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모든 사람을 위한, 그리고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이진우 옮김 / 휴머니스트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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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로보로스(Ouroboros)! 책 표지에 자신의 꼬리를 삼키는 우로보르스가 등장한다. 시작이 끝이요. 끝이 곧 시작을 의미하며, 무한한 순환과 윤회의 상징인 우로보로스가 책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우로보로스는 스스로 자신을 만들어 내고 자신과 결혼하며 혼자 임신하고 스스로를 죽인다!!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뜻하기도하며 하나의 몰락이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다는 의미를 우리에게 전달해 준다. 니체가 몰락시키고 싶었던 핵심은 무엇일까? 신의 피조물인 인간이 신을 부정하고 신을 죽이는 것은 우로보로스가 자신의 꼬리를 먹어 치우는 것과 같지 않을까? 니체는 신의 노예에서 인간을 해방시키고 싶었다. 너무도 읽기 힘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에 니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1. 크리스트교의 신을 죽이다!!

서양에서 신은 보통 크리스트교의 신을 의미한다. 영어에서 'God'는 하느님을 뜻하고, 'god'는 잡신을 뜻한다. 니체가 말하는 신은 잡신이라기 보다는 크리스트교의 하느님을 뜻한다. 그리고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줄기차게 크리스트교의 하느님을 비판한다.

 

, 형제들이여, 내가 창조한 이 신들은 모든 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작품이자 망상이었다! ... 고통과 무능, 이것이 모든 저편의 세계를 만들어 냈다.-54

"신들은 존재하지만, 하나의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신성함이 아닌가?" 귀있는자는 들을지어다.-330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어 니체가 한 말은 참으로 충격적이다. 크리스트교의 하느님이 '인간의 작품이자 망상'이라는 주장! 그리고 고통과 무능이 지옥과 천국을 만들어냈다는 주장은 크리스트교가 가지는 종교적 근거를 송두리채 무너뜨린다. 더욱이 시장에서 줄타기하다가 사고를 당해서 죽어가는 광대에게 차라투스크라는 '악마도 지옥도 없네'라며 헛된 종교적 망상을 부정하는 말을 내뱉었다. 종교를 비판하는 자들은 '종교가 불안 장사를 한다.'고 비판한다. 니체는 종교인들이 저지르는 불안장사를 비판하며 신을 죽이고 있다. 백번 양보해서 인간이 만든 신이 존재한다하더라도 하나의 유일신만 존재한다는 크리스트교의 주장은 성립할 수 없다고 성경 문구를 페러디하여 일갈한다. 크리스트교의 핵심인 유일신 사상을 니체는 무너뜨리고 있다! "변절자들에 대하여"라는 글에서는 십계명의 '나 이외의 신을 섬기지 마라!'라는 조항을 비판한다. 신이 자기의 아이를 돌보지 않았다고 비판하며 심지어 '그에게 아이가 있기나 한가'라는 의문을 제시하며 신을 비꼬고 있다. 니체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비판의 칼날을 들이댄다.

 

참으로 천천히 죽을 것을 설교하는자들이 존경하는 저 히브리사람은 너무 일찍 죽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그의 때 이른 죽음은 많은 사람에게 재앙이 되었다. 그가 이 히브리인 예수가 알고 있었던 것은 선하고 의로운자들의 증오와 함께 히브리사람들의 눈물과 비애뿐이었다.-136

그는 너무 일찍죽었다. 내 나이 만큼만 살았더라면 그는 자신의 가르침을 철회했을 것이다! 그는 철회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고귀한 자였다! 그러나 그는 아직 성숙하지 못했다.-137

인간이 존재한 이래 인간은 너무도 즐기지 못했다. 나의 형제들이여, 이것만이 우리의 원죄다! -162

 

크리스트교가 유대교와 다른 것은 예수의 죽음과 그의 부활이다. 창세기에 시작된 아담과 이브의 원죄를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으로써 씼었다는 크리스트교의 원죄론은 감히 그 누구도 함부로 부정할 수 없는 금기이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어 니체는 크리스트교의 원죄론과 예수의 부활을 철저히 부정한다. '히브리인 예수가 알고 있었던 것은' 그의 때 이른 죽음'과 함께 '증오'의 불길을 만든다. 결국 십자군에서 부터 시작하여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라는 만행의 근본 뿌리가 '예수를 죽인 유대인'이라는 낙인이었다. '히브리사람들의 눈물과 비애'가 인류의 역사 속에 깊게 상처로 남아 있을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니체는 강하게 지적하고 있다. 더욱이 니체는 젊은 예수와 성숙한 예수를 분리하여 예수가 내 나이만큼만 살았더라면 예수의 가르침을 예수가 스스로 철회할 것이라는 파격적 주장을 했다. 아울러, 인간의 원죄를 들먹이며 금욕을 강조하는 크리스찬들에게 니체는 '너무 즐기지 못했다.'는 것이 우리의 원죄라고 일갈한다! 크리스찬들 중에서 니체의 서적들을 금서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니체의 파격적인 주장을 살펴보면 그들의 생각이 일면 이해되기도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의 사상이 많은 사상가들과 일반인들에 의해서 연구되고 그의 책을 탐독하고 있다는 사실은 엄청난 힘을 가진 크리스트교 세력에 대한 비판과 진실을 니체가 대신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신은 하나의 억측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나는 그대들의 억측이 그대들의 창조적 의지보다 멀리 나가지 않기를 바란다.-156

선하고 의로운자들을 조심하라! 그들은 자기 자신의 덕을 만들어 내는 자들을 즐겨 십자가에 매단다. 그들은 고독한 자를 증오한다. ... 성스러운 단순함도 조심하라! 그들에게 단순하지 않은 모든 것은 신성하지 않다. 그들은 불놀이를, 화형의 장작 더미를 좋아한다.-120

한때 의심은 악이었고 자아에 대한 의지도 악이었다. 그대 병든자도 악이었다. 그때 병든자는 이단자가 되었고, 마녀가 되었다.-71

그들은 자신이 가는 길에 핏자국을 남겨 놓았으며, 어리석게도 피로써 진리를 증명한다고 가르쳤다. -169

여기 성직자들이 있다. ... 그들은 사악한적들이다. 그들의 겸손보다 더 복수심에 불타는 것은 없다. ... 그들이 구세주라고 부르는 자가 그들을 굴레에 묶어 놓았다. 거짓 가치와 망상의 굴레다! , 누군가가 그들을 구원자에게서 구원해줄 것인가! -166~167

그대들에게 적이 있다면 그 악을 선으로 갚지는 마라. 그것은 적을 부끄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적이 그대들에게 선한 일을 했음을 보여주어라 -127

 

니체는 신을 부정하며 신을 죽였다. 중세 신중심의 암흑사회를 부정하고 근대 혹은 미래 사회의 창조적 인간! 초인을 예찬한다. 하나의 신을 창조할 수 없다면 모든 신에 대해서 침묵하라는 니체! 그러면서 그는 '하지만 그대들은 초인을 창조할 수 있다.'라며 우리를 격려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했던 시기 마을의 한 할머니가 '예수의 종이되어 선교활동하라!'며 나에게 교회에 다닐 것을 권유했던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유난히도 그 말이 싫었다. '자유인인 내가 어찌 노예가 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을 하며 쓴 웃음을 지었다. 니체는 나와 같은 생각을 먼저했다. 신중심의 시대가 종말을 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의 노예로 사는 최후의 인간들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 항상 새로운 인간! 초인이 되어야한다.

신중심의 무지의 시대가 가고 이성이라는 등불이 대지를 환하게 비추는 현대 사회이기에 신을 부정하고도 살아 남을 수 있다. 만약 중세 서양 사회에서 내가 '신의 종이되라'는 말에 쓴 웃음을 지었다면 나는 '불놀이를, 화형의 장작 더미를' 좋아하는 크리스찬들에 의해서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자신의 신만이 의롭다고 말하는 자, 단순하게 맹목적으로 신을 따르라는 노예 근성을 심어주는 자들은 '성스러운 단순함'으로 세상을 아귀다툼이 벌어지는 지옥으로 만든다. 예수의 부활을 믿고 예수를 구세주라고 믿으며 크리스트교를 정립한자들이 이 망상의 굴레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크리스트교로부터 구원할 것을 니체는 주문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십자군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희생했는가! 크리스트교의 배타성과 폭력성, 야만성을 비판하며 니체는 '어떤 사람이 자신의 가르침을 위해 물속에 뛰어든다해도 무엇을 증명할 수 있는가'라며 반문한다. 마녀사냥, 이단 화형, 종교박해에 맞선 순교 등, 이 모든 것을 부정하며 니체는 '내게 구역질을 일으킨다.'라고 일갈했다.

니체는 마태복음 5장에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 대어라'라는 구절을 더 탁월한 문구를 비판한다. 니체에게는 크리스찬들이 오른뺨을 맞고도 왼뺨을 들이대는 행동은 위선적인 행동이거나 무기력한 노예의 모습으로 보였을 것이다. 니체는 '전혀 복수하지 않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복수하는것이 더 인간적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적이 그대들에게 선한 일을 했음을 보여주'는 행동일 것이다.

니체의 아버지 카를 루트비히 니체는 목사이다. 더욱이 그의 어머니 프란치스카 윌러도 목사의 딸이다. 독실한 크리스찬 집안에서 크리스트교를 맹렬히 비판하는 니체가 만들어졌다. 니체가 진정으로 원한 것은 안티크리스찬일까? 그가 진정으로 원한 것은 무엇일까?

 

2. 크리스트교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다.

니체는 자신의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제5복음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무슨 뜻일까? 분명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에는 '나는 이러한 약속의 땅을 찬양하지 않는다. 그곳에서는 모든 나무 중에서 가장 나쁜 나무, 곧 십자가가 자라났기 때문이다.'(365)라는 반기독교적인 내용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가득차 있다. '안티크리스트' 혹은 '적그리스도'라는 이름의 책까지 저술한 니체가 자신의 책을 크리스트교의 4복음서에 이은 제5복음서라고 말하는 자체가 모순으로 들릴 수 있다.

니체와 비슷한 가정환경에서 자라난 한국의 철학자가 있다. 바로 도올 김용옥이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났다. 그리고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이자 철학자로 한국사회에 많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그런데, 그는 대중강연에서 한국의 기독교를 많이 비판한다. 그의 실날한 비판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눈쌀을 찌푸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나는 도올 김용옥의 삶과 그의 강의를 통해서 니체의 사상을 유추해 보았다.

도올 김용옥의 대중강연과 '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1,2,3'에는 크리스트교에 대한 도올의 생각이 잘 묻어 있다. 도올은 불교가 상좌부불교(소승불교)에서 모든 대중을 구제하는 대승불교로 발전하는 과정을 거친다고 말한다. 그런데, 불교의 위대성은 대승불교에서 신의 반열에 올린 부처를 스스로 부정하는 단계로 까지 발전한 것이라고 말한다. 불교가 중국땅에 이르자 선불교로 발전한다. 임제스님은 '살불살조(殺佛殺祖)' ,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단계로까지 발전한다. 부처의 종이 되는 종교가 아니라, 누구나 깨달은 자, 부처가 될 수 있는 종교가 바로 불교이다. 이것이 불교가 다른 종교와는 다른 불교의 위대성을 보여준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을 통해서 이루려한 최종 목표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나는 판단한다.

니체는 크리스트교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기 위해서 크리스트교의 뿌리를 살폈다. 니체가 주목한 크리스트교의 뿌리는 옹졸한 민족종교인 유대교가 아니라 유대교와 크리스트교를 비롯한 많은 종교에 영향을 준 조로아스터교이다. 조로아스터의 독일식 발음이 차라투스트라인점에 유의한다면, 니체가 차라투스트라의 목소리를 빌려 크리스찬들에게 크리스트교를 새롭게 선불교의 단계로 발전시켜야한다는 계시를 주려했다는 주장이 이해될 것이다.

차라투스트라가 산을 내려오면서 늙은 성자를 보며 "이 늙은 성자는 숲속에 살아서 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아직 듣지 못했구나!"라고 한탄한다. 성자는 신을 사랑하지만 시대는 변하여 중세 신중심의 낡은 시대에서 이성 중심의 근대가 되었다. 더 이상 인간은 신의 노예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제 신의 노예가 아니라 주인으로 살아야한다. 진정한 깨달음을 얻으려면 속세를 떠나서 깨달음을 얻기 보다는 세속에 살면서 깨달음을 얻어야한다. 현실에 뿌리 내리지 못한 진리는 진정한 진리라할 수 없다. 니체는 늙은 성자 처럼 현실의 변화를 깨닫지 못하는 크리스찬들에게 신은 죽었다며 현실을 인정하라고 말한다.

절대신을 믿는 크리스찬들에게 '신은 죽었다.'라는 말은 크리스트교를 부정하는 말로 들릴 수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곳곳에서 '~파멸해야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많이 쓴다. '파멸', '몰락'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니체! 그러나 '파멸''몰락'을 니체는 부정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마치 동양 사상에서 하나의 끝은 새로운 시작의 출발이라는 관점을 떠올린다면 '파멸''몰락'을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인도 힌두교의 시바신이 세상을 파괴해야 브라흐만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듯이, 기존의 체계를 파괴해야만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 신의 노예로 살 것을 강요하는 크리스트교도들이 신은 죽었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이를 받아들일 때만이 크리스트교는 새롭게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선불교에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야만 자신이 부처요 조사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이치와 같다. 니체는 크리스트교가 소승불교에서 대승불교로 발전하는 과정을 거쳤다면, 이제는 선불교의 단계로 발전해야한다고 일갈하는듯하다. 많은 논쟁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부활을 믿고 예수를 신의 아들이라 믿는 크리스찬들이 선불교로까지 발전하기 위해서는 그 신을 죽여야한다는 것이다.

그럼, 신이 죽은 그자리에 누가 있어야할까? 신을 죽인 인간이 이제는 새로운 신을 그 자리에 앉혀야할까? 니체는 '초인'을 말하다. 내가 이해한 초인은, 자신을 새롭게 하려는 자, 자신을 거듭나게하는 자이다. 고사성어로 표현하면, 일일신 우일신(日日新 又日新)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신의 노예로 사는 존재가 아닌 스스로 새롭게 태어나려 끊임 없이 노력하는자! 그 사람이 '초인'이라면 이는 불교의 부처나 보살로 볼 수 있다. '그대들은 모든 구세주보다 더 위대한 자들에 의해 구원받아야한다.'(-170) 는 니체의 말은 구세주에 의탁해서 구원을 받기 보다는 스스로 더 나은 존재로 거듭나려는 초인이 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이는 불교에서 부처가 되라는 말과 같다.

 

고귀한자는 새로운 것과 새로운 덕을 창조하려한다. 반면에 선한자는 옛것을 원하며 옛것이 보존되기를 원한다.-79

 

고귀한자는 예수를 비롯해서 석가모니와 무하마드와 같은 분들이다. 그에 비해서 선한자는 중세 교황과 타락한 성직자들 처럼 고귀한자의 힘을 빌어 권력을 누리고 그 권력을 추종하는 자들이다. 니체가 한명의 진정한 크리스찬이 있었으나 그분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고 말했듯이, 진정한 크리스찬은 예수그리스도이다. 그러나 그 이후에 고귀한자의 힘을 빌려 권력을 누리려는 '선한자'들이 그의 이름으로 크리스트교를 타락시켰다. 니체는 인간 권력의 속성을 꿰뚫어보고 이를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말하고 있다. 진정한 크리스찬이 되려면 예수의 추종자가 되지 말고 예수처럼 삶을 살아가라는 절규이다.

니체의 사상은 불교와 너무도 유사한 점이 많다. 그의 말들과 논리들은 불교에서 힌트를 얻은 것은 아닌가? 의문이 든다. 그의 핵심 사상인 영원회귀 사상 또한 불교의 윤회와 비슷하다. 니체는 말한다. 만약 악령이 어느 날 당신에게 다가와서 네가 살고 있고 살아왔던 삶을 다시 살아야만 한다고 제안한다면 과연 당신을 이를 받아들일 것인가? 영원히 반복될 수 있는 삶이라는 문구에 윤회의 수레바퀴가 떠오른다. 물론, 니체의 영원회귀가 윤회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가설로 자신의 삶을 다시 살아도 좋을 만큼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이 순간을 행복하게 살라는 니체의 제안일 뿐이다. '프레임'을 쓴, 최인철 교수가 현재를 잘 살아가고 싶다면 지금 이 삶이 2번째로 주어진 삶이라고 생각하고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라고 제안했다. 니체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서 이 삶이 몇만년을 다시 반복해서 살아도 좋을 만큼 현재를 사랑하며 살아가라고 말하있다. 바로 아모르 파티(Amor Fati)를 말하고 있다 .

니체의 사상이 불교에서 많은 힌트 혹은 영감을 얻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고, 니체가 모든 불교를 긍정한 것은 아니다. 81쪽에 '죽음을 설교하는 자들'은 누구일까? 니체는 '노란 사람들'이라고 지적한다. 노란 사람들은 노란 가사를 입은 승려를 뜻한다. '병자나 노인이나 시체와 마주치면 그들은 즉시 '삶은 부정되었다.'라고 말한다.'라고 지적하며 자신이 죽음을 설교하는자들이라며 비판하는 사람들이 불교도들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육욕은 죄다.', '삶은 고통일 뿐이다.'라고 지적하며 불교에 대해서 비판하는 니체의 모습이 무척 낯설어 보인다. 그러나 진정한 크리스찬이 예수이듯이, 진정한 불교도는 부처일 수 밖에 없다. 기존 종교조직에 의탁해서 그 권위로 먹고 살려하며, 그 종교의 노예로 살려는 사람들을 니체는 비판한다. 진정한 주인으로서의 삶을 살려한다면 스스로 예수가 되려해야하며, 스스로 부처가 되려해야한다. 그러한 존재가 바로 '초인'인 것이다.

크리스트교도인들의 숫자가 시간이 지날 수록 줄어들고 있다. 이러한 위기는 예견된 것이다. 더 이상 신의 종이되기를 원하는 자가 줄어들고 있다. 스스로 초인이되려는 자가 늘어나는 현실 속에서 크리스트교가 다시 태어나려면 니체의 말에 귀기울여야할 것이다.

 

3. 초인을 꿈꾸다.

'비밀로 가득찬 숨은 신이있다. 참으로 그는 아들에게 올 때 조차 샛길로 왔다. 그리하여 그의 신앙의 문에는 간음이란 것이 있게된 것이다.'(146)라며 니체는 노골적으로 크리스트교를 비판한다. 신은 죽었으며, 신의 노예로 살기보다는 초인이 되라고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그렇다면 초인이 되려면 어찌해야할까? 초인은 어떠한 존재인가?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을 평등하다고 보지 않았다. '평등의 설교자'를 격멸하며 그들을 치명적인 독이 있는 타란툴라와 같은 존재로 보았다.

 

설령 내가 자신의 오류를 밟고 걸어 다니더라도 나는 여전히 그들과 그들의 머리 위에 있을 것이다. 인간은 평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의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원하는 것을 그들은 감히 원해서는 안 될 것이다!-233

시장에서는 아무도 우월한 인간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런데도 거기서 말하고 싶은가. 좋다! 하지만 천민은 눈을 깜박이며 말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고"라고. ..."....신 앞에서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 신 앞에서라고! 그러나 이제 이 신은 죽었다. -502~505

 

만인이 법앞에 평등하다면, 법질서가 붕괴된 사회에서는 평등은 사라진다. 만인이 신앞에 평등하다면 신이 사라진 사회에서는 평등도 사라진다. 우월한 인간과 천민 사이에 구분이 시작될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를 보더라도 고위 공직자가 법위에 군림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또한 우리 사회에서 신은 사라졌다. 우리 사회는 평등하지 않다. 인간들 사이에서 지적 수준과 판단력, 정의감이 평등하지 않다. 이번 대선에서 자신의 탐욕을 위해서 수준 이하의 후보에게 투표한 자가 있지 않은가! 인간이 평등하지 않기에 민주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평등하다는 신화를 쓰고 있지 않은가!

니체는 인간을 어떻게 구분하고 있을까? 인간의 맨 아래에는 천민이 자리하고 있다. '권력의 천민, 문필의 천민, 그리고 쾌락의 천민들과 함께 살지 않기 위해서였다.(179)'라고 외치며 천민을 경멸한다. 니체가 말한 천민이 우리사회에서도 널려 있지 않은가? 권력에 아부하며 국민을 속이는 언론의 천민, 검찰의 천민, 돈의 천민, 무속의 천민 ... 삶을 주인으로 살기 보다는 권력과 돈, 탐욕을 위해서 노예로 살기를 즐거워하는자들이 바로 천민인 것이다. 그러한 천민을 니체는 경멸하고 있다.

천민 위에는 누가 있을까? '우월한 인간'이 있다. 그러나 우월한 인간은 천민으로 언제나 떨어질 수 있는 존재들이다. 신은 죽었다는 사실을 직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신을 만들어내는 나약한 존재들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4부에 재미 있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1~3부가 차라투스트라의 경구(잠언)들로 역여있다면, 4부는 소설적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두명의 왕, 일자리 잃은 교황, 사악한 마술사, 자발적으로 거지가 된 자, 그림자인자, 늙은 예언자, 정신의 양심을 지닌자, 더없이 추착한자들이 차라투스트라의 영토인 동굴에 모여 만찬을 즐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들을 우월한 인간이라 부르며 자신의 동굴로 인도했으나, 그들은 차라투스트라가 없는 사이에 나귀를 신으로 만들었다. 차라투스트라는 분노했다. 그리고 사자의 울부짖음이 들리자 순식간에 그들은 사라졌다. 차라투스트라는 '동정이다. .... 우월한 인간들에 대한 동정이다! ... 좋다 그것도 이제는 끝이다.!'라고 되뇌이며 이글거리는 태양을 바라보며 동굴을 떠났다.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의 동굴로 초대했던 우월한 인간은 초인이 되지 못하고 천민의 나락으로 떨어진 겁쟁이들이었다. 그리고 니체는 그들에 대한 연민을 거둬들인다.

우리 사회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니체가 말한 우월한 인간이다. 언제나 진실을 보았으나, 그 진실을 잊어 버리고 다시 타락의 길에 빠져든다. 박근혜라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았고, 그녀의 무능력함과 탐욕스러움에 분노하여 많은 우월한 인간이 탄핵의 촛불을 들었다. 그런데, 5년 후에 다시 최악의 선택을 했다. 그러하기에 니체는 이러한 우월한 인간에 대한 동정을 거두어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니체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인간은 무엇일까? 바로 '초인'이다. 초인이 되기 위해서는 세가지 변신을 해야한다. 그것이 바로 '낙타 - 사자 - 아이' 이다. 낙타는 짐을 잔득 실고 사막을 횡단한다. 주인의 말을 묵묵히 수행할 뿐이다. 이러한 존재는 천민이나 중세 시대 신의 노예와 비슷한 존재들이다. 종처럼 주인의 말에 순종할뿐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말하지 못한다. 낙타의 상태에서 깨어나서 사자가 된자는 용과의 대결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강한 이빨과 발톱으로 주장한다. 그렇다고 사자가 초인인 것은 아니다. 사자는 아이가 되어야한다. 부드러움은 강함을 이긴다. 강한 사자가 부드러운 아이가 되어야 '자신의 세계를 얻'을 수 있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아이가 되어야 초인이 될 수 있다. 민주화 운동가를 만나본 사람들은 '평소에 이렇게 조용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자가 어떻게 서슬퍼런 독재정권에 맞서 민중의 요구를 강하게 주장하는 투사가 되었는가?'라며 의아해한다. 진정한 초인은 아이의 부드러움과 아이의 가능성과 창조성을 품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니체가 말한 '초인'을 보다 자세히 탐구해보자. 니체가 칭찬하는 인간의 모습이 바로 초인의 모습일 것이다. 니체가 이상으로 여긴 인간상을 추적해보자.

 

이제 그대들에게 명하노니 나를 버리고 그대들 자신을 찾도록하라. 그리고 그대들 모두가 나를 부정하게 될 때 비로소 나는 다시 그대들에게 돌아올 것이다. -146

언제나 학생으로 머물러 있는자는 선생에게 제대로 보답하지 못한다. 그대들은 어찌하여 내게서 월계관을 잡아채려하지 않는가? 그대들은 나를 숭배한다. 어느날 그 숭배가 무너진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 입상에 깔려 죽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 -146

삶은 언제나 자신을 거듭해서 극복해야한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덜거덕거리는 표지가 되어야한다. -185

 

초인은 거급해서 극복해야하는 그 무엇이다.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보다 나은 자, 보다 새로운 자가 되려고 끊임 없이 노력하는 자이다. 임제스님의 '살불살조(殺佛殺祖)'라는 사자후 처럼, 스승을 넘어선 존재가 되기 위해서 끊임 없이 노력하는 자이다. 스승의 제자로만 남아있으려는 자는 영원히 스승이 될 수 없다. 그러한 자는 사이비교의 신도로 전락할 우려가 많은 노예이다.

니체는 용기를 예찬한다. 용기는 초인이 갖추어야할 기본중에 기본이다.

 

용기는 최고의 살해자다. 공격하는 용기야말로. 모든 공격 속에는 낭랑하게 울려 퍼지는 승리의 소리가 있기 때문이다.-283

용기는 죽음 조차 죽인다.-284

뱀이 목구멍 속으로 기어들어 간 그 양치기는 누구인가? ...어쨌든 양치기는 내가 고함을 쳐 말한 대로 물어뜯었다. 제대로 물어뜯었다! 뱀 대가리를 저 멀리 뱉어버렸다! 그러고는 벌떡 일어섰다. 더는 양치기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변화한 자, 빛에 둘러싸인자로서 그는 웃고 있었다. -288

 

뱀에 두려워하기 보다는 뱀의 대가리를 물어 뜯는 용기를 가진자를 니체는 예찬했다. 더러움에 맞서 싸우는 용기는 니체의 말대로 '죽음 조차 죽인다.' 어떠한 두려움과도 맞서 싸울 수 있는자가 초인이다. 용기 있는 초인은 타인이 만든 선과 악의 구분도 붕괴 시킨다.

 

선과 악에서 창조자가 되려는 자는 우선 파괴자가 되어 가치를 파괴해야한다. 이렇게 하여 최고의 악은 최고의 선에 속한다. 그러나 최고의 선은 창조적인 선이다. -213

굶주리고 난폭해지고 고독해지고 신을 믿지 않는자. 사자가의 의지는 스스로 이렇게 되기를 원한다. 노예의 행복에서 해방되고, 신들의 경배에서 구제되고,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남을 두렵게하고, 위대하면서 고독해지는 것. 진실된자들의 의지는 이와 같은 것이다. -189~190

 

선이 악이되는 시대! 악이 선이되는 시대! 선과 악의 개념 자체가 그 시대 지배이데올로기의 산물인 경우가 많다. 다산(多産)이 무지한 국민들의 모습이었던 것이, 지금 다산은 애국의 상징이 되었다. 무엇이 변하였는가? 지배 이데올로기가 변했을 뿐이다. 변한 것은 없다. 초인은 선과 악을 창조적으로 파괴한다. 누군가에 의해서 주입된 선악이 아니라, 자신이 선악을 새롭게 규정한다. 그러하기에 신에 의지해 살기 보다는 사자처럼 당당하게 살아간다. 신의 노예이기 보다는 고독한 초인의 길을 선택하길 니체는 염원한다.

그렇다면 초인의 뒷모습은 어떠할까?

 

인간들 사이에서 배고픔과 갈증으로 죽고 싶지 않은자는 어떠한 잔으로든 마실줄 알아야한다. 그리고 인간들 사이에서 깨끗하게 남아 있고자하는 자는 더러운 물로도 씻을 줄 알아야한다.-262

권력이 자비를 베풀고 눈에 보이는 세계로 내려올 때, 나는 그러한 하강을 아름다움이라고 부른다. -217

나는 삶을 완성하는 죽음. 산자에게 가시가 되고 굳은 맹세가 될 죽음을 그대들에게 보여주고자 한다. 삶을 완성하는 자는 희망에 차 있는 자들과 맹세하는 자들에 둘러싸여 승리에 찬 죽음을 맞는다. ... 나는 그대들에게 나의 죽음을 권한다. 내가 원하기 때문에 나를 찾아오는 자유로운 죽음을. -134~135

 

인간들 사이에서 살고자 한다면 어떠한 잔도 가려서는 안되며, 깨끗하게 살기 위기 위해서는 어떠한 물로도 씻을 줄 알아야한다. 정치를 하려면 구정물에 손을 담글 각오를 해야하는 것처럼! 초인은 눈앞에 더러움을 피하려 대의를 망각하지 않는다. 권력을 쥐고 나서는 칼을 쥔 망나니 처럼 폭주하지 않는다. 자비를 베풀고 서민들 사이로 내려올 때 우리는 그러한 지도자를 사랑한다. 고 노무현 대통령이 그러했던 것 처럼! 죽음을 대할 때도 초인은 죽음을 삶의 완성으로 본다. 마치 이순신 장군 처럼 죽음에 임해서도 당당하며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승리에 찬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죽음과 함께 임진왜란도 끝났다. 그렇게 초인은 떠나가는 뒷모습도 아름답다.

인간이라고 모두 같은 인간이 아니다. 삶이라고 모두 같은 삶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초인과 같은 고귀한 삶을 살고자한다면 지금 당장! 끊임 없이 새롭게 거듭나려 노력해야한다.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만이 '더는 천상의 모래밭에 머리를 처박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머리를 처들'(56~57)고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다.

 

중학생에 다닐때, 천원짜리 '작은 책'이 있었다. 천원으로 유명한 책들을 살 수 있었다. 그때 산책중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도 있었다. 재미있는 소설책으로 알고 샀던 그 책은 너무도 어려웠다. 서문과 니체에 대한 소개글을 읽고는 책장을 덮어 버렸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고등학교 윤리 선생님은 대단한 학생이라며 나를 칭찬해주었다. 그리고 세월은 흘렀다. 다시 한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에 도전장을 던졌다. 쉽지 않은 독서의 시간이었다. 문장이 이해되지 않아서 같은 문장을 몇번씩이나 반복해서 읽기도 했으며, 한쳅터를 읽고 나서는 전혀 내용이 이해되지 않아서 다시 한번 읽은 쳅터도 너무도 많았다. 그렇게 힘들게 읽으면서 뿌듯한 점이 있었다. 그것은 나의 정신이 많이 성장했다는 사실이다. 그때는 그렇게 이해되지 않던 것이 이제는 이해되는 부분이 많아졌다. 그리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에서 가장 아름다운 글귀도 발견했다.

 

우리가 삶을 사랑하는 것은 삶에 익숙해져서가 아니라 사랑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74

더러워지지 않으면서 더러운 물을 받아들이려면 우리는 먼저 바다가 되어야한다. -20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어서 행복하다는 말이 있다. 우리가 삶에 익숙해지기 보다는 사랑에 익숙해진다면 우리는 삶을 사랑하고 우리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 그렇게 사랑에 익숙해지면 우리는 바다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아름다운 독일어 경구들로 이루어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생각날때 마다 펼쳐 읽으며 가슴속에 담을 문장을 찾아야겠다. 그러면 그 문장은 나의 가슴에 별이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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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1-09 15: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루님 이달상 추카합니다
11월 건강 잘 챙기세요
주변에 코로나 확진 급증입니다 ㅜ.ㅜ

강나루 2022-11-10 04:41   좋아요 0 | URL
scott님, 감사합니다.
저는 이미 10월달에 코로나19에 걸렸습니다.
그래도 조심해야죠.
scott님도 건강 잘 챙기세요^^

서니데이 2022-11-09 15: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강나루 2022-11-10 04:41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도 행복하고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이하라 2022-11-09 15: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평화로운 시간 되세요.^^

강나루 2022-11-10 04:42   좋아요 0 | URL
이하라님 감사합니다.
이하라님도 행복하면서 평화로운 시간 보내세요.^^

thkang1001 2022-11-09 18: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한 주 되시길 바랍니다.

강나루 2022-11-10 04:42   좋아요 0 | URL
thkang1001님 감사합니다.
행복과 사랑이 넘치는 한주 보내세요.^^

bookholic 2022-11-09 2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 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늘 좋은 책 소개해 주셔서 감사하고요..^^

강나루 2022-11-10 04:43   좋아요 1 | URL
bookholic님 감사합니다.
좋은 책으로 봐주시는 bookholic님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마루☆ 2022-11-09 22: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당선 축하드려요. ~^^

강나루 2022-11-10 04:43   좋아요 1 | URL
마루☆님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하나의책장 2022-11-09 2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강나루 2022-11-10 04:44   좋아요 0 | URL
하나의책장님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22-11-10 07: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처음에 말씀이 있었다‘는 구절이 중세 시대를 열었다면,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말이 정신사적 의미에서 중세를 끝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만, 니체가 말한 기독교(그리고 종교)의 문제가 교리상의 문제인지, 이러한 도그마를 바탕으로 한 집단(교회 등)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인지 더 생각하게 됩니다. 인류의 4대 성인이라고 하는 분들, 각자가 한 명의 초인이었다는데 큰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이 창시한 종교/사상이 배타적인 사상으로 자리한 것이 인류사에 미친 종교의 악영향이라면, 어쩌면 초인이 문제가 아니라, 초인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더 중요한 것은 아닐까를 강나루님의 글을 통해 생각해 봤습니다... 강나루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

강나루 2022-11-10 08:15   좋아요 1 | URL
겨울호랑이님은 내공이 깊으시네요.
한수 배웁니다.
초인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중요하다는 말에 깊이 공감합니다.

겨울호랑이 2022-11-10 08:36   좋아요 1 | URL
에고 아닙니다. 강나루님의 깊은 사색을 따라가다보니, 초인 이후의 세계에 대해 조금 생각해봤을 따름입니다. 모두가 초인인 세계에서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세계가 된다면 정말 좋은 세상에 될 것이란 생각을 해봤습니다. 강나루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좋은 아침 되세요! ^^:)

thkang1001 2022-11-10 09: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강나루 2022-11-11 06:15   좋아요 0 | URL
thkang1001님, 감사합니다.^^
 
메타버스 스쿨혁명 - 메타버스세대 아이들을 위한 미래 교육의 방향
김은형 지음 / 서사원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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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버스 스쿨혁명!! 얼마나 거창한 제목인가! 메타버스라는 뜨거운 주제로 우리의 학교를 혁명하겠다는 거창하면서도 가슴 떨리는 제목이다. 거창한 제목은 기대도 거창하게 만든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과연 저자가 무엇을 말하고자하는지 의문이들었다. 저자는 메타버스로 어떻게 학교 혁명을 하고자하는 것일까? 저자의 책을 내가 제대로 읽지 못한 것인지, 저자가 제대로 책을 쓰지 못한것인지 모르겠지만, 책의 내용은 제대로 나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메타버스 스쿨혁명 이라는 제목에 걸맞는 책을 쓰려면, 우선 메타버스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이러한 메타버스를 학교 수업 현장에 어떻게 적용시킬지를 설명한 다음, 이러한 메타버스를 학교에 적용시켜 우리 교육을 어떻게 변화시킬지를 서술해야하지 않을까? 그래야만 명실 상부한 '메타버스 스쿨 혁명'이라는 하나의 책이 빛을 발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에는 메타버스를 어떻게 수업현장에 적용시킬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내가 이 책에서 기대했던 핵심이 빠진 서술은 책에 집중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더욱이 메타버스에 대한 설명도 뜬구름 잡는 듯한 공허한 말들의 연속으로 느껴졌다. 저자는 과연 메타버스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인지, 아니 정확히 말하면 메타버스에 대해서 책을 쓸 정도로 메타버스에 대한 해안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저자가 제시한 메타버스 시대의 새로운 교육방향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1. 수행적 영성 키우기

2. 자급자족 생활능력 키우기 -82"

 

이 책을 읽으며 저자가 불교에 심취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이러한 저자의 모습은 메타버스 시대의 새로운 교육 방향에도 그대로 투영되었다. '수행적 영성 키우기'라는 말은 이책이 교육관련 서적인지, 불교 서적인지 의심케하는 표현이었다. 불교에 심취한 사람들이라면 좋아할 표현이지만, 미래 교육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책을 펼친 나로서는 매우 어색한 표현이다. 불교적 표현들을 미래 교육에 맞는 표현으로 수정해서 제시했다면 읽는데 불편함이 없었을 것이다.

두번째로 제시한 '자급자족 생활능력 키우기'라는 표현도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야하는 학생들에게 어울리는 표현인지 의문이 들었다.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 , 환경 파괴 등을 이야기하며 대안적 삶으로 '자급자족'적 생활을 이야기할 수 있으나, 자본주의 사회가 고도화된 메타버스 시대를 소개하는 책에서 '자급자족'이라는 표현은 매우 어색해 보인다.

외래 남발로 읽기 불편했던 쳅터1, 2를 지나서 쳅터3은 비교적 읽기 편했다. 그런데, 쳅터3'메타버스시대 라이프스타일 교육'이라는 소제목에 보다는 코로나19 이후 학교 현장은 어떻게 변화하고 변화해야하는지에 대한 서술이 주류를 이뤘다. 가장 불편했던 것은 홈스쿨링이 코로나 19 시대 교육의 모습으로 제시한 것이다. 책의 곳곳에서 홈스쿨링에 대한 언급이 되어 있는 것은 공교육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유쾌하지는 않았다. 공교육 현장에 메타버스를 끌어들일 방법을 제시하기 보다는 홈스쿨링을 받아들이라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또한 쳅터3'메타버스 시대 라이프스타일 교육'이라는 표현보다는 '코로나19 이후의 라이프스타일 교육'이라는 소제목이 더 어울려보였다. 미래교육에 관한 책을 쓰다가 갑자기 주제를 메타버스로 변경하면서 쳅터3이 메타버스 보다는 미래교육 전반에 대한 글로 쓰여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글귀는 눈에 띈다. 그 몇가지를 공유해보자.

 

"선한 영향력으로 사육되는 삶을 경계하라."-35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는 서양 속담이 떠오르는 문장이다. 우리에게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구글, 유튜브, AI 등이 편리성이라는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지만, 그 속에 무비판적으로 살다보면 우리는 사는 것이 아니라 '사육'될 것이다. 조지 오엘이 '1984'에서 말한 빅브라더가 우리를 사육할 수도 있다. 이는 영화 '메트릭스'의 또 다른 버젼의 디스토피아가 펼쳐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자각해야한다. 온종일 게임에 빠져 사는 학생들을 보면서 어쩌면 우리는 게임이라는 철창에 갖혀 사육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상품권력 사회에서 생각의 한계는 삶의 한계를 만든다."-43

 

메타버스 사회에서 주체적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소양 교육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빨간약과 파란약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는 기로에 주인공 레오가 잠시 머뭇거린다. 매트릭스 세계에서 빨간약을 먹고 현실로 돌아올 수 있다면 우리는 주체적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만일 파란약을 선택한다면 이는 그의 짧은 생각의 한계속에 갖혀서 매트릭스의 노예로 살 것이다. 주체적 인간으로 살 것인지, 메타버스의 노예로 살 것인지는 우리 생각의 한계가 어디인가에 달렸다. 메타버스는 인간을 사육하는 사육장이 될 수도 있고 인간이 창조한 새로운 세계일 수도 있다. 우리의 생각의 범위에 따라서....

 

"자신이 거했던 곳이 픽션의 세계임을 '각성'하고 다시 메타픽션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타자와 대화 나누듯이 자신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메타버스의 미래는 희망적이다."-68

 

장자에는 나비꿈을 꾸고 자신이 나비꿈을 꾼 것인지, 나비인 자신이 인간의 꿈을 꾸는 것인지 분간하지 못했다. 장자도 분간하지 못했던 것을 우리가 할 수 있다면 메타버스의 미래는 희망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교육은 과연 어떠한 교육을 해야할까? 저자가말한 명상을 통한 영성 교육이 해답일까? 저자의 의견을 많은 사람이 동의할까? 나로서는 장담할 수 없다.

 

기대가 컷던 것일까? 책을 읽고 해답을 얻은 듯한 상쾌함은 없었다. 에필로그에는 필요없는 내용들이 많았다. 글을 간결하게 썼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여러가지 잡념이 밀려오면서 좋은 제목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좋은 제목이란 무엇일까? 책을 많이 팔게 만드는 제목일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메타버스 스쿨혁명'이라는 제목은 상업적인 면에서 성공한 제목이다. 그러나, 책의 내용을 명확하게 전달하여 독자가 책을 선택하는데 도움이 되는 제목은 아니다. 과도한 제목에 끌려 책을 선택한 독자에게는 실망감을 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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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 철학자 강신주 생각과 말들 EBS 인생문답
강신주.지승호 지음 / EBS BOOKS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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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자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강신주이다. 한 동안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그를 잠시 잊고 지냈다. 그런데, 텔레비젼에 다시 모습을 보인 그는 너무도 병약해져 있었다. 건장한 체격에 자신감 넘치는 강한 목소리의 철학자는 노쇠하여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병자의 모습이었다.순간 나의 머릿 속에는 강신주가 혹시 불치병에 걸린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도 만족할만한 정보를 얻기 힘들었다. 내가 무관심했던 사이에 강신주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 무척 궁금했다. 불교방송에 나와서는 책을 쓰느라 무리한 것이 원인이라고 말했다. 나의 상식으로는 이해 되지 않았다. 아니, 책을 쓴다고 그렇게 병약해진다는 것이 말이되는가? 그때,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라는 책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분명, 강신주가 병약해진 이유가 쓰여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제목만 본다면, 강신주가 삶을 포기하려했다가, 어떠한 계기로 삶을 되찾는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책을 펼쳐 보았다. 


  책을 펼치는 순간, 내가 강신주의 낚시질에 걸려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강신주가 나를 속이려하지는 않았을지라도, 나는 그가 정한 제목에 낚였다. 5권의 책을 쓰려고 동시에 집필을 시작했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게 되었단다. 정신이 몸을 이끌었던 시간이 지나가고, 이제는 몸의 말을 들어야하는 상황이 되었단다. '철학 vs 철학'이라는 엄청난 두께의 책을 쓴 그가, 이제는 무척 두꺼운 책을 동시에 5권을 집필하려는 욕심을 부리다가 몸이 병약해졌다. 강신주의 몸도 나이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했다. 강신주는 병약해짐으로써 노인의 쇠약함을 이해하게 되었다며 쇠약해짐으로서 얻은 장점을 말하기도 했다. 철학자는 불행속에서도 철학적 사유를 잃지 않는다는 놀라운 사실을 목도했다. 이렇게 나의 상상력과는 전혀 다른 결론을 들었지만, 그덕에 이책을 열심히 읽었다. 

  강신주는 자본주의를 싫어한다. 아니, 격멸한다. 그는 "하늘은 더불어 있는 것이지 누가 소유하는 공간이 아니에요."(35쪽)라며 자본주의의 기본인 '소유'를 배격한다. 유현준 교수는 '공유'라는 말을 싫어한다고 밝혔다. 반면 강신주는 공유를 좋아한다. 철학자와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건축가의 차이는 '공유'라는 개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지점에서 극명하게 차이가 난다. 모두가 함께 더불어사는 대동 세상을 꿈꾸는 강신주! 반면, 자본주의 시대에 뿌리박은 유현준! 우리는 어느 쪽 삶을 살아가야할까? 

  이상은 '공유'로 대표되는 대동세상을 꿈꾸지만, 현실은 '사유'에 기반한 자본주의 사상에 뿌리 내릴 수 밖에 없지 않을까? 공유지의 비극을 말하지 않더라도, 이번 대선에서 보수당 후보가 당선된 것은 우리 사회가 '공유' 보다는 '사유'를 더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공공 임대 주택을 지어 청년 주택난을 해결하겠다는 이재명 후보의 공약에 많은 사람들이 난색을 표명했다. 작은 평수라도 내것을 원하지, 임대 주택에 왜 사는가! 라며 열변을 토하는 민주당 지지자를 보기 까지 했다. 우리 사회는 뼈 속까지 자본주의 체제에 물들어있다. 우리의 진보 세력들이 욕망에 충실한 국민의 마음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자신의 이상으로 국민을 이끌려했다. 우리사회는 배고픈 소크라테스보다. 배부른 돼지를 원한다. 그것이 이번 대선 결과로 나타났다. 

  "자본주의가 파괴하지 않고 남겨둔 마지막 공동체"(193쪽) 가족! 1인 가구가 증가하고, 가족이 해체되고 있다. 이제 자본주의는 가족에게까지 파고든다. 어쩌면 이제 신자유주의는 최후의 보루인 가족도 해체할것이다. 1인가구가 증가하면서 예전에는 가족 내에서 해결하던 일들이 이제는 시장에 맡겨질 것이다. 자본주의 편리성과 맞물려 이는 너무도 급속히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한 자본주의의 무서운 질주를 지적하며, 자본주의에 대한 맹렬한 비판을 가한다. 

  억압 구조(명령하는 자와 명령을 듣는 자의 구조)의 전복!!, 신자유주의와 벤담적 사유의 전복!! 핏대를 세우며 새로운 사회를 추구하는 강신주! 그는 페미니즘도 벤담적 사유론을 벗어나지 못했다며 강한 비판을 한다. 나로서는 강신주의 급진적 주장이 버겁기만하다. 그렇다면, 억압구조의 전복, 신자유주의와 벤담적 사유의 전복을 통해서 강신주는 어떠한 사회를 만들려고하는가? 그리고 이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하는가? 강신주는 강하게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하지만,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대안을 제대로 제시하지는 못했다. 아니, 다른 책에서 새로운 사회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을 제시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의 내용만으로는 강신주의 이상사회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과 실현 방법을 알 수 없다. 강신주의 과격한 주장을 읽으며, 자본주의를 전복시킨 후, 그 다음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자본주의 시스템을 붕괴시키면, 인류의 삶 자체가 불가능할 수도 있지 않은가?

  4차 산업혁명과 기후 위기에 대한 강신주의 생각은 무엇일까? 강신주는'바둑판을 뒤엎어라.'(133쪽)라고 말한다. 바둑을 잘두는 전문가에게 당할 수밖에 없다며, 판을 뒤집으라고 강신주는 강변한다. 전문가를 양산하는 체제 속에서는 실업자는 증가할 수밖에 없다. 즉, 하나 밖에 못하는 전문가가 되지 말라고 강신주는 주장한다. 이어령 교수가 말과 경쟁하지 말고 말에 올라타라고 조언했다. 그런데, 강신주는 판을 뒤집어 엎으라고 한다. 역시 강신주의 해법은 더 과격하다. 

  기후 위기를 막기 위해서 채식주의자가 된 사람들이 있다. 강신주는 채식주의자에 대해서도 살생을 하지 않는 다는 착각을 버리라고 말한다. 그리고 인간은 자족적이지 않기에 살생을 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또한 채시주의자에게 식물을 먹는 것은 살생이 아닌가?라며 채식주의자를 비난하는 자들에 대해서도 '최소한의 살생을 하려 노력'하는 채식주의자를 비난하지 말것을 당부한다. 그렇다. 채식주의자도 살생을 하지 않느냐며 비난하지 말자. 그들은 최소한의 살생을하려 노력하는 자이다. 우리는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 생명을 빼앗아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는 존재이다. 


  오랜만에 강신주의 책을 만났다. 이번책은 과거 강신주의 책을 정리하는 느낌의 책이다. 그리고 강신주가 자본주의에 대해서 무척이나 염증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단순한 비판의 수준을 넘어선다. 예전 같으면 강신주의 주장에 많은 공감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도 변했다. 강신주의 주장에 현실성이 없어 보인다. 한예로 면접장에서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것을 합격을 위해서 좋아한다고 말해야하는 세상을 강신주는 비판한다. 당당하게 카프카를 좋아한다고 말해야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나는 카프카를 그토록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카프카를 소재로 콘텐츠를 만들라고 조언하고 싶다. 크리에이터가 되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찾으라고 말하고 싶다. 현실에서 가능성을 보지 못하고 현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현명한 처세술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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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06 07: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9-06 07: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22-09-06 11: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살이 빠진 게 무리해서 였군요.
저도 좀 놀랐습니다. 전 다이어트를 하나 했습니다.
요즘 젊으나 늙으나 다이어트 하던데 나이들어 다이어트는
별로 권할만하다 게 못되는 것 같더군요.
암튼 한꺼번에 5권을…? 무리하다 못해 위험했음 것 같습니다. 제가 알기론 곧 60이 가까운 줄 아는데ᆢ
요즘 강신주 인기가 예전만 같지는 않죠? 사람들은 TV에 자주 안 나오면 그렇게 생각한다더군요. ㅋ

강나루 2022-09-06 18:54   좋아요 1 | URL
나이가 60 가까이 인데도 집필에 대한 열의는 크더군요.
하루에 2시간 집필할 수있는 체력 밖에 안된다고해요.
그런데도 목표로한 책을 집필하려 노력하네요.

이하라 2022-09-08 13: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행복하고 풍성한 한가위 보내세요.^^

강나루 2022-09-09 04:57   좋아요 1 | URL
이하라님, 감사합니다.
이하라 님도, 풍요로운 한가위 보내세요^^

thkang1001 2022-09-08 14: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행복하고 풍성한 한가위 보내세요!

강나루 2022-09-09 04:57   좋아요 0 | URL
thkang1001님 감사합니다.
언제나 한가위 처럼 풍성하고 여유있는 시간 보내세요.^^

thkang1001 2022-09-09 08: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강나루 2022-09-16 19:42   좋아요 0 | URL
thkang1001님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scott 2022-10-07 14: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이달상 추카 합니다!
건강 잘 챙기세요 ^^

강나루 2022-10-08 05:4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코로나19로 일주일 동안 고생하고 있습니다. 이제 좀 괜찬아 지네요. 감사합니다.
scott님도 건강 잘 챙기세요.^^

이하라 2022-10-07 14: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강나루 2022-10-08 05:47   좋아요 2 | URL
이하라님, 감사합니다.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

thkang1001 2022-10-07 16: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주말과 휴일 보내세요!

강나루 2022-10-08 05:47   좋아요 1 | URL
thkang1001님, 감사합니다.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

mini74 2022-10-07 21: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축하드려요 ~ 연휴 즐겁게 보내세요 *^^*

강나루 2022-10-08 05:48   좋아요 1 | URL
mini74님, 감사합니다.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

서니데이 2022-10-07 22: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

강나루 2022-10-08 05:48   좋아요 2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22-10-10 08: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의 글을 읽으며, 서로 다른 처지에 놓인 이들의 장기 목표와 단기 목표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궁극적으로 지향점으로 가야 할 방향은 같은 곳일지라도 활동가는 운동을 위해서 보다 큰 힘을 모으기 위해 비판점에도 불구하고 단기 목표를 추구하는 반면, 지향점을 제시하는 사상가는 모두까기(?)를 보여주며 현실성 없어보이는 이상향을 제시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수의 대중들은 이러한 점을 모두 이해하고 자신의 관점을 형성하는 과제를 이로부터 부여받겠지요... 강나루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

강나루 2022-10-10 13:54   좋아요 2 | URL
장기 목표와 단기 목표로 나누어 발화자의 목표까지 나누어 생각할 수 있겠네요.
감사합니다.

보보코 2023-05-17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상과 현실은 같은겁니다. 이상을 품어야 극복할려는 현실이 보이는거고. 반대로 현실에 순응하게 되면 체념하는 현실만 보며 살아가는거죠. 자본주의가 나쁜데, 그게 불편하니 애써 그건 이상이야. 이뤄질 수 없어. 자위하지 말고요. 본인이 체념하는 현실 속에서 아무것도 변할려고 하지 않을려고 하는 비겁한 사람이 아닌지 스스로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대안이요? 대안 얘기할 때 이미 끝난겁니다. 강신주의 말에 찔리는데 비판 할 수 없으니 대안 타령하는건데요. 그건 할 말이 없기 때문이거든요. 본질을 건드렸는데 할 말은 없고 그래서 대안이 뭔데? 이러는건데요. 대안은 사랑, 연대로 뭉친 공동체죠. 대안이 없다고 하지 마세요. 지금 당장 불이 났는데, 불 끌 생각보다 불끄고 나서 뭐할건데? 대안있어? 이러는거와 같죠. 참 안타깝네요.

강나루 2023-05-17 20:40   좋아요 0 | URL
님은 이상주의자로 사세요.
난 이상을 품지만 현실 감각을 잃지안는 현자로 살겠습니다.
이상만으로 살다가 죽은 조광조와 같은 삶은 싫네요.
김대중 대통령이 말씀하셨죠
철학자의 이상과 상인의 현실 감각을 가지고 살라고요.
현자는 불을 끈서도 불을 끄고난 이후를 생각합니다.

보보코 2023-05-18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인의 문해력 지수가 꼴찌인 이유가 있나봅니다. 이상과 현실은 같다는데 무슨 말을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강한 이상을 품어야 극복할려는 현실을 본다는 말이 어려우면 심각한겁니다. 모든 문명과 인간은 이상을 품어 극복할려는 현실을 하나하나 극복 했을 때 진보가 이뤄 졌던거지 체념하는 현실에 안주하며 살면 발전은 없는거죠. 불을 꺼야 될 상황에는 불부터 꺼야 한다는 말인데, 이걸 불끄고 아무것도 안한다로 받아들이시면 어쩌자는거죠;; 제가 말한건 님의 스탠스가 불도 끄기전에 그게 현실성이나 있냐며 마치 불 끄는 것 조차 이상이라 치부하는 그런 비겁함을 말하는겁니다.

강나루 2023-05-18 20:48   좋아요 0 | URL
부처님 눈에는 부처가 보이고 개에게는 똥만 보이지요.
자신을 되돌아 보세요.*
 
눈물 한 방울 - 이어령의 마지막 노트 2019~2022
이어령 지음 / 김영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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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이 죽음을 대면할 때 숙연해진다. 아무리 커다른 권력을 가진자라도, 아무리 어마어마한 부를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죽음 앞에서는 인간의 나약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시대의 지성인으로서 한 평생을 살아왔던 이어령도 죽음을 대면하며 한들자 한글자 메모를 남겼다. '인생은 B와 D 사이의 C다'라고 장 폴 사르트르가 말했던가!(Life is C between B and D) 즉, 인생이란 '삶, 탄생(Birth)과 죽음(Death) 사이에서 선택(Choice)'이라는 뜻이다. 삶과 죽음의 선택 속에서 이어령은 메모지와 펜을 들고 자신의 생각을 적는 길을 선택했다. 자신의 생각을 기록으로 남기며 죽음을 묵묵히 대면하는 길을 선택했다. 암과 싸우기 보다는 암을 친구로 대하기로 선택한 그의 마지막을 드려다보자.


  '눈물 한 방울'이라는 책 제목부터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이어령은 제목을 '눈물 한 방울'이라 정한 이유를 "우리는 피 흘린 혁명도 경험해봤고, 땀 흘려 경제도 부흥해봤다. 딱 하나,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 바로 눈물, 즉 박애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자신을 위한 눈물이 아닌, 이웃을 위해서 흘릴 수 있는 사랑의 눈물이 필요한 시기임을 이어령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의 실천으로서의 '눈물 한 방울'이 필요함에 동의하지만, 이어령이 '눈물 한 방울'이라는 제목을 자신의 마지막 노트의 제목으로 정한 것은 지난날의 회한과 대면할 수 밖에 없는 죽음의 공포 때문이 아닐까? 

 이어령은 다양한 사물을 통해서 사유를 하고 이를 기록했다. 이책의 초반부에는 '늙다와 낡다'라는 글이 있다. "늙은이여! 쫄지마. 이가 빠지고 머리카락이 빠져도 손톱 발톱이 부서져도 두 손만 있으면 만세를 부를 수 있으면 천세 만세 살 수 있다."라며 늙은 자신에게 '천세 만세 살 수 있다.'며 희망의 말을 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글은 늙고 병들었기에 천천히 죽음에 다가갈 수 밖에 없는 자신의 내면에 대한 위로의 말로 해석할 수 있다. 


  "밤길에 갑자기 검은 그림자가 뒤쫓아 온다."-33쪽


  이어령은 '밤'과 '검은 그림자'를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저승 사자가 찾아올 듯한 '밤길'과 검은 옷을 입은 저승사자의 '검은 그림자'가 두려웠던 것 같다. 심지어는 불을 켜 놓고 잠을 자기까지 한다.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에 대해서 의연히 맞서려 몸부림치는 이어령의 내면이 읽혀진다. 


  "죽음은 무지개인가 보다.  ..... 하늘로 들어가는 문 찬란한 오색 무지개"-39쪽


  무지개를 보며 어떤이는 희망을 본다. 또 어떤이는 현실에 뿌리 두지 못한 허황된 생각을 본다. 그런데, 이어령은 '하늘로 들어가는 찬란한 문'을 본다. 누구나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죽음이라는 길을 보면서 어떠한 길에 들어설지 두려움이 밀려온다. 죽음에 들어가는 문이 찬란한 오색 무지개라 말한 이어령은 죽음에 임해서도 희망을 놓치지 않으려 했던 것일까?

  이 책의 곳곳에 죽음에 관한 말들이 흩어져 있다. 바람 한점 없는 날에도 저자의 마음은 흔들린다. 살고 싶어서..... 그러면서 신에게 일말의 시간을 달라며 애원한다. 


  "하나님 제가 죽음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까닭은 저에게는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169쪽


  책을 꺼낼 힘도 없어 전자 책으로 글을 읽는 이어령! 조금 늦게 신의 곁에 가더라도 용서해 달라는 그의 글에서 책을 사랑하는 한 남자의 향기가 난다. 책을 읽을 시간이 많지 않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는 새책을 주문한다. 그리고 다 읽은 책이라 할지라도 새롭게 읽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도 사랑하는 책과 이별해야할 시간이 다가온다. 


  "책들과도 이별을 해야할 시간이 되어서 최고 사령관이 부대의 사열을 하듯 서가의 구석구석을 돌았다."-195쪽


  즉음을 맞이하는 2022년! 그는 "여기에 남은 여백 만큼만 살게하소서"라며 절대자에게 부탁했다. 이제는 여백이 남지 않았는지 절대자의 허락을 받지 못했는지. 책을 사열하며 이별을 고한다. 그에게는 읽어야할 책들이 너무도 많았다. 그래서 그 책들을 읽기 위해서라도 더 살고 싶었다. 그러나 절대자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몸무게는 쭉쭉 빠져나갔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 그리고 2022년 1월 23일 밤에 마지막 글을 남긴다. 


  "나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말은 무엇인가?"


  라는 글을 남기고 펜을 내려 놓는다. 죽음에 앞서 한마디 말을 남기고 싶었던 이어령은 그렇게 쓰러져갔다. 그로부터 한달 후인, 2022년 2월 26일 절대자의 곁으로 간다.


 깊은 사유의 내공을 가진 그의 지혜를 더 이상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서글프지만, 죽음을 담담하게 직면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글로 남기고, 마지막까지 책을 사랑한 그의 모습은 나에게 깊은 여운을 남긴다. 일평생 독서를 해도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읽을 수 없다. 더 많은 책을 읽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우리는 이어령 선생 처럼 길을 떠나야한다. 그 길을 담담하면서도 꿋꿋하게 걸어갈 수 있다는 희망을 이어령 선생의 마지막을 통해서 확인했다. 이어령 선생이 편안히 영면하시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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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답으로 읽는 20세기 한국경제사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20세기 한국사 3
정태헌 지음 / 역사비평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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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은 좋지만, 잘 읽히지 않는 책은 좋은책일까? '문답으로 읽는 20세기 한국경제사'는 좋은 내용으로 가득차있다. 그러나, 쉽게 읽히지는 않는책이다. 어려운 경제사를 쉽게 풀어쓰는 것이 쉽지는 않겠으나, 쉽게 풀어쓰려는 노력이 빛을 발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으면서 좋은 책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나의 내공이 전문가 수준이 아니라서 저자 정태헌의 설명을 100%이해하지는 못했으나, 정태헌이 전하고자하는 올바른 경제사의 어려 관점에는 공감을 한다. 


  정태헌은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실날한 비판을 한다. 식민지 수탈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의 첨예한 대립 속에서 각종 숫자를 들이대며 마치 객관적인 양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학자에 대해서 정태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식민지 자본주의에서 개발과 성장이 없었다면 어떻게 수탈이 가능했겠습니까? 문제는 개발과 성장의 주체가 누구였으며, 식민지 자본주의의 귀결이 어떠했는가하는 점"-17쪽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의 글을 읽노라면 그들은 식민지 시대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리고 이땅의 고통받는 조선인에 대해서 무관심한 그들을 보면서 분노가 끓어오른다. 정태헌이 강조한 "개발과 성장의 주체"란 역사의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핵심 질문이다. 친일 부끄러워하는 염치도 없는 자들이 떵떵거리며 사는 현실에서 정태헌의 글을 우리에게 청량감을 감돌게 한다. 

  정태헌이 고려대 경영학과 출신이라 경제학자들이 중시여기는 숫자만 강조하지는 않을지 걱정을 했다. 그러나 정태헌은 여타 역사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역사학자로서의 소양과 탁월한 내공을 가지고 있다. 정태헌은 경제가 성장하면 민주주의 통일 등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주장을 비판한다. 거민의식이에서 탈피해서 민주주의 민족적 국민의식이 확산될 때, 경제 성장과 자본축적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정태헌은 강조한다. 이는 단재 신채호 선생이 독립이 있고 나서야 실력을 기를 수 있다는 주장과 일맥 상통한다. 주체가 빠져버린 역사가 역사일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모르는 식민지 근대화론자에게 말해주고 싶다. 역사에는 "주체" 즉 이땅의 주인공의 역사라고....

  정태헌은 현대 한국의 경제 성장 원동력에 대해서도 그의 깊은 내공을 드러낸다.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란 사회구성원에게 생산결과물과 자원의 동원, 분배과정에서 동의와 자발성을 촉진시키는 환경을 조성한다는 의미"-248쪽, 라고 지적한다. 민주주의 없이는 지속적인 경제 성장이 불가능함을 정태헌은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서구의 경제학자들이 한국의 독재가 경제 성장을 불러왔다는 주장 자체가 오리엔탈리즘의 일종이라는 정태헌의 주장은 참으로 날카롭다. 

  현대 한국의 경제 성장은 구가 한 것일까? 박정희의 리더십 일까? 미국의 도움 때문일까? 최저 임금도 받지 못하고 고된 노동을 한 민중의 땀 덕택일까? 경제 성장의 원인을 어느 하나의 입장에서 보려는 측면에서 위의 3가지는 비슷한 면을 보인다. 정태헌은 어느 하나가 원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원했든 원치 않았든 권력과 국민의 피드백"이 경제 성장을 이루는 힘이었다고 지적한다. 지배와 피지배 사이의 상호작용이 경제 성장을 추동하기도하며, 그러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정태헌은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경제사를 쉽지 않은 부분이다. 일제 강점기를 미화시키는 식민지 근대화론자와 수많은 식민지를 거느린 역사를 가지고 있는 소위 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들은 한국의 경제성장 원인을 일제의 식민지배 덕택이라고 말하고 싶어한다. 그들의 주장에 속시원한 반박을 하기 위해서는 정태헌과 같은 경제사학자들이 쓴 글들을 읽어둘 필요가 있다. 물론, 그의 글이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는 단점이 있으나,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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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라투스트라 2022-08-22 00: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고나니 반드시 이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진짜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비판 너무 궁금하네요

강나루 2022-08-23 08:45   좋아요 0 | URL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비판이 맘이드는 책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