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공중부양 - 이외수가 처음으로 공개하는 실전적 문장비법
이외수 지음 / 해냄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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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변의 누군가가 글을 팔아 밥을 벌고 싶다는 미래를 말한다면, 나는 그러지 말라고 할 것이다. 

책은 더 이상 팔리지 않는다. 읽히지도 않는다. 선진 대한민국의 대다수 국민들이 평생에 걸쳐 교과서 이외의 책을 읽게 될 때는 시험을 보거나 주식을 사거나 처세를 생각할 때다. 간혹 마음이 상처를 입었을 때도 본다. 선물로 받은 책을 들고 30페이지 가량 읽고 난 뒤 베개 맡에 놔두고 10년을 삭힌다. 이게 바로 오늘날 책의 일생이다. 프랑스의 소설가 모파상은 '여자의 일생'이란 책에서 평생 동안 고난을 당하는 한 여자의 비참한 일생을 그렸다. 한국의 블로거인 나는 '책의 일생'이란 책을 써서 평생 동안 고난을 당하는 책 한 권의 비참한 일생을 그려보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 쓰기에 대한 열망은 뜨겁다. 글쓰기 능력을 성공과 연관 시키는 짜릿한 처세 광고의 힘일 것이다. 처세의 글 쓰기는 내가 바라는 영혼의 글쓰기와는 너무나도 다른 대륙 위에 서 있다. 두 대륙 사이에는 거대한 바다가 있다. 하지만 글을 쓰는 모든 사람들이여 눈을 크게 뜨고 우리가 딛고 있는 땅을 보라. 이 땅은 대륙이 아니다. 우리의 글은 바다를 건너 저어 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감동도 전달해 주지 못한다. 우리는 외딴 섬에 갇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쓰는가? 아직도 반짝 반짝 빛나고 있는 영혼의 글 쓰기, 그 묵직한 열망의 사슬이 우리를 이 고독한 섬 위에 잡아 두기 때문이다.





이외수는 소설가다. 그는 IT에 밝고 트렌디하다. 트위터를 한다. 그런데 나는 이 사람의 소설을 한 권도 읽어 보지 못했다. 그는 소설가지만 에세이로 돈을 벌기 때문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바로 이 때문에 이외수는 현존하는 소설가 중 젊은 사람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소설가가 되었다. 


이외수의 글은 확실히 놀랍다. 방황했던 젊은 시절의 상처와 아웃사이더로 살아온 수십 년의 경험이 색다른 해석과 치유의 문장을 만들어 낸다. 특히 사물과 현상을 재해석해 써내는 촌철의 문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더 이상 긴 글을 읽지 못하는 현대인들에게 촌철의 힘은 오늘날 이 땅에서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들이 가져야 할 첫 번째 능력이다. 촌철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이외수의 수 많은 베스트셀러 에세이가 증명해 내고 있다. 

이런 그가 '실전적 문방비법'을 표방한 글쓰기 강의 책을 썼다. 나는 처음에 이 문장 뒤로 '전혀 놀랍지 않은 일이다'라는 문장을 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그의 글에선 언제나 돈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라는 문장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필모그래피를 보고선 이 책이 나온 시점이 그가 에세이 작가로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기 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 앞의 두 문장은 취소다. 이 책은 소설가이자 촌철의 에세이 작가인 이외수가 이 땅에서 작가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진심어린 충고라고 봐야 한다.





나는 이 책의 위대함이 첫번째 장 '단어의 장'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 장에서 이외수는 그야말로 '실전적 문방비법'이 무엇인지 명확하고 구체적인 강의를 해준다. 이 장은 주로 단어의 본성을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실전 예제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특히 단어를 '생어'와 '사어'로 나눠 그 차이를 설명한 부분에선, 감탄했다. 원래 혼자 독학을 하는 사람들은 절대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내가 그렇다. 꽤 오랫동안 글 쓰기를 해왔지만 단어에 이런 차이가 있는 줄은 처음 알았다. 내가 사어를 많이 쓴다는 것도 알았고 때문에 글이 필요 이상으로 질리는 이유도 알았다. 다음 문장을 한 번 보자.

그놈은 흉기로 자주 자해를 하는 습관이 있다.

이것이 바로 사어로 된 문장이고 내가 쓰는 글이다.

그놈은 뻑하면 회칼로 자기 배를 그어대는 습관이 있다.

이것이 바로 생어로 된 문장이다.

이어서 이외수는 생어 채집을 권한다. 이렇게 수십년 동안 모아 놓은 생어 채집 노트가 좋은 글의 자양분이 될 것은 확실하다.

다음은 단어의 속성을 탐구해 보는 시간이다. 이 부분을 곱씹다 보면 이외수 글 쓰기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단어의 속성을 파헤쳐 그 본성에 근거한 쓰임이 어떻게 사물과 현상의 이면을 드러내는지... 오래된 단어들 속에서 이전에는 전혀 깨닫지 못했던 의미들이 방울방울 피어 오르는 광경을 목격하는 것은 글 쓰기를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느껴보는 충격이었다. 

'글쓰기의 공중부양'이 좋은 점은 책 속의 강의가 일종의 연습 문제로 둔갑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생어 10개를 제시 하시오', '새벽녘이라는 단어의 속성을 오감에 근거해 서술 하시오'라는 연습 문제를 매일같이 푼다고 생각해 보자. 생각만 해도 글 쓰기 실력이 쑥쑥 자랄 것 같지 않은가? 나는 위대한 소설가가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이 '재능'이 아니라 '습관'이라고 믿는다. 이 책은 이 믿음을 증거한다.

1장 '단어의 장' 말고도 다른 장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책의 위대함은 이 첫 장으로도 충분하다. 해서 정말로 시간이 부족한 사람이라면 책의 87페이지 까지만 읽어도 좋다. 그렇게 바쁜 사람이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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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는 언제 치나요?
다니엘 호프 외 지음, 김진아 옮김 / 문학세계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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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라는건 그렇다. 언제 봐도 부담이 없고 또 재밌다. 마치 남의 일상을 몰래 엿보는 것 같은 아슬아슬함도 준다. 그런데 에세이가 더욱 빛을 발하는 순간은 그것이 인문 교양서의 탈을 쓸 때다. 무미건조하고 전혀 흥미롭지 않은 전문 지식을 생생하고 활기 넘치는 문체로 전달해 주기 때문에, 우리는 아주 쉽게 그 무거운 문을 쉽게 열 수 있다.






'박수는 언제 치나요?'는 클래식 입문서를 표방한 에세이다. 저자 다니엘 호프는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자신이 겪었던 음악 활동을 책 전체에 걸쳐 친절하고 자세하게 설명해 준다. 그 중에는 뉴욕의 택시 기사를 만나 클래식 콘서트의 편견을 깨주게 된 일화 부터 유명 음악가들의 뒷 이야기, 시기별 음악 사조의 특징과 그 연주법까지 다양한 무게의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이 중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역시 음악가들의 뒷담화였는데, 사실 뒷담화라고 하기엔 좀 그렇고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또 어떻게 행동했는지에 대한 알려지지 않은 일화라고 하는게 옳을 것이다.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이렇다. 

클래식 음악가 하면 떠오르는 사람, 위대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그 자신도 작곡가였는데, 하루는 그 위대한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곡은 짧고 가볍고 대중적으로 써라. 아무리 둔감한 사람의 귀도 간지럽게 할 수 있어야 한다.'(p.55)

너무너무 재미있는 얘기 아닌가? 오늘날 우리가 그 이름만 듣고도  머리를 쥐고 세차게 흔들 만큼 고루하고 지겨운 클래식 음악을 창조한 모차르트는 '곡은 짧고 대중적으로 쓰라'는 아버지의 말을 가슴 깊이 새기며 음악 활동에 매진했다. 아마도 모차르트 부자가 현대에 태어났다면 그 아버지는 모차르트에게 아이돌 가수가 되라고 당부했을 것이다. 이런걸 보면 클래식하고 고귀한 예술들도 한 때는 모두 저급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그 시대의 대중은 현대의 대중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들은 일을 할 필요가 없고 성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전속 음악가를 고용해 파티와 음악회를 수시로 열던 부자들이었으니까. 게다가 그들은 음악을 깊이 이해할 만큼 교양도 있었고. 하지만 이 일화로 미루어 보아 그 시대의 모든 대중들이 음악을 이해하고 있었던건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확실한 건 하나다. 음악은 그 당시나 지금이나 '오락 거리'였다는 것. 모차르트와 후원 귀족의 관계는 정확히 소속 가수와 소속사의 관계로 대치될 수 있다. 아마도 그 당시의 클래식 음악가들이 오늘날 우리가 부여하는 권위과 지위를 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본의 아니게 모차르트를 폄하한 것 같은데, 사실 모차르트는 엄청난 반항아였으며 단순히 고용된 음악가가 아니라 예술가로서의 강한 에고를 지닌 진정한 아티스트였다고 한다. 그 당시의 유명 작곡가들의 에고가 어느 정도 였는지, 이번엔 베토벤의 일화를 소개해 보겠다.






베토벤은 그 초상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엄청나게 완고한 사람이었다. 그는 오로지 청중과 자기 자신에게만 책임을 지는 예술가의 길을 가려 했다. CD도 YouTube도 없던 그 시대에 음악은 오로지 귀족들이 여는 음악회를 통해서만 유통될 수 있었다. 한 마디로 귀족의 후원 없이는 어떠한 음악 활동도 불가능했다는 것. 베토벤은 이런 상황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는 예술적 자존심으로 충만한 사람이었다. 하루는 그를 후원하는 영주 리히노프스키가 자신을 업수이 여긴다고 느꼈는지 베토벤이 이렇게 말했다.

'영주님, 당신이 영주인 것은 우연과 출생의 덕이지만 나는 나 스스로의 힘으로 이 자리에 왔소. 세상에 영주는 수천이 넘지만 베토벤은 단 하나뿐이오!'(p.60)

음악가나 화가가 오늘날 우리가 얘기하는 '아티스트'가 된 것은 근대의 일이다. 절대왕정이 붕괴하고 부르주아 사회가 도래하면서 귀족의 후원을 잃게 된 '직업인'들이 저마다 살 길을 찾게 되면서 누구는 '진짜 대중'에게 팔리는 예술을 하고 누구는 고고하고 배고픈 예술가의 길을 가게 되면서 저급 문화와 고급 문화(예술)의 영역이 분리된 것인데, 사실 이 얘기는 이전에 발터벤야민과 아도르노의 책을 통해 말했거나 앞으로 다른 책을 통해 말할 기회가 많으므로 이쯤에서 마무리 하겠다.

자, 이제 다시 에세이라는 장르로 돌아가자. 에세이는 이처럼 재미있는 '일화'로 가득하다. 따뜻한 온돌방에 앉아 군고구마를 까먹으며 할아버지의 옛날 얘기를 듣듯, 에세이에는 소소하고 유쾌한 진리가 반짝 반짝 빛나고 있다. 

에세이라는 장르는 어쩌면 요즘 시대에 가장 어울리는 문학 장르인지도 모르겠다. 무언가를 길게 읽을 시간도, 펑키한 뭔가를 찾을 시간도 없는 사람들에게 이 보다 손쉽게 자극과 교양을 취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소설가들이 에세이 작가로 전향하는지도 모르고.

'박수는 언제 치나요?' 한 권을 읽고 클래식에 통달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입문서란 원래 강물까지 말을 끌고 가는 것이 전부다. 이 후에 그 거대한 강물을 다 들이키든 그 속에서 헤엄일 치든 그건 전적으로 우리의 의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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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루덴스 - 놀이하는 인간
요한 하위징아 지음,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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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지칭하는 호모 어쩌구 하는 단어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아무래도 '호모 사피엔스'일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 생각하는 사람. 사실 이렇게 인간을 정의하려는 노력은 인간이 자연계의 다른 것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고유성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인간이 일반 생물과 다른 점은 과연 무엇인가? 도구를 사용할 줄 안다는 건가? 직립보행을 한다는 건가? 아니면 예술을 할 줄 안다는 건가? 수 많은 궁리 끝에 도달한 답은 결국 '생각할 줄 안다'는 것이었다. 이 이성에 대한 강력한 믿음 덕분에 우리 인간은 비로소 육체적 동물성의 한계를 벗어나 이 세상의 특이종으로서 군림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1938년, 네덜란드 출신의 역사학자 요한 하위징아가 인간의 본성을 새롭게 정의하려는 시도를 한다. 이름하여 호모 루덴스. 놀이하는 인간이란 것이다.

 



역사학자 하위징아는 자신의 주장을 논증하기 위해 당연하게도 역사적 방법을 취한다. 인간이 언어를 발견하고, 문명을 일으키고, 집단을 형성하고, 법과 체계를 세워 국가를 만들고, 심지어 전쟁을 일삼고 기타 등등 오늘날 이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행동들이본질적으로 놀이에 다름 아니었으며 바로 놀이로서 발전해 왔다는 것, 하위징아는 이 모든 것들에 하나하나 구체적 예시를 들어가면서 자신의 독특한 주장해 펼쳐 나간다. 


그렇다면 놀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문화를 놀이로 설명하기 위해 우선 놀이를 정의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하위징아는 이 책의 전반부에서 놀이의 보편적 특징을 언급한다. 그것은 아마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놀이는 자발적 행위이다. 놀이에 의무나 강제적 명령이 부여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놀이가 아니다. 놀이는 무언가를 '위해'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놀이의 필요라는 것은 그 놀이를 즐기고자 하는 욕망에 정비례하며'(42p) 이것은 놀이가 그 자체로서 목적이될 수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둘째, 놀이는 '일상적인' 혹은 '실제' 생활에서 벗어난 행위다. 놀이는 일상 생활을 잠시 접어두고 놀이가 만들어낸 고유의 세계로 들어가 자기에게 부여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왜 어느 순간 현실 세계를 잊고 그 안에 완전히 몰입하는지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잘 설명해주는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셋째, 놀이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다. 놀이는 일단 시작되면 어느 순간 종료되야 한다. 하지만 이 시간적 제약으로 인해 놀이는 후손에게 물려져 전통이 되며 따라서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특성을 갖는다. 한편 놀이는 일상 생활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독립된 공간을 필요로 할 수 밖에 없다. 오늘날 스포츠 경기장, 무대, 도박장 등의 장소가 생활 세계와는 구분되는 독특한 형태로 발전되어 온 것은 아마도 일상 세계와 놀이터를 엄격하게 구분지음으로써 더 강력한 몰입 효과를 얻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넷째, 모든 놀이에는 규칙이 있다. 규칙은 놀이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규칙이 없는 놀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놀이에 참여한 어떤 사람이라도 그 규칙을 어기는 순간 놀이는 중단된다. 예를 들어 얼음땡의 술래가 된 사람이 '얼음'을 외친 플레이어를 잡고 끝까지 술래가 되길 종용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참가자 모두가 합의한 규칙을 누군가가 어기는 순간 몰입은 중단되며 참가자들은 놀이의 세계로부터 강제로 꺼내져 현실 세계에 내동댕이 쳐지는 것이다.




얼핏 보면 이렇게 정의된 놀이를 어떻게 스포츠, 문학, 심지어 법과 정치에까지 연관지을 수 있는 의아할 것이다. 이 글에서 그 사례를 모두 언급할 수는 없으니 가장 관계가 없어 보이는 법률의 경우를 따져 보자.

소송은 확실히 놀이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소송 당사자들은 법원이라는 독립된 공간에서 할당된 시간 내에 논박을 주고 받는다. 원래는 평범한 회사원이거나 가게의 주인이었던 사람들이 이 곳에선 피고나 원고라는 배역을 맡아 변호사 또는 검사와 한 팀을 이룬다. 소송 과정에서 드러나는 복잡하고 다양한 규칙은 굳이 거론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의 소송이 과연 그 자체로서 목적이 될 수 있는가? 광장에 모여 논쟁을 주고 받고 그것을 일종의 놀이로 유희했던 고대 그리스 사람들에게는 소송이 놀이라는 주장이 일면 타당하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원고와 피고들은 분쟁을 해결하려는 확고한 목표를 갖고 있으며 그것을 통해 구체적인 이득을 얻고자 한다. 현대의 소송은 놀이의 가장 중요한 특성인 '그 자체로서의 목적되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하위징아가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니다. 그래서 그는 고대에 놀이의 특성을 지니고 있던 행위들이 현대로 오면서 점차 놀이적 성격을 잃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물론 이정도의 설명은 충분치 않다. 하지만 아쉽게도 하위징아는 문화가 놀이의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증명하려 할 뿐 왜 현대에 이르러 그것이 놀이의 특성을 잃게 됐는지에 대한 고찰은 진행하지 않고 있다.

내 보기에 그 이유는 아마 이성에 의한 이성을 위한 이성의 세계였던 근대 사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지 않을까 싶다. 이성이란 강력한 합목적성을 추구하며 언제나 논리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사실만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아무런 목적없이 행위 자체로서 목적이 된다는 놀이와 각종 문화 현상을 연관 짓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법률이나 정치같은 진지하고 엄숙한 사회 현상이 바로 근대에 이르러 급속도로 발전하며 그 전문성과 체계성을 갖췄다는 것도 눈여겨 볼 만한 사항이다. 

이 책 '호모 루덴스'가 무목적성을 기반으로 하는 '놀이하는 인간'으로 '생각하는 인간' 을 공격하며 근대 사회의 맹점을 비판했다면 난 이 책을 인생의 책으로 꼽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공백은 나에게 큰 아쉬움을 남겼다. 어쩌면 그 공백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던져진 과제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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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21 10: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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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DE 코드 (양장) -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에 숨어 있는 언어
찰스 펫졸드 지음, 김현규 옮김 / 인사이트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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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이 리뷰는 이 책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제공하지 않습니다. 


내게는 언제나 기원이 문제였다. 이것은 어디서 온 것인가? 저것은 무엇으로 만든 것인가? 그것은 왜 움직이는가? 전광석화처럼 달려 나가는 생의 발걸음을 멈춰 세운건 언제나 이런 뿌리에 대한 질문들이었다.

그런데 기원을 헤아리는 것은 꼭 불 꺼진 방에서 스위치를 찾는 것과 같다. 이리저리 부딪히며 가까스로 스위치를 켜 보면 그 안에 또 다른 문이 서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또 다시 어두컴컴한 방에서의 술래잡기가 되풀이 된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어린아이의 질문처럼, 기원은 긴 꼬리를 휘날릴 뿐 좀처럼 본체를 보여주는 법이 없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뭐냐고 묻는 말에 나는 자신있게 답할 수 있다. 그것은 '왜?'라는 질문이라고. 머리 속에 '왜?'가 떠오른 순간 이전의 고요했던 날들은 완전히 박살나 버린다. 평범했던 것들이 더 이상 평범해 보이지 않고 당연했던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해 지지 않을 때 뇌 속에 쌓인 두터운 껍질들이 일어나며 기원으로 향하는 미로의 문을 연다. 유사이래 이 문에 들어선 사람들은 대개 철학자가 되었다. 

그렇다고 컴퓨터의 기원을 밝히는 이 책 'CODE'를 철학서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단적인 증거로 저자 찰스 펫졸드는 프로그래머다(나는 대학 시절 윈도우 프로그래밍의 교재로 찰스 펫졸드의 책을 봤다!). 철학자와는 평생 말 한 번 섞을 것 같지 않을 사람. 그런데 이 책이 펼쳐 보이는 컴퓨터의 역사에는 예의 첨단 과학이 유발하는 지끈지끈한 두통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마치 낙타의 등에서 산을 보고 송아지의 눈에서 바다를 보듯이, 이 Bit의 오딧세이에는 철학적 사색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컴퓨터의 세계는 오로지 0과 1만으로 기술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왜 하필 0과 1일까. A와 B면 안되는 걸까? 아니 좀 더 깊이 내려가서 왜 항상 양자택일일까? 일자무식, 단순한 흑백론. 이것도 저것도 아닌 제 3의 무엇에는 컴퓨터를 못 견디게 할 만큼 어떤 악의적 개념이 숨어있단 말인가? 그런데 신기한건 컴퓨터는 오로지 0과 1만 가지고도 사과와 바나나와 원숭이와 거기다가 그 엉덩이가 빨갛다는 사실까지 표현한다는 것이다.

이런걸 보면 '음양론'이 떠오른다. 음과 양이 어우러져 태극을 이루고 그 태극이 온 세상 만물을 생성하듯이 컴퓨터는 0과 1로 우주를 만들어낸다. 지극히 현대적인, 게다가 지극히 서양적이기까지 한 이 사물의 원리가 어쩜 이리 동양 사상의 정수를 쏙 빼닮았는지... 어쩌면 컴퓨터는 서구 문명 사회가 음양론의 정수를 깨달아 만들어낸, 그 형이하학적 실체인지도 모르겠다. 

0과 1이 음양론의 그림자라면 아스키코드는 구조주의 언어학의 편린이다. 이쯤되면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지! 컴퓨터의 언어와 그 의미는 철저하게 임의로 결합한다. 예를들어 알파벳 소문자 'a'는 아스키 코드로 '97' 이진수로 표현하면 '1100001'이 된다. 아무리 뚫어져라 쳐다봐도 1100001에는 'a'라는 의미를 잉태할 어떠한 썸씽도 존재하지 않는다. 시니피앙이 시니피에의 바다에서 그 하나를 건져 내듯이 컴파일러는 이진수의 낚시대로 우리말의 의미를 낚고 있는 것이다. 

한편 컴퓨터 진보의 역사와 이를 위한 인간의 집념에선 '모든 가치는 노동으로부터 창조된다'는 아담 스미스의 노동가치론의 미래가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언젠가 컴퓨터가 너무너무 발전해 컴퓨터 스스로 해야 할 일을 정하고 그들 스스로가 프로그래밍을 할 수 있다면, 기술 문명의 발전과 그에 따른 온갖 가치들을 노동의 산물이라고 부를 수는 없지 않겠는가?

자 이쯤보면 찰스 펫졸드의 'CODE'는 완전히 인문서다. 그것도 철학에 언어학에 경제학까지 잡탕한 종합 인문서말이다. 하지만 고백할게 있다. 
사실 이 책에서 이런 사색을 이끌어 내는건 완전히 자의적이다. 아니 철저히 주관적이다. 아니아니 완전히 자의적이면서 동시에 철저히 주관적이고 심지어 대단히 이기적이기까지 하다. 한 마디로 개 눈에 똥만 보였다고 밖에...

이 책이 철학과 사상을 컴퓨터의 역사로 은유한 출판 역사상 가장 독특하고 메타적인 철학서라고 설명하는 건 사기다. 하지만 어떻하냐고! 0과 1에서 출발해 논리 회로를(AND, OR, NOR, NAND...) 만들고 그 논리 회로를 좁은 공간에 직접하기 위해 반도체를 만들고 반도체를 모아 CPU를 만들고 그 CPU로 컴퓨터를 만드는 과정 속에서 내가 본 건 음양과 소쉬르와 아담 스미스 인걸. 

하여튼 기원을 찾아 떠나는 여행은 이렇게 두서 없다. 제대로 된 출구를 찾았는가 하면 어김없이 딴 세상이다. 자 주절주절 이야기를 딴 데로 돌리는 건 무안하다는 증거. 더 이상 썼다간 매 맞을까 두려우니 오늘 리뷰는 여기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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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연 2012-02-28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로운 책이네요

한깨짱 2012-02-29 21:20   좋아요 0 | URL
흥미로운 책이긴 한데, 컴퓨터공학 베이스가 없으면 많이 어렵긴 하더라구요.
 
결혼.여름 알베르 카뮈 전집 1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198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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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의 산문집이다. 대학 시절 이방인을 읽은 이후로 카뮈를 읽은 적이 없으니 참으로 오랜만의 재회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재회의 낯설음은 으레 그렇듯 둘 사이에 패인 시간의 공백때문이 아니었다. 첫 문장을 읽어 내려간 순간, 나는 이 낯설음의 정체를 파악했다. 그것은 마치 다른 사람의 작품을 읽는 듯한 느낌. 내가 읽고 있는 '결혼, 여름'의 카뮈는 내가 알고 있던 '이방인'의 카뮈가 아니었다.

카뮈의 산문은 시적이었다. 더 이상의 수식은 이 춤추듯 넘실대는 에세이의 고귀한 리듬을 해칠것만 같아 적지 않는다. 이방인의 카뮈만을 알고 있었던 사람에게는 분명히 말해두고 싶다. 카뮈에게는 두 개의 영혼이 있다. 하나의 영혼은 숨막히는 열기를 호흡하며 꺼질듯 말듯 깜빡이는 전등 아래서, 밤새 위대한 소설의 바위를 굴려 나간다. 또 하나의 영혼은 시원한 바다를 가르며 힘차게 수영한 뒤 따뜻하게 달궈진 모래 사장 위로 기어 올라가 기분 좋은 태양 빛을 만끽한다. 카뮈의 소설이 사막에서 나온다면 그의 에세이는 바다에서 나온다.




기억을 되살려 보자. 태양 때문에 살인을 저질러야 했던 뫼르소에게선 팍팍하고 건조한, 그래서 씹으면 씹을 수록 텁텁한 맛이 났다. 부조리는 사막의 모래 바람에 수분기를 몽땅 뺏겨 파삭파삭 말라버린 미이라 같았다. 티파사를 노래하는 카뮈의 옆엔 윤기 넘치는 흑발의 여인이 누워있다. 그 우아함이 파도를 차고 오르는 힘센 펄떡 거림과 결합한다. 탱탱하게 솟아오른 피부를 태양이 어루만지면 살갗은 보기 좋은 구리빛으로 물든다. 울긋불긋 물든 꽃들은 축복을 내리고, 그 향기에 취해 눈을 뜨면 비로소 헤아릴 수 없는 자유가 온 몸을 가득 채운다.

카뮈는 알제의 오랑을, 제밀라를, 티파사를 여행하며 돌과 태양과 바람과 폐허가 된 역사를 얘기한다. 이야기를 읽는대는 마음의 준비도 상상도 필요 없다. 그저 벅차 오르는 문장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만 하면 때로는 누렇게 물든 나른함이, 때로는 입안가득 넘쳐 흐르는 과육이 향기가, 마치 축복처럼 다가온다.

문장은 상당한 만연체다. 카뮈 자신도 그 아름다운 지중해의 풍광 앞에서는 차마 문장을 끊을 수 없었나 보다. 첫 단어를 읽고 중간쯤 지나다 보면 어느새 문장에 흠뻑 취해 비틀비틀 단어 사이를 오간다.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분위기를 느끼는 것이다. 이렇게 글에 취해 신나게 춤을 추고 나면 어느새 책 한 권이 끝나있다. 찌릿찌릿 가볍게 떨리는 몸의 여운은 기분 좋은 숙취다.

난생 처음 이런 에세이를 읽은 것 같다. 이 한권의 책으로 카뮈를 전독(全讀)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 정도였으니까, 저 부조리의 화신 카뮈를 재인식하기에는 이만한 책이 없는 셈이다. 카뮈를 읽고 싶지만 시지프스의 돌덩이도, 뫼르소의 태양도 부담스러운 사람들은 대신에 이 향기로운 술 한 잔을 따라 마시는 건 어떨까? 

카뮈의 '결혼,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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