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벽암록
윤용진 지음 / 애니빅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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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문관'을 강신주 방식으로 풀어낸,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라는 책을 읽고 나서부터 선문답에 대한 책들을 더 읽어 보고 싶었다. 사실 강신주가 '벽암록'을 비롯한 선문답 관련 서적들에 관한 책을 쓰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중에 나와 있는 선문답책들이 쉽게 풀어 놓았다고 말들하지만,  강신주 처럼 쉬우면서도 깊이있는 설명을 해내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깊으면서도 쉽게 글을 쓴다는 것은 왠만한 고수가 아니면 해낼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아무리 기대려도 강신주는 새로운 선문답 관련 책들을 내놓지 않고 있다.그를 기다리느니, 다른 책들을 읽으며 갈증을 해소해 보기로 결심했다. 푸른 바위위에 무엇을 기록했는지, 책제목이 '벽암록'이다. 5권으로 풀어 놓은 벽암록이 있지만,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아마추어가 쉽게 풀이한 '세상 벽암록'을 선택해다. 과연 이책은 선문답에 대한 나의 갈증을 풀어줄 수 있었을까?


1.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조린다.
  강신주의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를 읽고 이 책을 읽으니, 몇개의 화두는 풀 수가 있었고, 몇개는 저자 윤용진의 풀이를 읽고서 이해를 했다. 그런데, 나의 풀이와 저자 윤용진의 풀이가 다른 부분이 있다. 
  제2칙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에 대한 풀이를 어떻게 해야할까?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다만 간택만을 꺼리면 된다. 도의 경지를 말하려는 것도 간택이다. 그러니 도는 명백함도 없다. 라는 조주화상의 말에 수행승이, '명백함이 없다면 무엇을 지켜야 합니까?'라고 묻는다. 그러자 조주화상은 '나는 모른다.'라고 답한다. 이에 대해서 저자 윤용진은 '명확하지도 않으면서 어찌 크다고 할 수 있는가?', '도 또한 그러하지 않는가?'라고 풀이한다. 이러한 풀이가 나로서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수행승의 입장에서는 윤용진의 풀이가 오히려 궁금증을 더해주지 않을까?

  도는 간택을 꺼린다. 도의 경지를 말하려는 것도 간택이다. 간택하지 않으니 도는 명백함도 있을 수 없다. 노자가 말했지 않은가? 도를 도라하면 도라할 수 없다고.... 인간의 개념으로 도를 명백히 규정한다면 도는 하나의 도그마로 떨어진다. 인간의 도그마에 의해서 규정된 도를 과연 도라할 수 있겠는가? 한예를 들어보자. 조선 후기 송시열을 중심으로한 노론세력에 의해서 절대화되고 교조적으로 변한 조선의 성리학을 유학의 정통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들은 주자와 송시열의 사상만을 정통으로 생각하며 독자적인 해석을 시도한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아 죽이기까지 했지 않는가? 그들을 학자라 말할 수 있을까? 자신의 생각에 반론을 제기하고 동의하지 않았다고 칼을 들이 대는 행동은 파시스트들이나 하는 야만적인 행동이다. 절대화된 도는 도가 아닌 것이다.

  제3칙 일면 월면 (日面佛 月面佛)에 대한 풀이도 동의할 수 없다. 몸이 아파 누워있는 마조화상에게 원주스님이 '법체가 어떠하십니까?'라고 묻자, 마조화상이 '일면 월면 (日面佛 月面佛) 이네.'라고 답한다. 일면불의 수명은 단 하루요. 월면불의 수명은 8천 1백세이다. 윤용진은 이를 '수명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풀이한다. 그럴까? 마조화상의 말씀을 너무 낮은 수준에서 풀이한듯한 인상을 받는다.

  이승에서의 삶은 하루 같이 짧지만(일면불(日面佛)), 저승에서의 삶 혹은 윤회의 삶은 억겁의 시간이다.(월면 (月面佛))라고 해석해야하지 않을까? 마조화상은 지금 이순간의 삶보다는 우주적 시각에서 자신의 삶을 조망하고 있으며, 이러한 시각에서 원주스님의 말에 답하고 있다. 불교의 스케일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한다.

  제20칙 거기엔 뜻이 없다.의 풀이는 너무 의아스럽다. 용아납자가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취미화상이 선판을 가져오라 한다. 용아납자에게 선판을 받아 들고는 즉시 내려쳤다. 이를 윤용진은 "분명 거기엔 아무런 뜻도 없다."라고 풀이했다."라고 풀이한다. 선판과 포단을 내리친 것이 어찌, '거기엔 아무런 뜻도 없다.'라고 풀이되는가? 선판과 포단은 참선을 할 때 필요한 것들이다. 나에게 묻지 말고, 네 스스로 좌선하여 깨달으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것이 '용아납자'를 깨우치는 스승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제29칙 온 세상이 파멸할 때라는 주제는 불교를 순응적인 종교로 오해하기 쉽도록 풀이를 해놓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수행자가 '온 세앙이 파멸할 때' 그것을 따라가겠다고 말하자, 대수화상이 '따라가라!'라고 말한다. 이를 윤용진은 '그날을 맞이하는 수밖에 없다.'라고 풀이했다. 얼마나 순응적인 풀이인가! 나는 풀이를 달리한다. 불교의 생각의 넓이와 폭은 헤아릴 수가 없다. 미륵보살도 56억 8천만년 후에 이 세상에 오신다 하지 않았는가? 그러하기에 온 세상이 파멸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지금의 우주가 사라지고, 새로운 우주가 생성되는 새로운 종말이자, 새로운 시작의 시점이다. 그러하기에 대우주적 순환 속에서 온 세상의 파멸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수행자가 '그것을 따라가겠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대수화상은 '따라가라!'라고 말했던 것이다.

  제63칙 남전의 일도양단에 대한 풀이도 저자와 나의 생각이 다르다. 선승들이 고양이를 가지고 서로 다투자. 남전화상이 고양이를 잡아들고서, '말할 수 있다면 이 고양이를 절단하지 않겠다.'라고 말한다. 선승들이 말이 없자, 남전화상은 칼로 고양이를 두 동강 내어버렸다. 이를 윤용진은 '한번 분열된 국민의 마음을 되돌리기 어렵듯이 한번 죽은 고양이도 다시 살아올 수 없다.'라고 풀이한다. 남전화상이 분열된 선승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고양이의 생명을 거두었다는 풀이로는 남전화상의 의도를 다 설명할 수 없어 보인다. 고양이에 대한 집착이 선승들의 분열을 가져왔으며, 더 나아가서 선승들의 수행을 방해할 것이다. 그 집착을 없애려 고양이를 죽였다고 풀이해야 보다 근본적인 풀이가 되지 않을까?

 

2. 불친절한 용진씨

  이 책은 대중을 위해서 씌여졌다. 그런데, 불교에 대해서 많이 알지 못하는 대중들을 위해서 보다 친절한 풀이를 해주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리 친절하지 않았다.

  제43칙 산놀이를 설명하면서 '오노봉'이 무엇을 뜻하는지 설명해주지 않았다. 또한 제69칙 남전의 일원상 또한 불친절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남전화상이 혜충국사를 만나러 가는 도중에 깨달은 바가 있어, 혜충국사를 만나러 가지 않겠다고 말한 것이라 풀이한다. 그렇다면, 남전화상이 과연 무엇을 깨달았는지를 설명해주어야한다. 그러나, 저자 윤용진은 이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고 넘어간다. 제62칙 우주 가운데 보물은 원문과 저자의 설명을 아무리 읽어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책에는 우리가 한국사 교과서에서 보았던 "혜초"라는 인물의 이름도 등장한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혜초가 맞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설명해 놓지 않아서 알 수가 없다. 화두의 내용을 살펴보면, 혜초스님이 '무엇이 부처입니까?'라는 질문을 하자, 문익화상이 '네가 혜초니라.'라고 말했다. 저자는 '모든 문제의 중심에는 항상 자신이 있다.'라는 뜻으로 풀이했다. 그러나 문익화상이 일깨우고자 했던 참된 의미는 '네가 부처다.'라는 의미를 전달하려한 것이 아닐까?

  저자 윤용진이 스스로 밝혔듯이, 불교 철학자도 아니요, 스님도 아니기에 깊이 있는 설명을 바랬던 것이 무리일 수도 있다. 다음에 '벽암록'의 본칙과 송, 수시, 착어, 평창까지 자세히 설명해 놓은 책을 읽을 때, 이 책과 비교하면서 나름의 이해를 해보기로 마음 먹었다. 이 책은 벽암록의 끝이아니라, 시작점이 셈이다.

 

  불교에 많은 관심이 있는 윤용진이 심혈을 기울여 풀이를 달아 놓았다. 여행을 하면서 틈틈히 볼 수 있는 책이다. 하나의 화두를 읽고 그 뜻풀이를 하고, 이를 윤용진의 풀이와 비교하는 재미가 나름 쏠쏠하다. 선문답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간단히 읽을 수 있는 책으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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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과 그의 시대 이덕일의 역사특강 1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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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정도전이라는 인물은 무척 흥미로운 인물이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그를 고려를 무너 뜨린 역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세계관도 성장하는 법!! 그를 바라보는 시각도 성장했다. '왕조의 설계자'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그를 만나고 싶어서, 몇년전에 '인간 정도전(문철영)'을 읽었다. 이제 그를 다시한번 만나고 싶어서 이덕일의 '정도전과 그의 시대'라는 책을 꺼내 읽었다. 이덕일 특유의 글재주로 풀어낸 '정도전'을 만나고 싶었다. 이덕일이 바라본 정도전은 어떤 모습일까?

 

1. 이덕일만의 필법

  이전에 읽었던 '인간 정도전'이라는 책보다 이 책은 확실히 흡입력이 있다. 정도전을 다년간 연구한 교수의 책과 비교해도 그 깊이가 절대 얕지 않았다. KBS 대하사극 "정도전"의 제작진과 연기자들을 대상으로 강의한 내용을 묶어낸 이 책에는 정도전이 살았던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 배경이 되는 토지문제와 성리학에 대한 깊이 있는 설명이 서술되어 있다. 연기자들이 당시 시대를 이해하고 연기할 수 있도록 강의를 구성하다 보니, 정도전의 숨결보다는 그가 살았던 시대의 고민들을 강의에 담아내려 노력한 듯 하다.

  이덕일의 필법이 흡입력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과거를 과로만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크로체가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 말했다. 이덕일은 과거의 혁사를 현재를 이해하는 도구로 사용한다. 예를 들어 '소강사회'를 설명하면서, 현재의 스웨덴을 언급한다. 그리고 우리사회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 물음을 던진다. 이러한 그의 설명방식은 역사와 마주하면서 오늘을 생각하고 내일을 고민하게 만든다. 그러니 우리가 이덕일의 필법에 빠져들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러한 이덕일의 필법은 이책을 마무리하면서 빛을 발산한다. 고려말의 상황을 설명하며, 현재 우리의 모습과 비교해서 설명한다. 그리고 우리사회의 현실을 직면하고 우리가 나갈 방향이 무엇인지를 질문한다. 고려의 구가세족이 다수 백성의 토지를 빼앗아 자신들 만의 나라를 만든 결과 고려는 망하고 고려의 왕족들도 비참하게 죽어갔다고 지적하며, 부와 권력을 잡은 특권세력이 자신이 더 많은 것을 가지려하는 오늘과 대비시킨다. 오늘날의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어떠한 일이 벌어질 것인지를 질문하며 글을 맺는다. 독자들은 깊은 여운 속에서 깊이 있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이 이덕일 필법의 강점이다.

 

2. 알을 깨고 나오자!

  이덕일은 '태조실록'을 편찬하면서 정도전의 행적을 지우지 않은 점을 높이 평가한다. 정도전을 태종 이방원이 반역자로 규정하고 죽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도전이 행적을 지우지 않은 것은, 정도전이 조선 건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기 대문이기도 하지만, 조선초 사관들의 건강한 역사인식 덕분이라고 평가한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나와 정치적 입장이 다르다고 역사를 자기식대로 창조하여 가르치려 했던 '국정화 프로잭트'를 떠올리면, 조선초 사관들의 역사인식이 오늘보다 높다는 생각이 든다. 그뿐이아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신라가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도움을 받아 왜를 물리쳤다는 기록이 없다. 왜? 없겠는가?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고 기록을 남겨 놓을 때, 자신들에게 불리한 기록을 없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광개토대왕릉비가 없었다면 그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조선초 사관의 건전함이 없었다면, '왕조의 설계자' 정도전에 관한 많은 기록을 찾아볼 수 없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후지와라 세이카를 아는가? 모른다면 '강항'은 아는가? 역사에 관심이 있는분이라면 강항의 이름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강항은 임진왜란때 일본에 끌려가서 후지와라 세이카에게 주자학을 가르쳤다. 일본에 주자학을 전해준 강항을 생각하며 우리는 많은 우월감을 갖는다. 그러나 그후 일본의 학문은 일취월장하게 된다. 반면 조선의 성리학은 '성리학 유일사상'으로 파탄을 맞이한다. 윤휴가 주자와 다른 주장을 했다고 해서, 그를 사문난적으로 몰아 죽여버렸다. 우리가 일본에게 문화를 전수해주었고, 일본은 우리의 아류라는 우월감에 취해있을 때, 일본의 이토 진사이는 상인계급의 시각으로 논어를 해석한다. 그리고 우리를 넘어서기 시작한다. 이덕일은 우리에게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라고 당부한다. 무조건적인 자문화 중심주의에 빠진 우리를 질타하고 있다. 이덕일이 강한 민족주의 사학자라고 평가한 내게는 이덕일의 이러한 주장이 너무도 신선했다. 우리것이 무조건 좋은 것이여! 라고 주장하리라 생각했는데, 이덕일은 우리에게 냉정히 역사를 바라보라고 주문한다. 우리의 단단한 선입견이라는 껍질을 벗으라고 망치를 휘두르고 있다.

 

3. 아쉬운점

 이덕일의 책을 읽으며 두가지 아쉬운점이 발견되었다. 75쪽에 '예기' 일부분을 인용한다.

"貨惡其弃於地也 不必藏於 그 재물을 땅에 버리는 것은 미워했지만, 반드시 자기를 위해 쌓아두지는 않았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몸기()자를 써야하는데, 이미이() 자를 써버렸다. 이를 바로 잡으면,

"貨惡其弃於地也 不必藏於己"라고 써야한다. 물론, 교정을 보는 과정에서 놓친 사소한 실수일 수 있다. 그러나, 책을 읽는 독자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야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사소한 실수를 줄여주길 바란다.

  이덕일은 과전법을 비롯해서 고려와 조선의 토지제도를 자세히 설명했다. 각종 제도들은 글로만 이해하기에는 무척 힘든 것이 사실이다. 독자를 위해서 도표를 그려서 쉽게 설명해주었다면 이해가 쉬웠을 것이다. 이덕일의 책이 읽기 쉽고 재미있다는 강점이 있으나, 독자를 위해서 도표를 그려 제도나 개념들을 설명해주는 친절함은 결여되어 있다. 도표를 첨가하는 친절함을 보여주길 기대한다.

 

  두번째 만나는 '정도전'!! 그를 우리가 그리워하는 이유는, 우리 현실이 고려말의 현실과 닮아 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도전과 같은 위대한 개혁가를 기대하기 이전에, 우리가 정도전이 되어 우리 현실을 하나하나 개혁해 간다면, 고려말과 같은 소용돌이를 경험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지난 촛불혁명에서 보여준, 대한민국의 시민들의 모습은 정도전이 부활한 듯한 모습이었다. 고려말에는 정도전을 비롯한 소수의 혁명파 사대부들이 개혁을 추진했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은 다수의 민중들이 혁명을 요구하며 혁명을 추동하고 있다. 이점이 고려말의 현실보다 오늘의 현실이 더 희망적인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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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임 - 나를 바꾸는 심리학의 지혜
최인철 지음 / 21세기북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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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지혜는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다."라는 지혜에 대한 최인철의 정의에서 이 책은 시작한다. 지혜란 자신이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사이의 경계를 인식하는데서 출발한다는 부연설명이 이어진다. 이 말은, 논어 위정편에 나와있는 "아는 것을 안다고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하는 것이 진정한 앎이다.(子曰 由 誨女知之乎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라는 공자의 말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인간은 자신이 모든 진리를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가지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것을 타인에게 강요한다. 자신이 보는 진리는 자신만의 채로 모래사장의 모래를 치는 것과 같다. 채 사이로 빠져나가는 보다 많은 모래들을 보지 못하고, 자신의 채에 남아있는 모래들이 세상의 진리라 말한다. 최인철은 '자신만의 채'를 '프레임'이라는 용어로 설명하고 있다. 한언어를 알게 된다는 것은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된 것과 같다는 말이 있다. '프레임'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새로운 세상을 알아보자.

 

1. '프레임'! 역사를 생각하다.

  프레임이라는 단어는 역사학의 용어로 환언한다면, '역사관'으로 말할 수있다. 대학을 다니며, '너의 역사관'을 갖으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타인의 역사관으로 역사를 바라보지 말고, 자신의 역사관으로 역사를 해석할 수 있어야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나는 나의 역사관을 갖으려 노력했다. 수많은 학자들의 글을 읽으며, 나만의 역사관을 확립해나갔다. 나 자신만의 역사관을 정립하면서,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나의 역사관'으로 논리적으로 꾀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또한 수많은 사실들이 나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사실도 깨달았다. 한편으로는 자신만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노력해야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연습을 해야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역사관이라는 단어가 역사에 국한된 용어라면, '프레임'이라는 단어는 우리 생활과 보다 밀접한 단어이다. 우리의 생활을 어떤 프레임으로 보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생활태도, 세상에 대한 태도가 바뀔 수 있다. '민족주의', '사회주의' 등등의 각종 이념도 이러한 프레임 전쟁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든다. 즉, '나는 남들을 잘 알고 있는데 남들은 나를 잘 모른다.'라는 착각은 인간의 자기중심성을 잘 드러내는 지적이다. 프레임을 이 책에서는 개인의 차원에서 설명하고 있지만, 이를 민족이나 국가의 관점으로 확대한다면, 기나기 인류의 역사속에서 벌어진, 각종 이념대립의 원인을 설명할 수 있다. 어느 민족이나 스스로를 최고의 민족이며, 선택받은 민족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타민족을 잘아는데, 타민족은 우리를 모른다라는 생각을 많이한다. 이것이 바로 프레임에 갖힌 민족들의 일반적 모습이다. 자민족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볼 필요도 있지만, 때로는 그 함정에서 벗어나 자신을 객관화시키는 지혜도 필요한 법이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고 나면 자신은 처음부터 작은 나비였다고 생각한다.' 즉 회상해낸 자신의 과거 모습은 과거의 실제 모습을 닮았다기보다 현재의 자기 모습을 더 닮기 마련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만들어진 전통', '모든 역사는 현대사이다.'라는 역사학의 격언과 일맥상통한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전통이 기껏해야 2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며, 심지어는 근대화 과정에서 창조해낸 것들이라는 사실을 접했을 때의 충격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우리의 고유 무예라고 생각했던 태권도가 사실은 일본의 가라데와 공수도가 결합되어 현대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글을 읽었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 우리가 전통이라고 생각하는 것들도 사실은 근대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전통은 그 시대의 필요에 의해서 창조되는 것들이다.

  크로체는 '모든 역사는 현대사이다.'라는 말을했다. 모든 역사는 과거 그자체로 존재하지 않으며, 현재의 필요에 의해서 재해석되기 마련이다. 수많은 정권들이 들어서면, 과거의 역사를 자신들만의 시각으로 다시 쓰려한다. 박근혜 정권의 한국사 국정화 계획을 예로 설명할 필요도 없다. 현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과거를 호출하고, 때로는 과거를 새롭게 만드는 작업들이 역사에서는 흔하다. 우리가 절대적 역사 진리라고 믿는 것들도 때로는 우리가 만들어낸 프레임으로 보는 세계일 뿐이다.

 

2. 프레임 - 우리를 생각한다.   

  '이제 더 이상 날카로운 이빨을 지닐 수 없게 된 존재들은 과거 자신의 이빨이 얼마나 강했는지 떠올리며 현재를 보호하려 한다.' 과거의 향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과거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우리는 흔히본다. 왕년에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아느냐는 말은, 자신이 얼마나 초라해졌는지 아느냐는 반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초라한 자들의 모습을 우리는 우리주변에서 너무도 쉽게 볼 수 있다. 박정희 시대가 더 행복했다고 말하며, 박정희 향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P집회에 나가는 불쌍한 루져들! 그들이 바로 이빨빠진 늙은 호랑이들이다. 현재를 살아가지 못하고, 과거의 향수에 취해서 과거를 강제 인출하려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과거를 강제 인출당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을 객관화하고, 현재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려 노력해야할 것이다. 그들도 한때는 잘나가는 호랑이였으니까....

  '프레임은 주변의 사소한 물건들을 통해서 우리가 의 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행동을 좌우한다.' 자신을 변화시키려면 주변의 물건을 바꾸라는 저자의 충고를 교육에도 적용시킬 수있다. 어떠한 자녀로 키우고 싶은가? 어떠한 학급을 만들고 싶은가? 자연스럽게 접촉빈도를 높이도록해보자. 예전에 들었던 팟캐스트에서, '물건에서도 기가 나온다.'라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기'라는 동양적 프레임으로 세상을 설명한 점이 다를 뿐, 세상의 진리를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맥상통한다. 단순히 타인을 변화시키려하는 것이에서 나아가서, 나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도, 내가 닮고 싶은 모습! 하고 싶은 일! 그것으로 나의 주변을 다르게 꾸며보자.!!

 

3. 프레임 -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

  프레임을 바꾸면 삶이 바뀐다. 얇지만 가장 두꺼운 지혜를 담고 있는 이 책의 지혜를 소개해보자.

  행복해지고 싶지 않은가? 행복한 사람은 의미 중심 프레임으로 세상을 본다. 항상 의미, 이유, 목표를 생각하며 상위 수준 프레임을 추구한다. Why를 물으며, 보다 높은 시야에서 생각한다. 반면, 불행한자는 하위수준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쉬운지, 성공가능한지 등을 먼저 생각하며, How를 묻는다. 또한 행복한 사람이 '존재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면, 불행한 사람들은 '소유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인생을 성취해야할 목표로 생각하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현재를 희생한다. 그리고 그 목표를 성취하고서는 허탈해하기도 한다. 나 자신이 그랬다. 결국 인생이 도달하는 지점은 '죽음'이다.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도달점이다. 인생은 목표가 아니라, 과정이다. 오늘 행복하지 않다면, 내일 행복할 수 없다. 항상 상위 수준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무엇은 소유하려는 목표를 갖기 보다는,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그 과정을 중시할 때,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다. To have or To be! 당신은 소유를 선택할 것인가? 존재를 선택할 것인가?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인다는 말이 있다. 유난히도 타인의 험담을 늘어놓는 사람들과는 많은 대화를 하기 싫다. 그가 쏟아놓는 험담들은 유쾌하기 보다는 또다른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말하는 평가 내용을 들으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정보를 알 수 있다고 이 책은 조언한다. 정당하지 않은 비난은 정당화될 수 없다. 정당한 비판만이 정당화될 수 있다. 험담 프레임에 갖혀서 세상 모든 사람들을 험담하는 사람들은 그 자신이 바로 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한다. 똥개의 눈에는 똥만 보이기 때문이다.

  부자가 더 잔돈에 집착한다는 사실을 아는가? 예전예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보험사에서 비상시 도로에서 기름이 떨어졌을때, 도움을 요청하라면서 주유 써비스를 해준다. 고급 외제차를 운전하는 사람들이 이를 알뜰하게 다 이용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너무도 황당했다. 돈도 많은 사람들이 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프레임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그러하기에 그들은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진정 지혜로운 부자는 돈의 절대 액수를 중시하기 때문에 상대적 비교에 따른 푼돈이란 이름을 거부한다. 부자는 푼돈 프레임, 상대적 가치 프레임에 빠져, 100원짜리를 버리는 어리석음을 보이지 않는다. 상대적 가치 프레임에 빠진자들은 콩나물 값을 깎을 때는 100원도 귀하게 여기지만, 10만원 짜리 물건을 살때는 100원을 깍아 주면 오히려 기분나빠한다.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이는 이러한 프레임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부자일 수록 돈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중립적인 대안'으로 리프레임하라!라는 말의 뜻을 아는가? 현상유지를 하려는 우리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서, 중립적인 대안으로 리프레임할 때, 우리는 보다 지혜로워질 수 있다. 사용하는 물건, 서비스, 직업까지 처음 접하는 중립적인 대안으로 리프레임하자! 한번 사용한 써비스를 계속 불평하지 않고 이용하면, 호갱취급을 당한다. 잡은 물고기에게는 밥을 주지 않는다. 변하는 것을 싫어하는 우리의 뇌를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뇌로 바꾸기 위해서라도, 항상 '중립적인 대안'으로 리프레임하자!

  20대에 이제 헤어져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실연의 아픔이 싫어서 계속 연인관계를 지속했던 어리석은 기억이 있는가? 고통이 두려워! 실패가 두려워서 주저했으나, 시간이 지나고 보면, 과감히 결정하지 못한 어리석음이 고통을 더욱 가중시켰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나는 나의 '마음의 면역체계'를 과소평가했다. 생각보다 우리의 면역체계는 강하다. 시련, 고백거절에 대해서도 우리의 마음은 잘 견뎌낸다. 시간이 지나면 웬만한 것들은 다 사소해 보인다. 도전하자! 도전하지 않아서 후회하기 보다는 도전하고 시련의 아픔을 견뎌내자!!

 

  이 책의 마지막장은 지혜로운 사람의 10가지 프레임이 제시되어있다. 나의 삶에 많은 지침이 되어줄 것이며, 이 글을 읽는 고마운 사람들에게도 많은 지혜를 줄 것이기에 이를 소개하면서 글을 마무리하려한다.

첫째, 의미중심 프레임을 갖아라,

둘째, 접근 프레임을 갖아라, 도전하고 실패와 처벌보다는 보상에 관심을 갖자.

셋째, '지금 여기'의 프레임을 갖자,

넷째, 비교 프레임은 자신을 불행하게 만든다.

다섯째, 긍정적인 언어를 사용하자.

여섯째, 닮고 싶은 사람을 찾아라.

일곱째, 주변 물건을 바꾸어라.

여덜째, 체험 프레임을 소비하라.

아홉째, 누구와의 프레임을 갖아라.

열번째, 위대한 반복 프레임을 연마하라.

  당신도 위대한 프레임을 갖고 현명해지기를 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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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남자 - 한대 지식의 집대성 오늘 고전을 읽는다 4
이석명 지음 / 사계절 / 2004년 5월
평점 :
절판


  '회남자'! 그 이름도 낯선 책이다. 팟캐스트 '전영관의 30분 책읽기'에서 이윤호선생이 '회남자'에 대해서 소개를 해주어서 처음 알게된 책이다. 한무제의 중앙집권화에 반대하는 사상을 담았기에 결국 무제에 의해서 죽을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 인상적이었다. 책의 두께도 상당히 얇아서 읽기에 부담이 없었다. 책장을 넘겨보자.

 

1. 회남자에 대한 입문서

  '회남자'라는 책이 얇은 책이라는 생각에 책을 읽기 시작했으나, 이 책은 나의 생각과는 달리, 회남자에 대한 입문서였다. 장사 마왕퇴의 발견에서 부터 시작하여 회남왕 유안의 비극적인 가족사를 서술하며 '회남자' 탄생의 배경을 서술한다. 그리고는 '기론'과 '무위'등의 개념을 통해서 '회남자'가 어떠한 의미를 가진 사상서인지를 서술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회남자에 대한 안내서를 만났다는 즐거움도 있었으나, 상당히 가벼운 책이라는 한계점에 아쉬움이 남는다. 음식맛은 보지 못하고, 열심히 레시피만 읽은듯한 느낌이 든다.

 

2. 회남자는 무제에 대항한 책이었을까?

  이윤호선생은 '회남자'를 팟캐스트에서 무제의 중앙집권화에 반대하는 책으로 소개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과연 회남자는 무제에 반기를 든 책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이 책은 황제와 노자의 사상이 결합된 황로학의 대표적 이론서이다. 무위무불위(無爲無不爲)라는 최고의 통치술을 이루기 위해서, 인재등용, 법치, 시스템마련, 세의 확보 등의 다양한 통치술을 소개하고 있다. '무위'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경지가 아니라, 순리에 따라서 시스템적으로 통치가 이뤄지도록 하여, 통치자가 바삐 움직일 필요가 없는 상태를 '무위'라고 보아야하지 않을까? 무제의 중앙집권화에 반기를 든 책이 아니라, 무제의 중앙집권화를 효율적으로 이뤄낼 수 있는지 그 방도를 알려준 책이라할 수 있다. 황실의 피가 흐르는 유안이, '회남자'가 완성되자 한질을 무제에게 바쳤고, 무제는 이책을 소중히 보관하였다는 사실을 보더라도, '회남자'는 무제의 통치술에 반기를 든 책이 아니라, 무제의 통치술이 보다 효율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그 방법을 알려준 책이었다.

 

3. 성인과 미친자를 구별하라!

  아인슈타인의 비서가 아인슈타인의 강의를 많이 듣다보니, 아인슈타인을 대신해서 특강을 했다고 한다. 강의가 끝나고 학생이 질문을 했다. 비서는 "이질문은 너무도 쉬운 질문입니다. 제 비서도 이에 대답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라며 비서에게 학생의 질문에 대답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서 막힌 무위(색이무위)와 열린무위(통이무위)의 차이를 알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진정으로 과학에 대해서 깨달은 자이고, 아인슈타인의 비서는 깨닫지는 못했으나, 아인슈타인의 겉모습을 흉내낼 수 있는 자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두사람에게 차이는 없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분명한 본질적 차이가 있다. 이것이 막힌 무위와 열린 무위의 차이일 것이다. 세상의 진리를 이야기하면서 집착하지 말라고 강조하면, 자신은 집착을 하지 않는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는 깨달아서 집착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바보이기에 집착할 수 없는 자일 경우가 많다. '회남자'에서는 성인과 미친자의 차이와 공통점을 소개하고 있다. 둘다 근심이 없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지만, 성인은 덕으로 내면의 조화를 유지하는 반면에, 미친자는 화복을 분간 못하여 근심이 없는 자이다. 겉모습만을 보고, 겉모습만을 따라하면서 진정으로 깨달았다고 생각하는자! 그를 경계해야한다. 진정으로 통달하려한다면, 내면에서 부터 깨달음이 우러나와야 할 것이다.

 

4. 즐거움도 경계해야할까?

  회남자에서는 , 인간의 본성은 '고요함'이라고 단정한다. 귀와눈이 소리와 색깔의 즐거움에 지나치게 빠져든다면 오장이 요동하여 안정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고요함'을 잃지 말라고 당부한다. 즐거움 또한 경계하라는 이 말에 대해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즐거움'을 구분하지 않고, 다양한 즐거움들을 통털어 '즐거움'이라고 단정하여 말하는 것 자체가 무리한 표현이었다. 우리에게 해를 줄 수있는 즐거움은 감각적 쾌락, 즉 sex와 같은 쾌락일 것이다. 너무 지나치게 탐닉하면 정신과 건강을 해칠 수 있는 즐거움이다. 그러나, 지적즐거움이나 이타적 즐거움(봉사활동)과 같은 즐거움은 많이 할 수록 행복하게 우리를 이끌지 않는가! 이들을 구별해서 논지를 전개했다면, 보다 정교하고 치밀한 '회남자'가 되었을 것이다.

 

  중국에는 수많은 고전이 있다. 그 많은 고전들 중에서 새로운 고전 하나를 만났다. 한대의 철학을 집대성한 위대한 작품에 대한 작은 입문서를 읽고, 회남자라는 책이 어떠한 책인지 어렴풋하게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회남자라는 책의 입문서로 훌륭한 책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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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양장) - 빅터 프랭클의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0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빅터 프랭클의 의미치료에 관해서 처음 알게 된 것은 학생을 상담하면서부터였다. 자신의 꿈이 상담가이며,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읽고, 의미치료에 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상담을 하려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배워야하다고만 생각했다. 제3의 학파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그후,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에 관심이 높아져갔다. 과연 어떠한 책일까? 듣고 있던 팟캐스트에서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의 한부분이 소개될 때, 그 책을 직접 읽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커졌다. ‘프래모 래비의 책을 읽을까? 빅터프랭클의 책을 읽을까?’라는 고민을 했다. 프래모 래비가 아우슈비츠에서 생존했고, 증언자 문학을 남기기까지 했으나, 아우슈비츠의 고통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했던 반면에,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자신의 학문을 더욱 빛나게 갈고 닦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갖게 해주었다. 결국, 아우슈비츠에 패배하지 않은 빅터 프랭클의 책을 펼쳤다.

 

 

1. 수용소와 우리의 현실은 너무도 비슷하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으며, 나의 머릿속에는 그 수용소와 너무도 유사한 수용소 하나가 떠올랐다. 바로 군대였다. 물론, 강약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수용소에서의 생활은 군대에서의 생활과 놀랍도록 유사했다. 군대 선임과 보초를 서면서, 갑자기 선임병이 나에게 물었다. "너는 군대에 온 것 같냐?" "....." "난, 커다란 감옥에 온 것 같다. 난 내가 군인 같지가 않다." 선임병이 말했던 그 말은 내가 느끼고 있었던 감정과 유사했다. 군대는 거대한 감옥과 같았고, 나의 모든 생활은 통제되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의 모습도 너무도 많이 변했다. 하나같이 먹는 것에 집착하고, 이 군대생활을 빨리 끝내고 싶다며, 날짜를 셌다. 처음에는 달로 세고, 그 다음에는 날짜로 셌다. 고참병이 신참이 오면 몇일 남았느냐고 묻는다. 그러면, 신참은 "아주 많이 남았습니다."라고 외친다. 선임병이 웃으며 말한다. "야! 그 날이 오냐? 나라면 자살한다.!!" 까마득히 남은 군대생활을 조롱하는 것이 선임병들의 낙이었다. 이러한 모습은 빅터 프랭클이 말한, 죽음의 수용소에서 보이는 수용소 사람들의 모습과도 유사했다. 먹는 것에 집착하고, 이 기약 없는 생활이 언제 끝날지를 궁금해한다. 단지 다르다면, 군생활은 언제 끝날지를 알 수 있다면, 수용소 생활은 그 날짜를 모른다는 점이다. 훈련병이었을 때는 더욱 수용소 생활과 유사했다. 훈련병 시기에는 성욕도 없었으며, 훈련소 입소 후, 1주일 동안은 대변을 보지 못했다. 끝날 것 같지 않은 훈련소 생활에서 관심은 생존과 훈련소 생활을 마치는 것 뿐이었다.

 

그 고통 속에서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저녁 날짜를 세는 것 외에도, 누군가에 대한 정신적 의지였다. 애인이 있는 사람은 애인이 보내주는 편지에 집착하고, 나처럼 애인이 없는 사람은 고생하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의지처였다. 그 의지처가 배신을 하며 탈영으로 이어진다. 특히 애인이 배신을 하면, 혹시나 탈영하지 않을까? 간부들의 상담이 이어진다. 밖에서는 이해가지 않는 일들이 군대에서는 현실로 다가온다. 빅터 프랭클이 죽음의 수용소에서 희망으로 삼은 것은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를 다시 만나는 것과 자신의 학문적 업적을 다시 세상에 내놓겠다는 열정이었다. 그리고 그 희망이! 의미가! 그를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그를 지지해주었다.

 

군대의 생활이 고통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안에서도 소소한 희망과 재미가 있었다. 그 안에서 신참이 보이는 엉뚱한 행동은 웃음을 자아내게 했으며, 주말에 종교행사에 가서 먹는 초코파이의 맛은 달콤했다. 크리스마스날 보았던 연극은 너무도 우리를 즐겁게 해주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수용소에서도 유머가 있었다. 유머와 예술은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었다. 구석기시대 사람들도 알타미라 동굴 벽화를 남겼듯이, 예술과 유머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삶을 살아가게하는 윤활류였다. 반대로 '유머와 예술'이 없다면 인간은 생존할 수 없을 것이다.

수용소에서 치료받고 있는 사람들 조차도 그속에서 사소한 행복감을 느낀다. 마찬가지로 나도 사회에서는 이름조차도 들어보지 못했던 봉아지염에 걸려 의무반에서 누워지냈다. 그러면서도 그 사소한 휴식에 행복감을 느꼈다. 극한의 상황에서도 행복함을 느끼는 인간의 모습을 보면서, 인간의 적응력과 생존력이 얼마나 강한지를 깨닫게 된다.

 

 

2. 강신주, 신영복 그리고 유발 하라리를 생각하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으며, 강신주와 신영복 그리고 유발 하라리가 생각났다. 그들의 말과 빅터 프랭클의 말들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들이라면 빅터 프랭클의 말에 어떠한 해설을 남겼을까?

 

강신주는 어느 강좌에서 사랑하는 것이 하나라도 있는자는 자살하지 못한다고 했다. 자신이 보살펴야할 금붕어라도 있는자는 옥상에서 뛰어내리지 못한다는 말이다. 반면 빅터 프랭클은 미래로 부터 무언가를 기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면, 자실을 방지할 수 있다고 말한다. 강신주와 빅터 프랭클의 말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강신주는 자살을 방지하는 열쇠를 '사랑'으로 보았고, 빅터 프랭클은 '기대' 혹은 '희망'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자신의 사랑하는 것! 단지 인간만이 아니라, 일과 동물, 그리고 그 무엇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희망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희망은 삶에 대한 의미를 갖게 할 것이다. 강신주의 말과 빅터 프랭클의 말은 표현이 달랐지만, 하나의 이데아였다. 단지 이데아를 다른 말로 표현했을 뿐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읽으면서, 갑자기 고 신영복 교수가 생각났다. 베트남 전쟁 포로로 끔찍한 경험을 당한 사람이 포로생활을 '자기 성장에 도움이 되는 체험'이며, '이로은 점이 있다.'라고 선언하는 모습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쓰고, 감옥에서 읽은 고전을 바탕으로 '강의'라는 책을 쓴 신영복 교수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같은 감옥생활 혹은, 포로생활을 하지만, 어느 사람은 현실에 굴복하고, 어떤 사람은 그 속에서 의미를 찾는다. 감옥! 그것도 언제 풀려날지도 모르는 세월을 갖쳐 살면서도 자신의 삶을 더욱 성숙하게 만든 사람들!! 신영복 뿐만이 아니었다. 고인이 된, 김대중 전대통령과, 넬슨 만델라 전대통령 또한 감옥이라는 가혹한 현실에 굴복하지 않았다. 진정으로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 그들은 의미와 희망을 잃지 않으려했다. 그리고 새로운 의미와 희망을 감옥에서 만들었다.

 

빅터 프랭클은 지금의 정신의학이 '인간의 마음을 그저 하나의 수단으로만 보고, 정신질환 치료를 하나의 테크닉으로만 간주'한다고 개탄한다. 정신의학은 '환자를 병 너머 존재하는 하나의 인간으로 보라'고 절규한다. 빅터 프랭클의 말은 인본주의에 기초한 위대한 정신의학자의 진리이다. 그러나 유발 하라리는 빅터 프랭클의 말에 동의할까? 유발 하라리는 그이 저서'호모 데우스'라는 책에서 현대 사회가 신성시하는 인본주의도 미래사회에서는 도전을 받을 것이라 주장한다. 최신 뇌과학을 근거로 인간의 정신도 뇌활동의 일부분이며, 인간이 결정하기 이전에 이미 뇌에서 결정이 내려진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인간을 절대시하는 인본주의는 설곳이 사라진다. 빅터 프랭클의 절규를 최신 뇌과학은 뇌 신경세포의 상호작용에 불과한 것이라며 인간의 마음을 하나의 수단으로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인간이 고귀함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우리는 빅터 프랭클의 절규에 귀를 기울여야한다. 과학이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과거 종교가 모든 것을 설명해 줄 수 있다는 생각이 진리를 볼 수 없도록 했듯이, 과학이라는 또하나의 거대한 종교가 인간의 참된 가치를 없앨 수 있다. 그러기 전에 우리는 인간의 참된 의미를 찾아야한다.

 

3. 현실을 생각하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나온 사람들은 곧바로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다. 그들은 그토록 원하던 자유를 얻었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그들을 죽음의 수용소에서 버티도록 했던 정신적 지주가 사라졌다. 사랑하는 아이들도, 사랑하는 아내도 더 이상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의 정신은 파탄을 맞이한다. 빅터 프랭클의 수용소 친구는 귀리를 짖밟으면서 '자신은 엄청난 고통을 받았는데, 이까짓 귀리를 밟는 것 정도를 가지고 왜 그래?'라고 항변한다. 빅터 프랭클은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옳지 못한 짓을 했다하더라도 자기가 그들에게 옳지 못한 짓을 할 권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없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나의 폐부를 찔렀다. 혹독한 시집살이를 한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되어서, 더 지독한 시집살이를 시키거나, 선임병에게 많이 맞은 자가, 선임병이 되어서는 더욱 가혹한 폭력을 후임병에게 시킨다. 폭력의 대물림이 나에게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고치기 위해서, 병든 나의 마음을 어루만지기 위해서 부단히도 노력했고, 심리학 책들을 읽으며 스스로 치유했다. 이러한 트라우마는 집단에게도 나타나고 대물림된다. 팔래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유대인들의 가혹한 행동은, 역사적 집단 트라우마를 제대로 치유하지 않음으로써, 폭력적 행동이 어떻게 대물림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유대인들은 아우슈비츠에서 겪은 고통이, 역사적 트라우마가 되어 대물림되고 있다. 그들의 피의 보복을 치위하기 위해서라도, 빅터 프랭클의 책을 그들이 읽어야한다.

 

빅터 프랭클은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우울증, 공격성, 약물중독'이 널리 퍼져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실존적 공허함에서 나온 것들이라 진단한다. 그들에게 삶의 의미를 일깨워준다면, 많은 효과가 있을 것이라 말한다. 빅터 프랭클의 지적은 비단, 미국의 젊은이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한국의 젊은이들과 청소년들도 '우울증, 공격성, 약물중독'이 노출되어 있다. 단지 심각성의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들에게 실존적 공험감을 없애줄 방법은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그들에게 인생의 목표를 정할 수 있도록 하고, 그 목표를 이뤄가 면서 인생의 의미를 찾도록해야한다. 이러한 점에서 학생부 종합전형이 얼마나 유용한지를 알 수 있다. 학생부 종합전형을 네글자로 줄이면 '진로지도'이다. 자신의 꿈을 찾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이 진학해야할 학과를 선택하도록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고등학교에서 진로와 관련된 책을 읽고, 관련된 동아리활동 및 교과활동을 한다. 이를 바탕으로 대학에서는 학생을 평가하여 선발한다. 우리의 교육현실에서는 가장 이상적인 대입제도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학생부종합전형이 있는 집 자식들을 합격시키는 불공정한 제도라고 비난을 받는다. 이러한 기사를 볼 때마다 안타까움이 많이 든다. 보수 매체들은 왜? 학생부 종합전형을 비난하는 것일까? 분명, 수능과 논술을 비롯한 여타 대입제도보다 학생부종합전형은 사교육비를 유발하지 않는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학생부 종합전형을 준비하느라, 학교현장은 예전에 비해서 분명 내실이 있어졌다. 학생들은 자신의 진로와 관련된 책을 한권이라도 읽고, 자신의 꿈에 대해서 고민한다. 그렇다면 왜? 보수매체들은 학생부종합전형을 비난하는 것일까? 혹시 사교육비을 더 쓸 수 있는 자들을 위한 교육제도를 그들은 원하는 것은 아닐까? 수능처럼 단순히 성적순으로 대학을 가는 것이 누구에게 이로울까? 사교육비를 많이 쓸 수 있는 자들이 유리할 것이다. 그리고 수능성적으로 사람을 뽑는다면, 이러한 인재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적응할 수 없다. 시대변화의 요청 속에서 학교현장을 바꾸기 위해서는 학교현장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현명한 대중들이 무엇이 21세기 새로운 인재를 키워내는데 더 훌륭한 제도인지를 판단해야할 것이다.

 

'스타인 호프의 도살자' J박사를 아는가? 그는 많은 정신병자를 가스실로 향하게 했다. 그런데 그는 모스크바의 루비앙카 감옥에서 죽었다. 그를 옆에서 지켜보았던 사람은 그가 죽을 때,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도덕적 차원에 도달해서 생을 마쳤다고 증언한다. 지옥 같은 감옥이 그를 성자로 만든 것일까? 지옥 같은 감옥을 경험하지 않았더라도 '스타인 호프의 도살자'는 성자가 될 수 있었을까? 한국의 현실에도 '스타인호프의 도살자'에 비견될 수 있는 고문기술자가 성직자가 된 경우가 있다. 감옥살이를 하고, 성직자가 되어서는, 자신이 다시 태어나도 그일을 할 것이며, 그일은 범인과 두뇌싸움을 하는 예술이었다고 증언한다. 왜? 한국의 '스타인 호프의 도살자'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도덕적 차원에 도달'하지 못했을까? 한국의 감옥이 루비앙카 감옥에 비해서 덜 고통스러웠기 때문일까? 아니면, J박사보다 한국의 '스타인 호프의 도살자'가 인간성이 더 떨어지기 때문일까?

 

'역설의도기법'을 아는가? 글씨를 흘려쓰는 사람에게 자신이 글씨를 얼마나 엉망으로 쓰는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겠다고 마음 먹고 글씨를 쓰라 처방했더니, 그사람의 증상이 사라졌다. 역설의도기법은 '도덕경'의 한구절을 떠올리게했다. 그릇은 비움으로써 그 쓰임이 있다. 받으려면 주고, 집으려면 펴라! '도덕경'의 역설적인 이 구절이 빅터 프랭클의 '역설의도기법'과 너무도 유사했다. 집착을 버리자. 멈추면 보이는 것이 더 많은 법이니까.....

 

4. 삶의 의미를 찾는 방법 - 창조, 사랑, 시련

 

삶의 의미를 찾는 방법에는 '창조', '사랑', '시련'의 방법이 있다. 이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사랑'이 아닐까? 사랑의 범위를 사람에게만 한정하지 않고, 일, 동물 등 보다 넓힌다면, 삶의 의미를 찾는 가장 핵심적인 방법은 '사랑'일 것이다. 다양한 시련을 이기는 힘도 사랑에서 그 원천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책에는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인간을 얼마나 강하게 만드는지에 관한 글들이 적혀있다.

 

"왜 살아야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니체

 

니체의 이 말은 의미가 인간에게 얼마나 큰 힘을 주는지 잘 말해준다. 빅터 프랭클은 "인간은 환경에 굴복하기도 하지만,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최악의 상황에서 인간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용감하게 저항하고 맞서 싸울 수 있다.'라고 지적한다. 현실에 굴복할 수 있으나, 강한 정신력과 삶의 의미는 가혹한 환경을 이겨 내게 한다.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라는 것이 있다. 결국, 가혹한 현실속에서 절망을 택할 것인가? 삶의 희망을 잃지 않고 현실에 당당히 맞설 것인가는 인간의 선택에 달려있다.

 

현실을 탓하며 절망을 선택한자들은 어떻게 될까? '미래에 대한 믿음의 상실은 죽음을 부른다.', '그 자신의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수감자는 불운한 사람이다.' 결국 절망 속에서 스스로의 삶의 의지를 상실하고 급격히 저항력이 떨어져, 병으로 죽거나, 현실적인 쾌락을 택하며 죽어간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삶을 선택해야할까? 한비야의 책 '지도밖으로 행군하라'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서술되어 있다. 어느 부족에게 씨앗을 주고, 다른 부족에게는 씨앗을 주지 못했다. 비가 오지 않아 씨앗은 싹을 틔우지 못했지만 씨앗을 받은 부족은 씨앗이라는 희망덕택에 아사자가 많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 가혹한 현실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기대' 혹은 '희망'이다. 위대한 지도자는 국민에게 훌륭한 비젼을 제시한다. 그것이 국민에게 희망을 주고, 가혹한 현실을 극복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나에게 나는 어떻한 비젼과 희망을 제시할 수 있을까? 나는 어떠한 희망을 가지고 있을까? 이 질문에 대답해본다.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은 탈출을 결심했다가 자신이 보살펴줄 사람이 생기자 이를 포기한다. 친절한 독일군이 자유의 몸이 되었다며 사람들을 수용소 밖으로 실어 날랐을 때, 자신의 명단이 없어 항의했다. 그러나 수용소 밖으로 이송된 사람들은 대부분 불에 탄 채로 발견되었다. 빅터 프랭클은 천운으로 살아 남아 감옥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의미치료라는 제3의 학파를 만들어 우리의 인생에 많은 깨달음을 주고 있다. 만약 그가 이송차량에 탑승했다면 그의 의미치료도 세상에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빅터 프랭클은 우리에게 '의미 치료'라는 새로운 희망의 빛을 우리에게 내리 쬐고 있다. 나의 마음에도 그 빛이 비춰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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