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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마코스 윤리학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ㅣ 현대지성 클래식 42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2월
평점 :

이 책은 책 속에서 평생 들었던 책 속의 책이라서 꼭 한 번 읽어 보고 싶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BC384에 그리스 마케도니아 지방의 스타게이로스에서 태어나 322에 죽었다.
아버지 니코마스는 왕의 주치의였으며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릴 때 죽었다.
17세 때 어머니도 죽고 후견인 프록세녹스는 스승 플라톤이 있던 아테네의 아카데미아로 그를 보냈고 거기에서 20년간 머물렀다.
기원전 347년 플라톤이 죽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카데미아를 플라톤의 조카 스페우시포스에게 맡기고 철학의 후원자였던 소아시아 아소스의 왕 헤르메이아스에게 갔다.
거기서 헤르메이아스의 조카 피티아스와 결혼해 딸 하나를 두었다.
기원전 342년에는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2세의 초청으로 훗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된 왕세자의 가정교사가 되었다.
기원전 335년 다시 아테네로 돌아와 자신의 독자적인 교육기관 리케이온을 세웠고 이것이 소요학파의 기원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 대부분은 이 기간에 쓰였다.
기원전 323년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고 나서 아테네에 반마케도니아 정서가 강해지자 불경죄로 고발당한다.
그는 에우보이아의 칼키스로 떠나 62세의 나이로 죽었다.
안렉산더 대왕의 여자에 빠졌다는 얘기도 들은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함께 서양철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서영철학사에서 가장 영향을 끼친 인물 1위에 뽑힌 적도 있다.
그의 지성과 관심 분야는 논리학, 형이상학, 인식론, 심리학, 윤리학, 정치학, 수사학, 미학, 동물학, 식물학, 자연학, 철학사, 정치사등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으로 넓다.
그의 저서는 니코마스 윤리학, 수사학, 시학, 형이상학, 정치학, 자연학, 범주론, 명제론 등인데 시학은 읽어봤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책에서 논하는 것들은 인간에게 좋음은 무엇인가, 도덕적 미덕은 무엇인가, 미덕과 악덕은 무엇인가, 다른 미덕들은 무엇인가 , 정의는 무엇인가 , 지적 미덕은 무엇인가 , 즐거움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자제력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즐거움과 행복이란 무엇인가이다.
나도 이런 본질에 대해서 항상 궁금하지만 내주변 교수가 많고 박사가 많아도 얘기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난 과거의 아리스토텔레스를 책으로 만나야 하는 것이다.
서울대 다니는 남자애한테 아리스토텔레스 시대는 책도 잘 없는데 그 사람은 이런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깊이 생각했는지 아느냐고 물으니까 모른다고 했다.
그 시대에 책이 잘 없는데 어떻게 이런 깊은 지식이 많냐고 애말고도 여러 명한테 물었던 것 같은데 대답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난 그냥 하나님의 설계된 뇌속에서 나오는 정보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나도 지금은 성경에서 많은 정보를 얻고 나의 인생 지침서로 삼고 있다.
꿈의 사람 요셉도 형들에게 그들이 염탐꾼이라고 거짓말을 하는 걸 보고 요셉도 거짓말을 하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법학책을 읽고 있는데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정확히 답을 안 해준다.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도 그랬던 것 같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 정의가 아닐 수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를 뭐라고 했는지 너무 궁금한 상태로 이 책을 읽었다.
정의와 불의는 어떤 종류의 행위이고 정의는 어떤 종류의 중용이며 정의로운 것은 어떤 것의 중간인지를 고찰해야 한다.
정의로운 것을, 정의롭게 행하게 하고 정의로운 것을 바라게 하는 그런 성품을 정의라고 한다.
사람들에게 불의한 것을, 불의하게 행하게 하고 불의한 것을 바라게 하는 그런 성품을 불의라고 한다.
성품은 지식이나 능력과는 다르다.
능력과 지식은 같은 것이 반대되어 나타나기도 하지만 성품은 자신과 반대되는 것과 관련되지 않는다.
정의와 불의는 여러 의미로 사용되는 듯 보이지만 그 여러 의미가 서로 가까이 있으므로 그것이 동음이의어임이 드러나지 않고 그 여러 의미가 서로 멀리 떨어진 때와는 달리 분명하게 드러나진 않는다.
불의한 사람이라는 말이 여러 의미로 사용되는지 알 수 있다.
법을 어기는 사람과 자기가 더 많이 가지려고 공평하지 않게 행하는 사람은 불의하게 보이므로 법을 지키는 사람과 공평한 사람은 정의로운 것이 분명하다.
정의는 법을 지키는 것과 공평한 것이고 불의는 법을 어기는 것과 공평하지 않은 것이다.
정의는 완전한 미덕이지만 개인적으로가 아니라 남과 관련해서 그렇다.
정의는 최고의 미덕으로 여겨지고 모든 미덕이 정의 안에 다 들어 있다라는 말도 있다.
정의는 완전한 미덕을 실제로 실행한다는 점에서 가장 완벽한 미덕이다.
정의라는 미덕을 지닌 사람은 그 미덕을 자신에 대해서만 아니라 남에 대해서도 실행한다는 점에서 정의는 완벽한 미덕이다.
다른 미덕을 지닌 사람들은 자신과 관련해선 미덕을 실행하지만 남과 관련해서는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미덕과 정의는 실체는 같지만 이 둘을 정의하는 방식은 같지 않다.
남과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본 것이 정의이고 그 자체로 어떤 종류의 성품이냐 하는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 미덕이다.

정의는 한 종류가 아니고 미덕들 전체를 가리키는 정의와 구별되는 다른 정의가 분명 존재한다.
부분적인 정의와 그런 의미에서 정의로운 것 같은데 한 종류는 같은 정치체계에 속한 사람 사이에서 명예나 돈이나 그 밖에 나누어줄 만한 다른 것을 분배하는 일과 관련된다.
그런 때는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분배될 수고 있고 공평하지 않게 분배될 수도 있다.
불의한 사람은 공평하지 않은 사람이고 불의한 것은 공평하지 않은 것이므로 공평하지 않은 것 사이에 중간이 존재함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중간이 바로 공평한 것이다.
어떤 행위든 거기에 더 많음과 더 적음이 존재한다면 거기에는 공평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공평한 것이 불의한 것이라면 공평한 것은 정의로운 것이다.
공평한 것은 중간이므로 정의로운 것도 어떤 중간일 것이다.
공평한 것은 둘과 관련해 성립한다.
정의로운 것은 어떤 중간이고 공평한 것이며 어떤 것이나 사람에 대한 것이다.
정의로운 것은 어떤 중간이라는 점에서 무엇과 무엇의 중간일 수밖에 없고 공평한 것이라는 점에서 둘이 관련될 수밖에 없으며 정의로운 것이라는 점에서 어떤 사람에 대한 것일 수밖에 없다.
정의로운 것은 적어도 넷과 관련해 성립한다.
정의로운 것과 관련해 필요한 당사자가 적어도 둘이고 정의로운 것을 드러내는 데 필요한 몫 또한 둘이기 때문이다.
사람사이에 존재하는 공평함과 각자의 몫 사이에 존재하는 공평함은 서로 동일하다.
몫들 사이에 공평함이 존재한다면 공평함은 그 몫을 분배받은 사람들 사이에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동등하지 않은 사람들은 동등한 몫을 가져선 안 된다.
사람이 동등한데도 동등한 몫을 분배받지 못했거나 서로 동등하지 않은데도 동등한 몫을 분배받았다면 거기서 다툼과 불평이 생긴다.
정의는 비례적인 것이다.
추상적인 숫자에만 해당하지 않고 수나 양에도 해당한다.
비례는 비율들의 공평함이고 정의로운 것은 비례에 따르는 것이고 불의한 것은 비례에 어긋난다.
불의한 것에서는 한쪽 항은 더 많아지고 다른 쪽 항은 더 적어지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
정의의 다른 종류는 바로잡는 정의이고 이것은 자발적인 거래와 비자발적인 거래 모두에서 생긴다.
공동의 것을 분배하는 일과 관련한 정의는 언제나 비례에 따른다.
사람들 사이에서 정의로운 것은 공평함이고 불의한 것은 불공평함이다.
공평함은 기하학적 비례에 따른 것이 아니라 산술적 비례에 다른 것이다.
공평함은 산술적 비례에 따라서 큰 것과 더 작은 것 사이에 있는 중간이다.
중간은 정의로운 것이고 그 중간은 둘로 정확하게 나누었다고 할 정도로 이등분한 것이다.
손해와 이득은 자발적인 거래에서 생겼다.
사람들은 물건을 사고팔거나 법이 자유롭게 행하도록 허용한 그 밖의 다른 거래들에서 자기 몫보다 더 많이 갖게 되었을 때 이득을 얻었다고 말하고 자신의 원래 몫보다 더 적게 갖게 되었을 때 손해를 봤다고 말한다.
더 많이 갖거나 더 적게 갖지 않고 자기가 갖고 있던 것을 그대로 유지했을 때 사람들은 자기 몫을 갖게 되었다고 말하고 손해를 입었거나 이득을 얻었다고 하진 않는다.
정의로운 것은 자발적인 거래에서 어떤 이득을 얻는 것과 손해를 입는 것 사이에 있는 중간이고 거래 이전과 이후에 같은 몫을 갖는 것이다.
비례적인 상호주의는 상호교차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정의롭게 행하는 것은 불의하게 행하는 것과 불의를 당하는 것 사이에 있는 중간이다.
불의하게 행하는 것은 너무 많이 갖는 것이고 불의를 당하는 것은 너무 적게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의는 중용이다.
정의는 다른 미덕과 같은 방식으로 중용이지 않고 중간을 만들어낸다는 의미에서 중용이다.
불의는 양쪽 극단과 연결되어 있다.
정의는 정의로운 사람이 정의로운 것을 선택하게 만드는 것이다.
정의로운 사람은 자기와 남 사이 또는 남과 남 사이에서 분배할 때 사람이 선택할 만한 것을 자기에게는 더 많이 주고 남에게는 더 적게 주거나 해로운 것을 자기에게는 더 적게 주고 남에게는 더 많이 주는 것이 아니라 비례에 따라 동등하게 주고 남과 남 사이에서 분배할 때도 동일하게 한다.
정치적으로 정의로운 것은 공동체 내에서 자족적인 삶을 목표로 함께 살아가는 비례적이거나 산술적으로 동등한 자유민들 사이에서 성립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사이에서는 정치적으로 정의로운 것은 존재하지 않고 어떤 정의로운 것이나 유사성에 따라 정의로운 것만이 존재한다.
정의로운 것은 서로 간의 관계가 법으로 규율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존재한다.
정치적 정의에는 자연적 정의와 법적 정의가 있다.
자연적 정의는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모든 것에서 같은 효력을 지닌다.
법적 정의는 원래는 어떻게 하든 아무런 차이가 없지만 정해진 후에는 차이가 생긴다.
정의롭고 법적인 것은 보편적인 것을 규정하여 개별 적용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는 정말 간단하게도 중간이다.
이렇게 쉬운 정의를 다른 책에서는 또 어렵게 공부해야 할 것 같다.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