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 나는 무엇이고 왜 존재하며 어디로 가는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2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러분은 혹시 방송 <알쓸신잡>을 아시나요? 재미있게 봤던 프로그램이라서 지금도 가끔 VOD로 볼 때가 있습니다. 지금은 출연진이 익숙하지만, 처음 봤을 때는 MC를 빼고는 다 생소한 분들이었어요. 과연 재미있게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인지 반신반의하며 봤습니다. 생각보다 출연진의 입담이 좋아서 흥미로웠습니다. 방송의 히트를 계기로 출연진의 저서도 많이 출간되었지만 사서 읽지는 않았습니다. 방송을 볼 때마다 출연진의 전문성이 매우 높게 느껴졌고, 그런 사람이 쓴 책을 읽은들 이해도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이 있었거든요.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이하 <문과>)도 그런 책이었습니다. 저자에 대한 친근감으로 장바구니에 넣었다가 늘 삭제하는 책이었습니다. 인문학 이야기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데, 거기에 과학을 더하면 절대 이해하지 못할 책이라는 확신과 함께.

 

그러던 어느 날, <서울리뷰오브북스> 11호에 <문과>의 서평이 실렸습니다. 그 서평이 이 책을 구매하게 만들었습니다. 교양 심리학 도서를 읽다가 뇌과학 분야의 책도 조금씩 건드리고 있었기 때문에 흥미로운 대목을 발견했지요. 저는 뇌과학 분야에서 머물고 있는데, 작가님은 뇌과학 분야에서 생물학 분야로 지적 이동을 하셨더라고요. 왜 그렇게 됐을지 궁금했고, 결국 읽었고, 감상문을 쓰고 있습니다.

 

작가님은 자신을 운명적 문과로 지칭합니다. 수학을 못해서 문과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면서요. 그러나 작가님과 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작가님은 물량공세를 펼치면 수학 문제를 어느 정도 풀 수 있는 이해력이 있었지만, 저는 그것조차도 없었습니다. 아무리 친절하게 설명을 해 줘도 바로 받아먹지 못하는 사람이었으니 문과 쪽에서도 딱히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문과>를 읽으면서 그 사실을 더 깊이 느꼈고, 세상에는 공부할 게 이렇게 많다는 생각을 하며 책을 덮었습니다. 인문학 이야기도 과학 이야기도 어렵지만 그래도 한 마리의 생선을 건져 올리기는 했습니다. 새끼라서 바로 방생을 해 줘야 할 것 같지만요.

 

이 책을 읽고 화학에 대한 편견을 바로잡을 수 있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다시 잘 때까지 화학제품을 소비하면서 화학을 나쁜 놈처럼 취급하는 모순을 일깨워준 챕터가 있습니다. 바로 화학은 억울하다챕터입니다. 화학의 연구대상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입니다. 물질의 구조, 성질, 관계, 변화를 연구합니다. 물질은 법칙대로 움직이는데, 법칙을 바꿔가며 다른 변화를 발견하고 자연과 인간에게 적용하는 것은 사람입니다. 좋지 않은 물질을 생성하는 책임을 화학에게 물어서는 안 되는 이유지요.

 

그나마 다행인 점은 최근에는 에코가 자리를 잡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기업이 제품을 출시할 때, 메인 카피로 친환경 제품이라고 홍보를 합니다. 그만큼 소비자들이 지구와 사람이 공존할 수 있는 제품을 선호한다고 분석할 수 있겠지요. 화학을 자연과 사람이 공존할 수 있는 방향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신호로 보입니다. 트렌드처럼 시간과 함께 사라질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문과>가 작가님의 유명세로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운명적 문과 + 열세한 문과인 입장에서 이 책은 과학 교양서로 충분한 가치를 지녔습니다. 이번에는 하나만 건졌지만, 다음에는 하나 더 건지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인문학 공부도 더 해야겠군요. 이 책의 예시를 이해하려면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하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타는 작품
윤고은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불타는 작품>(이하 <작품>) 출간 소식이 꽤 반가웠습니다. 왜냐하면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이하 <늙은 차>)에 똑같은 제목의 작품이 실려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몇 안 되는 국내 작가 중 한 명인데다, 재미있게 읽은 작품을 장편소설화한 셈이라 몹시 기대하며 읽었습니다.

 

<작품>은 읽으면 읽을수록 여러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작가가 기발한 상상력을 사용해 독자의 상상력을 이끌어냅니다. 수많은 이야기 중에서 무엇을 중점으로 말해야 이 책의 매력을 더 끌어낼 수 있을까 고민도 됩니다. 결국 제가 쓴 모든 서평후감이 그렇듯 가장 먼저 떠오른 걸 골랐습니다. 맨 처음 생각난 만큼 하고 싶은 이야기도 풍성할 테니까요.

 

안이지는 로버트 재단으로 찾아갈 계획이 틀어져 로버트 재단으로 가지 못하고, 숙박시설에 머물게 됩니다. 그곳에서 티브이를 통해 화재 소식을 접합니다. 며칠이 지나도록 화재는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고 여러 지역으로 번집니다. 그 화재로 안이지는 궤도를 회복하지 못합니다. 그저 로버트 재단의 연락을 기다릴 뿐입니다.

 

화재는 마치 자연의 경고 같습니다. 인간은 가장 먼저 지구에 존재한 자연을 이용하여 진화한 생물입니다. 만일 자연이 없었다면 굶주림을 덜어줄 양식도, 위험에서 지켜줄 집도 마련하지 못했을 겁니다. 서로 멸망하지 않을 정도의 피해를 주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균형을 인간이 먼저 깨트립니다.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그 속도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빨라집니다. 인간이 자신들이 이루어낸 결과를 자랑스러워하며 자아도취하고 있을 때, 자연은 더 이상 인간의 편이 되어주지 않습니다. 인간의 갈증을 해소해 주던 비는 산성비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영양을 채워주던 자연 음식이 공해 속에 함부로 먹지 말아야 할 식품이 되었습니다.

 

이제야 인간은 자신들이 완성한 시대가 훌륭하기만 한 작품이 아니라고 알게 됩니다. 다시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깨닫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요? 나무를 심고, 분리수거를 철저히 하고,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고, 텀블러를 사용하고. 물론 이런 사소한 실천도 도움이 됩니다. 다만 자연을 망가뜨리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합니다.

 

소설이 끝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화재가 진압되었다는 힌트를 찾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를 드러내는 힌트가 발견됩니다. 안이지는 자신의 작품을 사겠다는 딜러를 만납니다. 그리고 소각될 그림의 모조품을 그립니다. 그리고 진짜 작품과 바꾸려고 합니다. 그 모습을 로버트에게 들켰고, 로버트는 두 작품을 섞은 뒤 진짜를 골라가라고 합니다. 안이지는 수많은 고민 끝에 하나를 골랐고, 자신의 그림을 사겠다는 딜러에게 전화를 겁니다. 그런데 그 딜러가 말합니다.

 

딜러는 내가 정말 그 그림을 빼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거기서 불타기로 되어 있었던 걸 빼돌렸다면 그건 더 이상 진짜가 아니다.” 341

 

무언가를 소각해야 원하는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소각할 대상이 자연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연을 계속 소각하니 자연이 스스로 삶을 포기해서 화재가 진압되지 않는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인간이 자연이 생명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거지요.

 

어쩌면 저를 소각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회복탄력성이 낮은 걸 보니. 그래도 시스템을 탓하고 싶지 않으므로,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하고자 오늘도 교양 심리학 책을 읽습니다.

 

P.S. 혹시 소각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궁금하다면 <늙은 차>에 실린 <불타는 작품>

을 읽어보세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명탐정으로 있어줘
고니시 마사테루 지음, 김은모 옮김 / 망고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혼자 사시는 분들은 이런 적이 있나요? 우산을 들고 나가지 않았는데 비가 와서 당황한 경험. 가벼운 외투를 입고 외출을 했는데 생각보다 추워서 핫팩에 의존한 경험. 이제 생각해 보세요. 가족들과 같이 살았을 때는 어땠는지. 아버지나 어머니가 오늘 춥다고 했으니 더 두껍게 입어라, 비 온다고 했으니 우산 챙겨라. 이런 말을 듣지 않았나요? 덕분에 춥지 않았고, 비를 맞지 않았습니다. 잔소리처럼 들리지만 그 잔소리에는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그 사랑을 <명탐정으로 있어줘>(이하 <명탐정>)을 통해서 다시금 느낍니다.

 

제목에 탐정이라는 들어가는 만큼 소설은 추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주로 가에데가 일상 미스터리를 할아버지에게 들려주고, 할아버지가 스토리 형식으로 풀어내는 방식입니다. 할아버지는 자신이 치매에 걸렸고 환시를 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명석한 두뇌를 지녀서 치매에 걸린 뒤로도 논리적인 사고를 하고요. 어쩌면 가에데는 그런 할아버지와 대화하려고 일상 미스터리를 수집했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사랑을 표현했던 게 아닐까요?

 

, 그렇다면 할아버지는 가에데에게 어떻게 사랑을 표현할까요? 이 책을 마지막까지 읽고 나서야 손녀를 향한 할아버지의 사랑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 이런 방식으로도 사랑을 표현할 수 있구나.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사랑의 표현 방법도 있다는 걸 알았고요. 할아버지는 가에데의 일상을 지켜주고 있었습니다. 누구보다 먼저 딸을 스토킹하는 인물을 알아채고, 스토커로부터 가에데를 지키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가에데에게는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습니다. 덕분에 가에데는 아무 것도 모르고 평온한 일상을 보낼 수 있습니다. 자신의 뒤를 할아버지가 든든하게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가에데도 할아버지도 서로에게 사랑을 최대한으로 표현합니다. 그 방식이 일상에 자연스럽게 녹아있으므로 서로 사랑인 줄도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특히, 가에데는 더 그랬을 겁니다.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가, 아무리 본인이 자각하고 있더라도,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울 테니까요. 그런데 할아버지가 실은 자신을 지켜주고 있었다는 진실을 알았을 때, 얼마나 감동스럽고 고마웠을까요?

 

그래서 제목 <명탐정으로 있어줘>가 훨씬 와 닿습니다. 이 제목은 가에데가 할아버지에게 바치는 사랑이자 애정입니다. 시간이 지나더라도 자신을 지켜주었던 총명한 두뇌를 유지해 자신과 일상 미스터리를 풀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가에데의 소원이 아닐까요?

 

우리는 사랑을 특별하다고 여깁니다. 사랑을 표현하는 특별한 방식이 있다고 믿기도 합니다. <명탐정>은 꼭 그렇지도 않다는 걸 보여줍니다.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사랑이 일상의 흔한 행동과 한마디에 담겨 있다고 말합니다. 사랑이 고프나요? , 일상을 다시 한 번 둘러봐요. 누가 어떻게 자신에게 사랑의 표현을 보내고 있는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말리의 일곱 개의 달
셰한 카루나틸라카 지음, 유소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구매한 이유는 <소녀 동지여 적을 쏴라>를 읽은 직후였기 때문입니다. 전쟁에서 소외된 계층을 중점적으로 다루어 전쟁 소설의 한 획을 그었다고 여겼지요. <말리의 일곱 개의 달>(이하 <말리>) 역시 전쟁을 다루고 있었으며, 부커 상까지 수상할 정도라면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잡은 책일 거라는 믿음에 읽었습니다.

 

<말리>에서 말리는 사진작가입니다. 스리랑카 정부군과 타밀 반군 사이를 오가며 여러 사진을 찍습니다. 사진 속에는 무너진 건물들, 사체들이 담깁니다. 그 사진을 보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사진과 글을 통해 전쟁을 지켜보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뉴스를 통해 전쟁 소식을 접합니다. 영상에 비춰진 피해자들의 암담한 현실, 사체들, 각종 무기의 향연을 지켜봅니다. 피해자들을 안타까워하고, 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하겠지요. 이런 마음을 느끼는 이유는 자신은 평온한 세상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말리는 전쟁터에서 사진을 찍습니다. 매일 마주치는 군인들. 매일 목격하는 피해자들. 매일 듣는 총성과 폭발음. 상상하기도 힘든 잔혹한 모습들. 이런 현장에 익숙해진 말리는 굉장히 덤덤해집니다. 사진을 찍을 때, 어떤 사명감 혹은 의미를 따지지 않습니다. 그저 사진작가로서 일을 할 뿐입니다. 만일 자신의 사진에 어떤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의도가 아니라고 합니다. 위란의 솜씨라고 합니다. 위란이 노출을 조절하고 프레임을 잘라낸...(중략)...평범한 똑딱이 사진에 미처 의도하지 않았던 깊이를 불어넣는다고(429) 합니다.

 

<말리>는 말리를 통하여 전쟁과 동떨어진 독자를 현장으로 끌어당깁니다. 전쟁이 오래될수록 무감각해지는 사람들의 일상이 독자의 평범한 일상과 얼마나 다른지 상상하게 만듭니다. 만일 이 책에 그림이나 사진이 실렸다면 어땠을까요? 상상에 리얼리티가 추가되어 독자를 더 오싹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릅니다.

 

말리로 대표되는 우리는 전쟁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 걸까요? 끊임없이 보도되는 자극적 제목의 기사들과 영상에 무뎌지지는 않았을까요? 우리는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타인의 고통,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가.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낙원은 창백한 손으로
박영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읽고자 했던 이유는 제목에 이끌렸기 때문입니다. <낙원은 창백한 손으로> 낙원과 창백, 이 두 가지 조합이 신선합니다. 창백하다는 말을 긍정적 단어로 써 본 일이 없습니다. 대체 어떤 이유로 낙원을 만드는 손을 창백하다고 표현했는지 궁금증이 일어 책을 읽었습니다. 핏빛 자국이 맺힌 건물 표지는 커다란 비밀을 숨기고 있는 듯합니다.

 

15년 전후의 도진을 따라가다 보면 사람의 욕망이 얼마나 다양한지 알 수 있습니다. 15년 전, 도진은 아버지의 이중성을 폭로하려고 합니다. 아버지의 병원에 숨어들어 약점을 찾아냅니다. 그 약점을 경찰에 고발하지만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습니다. 자신이 봤던 현장, 아버지와 경찰의 유착 관계를 알고 죄책감과 불안에 시달립니다. 어쩌면 아버지를 무너뜨리지 못하는 자신에게 좌절감도 느꼈을지 모릅니다.

 

그 좌절감은 한 사건을 계기로 더욱 굳어집니다. 사건에 대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경찰이 시키는 대로 따르는 수밖에 없습니다. 괜찮아, 괜찮아 이 한 마디를 끊임없이 자신에게 속삭이면서. 아버지의 죄를 밝히려 했던 도진은 나락에 떨어집니다. 이제 자신에게는 아버지를 고발할 자격이 사라집니다. 아버지와 똑같은 사람이 되었으니까요.

 

그 상황에서 도진은 외면을 선택합니다. 경찰이, 아니 어쩌면 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길을 걷습니다. 면죄되고 싶다는 이유보다 앞으로도 이 사건이 터지기 전의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싶다는 더 큰 욕망을 위해.

 

인간은 본능적으로 생존에 유리한 선택을 한다. 반성보다는 자기 합리화를, 고통보다는 안락과 포만감을 추구한다. 자신도 인간이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뇌는 그때의 기억을 삼켰다. 구태여 그 기억을 끄집어내려 노력하지 않았다. 오히려 언제까지나 도피할 수 있기를 바랐다. (66-67)

 

이제는 손이 왜 창백해야만 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손은 원래 창백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이중성을 알리겠다는 달빛처럼 맑은 의지를 다졌던 손이, 한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흐릿해집니다.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창백해지는지 저자는 심리묘사를 통해 보여줍니다.

 

차도진이라는 한 인물만을 따라가도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크고 작은지, 다양한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인물들의 욕망까지 덧붙여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욕망이 가득한 정글을 읽는 기분입니다. 정글에서는 욕망이 살아남는 방법이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길을 잘못 들 수도 있습니다. 돌다리를 두드리고 건너는 것처럼 늘 길을 점검하고자 합니다. 이 길 위에 떨어뜨린 가치가 있지는 않은지.

호흡곤란이 찾아오면 눈앞이 흐려졌다. 흉통에 느껴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도진은 고개를 숙였다. 핸들에 머리를 처박은 채 가쁜 숨을 골랐다. 그때의 일을 기억하려 하자 또다시 온몸에 거부 증세가 나타났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생존에 유리한 선택을 한다. 반성보다는 자기 합리화를, 고통보다는 안락과 포만감을 추구한다. 자신도 인간이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뇌는 그때의 기억을 삼켰다. 구태여 그 기억을 끄집어내려 노력하지 않았다. 오히려 언제까지나 도피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제 그럴 수 없게 된 것이다. - P6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