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절대지식 - 천만년을 버텨갈 우리 속담의 품격
김승용 지음 / 동아시아 / 201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당신은 우리 속담을 얼마나 아는가? 아마 30여개를 넘기가 힘들 것이다. 그렇다고 속담을 모아 놓은 백과사전이 있지도 않아 속담을 제대로 공부하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팟캐스트 '떡국열차'에서 김승용씨가 나와서 우리말과 우리 속담을 풀어 냈다. 내가 한국인이고, 고등교육도 받은 사람이기에 우리말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현실은 그러하지 않았다. 김승룡의 현란한 우리말 속담 풀이에 푹빠져들면서, 우리의 말과 속담에 대해서 그 흥미 진진한 이야기를 좀더 자세히 알고 싶어졌다. 그래서 '우리말 절대지식'을 주문했다. 이 책을 다읽는데 1년여의 시간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쉽게 읽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이 책을 한꺼번에 다 읽는다면 우리말 속담을 제대로 이해하고 나의 생활에 활용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생겼다. 그래서 하루에 1장 ~ 5장씩 읽어 내려갔다. 그 꾸준히 읽어 내려가서 마침내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과연 '우리말 절대지식'에는 어떠한 보물이 숨겨져있었을까?

 

1. 잃어버린 우리의 보석들

  군대에서 점심 식사를하기 전에 중대단위로 인원채크를 했다. 일단은 식당으로 이동하기 전에 번호를 외쳤다. '하나!', '둘'..... 그런데, 갑자기 숫자가 끊겼다.  '마흔 아홉!' 그 다음 순서의 병사가 자신이 외쳐야할 '쉰'이라는 단어를 몰라 당황하고 있었다. '오십'은 알아도 '쉰'은 알지 못했다. 이런일이 종종 심심치 않게 발생했다. 결코 웃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이러한 안타까운 현실이 나에게도 존재함을 이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개호주', '능소니', '초고리', '풀치', '발강이', '모쟁이'라는 단어를 들어보았는가? 그 뜻을 아는가? 이 단어들은 특정 동물의 새끼를 달리부르는 이름이다. '개호주'는 호랑이 새끼를, '능소니'는 곰을, '초고리'는 매를, '풀치'는 갈치를, '발강이'는 잉어를, '모쟁이'는 숭어 새끼를 부르는 명칭이다. 이러한 단어를 사용하는 예를 이책을 읽기 전까지는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이중에서 갈치와 잉어는 우리의 식탁에 자주 오르는 생선들이다. 우리는 우리 식탁에 오르는 생선들 새끼들의 명칭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동짓달'과 '섣달'이 몇월인지 아는가? 그럼, 그믐이 몇일인가? 물론 이를 쉽게 답하는 분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를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동짓달'은 11월이고, '섣달'은 12월이다. '그믐'은 그달의 마지막 날로써, 29일이 될 수도 있으며, 30일이 될 수도 있다. 단순히 단어의 뜻풀이만 한다면 이책의 가치는 그리 높지 않을 것이다. 왜? 섣달이 섣달이지 아는가? 예전에는 12월이 1월이고, 동짓날이 마지막 달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새로운 해가 시작된다하여 12월을 섣달이라했다. 재미있지 않은가? 주옥 같은 우리 말들을 재미있는 어원풀이를 곁들여 소개한다.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이러한 우릿말들을 하나하나 찾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2. 맛깔나는 보석!! 우리말 속담들

  '제 똥 구린 줄 모른다.'라는 속담을 아는가? 그렇다면 이와 비슷한 현대 만들어진 속담을 아는가? 모 국회의원이 최초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내로남불'이라는 말을 알 것이다. '내가 하면 로멘스 남이하면 불륜!!'. 이와 비슷한 말이 '남이 하면 에로 내가 하면 멜로', '남이 하면 간섭 내가 하면 관심', '니가 하면 비리 내가 하면 의리', '나는 팬이고 너는 빠다'라는 말이 있다. 속담이라면 보통 늦어도 조선시대 쯤 만들어져서 지금까지 사용될 것이라 추측한다. 그런데, 김승용은 현대에 새로 만들어져 사용되는 속담들까지 수집 정리했다. 언어는 사용되고 있을때, 그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 많은 속담들이 사라지고 있지만, 많은 속담들이 새로 만들어지고 있다. 새로운 속담들이 만들어져 쓰인다면, 우리의 언어 생활은 보다 풍성해질 것이다. 그래서 나도 하나 만들어 보았다.

  '내가하면 장난, 남이하면 괴롭힘!!' 우리 교육 현장에서 친구들을 괴롭히는 학생들이 흔히 '장난이었어요.'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그러나 피해자는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 '내로남불'의 학교판!! 이 속담으로 학교에서 벌어지는 '괴롭힘'을 예방해보아야겠다!!

 

3. 삶을 들여다보는 보석!! 속담에 숨어있는 조상의 삶과 지혜

  어려서 아버지께서 '구운 게도 다리 떼고 먹어라.'라는 말의 풀이를 해주었던 것이 생각난다. 부모의 시묘살이를 하던 사람이 있었다. 물가에 씻으러 갔다가 게를 보고는, 시묘살이가 끝나면 저 게를 잡아먹어야겠다고 입맛을 다셨단다. 그런데 시묘살이 끝나기를 하루 앞두고 이를 못참고서는 게를 잡아 구워먹었다. 지나가던 사람이 이를 보고서 그 사람을 나무랐단다. 그래서 시묘살이하던자가 게를 구워먹기 전에 나무다리를 떼어 놓고 먹었다면 효자소리를 들었을 것이라며, 사람들이 '구운 게도 다리 떼고 먹어라.'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속담 하나에 '시묘살이' 풍습이 녹아있다. 조상의 삶이 녹아있다. 이렇게 조상의 삶이 녹아 있는 보석들이 이책에는 많이 소개되어 있다.

  '가재 물 짐작하듯'이라는 속담을 들어 보았는가? 무엇이든 미리 짐작을 잘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이 속담은 가재를 잘 관찰한 조상들의 세심한 관찰력이 숨어있다. 가재는 허파로 호흡하지 않는다. 물고기 처럼 아가미로 호흡한다. 가재는 커다란 머리 투구 안쪽 공간 사이에 물을 저장하여 그것으로 아가미 호흡을 하며 물 바깥에서도 일정 시간동안 버틸 수있다. 상류의 얕은 물에서 사는 가재가 상류의 물이 줄어들 경우 이사를 가야하는데, 그럴 경우 물바깥에서도 호흡을 해야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때 가재의 호흡법이 빛을 발한다. 가재의 생태를 관찰하고 이를 속담으로 만든 조상의 지혜도 감탄을 자아내지만, 이를 글로 자세히 표현한 저자 김승용의 노력은 더욱 감탄을 자아낸다.

 '갓 사러 갔다 망건 사온다.'라는 말을 들어 보았는가? 많이 들어보지는 않았어도 들어는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러한 속담이 만들어 졌는지는 아는가? 엣날에 갓과 망건은 매우 비싼 물건이었다. 그런데, 둘의 값이 거의 같았으며, 같은 곳에서 팔았다한다. 자기가 원래 사려던 것을 장사꾼의 말에 흔들려 갓을 사지 않고 망건을 사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한다.

  '칠성판에서 뛰어 났다.'라는 속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칠성판이 관 바닥에 까는 얇은 널조각이며, 여기에 북두칠성을 본떠서 일곱게의 구멍을 뚫었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산 김가 셋이 죽은 최가 하나를 못당한다.'라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가'가 '최씨'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저승에서 가장 높은 판관인 '최판관'을 뜻한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속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홍치마'를 입는 사람을 뜻한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나이 많은 남자 혹은 홀아비가 돈을 주고 신붓감을 데려 올때 어린 여자나 처녀와 결혼하겠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쉽게 사용할 수 없는 속담이다.

  속담을 알면 조상들의 삶이 보이고, 속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상의 삶에 관심을 가져야한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사용하지만, 속담이 만들어진 이유를 알면 쉽게 사용할 수 없는 속담이 있고, 너무도 친근함이 느껴지는 속담이 있다. 이 책은 우리에게 조상의 삶을 말해주고 있다.  

 

4. 잘못 알고 있었던 보석들! 그 참의미를 알게 되다.

  "아빠 까마귀 고기 맛있어요?"라는 나의 질문에 아버지께서는 "먹어보지 않아서 모르겠다. 그런데 까마귀 고기를 먹으면 잘 까먹는단다."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다시 "먹어보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아요?"라고 묻자, "잘 까먹는 사람에게 '까마귀 고기 먹었냐?'라고 하잔니"라고 말씀하셨다. 한방에서는 자연의 동식물이 약재로 사용되기도 하고, 특정 동식물을 먹으면 다양한 효능이 나타나기에 아버지의 말씀을 그때는 그대로 믿었다. 그런데, '까먹다'를 까마귀와 연관시켜 만들어진 속담이라는 사실을 이책을 통해서 알고서는, 무릎을 탁치며 웃었다.

  '계란유골(鷄卵有骨)'이라는 고사성어를 아는가? 이 고사성어를 두가지로 풀이할 수 있다는 것도 아는가? '계란유골(鷄卵有骨)'이라는 고사를 유정난의 경우 병아리가 되다 말 경우도 있기에 실제로 '뼈가 있다.'로 해석할 수도 있으나, 有骨을 '곯아 있다.'의 이두식 표현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중학교 한자시간에는 '뼈가 있다.'라는 해석으로만 배웠다. 당연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고사성어를 새로운 관점에서 해석할 수도 있는 사실이 재미있다.

 '일석이조(一石二鳥)'라는 고사성어를 아는가? 중학교 '한자' 수업시간에 배웠던 이 고사성어가, 사실은 순수한 고사성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가? 영어속담 "To kill two birds with one stone"을 일본 메이지시대에 '돌 하나 새둘'로 직역한 것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이란다. 그 이전에는 '일거양득'만이 사용되었단다. 일제강점기와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일본으로부터 많은 말들이 들어왔다. 우리가 잘아는 '혹부리 영감' 동화도 일본의 민담이 일제 강점기 교과서를 통해서 전해진 이야기이다. 우리 문화 속에 일제의 영향력을 지금도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알고 쓰는 속담과 모르고 쓰는 속담에는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5. 옥의 티를 찾아라!

  옥에도 티가 있듯이, '우리말 절대지식'에도 약간의 오류가 있다. 우선 명백한 오류로 보이는 몇가지를 찾아보자.

  첫째, ‘자두연두기(煮豆燃豆萁)’와 '자두연두기(煮豆燃豆箕)' 중에서 어느 것이 맞을까? 萁는 '콩깍지기'이고, 箕는 '키기'이다. '콩대를 태워 콩을 삶'는다는 표현을 할 때는 '콩깍지 기'자를 써야 맞다.

  둘째, '성동격서'를 설명하면서 ''손자병법' 36가지 계책 중 여섯 번째 계책으로'라고 설명했다.무엇이 오류일까? '손자병법'과 '36계'는 별도의 책이다. '손자병법'안에 '36계'가 있는 것으로 착각한 듯하다.

  셋째, 131쪽 주에 '나폴레옹도 감옥에서 돈에 매수된 주방장이 음식에 조금씩 넣은 비소에 의해 암살되었다.'라고 서술했다. 여러분도 잘알 듯이, 나폴레옹은 감옥에 갖혀 죽은 것이 아니라,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일생을 마쳤다.

  저자 김승용은 치밀한 자료조사를 통해서 훌륭한 속담사전을 완성했다. 나는 그의 노력을 존중한다. 그러나 그의 주장을 맹목적으로 따르지는 않는다. 그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을 소개해보자.

  첫째,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라는 말의 어원을 아는가? 이책에는 '송남잡지'를 인용하여, '지금 남녀가 하룻밤의 인연을 맺음을 일컫는다. 왜구가 우리나라를 쳐들어 왔을 때 단 하룻밤을 머물러 자고 가더라도 적을 막기 위해서 반드시 성을 쌓았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고등학교 시절, 일본어 선생님께 들은 이야기는 이와는 다르다. 노총각으로 늙어가는 사람이, 옆집 여성에게 자신이 당신의 남편대신 만리장성을 쌓으러 가겠으니, 자신과 하룻밤을 자자고 했단다. 결국 그 여성과 하룻밤을 자고 만리장성을 쌓으러 그녀의 남편대신 갔다고 한다. 여기에서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라는 속담이 나왔다고 한다. 설득력으로 치자면, '송남잡지'보다는 일본어 선생님의 설명이 설득력이 있다. 그렇다고 일본어 선생님이 들려준 설명이 100% 확실하다고 단정은 못하겠다. 호사가들이 지어낸, 민간어원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둘째, '만만한 놈은 성도 없나'라는 속담의 어원이 무엇일까? 이 책에서는 '누구나 성과 이름이 존재하니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내용이라는 주장과 '성'을 성질로 풀이해서 만만한 상대도 감정을 가진 사람으로 성낼 때도 있음을 말한다고 설명한다. 어느 설명이 옳을까? 나는 두번째 설명이 타당하다고 본다. 우리가 잘 알듯이 우리나라 사람들 누구나 성을 갖게 된 것은, 갑오개혁 이후이다. 신분제도가 폐지되면서 해방된 노비들도 성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도 나의 추정이다.

 

 

  이 책은 우리가 생각하는 고리타분한 사전이 아니다. 맛깔나는 설명과 다양한 사진자료까지 첨부되어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고금을 넘나드는 다양한 우리의 속담을 풀이하고, 속담과 관련있는 고사성어, 현대속담, 생태학적 지식을 소개하고 있다. 토마토가 채소로 분류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채소로 분류되고 있으나, 유럽에서는 과일로 분류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이렇게 다양하고도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이책에 가득하다. 한국어를 사랑하는 모두가 이책을 소장하고, 틈틈이 옆에두고 읽었으면 좋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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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신은 죽었다
프리드리히 니체 & 마르틴 하이데거 지음, 강윤철 옮김 / 스타북스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니체! 내가 니체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중학교 시절 서점에서 였다. 그때 돈으로 천원이면 작은 책한권을 살 수 있었다. 시중의 책을 글자 폰트를 작게하고 얇게 만들어 돈이 부족한 나에게는 참으로 좋은 책이었다. 그 책들 중에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이 나의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그 책을 샀다. 그러나, 5장을 읽고는 다시 책장을 덮었다. 너무도 이해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어른이 되어서 팟캐스트를 통해서 니체에 대한 다양한 강의를 들었다. 그리고 니체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그리고 이책을 꺼내 들었다.

 

1. 불친절한 니체씨!!

  니체는 불친절하다. 자신의 사상을 독자가 알기 쉽게 풀어써주지 않는다. 그런데, 이책의 출판사는 니체 만큼이나 불친절하다. '니체의 신은 죽었다.'라는 책을 마틴 하이데거가 왜? 썼는지, 그리고 이러한 구성을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독자에게 말해주는 것은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출판사는 이러한 설명도 없이 독자에게 이 책을 읽으라고 한다. 1,2,3부를 읽으며, 이해가 되지 않으면 두번씩 읽으며, 4부의 마틴 하이데거의 '신은 죽었다. '라는 논문을 읽으면 니체에게 성큼 다가서리라 믿었다. 그런데, 아뿔싸!! 니체의 사상을 잘 이해하라고 구성한 4부가 더 이해하기 힘들었다. 니체의 사상에 대한 해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이데거의 사상을 이해해야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했다. 이책의 가장 어려운 부분이 바로 4부였다. 불친절한 니체씨 만큼이나, 하이데거도 불친절했고, 이들을 뛰어넘는 출판사의 불친절함은 나를 감탄하게 했다.

 

2. 여혐 니체!!

  니체라는 이름은 강한 느낌을 준다. 중세의 기나긴 시간동안 인간을 억압해왔던 종교에 맞서서, 당당히 신은 죽었다. 라고 외쳤던 니체!! 당당한 이미지의 니체가 여성 혐오자였다는 사실을 이책을 통해서 알았다. 믿겨지지 않았다. 니체를 연구하는 여자 학자도 있는데, 그 여성학자는 니체의 이러한 여혐론에 대해서 어떠한 기분이 들었을까?

 

"여자는 남자와 동등한 권리를 갖지 못하며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하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저없이 주장할 수 있게 된다."

"복수와 사랑에서 여성은 보다 야만적이다."

"여자를 만든 것이 신의 두번째 실수였다."

"여자는 깊이 있는 척하는 껍데기이다."

 

  왜? 이리도 니체는 여성 혐오자가 되었을까? 니체가 강하게 여성을 비하하고 열등한 존재로 규정할 수록, 니체가 측은해지는 것은 왜일까? 그 정답은 그의 인생을 통해서 찾아야하지 않을까? 니체는 아버지가 5살에 돌아가셨기에, 어머니를 비롯한 3명의 고모와 엘리자베트라는 여동생에 둘러싸여 살아야했다. 그는 여성의 옷을 입도록 강요받았다. 이러한 삶이 내면에 침잠하여 여성 혐오로 표출되지 않았을까? 니체가 '힘의 의지'를 추구 한 것도, 강한자가 되어 여성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니체의 '힘의 의지'는 단순히 '폭력'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적 불굴의 신념'을 뜻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여성성을 강요받던 니체는 이 강요로부터 탈피하기 위해서라도 '내적 불굴의 신념'이 필요했을 것이다.

 

"성적인 사랑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그러한 기대를 갖는 것에 대한 수치심이 처음부터 여자를 보는 눈을 망쳐 놓는다."

"늘 깜짝할 사이의 많은 어리석은 행동에 대하여 그대들은 연애라고 부른다."

"결혼하기 전 당신 자신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라. 즉 나는 이 여자와 늙어서도 여전히 대화를 잘 나눌 수 있을까? 결혼생활은 긴 대화이다."

 

결혼을 하지 않은 니체가 결혼에 대해서, 연애에 대해서 이렇게 깊이 있는 말을 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뿐이 아니다. 여성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말들을 쏟아낸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심리학자 황상민이 한말이 있다. '그들이 하는 말을 거꾸로 생각하며 그들의 마음을 알 수 있다. ' 여성에 대한 혐오와 결혼에 대한 많은 심오한 격언들은 그만큼 니체가 연애와 결혼을 하고 싶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루 살로메와 연애하고 싶었고, 그녀와 결혼하고 싶었지만, 루 살로메는 니체를 거부했다. 루 살로메는 니체와 지적인 대화를 나누고는 싶었지만, 그와 잠자리를 같이하기는 싫었다. 여성으로부터 버림받고, 좌절받은 남자의 상처는 깊다.  2011년 오슬로 북서쪽 30Km에 위치한 노동당 청년캠프 행사장(우퇴위아 섬)에서 극우 청년에 의해서 테러가 일어났다. 그 청년의 말중에서 '나도 여자를 사귈것이다.'라는 말이 생각난다. 또한 극우 청년으로, 여성혐오증을 가지고 있으며, 모범적 단일민족 국가로 한국을 뽑았다는 사실이 인상적이었다. 사랑을 갈구하지만,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사랑은 분노로 폭발한다. 니체와 노르웨이의 극우청년의 경우, 여성에게 사랑받고 싶고 사랑하고 싶었으나,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폭력적 말이나 행동으로 이것이 표출된 것은 아닐까?

  니체는 수많은 철학자들의 이름을 나열하면서, 철학자는 결혼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단지 소크라테스가 실수를 했을 뿐이라고 한다. 이는 결혼하지 못한 니체 자신에 대한 변명으로 들린다. '나도 연애하고 결혼하고 싶다!! 천재인 내가 무엇인 못나서 여성이 없겠는가?'라는 니체의 절규가 나의 귓가에 들린다. "모든 위대한 사랑은 동정의 단계를 초월해 있다." 진정한 사랑은 동정이 아니며, 상대를 동정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하나의 인간! 하나의 인격체로 사랑한다. 악마가 "신은 죽었다. 인간에 대한 동정 때문에 죽었다."라는 말을 했다는 말도 결국 동정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뜻이다. 니체는 여성에게 동정의 대상이고 싶지 않았다. 한남자로서, 사랑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루 쌀로메에게 니체는 동정의 대상! 그 이상은 아니었나 보다. 니체를 알면 알수록 그가 더욱 측은해지는 것은 왜일까?

 

3. 크리스찬 가정에서 자란 니체!!

 니체를 공부하면서 도올 김용옥 선생이 떠오른다. 크리스찬 가정에서 자라났지만, 현실 교회를 가장 날카롭게 비판한다. 그렇다고 그가 예수님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니체와 도올은 예수를 성인으로 인정한다. 가장 독실한 크리스찬이었기에 예수의 말과 달리살며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기득권을 지키려는 세력에 쓴 소리를 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신의 자식으로서 누구든다 동등하다. 그런데 예수를 영웅으로 만들어 놓다니!'라고 소리친다. 이 말은 '도마복음'에서 예수를 인간으로 표현한 것과 유사하다. 예수와 인간이 동등하다는 니체의 주장은 크리스찬들에게는 엄청난 발발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나는 신에게 영예를 돌려 신을 악의 아버지로 생각"한다는 니체의 말을 가히 충격적이다. 더 큰 폭탄발언을 소개할까? "형제들이여, 내가 지어낸 이 신은 다른 신들이 모두 그러하듯이 사람들이 만들어낸 사람들의 작품에 불과하며 망상에 불과하다.' 니체의 이 말은 자신을 전투적 무신론자로 규정한 니챠드 도킨슨을 떠올리게 한다. 크리스찬 가정의 엄격함이 니체를 이렇게 급진적인 철학자로 키웠던 것일까?

  "저 도덕이야 말로 위협가운데서도 가장 위험한 것이라면?"이라 주장하며 '도덕'에 대한 의심을 한다. 서구 기독교 사회에서 기독교 윤리에 대한 의심은 보통 용기있는 자가 아니라면 할 수 없다. 한편으로는, 니체의 말이 타당해 보이기도 하다. 한사회에서의 도덕이 다른 사회에서는 부도덕한 것으로 규정된다.(공간의 차이) 또한 한시대의 도덕이 다른 시대의 부도덕일 수도 있다.(시간의 차이) 남편이 죽으면 부인이 따라죽는 사티라는 인도의 풍습 과거에는 도덕적인 행동일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시대 인도를 벗어나면 사티는 부도덕한 일이 된다. 그리고 오늘날 사티는 법으로 해서는 안되는 악습으로 규정되어 있다. 현실의 그 어떤 철창도 부수려했던 망치의 철학자 니체! 그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모든 억압을 부수려했다.

  니체를 대표하는 사상중에 하나가 '니힐리즘'이다. 허무주의!! 니체의 니힐리즘은 '최고 가치들이 가치 없어지는 것'을 뜻한다. 이를 하이데거는 '종래의 가치들에 대한 부정은 새로운 가치 선정에 대한 긍정'이라고 말했다. 서구 기독교 도덕에 대한 '니힐리즘'은 새로운 시대의 도덕을 세우기 위한 창조적 파괴일지도 모른다.

 

4. 고통속에 철학을 꽃피운 니체!!

  이책 곳곳에 '병자', '고통', '죽음'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이러한 단어들이 자주 그의 글에 등장한다는 것은 그를 가장 괴롭히는 것이 '질병', '고통',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니체가 매독을 앓기 시작했으며, 결국은 이 매독균이 뇌에 침투하여 그를 미치게 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어느 팟캐스트에서는 뇌종양이 그를 괴롭혔고 이것이 그를 죽음으로 인도했다는 주장을 했다. 매독과 뇌종양 중에서 한가지만이 니체를 괴롭혔다기 보다는 이 모두가 니체를 괴롭혔을 것이다.  

 

"괴로움이 철학을 낳는다면 만약에 생각 자체가 병으로 부터 압력을 받게 된다면 어떻게 될것인가?"

"우리 철학가들 역시 우리가 병이 났을 때는 우리의 몸과 영혼은 병에게 맡기고 우리 자신들로부터 눈을 감아버린다."

"인간의 죽음에 대한 생각을 전혀하지 않은 것을 보는 것은 나에게는 무거운 일이다."

 

니체는 괴로웠을 것이다. 매독은 잠시 발생했다가 치료를 중단하면 잠복기에 들어가고 이 매독이 재발할 경우 척수에도 침투할 수도 있고, 뇌에 침투할 수 있다. 뇌에 침투할 경우, 매독성 치매로 진행된다.그 고통 속에서 니체는 고통과 죽음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니체는 이 고통에 무릎꿇지 않았다. 니체는 '그들에게 있어 삶에 대한 생각이 몇백배나 더 생각할 만큼 가치있는 것이 되도록'하겠다며 당당히 고통과 죽음에 맞선다.

  혹시 니체의 좌우명이 무엇인지 아는가? "상처에 의해 정신이 성장하고 힘이 회복된다."는 그의 좌우명은 고통에 좌절하지 않겠다는 그의 불굴의 의지를 보여준다. 심지어 그는 '모든 경우가 하나의 행운이다. 무엇보다도 전쟁이 그렇다.'며 고통의 극단인 전쟁을 찬미하는 어리석은 모습까지 보인다. 그만큼 그는 절실했다. 고통에 무릎꿇지 않으려 몸부림쳤다. 그러면서 희망을 노래했다. '철학은 고작 신체의 해설과 신체에 대한 오해'라고 말하며, '지금까지 행해진 모든 철학의 목표는 진리가 아닌 다른것 '건강, 미래, 성장, 힘, 생명'이라고 말한다. 신체! 아니 건강한 신체를 그는 희구했다. 그러면서 그는 고통을 승화했다.

 

"내가 심하게 아팠던 시절에 얻은 이득을 난 아직도 다 소모하지 못했다."

"삶이란 또한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는 모든 것이다."

"오직 거대한 고통만이 영혼의 최종적인 해방자인 것이다."

 

  니체는 고통속에서도 철학을 했다. 그리고 그 고통을 통해서 우리에게 많은 주옥같은 명언들을 쏟아낸다. "가장 강한자로서 가장 정신적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파멸을 보는 곳에서 행복을 발견한다."라는 그의 말은 병으로 무너져가고 있는 자신은 그 질병을 통해서 더 많은 깨달음을 얻을 것이며, 고통과는 상관 없이 행복하다는 신념을 말하고 있다.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가 떠오른다. 힘든 감옥속에서도 자신의 자유와 신념을 지키려는 지식인의 불굴의 신념이 떠오른다. 20여년을 감옥에서 보내며 인생과 고전의 지혜를 갈고 닦은 신영복이 생각난다. 니체에게 고통은 감옥이었다. 그러나 그 고통이라는 감옥에 굴하지 않고, 신영복이 고전의 지혜를 갈고 닦았듯이, 니체는 고통을 통해서 자신의 철학을 더욱 날카롭게 벼렸다.

  Amorfati(운명애)!!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 서서히 죽어가는 니체는 절규한다. "적어도 나는 언젠가 반드시 하나의 긍정자가 되고 싶다."이 말은 지금은 긍정자가 아니라는 말이 된다. 병마와 싸우며 긍정자가 되기 위해서 니체는 노력한다. "오늘 가장 좋게 웃는 자는 역시 최후에도 웃을 것이다." 지금 당장 웃는다면, 그는 죽을 때도 웃을 것이다. '영원회귀'라는 말을 이때 사용해야되지 않을까? '고통'이라는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며, 긍정자로 살기 위해서 노력한 니체!! 그는 초인을 찾는다. '초인이란 필요한 일을 견디어 나아갈 뿐아니라 그 고난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고통을 견디어 나갈 뿐만 아니라, 고통을 사랑하려하는 니체의 모습이 느껴진다. 세상에 고통까지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까? 더 나아가 상대방의 아픔까지 사랑하는 자가 있을까? 있다면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일 것이다. 사랑할때 우리는 고통을 인내하며 상대방의 고통까지 사랑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할때 초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자랑스럽게 사는 것이 그 이상 가능하지 않을 때, 사람은 자랑스럽게 죽어야 한다."

 

  니체는 자랑스럽게 살고 싶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죽음을 선택하고 싶었다. 그러나 니체의 이 소망을 이뤄지지 않는다. 1889년 투린에서 마부의 채찍을 맞는 말을 감싸 앉으며 그는 쓰러진다. 인간에 대한 사랑을 뛰어 넘어 살아 있는 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려했던 초인은 그렇게 쓰러졌다. 그리고 10여년을 병실에서 살다가 1900년 바이마르에서 사망한다. 그때가 8월 25일이었다.

 

5. 니체가 들려주는 아포리즘!!

  니체의 글은 문학적이며 많은 명언들로 가득차 있다. 이 책에 소개된 많은 명언들이 나의 가슴을 울리게 한다. 그 명언중에 일부를 소개해본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가 그 법칙을 획득해 낸 윤리 이외의 어떤 윤리도 알지 못한다."

  '그 법칙을 획득해낸 윤리'란 무엇일까? 외부에서 강요되거나 맹목적 복종을 요구하는 윤리를 구체적 '삶의 문답'으로 해부해내는 능력을 말한다. 노예의 윤리를 거부하고 당당히 자신의 윤리로 살면서 주인으로 살아가라는 의미일 것이다.

 

"인간만이 웃음을 고안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깊이 괴로워하고 있다."

  동물중에서 '우울증'을 알고, 스스로의 목숨을 끊고, 혹은 과로사를 하는 동물은 인간이 유일하지 않을까?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가장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는 니체의 탁월한 지적은 한국의 현실에서 너무도 유효하다.

 

"아무것도 버릴 수 없는 자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모든 것은 댓가를 필요로한다. 그런데 인간은 아무것도 버리고 싶어하지 않고 더 많은 것을 얻으려한다. 희생없이 댓가만을 바란다면 그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사랑하는 여성을 원한다면 시간과 돈과 사랑을 한여성에게 쏟아야하듯이....

 

"알맞은 정도라면 소유가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도를 넘어서면 소유가 주인이 되고 소유하는 자가 노예가 된다."

  황금만능의 시대! 감질! 금수저가 활개치는 시대! 우리사회에 적절한 니체의 명언이다. 회사원들을 자신의 기쁨조로 여기며 갑질을 해대는 재벌 2세와 3세는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부로 인해서 물질의 노예가 되었다.

 

"진리는 힘이 필요로 한다."

  '정의는 힘이 필요하다.'라는 말로 치환가능하다. 정의도 진리도, 진실도 힘이 있어야 정의일 수 있고 진리일 수 있다. 세월호의 진실은 촛불혁명이라는 힘을 필요로했고, 그 진실에 다가설 수 있었다.

 

 

   니체는  "그 같은 자유정신은 존재하고 있지도, 전에 존재해 본 적도 없다."라고 말했다. '자유정신에 대한 부정이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몸이 약하고 지독한 고통속에서 살아야했던 니체에게 '자유정신'은 부정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이것이 건강한 육체에 대한 희구로 이어졌을 것이다. '니체의 신은 죽었다.'라는 책을 읽으며, 나는 강한 니체의 모습이 떠오르기 보다는 아프고 고뇌하는 인간 니체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그 고통속에서 완성된 철학을 나의 지식으로 단시일내에 정복하기란 너무도 힘들다. "산맥 중에서 가장 가깝게 가는 길은 산봉우리에서 산봉우리까지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긴 다리를 갖고 있어야만 한다."라는 니체의 말처럼, 그의 명언을 읽기 위해서는 긴다리가 필요했다. 나에게 긴다리가 없다면 긴 장대가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어린시절 기다란 장대를 개울에다 짚고 반대편으로 넘어가던 일이 생각난다. 스타북스 출판사에서 만약 니체를 이해할 수 있는 장대를 이책의 곳곳에 배치했다면 '니체의 신은 죽었다.'라는 책을 읽기에 좀더 수월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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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20-09-03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가 너무 길어 앞에 조금 봤는데 시간이 많으신가 보네요. 저 같으면 리뷰 안 쓰고 책 한권이라도 더 볼 듯^^;;

강나루 2020-09-03 21:25   좋아요 0 | URL
독서 초보는 책을 읽고 독서를 좀한 사람은 책을 읽고 서평을 쓰고 독서 고수는 자신의 책을 쓰지요

candidx 2022-10-16 16: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상세한 리뷰 너무 감사합니다. 책을 읽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강나루 2022-10-16 17:58   좋아요 0 | URL
도움이 되었다니 제가 감사합니다^^
 
극한의 경험 - 유발 하라리의 전쟁 문화사
유발 하라리 지음, 김희주 옮김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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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발 할라리!! '사피엔스'를 읽었을 때, 그에게 받은 강력한 계시(새로운 깨달음)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사피엔스의 역사를 한권의 책으로 엮어 냈을 뿐만 아니라, 인류의 역사를 새로운 역사로 바라보며, 나에게 강력한 계시를 주었다. 그의 전공이 중세 전쟁사이고, 한국에 번역된 책이 '호모 데우스'말고서도 2권이 더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호모 데우스'도 '사피엔스' 만큼은 아니지만, 나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었기에 그의 책을 더 읽기로 결심했다. '대담한 작전'과 '극한의 경험' 중에서 어느 것을 먼저 읽을 것이지를 고민했다. '대담한 작전'이 단편적인 에피소드의 모음으로 보인 반면에, '극한의 경험'은 유발 하라리 만의 통찰이 묻어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이 느껴졌다. "'호모 사피엔스' '호모 데우스' 이전에 전쟁하는 인간 '호모 벨리쿠스'가 있다."라는 표지글이 나를 강력하게 끌어 당겼다. 그리고 책장을 넘겼다.

 

1. 고통이 우리에게 새로운 '계시'를 줄 수 있을까?

  유발 하라리는 이 책에서 '계시(revelation)'이라는 단어를 자주 쓴다. '계시'라는 단어를 종교적 의미의 단어로 받아들인다면, 이 책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오히려 '새로운 깨달음'으로 해석하는 것이 유발 하라리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깨달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고통이 우리에게 '계시'를 줄 수 있을까? 특히 극한의 경험인 전쟁을 통해서 '계시'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본다. '군대 갔다와야 사람된다.'라는 말을 흔히 듣고, 번지 점푸를 하거나 커다란 동물을 사냥하고, 고통을 참을 줄 알아야 성인으로 인정하는 풍습이 인류의 문화 속에 녹아 있다. '고통'이 새로운 '계시'를 준다는 인류의 인식은 과연 타당한가? 이 책을 읽는 내내 나의 머릿속을 맴도는 화두이다. 우리는 이 화두에 앞서 해답을 얻었던 씻다르타의 경험을 되새겨 보아야할 것이다. 씻다르타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고행'을 했다. 그러나 그가 얻은 것은 고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결론이다. 그리고 보리수 아래에서 '명상'을 한다. 그리고 그 명상을 통해서 위대한 종교적 깨달음을 얻는다.

  반면 예수의 죽음, 십자가의 죽음, 예수의 수난 등, 서양 근대초기의 문화속에는 고통을 새로운 깨달음이나 개종의 장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많이 있었다. 상해를 무거운 벌로 다스리는 서양인들! 백인들의 경우, 동양인들 보다 진통제 처방을 많이 사용한다고 한다. 고통을 잘 참아내지 못하는 백인들이 오히려 고통을 통해서 계시를 얻을 수 있다는 역설적인 인식을 만들어 낸점이 아이러니컬하다.

  진정으로 전쟁이라는 극한의 체험이 인간을 종교적 계시, 새로운 깨달음의 세계로 이끌 수 있을까? 전쟁 후에 군인들이 수도원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떠올리는 사람들은 그렇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유발하라리가 지적했듯이, 수도원에 상이군인 수용시설로 많이 활용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한다면, 전쟁이 새로운 깨달음을 준다는 결론은 유보되어야한다. 예수회를 만든 로욜라도 전쟁의 참상을 보고 종교적 계시를 받은 것이 아니라, 병원에서 이뤄진 독서와 명상이 그를 새로운 깨달음의 세계로 이끌었다. 전쟁이 계시를 주진않았다. 깊은 성찰과 독서가 그에게 계시를 주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경험이 종교적 계시를 주었다는 주장이 있는 것은 왜일까? 뇌과학에서 입증되었듯이, 인간은 합리적이지 않다. 단지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할 뿐이다. 상이 군인이 은둔자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삶을 합리화했을 가능성이 크다.

  귀향한 군인을 부모 형제들이 알아보지 못했다는 기록을 유발 하라리는 전쟁이 이들을 성숙시켰기 때문이라고 서술했다. 이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전쟁이라는 커다란 풍파가 그들을 빨리 늙고 살기 등등한 존재로 만들었을 뿐이다. 대학에서 복학한 예비역들이 아저씨 처럼 나이들어 보이는 이유를 생각해 본다면 쉽게 이해갈 것이다.

 

2, 한국군대 문화의 뿌리를 해부하다.

  흔히들 우리 군대문화는 일제 강점기 일본군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만주군과 일본군에서 군대생활하던 친일군인들이 한국군의 주류가 되었고, 그들이 만든 한국군에는 일본군에서 흔히보이는 구타와 얼차려 등의 비인간적인 악습들이 그대로 일제의 잔재로 이어졌다고 말한다. 조국을 위해서 스스로 독립군에 입대한 군인들에게는 구타와 무조건적 강요가 필요 없을 것이다. 반면에 강제로 군대에 끌려와 자신과 상관없는 전쟁에 동원되는 사람을 움직이려면 구타와 강요는 필연적이다.

  현재 우리군의 모든 악습은 일본군에서 왔다는 선입견은 타당할까? 유발 하라리는 나에게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군대가면 똑똑한 사람도 생각을 못하는 멍청한 행동을 한다. "내가 왜그랬을까?"라는 말을 외치며 얼차려를 받는 훈련병들을 생각하면, 군대에 들어와서 왜? 생각을 못하는 존재로 변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데, 군대에서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존재가 된 것은 데카르트 때문이었다. 데카르트? 그는 위대한 철학자가 아닌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한 그가, 군인을 생각하지 않는 존재로 만드는데 기여를 했다니..... 그러나 사실이다. 데카르트는 프랑스의 젊은 귀족으로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서 장교로 입대했으며, 30년 전쟁이 한창일때 보헤미아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서 가던 중에, 화로에 몸을 녹이다가 '고기토 에르고썸'을 생각해 낸다. 데카르트의 이론은 군대에 적용된다. 데카르트의 정신이 육체를 통제하듯, 장교들이 사병을 확고히 통제하도록 군대가 만들어진다. 머스킷총 발사에서 장전까지 32개의 개별동장으로 나눠 반복 연습시키고, 기계처럼 전장에서 총을 쏘도록 훈련시킨다. 아는 것이 가장 적은 사람이 가장 잘 복종한다. 사병은 생각하지 않는 육체적 존재로 전락한다. 오직 생각은 장교들이 할 뿐이다.

   정신과 육체라는 이분법적 생각! 그리고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는 데카르트의 사상은 놀랍게도 한국군에서도 목격된다. 군에 입대하고 특히, 신병교육대에서 오직 생존만을 생각하며 군사훈련을 받았다. 생각하는 존쟁기 보다는 조교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기계로 만들어졌다. 자대에 배치받고 나서도 시키는데로만 하면 편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계급이 올라가 생각을 해야할 때는 머리가 아팠다. 군대는 나를 기계적 존재로 만들어 갔다. 그 시초는 데카르트에서 부터 시작되었다.

 

3. 생각하는 군대가 강한 군대이다.

  17.18세기 구체제 군대는 나폴레옹의 군대에게 철저히 유린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구체제의 사병들은 감시의 대상이었다. 언제 탈영할지 모르기에 산림에서 산개대형의 훈련을 하지 않았다. 오직 연병장에서 기계와 같은 반복된 훈련만을 했다. 기병은 적을 감시하기 보다는 보병의 탈영을 감시했다. 이는 군사천재였던 프리드리히 대왕의 군대도 마찬가지 였다. 더욱이 프로이센 군대는 '태형'이라는 악습이 오랫 동안 남아있었다. '태형'과 같은 강한 체벌은 군인의 명예심을 말살 시키고, 전투의지를 상실시킨다. 군인 개개인을 존중하지 않고 감시와 처벌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군대와 스스로 생각하고 그들을 고귀한 인간으로 대하는 프랑스군대 중에서 어느 군대의 전투력이 강하겠는가? 구체제의 군대가 프랑스군대의 문화와 훈련법을 받아들이기 전까지 프랑스군대는 연전연승을 할 수밖에 없었다.

  놀랍지 않은가? 프로이센의 군대에서 보였던 감시와 처벌이라는 문화가 한국군대에도 있다. 내가 군복무 중에도 구타는 암암리에 있었다. 구타를 없애려는 노력을 군대를 몰라서 하는 망상정도로 치부하는 사람도 많았다. 생각하지 말고 선임병의 명령에 복종만 할것을 강요하고 이를 따랐다. 프랑스 군대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도록 훈련받았다. 부사관도 사병도 작전계획을 이해해야한다고 프랑스 군은 믿었다. 반면 우리는 어떠한가? 로봇군대! 스스로 생가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훈련중에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하고 무조건 뛰도록 훈련받았다. 우리군대문화는 아직도 프랑스 군대의 앞선 문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프로이센 군대의 낡은 문화에 취해있다. 적어도 내가 군대에 복무하던 시절까지는 말이다.

  클라우 제비츠는 '전쟁론'에서 "군대 정신이 훈련 숙달보다 훌씬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군대를 강한 군대로 만들고 싶다면, 생각하는 군대, 군인에게 강한 자부심을 주는 군대 문화를 만들어야할 것이다.

 

4. 전쟁이 계시를 준다는 믿음의 탄생! 그리고 비극의 시작

  낭만주의와 민족주의가 광기처럼 퍼져나가면서 전쟁을 '숭고한 것'으로 여기고 '평화를 상업적 정신을 따르는 천박한 사리사욕'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참전 경험을 '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인식과 경험'이라며 동생의 입대를 축하하는 사람까지 출현한다. 낭만주의 시기에 제국주의와 전체주의의 싹이 트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을 죽이는 체험이 축복일 수 없다. '평화만 아니라면, 그곳에서 겪은 것을 제 아이에게 경험하고 싶'다는 글 속에서 소름돋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전쟁의 경험을 새로운 계시를 받는 숭고한 경험으로 생각하는 수 많은 사람들이 출현한다. 물론 전쟁의 비참함 속에서 환멸을 느끼고 자신이 생각했던 전쟁의 숭고함이 망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탈영을 결심하는 병사들도 출현한다. 그러나 이러한 개별 병사들의 깨달음이 낭만주의와 민족주의라는 커다란 '주의'를 꺾어 놓지는 못했다. 그리고 1차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소위 남자다움을 폭력과 근육에서 찾는 사람들이 있다. 남자라면 군대에 갔다와야 사람이된다고 생각하는 살마들! 남자는 거칠고 강하게 키워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이러한 믿음이 더큰 폭력을 낳고 인류를 파멸로 몰아 넣는다. 진정한 남자다움은 인간다움에 있다는 사실을 우린 기억해야한다. 폭력은 숭고한 것이 아니라 야만적인 것이며, 근육은 남성적인 것이 아니라 건강미일 뿐임을 깨달아야한다.

 

  유발 하라리는 "전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사담 후세인"에게 감사를 표현하며 이책을 저술했다. 전쟁을 빼 놓고 인류의 역사를 서술할 수 없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연구할 수밖에 없다. 유발하라리의 전쟁 문화사 '극한의 경험'을 통해서 새로운 계시를 얻었다. 그것은 강한 군대는 폭력에 의해서 병사를 기계로 만들으로써 완성되는 것아 아니라, 존중하고 스스로 생각하는 군대로 탈바꿈함으로서 이뤄질 수 있다는 진리이다. 우리 학교도 마찬가지다. 강하게 학생을 억압함으로써 명품교육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존중하고 스스로 생각하도록 함으로써 참된 인간을 길러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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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 역사인물 다시 읽기
한명기 지음 / 역사비평사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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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해군!! 그 처럼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많은 임금도 드물 것이다. 광해군을 소재로한 많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그는 탁월한 비운의 군주로 그려졌다. 광해군과 고 노무현 대통령을 오버랩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그리워했다. 한반도 균형자론을 주장하면서 강대국들 틈바구니 속에서 중진국 지도자의 리더십을 발휘하려 노력했던 고 노무현대통령!! 임진왜란과 명청 교체기에 조선이라는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 중립외교정책을 펼치면서 부던히도 노력했던 비운의 광해군!! 두사람의 비극적 죽음은 우리에게 더욱 많은 그리움을 남긴다. 학생들에게 한명기 교수의 광해군을 추천해주면서도 정작 나는 '광해군'이라는 책을 읽지 않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광해군이라는 책을 단숨에 읽기 시작했다.

 

1. 광해군은 폭군인가?

  오항녕을 비롯한 노론중심의 사관을 가지고 있는 학자들은 광해군을 폭군으로, 혹은 혼군으로 묘사한다. 물론, 오항년의 책은 읽지 않았지만, 그가 기고한 글들을 읽으면서, 그의 노론중심의 역사관에 자못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광해군이 무척이나 백성들을 쥐어짰으며, 그가 제대로 준비를 하지 않았기에 병자호란의 비극이 있었다는 주장이다. 그의 단편적이 기고글들을 읽으면서, 노론 중심의 역사관에 찌들어 있는 모습에 씁쓸함을 금치 못했다.

  그렇다면 과연 광해군은 백성을 괴롭힌 폭군이었을까?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당시, 다른 왕자들의 집은 불탔지만 광해군의 집은 멀쩡했다. 또한 송유진의 난이 일어났을 때, "임금이 스스로 허물을 뉘우치고 동궁에게 왕위를 넘겨주도록 종용"하겠다는 그들 주장은 참으로 신선했다. 광해군이 군주로서 가져야할 탁월한 자질과 역량을 짐작하게 하는 기록이다. 광해군은 백성들로 부터 탁월한 군주가 될 수 있는 역량이 있는 왕자로 인식되고 있었다.

  광해군을 비판하는 자들은 '조선왕조 실록'의 사료적 가치를 주장하며, 승리자의 기록인 '광해군 일기'의 기록을 근거로 광해군을 혼군으로 배척한다. 그러나, 광해군의 눈부신 분조활동을 기록흐나 유대조의 상소문이 정족산본 '광해군 일기'에는 없다. 의도적으로 광해군의 좋은 기록을 말살하려한 증거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이러한 사례 말고서도, 인조반정을 일으킨 서인들에 의해서 얼마나 많은 광해군의 업적을 기록한 기록들이 사라졌을까? 이것을 생각해본다면, '광해군 일기'를 근거로 광해군을 비난하는 것에는 일정한 경계를 해야할 것이다.

  광해군 시기를 병자호란을 막을 수 있는 기회를 무위로 만든 시기라 주장하는 사람들은 광해군이 궁궐 조영에만 힘쓸 뿐이지, 후금을 막을 만한 군사력 증강에는 노력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기민한 외교전략으로 명과 후금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치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후금의 주요 진격로상에 방비를 강화하고, 기마병이 장점이 그들을 대항하기 위해서 화포를 배치하는 노력을 그들은 애써 외면한다. 광해군이 그토록 군사력 증강을 위해서 노력한 역사를 외면한다. 그래야 진정한 혼군인 인조와 서인정권을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2. 광해는 왜? 궁궐 공사와 왕권에 집착했는가?

  임진왜란이라는 7년 동안의 참혹한 전쟁이 휩쓸고 가자, 많은 사람들이 도가나 운수에 빠져들게 된다. 사람의 생명이 파리 목숨보자 못한 취급을 받는 비극적인 시대상황속에서 어쩌면 그들의 피난처는 도가와 운수였을지도 모른다. 광해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당시의 시대상황뿐만 아니라, 후궁 소생의 왕이라는 태생적 한계가 그를 더욱 작아지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뿐인가? 광해군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못난 아버지, 선조는 그를 박대하며 문안조차 받지 않았다. 선위파동을 수시로 일으켜 자신의 왕권과 신하들의 충성심을 확인하고 싶어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입지가 약화된 광해군! 세자에서 폐위된다면 잔혹한 정치권력의 속성상, 자신의 목숨조차도 보존할 수 없었다. 그는 왕위에 더욱 집착했다. 큰 궁궐을 지어 왕의 위엄을 드러내고 싶어했다. 그러나 진정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싶다면, 백성들의 고혈을 뽑아서 으리으리한 궁궐을 짓기 보다는 백성들의 삶을 어루만지며, 백성들의 지지를 국정과제 추진의 원동력으로 삼아야한다는 진리를 그는 몰랐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로'에서 시민에게 사랑을 받는 군주는 성을 높이 쌓지 않는다고 했다. 시민들의 군주의 성채가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광해군에게는 좋은 신하를 얻는 복도 없었다. 그를 지지했던, 대북들은 정치적 감각이 너무도 미숙했다. 적을 살려주어 은전을 베푸는 길이 권력을 강화시키는 길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몰랐다. 폐모살제의 어리석음은 서인과 남인들에게 반정의 명분을 제공해주었다. 북인들이 독점한 권력이 강해보이지만, 독점된 권력은 모래성과 같다. 강한 강철일 수록, 충격에 깨지기 쉽다. 노자 '도덕경'에 상선약수(上善若水)라 했다. 가장 강한 것은 강철이 아니라, 유약해보이는 물과 같은 부드러움을 지닌자이다. 정치적 감각이 미숙한 북인들과 권력을 지켜야했던 광해군!! 북인은 광해군을 지켜주지 못했다.

 

3. 광해군, 그는 왜? 몰락했는가?

  '외교는 내정의 연장이다.'라는 한명기의 말처럼, 광해군의 탁월한 외교적 성과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내정에서 반정의 명분을 제공했다. 광해군은 외교의 성과를 내부 결속을 다질 수 있는 원동력으로 삼기 위해서 '대내협상'을 했어야했다. 그러나 시대적 한계속에서 다수 사림들의 지지를 얻어내는데 실패했다. 심하전투로 인해서 많은 백성들이 고통을 받는데도, 사림들은 '재조지은'을 지켜야한다며 광해군을 비난한다. 백성은 백성대로, 사림은 사림대로 불만이 쌓여갔다. 광해군은 백성의 지지를 끌어내어 이를 통해서 국내 정치에서 주도권을 장악해야했다. 그러나 광해는 그러지 못했다.

  1622년 광해군은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폐모살제를 부추긴 북인 정권에 진절머리가 난듯하다. 북인에 의해서 내쳐졌던, 서인과 남인 중진들을 다시 벼슬길에 나서도록 배려한다. 그러나 이때 풀려난, 최명길과 이귀는 1년 후에 인조반정을 일으킨다. 적을 끌어 안지 않은 것이 광해군의 실수라기 보다는, 끌어 안아야할 적과 내쳐야할 적을 구분못한 것이 광해군의 패착이었다. 물론, 그 구분선이 참으로 불분명하다.

  자신들의 권력 강화를 위해서 광해군을 이용하려했던 북인들과, 현실을 모르고 명분만을 주장하는 서인과 남인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광해군은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바닷가에서나 살며 여생을 마치고 싶다'라고 스스로 말할 정도로 그는 지쳐있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정치판에서 진절머리가 난 광해군! 인저반정이 일어나고도 19년을 더 살아, 삼전도의 치욕을 보며 세상을 관조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도 집착했던 왕권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홀가분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4. 광해와 노무현!! 그리고 문재인

  한명기는 '광해군'이라는 책 곳곳에서 오늘과 광해군이 살았던 당시를 비교하며, 현명한 선택을 할 것을 당부한다. 재조지은을 배풜었다며, 후금을 공격할 것을 종용하면서도, 조선에게 염초제조법을 알려주지 않는 명나라와, 한미동맹을 강조하면서도 한국의 미사일 사정거리를 180km로 묶어 놓는 미국을 비교하며,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냉혹한 국제관계의 현실을 직시하게 만든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속에서 광해와 노무현을 보게 된다. 중립외교정책을 추진하며, 조선이 살길은 '재조지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강대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백성과 나라를 지키는 일임을 강조한 사람이 광해군이라면, 노무현 대통령은 북한과 대화하며 강대국들 속에서 균형자역할을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퇴임할 무렵, 외국언론에서는 중진국 지도자의 리더십을 보여주었다며 그의 리더십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이들은 사림들과 국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 명나라에 사대를하며, 재조지은을 지켜야한다는 꼴통들에게 광해군의 현명한 외교전략은 '배은망덕'한 말일 뿐이었다. 북한과는 대화할 수 없으며, 미국의 주장에 반대해서는 안된다는 '종미주의자'들에게는 노무현은 이상주의자이고 현실을 모르는 사람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타의에 의해서, 또한 사람은 임기가 끝나서 자리에서 물러나야했다. 그리고 광해군은 19년 동안을 모진 고통속에서도 세상을 달관하며 살았고, 노무현은 정치적 보복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광해군은 미국에서 중국으로 세계의 패권이 옮겨가는 시기에 다시 부활했고, 노무현은 이명박근혜정권을 거치면서 국민들에 의해서 다시 소환되었다. 우리는 광해와 노무현과 같은 리더를 필요로하고 있었다.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었다. 탁월한 외교전략을 구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광핸군이 다시 환생한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광해군에게서 문재인 정권은 교훈을 얻어야한다. '외교는 내정의 연장이다.' 아무리 외교를 잘한다해도 내정을 못한다면 정권의 불행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문재인 정권의 '한반도 운전자론'이라는 자주적 외교는 국내 경제가 얼마나 살아나느냐에 따라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도 있고, 수구세력에게 다시 정권을 내놓아야할 수도 있다. 이것이 냉엄한 정치 현실이다.

 

  우리는 광해군과 노무현을 끊임없이 소환하고 있다. 그들의 리더십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는 아직도 기득권을 가진자와 그 후손들이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광해를 무덤에서 다시 불러들이는 것을 두려워하고, 노무현과 같은 지도자가 다시 나타나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고 있다. 그들 수구세력에서 광해와 노무현을 떠올리는 문재인이라는 정치가는 얼마나 두려운 존재일까?? 역사는 오늘을 비추는 거울이다. 명청 교체기라는 격변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서 겪은 고통을, 미국에게서 중국으로 패권이 넘어가는 오늘을 사는 우리는 잊지 말아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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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07-03 15: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강나루 2018-07-03 18:10   좋아요 0 | URL
감사^^ 감사^^

레삭매냐 2018-07-03 15: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말 오래 전에 읽은 책이네요.

조선시대 유삼(노산군-연산군-광해군)한
세 명의 군주 중의 하나로, 인조반정으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 군주가 아닌
가 싶습니다.

동아시아 질서가 바뀌던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친명배금 정책을 고수하다
망국으로 나라를 이끈 서인세력이 반성을
했던가요? 아니죠.

503호를 앞세워 호가호위하던 정치세력
과 어찌나 그렇게 비슷한지 모르겠습니다.

강나루 2018-07-03 18:10   좋아요 1 | URL
맞아요 당시의 시대상과 오늘날이 자꾸 오버랩되었어요

야상곡(夜想曲) 2018-07-03 18: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금의 헬조선에선 조조나 손권,제갈량,관중,왕맹,유기,강희제같은 리더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지금의 헬조선에선 더더욱 왕맹의 리더쉽이 매우 많이 필요하다.(지금의 중국은 절대 한족들만의 중국이 아닌 북방과 서방의 힘으로 거대해진 대륙의 집합체로서 다민족국가의 장점으로 운영되는 나라이다)

만화애니비평 2018-08-10 16: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향녕 교수의 그런 시점은 기축옥사 관련 도서입니다. 상당히 어이 없는 글입니다.
임진왜란의 불씨가 기축옥사와 관련 있는 이유가 대부분의 의병장들이 동인(북인)들이 위주이고, 그 중에 정인홍이나 곽재우 장군은 남명 조식 선생의 수제자들 점에서 많은 여파가 나옵니다.
군권에서도 동인(남인) 세력은 이순신을 지원하고, 서인은 원균을 지지하죠....
광해군이 집권하자 원균의 집에 내려준 녹봉을 없애버리는데, 인조반정 이후 다시 원균의 집안에게 녹봉을 하사합니다. 그런 겁니다..허허
 
라틴어 수업 - 지적이고 아름다운 삶을 위한
한동일 지음 / 흐름출판 / 201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라틴어 수업'!!이라는 제목을 보고서, 무척이나 어려운 책이라는 선입관이 생겼다. 라틴어에 관심이 없는 나로서는 읽을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팟캐스트 '최영아의 책하고 놀자'를 통해서 저자 한동일의 '라틴어 수업'에 대해서 새롭게 알았다. '라틴어 수업'을 단순히 라틴어 문법과 단어를 배우는 수업이 아니라, 유럽의 문화와 역사를 배우는 인문교양수업으로 꾸며갔으며, 인생의 깊이를 더해주는 수업으로 20명으로 시작한 수업이 200명의 수강생과 수 많은 청강생들로 채워졌다. 감동이 있는 수업을 꿈꾸는 나에게, 한동일의 '라틴어 수업'은 그 열쇄를 줄 것만 같은 기대감을 주었다. 어느덧, 그의 책을 형광펜을 들고 밑줄 그으며 읽기 시작했다.

 

1. Non scholae, sed vitae discimus.(논 스콜래, 세드 비때 디쉬무스, 우리는 학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을 위해서 공부한다.)

  내가 00고등학교에 재직하고 있던 그해에, MB 정권에서는 일제고사를 밀어붙였다. 보수적인 학교분위기와 시대분위기 속에서 공부잘하는 학생들을 주말에도 나와서 공부하도록 했다. 명분은 "학교의 명예를 위해서..."였다. 일제고사에서 학교의 성적이 낮게 나오면 안된다는 것이다. 중간고사 시기가 눈앞에 다가오자, 한학생이 "중간고사 준비를 위해서 학교에 나와 공부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은 정년퇴임한 학년부장님과 그 학생의 담임교사는 "학교의 명예보다는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한다."며 나무랐다. 과연 그 학생의 선택은 잘못된 것일까? 학교의 명예와 개인의 이익이 충돌할때, 학교의 명예를 우선시해야할까?

  Non scholae, sed vitae discimus.(우리는 학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을 위해서 공부한다.)라는 라틴어 경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공부는 학교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의 인생을 위해서 해야한다. 그리고 우리는 시험을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꿈을 위해서 공부한다.!! 나는 이 아름다운 말을 학급 게시판에 붙여 놓았다. 그리고 종례시간에 이 명문을 읽어주며, 진정한 공부 이유를 생각해보도록 했다. 철저히 국가와 가문, 학교를 위해서 공부하도록 강요받았던 지난날의 학생들이 이제는 자신의 꿈을 위해서,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 공부해야하지 않을까?

 

2. Postquam nave flumen transiit, navis relinquenda est in flumine.(포스트쾀 나베 플루멘 트란시이트, 나비스 렐린쿠엔다 에스트 인 플루미네. 강을 건너고 나면 배는 강에 두고 가야한다.)

  고 신영복 교수의 '강의'라는 책에, 득어망전(得魚忘筌, 得鱼忘筌)이라는 말이 있다. 물고기를 얻었으면 통발은 잊어버리라는 말이다. 그런데, 고 신영복 교수는 고기는 잃어버려도 통발은 버려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통발이 있으면 얼마든지 고기를 잡을 수 있으니, 물고기 보다는 통발이 중요하는 주장이다. 고 신영복 교수의 주장이 일면 타당하기도 했지만, 그의 주장에 100% 공감할 수 없었다. 이러한 나의 생각을 한동일은 라틴어 경구로 설명해주었다. 강을 건너고 나면 배는 강에 두고 가야한다. 아주 좋은 배라서 그 배를 짊어지고 길을 떠난다면, 그 배는 인생을 도와주는 도구가 아니라, 인생을 방해하는 짊덩어리일 뿐이다. 물고기를 잡으면 물고기를 맛있게 요리해서 먹을 준비를 해야한다. 그런데, 통발에 집착한 나머지 물고기를 내팽겨친다면 그사람은 물고기의 참맛을 볼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통발'과 '배'에 집착한다. 수업에 쓰이는 '협동학습 모형', '토론학습 모형' 등등의 모형들은 수업을 위한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 수업을 얻으려면, 과감해 그 모형들을 버려야한다. 모형에 집착해서 수업을 망칠수는 없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다. 각종 모형들의 무게이 짖눌려 수업을 망치는 선생님들이 얼마나 많은가?

  결혼하기 전에, 활발한 성격과 친화적인 모습은 그사람의 장점일 수 있다. 그러나 결혼하면 대외적인 활동을 많이하느라, 가정에 소홀히 한다면, 그의 활발하면서도 친화적인 모습은 버려야할 '통발'이요. '배'이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말이 한때 유행이었을 때가 있다. 그러나 사랑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사랑은 끊임없이 변해야한다. 애인 사이의 불꽃 튀는 사랑에서, 부부사이의 애틋한 사랑으로 사랑은 변해야한다. 과거의 '통발'에 갖혀서 새롭게 변하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영원할 수 없다. 동서양의 지혜가 이렇게 만날 수 있다니, 참으로 놀랍다.

 

3. Do ut des.(도 우트 데스. 네가 주기 때문에 나도 준다.)

 Give and take라는 말을 알고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믿음과 신뢰를 쌓기 위해서 아낌없이 이웃들에게 나눠주어야 한다는 착한사람 컴플랙스를 가지고 있다. 그러서인지, Give and take를 좋지 않은 뜻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나도 그랬다. 그러나, "Do ut des."라는 경구를 설명하면서, 로마가 주변 도시국가 주민들에게 로마 시민과 동등한 여러 권리를 주었기 때문에 그 국가들이 로마의 정치적 동맹국이 되었다는 한동일의 역사 설명이 뒤따르자, Give and take에 대한 나의 기존관념은 새롭게 업그래이드 되었다. '상호주의'!! 공짜를 바라지 말고 서로의 약속을! 계약을 주고 받으며 정당한 댓가를 서로에게 지불하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깊은 성찰의 시간이 나에게 다가왔다. 과연, 나는 타인의 유형 혹은 무형의 노력의 산물에 대해서 정당한 댓가를 지불하며 살아왔는가? 그들의 유형, 무형의 산물들을 친하다는 이유 하나로, 공짜로 얻으려하지 않았는가? 부모 자식 사이에라도, 정당한 댓가를 지불하지 않았다면, 받지 말아야하고, 혹여 받았더라도 반드시 다른 어떠한 형태로라도 정당한 댓가를 지불해야한다. 아침 산책을 하면서 'Do ut des.'를 되뇌이며, 나 자신을 반성해 보았다.

  한편으로는, '네가 주기 때문에 나도 준다.'라는 말이 '네가 안주기에 나도 안준다.'라는 삭막함으로 이어지지는 않을까? 라는 걱정도 들었다. 그리고 '내가 줄테니, 당신도 달라'는 폭력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생각까지 머릿속에 떠올랐다. 같은 명언이라도,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지혜로운 해석을 해야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4. Dilige et fac quod vis.(딜리제 에트 팍 쿼드 비스.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라.)

  '문제아는 없다! 단지 문제 부모가 있을 뿐이다.!! '라는 명언이 있다. 문제아의 부모를 만나보면, 문제학생이 이해가 될 때가 있다. 때로는 이러한 부모 밑에서 살아가는 학생이 대견해 보일때도 있다. 자식을 망치는 부모들 중에서 가장 많이 보아온 종류의 부모는 자신의 자녀를 아바타로 생각하는 부류이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자녀가 대신 이뤄주기를 바라며, 자신의 뜻대로 자라지 않는 자녀를 윽박지른다. 자신의 꿈이 아니기에, 이에 저항하며 학교에서 퇴학당하기 위해서 갖가지 문제를 일으키는 학생들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라.'라는 명언울 문제 부모를 둔, 학생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학생 인생의 주인은 부모가 아니라, 학생이다. 자녀는 부모의 아바타가 아니다! 하나의 인격체일 뿐이다. 실업계를 가고 싶어하는 학생에게 강제로 인문계로 진학하도록 하고, 법대에 진학해서 자신이 못이룬 법관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못난 부모가 결국은 자녀가 고등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퇴학당하게 만들었다. 그 학생의 인생은 누구에게 보상받아야할까? 상담이 필요하고, 정신과 진료가 필요한 것은, 문제아가 아니라, 그 문제아의 부모였다.

  Dilige et fac quod vis!! 삶은 유한하다. 사랑하며,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어 하는 것을 하자! 그것이 내 자신이 인생의 주인으로 살기 위한 조건이니까....

 

5. Dum vita est, spes est.(둠 비타 에슽, 스페스 에스트. 삶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

  희망이 있기에 삶이 있고, 살아 있기에 그래도 희망은 있다. 이명박근혜 정권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면서,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희망을 보라고 말했다. 헬조선을 말하며 한국을 떠나고 싶다는 사람들에게 '두려워서 도망친 곳에 천국이란 없다.'며, 천국을 찾아 떠나지 말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을 천국으로 만들자고 말했다. 현실이 아무리 절망적이라도 우리는 희망을 보아야한다.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보이는 한줄기 빛이 바로 희망이다. 희망은 현실이 절망적이기에 더욱 빛을 발한다. 그 희망을 잃지 않았기에 우리는 '촛불 혁명'을 이뤄냈다. 삶이 있는 한, 희망이 있기에 오늘도 우리는 살아간다.

  절망을 노래하는 삶이, 희망을 노래하는 삶으로 바뀌었을때, 우리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할까? 한동일은 '인간은 죽어서 그 육신으로 향기를 내지 못하는 대신 타인에 간직된 기억으로 향기를 낸다.'라는 말을 한다. 나는 남에게 얼마나 향기로운 기억을 남기며 살고 있는가? 가장 가까운 부모에게 얼마나 아름다운 향기를 남기려 노력했는가? 그래! 살아가며 희망을 노래하고, 나의 주변에 가까운 사람들부터 향기로운 기억을 선사하자! 그것이 인생인 것을....

 

6. 옥의 티

  '라틴어 수업'에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동일은 이슬람교에 대해서 부정적인 서술이 눈에 거슬리는 면도 있다. 그래, 한동일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슬람교 국가들이 자국민에게 이슬람교를 강요하는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타국에서도 강도는 약하지만 있는 일이다. 미국 대통령이 성경에 손을 대고 맹세한다. 이는 묵시적으로 그리스크교를 국민들에게 인정하기를 강요하는 미쟝센이다. 호주에서는 가벼운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교회에가서 목사님의 변호서를 받아오라고 한다. 이 또한 크리스트교를 믿으라는 압력이 아닐까? 이슬람교 국가보다 약하긴하더라도 묵시적으로 존재하는 압력을 행사하는 나라들이 있는데, 유독 이슬람교 국가만 더 비판할 필요가 있을까?

  한 쳅터당 하나의 라틴어 명언이 제시되어 있다. 이 책의 장점을 더 살리려면, 그 라틴어 명언을 한 사람을 적어두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Tantum videms quantum scimus.(탄툼 비데무스 콴툼 쉬무스. 우리가 아는 만큼, 그만큼 본다.) 즉, 아는 만큼 보인다. 라는 이 문장은 유홍준 교수가 그의 책에서 한말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혹시 유홍준 교수는 라틴어 명언을 옮긴 것이 아닐까?라는 의문이 든다. 그러나, 이를 확인할 길이 없다. 한동일이 각각의 라틴어 명언에 대한 출처를 제시했다면, 나의 지적 호기심을 더 많이 충족해 주었을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신영복 교수의 '강의'가 떠올랐다. 감옥이라는 작은 세상을 통해서 인생의 진리를 깨닫고 이를 '강의'를 통해서 우리를 깨우쳐 주신, 시대의 스승 신영복! 쉽지만은 않은 '강의'라는 책을 읽고 받았던 감동을 이책에서 다시 느꼈다. 저자 한동일은 자신의 삶 속에서 우러나온 인생의 지혜를 라틴어를 통해서 표현하고 우리의 가슴에 감동의 울림을 주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강의를 듣고 삶의 자세를 배웠다는 감사함을 전하는 학생있고, 그를 존경한다는 제자들고 많다. 그는 단순히 라틴어 문법을 가르치지 않고, 삶을 가르치려했다. 삶을! 사랑을! 가르치며, 자신의 인생 내공으로 학생들의 마음을 우렸다. '라틴어 수업'이 단순히 라틴어를 가르치는데 머무르지 않고 유럽문화! 더 나아가서 인생을 곱씹을 수 있는 화두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오늘도 삶을 살아가야하는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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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drailmin 2018-09-22 16: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가 이상으로 생각의 폭이 넓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서평, 잘 읽었습니다

2018-09-23 18:1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