주 목걸이를 족쇄와 바꾼 상태였다. 히틀러는 많은 사람들의 오해와는 달리 아주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대다수의 독일 국민의 지지를 받아 선출됐다. 독일 국민은 군부 독재에 시달리는 아프리카나 북한의 주민과는 달리 아주 자율적이었으며 합리적이었다. 그들은 단지 가난한 독일, 무능력한 독일을 한 방에 개혁해줄 강력한 지배자를 원했을 뿐이다. 삶의 확실성만 부여해줄 수 있다면 어떠한 이데올로기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자세, 그것이 바로 나치즘과 파시즘이 만개한 심리적 배경이었다. 





내가 경탄하는건 이미 1941년 이같은 심리적 메커니즘이 완벽히 분석됐다는 것이고 내가 슬픈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사회가 여전히 자유로부터 도피중이라는 사실이다. 누군가는 그 땐 단지 유럽인들이 약간 맛이 갔었던 것 뿐이라고, 이제는 히틀러 같은 사람은 안나올 거라고, 그리고 우리나라도 아닌 유럽의 현대사를 뭐 그리 진지하게 거론하느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지난 두 번의 대통령 선거를 통해 우리가 얼마나 1940년대의 독일인을 닮아 있는지, 우리가 얼마나 간절히 자유를 팔고 싶어하는지 알수 있었다.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군부 독재로부터 자유를 쟁취해온 투쟁의 역사다. 그것은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파리 시민만큼, 노예 제도 폐지를 위해 싸운 미국의 흑인들만큼 치열하고, 또 숭고했다. 그들이 그랬듯 우리도 고귀한 자유를 얻었다. 부상은 급격한 경제 성장이었다. 


초고도 성장을 축하하는 샴페인을 흥청망청 터뜨리는 사이 국가는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고 급기야 곳간이 바닥을 드러냈다. 1997년,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가. 그때 생긴 대량 실업은 10년이 지나서 비정규직과 취업난이라는 고용 불안으로 이어졌고 더딘 임금 임상과 치솟는 부동산 가격은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극심한 불안을 일으켰다. 불안이 커지는 만큼 우리의 소망도 커져갔다. 이 답답한 현실을 한 방에 뒤집어줄 영웅을 기다리는 것. 


독일인들은 히틀러는 선택했고 우리는 '잘 살아 보세'를 노래부르던 시절을 택했다. 우리가 지난 5년과 앞으로의 5년을 책임질 대통령으로 선출한 인물은 권위주의적 통치와 무력을 앞세운 한 독재자의 이미지를 차용하거나(지난 5년), 직접적으로 계승한(앞으로 5년) 사람이었다. 


기가찬것도 정도껏 해야 한숨이 나오는 법이다. 





현대인에게 자유의 의미는 무엇인가? 프롬의 통찰력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려주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나는 이 모든 것들이 무지로 인해 발생한 것이며 그러므로 무지가 사라질 때 비로소 우리가 원하는 세상이 온다고 믿고 싶다. 하지만 때때로 회의가 든다. 우리는 정말로 몰라서 이렇게 사는걸까?


깊은 회의와 무력감은 개인을 자유로부터 도피하게 만드는데, 결국 이 나의 회의와 무력감이 나의 자유를 나의 적에게 파는 날을 오게 만들 것인지, 과연 나는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 그 인내의 보상은 있는지 없는지, 어쨌거나, 


잘살아 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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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란 2013-04-15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하지만, 슬픈건 알면서도 그 중력을 벗어 날 수 없는 인생이라는 것... 해결책이 있을 까요?

한깨짱 2013-04-16 12:50   좋아요 0 | URL
사는건 원체 이래 고단한 것 같습니다. 아직 젊어서 이걸 몇 십년을 더 해야한다는 생각을 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