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정원 - 상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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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정원'을 만난 것은 2007년 겨울, 삼성역의 멀티플렉스 극장에서였다. 나는 이 영화의 원작이 황석영의 소설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리고 감독이 임상수라는 것도 역시 몰랐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내내 도대체 누가 이런 영화를 만든걸까? 하는 감탄어린 의문이 가슴을 맴돌았다. 마침내 크레딧이 올라간 뒤에야 두 사람의 존재를 알아차렸고 나는 그제서야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원래 이 영화를 보고 싶었던 건 내가 아니었다. 나는 이 영화에 대해 전혀 몰랐으니까. 그런데 정작 이 영화를 보고자 했던 사람은 영화관을 나오는 내내 '오래된 정원'을 불편해했다. 친구는 민주화를 위해 온몸을 불살랐고 - '불사르다'는 말이 단순한 은유가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  전쟁같은 데모를 벌여야 했던 청춘들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으며 그 삶을 낭비라고까지 했다. 

나는 이런 얘기를 들으며 사람들로 가득찬 쇼핑몰을 걷고 있었다. 이 세련되고 쿨한 영화가 완전히 망한걸 보면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단지 내 주변의 일 이인에 불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불과 
20년 전만해도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걸어야 했던 이 나라였지만 이데올로기와 정치는 마치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깔끔히 지워져 있었다.  

'오래된 정원'은 황석영의 소설이다. 나는 이 문장 하나만으로도 '오래된 정원'의 소개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왜냐고? 전투화발에 몸이 깨지고 목이 쉬어라 자유를 외치던 세대는 이제 근엄한 정치인이 되거나 사교육계의 스타가 되어 돈과 권력의 노예가 되었다.  

힘 없고 가난할 때는 몰랐지만 높은 자리에 서서 돈을 좀 벌고 보니 세상이 달라 보이더라... 이 세상에 권력과 돈 만큼 강렬한 환각제는 없다. 이런 세상임에도 변함 없이 자신의 '문학을 오롯이 살아낸다면' 그 존재만으로도 이 사회의 귀감이 되는게 아닐까? 이런 작가의 소설이라면 이것저것 따질 필요가 없다. 그 소설 속엔 분명 온 몸으로 시대를 이겨낸 진한 삶의 체취가 담겨 있을 테니까.   

 

 

<전두환은 전범 수준의 악당이었다. 우리 사회는 너무 쉽게  

그 악마를 잊어 버렸다.>

학생 운동가 오현우는 광주항쟁의 주모자로 검거되어 무기 징역이 선고 된다. 잡히기 전 미술 교사 한윤희와 함께 갈뫼에서, 6개월 동안 꿈같은 평화를 누리는데 갈뫼 이전의 오현우의 삶과 이 갈뫼에서의 6개월 그리고 이별 이후 한윤희의 삶이 교차로 진행되는 것이 '오래된 정원'의 주된 서술 방식이다.

특히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하는 서울의 삶과 평화롭기 그지 없는 갈뫼 생활의 교차는 7, 80년대 한국 사회의 폭력성을 잔인하게 드러낼 뿐만 아니라 '저항-현실에의 안주'라는 오현우의 내적 갈등으로 환원되면서 두 주인공의 러브스토리에 아슬아슬한 긴장을 불어넣기도 한다. 반면 이별 이후 한윤희의 삶은 이 두 공간에 대한 비평의 무대로써 소설이 이데올로기에 휘둘리는 것을 막아주는 중심추 역할을 하는데 이런 절묘한 구성은 세 개의 역사를 모두 경험한 자만이 선택할 수 있는 특권이자 일종의 의무가 아니었을까 나는 생각 한다.   

 

 

  <5년 간의 망명 생활, 5년간의 투옥 경험은 오현우의 감옥 생활과  

베를린 장벽 붕괴 현장의 리얼리티로 되살아 난다.>

 

그러나 '오래된 정원'이 갖는 서술의 균형은 갈뫼의 의미를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특히 갈뫼를 '현실에의 안주'를 위한 공간으로 간주할 경우 그곳은 유토피아라기 보다 현실 세계가 파놓은 함정으로써, 오현우의 혁명 의지를 갉아 먹는 해충 같은 장소라고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갈뫼를 하나의 상징으로만 확정할 수는 없다. 특히 황석영은 갈뫼에서의 삶을 매우 서정적으로 그리고 있는데 그 아기자기하면서도 소소한 일상 속에 녹아든 주인공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과연 갈뫼를 해충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망설임이 드는건 사실이다.

또 갈뫼를 뛰쳐나간 오현우는 결국 감옥에 갇혀 17년간 인생을 낭비했다. 오현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여전히 그대로 였으며 자유를 쟁취한 듯 보이는 오늘날도 실상 군부독재의 군화발이 자본독재의 구두발로 대체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그 구두발은 더욱 강해지고 은밀해졌지 않은가! '너희들이 한게 뭐 있어!'라고 외치는 윤희의 대사는 그렇기 때문에 가슴을 아리는 비판으로 다가온다. 이런 점에서 갈뫼는 단지 가정을 꾸려 평범한 일상을 만들어가고자 했던 두 주인공의 안식처, 때 묻은 현실과 대립하는 순수한 장소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출소 후 갈뫼에서 안식을 찾아가는 오현우를 보고 있으면, 어딘지 모르게 체념한 듯한 분위기, 한 줌의 승리도 얻지 못한채 생명의 에너지를 고갈한 힘없는 후회가 느껴진다. 갈뫼를 다시 찾아 추억을 더듬으면서 오현우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혹시 '그 모든 것들은 부질없는 짓이었다'고 고백하려던 것은 아니었을까?    

나는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황석영 만큼은 변하지 않을거라 믿는다. 대한민국이라는, 괴물처럼 변태하는 역사 속에서도 언제나 우뚝 선 거암(巨岩)으로 내 기억속에 남아있기를, 나는 바란다. 하지만 인간이란 결국 

시간이라는 바다 앞에 쌓여 있는 조약돌같은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모난 것이라도 그 거센 물결에 닳아버려 언젠가는 맨들맨들한 조약돌로 축적되는 것. 만약 이것을 역사라고 부른다면 그 안에서 살아가는 오현우도 황석영도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그 조약돌이 되고마는 현실을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에필로그 

황석영은 '오래된 정원'의 영화화가 결정된 후 임상수와 인터뷰를 가졌다. 길지 않은 대화임에도 소설을 이해할 수 있는 많은 단서를 얻을 수 있는 인터뷰였는데 특히 이런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그건(오래된 정원) 감옥에서 나와서 얻은 자유의 공간이야. 시대가 바뀌었으니 이제 맘놓고 러브스토리도 쓸 수 있게 된 거지. 옛날엔 우리끼리 복장도 서로 단속했어. 이 새끼 왜 이렇게 야하게 입어 이러면서.(웃음) 예전엔 사랑할 자유도 억압됐고, 그러니까 러브스토리를 쓸 자유도 없었던 거지. 망명 기간이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좋은 시간이었어요. 나 자신을 돌아보고 내 한계, 한반도의 한계를 봤으니까.

어떠한 사상이라도 억압과 지배의 수단이 되는 순간 그 순수한 가치를 잃고 만다. 좌우의 이데올로기 또한 마찬가지다. 작가의 말대로 어쨌든 시대는 바뀌었다. 황석영은 '오래된 정원'의 완성을 통해 일종의 숨고르기를 마친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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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스 : 정재승 + 진중권 - 무한상상력을 위한 생각의 합체 크로스 1
정재승, 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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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승과 진중권은 모두 글깨나 쓰는 사람들이다. 글을 잘쓰냐 못쓰냐는 여러가지로 따져 볼 수 있겠지만 특히 쉽게 읽힌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글은 후한 평가를 받곤 한다.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와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가 각각 제 분야의 까다로운 전문 지식을 다루고 있음에도 그 특유의 가독성으로 마음을 사로잡았던 기억이, 나는 아직도 생생하다.

이런 면에서 이 책의 기획 의도는 명백하다. 인터넷의 발달과 복잡한 정치 상황, 대형 스포츠 행사의 개최로 촉발된 다양한 문화 현상의 빅뱅. 이 전례없는 사태에 대한 해석이야 말로 지금 우리가 원하는 스토리 텔링인 것이다.   

 

<대중 문화의 알파와 오메가...?>

그러나 대중 문화 비평이란 전혀 새로운게 아니다. 짧게는 발터 벤야민과 아도르노로부터 길게는 그 옛날 고대 벽화에 '요즘 애들은 참 버릇이 없어'라는 낙서가 등장했을 때 부터 지속되어 온 것이 바로 이 대중 문화 비평이다. 잔뼈가 굵은 출판 업계가 이런 사실을 모를리 없다.  

그리하여 미학자이자 대중 문화 비평가이자 전직 교수인 진중권과 물리학을 전공했고 이제는 뇌과학을 연구중인 베스트셀러 과학자가 링 위에 올라선다. 인문학 vs 과학! 이건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 얘기다. 이제 관객은 두 사람의 주먹이 제대로 충돌해 주기만을 바라며 두근대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긴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펀치는 당연하게도 무척 대중적이다. 스타벅스에서 생수, 레고에서 애플, 셀카에서 개그콘서트까지 의, 식, 주, 락! 생활 세계를 총망라한 다양한 문화 현상들은 미학자가 날리는 잽이 되고 과학자가 휘두르는 훅이 된다.   

 

<우리 시대의 Icon>

그런데 가만히 보고 있으면 이 경기장은 애초에 미학자에게 유리하게 지어진 것처럼 보인다.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학(學)을 추구하는 인문학은 그 주제가 어떤 것이라 하더라도 나름의 답을 제시할 수 있다. 게다가 진중권은 오랜 기간 동안 대중 문화와 함께하고 그것을 연구해온 사람아닌가. 그에게 이런 일은 너무나 익숙한 작업이다.

그러나 과학자는 그렇지 못했다. 21개의 소재 중 물리학과 뇌과학의 힘을 빌려 논술할 만한 것은 거의 없다. 정재승의 글이 현상의 뿌리를 파고드는 논문이 아니라 그저 담백한 에세이가 되고 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주 창조론이나 생명의 기원, 인간 복제와 윤리학의 문제 등 과학과 인간의 가치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이슈를 두고 두 사람의 대담이 진행됐더라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이 두고두고 남는다. 이런 면에서 '크로스'의 기획 의도는 그 자체가 한계이기도 했다.

따라서 웅진지식하우스는 새로운 경기장을 지어야 한다. 이번에는 누구에게도 기울어지지 않은 - 아니 정재승 쪽으로 살짝 기울어도 괜찮다 - 평평한 경기장을 만들어 주길 바란다. 그리고 그 위에서 미학자 vs 과학자의 진정한 종합 격투기가 벌어진다면, 합체도 충돌도 미완성인 이 책의 허물쯤은 적당히 덮어둘 의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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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사원 시절 선배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이 '회사 생활 해보니 어떠냐?'는 것이었다. 대답은 대개 '잘 모르겠다'거나 '그냥 그렇다' 정도였던 것 같다. 나는 이런 대답을 하면서 어쩜 이렇게 감상이 없을까 하다가도 이 질문을 고대로 선배에게 돌려준다면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궁금했다. 

아마 특별한 얘기가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상'이라는게 원래 그런거다. 다람쥐 쳇바퀴 돌기. 
사람의 뇌는 가장 많이 한 일을 기억하는게 아니라 가장 특별한 일을 기억한다고 한다. 당시이나 나나 똑같은 일상을 살아가는 처지에 뭔가 특별한 얘기가 있을리 없지 않은가. 이런 질문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평소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대개 '잘 모르겠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요즘 신입 사원들과 같이 일을 하면서 내가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 '회사 생활 어떠냐?'는 것이다. 말하면서도 참 난감하다. 내가 왜 이런 질문을 하고 있나. 돌아오는 대답도 1년 전의 나와 마찬가지로 뾰족하지 않다. 어쩌면 이 말은 신입 사원과 독대하는데서 오는 침묵, 그 난감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고안된 선배들의 필살기가 아닐까 한다.




<판화가 Maurits Cornelis Escher 作>



만약 그렇다면 이 기술은 Freshmen에서 Sophomore로 레벨업하는 순간 패시브 스킬로 습득되는 능력일 것이다. 따로 노력하지 않아도 지난 1년간 수 많은 선배들로 부터 들어온 질문이 최면이 되어 Freshmen을 만나는 순간 저절로 발동하는 능력. 이런 구태의연한 대물림을 고급스럽게 '전통'이라고 부르는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런데 난감한 일은 하나 더 있다. 후배들의 입에서 대답하기 곤란한 얘기가 튀어 나왔을 때다. 예를들면 '우리가 하는 일은 생각만큼 창의적이지 않다'거나 '우리의 작업에 이런저런 문제가 있다'거나 하는 얘기들 말이다. 

이런 말을 들었을 땐 선배로서 뭔가 납득이 갈만한 대답을 해줘야 하는데 결국 한다는 얘기는 '조직은 원래 다 그런거다'고 얼버무리는 것 뿐이다. 물론 조금 잰체 하는 사람의 경우 '당신은 잘 모르겠지만'
이라고 운을 뗀 뒤 '정말로 모르겠는' 얘기를 주구장창 늘어놓기도 하고 최악의 경우 '너도 내 나이 되봐' 또는 '당신도 내 위치 되보면'하는 가히 얼토당토 않는 결론을 내려 버리는 경우까지 있다. 선배라고 언제나 답을 갖고 사는건 아니다. 



 

                            <clean shave face. 1moretime 作>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사고 구조를(이하 Frame) 갖고 있다. 때문에 새로운 환경에 적응 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Frame과 적응해야할 환경의(조직) Frame이 충돌하는 것은 당연하다. 위에서 예를 든 신입사원들의 의문들은 이 두개의 Frame이 강렬히 충돌했을 때 터져나오는 것이다. 의문이 많이 생길 수록 Frame은 아직 굳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의문'이란걸 품어본게 언제인지 가물가물하다면당신은 이미 '닳은' 사람이다. 당신의 Frame은 이미 온순해졌고 말랑말랑해졌지만 Freshmen에게서 보이는 유연성과는 거리가 멀다. 당신이 가진 말랑함은 탄력이 아니라 흐물함이다.

어리석은 후배들을 깨우쳐 준답시고 근사하게 연설해 보지만 이미 나는 조직의 논리에 포섭당한 좀비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매너리즘과 순응을 '경험'과 '지식'이라는 단어로 포장하고 있는 걸지도.

선배란 그저 뒷 사람보다 조금 먼저 답을 구하러 나섰을 뿐이지 이미 모든 해답을 구한 사람은 아니다. 그러니 선배들도 틀릴 수 있다. 나는 아직 한 개의 답도 찾지 못한 사람이지만 적어도 '끊임없이 고민하는 선배는 되야 겠다'고 생각하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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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제 서재를 찾아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제가 티스토리에 새로운 블로그를 만들게 됐습니다. 지난 여름 휴가 동안 글들은 모두 옮겨 놓은 상태고 오픈한지는 벌써 2주일 정도 되가네요.  

아무래도 알라딘 서재는 '책방'에서 운영하는 블로그다 보니 제가 다루고자 하는 IT분야나 User Interface에 대한 글은 쉽게 쓸 수 없더라고요. 티스토리로 옮긴 만큼 좀더 자유롭고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글쓰기를 시도할 생각입니다.  

물론 알라딘 서재도 계속해서 유지할 생각이고요 이 곳은 주로 책과 정치, 사회 등 인문학적인 주제만을 다룰 예정입니다.   

티스토리 쪽은 이제 새로 시작한 블로그라 아직 방문자 수는 바닥입니다. 즐겨찾기와 서재를 찾는 알라딘 유저 등을 통해 비교적 안정적인 방문자 수를 올렸던 이곳 서재와는 좀 더 척박한 환경이지만 스스로에게 보다 객관적인 평가가 필요하다 여겨 어렵게 옮기게 됐습니다.  

어쨌든 글쓰기는 하루도 빼먹지 않고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2039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겠다는 다짐도 변함 없습니다. 앞으로도 쭉 열심히 하겠습니다. 지금처럼만 봐주신다면 더 바랄게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www.wiredhusky.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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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 전3권 세트 - 한국만화대표선
박흥용 지음 / 바다그림판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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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ck(벡, 해롤드 사쿠이시 작)에 대한 글에서 썼듯이 만화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각을 오로지 시각을 통해서만 전달하는 매체이다. 그러므로 만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림'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기린의 이름은 기린이다 라고 하는 것만큼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세상이란 머리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참 많아서 당연한 일이 당연하지 않게 되고 거의 예상했던 일이 보란듯이 틀어지고 마는 일이 빈번히 나타나곤 한다. 감정 이입이 쉽지 않은 그림임에도 그 글을 읽는데 흠뻑 빠져들고만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독서 경험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영화에선 거의 나타나지 않지만 원작은 매우 서정적인 작품이다. 그것은 영화가 주로 이몽학-황처사(혹은 견자)-백지의 피상적인 대립 구조에 근거를 둔 반면 원작은 견자의 내면에 더 집중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준익의 마음을 사로 잡은 것도 바로 견자의 내면. 시대 자체보다는 그 안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한 '개인'의 애수였을 텐데 이는 이준익의 이야기들이 언제나 역사 속에 자리잡고 있음에도 시대보단 개인의 정서를 그리는데 공을 들인 전례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이준익이 '왕의 남자'만큼 잘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했다.

그러나 원작의 글은 너무나 오묘했고 차분했다. 그것은 푹푹 고아 삶아내는 사골국처럼 차분히 앉아 뜸을 들이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것들이었다. 2시간 남짓의 시간에 압축하기엔 글의 무게는 너무나 무거웠고 그 의미는 너무나 거대했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무대는 조선의 선조 시대. 바야흐로 임진왜란의 전운이 감돌고 동서인의 당쟁이 극에 달했으며 정여립이 반란하는 등 유사이래 그보다 더한 폐해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시기였다.  

주인공은 한견자(犬子)라는 인물로 본명이 한견주(堅柱)요 또 서자 출신이었다. 견자는 뛰어난 침술가요 전설적 검객인 봉사 황정학을 만나 그를 스승으로 삼게 되는데 이 만남이 의미하는 바가 또 오묘하다.

견자는 신분에 대한 울분으로 사회에 의미없는 분노를 표출할 뿐 마땅히 나아가야 할 길을 찾지 못하는 눈 뜬 장님이다. 반면 봉사임에도 마치 구르미 달을 버서나듯 태생의 저주를 훌훌 털어버린 황정학은 진정한 자유인이요 또 '눈 뜬' 장님이다. 이 눈 뜬 장님 둘이 만나니 비록 '눈 뜬'의 의미는 서로 다를지언정 두 사람의 마음까지 다르진 않았다.  

황정학은 눈먼 병신으로 천대 받았던 경험을 기억하기에 견자의 울분을 이해하고 견자는 황정학의 초월적 능력을 보고 자신의 깨부셔야 할 것은 부패한 나라, 사회가 아닌 바로 자기 자신임을 깨닫는다.

그래서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견자의 성장 만화가 된다. 역사의 소용돌이를 배경으로 스펙타클하게 전개되는 이야기가 아닌 까닭에 만화는 여유가 있다. 명대사들도 견자와 황정학이 나누는 한담 속에 드러나고 그것은 은근히 스며드는 서정시가 되었다가 곧 가슴 전체를 울리는 소리로 퍼져나간다. 영화가 원작을 쫓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고작 팔천원을 내고 감동과 재미와 메시지까지 남겨 가려는 관객들에게 영화는 어느 한 곳에도 집중하지 못한채 조바심 내는 모습만을 보여준다. 대중 예술이란 이렇듯 쉬워 보이면서도 결코 쉽지가 않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을 삼백원짜리 대여점에서 만나지 않은 건 참 다행이다. 만화가 책장 안에서, 위대한 문학과 나란히 호흡할 수 있다고 믿기에 나는 이 세 권의 만화를 나의 서재에 꽂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림보다 글이 좋은 만화, 그래서 더 오롯이 기억되는 작품.

찌는듯 사람을 볶아대는 이 더위가 마치 견자와 황정학을 괴롭혔던 사회의 굴레처럼 느껴지기에 이 밤, 웬지모를 절절함이 가슴 속에 더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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