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제1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백온유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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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일본 소설을 읽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한국에서 살면서 한국의 정서를 잘 알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 달에 1권 정도는 한국소설을 읽자는 마음으로 매달 한국 소설을 결제합니다. 문제라면 한국소설을 워낙 읽지 않아서 어떤 책을 읽으면 좋을지 가늠이 안 됩니다. 그래서 잡지도 읽어보고 SNS도 검색합니다. 그러다 매년 출간되는 <젊은작가상 수상 작품집>을 알게 됩니다. 현대와 밀접한 세계관을 지니고 있어서 굉장히 흥미롭더군요. 그 뒤로 매년 읽고 있습니다.

 

<2025 1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는 총 7편의 소설이 수록되어 있고, 소설마다 평론이 실려 있습니다. 소설을 읽으면서 감정에 몰두해버리고는 하는데 평론이 실려 있어서 객관적인 분석을 읽을 수 있어서 좋습니다. 모든 소설이 제 감정을 툭툭 치지만 가장 큰 한 방을 먹인 소설은 <바우어의 정원>입니다. 따라서 이 감상문에서는 <바우어의 정원>을 다루고자 합니다.

 

은화는 배우입니다. 배우 경력이 단절된 배우입니다. 다시 배우를 시작하려고 오디션을 보러 갑니다. 그곳에서 과거 같이 드라마 치료 워크숍에서 알게 된 동료를 만납니다. 은화와 동료는 내담자의 보조 자아를 연기합니다. 보조 자아에게는 가이드라인이 있습니다. 내담자가 어색해 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이끌어내는 가이드라인입니다. 보조 자아는 처음에는 가이드라인에 맞추어서 이야기합니다. 치료가 진행되면서 분위기에 익숙해진 내담자가 자신의 마음을 드러냅니다. 그 때는 가이드라인을 벗어나서 내담자의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말을 해야 합니다. 순발력과 연기력을 필요로 하는 대목입니다. 감정을 격렬하게 호소하는 내담자 앞에서 은화가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은화가 보조 자아는 잘못했다고 빌고 변명하는 역할이었다고 회상하는 이유일 것입니다.(68) 그 이후, 내담자가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은화는 모릅니다. 다만, 추측해 볼 여지는 있습니다. 왜냐하면 은화도 내담자처럼 재우고 있는 보조 자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은화는 보조 자아가 깨어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떱니다. 은화에게 보조 자아는 일종의 부채(負債)입니다. 스스로 과거의 행동이 잘못이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스스로 그 행동의 원동력이 대상에 대한 분노라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이 그렇게 했다는 사실과 불편함을 외면합니다. 정림과 만났을 때 부채를 떠올리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기억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지금까지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보조 자아로서 심연에 잠들어 있을 뿐입니다. 앞으로도 마음에 새긴 채로 보조 자아가 깨어나지 않도록 주의하며 같은 잘못을 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 그것을 구원처럼 여기며 살아왔기에 떠오른 셈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같은 잘못을 하지 않는 자세는 필요합니다. 그런데 보조 자아가 움직이지 않으면 동일한 잘못을 하지 않을까요? 보조 자아에게도 발언 기회를 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보조 자아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보조 자아도 스트레스를 느낍니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분노로 변화합니다. 분노는 동일한 잘못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잊게 합니다. 대상만 바뀌고 같은 잘못을 저지를 확률이 높습니다. 이런 상황을 막으려면 보조 자아를 어르고 달래야 합니다. 네가 기억하는 서사에서 이 부분만 주의하면 돼. 잘못을 계속 떠올리며 같은 잘못을 하지 않도록 노력하면 다시 용서를 구할 기회를 얻을 수 있어. 그러니까 속죄하며 살아가면 돼. 가끔 네가 숨쉬기 힘들면 이야기를 들어줄게. 지금처럼 내게 신호를 줘. 보조 자아를 무작정 재우려 하지 않고, 공감을 해 주며 차분해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보조 자아에게 자신도 같이 살아가는 동료라는 인식만 심어줘도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습니다. 다시 심연에 돌려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보조 자아의 신호를, 반응을 무시하지 마세요. 모든 것이 높게 쌓이거나 깊이 새겨지면 폭발합니다. 폭발하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그러기 전에<아티스트 웨이(줄리아 카메로, 경당)>에 소개된 아티스트 데이트도 하나의 방법으로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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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불평등 - 시간의 자유는 어떻게 특권이 되었나
가이 스탠딩 지음, 안효상 옮김 / 창비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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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소셜미디어에서 <시간불평등>이라는 제목을 봤습니다. 신선했습니다. 과거에 자기계발서를 많이 읽었습니다. 주로 에세이 형식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책에서 자주 접했던 문장이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져 있다라는 문장이었습니다. 누구에게나 하루는 24시간이 주어져 있으므로 다른 이들보다 배로 노력하며 계발을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런 내용을 자주 읽다 보니 잠을 많이 자는 건가, 너무 쉬려고만 하나 생각하며 노동 이외에 꿈을 이루기 위한 무엇을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늘 피곤했고, 잠시 쉬는 틈에는 불안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불평등하다니! 지금까지 믿어온 명제를 흔들리게 해서 읽었습니다.

 

책에서는 노동과 일을 구분하여 이야기한다고 생각합니다. 책을 끝까지 읽었는데도 노동과 일을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이해한 선에서 노동과 일을 다음과 같이 구분하려고 합니다. 노동은 살아가기 위한 경제적 기반을 다지기 위한 것입니다. 일은 경제적 구조를 벗어나 자신을 위해, 자신의 공동체를 위해 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해한 한도 내에서는 노동의 동기는 기본적 생활 유지이고, 일의 동기는 자발적 마음입니다. 그 비중은 엇비슷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시스템 안에서 더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쪽은 노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자발적이라는 표현입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하고 싶은 무엇을 발견해서 도전하라고 교육받습니다. 자발적 요소를 강조하는 교육입니다. 그런데 자발적인 무엇이 경제순환에 도움이 되지 않을 때, ‘게으르고’ ‘국가로부터 공짜로 얻어내려 한다.’는 말을 들을 가능성이 높습니다.(132) 사회에 무의미한 사람이라고 낙인을 찍는 셈입니다. 자발적인 일보다 경제순환에 도움이 되는 노동을 해야만 하는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발적인 무엇을 기본적 생활을 위한 노동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자연스럽게 노동과 일의 경계가 허물어집니다. 노동과 일이 같다는 공식이 성립되는 셈이지요. 이 공식을 성립할 수 있을 때까지 사회는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사회는 이미 돈을 매개로 한 경제순환이 기본적 생활을 위한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개인이 돈을 벌고 쓰면서 생활을 유지하는 구조입니다. 이 순환이 잘 돌아가는 사회를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그 지표를 위해 복지제도를 마련하겠지요. 다만, 그 제도에서 개인의 일은 철저히 배제됩니다. 진짜 그 일을 하고 싶었다면 기본적 생활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진작 행동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 일을 절실히 원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그래서 자발적 마음과 상관없이 경제순환에 도움이 되는 노동을 하라는 폭력이 되기도 합니다. 게다가 시간은 노동을 통해 일을 실현할 수 있을 때까지 건강을 유지해 주지 않습니다. 시간제한이 있는 셈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쉽게 일을 포기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사회는 한 주에 5일을, 하루 8시간 이상을 노동에 사용해야 하는 구조입니다. 어떻게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할 수 있을까요? 잠을 줄여야 할까요? 아니면 휴식을 줄여야 할까요? 그렇게 하면 노동에 차질이 생기지 않을까요? 사회는 그렇게 하면 너무 힘드니까 네 일을 줄이면 된다고 강요하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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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근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하빌리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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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생계를 위해 임시 교사로 일을 합니다. 뚜렷한 교육 철학도 없고 학생들에 대한 애정도 없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주인공의 시각으로 바라본 교실의 풍경은 몹시 건조합니다. 주인공은 학교 내에서 벌어지는 일을 서술할 뿐 감정 묘사는 전혀 하지 않습니다. 관찰하면서 이상한 점을 발견해도 학교는 원래 그런 곳이라며 그냥 넘어갑니다. 다만 교사라는 입장에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에는 관여합니다. 교사의 죽음, 지갑 도난 발생 같은 일입니다. 보통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면 통쾌하거나 안도감이 드는데, 이 소설은 찜찜합니다. 무미건조한 주인공의 한 마디가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학교는 세상의 축소판이다. 흔하게 쓰이는 비유입니다. 왜 이런 말이 나왔을까요? 사회의 어른들의 역할을, 교실의 학생들이 모방하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은 어른을 모방하면서 사회에서 자신이 맡을 역할을 배워 나갑니다. 문제는 학생들이 어른의 잘못된 행동을 별 생각 없이 따라할 때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행동을 하는 학생들을 어른이 꾸짖으면 의문을 드러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른이 자신과 똑같은 행동을 해도 처벌을 제대로 받지 않는데 왜 학생은 벌을 받나요?’ 이 질문을 받으면 어른은 말문이 막힙니다. 세상에는 선을 지키지 않는 어른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어른들도 분명 학창시절에 선을 배웠습니다. 선을 넘지 않고 사는 삶이 올바른 삶이라는 지식을 배웠습니다. 어른들을 관찰하며 무엇이 올바른 행동이고 올바르지 않은 행동인지 배웠습니다. 그런데 왜 선을 넘는 어른이 생기는 걸까요? 바로 어른들도 현재의 학생들과 같은 의문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어른이 자신과 똑같은 행동을 해도 처벌을 제대로 받지 않는데 왜 학생은 벌을 받나요?’ 어쩌면 학생은 어른의 행동을 관찰하며 자신의 행동이 어디까지 허용되는지 가늠하는 척도로 삼을지도 모릅니다. ‘저렇게 되고 싶지 않아.’라고 다짐하는 척도인 셈이지요. 그런데 선을 넘은 어른이 제대로 처벌을 받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학생은 어른이 자신에게 가르치는 교육 도덕, 윤리, 사회 등- 을 웃기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현재의 어른이 과거 학생시절에 이렇게 생각하며 교육을 받았다고 생각해 보세요. 당연히 배움을 실천하지 않는 어른으로 성장한 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 과거나 지금이나 어른의 사회와 학생의 사회를 비교했을 때 큰 차이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언제부터 교육이라는 시스템이 생계를 위한 직업을 갖추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을까요? 자신이 습득한 지식을 토대로 행동양식을 실천해서 더 나은 사회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어쩌면 생계를 꾸리기에 바빠서 자신의 실천의 가치를 낮추어 보는 사람이 많은 사회로 변했을지도 모릅니다. 나 한 명 실천하고 바뀌는 게 없다고 좌절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선을 실천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학생들이 본보기로 삼을 수 있는 어른이 더 많아집니다. 우리는 선순환을 그릴 수 있는 구성원입니다. 주인공 역시 그럴 수 있는 어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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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착각 - 뇌는 어떻게 인간의 정체성을 발명하는가
그레고리 번스 지음, 홍우진 옮김 / 흐름출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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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구성을 아시나요? 너무 어렸을 때 배워서 희미할 수도 있지만 기승전결을 떠올리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소설 속 단락마다 번호를 매기고 중심 내용을 적습니다. 그리고 몇 번부터 몇 번까지가 기승전결 중 무엇에 해당하는지 묶습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소설의 내용을 요약합니다. 요약본에는 소설 전체를 뒤흔들지 못하는 캐릭터들은 등장하지 못합니다. 주인공, 주인공과 밀접한 관계인 인물, 주인공과 대척하는 인물 등이 주를 이루지요. 왠지 평범한 인물들의 힘을 지우는 느낌이 들지 않나요? 반발심에 주인공뿐만 아니라 환경을 구성하는 인물까지도 선명하게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지지와 반대에 따라 주인공의 앞날이 바뀌기도 하니까요.

 

<나라는 착각>은 이 바람이 얼마나 이루기 어려운지 말합니다. 뇌는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선명하게 기억하지 않습니다. 압축해서 기억합니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요소를 단편적으로 기억합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어떤 의견을 내고 찬성했는지 기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찬성 의견을 생각하기까지의 과정과 원인을 선명히 떠올리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현상은 소설의 요약본을 적는 과정과 비슷해 보입니다. 중심인물(뇌가 생각하는 중심인물은 자신)을 세우고 중심인물의 언행에 집중합니다. 중심인물의 변화에 집중합니다. 중심인물과 밀접한 배경을 상세히 묘사하지만, 그렇지 못한 배경을 단순화합니다.

 

, 그렇다면 중요도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책에서는 그 기준을 사람이 최초로 접한 서사로 정의합니다. 새로운 이야기를 들으면 자신이 최초로 접한 서사에 요소들을 끼워 맞춥니다. 만약 최초의 서사에 적용할 수 없는 요소는 버리거나 요소를 왜곡해서 기억합니다. 사람마다 최초로 접한 서사는 다릅니다. 그래서 같은 현상을 두고도 사람마다 해석이 다릅니다. 이 지점에서 의문이 생깁니다. 최초로 접한 서사에서 최초는 어느 시기를 말하는 걸까요?

 

태어난 직후부터 겪는 모든 감각을 말할까요? 아니면 듣기, 말하기, 읽기를 수행할 수 있을 때부터일까요? 저는 태어난 직후부터라고 생각합니다. 표현할 방법이 우는 방법뿐이라고 해서 느끼지 못하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환경이 자신에게 우호적인지 비우호적인지 느낄 수 있습니다. 들려오는 소리가 즐거운지 험악한지 알아챌 수 있습니다. 그 느낌이 자신의 존재가 부정되는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 최초의 서사로 자리를 잡습니다. 자신의 존재감이 최초의 서사가 되는 셈이지요. 태어난 직후부터 사람들은 다른 서사 앞에 놓입니다. 사회인이 되어가면서 겪게 되는 일들을 최초의 서사에 어울리게 기억하는 것입니다.

 

개인조차도 최초의 서사와 어울리게 상황을 해석하고 적용하려고 합니다. 그런 개인이 모인 집단 역시 서사를 형성하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집단이 올바로 나아갈 수 있도록 구성원은 대표자를 뽑습니다. 집단을 이끌 권력을 쥐어주는 셈입니다. 당연히

대표자와 구성원의 서사 차이가 생기기도 합니다. 이 때, 대표자가 어떻게 서사를 완성시킬지가 포인트입니다. 구성원이 형성하려고 하는 서사를 대표자가 탄압할지 경청할지에 따라 집단의 양상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대표자와 구성원 간의 선을 지키는 행위이고, 하나는 그렇지 않은 행위입니다.

 

만약 대표자가 선을 넘는다면 구성원은 어떻게 할까요? 그냥 무기력하게 물러설까요? 아닙니다. 자신의 서사를 이루기 위해 반발하겠지요. 권력이 없는 구성원이 모여서 대표자와 맞먹을 수 있는 또 하나의 권력을 형성합니다. 평범한 구성원이 얼마나 위대한지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한편으로는 이런 순간에만 평범한 구성원에 주목하는 시스템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집단은 평소 구성원 개인의 서사를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구성원의 서사를 집단의 이익을 위해 당연히 필요한 과정이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집단의 이익이 무너지려고 할 때, 구성원에 호소합니다. 집단이 무너지면 개인의 서사가 무너진다고. 구성원은 생각합니다. 집단이 살아난다고 내 서사가 살아날 것 같지는 않지만, 서사를 주장할 수 있는 최소한의 선을 지키고 싶어서 도우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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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디자인해 드립니다
박현경 지음 / 선스토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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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의상, 공업 제품, 건축 따위 실용적인 목적을 가진 조형 작품의 설계나 도안.

(출처: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디자인의 정의는 위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꿈을 디자인한다는 말에서 꿈은 실용적인 무엇입니다. 실용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준비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28편의 소설에는 사람들이 저마다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꿈을 발견하는 과정이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단순히 상상에 머물지 않고 실천할 수 있는 실용적이고 다양한 꿈을 같이 꿀 수 있습니다.

 

가장 주목한 작품은 <바베트 여사의 식탁> <느낌>입니다. 2편의 소설을 대표하는 단어는 불확실입니다. 2편의 소설에는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사회 속에 스며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도 사회 속에서 자리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살아가기 위해 적응하려고 노력합니다. 앞이 보이지 않아서 불확실한 현재가 확실한 미래로 이어지도록 선택하고 나아갑니다. 앞이 불확실해도 나아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스스로 선택해서 행동합니다. 그러나 이 순간이 과거로 바뀌지 않으면 결과를 알 수 없습니다. 현재 상황에서 미래는 늘 불확실한 값입니다. 고민과 걱정 같은 불확실한 감정을 느끼는 게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애초에 꿈꿨던 곳에 잘 도달했는지 확신하지 못합니다. 선택의 순간마다 꿈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을 선택했다고 믿습니다. 꿈까지 돌아서 가는 선택일지도 모르지만 차근차근 꿈에 도달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과연 이 믿음이 올바른지 알 수 없어서 불안합니다. 불확실로 이루어진 미래를 걷는 셈이 됩니다.

 

그래도 그 믿음을 지나치게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과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흔적이 우리를 도와줄 테니까요. 분명 과거의 환경이 다르다고 해도, 과거의 자신의 마음과 다르다고 해도 힌트는 숨어 있습니다. 물론 과거의 흔적을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힌트를 현재 상황에 맞게 응용하며 앞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무언가를 배울 때 응용력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는 삶에 응용력이 필요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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