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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평점 :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라는 강력한 문장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책은 진지하지만 웃을 수밖에 없는 전형적인 '블랙 코미디'였다. 첫문장에서부터 작가의 남다른 내공이 느껴졌다. '이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될 수 있는 이유가 여기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소설은 아버지 초상을 치루는 삼일 동안의 일을 담담하게, 때로는 냉철하면서도 가슴 뜨겁게 그린다. 저자 정지아는 자신의 삶을 바탕으로 이 소설을 썼다. 그러하기에 그녀가 소설에서 그리는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사랑과 용서는 우리 이야기이기도했다. 책을 읽는 내내 나의 아버지를 떠나보내는 아픈 기억이 오버랩되었다.
보통 웃음은 예상하지 못했던 반전에서 나온다. 이 책 속의 아버지는 자본주의가 승리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언젠가는 공산주의가 승리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사는 이상주의자의 삶을 살고 있다. 부인과 싸울 때에도 사회주의 논리를 들이댔다. 방물장수 여인을 좁디 좁은 자신의 집에 재우려하자 어머니가 성화를 냈다. 그러자, 아버지로 어머니를 제압했다.
"자네, 지리산서 멋을 위해 목숨을 걸었는가? 민중을 위해서 아니었는가? 저이가 바로 자네가 목숨 걸고 지킬라했던 민중이여, 민중!"
이글을 읽을 때 웃음이 튀어나왔다. 현실과 이상의 차이가 느껴졌다. 현실에 이상의 공간을 옮겨 놓으니 코미디가 될 수 밖에 없다. '백면서생(白面書生)'이라는 말이 있다. 방안에서 책만 읽어 얼굴이 하얀 선비가 세상 물정에는 어두운 경우에 쓰는 말이다. 소설 속 아버지는 전형적인 백면서생이었다. '공산당 선언'을 읽고 사회주의자가 되었고, 사회주의가 실현될 수 있다는 자신의 이상을 굳게 믿었다. 농사도 '새농민'을 탐독하며 '새농민'이 하라는데로 했다.
강을 건넜으면 배는 버리라는 말이 있다. 책을 읽고 책의 뜻을 취했다면 책은 버려야한다. 책의 본질을 나의 가슴속에 담아 두고 그 이상을 실천하기 위해서 현실의 길을 모색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야한다. 그렇지 못한다면 현실과 괴리된 책 속의 이상에 얽매여 살아간다. 세상을 잘못 만난 자신의 불운을 탓하면 한세상을 한탄한다. 책속의 아버지는 책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책의 노예가 된 전형적인 백면서생이다.
그래도 소설속의 아버지는 인텔리이다. 나는 그런 인텔리 아버지를 둔 사람을 부러워했다. 나의 아버지는 초등학교만 나왔다. 학교 다니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도 동생들은 교육시키겠다며 도시에서 노동을 해서 두 동생을 공부시켰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배우지 못한 형에 대한 무시였다. 자신이 동생을 어떻게 교육시켰는데 자신을 무시하냐며 술을 마시며 명절 분위기를 공포분위기로 만드는 아버지를 지켜보았다. 주경야독하며 배우려하지 않고, 동생을 가르쳐 덕을 보며 살겠다는 얄팍한 아버지의 생각에 몸서리가쳐졌다. 소설 속 고아리는 어쩌면 그래도 부러운 인텔리를 아버지로 두었다.
아버지 고상욱은 동네의 모든 일을 자신의 일처럼한다. 아니, 자신의 일을 제처두고 동네 머슴이 되어 일을 한다. '사회주의의 이상을 품고 혁명을 꿈꾸었던 그였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아버지 고상욱이 내뱉은 말은 '사회주의 이상'이라는 나의 생각이 환상이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민족이고 사상이고 민심만 안잃으면 난세에도 목숨은 부지허는 거이여"
그렇다. 자본주의 국가 대한민국에서 빨치산 출신의 빨갱이가 살아 남기 위해서는 머슴이 되어야했다. 동네 머슴이 되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 남는 그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모내기를 해야하는데도 이를 내 던지고 자동차 사고로 죽은 사람의 뒷처리를 하는 그의 뒷모습에서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그의 투쟁이 보엿보였다.
사회주의 혁명을 실현하겠다는 그의 이상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자라는 생물학적 특징은 사라지지 않는다. 책속의 주인공 고아리는 하동댁 궁둥이를 뚜딜기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실망한다. 아버지는 혁명가이기 이전에 보통 남자였다. 아니, 성인이 아닌 다음에야 남녀가 이성에게 관심이 없을 수 있을까? 대중강연에서 공지영은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영화화하면서 배우 강동원을 직접보았던 경험을 이야기했다. 아들뻘되는 강동원을 보면서 자꾸 눈길이 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내가 이래도 되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했단다.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인간이 사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것인데 인간의 본성을 없앨 수는 없다. 오히려 소유욕이라는 인간의 욕망을 없애려했던 사회주의가 역사에서 퇴출되지 않았던가?
책을 읽는 내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아버지 장례식에 군수, 국회의원, 총장, 학장, 학과장의 화안이 답지했다. 심지어 한때 학생운동을 했던 선배가 빨치산 아버지를 고기 몇근 들고 찾아 오기도 했다. 왜? 그들은 빨치산을 존경하는 것일까?
대학시절, 어느 단과대 학우가 소설 '태백산맥'을 읽고 그 당시 치열하게 투쟁했던 빨치산의 모습을 보고 각성하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서 나는 빨치산들은 '민족'이라는 거대한 물결을 보지 못하고 이념의 노예가 되어 동족의 가슴에 총뿌리를 들이댄자들이라고 비판했다. 내말에 할말을 잃은 학우는 그후로 나와 관계를 끊었다. '이념'이라는 허상에 홀려 서로를 죽고 죽이는 아귀다툼을 하는 자들을 과연 긍정할 수 있을까?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정지아는 말한다. 그와 비슷한 말을 나의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외숙모께서 하셨다. '죽은자는 저 세상으로 떠나면서 자신에 대한 나쁜 감정까지 가져간다.' 아버지에 대한 만감이 교차하면서 무던히도 그를 원망했다. 그런데, 아버지를 떠나 보내자, 그가 좀 더 살아 우리 곁에 있기를 바라는 소망이 꿈틀거렸다. 아버지라는 존재는 그런 존재였다. 산업화를 성공시키기 위해서 정부는 저곡가 정책을 실시했다. 농사를 지어도 항상 적자일 수밖에 없는 산업정책과 산업 구조 속에서 힘든 노동을 잠시 나마 잊을 수 있는 것은 한잔의 술이었다. 농촌의 수많은 아버지들이 알콜 중독이 되어갔다. 간경화로 이 세상을 뜬 사람이 우리 마을에는 많다. 그 한사람이 나의 아버지이다. 지긋지긋한 술을 좋아한 나의 아버지는 술을 핑게로 가족에게 상처를 안겼다. 담석증으로 쓸개를 떼어냈는데도 아버지는 꿋꿋하게 술을 드셨다. 어머니의 성화를 피해서 몰래 소주를 사다가 숨겨 놓고 먹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의 저자 정지아도 아버지가 남긴 '빨갱이'라는 주홍글씨가 그녀를 옥죄었다. 이 소설은 '빨치산의 딸'이라는 소설로 작품활동을 한 그녀가 빨치산 출신의 아버지를 떠나 보내기 위해서 쓴 소설 같다. 정지아는 조문온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아버지의 다양한 모습들을 떠올린다. 그 과정을 통해서 주인공은 아버지와 화해한다. 나도 그랬다. 애증이 교차하는 아버지라는 존재를 떠나보내며, 못난 당신처럼 살지는 않겠다고 절규하면서도 그가 그리운 것은 당신에 대한 용서를 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