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향한 사랑의 의지는 거룩한 언약에 뿌리내리고 있고, 그 의지는 결국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향한 갈망으로 나타난다. 성도인 부부라면 이러한 사랑의 의지를 서로에게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원래 모습을 잃어버린 ‘에덴동산’이다. 어설프더라도 우리의 순종과 기도와 헌신을 사용하기 원하신다. 바로 이러한 실존적 상황이 우리 모두에게 처해 있는 것이다.
저자부부는 저자의 부부에게 주신 사명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한때는 사명에 대한 열정이 지나쳐 일중독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지금 사실 예전 보다 더 분주한 일상이지만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은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아내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저자 부부에게 주신 사명을 함께 감당하며 사는 것이 기쁘기 때문이다. 아내와 나누는 사랑의 감정이 이전과는 사뭇 다르다.
역동적인 감정 상태는 아니지만 서로 깊이 갈망하는 또 다른 차원의 로맨스를 느낀다. 거룩한 정서에서 비롯되는 사랑의 감정이 틀림없다. 배우자 ‘첫사랑’으로 고백하는 크리스천 부부는 그 사랑을 계속 유지하며 새롭게 할 의무가 있다. 부부의 사랑은 전인격적인 측면에서 확인되어야 하지만 특히 성관계를 통해 확인된다. 성경은 결혼이라는 언약적 테두리 안에서 성생활을 ‘적극적으로’ 허용한다. (창2:24, 레20:10고전7:3-5)
부부간의 성생활은 단순히 욕구를 해소하는 수단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여러 가지 의미를 도출해 낼 수 있겠지만 특히 언약과 관련지어 정리할 수 있다. 이 언약이 계속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식하는 현장이 바로 주일예배이다. 예배는 언약 갱신의 현장이다. 우리 부분이 삼위 하나님 앞에 그대로 노출되어 기꺼이 그분의 통치를 받고 싶어 한다.
이러한 아름답고 숭고한 순간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성생활이 결혼식 당일에 맺어진 언약을 확증하는 데서 시작되었고, 그 후로 계속되는 부부 성생활은 결혼 언약을 새롭게 인식하고 갱신하는 성격이 아주 짙다. 단순히 욕구를 해소하는 수단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크리스천 부부는 성생활에 임하는 태도가 근본적으로 달라야 한다.
서로 한 몸 됨을 다시 확인하며 결혼 언약에 충실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기뻐해야 한다. 젊은 때처럼 욕구가 흡족하지 못해도 하나님의 뜻인 결혼의 언약과 한 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신앙이 뜨거워도 부부 싸움을 많이 하는 특이한 경우이다. 신앙이 뜨거운 게 문제가 아니라 서로를 대하는 태도가 더 큰 문제이다.
아내는 남편의 독설에 초연해지려고 더욱 열심히 기도하며 은혜를 구했다. 그랬더니 어느 날부터 긍휼의 마음을 품고 남편의 태도에 반응 하게 되었다. 남편이 자신의 태도와 말투를 교정하고 아내처럼 변화되면 좋은 데, 남편의 태도에 큰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아내는 기도하며 은혜를 받아 그렇게 반응한다고 확신하는데, 오히려 남편은 자신의 말에 귀를 안 기울이는 아내의 태도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부부 사이에는 그런 부분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남편과 아내는 어느 한 쪽만 회복된다고 부부 사이가 회복되는 게 아니다. 부부가 서로 대화하며 이런 저런 교감을 통해 함께 회복해 가야 한다. 공감 능력은 남편과 아내에게 모두 필수적이다. 공감해 주는 지점이 조금 다를 뿐이다. 남편은 아내의 ‘감정’과 ‘기분’에 공감해야 더욱 사랑을 받는다. 부부 사이에는 ‘공감적 사람 읽기’ 라는 노력이 필요하다.
결혼생활 중에 한 번도 싸우지 않으면 부부 사이가 좋다는 것일까? 그럴 수 있겠지만 세상에서 그런 일은 없다.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는 부부일수록 실제로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 어느 한 쪽이 죽을 힘을 다해 무작정 참고 있는 경우가 많다. 부부 싸움의 목적은 갈등을 해소하고 화해하는 것임을 서로가 분명히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부부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하면 극단적인 경우에 다시 안 볼 것처럼 싸울 수도 있지만, 부부 사이라고 한다면 이혼하지 않는 이상 함께 살아야 하기 때문에 계속 갈등 상황에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부부가 화해하지 않고 계속 갈등 상황에 있다는 것은 마치 그리스도와 교회가 계속 불화하는 모습으로 비춰진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부부가 서로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우리 주님을 생각해서라도 갈등을 풀고 빨리 화해해야 한다.
무엇보다 이혼은 하나님 앞에서 서약한 결혼 언약을 파기하는 무서운 범죄이다. 저자도 결혼 주례를 서지만, 신랑 신부는 하나님이 세우신 주례자 앞에서 혼인 서약을 하고 죽음이 둘 사이를 갈라놓을 때까지 그 언약을 지키겠다고 엄숙하게 맹세한다. 주례자는 그 부부의 언약을 입증하기 위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성혼 공포를 한다.
즉, 신랑 신부가 마침내 한 몸이 되었다는 사실을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걸었기 때문에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그 언약을 깨뜨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19:6 막10:9) 그럼에도 완악한 인간들은 성격이 안 맞다는 이유로, 또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하나님 앞에서 굳게 서약한 결혼 언약을 깨뜨려 버린다.
크리스천 부부들이 쉽게 이혼을 결정하는 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결혼식 당일에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엄숙하게 서약하지 않았는가? 부부가 이혼하게 되면 자녀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 준다. 어릴 때 저자의 부모님은 몰래 싸운답시고 두 아들을 깊이 재우고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일방적으로 폭력과 폭언을 했는데, 저자는 잠결에 그 모습을 보게 되었다.
어린 나이에 너무 무서웠지만 모르는 체하고 잠자는 척했다. 심지어 아버지가 부부 문제에 간섭하는 할머니한테 식칼을 들고 죽여버린다고 소리치는 장면도 생생히 기억난다. 부부의 이혼은 자녀의 부모 됨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저자는 아버지의 모습을 절대로 닮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결혼하면 아버지 같은 남편으로 살지 않겠다고 이를 악물고 노력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아버지 같은 ‘폭군’ 남편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런데 문제는 자녀를 키우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대하는 저자의 모습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모습이었다. 수십 년에 전에 아버지의 폭언에 놀라는 저자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참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아버지와 좋은 추억을 쌓을 만큼 자녀에게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다는 걸 느꼈다.
다행히 지금은 그런 모습이 없어졌다. 저자의 아들 삼형제에게만 만큼은 수 십 년 전 저자가 소년시절 겪었던 트라우마를 절대로 대물러 주고 싶지 않았다. 부끄러운 아버지가 되지 않기 위해 이전보다 여러모로 노력하지만 아직도 아내가 보기에, 아들들이 보기에 아버지로서 부족한 부분이 많다. 부끄러운 아버지가 되지 않도록 계속 노력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짐한다. 저자의 신학은 연애에서 부부, 자녀에게까지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 나도 그런 연애신학과 부부신학, 자녀신학의 영향권에 놓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