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시대 - 거대한 전환점이 될 팬데믹 이후 10년을 통찰하다
김동원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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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때 경제학수업은 수강신청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몇 초만에 수강신청하기가 바로바로 끝났다.

겨우 수강신청을 했는데 교수가 1분만 늦어도 강의실 문을 잠가서 졸업할 때까지 끝끝내 못들었다.

강의실앞에서 몇 십명이 서 있다가 다른 과목으로 바꾸자고 대동결의했던 생각이 난다.

그 교수가 뉴스 패널로 나오는 걸 보면 기분이 별로 안 좋다.

자본주의사회에 살려고 하면 경제학적인 지식이 없으면 거의 문맹인같은 삶을 살게 된다.

진정한 자본주의를 알려면 경제학적인 지식을 기반으로 알아야 하는 것 같다.

이 세상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것으로 가르친게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라는 것을 알았다.

경제학책을 읽으면서 돈이 무엇인가와 경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명확하게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고 내 자신도 기준이 명확히 서 있었으면 좋겠다.

돈과 경제에 대한 기준을 명확히 세우고 내가 쫓아야할 행복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알면 더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

고전학파에서부터 신자유주의까지 정리를 하기는 했는데 아직도 모르는게 너무 많다.

세상의 구조를 잘 알면 그 구조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파악할 수 있다.

난  파레토 법칙의 부가 아니라 99%가 잘 살 수 있는 경제에 대해서 알고 싶다.

자본주의의 폐해가 많아도 사회주의는 또 아닌 것 같고 부동산 3법을 보고 또 그런 법을 만들면 안 될 것 같아서 경제에 대한 지식은 많이 알아둬야 할 것 같다.


 













저자 김동원은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경제학과와 동대학원에서 화폐금융을 공부했다.

수원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일하다가 2000년 매일경제신문 논설위원으로 자리를 옮겨 5년간 세상 살피는 일을 익혔다.

2004년 11월부터 2007년 말까지 KB국민은행 부행장으로 현장을 경험했으며 2008년 6월부터 2009년 말까지 금융감독원 부원장보로 일했다.

2010년부터 2년간 연세대학교 경영대학 객원교수를 거쳐 2012년부터 2019년 1학기까지 고려대학교 경제학과 초빙교수로 시사경제를 강의했다.

50여 편의 논문과 경제와 관련된 여러 책을 썼다.

현대 자본주의는 우리 모두를 전에 없던 번영으로 끌어올릴 잠재력을 가지고 있지만 윤리적으로 파산한 채 비극의 길을 향하고 있다고 폴 콜리어가 말했다.

빈부 격차가 커지는 이유는 부유층이 더 큰 비중을 보유하고 있는 금융자산의 수익률이 중산층의 주된 자산인 주택 자산의 수익률을 크게 능가해서이다.

1983~2016년간 금융자산의 연평균 실질 수익률은 6.3%였던 반면에 주택자산의 평균 수익률은 0.6%에 불과했으며 그 결과 상위 1%의 총자산 수익률은 2.9%였던 반면 인구의 3/5를 차지하는 중산층의 수익률은 1.3%에 그쳤다.

자본 소득이 높은 계층 중 노동소득도 높은 계층의 비중이 크게 높아졌다.

자본소득 상위 10%에 속하는 계층 중 노동소득 상위 10%에 속하는 계층의 비중은 1983년 15%에 불과했지만 2016년에는 30%로 높아졌다.

미국의 경우 빈익빈 부익부 양극화를 결정적으로 만든 것은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금융기관들의 신뢰를 회복하고 경기를 진작하기 위해 연방준비은행이 추진한 금융완화정책이었다.

이 정책을 통해 공급된 유동성을 바탕으로 주식 가격이 장기 상승한 것이었다.

특히 이 시기에 정보통신산업이 급성장에 따라 아마존을 비롯한 신흥 정보통신 기업의 주가가 급등했다.




 

불안과 분노, 그리고 절망 속에서 사람들의 정치적 소속감은 물론 정부에 대한 신뢰의 심지어 그들 서로에 대한 신뢰마저 산산조각이 났다.

저학력자들은 최근 정치권을 강타한 반항의 핵심에 있었다고 폴 콜리어가 또 말했다.

요즘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포퓰리즘을 넘어 정치적 부족주의로 치닫고 있다.

냉전 종식 이후 30년 동안 자본주의는 세계주의를 통해 양극화를 초래했다.

기존의 정치권이 시장경쟁의 실패자들의 고통을 방치한 결과 대중들은 포퓰리즘에 반응하게 되고 포퓰리즘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복합 위기를 반영하는 시대적 과제로 유럽을 넘어 세계적인 양상으로 확산되고 있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로 촉발된 냉전 종식 이후 세계는 자본주의 독주 체제로 30년을  보냈다.

또한 세계 금융위기로 인한 대불황 이후 10년이 지났다.

그 결과 세계의 정치와 경제는 포퓰리즘이 확산되었다.

그 결과 2차 세계대전 후 유럽 각국의 정치를 이끌어왔던 중도보수 또는 중도진보 정당들이 주도권을 위협받고 있다.

포퓰리즘 정당들이 대중들의 지지를 얻게 된 이유는 1990년 소련의 붕괴 이후 새로운 세계 경제질서로 등장한 세계주의는 선진국과 신흥국을 막론하고 심각한 양극화를 가져왔다.

기술적으로 사회미디어 플랫폼의 발달로 개인이 쉽고 빠르게 다수 대중들과 견해를 공유하고 함께 행동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포퓰리즘(대중주의)은 세계 각국에서 각 시대에 따라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통일된 정의가 성립하기 어렵다.

공통점이 있다면 기득권을 장악하고 있는 엘리트 세력이 비민주적일 때 이들에 대항하고 타도하기 위해 대중을 결집시키는 정치운동이라고 한다.

포퓰리즘은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여 표를 얻으려는 정치행태로 저질 정치행태로 폄하되는 경향이 있다.

























포퓰리즘은 기득의 정치 엘리트들로부터 정치적 접근, 생각, 행동이다.

그러나 포퓰리즘은 표를 얻으려는 정당 또는 정치인의 행태보다 기득권을 가진 정치 엘리트들로부터 대중들이 외면받았다고 느낄 때 힘을 얻는다.

따라서 민심의 이반과 신뢰 상실을 배경으로 한 대중들의 자국적 선택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포퓰리즘의 주류는 반엘리트주의로 기득권 정치체제의 정당성을 거부한다.

또한 유럽통합과 세계화가 양극화를 초래함으로써 대중들의 삶을 피폐하게 했기 때문에 포률리즘은 반개방주의이며  이민자들의 대량 유입이 그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위협한다고 느끼기 때문에 반이민주의다.

포퓰리즘은  다양한 배경을 가진 대중들의 집합체로 복잡한 논리를 거부하고 단순한 목표를 추구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2016년 영국에서는 브렉시트를 내걸고 포퓰리즘 성향의 보수당, 2017년 독일 대안당의 약진, 오스트리아 자유당의 연정 참여, 2018년 프랑스에서는 극우 민족주의 성향의 국민전선, 이탈리아의 오성운동 등 포퓰리즘 성향의 정치 지도자와 정당들이 등장했다.

포퓰리즘의 문제는 기존의 엘리트층을 공격한다는 이유는 아니다.

포퓰리즘의 확산에 대해 가장 우려되는 문제는 포퓰리즘 성향의 정치운동은 극도로 배타적인 정치적 부족주의로 악화될 위험이 높다는 것이다.

같은 부족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같은 규범과 같은 정서를 공유함으로써 다른 부족과 차별화하는 것이다.

부족사회 간의 갈등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부족의 문제다.

종족 간 대결하는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은 같은 부족이냐 다른 부족이냐의 여부다.

다른 부족에 대해서는 존재의 정당성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에 경쟁자 또는 다른 이익집단이나 다른 의견을 가진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고 토론과 협상을 통해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민주적 규범은 설 자리가 없다.

정치적 부족주의는 극단적인 양극화를 초래하고 극단적인 대립과 비타협으로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 수 있다.

부족주의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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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사의 시간은 거꾸로 흐르는가 - 격변하는 현대 사회의 다섯 가지 위기
마르쿠스 가브리엘 지음, 오노 가즈모토 엮음, 김윤경 옮김 / 타인의사유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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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세계관이나 사상에 대해서 관심이 많다.

이번에 세계관을 전부 혼자서 정리를 하고 세계를 보니까 세상 돌아가는 일이 더 잘 보였다.

저자가 얘기하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해서 더 깊이 알고 싶었다.

다양성을 인정하지만 다양성을 부정하는 사람도 인정해야 하는건가,,

중요한 것은 옳은지 옳지 않은지를 판단해야 하는 사고가 있어야 하는 것 같다.

이데올로기의 문제는 경계가 모호하다는 것이다.

난 기독교세계관 중심으로 프레임을 갖고 있어서 세상과 많이 부딪히는 것 같다.

저자 마르쿠스 가브리엘은 본대학과 하이델베르크대학을 거치며 철학, 고전문헌학, 현대 독일문학을 공부했다.

2005년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독일 본대학교 철학과에 사상 최연소 석좌교수로 발탁되었고 인식론과 근현대 철학을 강의하고 있다.

동 대학의 국제철학 센터 소장을 겸임하고 있으며 포르투갈의 리스본대학교, 덴마크의 오르후스대학교, 미국의 버클리대학교 등 유수의 대학교에서 객원 교수로도  활동했다.

저자는 신실재론을 주장하고 있다.

신실재론은 탈진실(객관적인 사실보다 개인적인 신념이나 감정이 여론 형성에 더 영향력을 미치는 현상)이라는 말이 확산되고 포퓰리즘(본래의 목적을 외면하고 일반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정치 형태)의 바람이 거칠게 휘몰아치는 오늘날의 세상에 응답하기 위해서 생겨난 새로운 형태의 철학이다.

세계사의 시간이 거꾸로 흐르고 있다는 의미는 신은 죽었고 근대라는 장대한 약속도 죽었다는 의미다.

죽음을 거친 우리는 닻을 잃고 표류하는 배와 같다.

그 바람에 지금 이 세계는 좋았던 옛 시절, 즉 19세기의 국민 국가시절로 되돌아가려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현재의 자본주의에 닥친 근본적인  위기는 사람들이 세계화라고 특징짓는 지점에 있다.

자본주의의 위기는 국민국가가 생겨난 일과 관련되어 있다.

현대의 국민국가가 탄생하게 된 과정과 산업화 과정은 유사하며 글로벌화는 실제로 세계적 규모의 제품 거래를 가리킨다.

표면적인 글로벌화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가 어떠한 국민국가의 법적체제에도 완전히 얽매이지 않는다.

1830년대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기까지 미국은 수입하는 공업 제품에 높은 관세를 부과했다.

독일은 19세기 말에 불어닥친 불황을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를 선두로 보호주의를 펼쳐 극복했다.

제품에 따라서는 세계적인 흐름을 타는 것도 있지만 글로벌 경제라는 이상은 아직 현실로 실현되지 못했다.

그렇기에 어느 국가든 어느 정도는 자국의 제품을 보호하고 있다.

글로벌 경제는 경제 전쟁으로 변했다.

글로벌 경제는 법률상 제한이 없다.

산업화는 어떠한 세계적 국가에게도 조종되지 않는다.

글로벌 자본주의 경제에는 세계국가가 필요하며 그렇지 않으면 붕괴할 수밖에 없다.

글로벌 경제가 글로벌 국민국가의 존재 없이 제 기능을 지속하는 일은 절대로 없다.

산업과 국민국가는 하나이다.

신자유주의  포함한 대부분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의존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자본주의에 관해 생각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한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이론은 너무나 불충분하다.

자본주의는 노동의 역할 분담에 대한 응답이다.

자본주의는 노동의 역할 분담을 이용해 한 사람의 인간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다른 사람이 모른다는 사실을 가치로 변환한다.

그것이 자본주의 비즈니스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상대는 알지 못한다.

그것이 자신에게 이점이 된다.

상대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시점에서 자신은 얼마의 금액을 청구할 수 있을지를 계산하는 것이다.

상대에게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려져 있는 경우라면 그 금액을 청구할 수 없다.

자신은 자신의 제품이 실제보다 훨씬 뛰어난 척을 해야 한다.

상대를 믿지 못하지만 믿는 척해야 한다.

자신의 제품을 사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 구조가 자본주의의 거짓이다.

자본주의 자체가 불투명한 시스템이다.

자본주의에는 투명성이 보장되어 있지 않다.

그렇지 않고서는 제대로 기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자세가 악은 아니지만 자본주의에는 악의 잠재성이 도사리고 있다.

민주주의자들은 자본주의는 우리를 민주주의 반대 방향으로 끌고 가려고 한다고 비판한다.

민주주의는 투명성이 중시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생산 상태를 좌우하는 자본가에게 민주적인 사고 훈련을 받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인간은 각자 조금씩 다르다는 사실이 다양성의 논거다.

다양성은 사실이다.

그 사실을 우리 사회에 투영해봐야 한다.

민주주의의 부정적인 측면은 반대 의견이 또 다른 측면에서는 또 반대 의견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과 관련된 분명한 사실은 인간은 때때로 인간 존재의 개념에 의거해 생을 보내고 있는 동물이다라는 것이다.

인간은 인간의 이미지, 그리고 자기 개념을 갖고 있다.

우리는 자신이 인식하고 있는 개념을 전제로 행동한다.

인간은 인간에 관해 연구한다.

그것이 과학이고 우리가 누구인지를 아직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특정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존엄성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인간이 자신의 정체를 생각할 수 있는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우슈비츠에 갇혀 있는 사람은 인간의 존엄에 대해서 생각할 수 없다.

우리가 존엄을 깨닫는 것은 자신의 정신 상태가 자유로울 때다.

인간의 존엄성, 즉 인간의 권리라는 개념의 연장선에서 보자면, 정부의 역할은 우리의 정신적 자유를 향상시키는 데 있다.

차별주의자가 자신은 여성을 차별하고 여성을 차별하는 것이 자신의 권리라고 한다.

그것을 침범당하는 것은 자신의 존엄성을 해치는 일이다라고 주장한다면 그는 타인의  존엄성을 낮추고 있고 동시에 자신의 존엄성도 낮추고 있는 것이다.

존엄에도 단계가 있다.

존엄이 제로가 되는 일은 없다.

제로가 되면 인간이 아니다.

존엄의 최고의 단계는 성인이다.

단순한 이념이지만 완벽한 인간이다.

다른 사람의 존엄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존엄도 없다고 보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자신이 믿는 것을 무엇이든지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권리로 성립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특정한 표현의 자유와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재판소, 인프라, 세금 시스템, 관료, 관공서 등 그런 모든 기관이 얽혀있는 복잡한 시스템이다.

민주적인 제도의 기능은 의견의 차이가 발생했을 때 사태가 일어날 확률을 줄이는 일이다.

비민주적 사고는 이것이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사고 방식이다.

어떤 일이나 상황이 언제나  완전하게 기능하고 자신의 이익을 실현하는 형태로 기능하기를  원하는 사고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독재주의다.

중국과 같은 독재주의 국가에서는 자신이 적을 무너뜨리기 위해 살해의 방법도 사용한다.

민주주의는 협의점을 찾는 것이다.

전 세계는 독립되어 있지 않다.

보편적인 의사결정 수준을 갖추고 대립을 중립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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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다 죽겠어요
이애경 지음 / 꼿꼿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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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배우자기도를 어릴때부터 28년 가까이 기도를 하고 아기를 위해서는 8년 기도했다.

하나님이 연인이니까 인간 남자는 만나본 적이 없다.

내 주변에는 결혼한 사람보다는 안 한 사람들이 더 많다.

내 친구들은 혼전순결주의자들이 많은데 난 인터넷으로 혼전순결주의자들을 싫어한다는 것도 요즘에 알았다.

친구랑 아는 형제가 결혼을 하는데 그 형제는 결혼 날짜도 잡히고 예비신부랑 결혼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결혼식 당일에 예비신부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혼전순결주의파들이 결혼 날짜가 잡힌다고 끝나는게 아니고 첫날밤을 사수해야 하는거냐 혼인신고를 사수해야하는 거냐고 연락이 왔다.

난 혼인신고를 사수하면 될 것 같다고 했다.












저자 이애경은 서울에서 태어났고 미국, 캐나다를 거쳐 현재 제주에 거주 중이다.

기자, 작사가, 에레이스트로 다양하게 변화하며 글을 쓴다.

저자는 지금의 남편을 40살이 넘어서 만났다고 한다.

남편은 그때까지 독신주의자로 살다가 저자를 만나서 결혼을 했다.

50대 중반의 신미란 대표는 홍보 컨설팅을 하고 있다.

일을 잘하고 유니세프나 해외 선교단체에 기부를 하면서 1년에 몇 번씩 해외에도 나가고 봉사하며 즐거운 삶을 살고 있다.

저자는 그녀에게 혼자 살면 외롭지 않냐고 결혼할 생각은 없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녀는 남자와 잘 안맞고 세상에는 너무 똑똑한 여자들이 많아서 왠만한  남자들은 자꾸 무시하게 된다고 했다.

자신보다 강하지 않으면 관심이 안간다고 했다.

신미란 대표는 세상의 잣대에 자신을 맞추고 사는 게 힘들고 자신이 행복하고 잘 사는 데 굳이 자신과 맞지 않는 결혼이 자신을 억지로 끼워 맞추고 고행하듯 살지 못할 것 같다고했다.

남들이 다 하니까 결혼한다는 건 그녀의 인생 사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고 거기서 뿜어 나오는 에너지로 남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주신 삶을 기뻐하며 즐겁게 사는 것, 그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자 삶의 방식이라고 한다.

자신의 성품이나 지금의 삶이 결혼 제도와 맞지 않는데 억지로 결혼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더 늦기 전에 생각해봐야 한다.

현실성 없는 신기루에 불과한 드라마는 쳐다보지도 않는 영성이 탁월하고 신앙심 깊은 자매들에게 함정이 있다.

기도와 성경 읽기 수많은 사역으로 다져진 그들의 신앙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상대방의 신앙을 가늠하는 그들의 눈높이도 높아진다.

맷 레드먼과 크리스 톰린, 스캇 브래너, 맥스 루케이도, 릭 워렌 목사님처럼 우리를 깊은 예배의 자리로 인도해주는 순수하고 순전한  하나님을 바라보는 형제를 찾게 된다.

저자는 지금은 믿음이 약해 보여도 미래에는 아브라함처럼 강한 믿음의 소유자가 될 수 있고 사도 바울 같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고 한다.

맷 레드먼과 맥스 루케이도를 원한다면 저자는 일찌감치 포기를 하라고 한다.

대신 그들처럼 탁월한 예배와 영성의 소유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을 보는 눈을 기르라고 한다.

맷 레드먼과 맥스 루케이도 같은 형제가 아니라도 자신만을 평생 사랑해주고 서로 아끼며 즐겁게 살며 함께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면 충분하다고 한다. 



 

 

 

저자는 이 나라 남자들의 부흥을 위해 기도하라고 한다.

자신의 남편만 찾겠다고 울부짖으며 기다릴 것이 아니라 거시적  관점에서 대한민국 남자들이 하루빨리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고 한다.

미혼 때 결혼에 대해 알고 있는 20퍼센트는 환상이며 30퍼센트는 망상이며 40퍼센트는 허상이라고 한다.

내 주변에는  나이가 많아도 결혼한 사람이 별로 없다.

저자는 기혼자들을 적극적으로 만나 정확한 정보를 접수해놓는 것도 결혼을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결혼한 사람들은 결혼은 현실이라는 얘기를  많이 한다는 얘기를 한다.

결혼을 하더라도 내 최고의 사랑은 남편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결혼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남편이 모든 것을 채워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내게 맞는 최고의 신랑을 준비해놓았을 것이라고 분명히 믿는다.

단 자신의 기준과 다를 수 있다.

결혼을 위해서 오랫동안 구체적으로 기도한다.

가정을 향해 갖고 계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자신의 삶과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신뢰한다.

저자가 얘기한게 맞다는 생각이 든다면 마냥 기다릴 떄가 아니라 침노할 때라고 한다.

저자는 배우자를 분별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긴 기다림의 시간을 견디며 하나님께 집중하다 보면 하나님이 무언가를 시작하시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하나님이 새로운 문을 여시고 새로운 시즌임을 말씀하시는 때가 되면 주위의 상황들이 조금씩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 형제들이 생기기도 하고 믿을 만한 사람들로부터 소개팅을 제안받는 건수가 불현듯 많아지는 등 하나님의 타이밍에 맞춘 본격적인 짝 지어주기 과정의 시동이 걸린다고 한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형제가 있다면 일단 하나님이 배우자로 인도하신 사람인지 기도해봐야 한다고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마음을 열지도 닫지도 않고 오직 기도하며 하나님의 생각을 묻는 것이다.

관심이 가더라도 일단 상대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시간이 있어야 하고 최대한 냉정하게 현실을 볼 수 있도록 감정을 자제해야 한다.

먼저 마음을 열고 좋아하는 감정이 생기면 상대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다.



















자기가 기도해왔던 사람인지 아닌지에 대해 기준을 무시한 채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버리는 것은 멈춰야 한다.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지만 결혼은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조건을 고려하지 않으면 결혼을 준비하다가 또는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파국을 맞기도 한다고 한다.

배우자를 고르는 과정에서 자신이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드러내놓고 상대방이 하나님이 보내주신 사람인지 아닌지를 점검해봐야 한다.

특히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들은 상대의 신앙 색깔이 어떤지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마음을 열지 않는 것만큼 마음을 닫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자신의 눈이나 머리도 믿지 말아야 한다.

오직 우리가 의지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눈이고 하나님의 머리다.

옛날에는 배우자와 30년 정도만 살면 됐지만 100세 시대가 되면서 길면 60년 이상도 같이 살아야 한다.

빌 하이벨스는 능력은 혼자만의 고요한 시간을 통해서 온다고 했다.

결혼은 두 남녀의 인생 궤도를 바꾸는 중요한 결정이다.

때문에 모든 것을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사람이 확실하다고 생각되더라도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잠잠히 앉아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나의 고요함 속에 아주 세밀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씀하신다.

하나님뜻과 하나님음성대로 해야 겠다.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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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를 즐겁게 - 우리말의 어원과 유래를 찾아서
박호순 지음 / 비엠케이(BMK)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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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말하다의 어원을 알려주는데 난 그런 얘기는 처음 들었다.

얼굴이 눈코입이 있는 머리의 앞면을 말하는거다.

얼굴은 혼 넋 마음 생각이 담겨 있고 꼴이라는 뜻의 굴이 합쳐져서 얼굴이라는 뜻이다.

난 책을 읽는데 의미를 모르는 단어가 항상 있다.

사전을 안 찾을 때가 없다.

신기하다.

읽어도 읽어도 모르는 단어가 항상 있다.

이 책을 읽으면 국어에 대한 깊은 이해가 더해질 것 같다.

책을 읽을 때 와닿는 단어나 문장도 좀 더 다른 의미로 와닿는다.

저자 박호순은 교대를 나와서 초중고 교사를 하고 교장 장학관까지 했다.

조선시대에 훈민정음이 창제되면서 우리말을 우리글로 표현하게 되었는데 그 전에는 우리말은 있어도 우리 문자가 없어서 한자로밖에 표기할 수 밖에 없었다.

[계림유사]를 보면 12세기 초 고려 숙종때 중국 송나라 손목(통역관)이라는 사람이 사신과 함께 개경에 왔다가 당시 고려의 조제(조정의 제도), 풍속 등과 함께 고려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 중에서 353 어휘(진태하의 [계림유사연구]에는 359어휘가 수록되어 있음)를 채록하여 당시 고려 사람들의 발음을 중국 송나라 시대의 한자음으로 가차(뜻은 다르나 음이 같은 다른 한자를 빌려 씀)하여 기록한 백과서이다.

[계림유사]의 기록이 1000년 전의 고려 사람들이 사용했던 한자음이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우리 민족은 그 당시에도 지금과 거의 비슷한 소리의 언어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역사가  시작되는 4300년 전의 고조선때에는 지금과 같은 소리의 언어는 아니더라도 현재 언어의 뿌리가 될 만한 우리말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되며 우리 민족 나름의 기호적 문자도 존재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한서]지리지에 의하면 고조선은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법조문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내용은 개인의 생명과 노동력에 의한 사유 재산과 가부장적인 가족 제도가 존중되는 관습법으로 범금팔조라고  불렸다.

1. 살인을 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

2.남을 상하게 한 자는 곡물로써 보상한다.

3.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그 주인의 노비로 삼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러나 속죄하고자 하면 일인당 50만  전을 내놓아야 한다.

중국 한서를 통해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 민족은 부족 국가를 형성하여 우리의 역사가 시작된 고조선 때에도 우리 나름대로의 우리 언어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사랑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는 어렵다.

국어사전의 사랑은 정성과 힘을 다하여 아끼고 위하는 마음, 이성에 끌려 몹시 그리워하는 마음, 남을 돕고 이해하려는 마음, 어떤 사물을 즐기거나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열렬히 좋아하는 대상이라고 한다.

사랑에 대하여 기독교는 믿음 소망, 사랑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면서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라고 했다.

사랑이 믿음과 소망보다 앞서는 이유는 믿음과 소망은 마음에 간직되어 있는 반면에 사랑은 마음에 간직되면서도 행동으로 실천할 수 있기때문이라고 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예수의 헌신적 사랑이다.

불교에서의 사랑은 중생들을 가엾게 여기어 고통을 덜어 주고 안락하게 해 주려는 자비를 말한다.

불교 사상 중에는 자비무적이란 말이 있다.

어지럽고 힘든 세상에서 자신이 살아가는 데 가장 힘이 되는 것은 상대를 미워하지 않는 자비로운 사랑이라는 것이다.

자비를 베푸는 데에는 적이 없다는 말이다.

불교의 자비심은 인연의 멀고 가까움에 차별 없이 모두를 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기며 무량한 사랑과 감싸는 마음으로 자기보다 상대를 더욱 위하는 마음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부처의 무한한 자비이다.

유교에서의 사랑은 남을 이해하고 보듬으며 어질게 행동하는 인을 의미한다.

아랫사람에게 베푸는 도타운 자애라고도 한다.

논어에는 박시제중(널리 은혜를 베풀어서 뭇사람을 구제함)이라는 말이 있다.

유교에서의 사랑은 기독교의 헌신적 사랑이나 불교의 무한한 자비보다 오히려 보편적인 면이 있어 보이지만 유교에서도 하늘 죽신의 뜻을 사랑에 결부시킨다.

공자가 말한 지천명은 사람의 나이 쉰 살을 달리 이르는 말로 사람이 쉰 살이 되면 하늘의 순리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하늘의 순리를 따르는 것도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다.

부자유친은 부모를 공경하고 효도를 하는 것인데 이 또한 부모를 사랑하기에 효를 실천하는 것이다.

유교의 기본은 인이라고 하지만 예 또한 가벼이 여길 수가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예절을 지키는 것 또한 상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예절을 지키는 것이다.


 

 

 

철학적 의미의 사랑에는 에피투미아(원초적 사랑), 플라토닉(정신적 사랑), 에로스(이성적 사랑), 필리아(친구 간의 사랑), 스토르게(가족 간의 사랑), 아가페(조건 없는 사랑)가 있다.

에피투미아는 원초적인 사랑으로 자기 자신을 우선으로 하여 욕구 충족을 위한 자기 사랑이다.

배가 고프거나 몸이 아프면 울고 마음이 흡족하면 웃으며 좋은 물건을 보면 갖고 싶어 하고 사회 활동 중에는 높은 지위와 명예를 얻고 싶은 것 등 자신에게 이로운 것을 탐하는 것이 에피투미아적 사랑이다.

에로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렁의 신의 이름처럼 이성 간의 사랑을 기본으로 하며 서로가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고 아름다운 것에 감동을 받으며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자타 공존의 사랑이 에로스적 사랑이다.

아가페는 철학자 플라톤이 이데아(이상적 개념)에 대한 동경이라고 정의한 것처럼 신의 뜻을 따르는 사랑, 모든 인류를 위한 사랑, 어떠한 조건도 없는 헌신적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전하고 있지만 어원사전에서는 사랑은 사람이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하였다.

그러니까 사랑은 사람과 사람이 상대방의 여러 상황을 깊이 생각하고 헤아리면서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다.

중세 국어는 사랑하다는 생각하다는 뜻도 있었다.

사랑과 가장 관련이 있는 사람에 대하여  국어사전과 어원사전에 의하면 사람의 어원은 살(명사로 사람이나 동물의 뼈를 싸고 있는 부드러운 물질)+암(접미사)이 합하여 사람이 되었다.

어원사전에는 사랑과 생각의 두 뜻을 포함하고 있는 사랑과 사람은 같은 동원어(뿌리가 같은 말)라고 하면서 사랑은 사람이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정리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상대방이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게 가장 사랑하는 것이다.



















조금 있으면 이팝나무가 길거리에 많이 핀다.

이성계 때 전제 개혁으로 토지를 분배 받고 조세는 십일제이므로 가족들의 입에 풀칠은 물론 이제 하얀 쌀밥까지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백성들은 전제 개혁을 실행한 이성계를 높이 칭송하였고 또한 쌀밥을 일러 이성계가 내려 준 밥이란 뜻으로 이밥이라 했다.

이런 일이 있어 이팝나무를 이밥처럼 꽃을 피우는 이밥나무라 하다가 이팝나무라고 부르게 되었다.

우리가 평소에 지어 먹는 쌀밥의 쌀을 멥쌀이라고 하고 입쌀은 멥쌀을 잡곡과 구분하여 이르는 명칭이므로 입쌉과 멥쌀은 같은 명칭이다.

이밥은 입쌀로 지은 밥이므로 이밥은 입쌀밥을 줄여서 줄여서 부르는 명칭이다.

이팝나무의 원말은 입쌀밥나무이다.

우리 속담에 언제 먹었는지 모를 만큼 음식을 빨리 먹어 버리는 것을 '마파람에 개 눈 감추듯'한다고 말한다.

춘향전에 한양으로 떠난 이몽룡이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에 내려와서 남루한 행색으로 춘향 모인 월매를 찬아가 밥 한술 달래 허겁지겁 먹어 치우자 월매가 원망하듯이 '마파람 게 눈 감추듯'먹는다며 핀잔을 주는 대목이 있다.

마파람은 뱃사람들이 남풍을 이르는 말로 경퐁(온화한 바람), 마풍(마파람의 한자말), 앞바람(앞에서 마주 불어오는 바람), 오풍(낮12시경부터 바다에서 육지로 부는 바람)등 여러 가지 명칭을 가지고 있다.

바람을 중시하는 뱃사람들이 남쪽을 '마'라고 불렀기 때문에 남쪽에서 부는 바람을 '마파람'이라 하였고 옛날에는 북을 '뒤'라 하고 남을 '앞'이라 하였으므로 '남'에서 부는 바람을 '앞바람'이라고도 하였으며 또한 일상생활 속에서 사람들은 해를 향해 남면(남쪽을 바라봄)하는 경우가 많아 역시 남쪽에서 부는 바람을 '앞바람'이라 하였고 고기를 잡으로 바다로 나갈 때 마주치는 바람이라 하여 '마파람'이라고 하였다.

남풍을 경풍이라 하여 온화한 바람을 말하는 것이며 개풍이라고도 하여 따뜻한 바람을 의미한다.

바다에서 온화하고 따뜻한 바람이 불면 대개는 비가 오기 때문에 남풍을 비바람이라 한다.

마파람은 외형상으로는 남풍이지만 내면적으로는 비바람과 같은 장마 바람을 뜻한다.

게 눈의 게(칠게와 같은 달랑겟과의 무리)의 습성을 바닷사람(뱃사람)들이 보고 게가 두 눈을 빠르게 감추는 것처럼 있던 것이 눈 깜짝할 사이에 없어지는 상황(음식을 빨리 먹어 치우는 상황)을 일컬어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이란 말을 썼던 것이 오랜 세월 굳어져 속담이 되었다.

우리말에 대한 것도 모르는게 너무 많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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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신뢰 - 인생의 모든 답은 내 안에 있다 현대지성 클래식 36
랄프 왈도 에머슨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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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지성책은 항상 좋다.

랄프 왈도 에머슨이 니체의 사상적 뿌리라는 건 처음 알았다.

책을 읽다보면 연결된 것들이 많은 것 같다.

천재의 행동이 자신을 믿고 자신에게 진실이 되는 것이 모든 사람들에게도 진실이 된다.

장미처럼 시간을 초월해서 자연과 어울려 현재를 살아야 행복하다는 얘기가 왠지 심오한 것 같다.

권력을 자기 내부에서 찾지 외부에서 찾지 말라고 한다.

그게 니체의 초인개념이다.

저자 랄프 왈도 에머슨는 ​ 1803년 5월에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일찍돌아 가셨는데도 어머니가 네 아들을 전부 대학에 보낼 정도로 의지가 강했다.

14세에 하버드대학교를 입학했고 그 후 하버드 신학대학원에 진학했으나 건강 문제로 학업을 중단했다.

26세에 보스턴 제2교회 목사로 일하기 시작했지만 형식적인 ​종교의식에 실망하여 1832년 목사직을 사임하고 유럽 지역을 여행하면서 견문을 넓혔다.

31세에 콩고드로 이사하여 월든 호수 근처의 땅과 집을 사고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47년 동안 왕성한 지적 노정을 시작한다.

에머슨의 제자 소로는 이 호수를 배경으로 [월든]을 펴냈고 에머슨 자신도 이 숲과 호수를 산책하면서 많은 영감을 얻고 안식을 누렸다.

35세 하버드 신학대학원 졸업반에서 형식적이고 영감 없는 설교에 대해 맹렬하게 비판하자 목사들로부터 엄청난 반발을 사서 즉각 이단 취급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에머슨은 미 전역을 돌어다니며 40년간 총 1500회 이상의 강연을 하면서 수많은 미국인에게 오롯이 자기 힘으로 우뚝 서는 삶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그는 미국이 강대국으로 도약하려면 유럽으로부터 사상적으로 독립할 것과 미국인만의 길을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에머슨은 대중 강연을 많이 했지만 평소 수줍음을 많이 탔고 동물적 야성은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콩코드의 현자로 불렸으며 19세기 후반 미국 사상계에서 가장 우뚝한 존재였고 공공지식인으로 통했다.

시인 프로스트는 가장 위대한 미국인으로 조지 워싱턴, 토머슨 제퍼슨, 에이브러햄 링컨과 함께 에머슨을 꼽았다.

대표 저서로는 [자연], [제1에세이], [제2에세이],[인생의 처세],[대표적 인간],[사회와 고독]등이 있다.





















​자신의 생각을 믿는 것, 은밀한 마음속에서 자신이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도 그대로 진실이 된다고 믿는 것이 천재의 행동이다.

자신의 머릿속에 숨은 확신을 밖으로 드러내면 보편적 의미를 획득한다.

가장 깊숙한 것은 적절한 때가 되면 겉으로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사람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번쩍거리는 지나가는 빛줄기를 발견하고 관찰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각 개인에게는 음유시인이나 현자들에게서 나오는 하늘을 가로지르는 불빛보다 자기 마음속에서 샘솟는 한 줄기 빛이 더 중요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자기에게서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그 생각을 별로 주목하지 않고 그냥 무시해버린다.

천재들이 남긴 모든 작품에서 우리는 스스로 거부해버렸던 생각을  발견한다.

낯설지만 장엄한 모습으로 그 생각들은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위대한 예술 작품들이 우리에게 전하는 가장 감동적인 교훈은 다른 무수한 목소리가 반대 의견을 낼지라도 점잖으면서도 굳건한 자세로 자신의 자발적인 느낌을 더 소중하게 믿고 그 작품들이 웅변하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내일 어떤 낯선 사람이 우리가 늘 생각하고 느꼈던 바로 그것을 아주 그럴듯하게 말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  타인에게서 우리 생각을 받아들여야 하는 부끄러운 상태가 된다.

부러움은 무지에서 나오고 모방은 자살행위다.

배우는 과정에서 이런 확신이 드는 순간이 온다.

또한 좋든 나쁘든 자신이라는 존재를 있는 그대로 제 운명의 몫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시간을 맞이한다.

이 세상은 좋은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자신에게 주어진 경작지를 자기 자신의 노동으로 갈지 않으면 단 한 알의 옥수수도 그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인간 내부에 깃든 힘은 본래 새롭다.

그 새로움 때문에 인간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예상하지 못하는데 직접 뭔가를 해보아야만 비로소 자기 능력을 알게 된다.

자기 자신을 믿어야 한다.






 

 

 

우리에게 이 시대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은 주어지지 않았다.

기하학은 주도적인 사상들의 거대한 궤적을 잴 수 없고 어떻게 귀결되는지 목격하지 못하며 사상들 사이의 대립을 화해시키지도 못한다.

우리는 단지 자신의 극성을 따를 뿐이다.

이 저항할 수 없는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다면  깊이 생각하면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선택해야 한다.

수단을 위해 목적을 희생시키는 것이 운명이다.

신체 조직이 성격에 독재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자연의 책은 운명의 책과도 같다.

자연은 거대한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기지만 예전 페이지를 다시 넘기는 법은 없다.

이 세상의 인간은 조건부적 인간이다.

최선은 아니지만 현재 서식 중인 것으로는 가장 좋다는 의미다.

온 자연을 관통하여 흐르는 원소를 운명이라고 부르는데 우리에게는 제약이라고 한다.

운명이 부과하는 제약은 인간의 통찰력으로는 꿰뚫어볼 수 없다.

운명이 최종적으로 가장 높이 상승할 때 인간의 통찰과 의지의 자유는 운명의 온순한 구성원이 된다.

지나치게 광범위한 일반 개념을 제시해서는 안 되고 운명의 자연스러운 테두리나 본질적 특징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운명의 다른 요소도 감안해야 한다.

운명이 거대하긴 하지만 이중 세상에서 한 부분을 차지하는 힘 또한 거대하다.

만약 운명이 힘을 따라오면서 제약하려 든다면 힘은 거기에 맞서서 운명을 적대시한다.

우리는 운명을 자연사로서 존중해야 하지만 그 안에는 자연사 이상의 것이 있다.

인간은 자연이 만들어낸 날 것 그대로가 아니다.

인간은 자연에 맞서는 엄청난 적대적 힘, 우주의 양극을 함께 끌어당기는 존재다.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무시할 수 없다.

모순어법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자유는 필연이다.

























생각이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도덕 감정도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의지에 강력한 힘을 실으려면 우주적 힘에서 가져와야 한다.

도덕 감정을 경험했다면 선택의 여지 없이 그냥 무제한적인 힘을 믿게 된다.

통찰은 의지가 아니고 감정도 의지가 아니다.

지각은 냉정한 것이고 소망속에서 선은 죽어버린다.

볼테르는 선량한 사람들의 가장 큰 불행은 그들이 겁쟁이라는 것이다.

통찰과 감정, 이 두 가지를 융합해야만 의지라는 에너지가 생긴다.

인간을 그의 의지로 전환시켜 그가 곧 의지이고 의지가 곧 그인 상황이 되지 않으면 아무런 추진력도 생기지 않는다.

자연 중에서 가장 진지하고 무서운 것은 의지이다.

사회는 의지의 결핍 때문에 굴복하고 따라서 세상은 구세주와 종교를 원한다.

영웅은 그 길을 보고서 그 목적에 따라 움직이며 온 세상을 발밑에 두고 뿌리와 지지목으로 삼는다.

다른 사람에게 그는 곧 세상이 된다.

영웅이 인정하면 명예롭고 반대한다면 치욕이다.

그의 눈빛에는 햇빛 같은 힘이 있다.

개인의 영향력은 기억 속에서 우뚝 솟아오르며 숫자, 돈, 날씨, 중력 그리고 운명의 나머지 것은 기꺼이 잊힌다.

역사는 자연과 생각의 작용과 반작용이다.

물질과 정신은 언제나 기울어졌다가 다시 균형을 잡는다.

노동은 하나님의 교육이다.

성실한 학습자여야만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다.

노동의 비밀을 깨우치고 자신의 총명함을 발휘하여 자연에게 왕홀을 빼앗는 사람만이 진정한 주인이다.

왕홀은 국왕이 왕권의 상징으로 손에 쥐고 있는 지팡이를 말한다.

주인의 표시라는 뜻이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 연보가 있어서 저자에 대해서 빨리 정리해서 보고 싶을 때 보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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