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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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여년전 친구에게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책이 참 좋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서점에서 신영복 선생의 '강의'라는 책을 보았다. 독서토론회에서 이 책을 주제로 발제를 하면 좋겠다 싶어서 책을 샀다. 그러나 당시 동양고전에 대한 배경지식이 일천한 나로서는 동양고전들의 핵심을 강의한 이책이 읽기 힘들었다. 결국 '강의'는 책장속에서 10여년을 잠들었다. 그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고, 신영복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한걸음 다가갔다. 팟캐스트에서 낭독해주는 신영복 선생의 책들은 나를 감동시키기 충분했다. 결국 다시 한번 '강의'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강의'를 10여년 동안 나도 얼마나 성장했는지 알아볼 수 있는 거울로 삼아보겠다.

 

1. 감옥에서 시작된 깊은 사색의 결과

  신영복 선생의 글을 속독하기에는 부적합한 책이다. 깊이 있는 사색의 결과로 한글자 한글자 씌여진 책을, 한번에 휙 읽기에는 책에 담긴 생각의 깊이가 너무도 깊다. 낭독 팟캐스트를 통해서 신영복 선생의 글을 듣고, 같은 부분을 눈으로 읽으며 다시 한번 사색하며 읽었다. 그래서 보통의 책들보다 읽는 속도가 무척 느렸다. 사색하며 읽을 수록 책의 맛은 더욱 깊어졌다.

  신영복 선생이 감옥에 갖혀 20여년을 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형을 언도 받고 나서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주역' 계사전의 이말이 그에게 많은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窮即變 變即通 通即久), 역이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라는 이 말은 곧 사형수 신영복의 궁한 것이 변하여 결국은 통하고 오래간다는 희망을 가게하지 않았을까? 대응! 변화! 응전! 의 과정을 통해서 가장 나락으로 떨어진 삶도 다시 변하여 새로운 희망의 싹으로 다시 태어날 것을 주역은 말하고 있다. 가장 좋은 지천태괘에서도 하락의 시작이 잉태되어 있고, 가장 비천한 천지비괘에서도 희망의 싹을 암시하고 있다. 고정불변한 것은 없다. 위기가 기회가 될 수도 있고, 행운이 불행이 될 수도 있다. 요행히 얻은 복권당첨이라는 행운이 재앙이 되어, 당첨금을 탕진하고 비참한 종말을 고하는 예를 풍문으로 자주 듣는다. 주역에서는 고정불변한 것은 없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행복보다는 행운을 추구하며 오늘을 허비하고 있다.

  항용유회(亢龍有悔)라는 말이 있다. 건위천괘의 상구 효사에 있는 구절이다. 하늘 끝까지 날아오른 용은 후회한다는 경계가 담긴 효사이다. 행운이 불행이 되기도하며, 불행한 곳에서 희망이 싹튼다는 주역의 교훈은 우리의 정치현실에도 적용된다. 이명박근혜 정권 9년 동안, 권력의 핵심에 있었던 사람들은 얼마나 기고만장했는가! 자신의 정권이 영원히 계속되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뉴스를 통해서 전해지는 것 처럼 엄청난 적폐를 저질렀다. 하늘 끝까지 권력을 손에 쥐고 날아오른 그들이 자신의 힘을 남용한 결과 커다란 후회를 하는 현실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가장 좋은 지천태괴에서 이미 불행을 싹틔우고 있었다. 반면에 폐족이라 스스로를 불렀던 노무현의 사람들은 가장 비천한 천지비괘에서 희망을 싹틔우며 재기했다. 영원불멸한 것은 없다. 권력을 가진자들은 하늘 끝까지 날아 오른 용은 후회한다는 항용유회(亢龍有悔)라는 효사를 반드시 가슴에 새겨두어야할 것이다.  

  감옥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신영복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깨달음을 얻었을까? 20여년 동안의 길고 긴 감옥생활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그는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라는 냉혹한 현실에 직면해야하지 않았을까? 법가를 대표하는 고전이 '한비자'이다. 신영복은 한비자를 강독하며 우리의 현실을 꼬집는다. 우리의 범죄관은 범죄 행위와 불법 행위로 양분하여 범죄를 바라본다. 범죄행위에는 절도와 강도 등의 범죄가 속하고, 불법 행위에는 선거사범, 경제사범, 조세사범이 이에 속한다. 이중에서 범죄행위는 가혹하게도 인간 전체를 범죄행위로 매도하며 그와 접촉하는 것 자체를 죄악시한다. 반면에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무척 관대하다. 사람과 행위를 분리하고 행위의 불법성만을 인정한다. 수많은 불법행위자가 있고 그중에서는 전과 14범인 정치인도 있다. 불법행위자들 중에는 대통령까지 된 사람도 있고, 심지어는 국회의원이 된 사람도 있다. 우리 현실에 녹아있는 범죄관을 신영복의 날카로운 지적에 감탄을 한다. 감옥이라는 현실을 직시하고 이를 분석한 신영복이기에 볼 수있는 우리의 현실이다. 신영복은 귀족도 예외없이 엄형에 처했던 법가를 바로 볼 필요가 있다고 설파하고 있다. 강자에게 관대하고 약자에게 강한 우리의 법집행을 법가들이 바라본다면 뭐라고 말할까?

  신영복은 감옥에서 만나는 선배들로 부터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 지혜를 얻는다. 굴원의 시에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씩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 라는 말이 있다. 생각은 좌경으로 하고, 행동은 우경으로 한다는 말이다. 생각은 비타협적 원칙주의로 하고, 행동은 현실주의와 대중노선을 지키라는 말이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나는 이를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따뜻하게 살아라'라고 풀이했다. 차가운 이성으로 사고하다보면 비관적 현실에 좌절할 수 있다. 암울한 이명박근혜 시기를 살면서 너무도 비관적이었다. 늘어나는 노인인구! 줄어드는 젊은 인구! 그 속에서 진보세력이 권력을 잡기는 요원해보였다. 그럴때마다 나 자신에게 말했다. 어둠속에서 빛을 보는 것이 희망이다. '비관적 현실을 긍정적으로 살자!' 좌와우 양극단을 경계하고 비관적인 현실을 긍정적으로 살아갈 때만이 희망이라는 불빛을 통해서 세상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촛불혁명이 바로 이를 증명해준다.

 

2. 고전 전문가보다 탁월한 고전 해설

  신영복은 그가 말하듯이, 고전 전공자가 아니다. 단지 어려서 할아버지에게 고전을 배웠고, 20여년의 길고긴 세월을 고전을 읽으며 살았다. 그리고 사색하며 자신만의 고전독법을 터득했다. 이러한 고전 독법을 읽으며 무릎을 탁치는 때가 많았다.

  신영복! 그가 가장 중시했던 고전의 글귀는 무엇일까? 나는 석과불식 (碩果不食)이 신영복이 가장 사랑하는 글귀일 것으로 생각한다. 큰 과실은 먹지않고 남겨둔다는 이 말을 읽으며, 농촌에서 감나무에 까치밥을 남겨 놓는 푸근한 인심이 생각나다. 큰 과실을 까치밥으로 남겨두어 자연과 그 과실을 나누고, 그 까치밥이 까치를 통해서 새로운 곳에 싹을 틔워 새로운 감나무를 자라게하는 재생산의 자연의 질서가 느껴지는 글귀이다. 한때 대기업이 골목상권까지 침범하며 자영업자의 생존을 위협했을 때가 있었다. 승자독식의 냉혹한 신자유주의 시대에 석과불식의 삶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 승자독식의 시대에서 석과불식의 사회로 전환되어야 우리 세상이 더 따뜻해질 수 있지 않을까?

  신영복의 깊고 깊은 사색의 결과로 잉태된 주옥같은 해설에는 무엇이 있을까? 지지자불여호지자 호지자불여락지자 (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에 대한 해설을 꼽겠다. 아는자는 좋아하는자만 못하고, 좋아하는자는 즐기는자만 못하다라는 '논어'의 글귀를, 어느 동양철학자는 좋아한다는 '호'와 즐긴다는 '락'은 별차이가 없다고 설명했다. 그때는 좀처럼 동의하고 싶지 않았지만, 명확히 '호'와 '락'의 차이를 설명할 수 없었다. 반면 신영복은 '지'는 대상에 대한 인식이며, '호'는 대상과 주체간의 관계에 관한 이해이고, '락'은 주체와 대상이 원융된 상태라고 설명했다. 같은 춤을 추더라도 단순히 춤을 추는자와 춤과 자신이 혼연일체가 되어 무아의 경지에 오른 사람은 분명히 차원이다르다. 신영복의 독법을 통해서 '논어'를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즉, 군자는 화목하되 부화뇌동하지 아니하며 소인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화복하지 못한다.라는 이 글귀를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해했다. 그런데 신영복은 이를 화목과 부화뇌동의 관점에서 벗어나 사회를 바라보는데 적용한다. 즉,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하며 공존하지 못한다.라고 해석했다. 더 나아가 '화동'의 논리로 다양성을 인정하며 지배하려하지 않았던(간접지배하려했던) 중국이 중화패권주의에 휩싸여 지배하려하며 공존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신영복의 해설은 나로하여금, 하나의 미물을 통해서 우주를 조망하는 경지라는 생각을 하게했다. 사회과학을 전공한 신영복이 깊은 사색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나름의 탁월한 경지에 올랐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신영복만의 고전 독법은 무엇일까? ‘득어망전(得魚忘筌)’, 즉, 물고기를 얻으면 통발을 잊어버린다는 말이있다. 신영복은 이 말을 비틀어, 망어득망(忘魚得網)'하라고 당부하고 있다. 고기(현상)는 잊어도 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물(거대한 관계망)을 잊어서는 안된다. 물고기(현상)을 잊어버린다하여도 거대한 그물 즉 거대한 관계망으로 새로운 물고기를 얻을 수 있으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물고기가 아니라 '그물'인 것이다. 고전에 매몰되기 보다는 고전을 현대에 맞도록, 나에게 맞도로 새롭게 독법하는 자신만의 눈을 가질 것을 신영복은 강조하고 있다. 그 새로운 눈(그물)을 갖는 것이 고전 독법의 핵심일 것이다.

  고전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 신영복은 정나라의 차치리라는 사람 이야기를 한다. 차치리는 신발을 사기 위해서 자신의 발을 본뜬 탁을 만들었으나, 신발가게에 와서는 탁을 놓고 온 것을 알고는 다시 집으로가서 탁을 가져온다. 그러나 장은 이미 파하고 신발을 살 수 없었다. 이 때, 사람들이 "어째서 발로 신어보지 않소?"라고 말하자 차치리의 답변이 걸작이다. "탁은 믿을 수 있지만 내 발은 믿을 수 없지요." 신영복은 우리는 차치리와 같은 행동을 하고 있지 않냐고 반문한다. 리포트를 쓰기위애해서 책(탁)을 찾는 우리의 모습에서 차치리를 발견한다. 우리의 현실(발)을 보다는 책(탁)을 믿는 우리를 우리는 경계해야한다. 현실과 함께하라 갖가지 통계지표를 통해서 경제가 좋아졌다고 하지만, 우리 생활에서 이를 느끼지 못한다면 과연 경제가 좋아진 것일까? 고전의 좋은 이야기도 우리 현실과 괴리된다면 그것은 고전으로서 가치가 있을까? 고전독법이 공리공담으로 흐르는 것은 신영복은 경계하고 있다.

  신영복은 관계론적 사고로 동양고전을 읽는다. '주역'을 읽을  때도 효와 괘를 관계론 적으로 읽는다. 관계를 중시하는 학파라하면, 유학을 첫번째로 꼽을 수 있다. 이  책에서도 '논어'에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서술하고 있다. 논어의 위상을 인정하고, 논어를  오늘의 현실에 적용해서 지혜를 얻고자하는 저자의 의도가 읽힌다. 

 

3. 신영복 그가 말하는 고전읽기의 필요성

  그렇다면 고전은 왜? 읽어야할까? 신영복은 대학에서 왜? 자신의 전공도 아닌 고전을 강의했던 것일까? 그 답을 얻기 위해서 고전이 만들어진 배경을 살펴보자. 농경민족은 유한 공간에서 반복적 경험을 쌓아 문화를 만든다. 그래서 '서경'이 탄생했다. 이러한 축적의 문화속에서 '마오어록'도 탄생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는 이상하게 생각되지만, 중국적 전통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유한한 공간에서 무한한 시간적 경험을 하고 이를 통해서 고전이 탄생한다. 반복적 경험 속에서 삶의 지혜를 담는 고전이 탄생하기에 고전은 충분히 읽을만한 가치가 있고 읽을만한 이유가 있다.

  고전을 읽을때 유의할 점이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고전이 고전이 아닌 경우가 있다. 무슨 말인가? '시경'에는 저항시와 노동요가 많다. 그러나 우리의 머리속에는 음풍영월이 시의 본령인 것으로 잘못 이해되고 있다. 시경에도 음풍영월하는 내용이 많으리라는 착각은 지배층의 편향적 여과장치 때문에 생긴 정신세계의 왜곡이다. 꼰대들이 고전을 읽고 자신에게 유리한 것들만 뽑아서 현실을 왜곡하고, 젊은이들을 억누른다. 이는 '논어'를 읽었을 때에도 느낀일이다. 논어 헌문편에(14-46) 原壤夷俟 子曰 幼而不孫弟 長而無述焉 老而不死 是爲賊 以杖叩其脛이라는 말이 있다. 원양이 걸터앉아 있자 공자가 어려서는 공손하지 않았고, 커서는 기억될 만한 을을 하지도 않았으며, 늙어서는 죽지도 않으니, 자네야말로 도둑일세.라며 지팡이로 정강이를 치셨다.라는 내용의 글을 그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고전을 읽어야하는 이유는 꼰대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국부론'에 독점자본가에 대한 경계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독점자본가는 '보이지 않는 손'만을 강조하며 자신에게 더 많은 자유를 달라고 한다. 현명해져라, 실시구시하라, 그러지 않는다면 착취의 지식에 세뇌당할 수 있다!!

  묵자에 '君子不鏡於水, 而鏡於人(군자경어수, 이경어인)'이라는 있다. 군자는 물을 거울로 삼지 않고 사람을 거울로 삼는다는 말이있다. 굴뚝 청소한 쌍둥이가 물에 자신을 비추기 보다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다. 이는 단지 숫검뎅이가 묻었는가를 살피기위함이 아니라,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안색을 살피고 길흉을 살피기 위함이 아닐까? 묵자의 감동적인 말을 가슴에 새기며, 내 주변의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아야겠다. 내 이웃의 얼굴을 살필 눈을 틔우기 위해서 고전을 읽어야하는지도 모른다.

 

4. 고전에서 발견하는 놀라움.

  마가복음6장에는 "선지자는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다. 이와 비슷한 말이 '묵자'에 있다. 초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하려는 것을 묵자가 저지했다. 묵자가 돌아가던 중에 비를 만나서 송나라 사람집에 들어가 비를 피하려했으나, 송나라 사람은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드러내지 않고 공을 세운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요란하게 공명을 휘날리며 다투는 자를 더 알아주고 있다. 이러한 일은 왕의 병을 미리알고 고칠 것을 간언했으나, 왕이 병이 없는 자신을 속인다고 편작을 멀리했다가, 왕이 죽은 이야기부터, 자신의 공을 빼앗길 뻔한 롬멜이 선전전에 중요성을 깨닫고 수많은 기록을 남긴 이야기, 황우석이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가 추락한 이야기 등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는 이야기이다.

  네 이웃을 사랑하기를 내몸 같이 하라 라는 말은 누구의 말인가? 놀랍게도 묵자의 말이다. 애인약애기신(愛人若愛其身)은 '묵자' 겸애편에 나와 있는 말이다. 물론 마가보금 12장에 나와있는 말이기도 하다. 묵자의 내용 중에서 성경에 있는 내용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내용이 많다. 그래서 중국에서 동방박사들이 묵가학파일 것이라 주장하는지도 모른다.

  '순'임금의 아버지 고수가 살인을 했다. 순임금은 어찌해야하는가? 당신이 순임금이라면 어찌할 것인가? 이질문에 어찌 대답하는가에 따라서 당신의 성향이 법가, 법가에 가까운지, 유가에 가까운지 알 수있다. 맹자는 법에 따라 체포하고 사형에 처해야한다고 말한다. 단, 순임금은 자리를 버리고 부친을 몰래 업고 도망가서 부친을 봉양하며 행복하게 살라고 당부한다.

  그럼, 묵가에서는 법가처럼 원칙을 중시한다. 진혜왕이 묵자의 다음 거자 복돈의 아들이 살인을 하자, 사면을 해준다. 그러나 복돈은 사면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그리고는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사형에 처한다. 만약 당신이라면 묵가나 법가의 입장을 택했겠는가? 유가의 입장을 택했겠는가?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이라는 말을 아는가? 물론 알 것이다. 그럼 그다음 구절, 명가명 상명(名可名 非常名)은 아는가? 그래 알것이다. 도를 도라할 수있으면 항상 그러한 도가아니요, 가히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라니, 무슨 말인가? 신영복은 개미를 들어 설명한다. 개미에게 물어보면 '개미'는 자기 이름이 아니다. 개념이란 그릇은 작은 것이다. 그릇으로 바닷물을 뜨면 그것은 이미 바다가 안니다. 이 얼마나 탁월한 해설인가? 우리가 개미를 개미라 부르지만, 어느 누구도 개미가 자신을 개미라고 생각할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는가? 다양한 관점에서 사람을 관계론적으로 파악하는 것!! 그것이 고전독법에 엄청난 파괴력을 갖을 줄은 몰랐다.

 

 경제학 전공자인 신영복은 소비를 미덕으로 생각하는 자본주의에 대해서 의문을 갖는다. '묵자'를 읽으며 거리를 가득채운 음식점이 불황을 겪지 않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외식을 해야하는가를 걱정한다. 신자유주의 자본질서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모습에서 신영복은 경제학자라기 보다는 인문학자로 보아야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사실이란 조각그림이라고 말한다. 사실의 조합에 의해서 비로소 진실이 창조되는 것이다. 부분의 합은 전체가 아니다. 1+1은 시너지를 발휘하여 2 이상의 힘을 발휘한다. 진실을 보려면 한조각의 사실 그이상을 보아야한다. 한조각 사실로 진실과 진리를 바라보려면 자신만의 고전 독법을 가져야한다. 신영복의 '나의 동양 고전 독법 강의'는 자신만의 고전독법을 만드는데 도움을 주는 명저이다. 그의 마지막 강의 '담론'도 읽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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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한글역주 3
김용옥(도올) 지음 / 통나무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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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올 논어 한글역주를 읽기 시작한 것이 약 3년전일이다. 일년에 1권씩 읽어서 3년만 동안 읽기로 마음먹었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문장씩 읽었다. 그러던 것이 3권을 읽으면서 부터는 1일 1문장을 읽는 것으로 목표가 바뀌었다. 모르는 한자를 찾고, 논어문장을 쓰고 읽고, 해석하면서 부단히 공부했다. 때로는 무릎을 탁치면서 감탄을 하고, 때로는 춘추 전국시대라는 시대적 한계를 넘지 못해서, 지금은 의미 없는 문장들도 있었다. 도올 논어 한글역주3권 속으로 들어가 보자.

 

1. 도가없는 세상을 살아가기.

   한친구가 있었다. 이명박근혜시절 공무원을하면서 그 정권에서 시키는 일들을 하는 친구였다. 이명박근혜 시기라는 시대적 암운 속에서 그는 이명박근혜 정권에서 시키는 정책들을 추진해야만 했다. 이제는 친구가 아닌, 그를 태백편을 읽으며, 떠올렸다. 태백편에 천하에도가 있으면 드러내도 좋으나 천하에 도가 없으면 숨어 버려라,나라에 도가 있을 때 가난하고 비천하게 사는 것은 치욕이다. 나라에 도가 없을 때 부유하고 높은 지위에 있는 것은 치욕이다 라고 했다.(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 邦有道 貧且賤焉 恥也 邦無道 富且貴焉 恥也) 무도한 세상에 저항할 수 없다면, 최소한 그들의 앞잡이는 되지 말아야했다. 그들이 시키는 일들을 거절하지 못한다면, 또 한명의 아이히만이 될 뿐이다. 총통이 시켰기에 열심히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에 보낸, 그와 영혼없이 일을하는 자들과 무엇이 다를까? 그래, 그는 자신은 거대한 기계의 조금만 나사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가 사표를 던졌다고 해서 정권에 아무런 파장도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용기있는 행동을 했다면 자신에게는 떳떳했을 것이다.

  요즘, 연일 국정농단 세력들이 구속되고 있다. 그들은 아마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부도덕한 지시를 수행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이 자신에게 경제적인 이득은 물론, 출세에도 커다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적폐 10여년 동안 많은 아이히만들이 한국사회를 움직였다. 한국의 아이히만에게 공자는 '비루한 녀석들 어찌 더불어 임금을 섬길 수 있겠는가? 자리를 얻기 전에는 자리를 얻는 것만을 걱정하고, 자리를 얻고 나면 자리를 잃을 것만 걱정한다. 만약 잃을 것만을 걱정하면 못하는 짓이 없게 된다.'(子曰, “鄙夫可與事君也與哉? 其未得之也, 患得之. 旣得之, 患失之. 苟患失之, 無所不至矣.) 공자님의 말처럼 그들은 자리를 얻기 위해서 고심했고, 자리를 얻고 나서는 그 자리를 잃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서 부당한 지시도 거절하지 않고 했다. 그들에게는 정의도, 국민도, 양심도 없었다. 용기없는자,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는자, 잘못된 지시를 거절할 수 없는자는 우리 국민은 물론이고, 그 자신도 불행해진다는 사실을 공자는 말하고 있다.

  공자는 우리들에게 충고를 잊지 않고 한다. 어릴 적에는 혈기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으니 경계함이 색에 있고, 커서는 혈기가 한창 강건하니 경계함이 싸움에 있고, 늙어서는 혈기가 이미 쇠미하니 경계함이 이익에 있다.(孔子曰 君子有三戒 少之時 血氣未定 戒之在色 及其壯也 血氣方剛 戒之在鬪 及其老也 血氣旣衰라 戒之在得) 도올 선생은 도식적인 이 말을 공자가 했을리가 없다고 단언한다. 도식적인 설명임에는 분명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야동에 빠져 있는 청소년들, 혈기가 왕성해서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해서 주먹을 쓰는 젊은이들, 노욕이 지나쳐서 P집회에 나와서 눈물흘리는 노인들의 모습!! 이런 모습이 우리의 전체모습은 아니지만, 우리의 일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분명하다. 그중에서도 한세월을 살아온 연륜 있는 노인들이 P집회에 나와서 차마듣기 힘든 말들을 쏟아내는 모습은 우리를 너무도 서글프게 만든다. 흥선 대원군이 민씨일파에 의해서 권력에서 쫒겨나고 나서 부단히 재기하려 몸부림치다가 추잡한 모습을 보였듯이, 이시대의 노인들은 곱게 늙어갈 기회를 스스로 내팽겨치고 있다. 떠날때를 알고 떠나시는 님의 모습이 아름다운 이유를 이시대의 노인들은 언제쯤 알게 될까?

  땅에 넘어진자! 땅을 딛고 일어서야한다는 지눌국사의 말처럼, 혼탁해진 한국사회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혼탁한 한국사회를 딛고 일어서야한다. 논어에서는 자로의 입을 빌어 '내 몸 하나를 정결히 지키고자 하다가 사회의 대륜을 어지럽힐 수도 있는 것이니, 군자가 벼슬을 꾀함은 오직 그 의를 행하려함이로소이다.(欲絜其身, 而亂大倫. 君子之仕也, 行其義也.)라고 했다. 정치를 떠나 은둔하며 고고히 살아간다면 자신의 몸은 깨끗이 보존할 수 있다. 그러나 정의롭지 못한 현실은 변하지 않게 된다. 정치를 하려면 자신의 손에 더러운 구정물을 묻히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않된다는 말이 있다. 용기있게 세상의 구정물을 묻히며, 적폐를 청산하려 혈투를 벌이는 정치인들을 응원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2. 공자는 어찌 생각했을까?

  공자님, 한쪽 뺨을 맞으셨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라는 질문을 한다면 당신은 공자가 어찌 대답했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예수님 처럼 다른쪽 뺨을 내밀었을까? 아니면, 덕으로 갚으라했을까? 공자는 곧음으로 갚으라했다. 원한을 덕으로서 갚는다면 덕을 무엇으로 갚겠는가? 원한은 곧음으로 갚고, 덕은 덕으로 갚는 것이 정당하다고 공자는 생각했다.(或曰, “以德報怨, 何如?” 子曰, “何以報德? 以直報怨, 以德報德)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과는 달리, 공자님은 그들이 잘못한 것은 곧음으로 갚아 정의를 바로세우라는 날카로운 말씀을 하신 것이다. 고 김대중 대통령이 헌정질서를 어지럽힌 자들을 사면했다. 그리고 그 적폐세력은 사관학교 사열을 받았으며, 회고록에서 자신이 희생자라고 말하고 있다. 원수를 덕으로 갚은 결과이다. 개과천선할 의지도 능력도 없는 자들을 사랑으로 감싸안으면 그들은 자신에게 다시 힘이 생긴다면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한다. 현재! 적폐세력을 제대로 척결하지 않는다면 그 세력은 다시 일어설 것이다. 그리고 다시 우리의 미래를 짓밟을 것이다.

  공자님, 소인이 모시던 주군이 죽었습니다. 따라 죽어야할까요? 아니면 소인의 주군을 죽인 그분에게 의탁해서 능력을 펼칠까요? 이 질문에 공자는 어찌 대답할까? 대의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려라! 너는 죽지만 나의 의기는 많은 이의 가슴에 길이 빛날 것이다. 라는 말을 공자가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공자는 주군과 같이 죽지 않고 주군을 죽인 환공밑에서 재상을 한 관중을 높이 평가한다. 관중이 없었으면, 그는 오랑캐의 풍속을 따르며 살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보통사람들이 조그마한 신의를 위해 자신의 결백을 입증코자 작은 도랑가에서 스스로 목매달아 죽어도 아무도 거들떠 보지도 아니한다며 관중을 높이 평가한다.(子貢曰, 管仲非仁者與? 桓公殺公子糾, 不能死, 又相之.” 子曰, “管仲相桓公, 霸諸侯, 一匡天下, 民到于今受其賜. 微管仲, 吾其被髮左衽矣. 豈若匹夫匹婦之爲諒也, 自經於溝瀆而莫之知也?) 무조건 절개만을 강조하는 조선의 교조적인 유학자들의 생각과는 다른 공자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또한 연합군에 항복하기 보다는 옥같이 부서지겠다며 반자이를 외치며 돌격을 하는 일본군과도 비교된다. 공자는 결코 목숨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다. 진정! 용기있는 사람은 목숨을 중히여긴다. 한신처럼 대의를 위해서 지금의 치욕을 참을 수 있는자! 그가 바로 참다운 군자인 것이다.

  공자님. 선불교의 참선법을 아시나요? 고요히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수행법입니다. 공자님, 참선을 통해서 진정한 깨달음의 경지에 올라가 보시지요? 라는 질문에 공자는 어떻게 대답할까? 공자는 참선보다는 공부를 더 좋아했다. 하루종일 밥도 먹지않고 잠도자지 않고 생각만 해보았더니 별로 유익하지 못했다. 역시 배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子曰 吾嘗終日不食 終夜不寢 以思 無益  不如學也)고했다. 만약 공자가 불교를 접했다면 선종보다는 교종에 호감을 갖았을 것이다.

 

3. 도올! 송유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다.

"四體不勤 五穀不分 孰爲夫子" 이글을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사지를 움직여 부지런히 일하지도 않고, 오곡도 분별치 못하면서 (당신은) 누구를 가리켜 스승이라하는냐'라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반면 도올은 '팔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이지도 않고 오곡도 제대로 분간 못하는 그 자를, 누가 선생이라고 일컫는가?'라고 번역한다. 무슨 차이일까? 노인이 비난하는 자를 자로로 볼 것인가? 공자로 볼것인가? 라는 차이가 있다. 전통적인 송나라 유학자들은 공자를 높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자로를 비판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도올은 이러한 전통적 해석에 얽매이지 않는다. 이것이 도올 해석의 강점이다. 공자마져도 동시대의 사람으로 여기며 그를 냉정하게 대하는 그의 해석이 빛나는 부분이다.

  도올은 자공이 스승 공자를 지나치게 숭배하는 것도 경계한다. 공자가 나라를 다스린다면 살아계실 때 그 나라의 백성들이 영예롭게 생각하고, 돌아가시면 그 나라의 백성들이 애통해 할 것이니, 누가 어떻게 부자의 경지에 미칠 수 있단 말이냐(其生也榮, 其死也哀, 如之何其可及也)라는 자공의 말에 '우리는 공자를 과도하게 정치화시키는 해석을 가할 필요는 없다.'고 일침을 가한다. 공자를 사랑하지만, 공자 옆에서 한걸음 물러나서 그를 냉정히 볼 수 있는 눈을 도올은 가지고 있다. 이러한 냉정함을 가질 때만이 우리는 공자를 뛰어 넘을 수 있다. '아직도 나의 제자로 남아있는 자보다 더 나뿐 제자는 없다.'라고 말한 니체의 호통소리를 조선의 유학자들과 지금 공자를 사랑하는 자들은 되새겨야할 것이다. 

 

4. 도올! 해석에 이의있습니다.!!

  도올의 해석이 매양 공감이 가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도올의 해석에 공감하지 못하는 부분도 많다. 몇가지 예를 들어보자.

  공자가 '가장 뛰어난 현자는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을 피해버리고, 그다음으로 현명한 사람은 나라를 피하고, 그 다음으로 현명한 사람은 색을 피하고, 그 다음으로 현명한 사람은 말을 피한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도올은 "별로 중요한 말이 아니다."라며 공자의 이 말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애써 외면하고 있다. 도올은 공자는 은일지사가 아니라 현실 개혁적인 사람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그러니 가장 뛰어난 현자는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을 피한다는 말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도올이 지적했듯이 공자는 째즈 아티스트이다. 공자는 어떠한 절대적인 원칙에 얽매이지 않는다. 째즈 아티스트 처럼!! 아마도, 이 말을 하던 공자의 상황은, 가장 더러운 세상을 만났을 때 군자의 처세방법을 말했을 것이다.  

  "上好禮 則民易使也 "라는 문장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도올은 '윗 사람이 예를 좋아하면, 예에 의하여 교화된 백성은 부리기가 쉽다.'라고 해석했다. 유가의 리더십의 원칙은 솔선수범이라고 지적하고, 현대민주정에도 항상 들어맞는 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라는 것은 수직적 질서이다. 신분과 존귀, 서열을 강조하는 것이 바로 '예'이다. '예'는 불평등을 전제로한 통치 이데올로기일 뿐인데, 윗사람이 예를 강조한다는 것은 자신이 군림하기 위한 질서를 더욱 공고히 한다는 말이된다. 이것이 어찌 현대민주정치에도 항상 들어맞을 수 있단 말인가?

  원대한 이상을 실현하는데 소도에 이착함이 장애가 될까 두렵다. 그러므로 군자는 소도에는 집착하지 않는다(子夏曰 雖小道 必有可觀者焉致遠恐泥. 是以君子不爲也).라는 자하의 말에 동의하는가? 날카로운 비판을 하던 도올이 이 문장에 대한 비판을 하지 않아 나를 당황스럽게 했다. 여기서 소도는 '농사, 원예, 의술, 점복'과 같은 지엽적 기술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엽적 기술도 대학을 하는데 도움이 된다. 조그만 미물에게서 대우주의 진리를 보는 것은 보는자의 눈에 달려있다. 그만한 그릇이 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큰 진리를 보아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

 

  논어!! 이 책의 내용 중에서 '아버지의 신하와 정치방식을 바꾸지 않는' 것을 강조하는 내용을 비롯해서 21세기에 공감이 되지 않는 내용도 많이있다. 그 뿐아니라, 도올의 해석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인터넷'논어정석풀이'를 참조하기도했다. 상론에서는 '주희 집주'를 상세히 풀이해주어서 이해를 쉽게 해주었으나, 하론에서는 이를 생략하여, 한자실력이 일천한 나로서는 무척이나 읽기 불편했다. 그럼에도 3년의 시간 동안 논어를 놓지 않으며 깨달음을 얻고자 했다. 이러한 부단한 과정이 무척이나 힘들었다.  '도올 논어 한글역주'를 탈고하면서 도올은 "공부하고 싶다. 정말 공부하고 싶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꿈이여"라고 절규하고 있다. 학문적 성취를 많이한 도올이 다시 공부하고 싶다고 부르짖는 모습을 떠올리며 진정한 학자의 못습은 과연 어떠해야하는지를 다시한번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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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30 05: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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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30 05: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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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30 06: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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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30 06: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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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30 06: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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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30 06: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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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18-01-31 17: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긴 서평 매우 잘 읽었습니다. 사실 제가 지식과 공부가 짧고 아직 20대라 논어나 제자백가 사상을 낡은 것으로만 생각하던 인식이 알게모르게 존재했었는데 이 서평을 읽고나니 관점이 달라지네요. 무엇보다 현재의 상황에 맞춰 설명한 점은 매우 놀랍습니다. 저희 아버지가 왜 논어나 제자백가 사상을 자주 얘기하는지 나름 이해가 됩니다. 무튼 좋은 서평 감사합니다.

강나루 2018-01-31 17:22   좋아요 1 | URL
고전은 오늘을 비출 수 있는 거울이어야 가치있다고 생각합니다 님의 따뜻한말 감사합니다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 교양 교양인 시리즈 4
박석무 지음 / 한길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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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 정약용은 높은 산과 같고, 박지원은 깊은 물과 같다.' 어느 학자의 말이다.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영정조 시대를 살아간 두 인물!! 그러나 서로 만나보지도 못했지만, 서로 정치적 입지가 달랐지만, 우리에게 영정조 시대의 커다란 빛으로 기억되고 있다. 찬란한 두 빛중에서 나는 다산에게 끌린다. 해학이 넘치는 박지원의 글보다는, 시대의 아픔을 고뇌하며 언젠가 정조와 같은 현군이 나타나면 개혁의 자료로 쓸 수 있는 책을 저술하는데 심혈을 기울인 다산의 모습이 나의 가슴이 더 다가온다. 다산을 알면 알 수록 다산을 다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뿐, 다산을 알았다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이덕일의 책과 정민 교수의 책도에서 무척이나 감동을 받았지만, 다산에 대한 갈증은 더욱 커졌다. 그래서 다산학의 대가로 불리는 박석무님의 책을 빼들었다.

 

1. 다시는 아들 낳았다 기뻐하지 않겠네요.

  농경사회에서 아들은 커다란 재산이다. 커다란 노동력을 얻었으며, 부모의 노후를 책임지는 노후대책이기도 하다. 그런데, 유배가는 길목에서 다산은 부모에게 시를 짓는다. 그 시에, '다시는 아들 낳았다 기뻐하지 않겠네요.'라는 글귀가 있다. 10달을 배속에서 키워 장성 시켰는데, 그 아들들이 줄줄이 유배를 가고, 혹은 천주교를 믿는다는 죄목으로 죽음의 길에 들어선다. 낳은 기쁨보다 아들을 먼저 떠나보내는 아픔이 더 크기에, 다시는 아들 낳았다고 기뻐하지 않고 이제는 슬퍼할 것이라는 말이다. 노론 벽파의 정치적 보복과 공서파의 공격으로 수많은 남인 신서파가 죽음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다산은 천주교를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노론과 공서파는 다산을 죽이려했다. 황사영 백서 사건이 일어나자, 아무런 관련이 없는 다산을 다시 한번 불러들여 국문한다. 특히 정승 서용보는 다죽여도 다산을 죽이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다며 다산을 죽이려한다. 다산의 암행어사 시절, 서용보의 비행을 왕에게 보고한 것을 그는 잊지 않고 처절히 보복한다. 피의 정치보복 앞에서 다산의 가문은 풍비박산 된다. 이를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은 어떠했겠는가? 죽어서도 편히 누워있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다산은 천주교를 믿은 것이 자신을 죽음의 문턱으로 이끌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다산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버이와 같은 정조가 살아 있을 때, 반성문을 쓴다. 이른바 '자명소'이다. 자신이 한때 새로운 학문을 배우려는 호기심에서 천주교를 믿었으나, 제사를 배척하는 천주교의 교리를 알고 나서는 이를 멀리했다는 내용의 반성문을 담은 상소문이다. 노론의 영수 심환지 조차도 글이 아름답다고 칭찬할 정도였다. 그가 공개 반성문을 써야할 정도로 다산은 삶의 끈을 놓치 않으려 처절히 노력하고 있었다. 그도 아마 신유박해의 '기미'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정조라는 어버이 군주가 사라진다면, 죽음의 먹구름이 맹렬히 그에게 다가올 것이라는 것을..... 

 

2. 나는 저술로 평가받으련다.

  유배지에서 그는 몰락한 가문을 걱정하고, 흑산도로 유배된 형을 그리워했다. 불행은 혼자오지 않았다. 6남 3녀를 낳았지만, 2남 1여만 살아남았다. 유배지에서 두 아이를 잃은 다산은 얼마나 괴로웠을까? 유배지에서 자식을 잃은 다산은 자신의 상실감보다 아내의 건강을 더 걱정했다. 자신의 아들에게 어머니에게 효도할 것을 당부하는 편지는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이순신 장군이 자신의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기 전에, 어수선한 꿈을 꾼다. 그리고 아들의 죽음을 듣고 나서는 너무도 괴로워한다. 두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다산의 심정도 이순신 장군과 같지 않았을까?

  연이은 불행 속에서도 다산은 불굴의 의지를 불태운다. 유배지 장기에서 '촌병혹치', '이야슬', '기해방례변'을 저술하는 무서운 집중력을 보인다. 강진에서는 해남윤씨 처가의 도움으로 책을 빌려 볼 수 있었으나, 장기에서는 참고서적조차 구하기 힘들었을 텐데, 이러한 책들을 저술한 그의 집중력에 감탄을 한다. 그후, 유배지에서 500여권이라는 놀라운 저술 활동을 한다. 다산은 왜? 이리도 저술에 자신의 모든 열정을 쏟아 부었을까?

  그 해답은 다산의 편지에서 찾을 수 있다. '후세 사람들이 단지 사헌부의 계문과 옥안만 믿고 나를 평가할 것 아니냐' 라는 글귀에서, 다산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이며, 왜? 그가 그토록 저술활동에 매진했는지를 알 수 있다. 유럽인들이 신을 두려워 한다면, 동양인들은 역사를 무서워한다. 다산은 역사에 자신이 죄인으로 기록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자신을 죽이려는 벽파와 공서파의 기록만 보고, 자신을 못난 죄인으로 후세인들이 평가하는 것을 그는 두려워했다. 그는 사마천이 궁형의 치욕을 참고, '사기'를 저술했듯이, 500여권의 저술활동을 통해서 당당히 시대의 참다운 지식인으로 평가받고 싶었던 것이다. 아홉마리 소의 한가닥 털이기 보다는, 당당한 한마리의 소로, 닭들 속의 학으로 평가 받고 싶었던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서, 다산은 폐족이기에 더 큰 인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산은 그의 아들에게 쓴 편지에서 과거 공부만 하지 않고 참다운 학문을 할 수 있는 기회라고 말하면서, 학문에 정진하도록 당부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환경 탓을 한다. 나의 환경이 이렇기에, 부모를 잘못 만나서 자신은 이럴 수밖에 없다고.... 그러나 다산은 유배지에서 500여권의 저술을 남겼으며, 신영복 선생은 감옥에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초고에 해당되는 글들을 썼다. 그리고 이책의 저자 박석무는 감옥에서 다산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문재인은 친구 노무현의 죽음과 대선에서 박근혜에게 패하고 나서 더욱성숙했다. 시련이 그들을 강하게 만들었다. 인간이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기도 하지만, 강한 인간의 신념이 냉혹한 현실을 자신을 벼리는 숫돌로 만든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머루르는 곳마다 주인이 된다면, 그곳이 참다운 진리의 세계가 된다!!

 

3. 조선시다운 조선시를 짓겠다.

  이 책은 다른 다산 관련 서적과는 달리, 다산의 시가 많이 소개되어 있다. 탁월한 시인이로서의 다산의 모습을 이책을 통해서 마음껏 보았다. 또한 다산이 그린 그림도 수록되어있어, 다산을 조선의 다빈치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다산의 시는 다른 한시와는 달리, 아가, 납하 등의 우리의 토속어를 시어로 참음해서 사용하고 있다. 중국의 고사를 즐겨 사용해야 지식인이라는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는 조선의 선비들에 비해서 그는, 우리 조선의 산천과 사람들, 그리고 말에 관심을 갖고 그들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그들의 말을 차음해서 시를 지었다. 문학면에서도 엄청난 시도였다.

  한편, 아쉬움도 남는다. 첫째는 장기현 마현리에 다산과 관련된 일화가 제대로 전승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다산은 마현리 사람들의 말과 생활을 시로 읊조리며 그들을 잊지 않았는데, 그 지역 사람들은 노론의 거두 송시열의 일화는 전승하면서도 다산의 일화는 전승하고 있지 않다. 정확한 다산의 유배집터 조차도 모르는 현실이 서글플 뿐이다.

  둘째는 다산이 한글시조를 남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산의 외가 6대조인 고산 윤선도는 한글시조를 다수 남겼다. 그러나 나산은 그러하지 않았다. 그가 민중의 삶과 애환을 한글시조로 노래했다면, 다산이라는 산은 더욱 높이 솟았을 것이다. 못내 아쉬움이 남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왜? 고산 윤선도는 한글시조를 남겼는데, 다산은 남기지 않았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아마도, 정계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산천에 은거해 사는 사람과, 사회 개혁의 의지를 버리지 않고 언젠가는 정조와 같은 군주를 만나 민초들을 구제하겠다는 사람의 차이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정계에 다시 진출하기 위해서라도 양반의 글자인 한자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은 것은 아닐까? 나의 상상일 뿐이다.

 

4. 아쉬운 점, 그리고 잡다한 생각

  논개는 기생일까? 다산은 논개를 '의기' 즉, 의로운 기녀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학자들의 연구결과 논개는 기녀가 아니다. 평민 여성일뿐이다. 다산을 비롯한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논개를 기녀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를 '의기'로 묘사했다. 이것은 시대의 한계이고 다산의 한계이다. 이러한 한계를 저자가 지적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책을 읽는 내내 '다산선생 지식경영법'이라는  책과 비교가 되었다. 정민 교수는 '다산선생 지식경영법'이라는 책에서 전염병이 번지는 모습을 보고 중국황제의 죽음을 예측한 다산의 '기미' 관찰법을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단 5줄로 서술을 마무리지었다. 서술 목적에 따라서, 보는 관점에 따라서 같은 주제의 책도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사람은 보이는데로 보지 않고, 보고 싶은 것만을 본다.

  다산에 대한 연구는 남한보다는 북한에서 먼저 활발히 시작됐다는 사실을 아는가? 다산의 매력을 북이 먼저 알았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다산이 저술한 500여권의 책은 이 시대에도 많은 지혜를 주고 있다. 다산에 대한 연구가 남북한 모두에게서 활발히 진행되고, 더 나아가서 남북한이 함께 다산연구를 하는 그날을 기대해본다.

 

  초등학교 시절에 읽은 위인전을 제외하면, 다산과 관련된 책을 읽는 것은 이번에 3번째이다. 매번 책을 읽을 때, 다산은 나에게 많은 감동을 선사하고, 많은 깨우침을 주었다. 그리고 나 자신이 얼마나 다산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것이 많은지를 느끼게 해주었다. 다산에 대한 더 좋은 연구서가 나온다면 다시한번 다산에 오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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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18-01-30 01: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의외네요. 남한보다 북한에서 먼저 다산을 연구했을 줄이야. 무튼 남북공동연구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강나루 2018-01-30 05:34   좋아요 0 | URL
여전론 처럼 다산의 혁신적인 개혁론의 매력 때문에 연구를 시작하지 않았나 생각해요
 
축복 - 그러나 다시 기적처럼 오는 것
정애리 지음 / 포북(for book)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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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여행!! 책과 함께 떠나고 싶었다. 오랜만에 가족과 여행을 떠나면서 나는 다른 사람이 챙기지 않는 나만의 친구하나를 챙려들었다. 바로 책이다. 팟캐스트 '빨간약 퍼스트 클래스'의 김경집 교수의 제안데로, 여행을 하면서 틈틈이 책을 읽고 싶었다. 무겁지 않으면서도 여행과 함께할 수 있는 책을 골랐다. 물론, 여행지가 제주도이니, 제주도의 역사와 관련된 책이면 더 없이 좋겠지만, 가족과 가벼운 여행이니 만큼,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을 고르다보니, 정애리의 '축복'을 꺼내들었다. 여행의 틈틈이 읽는 책의 맛을 한번 보자.

 

1. 여행 첫날, 책장을 넘기며 출발!!

  정애리는 나의 초등학교 시절, 주말드라마 '사랑과 진실' 속의 여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물론, 그후에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지만,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 나로서는 초등학교 시절의 정애리의 모습이 정지된 동영상처럼 나의 기억속에 남아있다. 연기자로서, 한아이의 어머니로서, 한남자의 아내로서 바쁜 삶을 살고 있는 그녀가 틈틈이 생활속의 여러 장면들을 사진과 글로 남겼다. 이들 책장을 넘기며 나의 여행의 장면들을 함께 추억의 책속에 기억하자.

  2018년 1월 8일 청주공항에서 제주행 비행기를 기다렸다. 이런, 비가오는 날씨에 항공기 연결관계로 30분정도 비행기 출발이 지연된단다. 비행기 출발지연은 한편으로는 아쉬운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책을 읽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책장을 넘기니 '단비 내리던 날'이라는 글이 눈에 들어왔다. 단비가 내리자, 정애리 작가는 환호성을 터트린다. 지금 내리는 겨울비도 단비일까? 지금은 단비가 아니겠지만, 이 비가 올해 농사에 쓰일물이 되겠기에, 멀리보면 단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비가 세상의 때를 씼고, 생명의 물줄기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해본다.

  드디어 비행기에 탑승했다. 출발을 기다리던 사이 책장을 살펴봤다. '닭둘기'가 눈에 들어왔다. 평화의 상징이던 비둘기가, 이제는 전염병을 옮기는 새가되어 우리에게 골치덩이가 되었다. 닭이된 비둘기! 닭처럼 된 비둘기! 별다른 노력 없이 먹이를 얻으려는 비둘기는 피둥피둥 살이 찐다. 서슴없이 더러운 쓰레기통을 뒤지는 모습을 보면서, 정애리는 닭둘기 처럼 되지 말자고 되뇌인다. 이 시대에는 많은 달둘기가 있다. 대한민국은 한때, 닭둘기를 많이들 좋아했고, 그들이 세상을 닭둘기의 놀이터를 만드는데 허수아비처럼 방관만 했다. 닭둘기가 싸놓은 똥들을 지금 우리가 치우면서 다시는 닭둘기가 되지도 말고, 닭둘기가 우리에게 굴림하지 않도록 해야한다고 말한다. 503호는 잘있을까?

  제주공항에 들러, 렌터카를 빌려 숙소로 갔다. 제주도 여행을 유행가 가사처럼 외치고 다녔던 딸들이 무척이나 좋아한다. 숙소 근처에서 먹은 제주의 음식은 정말 일품이었다. 입이 짧다는 말을 자주 들었던 우리 딸들이 밥한그릇을 뚝딱해치웠다.

 

2. 여행 둘째날, 비바람 뒤에 오는 것

  제주도 2일차! 강풍주의보가 핸드폰으로 전송되었다. 올해 최고란다. 제주도를 3다도라 했던가! 돌많고 바람 많고, 여자가 많은 곳! 과연 제주도는 바람이 매섭도록 많은 섬이었다. 아침을 먹고, 책장을 폈다. 가족들에 비해서 나의 식사 속도가 빠르다보니, 아침 식사시간은 나의 독서시간이기도 했다. 

  '비바람 뒤에 오는 것'이라는 글이 눈에 들어왔다. 태풍이 지나간 뒤에 고요가 밀려오듯, 바람 잦은 뒤에는 반드시 열매 맺을 거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정애리는 말하고 있다. 그래, 이 바람이 지나가면 평온이 올까? 이번 여행의 안전을 기도하며 제주도 여행의 일정을 시작했다.  

  제주도 여행지를 고를 때, 역사 유적지를 중심으로 여행을 짜고 싶었다. 그러나, 우리집안의 권력자께서 이를 단칼에 거절했다. 그래서, 하루에 한곳은 역사유적지를 넣자고 타협했다. 오늘 그래서 제주 4.3 평화 기념관을 가게 되었다. 얼마나 가고 싶은 곳이었던가? 4.3의 비극은 아직도 제주인의 가슴속에 남아있다. 영화 '지슬'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4.3을 알게 되었다. 나는 '여명의 눈동자'라는 드라마를 통해서 4.3을 처음 알게 되었고,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를 통해서 사삼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 생생하게 4.3을 나의 눈앞에서 보여주고 있는 4.3평화기념관을 관람하며, 우리가족에게 4.3을 되도록 쉽게 설명하려 노력했다. 4.3 평화기념관을 관람을 마치고 아내는 무척이나 충격을 받은 듯했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지 않은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느끼는 충격은 우리의 삶을 지배하며 오늘을 고민하며 하루하루를 살도록한다. 

  다음 코스는 아쿠아 플라리넷이다. 서울에서, 대전에서, 부산에서 아쿠아리움을 관람했던 나에게는 별로 새롭지 않은 곳이다. 그러나 우리 딸들은 너무도 즐거운 곳이었다. 물개쑈를 보면서 나는 졸음이 쏟아졌다. 아빠는 어째서 잠을 잘 수 있느냐는 딸들의 핀잔이 들려왔다. '아빠는 재미있는 것 싫어해요?' 라는 막내의 말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플라리넷에서 점심을 먹고, 김녕미로공원에 갔다. 미로속을 헤매며 길을 찾았고, 종을 울렸다. 미로공원의 가게에 들렀다. 일년후의 자신에게 보내는 엽서를 보내겠다고 딸들은 부산을 떨었고, 나는 주인 아주머니와 담소를 나눴다. 제주도의 바람이 평소에도 이런가요? 라는 질문에 대해서, 올해 최고로 강한 바람이라고 아주머니는 대답해주었다. 충청도 출신이신 아주머니는, 남편을 따라 제주도에 왔고, 제주도의 생활이 좋다 하신다.

  몰아치는 바람을 뚫고 숙소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어제 먹었던 맛을 잊지 못해서 또 들른 것이다.

 

3. 여행 3일차, 멈추지 않는 것이 없기를 바라며...

  새벽부터 눈빨이 휘날리고 있다. 아침을 먹으며 창밖을 근심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창밖의 눈빨은 맹렬한 기세로 하늘에서 땅으로 내리치며 땅에 부딪쳤다. 오랜만에 온 제주 여행인데, 맹렬한 눈빨때문에 여행을 망칠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책장을 펼치자 '멈추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오늘 비바람이 분다고 하여 지금 내 시간이 힘들다고 하여 움츠러들지는 마세요. 조금만 지나면 어느새 비는 그치고 지금의 고단함이 추억이 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테니까요.'라는 정애리의 글을 읽으며, 무슨 분노가 그리도 많은지 맹렬히 제주도 곳곳으로 내리치는 눈빨도 멈출까? 라는 생각을 했다.                                               

  3일차는 항몽 유적지를 먼저 들르기로 했다. 20분이면 충분히 관람할 수 있다고 우리집 권력자를 설득했다. 박정희 정권에서 제대로 된 발굴 조사도 하지 않고 복원을 해놓는 바람에 많은 사실들을 땅속에 묻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아픔을 간직한 항몽 유적지!! 고려인의 자주성을 간직한 마지막 대몽항전이었다고 평가할 것인가? 권력쟁탈전에서 패배한 자들의 발악으로 볼 것인가?를 두고 논쟁이 있기는 했지만, 그들이 외세에 맞서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던 역사적 사실만은 높이 평가하고 싶어, 항몽유적지 앞에서 묵념을 했다. 그들의 의도는 우리가 추측할 수밖에 없으나, 그들의 숭고한 행동은 우리가 영원히 기억할 만했다.

  다음 코스인 유리의 성으로 출발했다. 그런데, 눈빨이 맹렬히 휘날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고가 났는지, 정체가 계속되었다. 그래서 재빨리 근처의 '그리스 신화 박물관'으로 경로를 바꾸었다. 그리스 로마신화를 읽고, 연수도 들으면서 제법 상식을 키웠는데, 신들의 이름은 언제나 했갈렸다. 제법 재미있는 박물과 답사를 마치고 차에 와서 시동을 켜고 가족을 기다렸는데, 앗뿔싸! 사건이 터졌다. 우리 호기심 박사님께서 그리스 신화 박물관 분수에서 놀다가 물에 빠졌단다. 재빨리 차에 태워, 젖은 바지를 벗도록 했다. 아내의 내복을 입도록 하고,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그리스 신화 박물관 기념품 매점에 가서 웃옷 한벌을 샀다. 어른 옷을 입으니, 원피스를 입은 것 처럼 보였다. '유리의 성' 박물과 앞의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식당주인의 배려로 슬리퍼를 빌려 신고, 신발에 휴지를 넣어 물기를 뺐다. 밥은 맛이었지만, 밥맛을 즐길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다. 아내의 양말을 신기고, 양말안에 휴지를 넣었다. 식당주인에게 비닐봉지 2개를 얻어 비닐봉지를 신고 젖은 털부츠를 신도록 했다. 호기심 박사님은 이제  춥지 않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도 유리의 성에 가고 싶다고 날리를 부린다. 본인의 선택을 존중해서 유리의 성을 향했다. 다들 즐거워했지만, 난 추운 날씨 때문에 관람이 빨리 끝나기를 바랬다.

  4시정도에 관람을 마치고 또한곳을 찾을 수도 있겠으나, 날씨가 심상치 않고, 호기심 박사님의 상태로 봐서 더 이상 무리를 할 수 없는 상황이라, 숙소로 귀환을 결정했다. 그런데, 걱정하던 일이 벌어졌다. 눈빨이 맹렬히 차창을 때기 시작했다. 바닥에 내린 눈빨이 앞차를 놓아주지 않아, 트럭이 비끄러졌다. 자동차 체인도 하지 않고 거북이 걸음으로 운전을 했는데, 커다란 정체가 연속되었다. 중앙선을 넘어온 사고 차량을 경찰이 조사하는 장면도 보였다. 저녁을 먹으며 오늘 사고없이 무사히 귀환한 것을 감사했다.  

  다시 책장을 넘겼다. '빛을 보라고 어둠이 있는 거예요'라는 문장이 눈에 띄었다. 빛만 있다면 빛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빛을 잘보기 위해서는 어둠이 있어야한다. 마치 환한 도시에서는 별빛이 잘 보이지 않지만, 가로등 조차 없는 시골에서는 밤하늘의 별들이 너무도 총총히 빛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보통 빛은 희망을 상징하고, 어둠은 절망을 상징한다. 어둠속에서 빛을 보는 것이 희망이다. 항상 '희망'이라는 북극성을 잃지 않는 것이 어둠을 헤치고 나가는 방법일 것이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눈길을 헤치고 숙소에 도착한 것도 희망이라는 빛을 잃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제주에서의 하루가 저물어 간다.

 

4. 여행 4일차. 소금으로 살 것을 다짐해요.

  텔레비젼이 날리가 났다. 어제부터 중산간 도로가 통제되었으며, 일부 도로에서는 스노우 체인을 한 트럭만 운행을 허용한단다. 어렵게 제주도에 온가족이 왔는데 이 여행을 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엉금 엉금 해안도로를 타고 가면 오늘의 하일라이트인 잠수함 체험장에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 혹시 사고라도 나면 어찌하나?하는 근심도 마음 한켠에서 스멀스멀 올라왔다. 복잡한 마음에 책을 펼쳤다. '욕심 때문에'라는 글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비워 두세요. 욕심만 내버려도 당신이 훌씬 아름다워질 거에요.'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욕심을 버리자! 여행이라는 욕심을 비우자. 그럼 세상이 더 아름다워질 것이다. 그래, 예정된 여행지를 버리고, 시내로 방향을 틀었다.

   제주 민속박물관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허름한 곳이었다. 그러나, 전국대회 대상을 받은 한지 공예작품을 비롯해서, 많은 유물들을 볼 수 있었으며, 박물관장님의 가야금 병창을 들을 수 있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박물관장님은 영화 '지슬'에서 아버지 역을 맡기도 했단다. 나에게 4.3 평화기념관에 갔다 왔느냐고 묻고, 1층의 도서관도 열어 보여주었다. 내부의 인테리어만 잘하면 꾀 알찬 장소가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받은 도서관이었다.

  제주에 와서 반드시 먹어야할 것이 있다고 우리집 권력자께서 주장하시어, 맛집을 찾아 헤맸다. 회맛이 육지에서 먹던 것과 별반 다르지도 않았는데, 권력자께서는 맛있다고 연신 찬탄을 한다. 딸들은 맛있다고 몇점 먹더니 이내 먹지 않았고, 나는 굴복음밥을 시켜 딸들에게 나눠주었다. 딸들과 나는 회보다는 굴복음밥이 더 맛있었다. 그러나 우리 권력자님께서는 회가 맛있다며, 회를 다드시고는 매운탕도 먹어야하는데 배불러서 못먹는다고 한탄을 하신다. 책장을 펴들었다. '가짜 말고 진짜'라는 글이 눈에 들어왔다. '소금으로 살기를 다짐해요. 자기를 다 버리고 녹아내려야 맛을 내는 소금처럼 살다 가기를 소망합니다.'라는 문장이 인상적이다. 그래, 소금처럼, 자신이 바다물속에 녹아들어가 바다를 썩지 않게 하듯이,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녹아들어가 가족에게 평화를 주어야겠다. 권력자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맛있다고 맞장구를 쳐줘야겠다.

  점심을 먹고나니 눈빨이 너무도 맹렬히 대지를 향해 치닫았다. 숙소로 가기로 결정하고 출발했으나, 역사유적지를 보지 못하고 가는 것이 너무도 아쉬웠다. 삼성혈이나 관덕정 정도는 보아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관덕정을 검색하니, 바로 코앞이었다. 권력자님의 눈치를 보며, 가자고 했다. 겨우 관덕정에 들러 제주도의 통치가 행해지던 그곳에서 과거의 제주를 만났다. 눈보라가 치는 관덕정과 제주목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그러나 너무도 추웠다.

  숙소에 와서 뉴스를 들으니, 비행기가 연착되고, 4천여명의 승객들이 발이 묶였단다. 내일 우리는 출발할 수 있을까?

 

5. 5일차, 여행을 마치며,

  아침부터 뉴스를 살폈다. 최대규모의 사태가 재발할 수 있다며, 온통 제주 공항의 모습으로 뉴스가 도배되었다. 빨리 아침을 먹고, 공항으로가서 사태를 살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비행기가 뜨지 않으면 이참에 일주일 더 제주도에 있자며, 권력자님과 딸들은 기뻐하는 아이러니컬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아침을 먹고 책을 폈다. '살은 셀프입니다.'라는 글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물만 셀프가 아니다. 삶도 셀프이다. 오늘 여행의 이 난관을 헤처나갈 사람도 나다. 셀프다.

 급히 퇴실을 하고, 자동차의 눈을 치웠다. 스노우 체인도 하지 않고 렌터카를 반납하러 갔더니, 렌터카 직원이 놀란다. 공항에 도착하니, 비행기가 지연되기는 했어도, 오늘 출발한단다. 간신히 이륙해서, 청주공항에 도착하니, 앗뿔싸!! 공항 주차장에 주차시켰던 차가 방전되었다. 보험회사를 불렀으나, 감감무소식!! 옆차는 벌써 보험회사가 왔는데, 싸다고 가입했던 보험사가 서비스도 역시 싼 값을 하나보다. 그래도 옆차의 보험회사 분들이 마음이 좋아서, 나에게 무료로 시동을 걸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주었다. 그래서 세상은 살만한가 보다.

 

  여행은 이렇게 마쳤다. 정애리도 이책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있다. '전 세계, 수백 명의 내 자식들다 불러 모아 놓고 꿈결 같은 환갑잔치 할 거예요' 라는 말에는 '아름다운 여인, 정애리'의 모든 것이 녹아있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라는 말을 실처하면서 열심히 사는 정애리! 그녀는 누구에게 그토록 많은 사랑을 받았기에, 이렇게 아낌없이 사랑을 주는 것일까? 사랑을 줄 수있기에 그녀는 축복받은 사람일 수 있는 것이다. 그래, 행복한 제주의 여행을 '축복'과 함께한 것도 정말 축복받은 일이다. 우리 모두 '축복'을 받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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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1-13 12: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행이 축복으로 시작해서 축복으로 마무리되었군요. 제주도를 무사히 탈출하셔서 다행입니다. ^^

강나루 2018-01-13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제주에서 노숙할뻔 했어요^&^
이것도 추억이 되네요^&^
 
교양으로 읽는 뇌과학
이케가야 유지 지음, 이규원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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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아들 부시'가 대통령이 되고 잘한 것이 있다면, 뇌과학에 많은 투자를 했다는 점이다. ADHD알고 있는 부시는 그의 부인과 참모들이 있기에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미국의 대통령으로 재임할 수 있었다. 그도 아마 자신에게 어떠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ADHD가 보이는 충동적이고 과잉행동적인 모습이 아마도 뇌 과학을 발전시키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그가 갖게 하지 않았을까?라는 상상을 해본다. 부시행정부 시기 연구가 시작되어, 그로부터 10년후부터 뇌과학의 성과물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교육학과 심리학, 그리고 일반 사람들의 대화에서도 뇌과학적 지식은 첨단을 걷는 세련된 지식이 되었다. 연수 프로그램을 통해서 뇌과학을 접하기도 했지만, 이제 책을 통해서 깊이 있는 뇌과학 지식을 얻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뇌과학자가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 내용이라면 나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라는 확신을 갖고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1. 유발하라리의 '호모 데우스'의 흔적

  유발하라리는 그의 저서 '호모 데우스'에서 인간이 인간으로서 고귀할 수 있는 '의식'과 '자유의지'에 대해서 부정될 수도 있다는 내용의 서술을 했다. 현대과학의 발전된 최신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는가?라는 도발적인 물음은 나를 당황하게 했다. 선명하게 기억되는 유발 하라리의 '인간의 자유 의지'에 대한 회의적인 글은, 과학의 발전이 때로는 인간의 존엄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할 수 있다는 공포감을 심어주었다.

  이 책에도 '호모 데우스'에서 제기했던 질문을 우리에게 다시 던진다. 전기 자극을 통해서 쥐를 무선으로 마음데로 움직인다. 책찍과 당근으로 쥐를 유인한 것이이다. 단지 전기자극으로 쥐를 움직인다면, 쥐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 쥐의 자유의지마져도 전기자극으로 통제할 수 있다면, 그 결과는 인간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는가? 쾌락을 주는 전기자극을 이겨낼 수 있는 인간이 있을까? 만약 있다면,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럼, 우리의 뇌는 자유의지에 따라서 생각하고 몸을 움직일까? 실험결과는 충격적이다. 운동전령이 움직이고 난 이후, 1초후에 '움직이자'라는 의식이 나타난다. 자유의지는 잠재의식의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의 세계에 지배받는다고 말했듯이, 어쩌면 무의식이 '운동전령'을 움직이고, 그에 따라서 의식의 세계의 자아가 스스로의 행동을 주체적이라 하면서 행동하는 것은 아닐까?

  여기에서 한발자국 더 나가보자. 상대방의 의지를 데이터화 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 만약 특정 사람이, 인간의 의지를 눈으로 볼 수 있게 된다면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변할까? 상대방의 기분을 데이타를 통해서 알 수 있다면, 그 시대는 행복한 시기일까? 만약 인공지능이나 사업주가 데이터화된 사람들의 마음을 눈으로 본다면, 이 세상은 유토피아가 될까? 디스토피아가 될까?

  유발하라리와 이책의 저자, 이케가야 유지가 말하고 있듯이, 인간의 진화는 이제 멈추었다. 그대신 인류는 '환경'을 진화시킨다. 의족에서 인터넷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발명품들은 환경을 진화시키는 전형적인 예이다. 유발 하라리가 말했듯이, 환경을 진화시킨다. 그리고 마침내 인간은 신이되겠지. 그럼, 극대화된 환경의 진화, 그리고 호모 데우스가 된 인류, 그들에게 행복이 찾아올까? 유발 하라리의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질문이 다시 샘솟는다.  

 

2. 뇌과학에서 만나는 동양고전

  심오한 각각의 학문의 결국은 한곳에서 만난다는 말이있다. 어느 학문이나 심오하게 깊이 사유하고 연구하면 그 진리는 한곳에서 만난다는 이말을 뇌과학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가. 당신은 같은 물에 두번 발을 담글 수 있을까?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eracleitos, BC 544?--484?) "당신은 같은 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을 했다.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자연은 시시각각 생셩 변화한다. 물은 흐르고, 물도 변화하니, 방금 전에 내가 담갔던 물이 바로 그 물일 수는 없다는 말이다. 이말을 뇌과학 책을 읽으면서 다시 떠올리게 될 줄은 몰랐다. 무슨 말일까?

  인간의 기억은 완벽해선 안된다. 인간의 기억이 완벽하지 않다가 아니라, 완벽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하등동물일 수록 오히려 기억이 완벽한데 반해서 인간은 기억이 완벽해서는 안된다니 무슨 말일까? 인간은 기억이 모호하기 때문에 다양한 기억들 중에서 공통요소를 추출해서 기억한다. 그러하기에 더 많은 사실을 보다 효율적으로 기억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애매한 기억 때문에 글자를 읽고, 어제만난 사람을 오늘 알아 볼 수 있다. 우리가 쓰는 글자도 글자 폰트 및 서체에 따라, 각자의 개성에 따라 수 많은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글자를 읽는다. 그것은 우리 기억이 애매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어제 만난 사람은 오늘 머리모양이 변화했고, 옷을 갈아입었고, 어제보다 늙었지만, 우리는 어제 만난 사람을 애매하게 기억하고 어제의 그와 오늘의 그의 공통요소를 파악해서 오늘의 그를 어제의 그로 알아 볼 수 있는 것이다. 만물은 변화한다. 변화하는 만물을 모두 완벽하게 기억하는 것은 오히려 비효율적이다. 인간의 애매한 기억은 이러한 만물의 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효율성을 주었다. 도덕경 11장에 "

바퀴살이 하나의 바퀴통에 모여 있는데, 그 바퀴통 속의 비어 있음으로 인해 쓸모 있는 것이요, 그릇도 비어있음으로 쓸모가 있는 것이다. 집을 질 때에도 빈 공간이 있어 방안의 쓰임새가 생기는 것이니 쓸모 있음은 비어 있음에서 오는 것이다.(三十輻共一轂,  當其無,  有車之用. 埏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 鑿戶牖以爲室,  當其無,  有室之用. 故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라했다. 우리의 뇌와 눈은 그 비어있음으로 세상을 보다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나. 일체 유심조, 만물은 뇌에서 만든 것!

 일체유심조라는  ‘만일 사람들이 삼세일체불을 알려고 한다면 마땅히 법계의 본성이 모두가 마음의 짓는 바에 달려있음을 보라’는 화엄경에서 나온 말이다. 깃발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요. 깃발이 바람을 일으키는 것도 아니다. 나의 마음이 깃발을 흔들리게 하는 것이다. 불교의 이 화두가 뇌과학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우리 인간의 신체는 완벽하지 않다. 우리눈은 100만 화소정도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러나 우리는 선명하게 세상을 바라본다. 왜? 그럴 수 있을까? 그것은 뇌에서 100만 화소의 세상을 선명한 세상으로 보정처리했기 때문이다. 우리 눈에는 맹점이 있다. 어느 거리가 되면 보지 못하는 지점!! 그런데 우리 눈의 이 결점을 우리의 뇌는 수정보완하여 선명한 세상을 볼 수 있도록 한다. 사실은 우리의 뇌에서 수정보완된 세상이다.

  인간은 빨강과 파랑, 초록밖에 볼 수 없다. 시신경이 이것 밖에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자외선을 본다면 세상은 엄청달라져 보일 것이다. 우리가 보는 세계가 엄청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잠자리가 보는 세상과, 박쥐가 보는 세상은 우리가 보는 세상과 무척 달라져보인다. 우리가 보는 세상은 뇌에 의해서 재창조된 세상이다. 빛의 3원색인 빨강 파랑 초록으로 세상의 색을 창조하고, 자외선을 보지 않았기에, 건물뒤의 세상을 보지 않도록 했다. 절대적인 세상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뇌가 창조한 세상이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그 세계는 각각의 존재들마다 다를 수 있다. '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그 마음은 뇌에서 만든 것이다.

 

다. 정신과 육체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

  종교적으로 심취한 친구가 있다. 육체는 존재했다 사라지지만, 영혼은 불멸한다. 유한한 육체보다 영원한 영혼의 안정을 추구해야한다. 라는 주장을 하며, 종교에 심취한 친구다. 그런데, 과연 정신과 육체 중에서 정신(영혼)이 절대적으로 중요하고, 육체는 학대해도 되는 것일까? 고대 로마의 시인 유베날리스(Juvenal)는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Orandum est ut sit means sana in corpore sano)"라는 말을 했다. 어찌 정신과 육체가 분리될 수 있겠는가? 뇌과학 이야기를 하는데 왜? 갑자기 유베날리스의 말을 할까?

  마음은 뇌가 만든 것이다. 몸이 없으면 뇌도 없다. 즉, 몸과 마음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뇌과학에서 말하고 있다. 건전한 육체와 건전한 정신, 건전한 뇌와 건전한 마음의 조화는 필 수 이다. 정신과 육체, 마음과 뇌의 관계는 어느 하나만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아니다. '뇌 지도'는 뇌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정하는 것이다. 손가락이 4개인 사람에게는 5번째 손가락에 대응하는 장소가 뇌에는 없다 그런데, 붙어버린 4번째 손가락을 4번째 손가락과 5번째 손가락으로 분리하는 수술을 하면, 5번째 손가락에 대응하는 장소가 뇌에서 생성된다. 몸이 변하면 뇌가 변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은 너무 과잉되게 진화하였고, 이 과잉 진화된 뇌는 환경이 변화할 때 대응할 수 있는 여유분이기도 하다. 우리의 뇌는 손발이 열개여도 충분히 콘트롤 가능할 정도로 과잉 진화되었다. 수두증에 걸린 사람이 보통사람의 1/10 정도의 뇌로 보통의 일상을 무리없이 살아간예는 우리 뇌가 얼마나 몸이나 환경에 따라 '자기 조직적'인지를 알려준다. 그리고 우리의 몸이 변화하거나 환경이 변화하면 우리의 몸은 자신의 조직과 능력을 변화하면서 세상에 대응할 것이다. 이것이 정신과 육체, 몸과 뇌의 역동적인 상호의존성을 확인케힌다.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들고, 건전한 정신에 건전한 육체가 담겨야 한다.

 

라. 불립문자! 인간은 언어의 노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선불교에서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말이 있다. 문자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문자가 지니고 있는 형식과 틀에 집착하거나 빠지지 않는다는 표현이다. 선불교는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의 족쇄, 언어의 한계를 일찍이 깨닫고 이를 뛰어 넘는 수행방법을 모색해 온 것이다.

  이책에서도 인간은 언어의 노예라고 말한다. 인간이 연상하는 단어는, 자유롭게 연상하는 것처럼 보여도, 언어에 속박되어 있다. 이시대의 지성 촘스키는 "언어를 알면 그 나라나 사회의 구조와 체계를 알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인간은 언어의 노예이며, 이를 벗어나기 힘듬을 언어학자와 뇌과학자가 말하고 있다. 그리고 언어의 노예를 탈피하기 위해서 선불교에서는 '불립문자'를 수행의 방법으로 내세운 것이다.

 

마. 전체는 부분의 합이 아니다.

  서양의 철학은 쪼개고 쪼깨면서 분석한다(환원주의). 그러면 진리에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고대 그리스에 4원소설 등의 다양한 학설들이 이러한 관점에서 전개되었으며, 근대 서양과학의 발전에 '환원주의'가 일조했음은 널리 알려져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전체는 부분의 합이 아니라고 말한다. 즉 복잡계를 예로든다. 인간은 개인일 때와 집단일때 행동이 전혀다르다. 물고기 한마리 한마리를 연구하여 몇백마리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없다. 물고기 무리의 경향성을 파악해야만 그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다. 전체를 파악하지 않고 쪼개기만하려는 서양철학에 대해서 뇌과학은 전체를 보라고 말하고 있다.

 

 

  뇌와 컴퓨터의 차이를 아는가? 소프트웨어가 변한다고 하드웨어가 변하지 않는다. 컴퓨터의 하드웨어는 절대 변하지 않는데, 그러나, 우리의 뇌는 외부세계에 열려있다. 몸이나 정보가 달라지면 뇌의 구조와 기능은 달라진다. 외부에 열려있는 것! 그 유연성이 인간뇌의 생명력을 결정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달리말하면, 외부세계에 대한 유연성을 잃게 되면 그 뇌는 죽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언제가 공부하며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뇌를 유연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우리가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이 책은 단순히 과학지식의 나열만을 하는 수준의 책이아니다. 철학과 과학을 넘나들도록 우리를 안내해주며, 끊임 없이 새로워지라고 책찍질 하고 있다(일일신 우일신 (日日新 又日新) ). 새로워지고 생명력을 잃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책을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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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30 05: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강나루 2018-01-30 06:00   좋아요 1 | URL
어렵지만 그래도 끌리는 분야가 뇌과학 이에요
감이불취 라는 말이있어요 느끼지만 취하지않는다 책을 읽지만 책의 모든 내용을 머리속에 넣으려 하지 말자구요 저도 읽고나면 많이 잊어버려요^^

2018-01-30 06:0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