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으로 읽는 뇌과학
이케가야 유지 지음, 이규원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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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아들 부시'가 대통령이 되고 잘한 것이 있다면, 뇌과학에 많은 투자를 했다는 점이다. ADHD알고 있는 부시는 그의 부인과 참모들이 있기에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미국의 대통령으로 재임할 수 있었다. 그도 아마 자신에게 어떠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ADHD가 보이는 충동적이고 과잉행동적인 모습이 아마도 뇌 과학을 발전시키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그가 갖게 하지 않았을까?라는 상상을 해본다. 부시행정부 시기 연구가 시작되어, 그로부터 10년후부터 뇌과학의 성과물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교육학과 심리학, 그리고 일반 사람들의 대화에서도 뇌과학적 지식은 첨단을 걷는 세련된 지식이 되었다. 연수 프로그램을 통해서 뇌과학을 접하기도 했지만, 이제 책을 통해서 깊이 있는 뇌과학 지식을 얻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뇌과학자가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 내용이라면 나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라는 확신을 갖고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1. 유발하라리의 '호모 데우스'의 흔적

  유발하라리는 그의 저서 '호모 데우스'에서 인간이 인간으로서 고귀할 수 있는 '의식'과 '자유의지'에 대해서 부정될 수도 있다는 내용의 서술을 했다. 현대과학의 발전된 최신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는가?라는 도발적인 물음은 나를 당황하게 했다. 선명하게 기억되는 유발 하라리의 '인간의 자유 의지'에 대한 회의적인 글은, 과학의 발전이 때로는 인간의 존엄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할 수 있다는 공포감을 심어주었다.

  이 책에도 '호모 데우스'에서 제기했던 질문을 우리에게 다시 던진다. 전기 자극을 통해서 쥐를 무선으로 마음데로 움직인다. 책찍과 당근으로 쥐를 유인한 것이이다. 단지 전기자극으로 쥐를 움직인다면, 쥐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 쥐의 자유의지마져도 전기자극으로 통제할 수 있다면, 그 결과는 인간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는가? 쾌락을 주는 전기자극을 이겨낼 수 있는 인간이 있을까? 만약 있다면,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럼, 우리의 뇌는 자유의지에 따라서 생각하고 몸을 움직일까? 실험결과는 충격적이다. 운동전령이 움직이고 난 이후, 1초후에 '움직이자'라는 의식이 나타난다. 자유의지는 잠재의식의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의 세계에 지배받는다고 말했듯이, 어쩌면 무의식이 '운동전령'을 움직이고, 그에 따라서 의식의 세계의 자아가 스스로의 행동을 주체적이라 하면서 행동하는 것은 아닐까?

  여기에서 한발자국 더 나가보자. 상대방의 의지를 데이터화 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 만약 특정 사람이, 인간의 의지를 눈으로 볼 수 있게 된다면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변할까? 상대방의 기분을 데이타를 통해서 알 수 있다면, 그 시대는 행복한 시기일까? 만약 인공지능이나 사업주가 데이터화된 사람들의 마음을 눈으로 본다면, 이 세상은 유토피아가 될까? 디스토피아가 될까?

  유발하라리와 이책의 저자, 이케가야 유지가 말하고 있듯이, 인간의 진화는 이제 멈추었다. 그대신 인류는 '환경'을 진화시킨다. 의족에서 인터넷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발명품들은 환경을 진화시키는 전형적인 예이다. 유발 하라리가 말했듯이, 환경을 진화시킨다. 그리고 마침내 인간은 신이되겠지. 그럼, 극대화된 환경의 진화, 그리고 호모 데우스가 된 인류, 그들에게 행복이 찾아올까? 유발 하라리의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질문이 다시 샘솟는다.  

 

2. 뇌과학에서 만나는 동양고전

  심오한 각각의 학문의 결국은 한곳에서 만난다는 말이있다. 어느 학문이나 심오하게 깊이 사유하고 연구하면 그 진리는 한곳에서 만난다는 이말을 뇌과학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가. 당신은 같은 물에 두번 발을 담글 수 있을까?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eracleitos, BC 544?--484?) "당신은 같은 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을 했다.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자연은 시시각각 생셩 변화한다. 물은 흐르고, 물도 변화하니, 방금 전에 내가 담갔던 물이 바로 그 물일 수는 없다는 말이다. 이말을 뇌과학 책을 읽으면서 다시 떠올리게 될 줄은 몰랐다. 무슨 말일까?

  인간의 기억은 완벽해선 안된다. 인간의 기억이 완벽하지 않다가 아니라, 완벽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하등동물일 수록 오히려 기억이 완벽한데 반해서 인간은 기억이 완벽해서는 안된다니 무슨 말일까? 인간은 기억이 모호하기 때문에 다양한 기억들 중에서 공통요소를 추출해서 기억한다. 그러하기에 더 많은 사실을 보다 효율적으로 기억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애매한 기억 때문에 글자를 읽고, 어제만난 사람을 오늘 알아 볼 수 있다. 우리가 쓰는 글자도 글자 폰트 및 서체에 따라, 각자의 개성에 따라 수 많은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글자를 읽는다. 그것은 우리 기억이 애매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어제 만난 사람은 오늘 머리모양이 변화했고, 옷을 갈아입었고, 어제보다 늙었지만, 우리는 어제 만난 사람을 애매하게 기억하고 어제의 그와 오늘의 그의 공통요소를 파악해서 오늘의 그를 어제의 그로 알아 볼 수 있는 것이다. 만물은 변화한다. 변화하는 만물을 모두 완벽하게 기억하는 것은 오히려 비효율적이다. 인간의 애매한 기억은 이러한 만물의 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효율성을 주었다. 도덕경 11장에 "

바퀴살이 하나의 바퀴통에 모여 있는데, 그 바퀴통 속의 비어 있음으로 인해 쓸모 있는 것이요, 그릇도 비어있음으로 쓸모가 있는 것이다. 집을 질 때에도 빈 공간이 있어 방안의 쓰임새가 생기는 것이니 쓸모 있음은 비어 있음에서 오는 것이다.(三十輻共一轂,  當其無,  有車之用. 埏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 鑿戶牖以爲室,  當其無,  有室之用. 故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라했다. 우리의 뇌와 눈은 그 비어있음으로 세상을 보다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나. 일체 유심조, 만물은 뇌에서 만든 것!

 일체유심조라는  ‘만일 사람들이 삼세일체불을 알려고 한다면 마땅히 법계의 본성이 모두가 마음의 짓는 바에 달려있음을 보라’는 화엄경에서 나온 말이다. 깃발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요. 깃발이 바람을 일으키는 것도 아니다. 나의 마음이 깃발을 흔들리게 하는 것이다. 불교의 이 화두가 뇌과학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우리 인간의 신체는 완벽하지 않다. 우리눈은 100만 화소정도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러나 우리는 선명하게 세상을 바라본다. 왜? 그럴 수 있을까? 그것은 뇌에서 100만 화소의 세상을 선명한 세상으로 보정처리했기 때문이다. 우리 눈에는 맹점이 있다. 어느 거리가 되면 보지 못하는 지점!! 그런데 우리 눈의 이 결점을 우리의 뇌는 수정보완하여 선명한 세상을 볼 수 있도록 한다. 사실은 우리의 뇌에서 수정보완된 세상이다.

  인간은 빨강과 파랑, 초록밖에 볼 수 없다. 시신경이 이것 밖에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자외선을 본다면 세상은 엄청달라져 보일 것이다. 우리가 보는 세계가 엄청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잠자리가 보는 세상과, 박쥐가 보는 세상은 우리가 보는 세상과 무척 달라져보인다. 우리가 보는 세상은 뇌에 의해서 재창조된 세상이다. 빛의 3원색인 빨강 파랑 초록으로 세상의 색을 창조하고, 자외선을 보지 않았기에, 건물뒤의 세상을 보지 않도록 했다. 절대적인 세상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뇌가 창조한 세상이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그 세계는 각각의 존재들마다 다를 수 있다. '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그 마음은 뇌에서 만든 것이다.

 

다. 정신과 육체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

  종교적으로 심취한 친구가 있다. 육체는 존재했다 사라지지만, 영혼은 불멸한다. 유한한 육체보다 영원한 영혼의 안정을 추구해야한다. 라는 주장을 하며, 종교에 심취한 친구다. 그런데, 과연 정신과 육체 중에서 정신(영혼)이 절대적으로 중요하고, 육체는 학대해도 되는 것일까? 고대 로마의 시인 유베날리스(Juvenal)는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Orandum est ut sit means sana in corpore sano)"라는 말을 했다. 어찌 정신과 육체가 분리될 수 있겠는가? 뇌과학 이야기를 하는데 왜? 갑자기 유베날리스의 말을 할까?

  마음은 뇌가 만든 것이다. 몸이 없으면 뇌도 없다. 즉, 몸과 마음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뇌과학에서 말하고 있다. 건전한 육체와 건전한 정신, 건전한 뇌와 건전한 마음의 조화는 필 수 이다. 정신과 육체, 마음과 뇌의 관계는 어느 하나만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아니다. '뇌 지도'는 뇌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정하는 것이다. 손가락이 4개인 사람에게는 5번째 손가락에 대응하는 장소가 뇌에는 없다 그런데, 붙어버린 4번째 손가락을 4번째 손가락과 5번째 손가락으로 분리하는 수술을 하면, 5번째 손가락에 대응하는 장소가 뇌에서 생성된다. 몸이 변하면 뇌가 변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은 너무 과잉되게 진화하였고, 이 과잉 진화된 뇌는 환경이 변화할 때 대응할 수 있는 여유분이기도 하다. 우리의 뇌는 손발이 열개여도 충분히 콘트롤 가능할 정도로 과잉 진화되었다. 수두증에 걸린 사람이 보통사람의 1/10 정도의 뇌로 보통의 일상을 무리없이 살아간예는 우리 뇌가 얼마나 몸이나 환경에 따라 '자기 조직적'인지를 알려준다. 그리고 우리의 몸이 변화하거나 환경이 변화하면 우리의 몸은 자신의 조직과 능력을 변화하면서 세상에 대응할 것이다. 이것이 정신과 육체, 몸과 뇌의 역동적인 상호의존성을 확인케힌다.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들고, 건전한 정신에 건전한 육체가 담겨야 한다.

 

라. 불립문자! 인간은 언어의 노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선불교에서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말이 있다. 문자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문자가 지니고 있는 형식과 틀에 집착하거나 빠지지 않는다는 표현이다. 선불교는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의 족쇄, 언어의 한계를 일찍이 깨닫고 이를 뛰어 넘는 수행방법을 모색해 온 것이다.

  이책에서도 인간은 언어의 노예라고 말한다. 인간이 연상하는 단어는, 자유롭게 연상하는 것처럼 보여도, 언어에 속박되어 있다. 이시대의 지성 촘스키는 "언어를 알면 그 나라나 사회의 구조와 체계를 알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인간은 언어의 노예이며, 이를 벗어나기 힘듬을 언어학자와 뇌과학자가 말하고 있다. 그리고 언어의 노예를 탈피하기 위해서 선불교에서는 '불립문자'를 수행의 방법으로 내세운 것이다.

 

마. 전체는 부분의 합이 아니다.

  서양의 철학은 쪼개고 쪼깨면서 분석한다(환원주의). 그러면 진리에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고대 그리스에 4원소설 등의 다양한 학설들이 이러한 관점에서 전개되었으며, 근대 서양과학의 발전에 '환원주의'가 일조했음은 널리 알려져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전체는 부분의 합이 아니라고 말한다. 즉 복잡계를 예로든다. 인간은 개인일 때와 집단일때 행동이 전혀다르다. 물고기 한마리 한마리를 연구하여 몇백마리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없다. 물고기 무리의 경향성을 파악해야만 그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다. 전체를 파악하지 않고 쪼개기만하려는 서양철학에 대해서 뇌과학은 전체를 보라고 말하고 있다.

 

 

  뇌와 컴퓨터의 차이를 아는가? 소프트웨어가 변한다고 하드웨어가 변하지 않는다. 컴퓨터의 하드웨어는 절대 변하지 않는데, 그러나, 우리의 뇌는 외부세계에 열려있다. 몸이나 정보가 달라지면 뇌의 구조와 기능은 달라진다. 외부에 열려있는 것! 그 유연성이 인간뇌의 생명력을 결정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달리말하면, 외부세계에 대한 유연성을 잃게 되면 그 뇌는 죽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언제가 공부하며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뇌를 유연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우리가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이 책은 단순히 과학지식의 나열만을 하는 수준의 책이아니다. 철학과 과학을 넘나들도록 우리를 안내해주며, 끊임 없이 새로워지라고 책찍질 하고 있다(일일신 우일신 (日日新 又日新) ). 새로워지고 생명력을 잃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책을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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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30 05: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강나루 2018-01-30 06:00   좋아요 1 | URL
어렵지만 그래도 끌리는 분야가 뇌과학 이에요
감이불취 라는 말이있어요 느끼지만 취하지않는다 책을 읽지만 책의 모든 내용을 머리속에 넣으려 하지 말자구요 저도 읽고나면 많이 잊어버려요^^

2018-01-30 06: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영원한 라이벌 김대중 VS 김영삼 - 정의를 위한 처절한 2인의 전쟁 국민 90%가 모르는 이야기
이동형 지음 / 왕의서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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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동형!! 팟캐스트 '이이제이', '문희정의 라이벌'에서 막말을 해대며 즐거운 한국사 여행을 안내했던 작가! 그 작가의 책을 만나고 싶었다. 이동형의 대표작이라면 '김대중 VS 김영삼'이 아닐까? '이이제이'를 들을 때마다 광고가 많이 나와서 한번 읽어 보고 싶어하던 책이다. 이동형이 바라본 한국현대사는 한홍구 교수가 바라보는 한국현대사와는 어떤 차이가 있을가? 책속을 들어가보자.

 

1. 따라잡기 힘든 인터넷 필법

  한홍구 교수의 '유신'이라는 책을 읽다가, '마봉춘'이라는 단어를 보고 이것이 무슨 뜻인지 인터넷에서 찾았던 기억이 난다. 무한도전에서 유재석이 MBC를 '마봉춘'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을 한홍구 교수가 '유신'이라는 책에 사용한 것임을 알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이동형은 'ㅎ ㄷ ㄷ', '멍미'라는 표현을 비롯한 인터넷 용어를 무차별하게 사용한다. '멍미'는 '머니?'라는 뜻인 것으로 해석되는데, 'ㅎㄷㄷ'는 무슨 뜻인지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뿐이 아니다. 잦은 괄호의 사용은 읽는 흐름을 끊어버린다. 보통 글쓰기 책에는 괄호나 주는 되도록 줄이도록 당부한다. 그런데 이동형 작가의 책에는 괄호가 난무한다. "(구린 냄새가 나는데?)"라는 표현의 경우, 문장에 녹여서 충분히 쓸 수 있는 글을 굳이 괄호를 써서 표현한 이유를 모르겠다.

  비문도 상당히 많은 편이다. 한예로 "유신을 만들고"라는 표현이 있는데, 정확한 표현은 "유신헌법을 만들고"라고 적어야한다.

  이동형의 인터넷 필법에 적응을 하지 못했던 책읽기 초반부에는 무척이나 거슬리는 표현들이 많았다. 팟캐스트에서 하던 표현들을 그대로 책으로 옮겨 놓은 듯했고, 이것은 정제된 표현들을 읽어오던 나로서는 무척이나 어색하면서도 불편한 표현들이다.

 

2. 심심치 않게 발견되는 오류들

  이동형 작가의 글에는 심심치 오류가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몇가지 예만 들어보자. 첫째, 장덕수는 독립운동가일까? 이동형 작가는 21쪽에서 장덕수를 독립운동가라고 단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과연 장덕수가 독립운동가 일까? 그가 여운형을 도와 독립운동을 독립운동을 한 것은 맞다. 그러나 초반에 독립운동을 하다가 친일파로 변절한 사람을 우리는 독립운동가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들을 '변절자'라고 부른다. 보통의 변절자들이 그렇듯이, 장덕수도 30년대 부터 친일을 하기 시작한다.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時局對應全鮮思想報國聯盟)의 간부가 되었으며, 1939년에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에 가입했다. 1941년에는 일제 침략전쟁의 협력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과 이사, 1945년에는 국민의용대 조선총사령부 지도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했다. 이런 친일행위를 한자를 그의 초반부 삶만 뚝떼어서 독립운동가라는 표현을 써도 될까?

  둘째, 장준하는 2000킬로미터의 길을 혈혈단신 걸어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찾아갔을까? 아니다. 장준하선생의 회고록 '돌배개'를 보면 약5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임시정부를 찾아간다. 그 동지들 중에는 김준엽도 있었다. 장준하 선생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다가 벌어진 표현상의 오류로 보기에는 세밀함이 낮아보인다는 인상을 준다. 한가지더 지적하자, 박정희를 비판할때는 이동형 작가가 현역군인이 아니었기에 벌어진 우수은 표현도 있다. "오버로크도 마르기전'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오버로크가 잉크인가? 오버로크는 이름표를 미싱으로 박을때 쓰는 표현이다. 오버로크를 잉크라고 잘못 알고 "오버로크도 마르기"전이라는 표현을 쓰는 오버는 하지 않기 바란다.

  셋째, 우리나라에 정권교체가 없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이땅의 지배세력이 한번도 바뀐적이 없다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물론,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문학가들이 상용할 수 있는 표현이다. 현실을 강하게 비판할때 사용할 수 있는 용어이지만, 역사가가 혹은 역사책에서 사용하기에는 부적절한 표현이다. 역사는 엄밀성이 뒤따라야한다. 530쪽에서 '단군이 이나라를 건국한 이래 단 한번의 정권교체가 없었던 땅"이라고 적고 있지만, 이기백교수의 한국사신론을 들이대지 않더라도, 제2공화국 시기에 정권이 한번 교체된 것을 떠올린다면, 한번도 정권교체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표현이 틀린 표현이란 사실은 모두 알 것이다.

  넷째, '6.3사태'라는 표현은 옳은 표현일까? '5.18 민주화운동'을 '광주사태'라고 부른다면 여러분들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판단하시겠는가? '5.18 민주화 운동'이라는 표현은 광주민주화운동을 시민의 입장에서 정당하게 평가한 용어라면, '광주사태'라는 표현은 전두환 세력을 비롯한 한국의 보수세력들이 민주화운동을 깎아내리기 위한 표현이다. 마찬가지이다. 굴욕적인 한일국교정상화에 대항한 '6.3 항쟁'을 '6.3사태'라고 표현한다면, 이는 굴욕적인 한일국교정상화를 찬성하는 입장의 사람들의 망언이라고 밖에 달리 생각할 수없다. 공자의 정명사상을 말하지 않더라도, 역사에서 정확한 용어의 사용이 중요함은 어린아이조차 잘 알것이다.

  이러한 오류들은 그가 작가이지 역사가가 아니기에 벌어진 오류들로 보인다. 한홍구의 글쓰기와 이동형의 글쓰기는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동형의 글쓰기에 단점만이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

 

3. 역사의 뒷이야기를 알게된 쏠쏠한 재미

   이 책을 읽으며 역사의 뒷이야기를 새롭게 알게 된 재미가 무척 쏠쏠하다. 그 동안 이해되지 않았던 역사의 파편들을 짜맞추고, 작가의 분석을 더하면서 새로운 그림을 완성할 수 있었다. 어떤 것이 있을까?

  첫째, 김대중이 김영삼 처럼 귀국하지 않고, 해외에 머물렀던 것은 김대중이 비겁했기 때문일까? 과거 그러한 비난을 종종들었고, 이에 대해서 일면 수긍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김영삼이 당당히 귀국하여 가택연금을 받으면서, 그는 반유신투쟁을 전혀하지 못했다. 그에 반해서 김대중은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반유신 투쟁을 전개한다. 그의 이름이 세계적으로 알려지게된 계기가 바로 이시기 그가 세계를 돌아다니며 벌인 반유신 투쟁 때문이다. 김영삼은 유시민의 표현처럼 협객의 멋있는 모습을 보였으나 실리를 취하지 못했다. 그에 반해서 영리한 김대중은 비겁해보이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지만, 해외에서 효과적으로 반유신투쟁을 했다. 박정희에게 김영삼 보다 김대중이 더 미워보였던 이유를 알만하다.

  둘째, 서석재가 술김에 터트린 노태우 비자금은 진정 실수였을까? 김영삼이 전두환과 노태우의 12.12를 역사의 심판에 맞기자며 처벌하지 않다가, 갑자기 노태우 비자금 문제가 터지자, 역사바로세우기라는 대의 앞에 그들을 감옥에 보냈다. 김영삼은 왜? 돌변했을까? 매끄러운 이해가 되지 않았던 부분이다. 이동형은 나름의 분석으로 항간에 떠돌았던 이야기를 소개한다. 그것이 김영삼의 일련의 기획이라는 내용이다.(자세한 것은 책을 읽어 보시라- 이동형 작가가 많이 쓰는 괄호를 한번 흉내내봤다.) 노태우 비자금 증거를 국회에서 제시해서 일약 스타가된 박계동이 끝내 한나라당으로 간 것도 이동형의 설명을 듣고보면, 이해가 무척 쉬웠다. 사람이 갑자기 변한 것이 아니다. 그사람에게 이미 그러한 싹이 자라고 있었다.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했을 뿐이다.

  셋째, 김대중은 정계 은퇴를 하고 왜? 번복했을까? 많은 사람들은 대통령 욕심 때문이라 말한다. 물론 대통령 욕심이 없는 정치인이 있을까? 그것말고 다른 이유는 없을까? 이동형은 한겨레신문 이터뷰를 근거로 제시하며, 김영삼의 박대가 김대중의 복귀를 재촉했다고 주장한다. 대학강연을 하려해도, 그 무엇을 하려해도 방해하고 감시하니, 김대중은 무척이나 분노했고 이것이 그의 복귀를 재촉했다는 것이다. 기존에 생각하지 못한 변수를 새롭게 알게 되었다. 아울러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탔을 때, '노벨상의 가치가 떨어졌다.'라는 말을 한 김영삼의 도량과 컴플랙스를 학실히 알게 됐다. 김영삼이 김대중을 품을 줄 알았다면 우리 현대사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넷째, 정인숙의 사채를 영구보존했다.? 사실일까? 청와대에 있는 거물의 아이를 낳았다는 말을 하고 돌아다니다가 변사체로 발견된 정인숙을 아는가? 독제세력의 추악한 사생활을 우리에게 알려준 사건!! 그런데 이책에는 정인숙에 대한 야사가 한가지 더 적혀있다. 정인숙의 사체 일부분이 영구 보존되어 연수과정 교보재로 활용된다는 말이다. 정말 충격적인 설이다. 과연 사실일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일제강점기 일본놈들이 '명월'이의 생식기를 영구보존한 것을 혜문스님이 소송을 걸어 화장을 한 사건이 있다. 아마도 '명월'이의 생식기가 정인숙으로 와전되었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다. 한국인이 한국인의 신체 일부분을 교보재로 사용한 다는 것은 생각만해도 소름이 끼친다.

 

  책장을 덮고 생각해 보았다. 한국사의 모든 사료가 사라진다면 이책은 어떠한 평가를 받을까? 아마도 대한민국의 '삼국유사'라는 평가를 받을 것이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함께 소중한 역사서로 평가 받는다. 때로는 삼국사기에서 볼 수 없는 신화와 전설, 역사적 사실을 전해준다. 이동형이 쓴 '김대중VS김영삼' 또한 한홍구가 전해주지 못한 역사의 뒷이야기를 우리에게 재미있게 전해주고 있다. 확실히 재미는 있다. 즐겁게 한국 현대사를 산책하고 싶은 독자라만 일독을 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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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1-01 22: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ㄷㄷ‘이 ‘후덜덜‘을 뜻해요. 책에 신조어나 인터넷 은어가 많은 걸로 봐서는 DJ, YS의 관계를 잘 모르는 젊은 독자들을 겨낭한 것 같습니다. 시도는 좋은데 인터넷 용어를 모르는 중년 독자들은 낯설게 느껴질 수 있겠어요.

강나루 2018-01-01 23:12   좋아요 1 | URL
그렇구나 감사합니다

2018-01-02 09: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02 14: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후애(厚愛) 2018-01-02 19: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즐겁고 행복한 2018년 되시길 기원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18-01-02 2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강영계 교수의 프로이트 정신분석학 이야기 - 철학자가 쉽게 풀어쓴 교양인을 위한 프로이트 정신분석학
강영계 지음 / 해냄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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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역사를 공부하면 세상의 진리를 다 알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역사를 탐구해도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세상의 진리를 얻기 위해서 철학이라는 분야에 관심을 갖게되었다. 철학은 인간의 이상을 탐구하는 학문이기에 세상의 진리를 알려줄 것 같았다. 그러나 철학은 철학하라 나에게 말하고는 진리를 말해주지 않았다. 세상의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인간에 대해서 먼저 알아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재미있는 것은 심리학자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철학사에서도 중요시 여긴다는 사실이다. 데카르트의 '이성'중심의 근대의 세계관을 프로이트는 과감하게 전폭시켰다. 즉, 프로이트는 무의식, 은폐된 충동이 정신과정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그의 주장은 인간은 이성적 존재라는 관념에 강력한 한방을 날렸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세상의 진리를 알기 이전에, 인간에 대해서 이해하기 위해서 이 책을 꺼내들었다.

 

1. 고전을 읽어야하는 이유.

  고전은 오랜 시간을 견뎌낸 책이라 한다. 오래 시간이 흘렀는데도, 아직 고전의 지혜는 유효하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이야기를 읽으면서, 고전이 다시 반복되어 읽히는 이유를 체감했다. 그리스 로마신화를 서양지성의 마르지 않는 창조의 샘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도 그리스 로마신화속의 오이디프스, 엘락트라,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원용해서 우리의 무의식을 설명하고 있다. 서양의 지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화에 대한 이해는 필수라고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언행을 적어 놓은 플라톤의 대화편은 서양고전 중의 고전이다. 특히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은 교육학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놀라운 것은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이 프로이드의 자유연상법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서양 고대! 지금으로 부터 까마득하게 먼 시기의 산파술이, 근대의 자유연상법과 유사점이 있다는 것은 놀랍기만 하다. 우리가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 아닐까? 시대가 변하니, 지식도 새로운 옷을 갈아입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어쩌면 고전속에 있을지도 모른다. 스티브 잡스가 "소크라테스와의 반나절에 애플의 모든 기술을 걸겠다."라는 말을 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2. 억압된 욕망은 정신병을 유발한다.

  프로이트의 제자들은 그가 지나치게 성문제에 집착한다고 비판을 하며 그를 떠났다. 그러나 프로이트에 대한 그러한 비판 자체가 인간에게 성문제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반증하는 것은 아닐까? 정신분석을 할때 자신의 내면의 은말한 것을 말하도록 유도하는 의사에게 환자가 적개감을 갖기도 하는 것과 유사한 원리이다. 특히, 청소년들에게 성은 너무도 중요한 문제이다. 성은 웃음의 소재로, 소위 마초를 자랑하는 남자들의 세계에서는 빠질 수 없는 단골 주제로 사용된다. '암호속의 여인들'이라는 영화에서 KGB 요원을 교육하면서 미국의 종교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아무도 정답을 알아 맞히지 못했다. 그때, 정답은 '쎅스'였다. 성이 상업화되고, 사회의 어두운 곳에서는 성 때문에 수많은 문제들이 발생한다.

  이러한 성을 너무도 억압당하며, 성은 우회를 찾는다. 이책의 늑대소년의 경우, 자위행위를 억압당하면서 사디즘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한다. 성적욕구가 다빈치처럼 잘 승화된다면, 엄청난 업적들을 쏟아 낼 수 있지만, 이것이 잘못된 우회로를 찾는다면, 정신병적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학생들에게 적절한 자위행위는 정신건강상 좋다는 말이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욕구를 억누르게 하지말고, 적절히 이를 해소하도록 해야한다는 조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해소가 될 수 없고, 해소 되어서는 안되는 욕구는 어떻게 해야할까? 이 책에나오는 어는 장모는 심각한 발작을 보인다. 그녀의 발작원인은 사위를 사랑하는 욕구가 억압되었고, 이것이 발작을 일으킨 것이다. 이때 욕구에 충실해야하는가? 아니면 도덕과 윤리가 허락하지 않기에 억압해야할까? 철학자 강신주라면 어떻게 조언을 할까? 프로이트의 치료법대로 사위를 사랑하는 장모의 욕망을 직면하는 것만으로 발작이 사라질까? 이러한 고민을 나에게 토로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무어라 조언해야할까?

 

3. 종교는 강박노이로제의 환상인가?

  말년의 프로이트는 구강암으로 수차례 수술을 받으면서도 고통을 참고 연구에 매진한다. 그를 잡으러 온 나치요원들도 인간의 얼굴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구겨진 휴지와 같은 모습의 프로이트를 체포하기를 포기한다. 그러고는 "저 노인이 그렇게 도 유명한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란 말인가?"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궁형의 치욕을 견뎌내면서 '사기'를 완성한 사마천이 생각날 정도로 프로이트는 영국으로 망명해서 구강암과 싸우며 불굴의 신념으로 연구에 매진한다. 이것이 그로서는 나치에 대항하는 최후의 저항 수단이었을지도 모른다.

  프로이트의 후기 저작들은 정신분석학을 문화를 읽는 수준으로 발전시킨다. 그는 종교, 철학, 예술을 환상의 산물이라 주장한다. 그가 환상의 산물이라 무시했던 철학!! 그러나 철학사에 프로이트의 이름이 당당히 들어가 있다. 프로이트가가 무시한 철학은 철학사를 저술하면서 그를 소환한 것이다.

  철학과 함께 환상의 산물로 종교를 꼽았다. 프로이트는 종교는강박 노이로제의 환상이라 주장하며, 종교에 대한 해부에 들어간다. 유대인인 프로이트는 종교는 "엄청난 환상의 세계를 대변하는 세계관"이라고 규정한다. 유아기에 과대평가된 아버지상을 되살려 그것을 현재안에서 신성으로 고양시킨다. 신은 아버지이다. 인간은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신을 만들어낸 것이다. 가족의 윤리를 사회의 윤리로 확장시킨 유교의 모습이 어쩌면 인류 공통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든다. 재미있는 것은 청소년들의 경우, 아버지의 권위가 실추되면 종교적 신앙도 상실되고 만다. 유아기에 자신을 돌봐준, 힘이센 아버지를 어른이 되어서도 갈구하고 그러면서 신을 창조한 인간! 그렇다면 신앙심이 높은 가족에서는 아버지의 권위가 높고, 신앙심이 낮은 가정에서는 아버지의 권위가 낮을까? 아니면 그 반대의 경우가 성립할까?

  유대인인 프로이트는 스스로를 무신론자라 규정했다. 살불살조라는 임제스님의 말이 생각난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서, 그 종교를 극복한 프로이트!! 그러했기에 정신분석학을 정립할 수 있었지 않을까?

 

 

4. 자녀 양육에 참고할 지식들

  자녀를 키우면서, 자신이 마음에 들어하는 부모가 자신의 똥을 닦아 주는 것을 허락하고, 자신의 똥 냄새가 좋지 않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철없는 아이들의 장난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든데, 사실은 장난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똥은 아이들이 자신의 신체 일부분이며,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줄 수 있는 최초의 선물이라 한다. 아이들은 자신이 줄 수 있는 최초의 선물을 부모에게 준 셈이다.

  오랫동안 별거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가정이 있다. 남편을 용서하지 않고, 이혼도 아닌, 그렇다고 정상적인 결혼생활도 하지 않고, 호적상의 결혼만을 유지하면서 별거를 하고 있는 가정이다. 그런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사례를 읽으며, 충분히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용서하지 못해서 별거를 하고 있는 가정이 너무도 우려스러워졌다. 다빈치는 사생아다. 어머니에 의해서 길러지다가, 생모를 떠나 아버지와 계모 사이에서 자라게 된다. 이러한 다빈치는 동성애자가 된다. 다빈치는 제자를 뽑을 때, 예술적 재능을 중시하기 보다는 외모를 중시여겼다는 사실은 나에게 쓴 웃음을 짓게했다.프로이트는 남자 노예가 남자아이 교육을 담당할 경우, 동성애로 기울 경향이 증가한다고 한다. 성충동과 성적 자극 및 그것들을 바탕으로 삼은 성적 대상의 선택에 있어서 부모의 상냥함과 권위를 극복하지 못하는 사춘기의 청소년은 후에 히스테리 노이로제 증세를 보일 확률이 높다고 프로이트는 주장하고 있다. 정상적인 행복한 가정을 꾸리지 못한다면 그 가정의 자녀는 정상적으로 행복을 누릴 수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아이가 부모의 성행위를 목격했을 경우 어떻게 해야할까? 팟캐스트 '불금쑈'에 어느 성 전문가가 출연하여 너무 어릴 경우 부모의 성행위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라는 대답을 했다. 프로이트의 분석에 따르면 부모의 성행위를 자녀가 목격하면 그것은 커다란 충격으로 아이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것은 무의식 속에서 자녀를 괴롭히게 된다. '불금쑈'의 성 전문가의 주장과 상반되는 내용이다. 그럼, 아이가 부모의 성행위 장면을 목격한 경우, 해결책은 무엇인가? 이 책에서는 그것을 제시해주지 않고 있다. 성행위를 자녀에게 들키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한 해결책인 것 같다.

 

5. 악마는 천사의 얼굴로 우리 주변에 있다.

  강자에게 아부하며 비굴하게 구는 사람이, 높은 권좌에 올라서는 잔인하게 아랫사람을 대하는 모습을 보았는가? 전형적인 간신의 이런 모습을 우리는 주변에서 너무도 흔하게 본다. 가학적인 사디즘과 피학적인 마조히즘은 동전의 양면이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조화를 유지한다. 그러나 강박 노이로제가 있는 사라은 극단에 치우친다. 지나치게 친절한자는 권력을 잡으면 폭군으로 군림할 수 있다. 지나치게 친절한 자를 조심하라. 예루살렘의 아이히만도 평범한 모습의 선량한 시민이고, 상냥한 아버지였다. 악마는 우리 곁에 천사의 탈을 쓰고 있다.

  프로이트는 대중에 대해서도 분석했다. 대중은 고유한 인격을 상실하고, 사고와 가정도 체면술사의 지시와 방향을 따르는 존재이다. 전체주의적인 모습을 보이는 대중사회의 모습에서 히틀러치하의 유대인들의 고통스러운 모습이 떠올랐다. 아마도 프로이트는 히틀러 치하의 반유대주 독일의 모습을 보면서, 정신분석학의 방법으로 대중사회를 분석했을 것이다.

  프로이트는 대중을 정적 대중과 동적대중으로 나눴다. 정적 대중은 개성이 없는 부정적 모습의 대중이며, 동적대중은 주체적이고, 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사고할 줄아는 대중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동적 대중이 될 수 있을까? 프로이트는 오직 고독속에서 작업하는 개인만이 위대한 사유작업을 결단할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고차원적 대중은 개인의 속성을 보유한다고 밝히고 있다.  공자가 “군자는 화합하지만 같아지지 않고, 소인은 같아지지만 화합하지 않는다.(子曰,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라고 말했다. 현명한 대중은 대중속의 일원이 되지만, 대중에 휩쓸려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는 비주체적인 자가 되지 않는다. 현명한 대중은 스스로 생각하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연대하고 권력에 투쟁한다.

  프로이트는 지도자의 힘을 공동체의 힘으로 대치시키는 것이 참다운 문화의 진보라 지적한다. 어느 절대 권력자를 추종하는 노예로 살기보다는, 촛불혁명에서 우리가 보여준 저력처럼, 우리 모두의 힘으로 지도자의 힘을 대치시키는 것이 깨어있는 시민들이 할 일이다. 그러하기에 독재정권하에서 참다운 문화 발전이 힘든 것도 당연한 일이다. 우리나라의 민주화가 진행되고 나서야 영화산업이 르네상스를 맞이하게 된 것도, 필연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지도자, 아니 독재자의 입맛에 맞는 영화를 만들다보니, 시민들의 자유로운 생각을 담아낼 수 없고, 그것이 문화의 침체로 남게된다. 수많은 영화들이 검열당하고 삭제되어었던 암울한 시기를 보내고, 민주화의 열풍이 들어오면서, 자유로운 시민의 상상력이 나래를 펴면서 우리의 문화산업이 '한류'를 일으킬 수 있었다.

 

6. 철학자의 시선으로 프로이트를 바라보다.

  이 책을 쓴 강영계 교수는 철학자이다. 그렇다보니 철학적 관점이 이 책에 많이 투영되어 있다. 심리학을 철학과 과학에 다리를 걸친 학문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하기에 철학자 강영계 교수가 프로이트 정신분석학 관련 책을 쓴다는 것이 새로울 것은 없다. 그렇지만, 철학자 강영계 교수의 이 책은 철학적 색체가 확실히 많이 풍긴다. 심리학을 설명하면서 철학적 개념과 비교해서 설명하는 경우가 많고, 이것이 지나쳐서, 때로는 지루하기도 하다. 에로스를 설명하면서 플라톤의 '향연'을 장황하게 서술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때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비문도 눈에 띈다.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의 기초를 확립하게 정립하는 저술이다.(305쪽)"라는 글은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가지 않는 비문이다. 아마도, "정교하게 정립하는 저술이다."의 오타가 아닐까?

 

 이 책 한권으로 프로이트의 생애와 그의 대표적 저작들의 핵심내용을 알 수 있다. 만약 프로이트에 관해서 보다 많은 정보를 얻길 바라는 대중들이 있다면, 이 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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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nsun09 2017-12-30 11: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새해도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강나루 2017-12-30 12:42   좋아요 2 | URL
감사해요 munsun09 님도 건강하시노 행복한 새해를 맞이하세요

2018-01-30 05: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30 06: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우파니샤드, 귓속말로 전하는 지혜 청소년 철학창고 2
이재숙 풀어씀 / 풀빛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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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라는 나라를 떠올리면 종교의 나라라는 생각이 오버랩된다.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나무 그늘이나 동굴에서 명상에 잠기며 심오한 우주의 원리를 탐구하는 성자들의 나라! 이러한 이미지와는 달리 불교를 제외하고, 인도 철학에 대해서 무지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불교 이전의 인도인들의 사유 관렴을 알고 싶어 '우파니샤드'라는 책을 빼들었다. 인도철학! 그중에서도 우파니샤드에 대한 나의 지식이 일천하기에 너무 어려운 책을 읽기에는 마음이 무거웠다. 청소년들을 위해서 '우파니샤드'를 풀어써 놓은 이재숙씨의 책을 보면서 도전할 용기가 샘솟았다. 그래, 우파니샤드를 통해서 인도철학의 신비를 탐험해보자.

 

1. 동양의 소피스트철학 우파니샤드

  소피스트들이 철학의 대상을 자연에서 인간에게로 전환시켰듯이, 우파니샤드는 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 인간 존재에 관심을 갖는다.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인드라를 비롯한 신들은 철학을 위한 엑스트라일 뿐, 그들이 주인공이 아니다. 인간 존재를 중심으로, 세상을 탐구하기 위한 질문과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우파니샤드는, 동양의 논어, 서양 플란톤의 대화편 처럼 대화로 이뤄져 있다. 세계의 철학사의 흐름과도 우파니샤드는 일치하고 있다.

  문답법을 통해서 상대방을 깨우치는 교수법을 흔히,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이라고한다. 산파술은 학습자가 이미 지식을 알고 있고, 그 지식이 발현되도록 교수자는 이를 돕는다는 학습원리이다. 고대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러한 교수법을 사용해서 교육이 이뤄졌다. 그리고 그 효과는 학습자에 따라서 달리 효과를 거두기도한다. 우파니샤드에 조물주가, '다'를 말하자, 쁘라쟈빠띠는 '자제하라(암미야뜨)로 알아들었으며, 인간은 "베풀라(닷따)"로 알아들었으며, 아수라는 "동정심을 가져라(다야드왐)로 알아들었다. 자신에게 필요한 해답을 그들 각각은 이미 가지고 있었다. 질문에 해답이 있었다. 답은 자신의 가슴에 이미 존재했던 것이다.

 

2. 해탈하고 싶은가? 나는 원하지 않는다.

  도올 김용옥 선생이 달라이라마를 만났을 때 일화이다. 김용옥 선생이 물었다. "해탈하고 싶은가?" 보통의 사람들은 "그렇다"라는 말을 예상할 것이다. 그런데, 달라이라마는 "해탈을 원치 않는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윤회를 벗어나기 위해서 자신의 참모습을 깨달아야한다. 그러면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하게 된다. 더 이상 고통받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속담에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났다.'라는 말이 있다. 현실이 고통스럽다하더라도 윤회의 수레바퀴 속에서 사는 것이 났지, 해탈하여 더 이상 이승에 있지 못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우파니샤드에는 천상은 하늘이 아니라, 더 이상 태어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이 되어 늙거나 병들거나 죽지 않는 가장 자유롭고 행복한 상태라고 말하고 있다. 그 천상의 즐거움 보다. 생노병사의 고통속에서 서로 울고 웃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오늘이 우리에게는 소중하다. 나는 해탈을 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승을 어떻게 살아야할까? 우파니샤드에는 "이 세상에서 그대가 행한 바대로 육신이 죽은 뒤에 이루어지리라. 그러므로 자신이 이룰 일을 스스로 만들지어다."라고 말하고 있다.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할지 신에게 묻지 말고, 스스로 알려고 노력하고 행하라는 말이다. 임재스님의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내가 머무르는 곳에서 주인이 된다면, 그곳이 바로 진리의 세계가 된다는 이말을 나는 가슴에 새기고 있다. 신에게 자신의 운명을 내 맡기기 보다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진취적이고 열정적인 모습을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3. 육신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할까?

  우파니샤드에는 "육신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자신의 참모습을 보라"라고 말한다. 육신에 대한 집착이 참다운 자신의 모습을 보는데 걸림돌이 된다는 말이다. 또한 '자기 자신을 몸뚱이와 연계해서 생각하는 것이 자기 자신의 참 모습을 알아보지 못하는 결과를 불러온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완전한 자유 속의 자신을 깨달으라는 말이다. 과연 육신은 깨달음에 걸림돌일까? 흔히들 빠져드는 오류가, 육체보다 정신이 더 소중하다는 잘못된 믿음이다. 육신은 껍데기에 불과하기 때문이 이 육신을 원하는 사람에게 보시를 할 수도 있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사이비 종교도 있다. 육신은 정신의 집이다. 집이 없으면, 정신은 머물곳도 쉴곳도 없다. 정신과 육체는 어느 것이 더 소중하고 어느 것이 덜 소중한 관계가 아니다. 서로에게 위안이되며, 서로에게 쉼터가 되어주는 상생의 관계이다. 자신의 육체를 괴롭힌다고 해서, 깨달음의 세계에 다가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부처님이 고행을 하는 것을 통해서 깨달을 수 없음을 이미 설파하셨다. 공자님도 문질빈빈(文質彬彬) 이라 했다. 외양의 아름다움과 내면의 미가 서로 잘 어울려야한다는 말이다. 정신과 육체도 서로 잘 어울려야 참다운 진리의 세계로 들어설 수 있다. 육체가 괴로운데, 올바른 정신이 깃들 수 있겠는가? 아파니샤드의 이원론적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다.

 

3. 이 세상은 환영이니, 멋데로 살아도 될까?

  우파니샤드의 이원론적 생각을 접했을 때, 혹시 우파니샤드가 허무주의에 흐른 철학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우파니샤드에는 '인간이여, 이 세상에서 자신의 의무를 다하며 백년 살아갈 소망을 가질지어다.'라고 말하고 있다. 즉, 이 세상은 환영(마야)이니 버려라가 아니라, 오히려 열심히 살아라. 단! 집착하지 말라!라고 말하고 있다. 우파니샤든는 허무주의를 경계하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만 숭배하는 자는 깊은 어둠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에만 빠져 있는 자는 그 보다 깊은 어둠속으로 들어가게 되리라'

 우파니샤드는 어느 한쪽의 극단에 서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균형을 지키라라고 외치고 있다. 우파니샤드는 극단에 서지 않고 중용을 강조하고 있다. 사이비 종교에 빠져드는 사람들은 우파니샤드의 이 말을 가슴속에 새겨야할 것이다.

 

4. 인도의 종교관은 일신관일까? 다신관일까? 범재신관일까?

  인도의 종교하면, 브라만교가 인도의 토착종교와 결합해서 새롭게 탄생한, 힌두교를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힌두교는 다신교로 많은 사람이 알고 있다. 유일한 실재인 근원 존재(브라흐만)만이 진정한 신이라고 하면, 일신관이고, 아바타로 나타나는 다른 모습의 존재 모두를 신이라 부르기 때문에 다신관이라 할 수도 있으며, 근원 존재가 만물 하나하나에 존재하므로 신이 어디에나 있다고 하기 때문에 범재신관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인도에서는 우주의 순항법칙이기도한 자연의 여러가지 힘에 구체적인 이름을 붙여 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 신은 하나일 수도 있으며, 셋일수도 있으며, 300일수도 있고, 3000일수도 있는 것이다. 신은 숫자에 얽매이지 않기에 이름 붙이는 대로 불릴 수 있다. 신은 사람이 이름 붙여 부를때는 사람에게 대상이 되지만, 본래 대상이 될 수 없다. 우리의 얇팍한 지식으로 인도인의 정신세계를 이해할 수없다. 마음을 비우고 그들의 생각을 이해해야한다. 인도인의 이러한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도를 도라하면 도가 아니다.'라는 노자의 말이 생각난다. 개념화하고 규정하고 분류하고 분석하는데 익숙해져있는 현대인들의 사고관이 인도철학을 이해하는데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는 생각이 든다.

 

 '귀속말로 전하는 지혜'라는 부재가 붙은 '우파니샤드'라는 책은 우파니샤드를 쉽게 풀어 놓았지만, 쉽게 읽을 수 없는 책이다. 이 책에서 나에게 수많은 질문을 쏟아 내고 있다. 이들 질문에 답하기가 만만치 않다. 우파니샤드를 통해서 인도 철학의 신비를 조금은 보았다는 점에서 마음의 위안을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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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으로 꼭 알아야 할 세계의 신화
아침나무 지음 / 삼양미디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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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빛에 바래면 전설이 되고, 햇볕에 빛나면 역사가 된다.!! 세계의 신화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하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추가하거나 덜어 내어 마침내 문자로 정착된 이야기이다. 달빛에 바랜 전설이 햇볕을 만나 우리에게 전해져 신화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신화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단군신화와 중국의 삼황오제, 그리고 그리스 로마신화를 뺀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신화는 너무도 협소하다. 그중에서도 단군신화는 거짓말이라고 믿는 사람이 많고, 그리스 로마신화만을 아름다운 이야기로 여기는 신화 사대주의가 만연해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리스 로마신화에 대한 연수를 들으며, 세계의 다른 민족도 많은 아름다운 신화를 갖고 있지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7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을 빼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신화 속으로 들어가 보자.

 

1. 우리의 신화는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의 신화를 잘알고 있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는 '단군신화'를 말할 것이다. 여기에서 더 나가서, 동명신화를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우리에게 창조신화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 '단군신화'에는 천지창조 이야기는 있지 않다고 자신 있게 말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도 창조신화가 있었다. 이 책에 따르면, '부도지'의 주인공인 마고가 등장한다. 그리고 선천시대와 중천시대, 후천시대를 거치면서 만물이 창조된다. 무속신화(천지왕본풀이)에서는 옥황상제와 천지왕이 세상만물을 창조한 것으로 나온다. 이 책에는 소개되지 않지만, 제주도의 신화에는 설문대할망이 제주도를 만든 이야기가 나온다. 비루하게 '단군신화'만을 우리의 신화로 알고, 우리신화에는 천지창조 이야기가 없다고 주장했던, 우리의 과거를 반성해야 한다. 사랑을 가지고 우리 삶 속의 모든 이야기들을 들여다보면, 잊혀졌던, 우리 태고의 이야기가 들린다. 이 책을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물론, 이책에도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들어있다. 환인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말을 들어보았는가? 이 책에는 과감하게 환인이 우주를 창조한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 순간 '환단고기'를 참조했던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환단고기'에는 '치우천황'이라는 인물이 소개되는 이 책에도 치우천황을 우리의 영웅으로 소개하고 있다. 역사학자들이 위서로 평가하는 책을 과감하게 채용하여 책을 서술한 저자의 의도가 궁금했다. 그러나 저자의 이름이 '아침나무'라는 필명으로만 소개되어 있다. 저자는 20세기에 만들어진 이야기도 신화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일까?

  이 책에는 우리 조상들이 모셨던 신들이 나온다. 황우양이 성주신이 되고, 황우양의 부인이 지신, 터주신이 된다. 우리의 토착 신들도 나름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모르고 살았다. 어린이가 읽을 수 있는 동화책을 통해서 이러한 이야기를 소개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자연스럽게 어린이들이 우리들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도록 말이다.

  서낭신이 소진랑 이라는 이야기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황우양이 길가는 이들의 침이나 받아 먹으라고 세워 놓았는데, 서낭당은 커다란 숭배의 대상으로 숭배되어 왔다. 고려시대 관리는 서낭당에 인사를 하지 않았다고 관직에서 파직되기도 했다. 참, 재미있는 아이러니이다.

  불교 탱화를 감상하다보면, 시왕도가 눈에 띈다. 불교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없는 나에게는 시왕도의 모습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바리떼기 이야기에는 바리데기의 일곱 아들이 열시왕 즉, 십대왕이 되는 것으로 전해진다. 불교의 시왕도와 바리데기 신화의 연관성이 무엇일까? 지옥에서 죽은 자의 죄를 심판하는 열 명의 왕인 시왕(十王)을 그린 시왕도가 오리 무속의 영향을 받았다기 보다는, 우리의 전통적인 무속신화가 불교가 들어오면서 불교적 요소를 받아들인 것은 아닐까? 무당의 조상신이 되는 바리데기와 불교와의 습합은 이질적인 두 종교가 만나서 새로운 교류를 하며 성장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2. 신화의 보편성.

  세계의 신화는 고립적으로 발전하기도하고 교류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기도 한다. 때로는 고립적으로 발전하고 때로는 교류하면서 발전하기도 했던 세계의 신화들에게서 너무도 보편적으로 보이는 내용이 있다. 그것은, 천지를 창조하고 인간을 흙으로 만들었다는 내용과, 신이 창조한 인간을 신은 홍수를 통해서 심판했다는 내용의 이야기이다.

  성경에 나와있는 신이 인간을 흙으로 빚었다는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다. 유대교와 크리스트교가 탄생한 서아시아 지역의 페르시아에도 최초의 인간 '키유마르스'를 흙으로 빚어 만들었다. 몽골 신화에서도 오치르마니는 챠간 숑고드에게 흙으로 사람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흙으로 사람을 만들었다. 저 멀리 신대륙의 마야문명에도 진흙과 나무로 인간을 만들었으나 불완전하여 옥수수로 인간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흙에서 나와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관념은 세계의 공통적인 관념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리적 차이점에 따라서 자신들의 주식인 옥수수로 사람을 만들었다는 내용으로 수정되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다르면서도 비슷한 인간의 관념을 엿 볼 수 있는 신화적 요소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노아의 방주 이야기는 페르시아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올 뿐만 아니라, 인도판 노아 이야기 라고 할 수 있는 '마누'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강물이 범람해서 수 많은 사람들이 죽는 일이 벌어지는 환경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이러한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상상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물과 불은 떼어 놓을 수 없다. 불은 신성한 것이고,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위해서, 신들의 세계에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갖다 주었다는 이야기는, 아프리카 신화에서도 전해진다. 즉, 피그미족의 신화를 보면, 우연히 신의 집에서 불을 보고는 용감한 피그미 한사람이 신의 집에서 불을 훔쳤다고 한다. 이러한 프로메테우스적인 이야기가 세계 여러 신화 속에 많이 나오는 것은 불이 인간에게 얼마나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켰는지를 알려 주는 것이리라....

 

 

3. 신화의 특수성 - 신도 죽을 수 있을까?

  신도 죽을 수 있을까? 신은 불사의 존재일까? 우리는 신은 불멸의 존재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보편적이지 않은 생각이다. 크리스트교의 신처럼 절대적인 존재는 세계의 신화속에서 흔히 있는 존재가 아니다. 많은 종교에서는 신들은 하나의 특정한 능력을 가진 존재일 뿐이다. 심지어는 죽기도하고 중노동에 시달리기도 한다. 이집트신화에서 '오시리스'라는 존재는 세트의 함정에 빠져 죽었다가 살아난다.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는 지혜와 지하수의 신 에아가 바다 신 아프수를 죽인다. 그뿐인가?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는 지위가 낮은 작은 신들은 홍수방지와 농사를 위해서 침전된 강바닥을 파내야만 했다. 그리고 그들은 술에 취하기도하며, 노동에 불만을 품기도 한다. 켈트 신화에서 브레스 왕의 폭정으로 다난족의 신들까지 중노동을 해야했으며, 풍요의 신 다그다는 브레스의 성주변에 참호를 파기가지 한다. 이러한 모습이 우리 인간사회와 무엇이 다른가? 신이 마지막 전쟁 나그라뢰크에서 죽는 모습은 북유럽 신화에서도 보인다. 신은 불사의 존재라는 것은 보편적인 모습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유대교와 크리스트교 계통의 신화에서 볼 수 있는 특수한 모습일 수도 있다. 우리 사회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유대교 계열의 신앙이 신에 대한 고정관념을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세계의 신화는 그 고정관념을 깨뜨려 주었다.

 

4. 신화의 특수성 - 북유럽 신화의 귀환

  '반지의 제왕', '리니지', '라그나뢰크'의 줄거리와 캐릭터의 모델이 되는 신화를 알고 있는가? 우리에게 낯설게 보이는 북유럽 신화가 그 모델이다. 북유럽 신화는 그리스 로마 신화와 다른 점이 너무도 많다. 북유럽의 자연환경과 북유럽인들의 투쟁이 신화속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북유럽 신화의 다양성과 독특함이 21세기에 새로운 창조의 에너지를 만들고 있다. 수도사들에 의해서 정리된 북유럽 신화의 마지막은 나그나뢰크로 끝난다. 마지막 전쟁 나그나뢰크에 오딘을 비롯한 많은 신들이 참여하여 장렬히 싸우다가 죽는다. 그라나 나그나뢰크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 하나의 끝은 새로운 시작이 된다는 북유럽 신화를 보고 있다면, 북유럽 신화는 암울하다는 고정관념이 틀리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둡고 혹독한 추위 속에서 삶을 개척해 나가야했던 북유럽인들은 자연에 굴복하지 않았다. 한시대의 끝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라는 희망을 품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갔다. 그리고 지금 그 창조적 신화의 에너지는 다시 '반지의 제왕', '리니지'라는 문화 콘텐츠로 되살아나고 있다. 

 

5. 살아있는 켈트신화

  켈트 신화를 그리스 로마 신화만큼 잘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캘트신화는 우리 삶 속에 너무도 가까이 다가와 있다. 요즘 할로윈 데이가 되면 기괴한 복장을 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영어 유치원을 비롯한 영어를 가르치는 학원에서는 그 잔치를 성대하게 한다. 사실 할로윈 데이를 미국에서 시작했다고 아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 기원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켈트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켈트족들은 마법에 걸린 사후의 인간 영혼은 드루이드가 섬기는 신인 샴하인에 의해 구원받는다고 생각한다. 10월 31일은 겨울이 시작되는 심하인 축제날이다. 삼하인 축제날에는 죽은 자들이 긴 겨울밤에 활동하기 위해서 되살아난다고 생각하며, 그들에게 자신들의 집을 볼품 없게 보이기 위해서 벽난로 불을 꺼뜨리기도 했다. 이것이 기독교가 전파된 후에 11월 1일을 '만성절'(모든 성인의 날 All Hallows' Eve)로 불려지게 되었고, 이 말이 '할로윈(Halloween)'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할로윈데이를 즐기는 이들이 이러한 기원을 알고 있을까?

  '침략의 서'에 신족인 '투아다 데 다난'족이 아일랜드에 도착하여 '피르볼그족'과 전투를 한다. 잉글랜드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있는 바이킹족의 침략과 로마인들의 침략, 스페인의 무적함대의 침략을 받은 곳이다. 이러한 역사적 환경이 신화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 침략자들을 신족으로 묘사한 것도 이 신화를 만든 이들이 본토의 토박이 켈트족이라기 보다는 유럽대륙에서 이주해온 켈트족일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한다. 신화는 시대와 소통하면서 형성되고 발전되기 때문일 것이다.

 

6. 그리스 로마 신화의 생명력은 어디에 있을까?

  신화라는 말을 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 로마 신화를 생각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이해하지 못하면 교양없는 사람으로 인식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가 추앙받는 이유는 그 신화의 위대성보다는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한 세계가 패권을 장악하기 때문이다라는 주장을 했던 적이 있다. 이에 대해서 그리스 로마 신화의 문학성과 우수성을 주장하며, 그리스 로마신화가 우수하지 않았다면,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지도 못했을 것이라 주장하는 선생님의 강력한 반발을 듣기도 했다.

  그럼, 그리스 로마 신화의 문학성과 강력한 생명력의 근원은 무엇일까? 우선 개방성에서 찾아야할 것이다. 이집트의 하토르는 그리스 로마신화의 아프로디테가 되고, 아누비스는 헤르메스가 세트는 티폰이 된다. 그리스 로마신화의 신들의 기원은 사실 이집트 문명에 있다. 진정한 창조는 이집트 문명에 있었다. 그리고 그리스와 로마 문명은 이들 원석을 받아들의 자신들만의 보석으로 만들었다. 두번째는 끊임 없는 재창조에 있다. 헤시오도스와 호메로스와 비롯한 수많은 작가들이 문학화 작업을 했다. 신화가 살아있는 생명력을 갖기 위해서는 끊임 없는 재탄생의 과정을 가져야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그 작업을 끊임 없이 해가고 있다. 스타벅스 커피 로그에서 그리스 로마 신화의 사이렌이 살아 있듯이 그리스 로마 신화는 끊임 없이 재탄생되고 있다. 이것이 그리스 로마 신화가 살아있는 이유이다.

 

7. 신화 속에 녹아있는 심리학

  인도의 신화에 하늘의 신 드야우스와 땅의 신 프리비티 사이에 인드라가 태어난다. 많은 신들이 인드라를 주시하자, 인드라를 보호하기 위해서 인드라를 숲속에 숨기고 귀여워하지 않았다. 부모의 방치로 인해서 인드라는 드야우스를 죽이고, 번개라는 강력한 무기를 쟁취한다. 그리고 하늘, 땅, 지하 3계를 지배하는 최고 권력자가 된다. 이 이야기는 그리스 로마신화 속의 제우스가 그의 아버지를 죽이고 권력을 쟁취하는 모습과 닮아있다. 신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다는 설정은 신이 불사의 존재라는 고정관점을 깨뜨려야 이해가 가능하다. 더 나아가, 아버지를 이기고 독립하려는 아들의 심리를 형상화한 신화로 해석 가능하다. 큰나무 밑에서는 작은 나무가 자랄 수 없다. 아버지를 이기지 않고 아들은 세상에 나갈 수 없다. 어려서부터 오이디푸스 컴플랙스를 겪던 아들은 아버지를 이기고 세상에 나간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은 자신이 아버지라는 존재가 되었을 때 가능하다. 그 진리를 그리스 로마신화와 인도신화는 말하고 있다.

  인도신화에서 프라자티는 욕정이 강한 신이다. 딸을 보면서 욕정을 느낄 정도이다. 딸이 사슴으로 변해서 도망가자, 프라자티는 숫사슴으로 변해 추적한다. 참다 못한 폭풍의 신 루드라가 화살을 쏘아 프라자티를 맞추었다. 엽기적인 이러한 내용의 신화는 다른 지역의 신화에서도 나온다. 사춘기가 되면 딸은 아버지를 멀리한다. 스킨십을 하는 것을 특히 싫어한다. 이것은 근친상간의 위험성에서 벗어나기 위한 딸들의 보호욕구이다. 이러한 심리학적 기재가 신화속에 투영되어 프라자티 신화로 탄생했다. 신화를 알면 인간의 저변에 깔려 있는 심오한 심리를 읽을 수 있다는 말이 이해가 간다.

 

8. 신화를 통해서 알게 된 이야기들과 의문들

가. 일본인들은 천당과 지옥에 가지 않는다.

일본인들은 신들이 사는 곳(다카마노하라)과 인간계(아사하나노 나캇쿠니) 그리고 악령이 사는 곳(오미노 쿠니)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이들 신들이 사는 다카마노하라와 악령이 사는 오미노 쿠니에 갈 수 없다. '천당 간다.', '지옥간다.'라는 말을 내뱉는 우리들의 사고관념과 일본인들의 사고관념은 너무도 다르다. 아직도 천황이 있고, 천민이 있는 일본사회 속에서는 죽어서도 자신의 신분을 벗어난 세계에 갈 수 없다. 그들은 단지 신사에 갈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 가까우면서도 먼나라 일본은 죽음에 대한 세계관이 우리와 너무도 다르다.

 

나. 피그미족, 다양한 인종을 탄생시키다.

 피그미족 신화에 따르면, 한마법사가 세상을 창조했다. 인간을 만드는데, 코요테의 장난으로 인해서 흑인과 백인, 황인종이 생겨났다. 외부와의 교류가 별로 없었던 피그미족 사회에서 어떻게 이러한 신화가 만들어졌을까? 혹시 백인 선교사가 들어 오고 나서 생겨난 이야기가 아닐까?

 

다. 약속을 지키는 인도와 지키지 않는 켈트인

  인도신화 속에서는 자신이 내뱉은 말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한다. 자신이 내뱉은 말 때문에 운명의 사슬을 벗어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벌어진다. 그러나 켈트 신화에서는 프윌은 그와울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적을 유인해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도 문화의 차이일까? 아니면 신화를 재미있게 이끌어가기 위한 장치일 뿐일까?

 

라. 비극적 최후를 맞는 페르시아 영웅들

  많은 영웅들을 공주를 구하고 부와 명예를 얻으며 공주와 결혼해서 행복한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신화 속에 나오는 잠시드와 마누키르라는 영웅은 자신의 위대한 성공에 취하여 비참한 말로를 겪는다. 다른 지역의 영웅담과는 너무도 다른 결말이다. 이것이 이란의 특징일까? 아니면 자만에 빠지기 쉬운 인간에게 울리는 경종일까?

 

 

9. 동의할 수 없는 내용들

  이 책에서는 몽골과 한국어가 비슷한 단어가 많다는 것을 근거로 들어 몽골과 한국을 같은 계통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주몽신화와 비슷한 이야기가 몽골에도 있으며, 몽골의 '~치'가 한국에도 그대로 있고, 몽골이 말을 '몰'이라고 발음하고, 제주도에서 '몰'로 말을 발음한다. 이러한 근거가 몽골과 한국이 같은 계통이라는 근거는 되지 않는다고 본다. 왜? 그럴까? 사건을 바라보는 선후가 다르다. 한국어와 몽골어가 비슷한 이유는 몽골과 한국이 같은 계통으로 같은 뿌리를 갖았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고려의 원간섭기에 원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으로 설명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다. 연지와 곤지, 쪽두리, 소주 등이 이때 몽골로 부터 들어왔으며, 몽골에 의해서 강제로 제주도에서 말을 사육하기 시작했으며, 몽골인들로 부터 제주도 사람들은 말을 키우는 법을 배웠다. 몽골에 동명신화가 남아있는 이유는 고구려와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 고구려의 유민이 이곳을 점령하거나 망국에 한을 안고 이곳에 정착했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신화를 공부하는 사람과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이 같은 현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이렇게 다르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낮선 신화들을 쉽게 이해하도록 다양한 사진과 지도를 첨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머릿속으로 상상하기 힘든 이미지들을 친절한 그림으로 설명해주니 너무도 흥미진진했다. 흥미진진했던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이 책에서 가장 나의 가슴을 울린 한마디를 떠올려보았다.

  "마지막 남은 나무가 베어진 뒤에야, 마지막 남은 물고기가 잡히 뒤에야, 마지막 남은 물 한붕울이 사라진 뒤에야, 그때야 그대들은 깨닫게 되리라. 사람은 돈을 먹고 살 수 없다는 것을."

  황금만능주의에 물들고 환경오염을 문제시하지 않는 주변의 인간을 바라보며, 북미대륙에 살았던 크리족의 이 말은 나의 가슴을 울린다.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의 '문명의 붕괴'라는 책에 이와 비슷한 말이 전해온다. 이스터섬의 마지막 나무를 베었던 사람은 과연 어떤 마음이었을까? 한문명이 붕괴할 때, 다양한 요인들이 작용한다. 그중에 하나는 자연환경의 파괴이다. 이스터섬의 사례는 자산파괴가 인간 문명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음을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그리고 그 경고는 북미대륙에 살았던 크리족의 신화속에서 부터 전해져오고 있다. 우리 인류는 그 경고를 들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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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온 2017-12-10 08: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놓고 언제 읽을까 눈길만 주고 있네요 ㅎㅎ

강나루 2017-12-10 08:51   좋아요 1 | URL
두꺼운 부피 때문에 망설이기도 하지만, 일단 손을 데면 술술 읽혀져요.^^

낭만인생 2017-12-10 18: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 내용 정말 좋네요... 감사합니다.

강나루 2017-12-10 20:09   좋아요 0 | URL
내용이 좋다니, 감사합니다.^^

munsun09 2017-12-11 17: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서 읽으려고 하니 절판으로 뜨네요^^
중고를 살펴봐야겠어요.

강나루 2017-12-11 17:52   좋아요 1 | URL
절판이라니... 안타깝네요

라온 2017-12-11 22: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중고로 샀어요

강나루 2017-12-12 04:11   좋아요 0 | URL
네 ^^ 중고도 좋지요 즐거운 책읽는 시간 보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