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들의 섬 밀리언셀러 클럽 3
데니스 루헤인 지음, 김승욱 옮김 / 황금가지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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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스 루헤인의 '살인자들의 섬'을 접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말 그대로 데니스 루헤인의 원작 소설 '살인자들의 섬'을 읽거나,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 '셔터 아일랜드'를 보는 것이다. 무엇을 먼저 봐야하는지에 정해진 답은 없지만, 충고하건대 소설을 먼저 보라. 그것도 전부 읽는 것은 좋지 않다. 멈춰야 할 시점은 세 번째 챕터인 '셋째 날', 이 책을 기준으로 정확히 403 페이지에 도착했을 때이다. 


소설이 이야기 세상의 왕으로 군림하게 된 이유는 역시 서사가 가진 원초적인 힘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기, 승, 전, 결. 이 네 단락의 과정 속에서 사람들은 자기가 꿈꿔왔던 세상을 보고 때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진실을 마주하며 이로 인해 눈물을 흘리거나 웃음 짓는다. 

나는 수면욕, 성욕, 식욕처럼 인간을 생존케 하는 근원적 욕망 가운데 반드시 이야기를 하고, 이야기를 듣고 싶은 욕망이 추가되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은 어떠한 악조건 속에서도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야 마는, 그로 인해 생명을 이어갈 희망을 갖고 상처를 치유했던 인간 역사의 몇 가지 예만으로도 증명될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해 보라, 세계 대전과 노예제도와 홀로코스트가 없었다면 얼마나 많은 소설가들이 직업을 잃었을지.

물론 서사에도 약점은 있다. 이야기는 분명 찬란한 빛을 내뿜으며 탄생하지만 시작과 동시에 끊임없이 쇠퇴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났다. 이야기는 되풀이 할 수록 맥이 풀린다. 충격적이라고까지 느껴졌던 최초의 신선함은 시간이 흐를수록 지루함으로 부패한다. 부패의 정도는 특히 씌여진 서사에 더 심하기 마련인데, 구전된 서사가 시대와 화자를 달리하여 조금씩 변화할 수 있는 것과 달리 한 번 씌여진 글은 결코 그 내용이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대부분의 훌륭한 작가들이 작품에 모호한 상징을 넣거나 주제와 의미를 다층적으로 구성하여 자신의 작품을 읽기 어렵게 만드는 이유를 알 것 같지 않은가? 그들은 읽으면 읽을 수록 새롭게 해석되는 작품을 원한다. 그렇게 못하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 주제라도 작품에 담고자 한다. 그래야만 자신의 작품이 인간 지성사에 길이길이 남을 뿐만 아니라 덤으로 스웨덴행 비행기표까지 물고 올 수 있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대중 소설은 그 어떤 장르보다 '이야기 자체'에 집중한다. 책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것이야 말로 훌륭한 대중 소설이 갖춰야 할 제 1의 의무다. 그러기 위해 작가는 꽉짜인 플롯을 구성 하고 독자가 다음에 벌어질 일을 도저히 알아 차릴 수 없도록 이야기를 교묘하게 전개 시킨다. 특히 '살인자들의 섬'처럼 후반부의 반전이 결정적 역할을 하는 소설에서 말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렇게 치밀한 준비야 말로 대중 소설이 일회용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거 아닐까? 잘 짜인 대중 소설은 마치 샴페인같다. 병째로 흔들어 충만해진 탄산이 뚜껑의 개방과 함께 해방될 때, 이야기는 응축된 에너지를 폭발시키며 독자를 희열의 꼭대기에 올려 놓지만, 그 후로는 바닥을 굴러 다니는 빈병만을 남길 뿐이다.


객관적으로 말하면 데니스 루헤인의 '살인자들의 섬'은 반전 소설로서 아주 훌륭한 작품이다. 마침내 진실이 기다리는 곳에 다다르면 작품 곳곳에 널려 있던 수 많은 복선들이 가시처럼 일어나며 이처럼 명백한 단서를 바보같이 놓치고 지나간 독자의 가슴을 깊숙이 찔러 들어온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다.

번역의 문제는 언제나 외국 소설을 평가하는데 있어 나를 주저하게 만들지만, 어쨌든 이 한마디는 하고 끝내야겠다. 내가 영어로된 원서를 완벽히 이해하고 그 감상을 기가막힌 영어로 쓸 날이 오지 않는 한, 이 소설을 다시 볼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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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패러독스 1
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 여름언덕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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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전에 당신은 우선 비독서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비독서에는 네 가지 형태가 있다. 

첫째는 '책을 전혀 읽지 않은 경우'다. 너무 당연한 얘기여서 심심할 정도다. 

둘째는 '책을 대충 훑어보는 경우'다. 제대로 읽지 않은 책은 읽지 않은 것과 같다는 생각. 역시 충분히 
납득할 만한 얘기다. 

이어지는 세 번째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책 얘기를 귀동냥한 경우'다. 이는 직접적으로 책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이 오로지 그 책에 대해 주워들은 경우를 말한다. 책 대신 서평을 
읽거나 광고, 소개글 등을 접하는 것이 여기에 속한다. 

마지막은 '분명 읽었지만 책의 내용을 잊어 버린 경우'다. 비독서의 네 가지 형태 중에서도 가장 모호하고 억울하다. 그러나 책의 내용을, 심지어 그것을 읽었다는 사실조차 
잊은 경우라면 그것을 읽지 않은 책과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이 책에 따르면 구분할 필요가 전혀 없다. 이것은 명백히 비독서에 해당된다.

책의 저자 피에르 바야르가 이렇게 비독서를 구분해 놓은 이유는 역설적이지만 이것들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물론 '차이가 없다'라는 말은 결코 그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이 책에 대한 담론 형성에 미치는 영향을 두고 하는 말이다. 말이 어려우니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두 남자가 길을 가고 있는데 하늘에서 갑자기 자동차가 떨어진다. 한 남자는 재빨리 몸을 굴려 그것을 '피했다'. 한편 다른 남자는 그 순간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떨어지는 자동차를 '피할 수 있었다'. 어떤가? 두 사람은 전혀 다른 행위를 했지만 그 결과는 완전히 일치하지 않은가? 이 경우 두 행위는 결과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말한 '차이가 없다'라는 것도 이처럼 결과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경우를 의미한다. 

자 여기까지 봐서는 도통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 이 따위 책 읽고 싶지 않아라고 소리치기 일보직전이라는 걸 알지만 당신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라는 간지나는 제목에 '혹'한 순간 이미 무슨 얘긴지 확인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배길 수 없는 마음의 상태가 됐음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니 계속해서 얘기를 이어가 보자. 


 

 


책을 읽지 않았건, 대충 읽었건, 혹은 누군가로부터 들었든 심지어 전혀 책을 읽지 않았든 우리가 어떤 책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때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일련의 인상을 떠올리게 된다. 그건 저자와 관련된 개인적 경험일 수도 있고 책 제목에 대한 단순한 느낌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하루키의 1Q84에 대해 얘기한다고 할 때 실제로 나는 1Q84를 읽어본 적도 서평을 본 적도 
그 내용을 누군가로부터 들은것도 아니지만 1Q84를 보는 순간 조지 오웰의 1984를 떠올릴 것이고 당연히 그 책과 어떤 관계가 있느냐고 물을 수 있다. 

덧붙여 '하루키는 해변의 카프카를 시작으로 완전히 망가졌으며 
그의 소설에는 잡다한 판타지와 야릇한 에로티시즘만이 남아 있을 뿐, 1Q84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전혀 기대할 만한 소설이 아니다'라고 신나게 씹을 수도 있다. 

물론 누군가는 나의 생각이 아주 심각한 편견이라는 사실을 지적할 것이며 보지도 않은 책을 싸구려로 매도해버리는 것을 비윤리적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내가 1Q84를 자세히 읽고, 이 책에 대한 글들을 찾아본 뒤 결국 당신의 비평에 동의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겠는가? 아마도 논쟁은 직장을 잃고 토론은 땅 속에 묻혀 평화롭고 조용한 세상이 도래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걸로 만족하는가? 텍스트란 갑론을박, 끝없는 논쟁을 통해 새로운 해석과 창작의 가능성을 낳는 법이다. 그런데 당신과 내가 어설픈 합의를 보는 순간 이글이글 타오르며 폭발을 준비하던 해석의 다양성이 순식간에 멸종해 버렸다. 그런 다음 그것들은 모두 박제가 되어 아무도 찾지 않는 박물관의 지하창고에 쳐박힌다. 좀 더 올바른 행동을 한답시고 들인 노력이 오히려 텍스트가 가진 무한한 잠재력을 말살시킨 셈이다. 

물론 약간이라도 주의가 깊은 독자라면 분명 내 주장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나는 책을 자세히 읽으면 모든 사람이 하나의 비평에 다다를 것이라는 전제를 사용하고 있지만 이 전제는 조금만 생각해봐도 수 십가지의 반론이 떠오르는 근거없는 주장이다. 하지만 나는 이 이야기가 완전히 쓸모없는 얘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여기엔 우리가 두고두고 되새겨볼만한 의미심장한 얘기가 남아있다. 그것은 바로, 비평의 획일화를 지양하자는 것이다. 

책을 읽든 읽지 않든, 주워 듣고 하는 얘기든 아니면 내용을 잊어버려 횡설수설하든 이 모든 것들이 책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만들어내고 그로인해 비평의 세계가 더더욱 시끄러워질 수 있다면 그 방법이야 어떻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책을 자세히 읽는 것만이 비평의 무대로 들어가는 유일한 입장권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비평은 고도로 단련된 분석행위이며 그것은 단 하나의 진실을 찾아 떠나는 고행이기 때문에 책을 읽지 않은 자, 
대충 읽은 자 따위는 그 여행에 참가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을 말해 주면, 비평이란(=책에 대해 말하는 것) 결코 선생님이 불러주는 정답을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받아쓰기 시험이 아니라는 거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그것의 진위를 따지고 점수를 매기는 일이 아니다. 

비평의 세계에서 가장 의미있는 일은, 수 많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담론들을 비집고 그 사이에 오직 나만의 이야기를 끼워넣는 것이다. 이것은 이 세상의 모든 이야기가 보관되어 있다는 바벨의 도서관에, 영원히 반짝반짝 빛날 당신의 책 한권을 꽂아 두는 일과 같다.  

  

 

이 책은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아는 척'하는 법을 가르쳐 주는 책이 아니라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마음껏 '말해도 되는 이유'를 가르쳐 주는 책이다. 제목만 보고 끌린 사람들은 채 5분이 지나지 않아 책장을 덮을 테지만, 피에르 바야르의 관점에선 당신의 그런 행동 또한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는 걸 명심하라. 심지어 이 책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당신이 다른 곳에 가서 이 책을 신나게 씹을지라도, 저자는 결코 당신을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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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대해 아무거나 생각해 보자. 누군가는 우주에 먼지처럼 박혀 있는 지구에 무좀처럼 돋아나 있는 인간의 7분의 1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얼굴 모양에 대한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혹은 먼지처럼 박혀 있는 지구에 무좀처럼 돋아나 있는 인간의 취향과 미각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심지어 사람따위는 관심 밖. 그대신 이 우주 어딘가에 살고 있을, 갈기 대신 도넛을 달고 다니며 꼬리에선 고압축 플라즈마를 발사, 입에선 냉면 육수를 뿜어내는 목도리 도마뱀 한 마리를 상상할지도 모른다.

말해 두지만 정해진건 없다. 생각 하나하나에 우열을 매겨 점수를 줄 생각도 없다. 그저 살랑살랑 봄바람이 얼굴을 간지르는 이 밤, 입을 헤 벌리고 하늘을 쳐다보며 어떤 말을 하더라도 아무에게도 타박받지 않을 그런 시간을 가져보자는 거다. 그러다 보니 갑자기 이런 얘기를 꺼낼 수도 있다.

잘생긴 개미핥기와 못생긴 사람 중에 무엇으로 태어나고 싶니?

못생긴 사람.

그리고는 '못생긴 사람은 성형 수술로 바뀔 수 있으니까'라고 덧붙인다. 합리적 사고에 미국식 개척정신까지 단단히 갖춘, 그래서 때때로 멍청하다 싶을 정도로 단순한 친구가 한 말이다. 가슴이 답답해질 정도로 재미없는 대답이지만 한국 사회에서 성공할 요건을 두루두루 갖췄다. 친구여, 신의 축복이 영원하기를.

트위터의 글자 수 제한이 140자라는걸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이럴수가!

예전엔 나도 몰랐다! 세상 사람 모두가 한 때는 뭘 모르던 멍청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뭔가 자기보다 모른다고 생각하는 인간을 만나면 가차없이 잔인해 진다.

화려한 삶과 평온한 죽음 중에 무엇이 더 나을까?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는 소문을 도대체 누가 퍼뜨리고 다니는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만나게 되면 죽어본 적이 있느냐고 묻고 싶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런 말을 하고 다닌거라면, 진짜 용서하지 않겠어.

자살은 인간의 실존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가?

아니다. 인간의 실존을 증명할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아무런 설명 없이, 아무런 반론 없이 실존을 증명할 수 있는건 오로지 돈 뿐이다.

침묵은 긍정인가?

누군가는 대답할 가치가 없거나 아무리 말해도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할거라고 생각할 때 침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긍정이라고 여긴다. 그렇게 마음대로 생각해 놓고는 자기 혼자 들떠 신나게 떠든다. 누군가는 끝까지 침묵으로 응대해 보지만 천박한 사람들의 세계에서 그것은 조롱을 위한 명분 밖에 되지 않는다.

물냉면은 냉면의 왕이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시간의 끝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나요?

고민하지 말자. 안달복달 해봐야 인간은 결국 똥으로 변신한다.
언젠가 내 소설에 쓰일 대사다.

이 글은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재미가 없다. 일관된 논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촌철의 맛도 없다. 이런 글을 쓰느니 그냥 이불 속으로 들어가 일찍 잠 드는게 어떨까? 지금 이 순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쳇, 그러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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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없는 사람
커트 보니것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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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되거나 절판되지 않고 살아 남은 커트 보네거트의 번역서 중 유일하게 에세이 한 권 있으니 그게 바로 이 책 '나라없는 사람'이다.

좋은 수필이란 작가의 문제 의식이 소설의 언어로 발화하기 이전의 생생한 감정을 담고 있기 마련이어서 이것을 통해 작가의 생각을 더 쉽게 이해하거나 나아가 동일 작가의 다른 소설들까지 더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다라고 하는건 너무나 평범하고 뻔한 문장이라 커트 보네거트를 기대하는 사람에게 실망감을 안겨줄 수도 있으니 좀 더 커트 보네거트 식으로 말해보자.

75세인지 76세인지 어쨌든 지구에서 가장 멍청하고 폭력적인 동물의 평균 수명을 훌쩍 넘은 탓에 더 이상 좋은 농담도, 좋은 글도 생산할 수 없다고 생각한 노작가가 최후의 역작을 내놓았으니 그 책이 바로 타임퀘이크다. 그런데 이 책을 마지막이라고 선언한 노인네가 2년 후 단편집을 출간하고 거기다 아주 짧은 소설을 한권 덧붙였으며 심지어 그 6년 뒤 에세이까지 한권을 추가했으니, 미국 사람들은 이 책을 A Man Without a Country 라 불렀고 극동 아시아의 토끼모양 땅 덩어리에 살고 있는 옐로 몽키스들은 이를 '나라 없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됐수?
 

 

 

타임퀘이크의 뒷 작품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로 더 이상 좋은 농담을 할 수 없었던 탓인지 나라 없는 사람은 타임퀘이크의 일부를 그대로 차용하고 있는가 하면 이미 한 번쯤 소설에서 언급했던 얘기를 되풀이하는 경향이 있다. 술자리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주사는 테이블 위에 토를 해 놓는 사람이나 소파에 누운채로 오줌을 싸는 사람이나 친구의 뒤통수를 맥주병으로 때려 놓고 덩실 덩실 춤을 추는 사람이 아니라 했던 말을 하고 또 하는 사람이라는데, 되풀이 하는 말이 워낙에 좋은 말이니 대충 좋게 좋게 넘어가 주자. 게다가 이 책을 쓸 때 우리의 커트 보네거트 주니어는 여든 두 살이었지 않은가!

미국이라는 악당의 나라에 이런 사람이 있었다는 건 정말로 축복이다. 아마도 미국이 소돔과 고모라처럼 불에 타 멸망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이같은 의인이 살아남아 후세에 정의를 지키는 법을 가르쳐 줬기 때문일 것이다.

커트 보네거트가 스스로를 나라 없는 사람으로 부른 이유는 그가 미국에서 태어난 미국인이었음에도 결코 미국인처럼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는 전세계인의 사랑을 받았지만 정작 자신의 이웃과 친구들에게는 많은 비난과 야유를 받아야 했다.

미국인들은 세계 각지의 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그토록 증오하는 이유에 대해 좀 더 정확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미국인이 멍청하고 폭력적이기 때문에 싫어하는게 아니라 그들이 거만하기 때문에 미워한다. 커트 보네거트도 떠나버렸으니 앞으로는 누가 이런 사실을 가르쳐 줄지 모르겠다.

커트 보네거트를 좋아하는 친구에게 이런 고민을 털어 놨더니 친구 역시 그런 고민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더니 오래된 번역본들을 절판시켰고 남아있는 몇 권들마저 품절의 벼랑 끝에서 위태로이 떨게 만드는 망할 출판사들을 협박해 재판을 출간하게 만드는 것이 어떠냐고 했다. 나는 좋은 생각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자 친구는 서울 시내 대형 서점 4곳을 동시에 폭파시켜 우리의 생각을 전달하자고 했다. 나는, 필요하다면 충분히 감행할 수 있는 일이라고 대답해줬다.

물론 농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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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을 넘어 민음사 모던 클래식 43
코맥 매카시 지음,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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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어느날 잠에서 깨 늑대를 바라보았다. 늑대는 무리를 지어 눈 밭을 달려 가고 있었다. 눈 덮인 초원에 따뜻한 콧김을 내뿜던 송아지 한 마리가 순식간에 먹이로 변했다. 파리한 달 빛을 반사하는 새하얀 눈 위로 송아지의 새빨간 핏줄기가 뚝뚝 녹아 들어갔다.

순간 우두머리 늑대가 고개를 돌려 소년이 있는 곳을 바라 보았다. 소년은 도랑에 납작이 엎드렸다. 바람이 눈보라를 일으키며 산 기슭을 때렸다. 펄떡 펄떡 뛰는 소년의 심장 소리가 늑대의 귀에까지 들리는 듯 싶었다. 늑대는 곧이어 눈 위에 코를 박고 킁킁 대더니 만찬에 만족한 듯 길게 울음을 내지르고는 소년을 지나쳐 산 위로 달렸다. 곧이어 무리들이 늑대를 따랐다.

소년의 이름은 빌리 파햄이다. 17살 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동생과 함께 목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멕시코에서 넘어온 늑대 한 마리가 목장의 송아지를 잡아 먹었다. 아버지와 빌리는 덫을 쳤으나 늑대는 영리했다.

어느날 빌리는 자신이 늑대의 마음을 알아버린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혔다. 빌리는 모닥불이 타고 남은 시커먼 잿덩이 아래에 커다란 덫을 설치한 뒤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침대에서 잠들었다. 눈을 떴을 땐 아직 여명의 어스름조차 이른 캄캄한 밤이었다. 빌리는 마구간으로 가 말 위에 안장을 얹은 뒤 안장 주머니에 소총을 꽂고 덫을 향해 떠났다. 두 시간 남짓 말을 타고 도착한 곳에서, 빌리는 아몬드 빛 눈동자를 커다랗게 확장시킨 암늑대 한 마리와 눈이 마주쳤다. 늑대는 새끼를 베고 있었다.

소년은 늑대를 멕시코로 되돌려 보내 주겠다고 다짐했다. 소년은 늑대에 재갈을 물리고 밧줄을 묶어 말 뒤에 매단 뒤 국경을 넘어 그렇게, 세상으로 나아갔다.

멕시코에 도착한 빌리는 밀수꾼으로 오해받아 늑대를 빼앗겼다. 늑대는 사슬에 묶여 축제를 떠돌다 투견장으로 끌려가 생사를 건 진지한 싸움에 빠져 들었다. 거의 두 시간, 그 동네의 모든 개들과 사투를 벌인 늑대는 땅바닥에 주저 앉아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소년은 성큼성큼 늑대에게 다가가 피투성이 머리를 향해 소총을 발사했다. 늑대의 가죽을 챙기러 올라온 사람에게 소년은 자신이 갖고 있던 윈체스터 44구경 소총을 줘버리고 늑대의 시체를 가져갔다. 늑대를 엎고 천막을 빠져나가는 소년 앞으로 악당들이 길을 열어 주었다. 소년은 늑대를 산에 묻고 돌을 올려 놓은 뒤 말을 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소년은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 부모와 사라져 버린 부모가 남긴 피투성이 매트리스를 마주했다. 강도들이 산탄총으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날려 버리곤 말들을 훔쳐 달아났다. 살아남은 건 목이 잘려 짖지 못하는 개 한 마리와 동생 보이드 뿐이었다.

빌리는 동생과 함께 또다시, 멕시코로 떠난다. 잃어버린 말들을 찾기 위해. 그러나 말들을 되찾았을 때, 빌리는 동생을 잃었고, 동생의 마지막을 대면하는 순간 말들은 뿔뿔히 흩어져 버렸다.
 

 

 

'국경을 넘어'는 코맥 매카시의 국경 삼부작 중에서도 가장 잔혹하고 우울한 작품이면서 동시에 최고로 아름다운 작품이기도 하다. 소년은 무언가를 되찾기 위해 국경을 넘지만 오히려 돌아오는 건 상실의 아픔 뿐이다. 아버지의 말을 타고 터벅터벅, 말라 비틀어진 초원을 가르지를 때 마다 그 갈라진 틈새 사이로 선과 악이 구분없이 튀어나와 소년의 가슴을 꾹, 움켜쥔다. 이 잔인한 세계가 진실이든 아니든, 중요한건 이 모든게 소년이 살아내야 하는 단 하나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소년은 마침내 이 사실을 깨닫지만 그 고독을 함께 나눌 사람은 이제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빌리는 어째서 이 여행을 시작했을까? 소년은 덫에 걸려 헐떡대는 늑대의 아몬드빛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가 활짝 열리는걸 알아챘다. 소년은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자신이 기어이 그 길을 걷고 말 것이라는 걸,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이 잃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누군가는 세계가 악한거라고 말할 지 모른다. 소년을 가시밭 길로 내몰은 건 이 세계이며, 그것은 칠흑같은 입을 벌리고 있다 이 곳으로 나아가는 인간을 집어삼키는 것 외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세계는 그저 존재할 뿐이다. 거기엔 특별한 의도도 선악도 없다. 세계가 어떤 속삭임으로 인간을 유혹하든 결국 국경을 넘는건, 말을 탄 인간이다. 그 황량한 구분선 위로 발을 내딛을 때 마다 가슴에 섬뜩한 상처가 새겨지는 줄 알면서도 소년은 걷고 또 걸어 비로소 어른이 된다. 
 

 

  <출처: Flickr.com, say.today> 

이 소설은 분명 압도적인 슬픔을 그리고 있지만 문장 하나하나가 외치는 비명은 오히려 침묵에 가까울 정도로 담담하다. 아마도 여기서 오는 아이러니가 더욱 거대한 무게가 되어 읽는 사람의 가슴을 그토록 짓누르고 있는 것이리라.

책을 덮고 나면 이 압박감이 사라질 거라 생각하지만,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균열을 일으킨 마음은 마침내 마지막 문장을 읽는 순간 거친 파열음과 함께 산산조각나 버린다. 그리고 그 안에 웅크리고 있던 차가운 바람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거칠게 휘돌아 나가며 파편들을 이리저리 흩으려 놓는다.

남겨진 시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황량해진 마음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흩어진 파편들을 긁어 모으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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