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동남아 - 30개의 주제로 읽는 동남아시아의 역사, 문화, 정치
강희정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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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남아라는 지역에 관해서 우리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 못하다. 우리보다 뒤떨어진 지역, 열대지역이라는 조건으로 열심히 일하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은 지역으로 생각한다. 나도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이책을 읽었다. 그러나 책장을 덮고 나서야 깨달았다. 동남아는 우리가 배울 것이 많은 지역이라는 시실을....


  그렇다면 우리는 동남아로부터 무엇을 배워야할까? 그것은 외교에 있다. 동남아는 서세동점의 시기에 서구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배를 받았다. 풍족한 자원과 향신료는 동남아에게 축복이기보다는 재앙이었다. 신이 동남아인에게 준 선물은, 그것을 지킬 힘이 없는 자에게는 재앙으로 돌아왔다. '수완나부미(황금의 땅)'을 찾아서 인도인 이슬람인들이 동남아로 왔고, 그 뒤를 이어서 유럽인도 왔다. 그들은 동남아를 식민지로 삼으며 수탈했다. 식민의 아픔을 겪었기에 그들은 깨달았다. 약자가 강자에게 짖밟히지 않기 위해서 그들은 현명한 외교술을 터득했다. 

  약자의 힘은 단결이라고했다. 미국과 소련의 강자에게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 동남아 국가들이 제3세계 외교에 참여한 것도, ASEAN을 결성해서 미국을 초대한 것도 약자로서 살아 남기 위한 현명한 외교술이었다. 강대국의 외교 논리에 휩쓸려가기 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판을 만들어 강대국을 자신의 판으로 초청하는 탁월한 외교술이다. 

  싱가포르의 라자라트남장관은 "태양이 여러개일 때야 말로 작은 행성들은 항해의 자유를 더 확보할 수 있다."(323쪽)고 말다. 혼자만의 힘으로 강대국을 상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ASEAN을 구성하여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마치 가얇픈 개미가 무리를 이루어 강하게 생존하는 모습을 떠올리게한다. 

  특히, 싱가포르는 작지만 강한 나라이다. 경제력만이 강한 나라가 아니다. 외교에서도 강소국 외교를 구사하고 있다. ASEAN을 주도하며, 필요하면 새로운 협력체를 만들고 이슈를 이끌어간다. 이슈를 만들지 못하고 미국과 일본에 끌려다니며 의탁하는 외교 행태를 보여주는 우리 현실과 너무도 대비된다. 

  싱가포르가 강소국 외교의 모범을 보여준다면, 인도네시아는 한나라의 외교가 어떠해야하는지 보여주고 있다. "독립적 행동 외교"(Bebas dan Aktif), 즉 외부 강대국의 압력에 휘둘리지 않고 주체적으로 국제 사회에 적극 참여하겠다는 인도네시아의 외교는 자주 독립 국가의 외교는 어떠해야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우리가 일본과 미국에 일방적으로 의존하는 외교를 펼치고 있는 사이, 문재인 정권시기 드높았던 외교적 위상은 추락했다. 우리는 더 이상 변수가 되지 않는 나라가 되었으며 중국과 러시아를 적으로 돌리며 경제적으로 추락할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위기가 더욱 고조되고 있다. 동남아의 싱가포르와 인도네이사가 보여주는 외교력은 우리의 외교가 어떠한 길을 가야하는지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다. 

  지구상의 3분의 2의 국가가 식민지가 되었지만, 타이는 독립을 지켰다. 타이의 피분이 친일노선을 걸었기에 패전국의 대우를 받을 수도 있었으나, 타이는 패전국의 대우를 받지 않았다. 쁘리디를 주축으로한 '자유타이(세리티아)'는 OSS를 통해서 군사 훈련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의 갑작스런 항복으로 전투없이 종전을 맞이했다. 우리나라와 유사한 상황이었다. 우리는 제국주의 일본의 피해자인데도 불구하고 분단을 맞이했다. 부러움에 타이를 바라보았다. 라마4세와 라마5세의 개혁으로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유능한 국왕들 덕택에 지금도 왕실은 국민의 존경을 받으며 존속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선입견이 진실일까? 자혜로운 국왕의 통치 밑에서 외세의 침략없이 타이인들은 행복하게 오늘날에 이르렀을까? 아니었다. 1976년 10월 탐마삿대학에 왕실 근위대와 경찰,군대, 우익청년들이 기관총을 난사하며 대학생들일 학살했다. 피흘리는 학생을 나무에 매달아 놓고 의자로 내리치는 장면을 AP 통신 기자 닐 율레비치는 사진에 담았다. 자혜롭고 유능한 국왕의 이미지는 만들어진 것이었다. 민주 공화국을 바라는 학생들에게 국왕은 자혜롭지 않았다. 

  태국 정치사를 전공한 저자 현시내는 타이인들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푸미폰 왕에 대해서 다른 평가를 내린다. 


  "결국 이는 30년에 가까운 군부 독재에 대항해 시민들이 피흘려 쟁취한 민주화운동의 승리를 가로체는 일이었다. 푸미폰 왕이 스스로 민주주의의 영웅으로 나선 것이다."(287쪽)


  1973년 10월 대학생들이 민주화를 요구했다. 정부는 이를 받아들여 헌법을 개정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군경은 탱크와 헬리콥터를 투입해서 해산하던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77명 사망 800여명 부상이라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다. 그런데, 그날 푸미폰 왕이 "군부가 사퇴할 것이며, 새로운 총리를 임명해 의회를 재구성하겠다.'고 전격 선언했다. 이를 통해서 그는 민주주의의 영웅이 되었고, 민주주의는 납치되었다. 이것이 타이에서 민주주의가 정착하지 못한 근원적 이유였다. 자유는 피를 먹고 자란다. 그렇게 자란 자유는 때로는 납치당하기도한다. 타이처럼.....

  그런데, 어찌하여 푸미폰 왕을 타이인들은 존경하고 사랑하는가? 이는 푸미폰 왕의 어머니 상완의 이미지 메이킹 덕분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어머니(매팔루앙)'라고 불리는 상완은 산간 벽지의 가난한 소수민족을 헬리콥터로 돌아다니며 보살핀다. 소수민족에게 상완은 하늘에거 내려온 어머니로 보였을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 메이킹은 그녀의 아들 푸미폰 왕에게 이어져 자혜롭고 서민적인 국왕으로 이미지 메이킹에 성공했다. 

  아이는 태어나서 부모를 사랑한다. 생존을 위해서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다고 믿는다. 그래야만 부모에게 버림받지 않고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타이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푸미폰 왕은 부모와 같은 존재였다. 국왕을 모독하면 최고 15년 동안 감옥에 갖혀 살아야하는 상황 속에서 국왕을 자혜로운 분으로 존경하며 사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 마치 박정희 독재 정권 시기를 살면서 박정희를 자혜로운 어버이로 생각하는 우리의 7080세대처럼 말이다. 


  동남아는 고통을 통해서 생존의 방법을 찾았다. 강대국에 맹종하기 보다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서 자신에게 유리한 판을 만들고 강대국을 자신이 유리한 판으로 초청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식민의 아픔을 겪고 분단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우리가 동남아에게 배워야할 교훈이다. 또한, 피의 댓가 없이 자유를 얻는 것은 불가능하며, 피로 키운 자유는 언제나 납치당할 수 있다는 교훈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할 것이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하지만은 않는다. 현명한 시민이 깨어있을 때만이 정의는 승리할 수 있다.




ps. 이 책을 읽으며 가장 기분 나쁜 순간은 학자라는 사람들이 '대동아 전쟁'이라는 명칭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이책의 6쪽과 278쪽에는 '대동아 전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대동아 전쟁'이라는 용어는 일본이 백인 제국주의 국가에 대항해서 대동아시아 공영권을 만드는 전쟁이라고 선전하기 위해서 만든 용어이다. 적어도 학자라면, 대한민국의 학자라면, 황국사관에 젖어있는 어용학자가 아니라면 '대동아 전쟁'이라는 용어는 사용해서는 안된다. 동아시아사 교과서에서 사용하고 있는 '아시아 태평양 전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길 필자들에게 간곡히 건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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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영의 화해 (리커버) - 상처받은 내면의 ‘나’와 마주하는 용기
오은영 지음 / 코리아닷컴(Korea.com)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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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은영!! 그녀 미디어가 만들어낸 허상이 아닐까? 그녀가 등장하는 프로그램에 그녀는 모든 해결책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조그마한 단서로 문제의 핵심을 꿰뚫는다. 문제 아이도, 문제 부모도, 문제가 있는 연예인도 그녀와 대화하면 해결책을 발견한다. 물론, 방송하기 전에 사전 조사가 있었으며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하는 의뢰자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있다는 전제를 염두해 보더라도 그녀는 탁월한 상담가이며 정신과 의사이다. 그녀의 내공을 나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과 상처받은 나의 내면을 치유하고 싶다는 열망이 그녀의 책을 집어들게 만들었다. 


  오은영은 처음부터 부모라는 존재에 대해서 묻는다. 나약한 존재로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는 부모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부모라는 명목으로,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나약한 존재는 폭력과 학대가 가해진다. 사회는 가족에 가족으로 제기능을 하지 못하는 현실을 '행복한 가정'이라는 이데올로기로 덮어버리려한다. 오은영은 가장 말하고 싶지 않은 부분을 가장 먼저 말한다. 소중한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거리의 철학자 강신주가 공개 상담을 하다가 극단적인 처방을 내렸던 적이 있다. 병든 가족을 위해서 돈을 벌어 바쳐야했고, 그녀는 자신의 존재 이유와 가치에 심각한 회의를 갖았다. 강신주는 가족을 먼저 떠나라말했다. 자신을 먼저 추스리고 나서 이후에 가족을 챙이라는 조언이었다. '행복한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이러한 강신주의 조언을 용납할 수 없다. 폭풍우가 치는 바다 한가운데 조각배를 탄 가족은 서로를 살리기 위해서 죽는 그 순간까지도 손을 놓아서는 안된다. 가족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 던질 수 있어야 '행복한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완성된다. 

 그런데, 오은영도 강신주와 비슷한 처방을 내린다. 


  "여자는 친정어머니로부터 빨리 멀어져야 합니다. (중략) 어머니와 신체적 물리적으로 멀어져야합니다."(49쪽)


  자녀를 자신의 아바타요, 소유물로 여기는 어머니에게 탈출하라는 그녀의 해결책은 유교의 '행복한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정면으로 맞서는 행동이다. 유학자에게 이러한 고민을 말한다면 어떠한 해결책을 제시했을까? 아마도 더욱 진심으로 부모를 섬겨야한다고 말할 것이다. 천륜으로 맺어진 부모와 자식사이의 관계를 끊어서는 안된다. 자녀는 부모에게 복종해야하며, 부모가 잘못된 길로 간다면 자녀는 부모에게 진심으로 대해서 바른길로 가기를 권해야한다고 말할 것이다. 

  이러한 유교의 가족 이데올로기 밑에서 자란 우리는 가부장적 가족질서의 폭력에 휘둘려야했다. 유교의 가족 이데올로기는 가족에서 사회로, 사회에서 국가로 확장되었다. 어른의 논리적 헛점과 잘못을 지적하면 '어디 어른 앞에서 목소리를 내!'라는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그랬다. 유교적 가족 이데올로기는 건전한 가족을 만드는데 매우 부적합하다. 약자가 일방적으로 복종하게 만드는 상황 속에서 수 많은 화병 환자들을 양산할 뿐이다. 유교식 수직적 가족관계는 민주사회에서 더 이상 적합하지 않다. 부모가 자녀의 성장과 성숙에 방해가 되는 존재라면 부모를 떠날 수도 있다. 가족을 떠날 수도 있다. 

  부모에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겪어야했던 아픔을 간직한 존재가 이제 부모가 되었다. 부모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삶 속에서 부모의 흔적을 발견하는 슬픔을 보면서 괴로워한다. 부모가되어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에 자녀를 위해서 했던 말과 행동이 자녀에게 상처로 남는다. 이러한 부모에게 오은영은 따끔하게 말한다. 


  "부모의 마음을 알아차리려면 적어도 마흔은 넘어야 합니다. (중략) 지금 마흔 넘은 자식을 키우는게 아니라면 알아듣도록 좋게 말하라는 겁니다."(37쪽)


  인생을 먼저 살아보았으니 자녀를 위해서 한 조언들이 사실은 자녀에게 상처로 남는다. 따끔하게 혼을 내서 잘못을 반복하지 않게 하려는 의도를 자녀가 알려면 마흔을 넘겨야한단다. 그러나, 마흔을 넘겨도 부모의 마음을 안다는 보장이 없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입에 피를 머금고 타인에게 뿜으면 내입은 이미 더럽혀져 있다.' 그렇다. 좋은 의도에서 행한 말과 행동이라도 그 방법이 좋지 않다면 자녀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기 힘들다. 

  한녀석이 교무실에 찾아왔다. 야영 장기자랑 시간에 무대에 올라 친구들의 배꼽을 빼놓았던 녀석이다. 공부는 잘하지는 못하지만 사교성은 대단히 좋은 학생이다. 녀석이 나에게 한풀이를 했다. 암에 걸리신 어머니가 자기에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이라고 말했단다. 상처받은 녀석은 괴로워했다. 나는 녀석을 위로했다. 어머니는 너를 사랑하니까 그런말을 했다. 어머니 말의 진심은 네가 열심히 공부하라는 격려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은 진짜 쓸모없는 사람인가 보다며 푸념하는 녀석에게 말했다. 토끼와 거북이가 육지에서 뛰면 투끼가 이기지만, 바다에서는 누가 이길까? 넌 공부라는 부분에서는 뒤쳐지지만 타인을 즐겁게 해주는 능력은 그누구도 따라올 수 없다. 이러한 응원에 녀석은 힘을 내고 돌아갔다. 녀석의 어머니와 통화해서 당부를 해려했다. 그런데, 자신의 주장만할뿐 담임교사의 말은 들으려하지 않았다. 녀석이 받고 있는 고통이 피부로 느꼈졌다. 

  오은영은 '마음의 충족감'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자녀가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를 모르는 '맹심'을 가진 녀석의 부모는 자녀에게 상처를 준다. 그리고 그것을 사랑이라 변명한다. 그런데, 부모와 자식 사이에만 이러한 아픔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부부사이에도, 고부간에도, 친구와 친구 사이에도 이러한 아픔이 존재한다. 

  오은영 박사의 글 중에서 가장 나의 가슴에 아프게 다가온 단어가 '허구의 독립성(pseudo-independence)'이다. 실은 의존적인데 겉으로는 독립적인 존재 처럼 보이는 아이이다. 

  첫째는 너무도 빨리 언니가 되어야했다. 그래서 언니로서의 책임감을 은연주에 강요받았다. 스스로 자기 것을 챙기고 동생을 돌보는 모습을 보며 칭찬을 해주었다. 어른스러운 첫째가 있었기에 둘째와 셋째도 키울 수 있었다. 그래서 첫째에게 늘 고마워할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는 첫째에 비해서 너무도 아기같은 둘째와 셋째가 걱정스럽기도한다. 그런데, 잘 키웠다고 생각한 첫째가 사실은 허구의 고독립성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아이는 아이이다. 아이에게 너무도 일찍 독립성을 요구한 것이 애처롭다. 

 오은영 박사는 부모로서, 사회인으로서 주의해야할 한마디를 한다. "아이의 감정을 생각으로 받지 마세요."(231쪽) 그렇다. 단순한 푸념을 생각으로 받아들여 아이를 나무랄 때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잘못은 인간관계에도 나타난다. 특히, 여성의 감정표현을 T형 남자는 생각으로 받아들인다. 부부관계가 힘든 것도, 직장에서 여성 동료와 관계가 힘든 것도 감정을 생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었다. 

  대학에서 사료비판을 하면서 훈련받은 것이있다. 글뒤의 글을 읽어라! 사료의 표면을 볼 것이 아니라 그 이면을 보라는 이 교훈이 인간관계에도 적용되는 것이었다. 상대방의 말 속에서 감정을 읽을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말 속에서 감정을 읽을 수 있는 지혜를 계발한다면 부모와 자녀, 교사와 학생 사이에도 보다 부드러워질 것이다. 


  오은영 박사는 '매일 잠들기 전, 나를 용서하세요."(313쪽)라는 글로 책을 마무리한다. 우리는 자신을 너무도 나무랐다. 매번 이불킥을 하면서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왜? 그렇게 말했는지 스스로를 나무란다. 그런데, 나를 사랑할 줄 알아야 남을 사랑할 수 있다. 나만을 사랑한다면 문제이지만 나조차도 사랑할 수 없다면 어찌 남을 사랑할 수 있으랴! 나를 용서하며 많은 실수를 했지만 열심히 하루를 살아온 나에게 격려의 말을한다. 수고했어!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을 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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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 관한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물음 49 - 어디다 대놓고 묻기 애매한
장웅연 지음, 니나킴 그림 / 담앤북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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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품은 디테일에 강하다고 한다. 불교관련 책을 좀 읽었지만, 불교에 관해서 잘안다고 자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소한 질문에 제대로 대답못하는 자신을 보며, 불교라는 거대한 산을 오르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체감할 뿐이다. '불교에 관한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물음 49'는 불교에 관한 사소하지만 중요한 질문을 모아 놓았다. 정말 사소하지만 불교에 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없다면 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모아 놓았다. 불교에 관한 책을 좀 읽었기에 목에 힘주던 내가 사소한 질문에 대답못하며 무너졌던 기억을 떠올리며 한장 한장 재미있게 읽었다. 


  불교에 관한 사소하지만 결정적으로 중요한 질문 중에서 나에게 깊은 울림을 준것은 4가지 이다. 

  첫째, "불교에서는 신을 믿지 않는다고?"라는 질문이다. 일반적으로 종교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절대자와 내세관이 있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잣대로 한국의 무속 신앙과 불교를 살펴본다면 종교라 할 수 없다. 절대자와 내세관이라는 기준은 서구의 기준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기독교의 잣대이다. 절대자가 없이도, 내세관이 없이도 종교는 존재할 수 있다. 인간이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종교가 될 수 있다. 무속과 불교가 바로 그 예이다. 특히, 불교는 철저히 신을 부정한다. 


  "불교는 절대자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스스로의 성찰로 완성되는 종교이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신이란 인간의 나약과 미망을 먹고 자라는 헛것에 불과하다. 미안하지만 인간이 신을 창조한 것이다."(13쪽)


  '만들어진 신'을 쓴 리처드 도킨슨이 이말을 듣는다면 너무도 기뻐할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우주적 종교로 불교를 지목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불안을 먹고 사는 타종교와는 달리, 당당히 스스로 성철하며 주인이 되라는 불교의 가르침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너무도 감동적인 가르침이다. 

  개인적으로 사찰에 가면 편안함을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불교의 핵심 가르침이 나의 생각과 일치한다. 물론 심오한 불교의 이론을 내가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불교의 가르침이 나의 생각과 일치하기에 불교를 만나면 마음이 편안했던 것이다. 

  반면, 성당이나 교회에 가면 불편했던 이유가 비로소 이해되었다. 성탄절에 교회에 가서 방백을 하는 신도들을 보면서 몹시 불편했다. 사이비 종교인을 만난듯이 너무도 불편해서 자리를 떴다. 신의 종이되라는 말도 몹시 불편했다. 인생을 주인으로 살고 싶은 나에게 신의 종으로 살라니 너무도 어이가 없었다. 

  신도를 노예로 만드는 종교보다는 모두가 주인으로 살기를 바라는 불교가 우리를 더 가치있게 만든다. 

  둘째, "절은 왜 산속에 많은가?"라는 질문이다. 선생님들과 절에 갔던 기억이 난다. 한분이 "이곳은 예전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던 곳인가봐, 조선의 숭유억불책으로 절이 산속에 갔다잔아"라는 말을 했다. 그러자 한분이 "글세요. 불교가 원래 속세를 떠나서 스님들이 수도하는 산속에 있지 않나요?"라고 맞받아쳤다. 역사를 전공했다고 자부하던 나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열심히 불교 서적을 읽었지만, 절은 왜 산속에 많은가라는 질문에 의문을 던지지 않았다. 책속의 불교 지식을 흡수할 궁리만 했지, 당연한 것에 의문을 던지며 그 이유를 탐구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 책을 읽으며 비로소 의문이 해소되었다. 절이 산속에 많은 이유는 탈속주의와 풍수지리 때문이란다. 속세를 벗어나 수도를 하는 불교의 원래 모습을 떠올린다면 절이 산속에 많은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여기에 풍수지리설이 더해져 마치 인체에 뜸을 놓듯이, 기운을 북돋기 위해서 절과 탑을 세웠다. 여기까지 읽고 조선의 숭유억불책 때문에 절이 산속으로 숨어들었다는 주장은 잘못된 주장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 장웅연은 절이 산속에 많은 마지막 이유를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 때문이라 말한다. 그랬구나! 불교의 탈속주의와 풍수지리, 여기에 조선의 숭유억불책이 더해져서 절이 산속에 많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만들어졌다. 저자는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원인"으로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을 꼽고 있으나, 나의 생각으로는 숭유억불책은 부차적 원이으로 보인다. 지금 남아 있는 사찰들이 대부분 임진왜란 이후에 중건된 것들임을 떠올린다면 사대부들은 숭유억불을 했을지 몰라도 서민들의 삶속에 불교는 녹아들어 있었다. 

  셋째, "천도제인가, 천도재인가?"라는 주제는 제와 재의 심오한 차이를 깨닫게해주었다. 


  "불교에는 '재'만 있지 '제'는 없다. 자세히 살펴보면 '제'는 조상의 보이지 않는 도움을 받고 싶다는 일종의 투자에 가깝다. 이와 반대로 재는 철저하게 나를 버리고 비우겠다는 다짐이 먼저다. 아울러 제사상은 여인들의 명절 증후군을 발판 삼아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차리는 게 원칙이다. 그러나 잿밥은 맨밥이어도 괜찮다! 눈물을 흘리고 있다면, 눈물을 닦아 줄 수만 있다면."(233쪽)


  유교의 '제'가 조상의 음덕을 바라며 지내는 것이라면, 불교의 '재'는 죽은자와 산자 뿐만 아니라, 짐승을 포함한 만물을 위해서 지낸다. 불교의 하해와 같은 만물에 대한 사랑이 느껴진다.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이러한 심오한 차이를 알기나 했을까?

  넷째, "무아를 이야기하는데, 어떻게 윤회가 가능한가?"라는 주제에 대해서 저자 장웅연은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못했다. 단지 '밀린다왕문경'의 메난드로스 왕과 학승 나가세나의 문답에 제시한 논리를 제시해주었다. 


  "촛불은 금방이라도 꺼뜨릴 수 있지만, 한 촛불이 다른 촛불로 옮겨 붙을 수도 있다. 촛불이라는 '존재'는실체가 없으나, 촛불이란 '현상'은 영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174쪽)


  '밀린다왕문경'을 소개하면서도 저자 장웅연은 '딱히 결론이 없는 주제'라고 얼버무린다. 그러나, 나는 이를 설명할 수 있다.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에 윤회를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별이 폭발하면서 많은 원소들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원소들은 우리몸을 이루는 일부분이 되었다. 사람이 흙으로 돌아가면, 사람의 육신을 이루던 원소들은 자연으로 돌아간다. 이들은 음식물을 통해서 다시 사람에게 흡수된다. 우리의 원소는 과거 수많은 위인들의 몸을 이루었다.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면 우리의 원소는 미래 새로운 세대의 몸을 이룰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윤회한다. 불교의 윤회는 과학적으로 다시 해석할 필요가 있다. 


  이책의 49가지 질문에 완벽히 대답할 수 있는 내공을 가진 사람이 몇펴센트있을까? 교사인 나에게 불교의 심오한 이론을 묻는 학생은 거의 없다.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질문을 던지는 학생들에게 이 책은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상대해야하는 역사교사에게 많은 도움을 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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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추리반 - 청소년을 위한 그림 속 세계 역사
송병건 지음 / 아트북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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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사 수업을하면서 그림이나 사진 자료를 많이 활용한다. 학생들에게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안내하며 흥미를 유발시키는데 사진과 그림은 매우 유용하다. 서가를 거닐다가 '세계사 추리반'이라는 책이 눈에 띄였다. '청소년을 위한 그림 속 세계 역사'라는 주제가 눈에 띄여 책장을 넘겼다. 수업시간에 많이 활용했던 그림들이 눈에 띄였다. 세계사 수업 준비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하고 책장을 넘겼다. 


  책의 수준은 높지 않았다. 중고등학생이라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문안한 수준의 책이다. 또한 그림을 제시하고 호기심을 불러일으켜 세계사에 몰입하도록 만드는 필치는 대단했다. 또한 기존에 알지 못했던 그림속 새로운 사실을 알아가는 재미도 쏠쏠했다. 

  첫번째 분서갱유 관련 그림이다.분서갱유를 묘사한 그림은 모의고사 문제의 자료로 제시되기도했다. 별다른 의문을 갖지 않았던 그림인데, 앗불싸! 여기에 옥의 티가 있다니 놀라웠다. 진시황제 시기의 책은 서책이 아니라 죽간이었다는 점. 진시황제의 복장이 명, 청 대의 황제 복장이라는 점 등의 오류는 참으로 유용하면서도 신선했다. 그림에 대한 세심한 분석과 관련 설명은 친절한 해설을 듣는 듯하다. 

  둘째, 1780년 '건륭제를 알현하는 매카트니경'이라는 그림에 담긴 이야기 또한 매력적이다. 조지 3세가 파견한 외교관 중에 부사 조지 스타운턴과 그의 열한살 아들 조지 토마스 스타운턴은 나의 눈길을 끌지 못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열한살 조지 토마스 스타운턴은 중국어를 배워 인사를 했을 정도로 총명한 아이였다. 그런데, 반세기 후인 1840년 중년이된 조지 토마스 스타운턴은 영국 의회에서 전쟁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강성 정치인으로 성장하였다. 어린시절 조지 토마스 스타운턴의 눈에 비친 중국은 힘으로 짖밟아도 저항할 기력이 없는 쓰러져가는 초가집이었나 보다. 


  세계사와 그림에 관심이 있는 중고등학생이라면 재미 있게 읽을 만한 책이다. 아무런 부담없이 세계사를 즐기고 싶어하는 분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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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의 정치 강의 - 사유하고 판단하지 않는 시민에게 정치적 자유는 없다!
이진우 지음 / 휴머니스트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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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의 의미는 자유이다.(The meaning of politics is freedom)" 책의 표지에 한나 아렌트의 말이 적혀있다. 그리고 이 말은 이책의 핵심이다. 한나 아렌트에게 정치는 자유를 뜻하며 정치가 없다면 자유는 보장되지 못한다.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서 미국으로 탈출한 한나 아렌트에게 전체주의 탐구는 그가 밝혀야할 수수께기였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고 그녀의 지적 아름다움에 매혹되었다. 지난 겨울, 그녀의 또다른 대표작 '전체주의의 기원1'을 읽으며 쉽게 그녀의 아름다움을 정복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한나 아렌트는 자신의 지적 아름다움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의 아름다움을 정복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았다. 이진우 교수의 '한나 아렌트의 정치 가의'가 나의 손에 잡혔다. 이 책을 디딤돌 삼아 그녀의 '전체주의의 기원2'를 정복하겠다는 야망을 갖았다. 그리고 그 디딤돌은 생각보다 유용했다. 


  좀비를 소재로한 영화와 드라마가 유행이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누군가의 명령에 의해서 움직인다. 총이나 칼로 혹은 주먹으로 그들을 물리치려하지만, 자신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도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며 덤벼든다. 


  "복종하면서 꼭두각시처럼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인간들의 행렬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31쪽)


  한나 아렌트는 그러한 좀비들을 보았다. 아무런 저항없이 아우슈비츠의 죽음의 가스실로 순순히 걸어들아가는 유대인과 레벤스라움을 건설하기 위해서 전차를 몰고 소련 국경을 넘는 독일인들을 보면서 한나 아렌트는 좀비를 실제 목적한 것 처럼 두려웠을 것이다. 

  지구 반대편에도 좀비들이 있었다. '덴노헤이카 반자이'를 외치며 인간 폭탄이 되어 출격했던 가미가제 특공대도 무서운 좀비들의 행렬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주변에는 좀비들이 없는가? 불행히도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좀비들이 있다. 탐욕에 눈이멀어 대한민국호를 버뮤다 삼각지대로 끌고가는 선장을 뽑은 좀비들이 있다. '나라 팔아 먹는 이완용이 출마한다고 해더라도 우리는 XXXX을 뽑겠다.'는 어리석은 아줌마의 인터뷰를 보며 우리 사회의 좀비를 보았다. 

  이들보다 더 무서운 좀비가 있다. 정치에 관해서 대화를 하려하면 '모른다.', '관심 없다.'는 말을 하며 더러운 정치에는 관심없는 순수한 사람임을 자랑스럽게 말하는 좀비가 있다. 한나 아렌트의 입장에서 그들은 탄생성과 다원성이 전제되는 자유로운 사회를 스스로 부정하는 좀비들이다. 


  "현실을 생각하지 않으면 악을 불러오고 악은 사유를 허용하지 않는다."(9쪽)


  선거에 관심 없고, 현실에 떨어져 사는 것을 고귀한 것처럼 생각하는 좀비는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악을 불러오면서 현실을 고민하지 않는다. 또는 고민기 싫어 무조건 XXXX를 뽑거나 자신의 탐욕을 충족시켜줄 악마에게 한표를 행사한다. 


  "희생자들을 실제로 죽인 것에서 알마나 가까이 또는 멀리 있었던가하는 것은 그의 책임의 기준과 관련된 한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중략) 살상 도구를 자신의 손으로 사용한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을 수록 책임의 정도는 증가한다."(71쪽)


  세월호 안에서 구조될 것이라 믿으며 죽어갔던 단원고 학생들, 즐거운 저녁을 보내려 이태원에 갔다 압사된 청년들!! 그들의 곁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책임이 없는 것이 아니다. 학교 폭력을 조장하며 자신의 똘마니를 시켜 약자를 괴롭히는 일진이 있다. 좀비 똘마니가 손에 피를 뭍혔지만 자신의 손은 깨끗하다며 처벌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일진을 보며 한나 아렌트의 단호한 이 말이 떠오른다. 오히려 '멀리 떨어져 있을 수록 책임의 정도는 증가한다.'

  너무나도 암담해 보이는 현실을 변화시킬 수는 없을까? 좀비들로 가득찬 대한민국호에서 좀비를 시민으로 바꿀 수는 없을까? 


  "우리의 사회가 아무리 부패하고 불의로 가득차 있다고 하더라도 자발적으로 행위를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58쪽)


  '민주주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입니다.'라는 고 노무현 대통령의 말 처럼, 좀비를 시민으로 만들 수 있는 희망은 깨어있는 시민들에게 있다. 탐욕과 부정 부패가 넘쳐나는 현실을 바로잡으려 깨어있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행위'할 수 있다면 암담한 우리 현실을 바꿀 수 있다. 

  우리 주변의 좀비를 깨어있는 시민으로 일깨우고, 암담한 현실을 밝게 비추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갈등과 충돌이 두려워 절대적 진리를 구한다면, 그것은 곧 정치를 떠나는 일이다."(121쪽)


  한나 아렌트는 갈등과 충돌을 견뎌내고 조정할 줄 알아야 정치는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고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 시기에 방송에 수 많은 토론 프로그램이 있었다. 대통령이 검사와의 대화를 하면서 갈등과 충돌을 견뎌내면서 대화와 타협으로 우리 현실 속에서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려했다. 그러나, 독재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노무현을 만만하게보았다. 민주주의라는 정치를 불편해하는 사람들은 '민주주의는 말잘하는 사람이 이기는 시스템이다. 강력한 리더가 이끌어주었으면 좋겠다.'며 독재로의 회기를 갈망하기도 했다.


 "정치는 많은 사람이 지닌 차이와 이들에게 공동으로 주어진 공간을 전제한다.(111쪽)


  차이를 견디지 못하고 주어진 공간을 회피하려는 사람들이 권위적 지도자를 불러들였다. 친일적 발언을 하는 사회 지도층 인사가 늘어났다. 청소년들 사이에서도 '일베'들이 늘어났다. 독재를 찬양하고 친일을 미화하며 독립운동가 가족을 비하하는 악마의 졸개들이 늘어났다. 


  "다원성이 버거울수록 여론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의견만 절대화하는 전체주의의 유혹이다."(127족)


  친일을 미화하는 악마의 졸개들도 다원성을 존중한다는 측면에서 그들을 존중해야할까? 5.18을 모독하는 인간 말종들의 의견마져도 존중해야할까? 아마 아닐 것이다. 유럽에서 나치를 미화하고 히틀러를 찬양하며 처벌받는다. 홍세화가 말했듯이, 똘레랑스가 허용되는 정치의 장, 자체를 뒤흔드는 무리까지 똘레랑스를 허용해서는 안된다. 

  어둠을 헤치고 좀비들 사이에서 희망의 빛을 쫓는 일은 혼자만의 힘으로는 힘들다. 


  "'뿌리 뽑힌 대중'은 전체주의 운동의 자원이다. 전체주의 운동은 원자화되고 개인화된 대중의 특별한 조건에 의존하기 때문에 전체주의 운동은 이런 저런 이유로 정치조직에 대한 욕구를 가진 대중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나타날 수 있다."(26쪽)


  '뿌리 뽑힌 대중'이 되지 않으려면, 뿌리 내린 대중에 되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연대를 해야한다. 원자화되고 개인화된 대중은 제2의 히틀러에게 좋은 먹이감이 된다.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을 길러야한다. 우리는 혼자가 아님일 깨달아야한다. 좀비 이웃과 대화하며 그들이 깨어있는 시민이 될 수 있도록 선한 영향력을 미쳐야한다. 그럴때 우리는 불의의 권력에 맞설 수 있다. 


  "어떤 정권이 권력을 폭력으로 대체하려는 경향을 보일 때 우리는 더욱 정치적 행위를 해야한다. 왜냐하면 "모든 권력의 감소는 폭력에 대한 공개적인 초대이기" 때문이다."(175쪽)


  검찰 폭력에 연대로 대응해야한다. 조국을 짖밟는 무리에게 우리는 연대로 대응해야한다. 그들은 권력을 폭력으로 대체하려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자유로운 공간과 다원성을 전제로하는 정치를 지킬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두려움이 든다. 과연 우리의 판단은 정확한가? 소수 엘리트의 세뇌에 우리가 현혹된 것은 아닐까? 한나 아렌트의 마지막 화두는 '판단'이었다. 그녀는 '정신의 삶'이라는 책의 제3부 '판단'을 쓰려 타자기 앞에 앉았다. 타자기에 '판단'이란 제목과 두 개의 머리 인용문을 쓰고는 더 이상 글을 쓰지 못했다. 그녀는 '판단'의 문제를 우리에게 숙제롤 남기고 저 세상으로 갔다. 

  이진우 교수는 그녀가 채우지 못한 빈 공간을 그녀의 이전 저서를 토대로 '판단'문제를 추론했다. 한나 아렌트는 정치적 판단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관찰자'를 강조했다. 현실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서 한걸음 뒤로 물러섯 전체를 조망해야한다. 대중에 매몰되지 않는 관찰자이면서 현실과 유리되지 않는 참여자가 되어야한다. 한나 아렌트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한다. 아니, 다원성과 자유의 공간이 전제되는 정치를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는 이정도 비용을 지불해야한다. 댓가 없는 열매는 기대할 수 없다. 



 책장을 덮으려할 때 쯤, 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인민에게 배출된 엘리트에 의한 인민의 정부"(222쪽)


  우리의 현실을 너무도 잘 설명하는 문장이다. 선거 때만 국민이 주인으로 대접받는다. 어느 거리의 철학자는 이러한 현실을 비판하며 대의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직접 민주주의를 주장한다. 투표할 필요를 부정하는 괴변까지 '철학자'라는 간판을 걸고 짖어댄다. 투표라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완벽한 노예가 될 뿐이다. '인민에게 배출된 엘리트에 의한 인민의 정부'라 할지라도 그 공간에서 자유라는 이름의 정치를 누리기 위해서 우리는 투표해야한다. 정치에 관심을 갖고 참여해야한다. 관찰자와 참여자로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관찰자이면서 동시에 참여자가 되어야한다. '복종하면서 꼭두각시 처럼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관찰자 이면서 참여자가 되어야한다.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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