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렙 보르헤스 전집 3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 민음사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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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를 완전히 이해하는 날, 더이상 나는 내가 아니다. 이 글은 아직 내가 나일때 쓰는 감상이다. 이해했다는 건 거짓말이고, 읽었다는 사실조차 자신이 없다.

'알렙'은 이 세상의 모든 지점과 모든 역사와 모든 시간과 모든 영상과 모든 소리가 결코 겹쳐지거나 투명해지는 법 없이 담겨 있는 구슬이라, 그것을 보는 순간 세상의 비밀을 모두 알아챌 수 있다지만, 오히려 알렙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면 할수록 이것을 더더욱 알 수 없게 되는 역설은 보르헤스를 이해하는 한 방법인지 아니면 나의 무지를 드러내는 조롱인지, 역시 모르겠다.
  

 

 

소설 '알렙'에는 신, 시간, 영겁회귀, 우주같은 형이상학적 주제들이 미로, 불사, 재규어의 가죽 무늬, 바퀴 등의 모호한 상징물로 나타난다. 게다가 이 상징물들은 보르헤스가 평생을 고집한 단편이라는 형식 속에서 고도로 압축되어 제시되는 탓에 애초에 갖고 있던 모호함을 넘어 완전한 혼돈 속에 빠지는 경우도 다반사다. - 해외의 독자들은 여기다 번역의 모호함이라는 재앙까지 선물로 받게 된다.

이쯤에서 우리는 작가에게 해석 또는 그에 준하는 실마리를 요구하려 하지만, 보르헤스는 이러한 모호함을 작품 속에서 적극적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모호성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권고를 내림으로써 독자를 안개 자욱한 숲 속에 가둬 버린다.
  

 

  

생각해 보면 보르헤스의 작품들은 애초에 머리로 받아들일 수 있는게 아닐지도 모른다. 모든 역사와 시간을 동시에 본다는 것은 존재했고, 존재하며,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이해한다는 얘기지만, 이것을 말과 글로 설명하려 할 때 인간은 수십 만년 동안 갈고 닦은 언어의 기술이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는 사실만을 깨달을 뿐이다.

이것은 보르헤스도 마찬가지다. 그는 말과 글이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그것이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뱉어낸 모든 말들이, 씌여진 모든 글들이 인과관계에 묶인 죄수에 불과하다는걸 알고 있었다. 결국 언어의 테두리 안에서 알렙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표현은 모순, 불가지 같은 야심차지만 빈약하기 그지 없는 말들이다.

그렇다면 알렙을 이해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때로는 너무 많은 생각이 좋은 생각을 잡아 먹는다. 또는 계산된 음모가 우연을 이기지 못한다.

알렙은 직관으로 봐야한다.
알렙은 점점이 박힌 별들에서 나타나는 별자리 같은거고 갈라진 나무 무늬에서 떠오르는 사람 얼굴 같은 거다. 어떤 단어를 수없이 되풀이해 떠올려 본 적이 있는가? 어느 순간 단어가 의미를 잃고 완전히 낯선 소리로 다가왔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무의식 속에서 씻겨진 단어는 이 세상과 굳게 관계 맺고 있던 논리의 사슬을 풀어헤치고 괴물같은 본래의 모습을 드러낸다.

안타까운건 설령 당신이 알렙을 직관으로 파악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다른 사람과 공유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당신은 나에게, 나는 당신에게 결코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이 직관의 깨달음이다. 알렙은 알렙을 말하는 순간 알렙이 아니다.

글로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를 글로 써야 하고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머리로 읽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이성의 무지가 그리는 무한의 고리 위에서, 영원히 방랑하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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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안그림자 2011-03-08 0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각적이고 분석적인 글 잘 읽었습니다^^세상에는 빛이 존재하고, 인생에는 진리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하니 그 속에 삼차원 속에 존재하고 있는 우리들이 확인할 길이 보이지 않는 영화 속의 무극은 아니지만 무극같은 사차원적 영원성 같은 것이 있지 않나 싶어 보입니다^^

한깨짱 2011-03-12 10:11   좋아요 0 | URL
네, 사차원적 영원성. 이게 알듯 모를듯 긴가민가한데 막상 글로 표현하려면 정말로 어려운 것 같네요. 이 글은 쓰면서도 올바로 쓰고 있는지 확신이 안섰는데 칭찬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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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효의 글쓰기 만보 - 일기 쓰기부터 소설 쓰기까지 단어에서 문체까지
안정효 지음 / 모멘토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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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효는 나에게 번역가로 더 익숙한 사람이다. 우리 집에 있는 책만 헤아려 봐도 그가 번역한 책이 벌써 몇권이다. 얼핏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과 G.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이 눈에 잡힌다. 그런데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 사람이고 G.마르케스는 콜롬비아 사람이다. 그리스 사람은 그리스어를 쓰고 콜롬비아 사람은 스페인어를 쓴다. 뭐 이리 빙빙 돌려 말하냐고 따져 묻기 전에 생각해 보자. 두 대륙의 물리적 거리만큼 큰 차이가 있는 두 작품을 한 남자가 번역한다. 그것도 한 시대를 들었다 놓은 대가들의 작품을.

이런 번역은 맡긴 사람보다 맡은 사람을 칭찬해 줘야 한다. 맡긴 쪽은 약간 무책임하다. 맡긴 쪽이 무책임한게 아니라면, 아마도 역자에게 어마어마한 신뢰를 주고 있는 것이리라. 힐끗 보니 출판사가 열린책들과 문학사상사다. 둘 모두 호락호락한 회사는 아니다.

그런데 더더욱 놀라운 건 이 사람이 사실은 소설가라는 것이다. 90년대 초 큰 인기를 끌었던 영화 하얀전쟁(1992),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1994)의 원작이 바로 이 사람의 소설이다. 게다가 그는 영어로 작품을 쓰고 외국에서 직접 출판하는 몇 안되는, 혹은 유일한 한국 작가이기도 했다. 글에 관한한 웬만한 내공이 아니라는 말씀.  

 

  

 

안정효가 글을 쓰기로 작정한 때는 대학 시절이었다. 만화가가 되고 싶었으나 서강대 영문과에 진학해 버렸다. 이왕 영문과에 간 김에 두루두루 문학을 섭렵하기로 한 모양이다. 그 때부터 많은 책을 읽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방학때가 되면 어느 시골 산 속에 틀어 박혀 영어로! 소설을 썼다.

영어로 소설을 썼다는것 보다 무시무시한 사실은 그가 1981년, 42세의 나이로 문단에 데뷔했다는 거다. 글쓰기를 시작한지 20년 동안 그는 소설가라는 타이틀을 얻지 못했다. 이제 막 소설가의 꿈을 키우는 학생인 동시에 그 일을 시작하기엔 늦은감이 없지 않은 한 사람으로서, 이 사실이 전해주는 위안과 깨달음을 뼈에 새기지 않을 수 없다.

글쓰기는 뚝심이다. 

 

 

 

내 비록 많은 글쓰기 참고서를 읽진 않았지만 감히 말하건대 이 책은 글쓰기를 배우고 싶은 사람이 오래오래 소장하며 두고두고 찾아볼 명작 교과서다.

안정효는 글이란 무엇인가를 따지기 보다는 글 쓰는 '법'을 가르친다. 그래서 알쏭달쏭한 철학과 뜬구름 잡는 얘기가 없다. 벼락같이 영감을 받아 삼일 밤낮을 쉬지 않고 쓰고나니 명작 한 권이 놓여 있더라 하는 말도 없다. 대신 그는 철저한 과정으로서의 글쓰기를 가르친다. 어디에 앉아서 어떤 마음으로, 무엇부터 시작하여 어떻게 끝내야 하는지, 글쓰기의 알파와 오메가를 차근차근 짚어준다. 깐깐한 노교수에게 일대 일 첨삭 지도를 받는 기분이다. 

게다가 이 책은 한국 사람이 한국어로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 한국어로 쓴 한국 책이다. 이 사실이 전해주는 감동은 생각보다 거대하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면 지금 당장 인터넷 서점의 미리보기를 이용하여 글쓰기 만보의 첫꼭지 '수영과 글쓰기'와 어슐러 K. 르 귄의 '글쓰기의 항해술' 서문을 비교해 보라. 한국 사람이 쓴 한국어 문장이 얼마나 강력한 흡입력을 발휘하는지, 책에서 손을 놓을 수 없다는 것이 과연 어떤 경험인지, 어디한번 느껴보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책은 글쓰기를 배우고 싶은 사람이 오래오래 소장하며 두고두고 찾아볼 명작 교과서다. 당신이 다른 생각을 갖고 있으며, 다른 책들을 읽어 내 의견을 반박하고자 한다면, 부디 이 책을 대조군으로 삼아 당신의 가설을 검증해 나가길 바란다. 이 책이 그 정도의 자격쯤은 갖추고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물론 나 또한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글쓰기 지침서들을 꾸준히 찾아볼 것이고 그 감상을 여기에 쓰겠다. 이보다 좋은 책을 발견하게 되면 상당히 기쁜일이 되겠지만, 이 책을 읽은 후로는 도무지 다른 책을 찾아볼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게, 문제라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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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베이의 데뷔작 '나쁜 녀석들'(Bad boys, 1995)이 한국 비디오 대여점의 선반 한구석을 차지했을 때, 사람들은 '대박인 비디오가 하나 나왔다'며 포스터를 지나칠 때마다 한 마디씩 하곤 했다. 참나, 그게 벌써 16년 전이다. 

 

 

 

내 기억에 '나쁜 녀석들'은 저예산 영화였다. 윌 스미스가 나오는 영화가 무슨 저예산이냐고 하겠지만 1995년 당시 윌 스미스는 저예산 영화에 어울리는 싸구려 배우였다. 사실 그가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영화는 나쁜 녀석들 보다 일년 늦게 개봉한 '인디펜던스 데이'(1996)라고 볼 수 있는데, 이 영화 감독이 롤랜드 에머리히다. 여기까지만 얘기해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보충 설명. 이 사람은 블록버스터만을 고집하면서도 주연 배우만큼은 절대 블록버스터하지 않은 배우를 쓰는걸로 유명하다. 소시적의 제이크 질렌할도(투머로우에 출연) 여기에 속한다.
어쨌든,

잘나가는 연예인들도 한때 어려운 시절이 있었듯 현존하는 최강의 블록버스터 감독 마이클 베이도 처음에는 저예산 영화로 시작했다. 하지만 스타일리쉬한 액션 연출과 유머에 대한 감각, 성공하는 대중 영화의 절대 방정식 두 개를 공학 계산기도 없이 암산으로 풀어 버리는 듯한 마이클 베이를 나쁜 녀석들의 프로듀서 제리 브룩하이머는 한 눈에 알아봤다. 

 

  

<CSI의 아버지 제리> 

 

이 둘이 의기투합한 결과가 1996년 더 락(The Rock)! 1997년 콘 에어(Con Air)! 1998년 아마겟돈(Amargedon)!이다. 오늘날 제리 브룩하이머가 CSI로 침좀 뱉고 캐리비안의 해적으로 어깨뽕을 넣어 입을 수 있는 이유는 사실상 이 3년동안 내리 쌓은 성공이 진토되고 넋이 되어 자금적, 기술적으로 튼튼한 토대가 됐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문제는 진주만(Pearl Harbor, 2001)이었다. 전작 3편의 과도한 흥행으로 한껏 고무된 마이클 베이는 장장 300km의 필름을 소모하며 어지간히 미친짓을 해댔다. 흥행 성적 자체는 그리 나쁜게 아니었으나, 마이클 베이는 그 해 최악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줄거리가 개판인 탓이었다.

그런데 그게 뭐?

마이클 베이의 영화치고 줄거리가 탄탄한 영화는 더 락 외에 전무하다. 브루스 윌리스 대신 살아 돌아온 벤 애플렉을 함박 웃음으로 맞이하는 리브 타일러의 모습에서 친구의 친구를 사랑한 케이트 베킨세일을 그리는건 어렵지 않은 일 아닌가? 만약 마이클 베이가 꽉 짜인 스토리 구성 능력까지 갖췄다면 그건 거의 스티븐 스필버그 급이다. 그런데 스티븐 스필버그가 베이만큼 액션을 잘 찍나?

마이클 베이가 스무쓰한 스토리 텔링에 젬병이라고 욕하지만, 그의 영화에선 액션, 근래에 들어서는 CG 자체가 하나의 완벽한 스토리 텔링이다. 이런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영화가 바로 '트랜스 포머(Transformer, 2007)'다. 

 

 

 

트랜스 포머의 줄거리는 단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I'm Optimus Prime!

그리고는 옵티 머스 프라임의 주먹이 날라간다. 대사도 필요없다. 액션의 도입부에서 묘사하는 상세한 변신 장면은 일종의 세레모니다. 전투전에 행해지는 마우리 족의 군무처럼 이것은 스펙타클을 기대하는 관객의 마음속을 한껏 고양시킨다. - 나는 변신 장면에서 눈물이 주륵주륵 쏟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여전히 줄거리가 개판이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세상 사람들이, 성공을 위해선 부단히 단점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할 때 마다 창자가 비틀어지고 머리가 어질해진다. 하고 싶은 일을 위해선 하기 싫은 일을 해야만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진지하게 충고하지만,

다 개똥같은 얘기들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은 평생 장점만 갈고 닦아도 그것이 꽃필지 시들어 버릴지 알 수 없을 만큼 짧다. 그런데도 어떻게 단점 따위에 전전긍긍하며 마음을 졸일 시간이 있겠는가?

마이클 베이는 마이클 베이다. 못하는건 하지 않는다. 당신이 스티븐 스필버그가 되든 마이클 베이가 되든 그건 내가 알바 아니지만, 그렇다고 베이의 길이 우습다고 깔봐선 안된다.

그건 사자의 목이 기린의 목보다 짧다며 비웃는 것과 같다.


<뒷 이야기>
마이클 베이는 2003년 '나쁜 녀석들 2(Bad Boys 2)'를 마지막으로 제리 브룩하이머와 결별했다. 제작비가 폭증한 것에 비해 벌이가 시원찮았던 탓이리라. 결별의 사유가 제리에게 있었는지 마이클에게 있었는지 알바 아니지만, 마이클이 제리를 떠나 만든 첫 영화가 아일랜드(2005)라는 사실을 볼 때, 마이클의 선택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Dream Works를 만났고 스티븐 스필버그라는 갑옷과(제작자) 샤이아 라보프라는 검까지(주연 배우) 얻게 됐다. 스티븐은 다행히 마이클의 장점과 가능성을 존중해주는 관대한 제작자인 것 같다.

믿음은 언제나 위대함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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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노 다케시의 생각노트
기타노 다케시 지음, 권남희 옮김 / 북스코프(아카넷)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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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기타노 타케시는 코미디언이다. 무엇으로 데뷔했냐하면, 만담이다. 내 세대에서 만담이라고하면 많이 생소한 분야이다 보니 도대체 뭘 어떻게 했다는건지 알 길이 없지만, 이와이 슌지 감독의 '하나와 앨리스'를 보면 주인공 아오이 유우가 사랑하는 잘생긴 남자 선배가 바로 만담 동아리의 회원이라는걸 볼때, 일본에서는 이 만담이라는 것이 모든 세대가 보고 즐기는 인기있는 오락거리라는걸 추측해 볼 수 있고, 그렇다면 만담을 잘해서 전국적인 인기를 모았다는 것도 어느정도 이해가 되는 일이다.

어쨌든,

택시 기사에서 다방 웨이터 백화점 점원에서 앨리베이터 보이까지, 블루 칼라 노동직을 전전하던 기타노 다케시는 1974년 자신이 일하던 그 앨리베이터에서 비트 기요시를 만나 만담 콤비 '투 비트'를 결성한다. 

 






첫해 '투 비트'는 주로 스트립쇼의 오프닝 공연을 했다. 차츰 이름이 알려지자 콘서트의 바람잡이를 책임지게 됐고, 그곳에서 독보적인 활약을 펼쳐 라디오와 TV 만담에까지 얼굴을 비췄다.


이름과 얼굴이 널리 알려지고 난 뒤에는 영화에 출연했다. 영화에 출연하다 감독을 하게 됐다. 감독을 시작한 8년째에 '하나비'를 만들었으며 영화는 54회 베네치아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는 동안에도 다른 영화를 많이 만들었고 동시에 TV 쇼를 진행했다. 일년에 25억엔을 벌었다. 그러다가 오토바이 사고를 당해 얼굴뼈와 피부가 바스러졌다. 말 그대로, 

바스러졌다. 

모두가 죽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영혼의 발걸음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죽음의 강 위로 잔잔한 동심원을 그리며 나아가려는 순간 기타노 다케시는 기적적으로 삶에 복귀한다. 

 

 




앨리베이터 보이에서 정상의 연예인까지, 페인트공의 막내 아들에서 최고급 포르쉐까지, 그리고 정력적인 활동가에서 사지를 헤매는 중환자에 이르기까지, 기타노 다케시가 그리는 삶의 궤적은 그 큰 낙폭만큼 깊은 맛을 내며 읽는 이의 인생을 자극한다. 

기타노 다케시가 그 많은 역경을 이겨내고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사람들에겐 타인의 파란만장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단순화된 인생은 그대로 싸구려 미담이 되어 두루두루 소비된다. 이것이 소비되는 동안 포장지는 더 화려해지고 그 속에 담긴 노력의 빛은 갈수록 흐려진다. 

기타노 다케시만 해도 그렇다. 사람들은 그가 밑바닥 출신의 천재 엔터테이너라는 사실만 기억하지 그 과정이 구체적으로 어땠는지는 알지 못한다. 밑바닥 인생이라는 표현에는 가슴을 터지게 만드는 굴욕이라던가 나라는 존재가 송두리째 사라져 버리는 것 같은 경멸과 무시, 뼈가 부러지는 노동의 고통 등 듣는 이로 하여금 그 분노와 울분을 생생하게 떠올리게 하는 어떠한 힌트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건 그저 단어에 불과할 뿐이다. 

껍데기만 남은 미담은 급기야 사람들을 오해의 종착지로 몰고간다.

'다케시씨, 당신은 뭘 해도 성공했을 사람입니다.'
'당신은 참 재능있는 사람이로군요.'
'원래 그런거에요. 세상에는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아서 하는 천재들이 하나 둘쯤 꼭 있단 말입니다.'


기타노 다케시는 만담으로 한창 인기를 끌던 시절을 이렇게 회상한다. 

'심할 때는 여자와 있으면서 베갯머리에 둔 노트에 메모를 한 적도 있다.
젊을 때였으니 머리 한쪽에서는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쪽으로는 항상 만담 소재를 생각하고 있어서, 내일 보여줄 새로운 소재가 생각나면 그 자리에서 바로 노트에 썼다.'

삶과 죽음, 다케시 미학의 비밀, 세파를 찌르는 촌철. 이 책에 담긴 다케시의 육성을 요약하라면 이렇게 펼쳐볼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가슴에 새겨지는 한 마디는, 천재라 부르는 세상 사람들의 헛소리를 뒤로하고 담담히 전하는, 여자와 만담에 대한 일화 몇 문장. 나에게는 오히려 이것이 이 책을 선택했음에 후회가 없음을 보여주는 단 하나의 감동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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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파고스
커트 보네거트 지음, 박웅희 옮김 / 아이필드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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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고대 그리스의 극작가 소포클레스는 인생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가장 행복한 삶은 슬픔과 기쁨을 알기 전의 무지에 있다."

그런가 하면 역사상 최고의 예언가로 불리던 노스트라다무스는 또 이런 얘길 한적이 있다.

"행복은 무지다."

내가 어린 시절 좋아했던 만화 '해와 달'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많이 알았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슬펐다는 것이다."

당신이 삶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면 이유는 단 하나다.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어 슬픈 당신을 앞에 두고, 너무 많은 것을 알아낸 수고로 전문가라는 타이틀까지 획득한 심리상담사가 그 많은 지식을 이용해 이렇게 처방한다.

"생각이 너무 많으시네요, 며칠 푹 쉬세요."

인간의 뇌는 왜 진화했지?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딩동댕~ 그럼 경쟁에서 승리해야 하는 이유는 뭐지? 생존하기 위해서! 딩동댕~

인간은 생존 경쟁에서 살아 남았다. 그리고 이 말은 거대한 체격을 가진 맘모스와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사자와 나무 타기의 일인자인 원숭이를 인간이 모조리 패대기 치고 일등을 먹었다는 얘기다. 인간이 맘모스와 사자와 원숭이를 패대기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그들은 도구를 만들었다.

도구를 만들기 위해선 정교한 손재주가 필요했다. 손을 정교하게 조작하기 위해선 복잡하고 커다란 뇌가 필요했다. 이로써 일련의 공식이 성립된다. 생존 본능으로 인해 촉발된 도구 제작의 필요성은 인간의 뇌를 진화시켰고 진화된 뇌는 더 정교한 도구를 필요로 했으며 더 정교한 도구에대한 필요성은 인간의 뇌를 더욱 커지게 만들었다. 뿡야!

이것으로 진화에 대한 비밀은 아주 허망할 정도로 스르르,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리는 미녀의 네글리제처럼 그 속살을 드러낸다. 그것은 바로 도구와 뇌의 카르텔.

그러나 진화가 생존을 위해 존재하는거라면 오늘날의 뇌는 뭔가 다른 방식의 진화가 필요하지 않을까? 더 얘기해보자.

도구와 뇌의 수십만년에 걸친 카르텔은(담합) 지구 역사상 가장 강력한 파괴력을 발휘했다. 도구는 숲을 태우고 바다를 메웠으며 인간은 수백만종의 동식물을 먹어치워 똥으로 바꿔 놓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거대한 똥무더기들은 삶의 터전을 침범해갔고 비옥한 땅과 푸르른 숲과 신선한 공기와 맑은 물이 이제는 똥냄새를 풍기게 되었다. 뿡야!

이제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선 그 커다란 뇌가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수 밖에 없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슬픔도 절망도 없고, 무지에대해서까지 무지했던 순수의 시절로.

들어보라, 그리하여 인간은 100만년에 걸친 진화에 시동을 걸었다. 그들의 뇌는 서서히 쪼그라들기 시작했으며 손과 발은 헤엄치기 유리한 지느러미로 변했다. 인간이 숲을 태워 버리는 바람에 온 세상이 바다로 뒤덮였고, 따라서 인간이 먹을 수 있는 건 물고기가 전부였으며 이로인해 누구보다 빨리, 그리고 많은 물고기를 잡는 것 만이 생존의 유일한 법칙이었기 때문이다.
 

 

 

커트 보네거트가 1985년 써낸 이 책 '갈라파고스'는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조난당하는 바람에 우연히 지구의 멸망을 피할 수 있었던 일단의 인간들이 어떻게 100만년의 진화에 시동을 걸었는지, 그 과정을 잔인할 정도로 냉정히 그린다. 소설의 주인공은 이미 죽어 영혼이 된 레온 트라우트다. 레온 트라우트는 갈라파고스를 떠다니며 인간의 행동을 목격하고, 목격한 사실을 담담히 서술한다.

서술 시점이 3인칭 관찰자고 그마저 극 속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 유령이기 때문인지 이 작품은 커트 보네거트의 여타 작품과는 달리 감정 이입이 어렵다. 누군가는 시간을 거스르고 여기저기서 다른 얘기들이 튀어나오는 서술 방식 때문이라고 하지만, 사실 커트 보네거트의 소설 중에 이런 식으로 전개되는 소설이 어디 이것 뿐이랴? 따라서 이 소설엔 다른 문제가 있다고 봐야한다. 나는 그것을 유머의 부재로 설명하고 싶다.

커트 보네거트가 언제나 소설 속의 캐릭터들을 절망 속에 쳐넣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휴머니스트로 부르는 이유는, 그 상황이 인간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해학과 풍자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갈라파고스의 생존자들을 극단으로 몰아 넣으면서도 보네거트의 얼굴은 끝까지 무표정이다. 정내미가 뚝 떨어진듯한 냉정함. 이대로 없어져 버려도 좋을 것 같다는 조소. 나는 커트 보네거트의 책을 읽으면서 이토록 섬뜩해 본 적이 없다.

아마 작가 연보에 적혀 있는 건조한 한 문장이 이 유례없는 사태를 설명하는 실마리가 될지도 모른다. 

1985년. 갈라파고스 출간. 다량의 수면제와 술을 섞어 자살 기도.

누구보다 인간을 사랑했던 한 남자가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이유가 뭐였을까? 소리쳐 불러보아도 대답없는 세상에 지쳐버렸던 걸까? 물론 죽음이 삶의 다른 방식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건지도 모르지.

커트 보네거트는 그 해 목표한 바를 이루지는 못했다. 그 후로 20년을 더 살아가면서 보네거트는 예전처럼 전쟁을 반대했고 인간은 다른 인간과 더불어 살아야 함을 설파했으며 보수주의자들에게 머더 뻐킹을 먹였다.

그가 왜 자살 기도를 했는지는 아직까지 모른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몰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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