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란 무엇인가
테리 이글턴 지음, 이강선 옮김 / 문예출판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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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테리 이글턴은 영국의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문화비평가이자 문학평론가, 1943년 영국 샐퍼드의 아릴랜드가 카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영국 문화 연구의 창시자인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제자로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했다.

옥스퍼드학교와 맨체스터대학교 영문학 교수를 거쳐 현재 랭커스대학교 영문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세기 이후 영미문학을 주로 연구했으며, 문학사상론, 포스트모더니즘, 정치, 이면, 종교 등 분야를 넘나들며 왕성한 저술할동과 사회참여를 병행해왔다.

전 세계적으로 70만 부 이상 판매된 <테리 이글턴의 문학이론 입문>을 비롯해 < 신의 죽음 그리고 문학>50여 종의 저서를 출간했다.

옮긴이 이강선은 필명은 이명, 성균과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번역학으로 석사학위를, 토니 모리슨 연구로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성균관대, 한국외국어대, 중앙대, 성신여대 등에서 영문학과 번역을 가르쳤고, 현재 호남대학교에 재직하고 있다.

문화란 다면적인 개념이어서 엄격히 통일된 하나의 경우로 논하기 힘들다.

현대의 문화관념이 왜 그처럼 중요해졌는지에 관한 질문으로 넘어가 다양한 범위의 답을 제시할 수 있다.

주요한 답들은 산업자본주의에 대한 미학적 혹은 유토피아적 비판으로서의 문화라는 관념, 혁명적 민족주의, 다문화주의, 정체성 정치의 발흥, 종교의 대체재를 찾으려는 노력, 소위 문화산업의 출현 등이다.

이는 문화가 인간 존재 속에 철저히 스며들어 있기 때문으로, 문화 상대주의의 문제 역시 인간 존재 속에 있는 것이다.

일부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다수 문화의 번창을 사실이자 중요하다고 받아들인다.

이런 관점에서 다양한 생활 형태의 존재는 게이 문화, 패션쇼 문화, 가라오케 문화에서부터 시크교도 문화, 풍자 문화와 폭주족 문화에 이르기까지 그 자체로 축하할 만한 이유가 된다. 하지만 이는 분명한 오류다.

사실 이것은 오늘날 이 주제를 검색하면 등장하는 형식적인 말들의 전형에 지나지 않는다. 문화 이론가 대부분은 생활 형태의 다원성을 믿을 뿐만 아니라 생활 형태의 혼종적 혼합물도 믿는다.

인간 역사 중 그 어떤 생산양식도 자본주의만큼 혼종적이고 포괄적이며 이종혼합적었던 것이 없었다.

자본주의는 경계를 부식시키고, 양극을 무너뜨리며, 고정된 범주를 뒤섞고, 생활 형태의 다양성을 잡다하게 버무린다.

상품보다 더 관리하고 포용적인 것은 없다.

상품은 살 수단을 가지고만 있다면 지위, 계급, 인종, 성별의 구별을 혐오하면서 누구에게나 바싹 파고들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문화연구만큼이나 계층의 적이다.

저자는 사회주의라서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것 같다.

자본주의는 자신을 포함한 바로 그 틀을 갉아먹을 수 있는 정치적 태도를 가진 사람들만 제와하고 모두를 포함한다.

영국에서 사적 의료서비스를 공적 의료보장과 혼합해 국민건강보험 NHS를 혼종화하려는 조치들이 있었다.

최고의 혼종성과그 자체가 좋은 것이라고 믿는 옹호자들은 그런 기획을 받아들인다.

미국 공화당은 자유주의적 공화당원들과 보수주의적인 티파티 회원들을 함께 포함하고 있는 혼종적 조치인데, 이는 차이의 다양성을 의문의 여지없는 장점으로 여기는 이들에게 환영할 만한 사실임에 틀림없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무슬림 동포단의 일원이고 알카에다가 미 중앙정보부 소속이라고 믿는 공화당원들이 없다면, 공화당 구성은 더욱더 황량하고 단조로울 것이다.

모든 획일성이 다 치명적인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단일성이나 의견 일치가 본질주의로 악마화될 일도 아니다.

반대로 단일성이나 의견 일치가 훨씬 더 많을수록 전적으로 환영받을 수도 있다.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기 위해 모든 종류의 의견이 필요하다는 말은 옳다.

또 그다지 좋은 다양성의 사례는 아니지만, 이민자를 환영해야 한다고 믿고 사람이 있는 반면, 그들이 탄 보트에 조준 사격을 퍼부어 침몰시켜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서로 다른 관점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

다른 관점은 단지 그것이 다르다는 이유로 존중되지 않는다.

어떤 의견은 누군가가 그런 의견을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가치 없다 여겨진다.

어떤 역겨운 관점이라도 덜하거나 더하거나에 상관없이 생각만 할 수 있다면, 어디에선가 누군가는 그런 관점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넬슨 만델라가 악의 화신이었다고 믿는 우파 아프리카너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루초 막스는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이 활동하는 클럽에는 가입하고 싶지 않을 거라는 유명한 말을 했는데, 전쟁 범죄자들이 운영하는 클럽에 가입하기를 열망하는 사람 역시 없을 것이다.

배타성의 원칙에는 잘못된 것이 전혀 없다.

예를 들자면 소아성애자 집단이나 여자들을 성노예로 매매하는 남자들이다.

또한 모든 소수자를 애정으로 포용해야 하는 건 아니다.

왜냐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아직 역사가 짧아 대중 정치운동이 어떤 주변부나 소수자들보다도 훨씬 더 강력하게 국가를 뒤흔들 역량이 있음을 증명한 때가 없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니즘은 그 자신의 정치적 역사가 혹은 오히려 정치적 역사 부재가 정치적 관점을 얼마나 깊이 형성하는지알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문화적으로 말하면 우리 모두는 동일하게 존중받는 반면, 경제적으로 말하면 푸드뱅크 이용자와 투자은행 이용자 사이의 격차는 그 어느 때보다 커졌다.

포용성을 무조건적으로 맹신하면 이런 물질적 차이를 못하게 된다.

원하는 대로 옷을 입고, 숭배하고, 사랑을 나눌 권리는 존중받지만, 제대로된 임금을 받을 권리는 부정된다.

문화는 위계를 거부하지만, 교육 시스템은 위계로 가득하다.

문화이론은 혼종성과 다원성으로부터 고통을 몰아내버릴 위험성을 갖고 있다.

여러 언어가 사용되는 카페에서 외국에서 온 동료들과 어울리면서 더욱 범 세계주의적 스타일을 추구하기 위해 모국을 배척했던 모더니스트 예술가들은 문화이론을 매혹적인 해방이라 여겼다.

모든 인간은 살아가는 데 적정한 정도의 정체성과 안정성을 꼭 필요로 한다.

일부 포스트모던 이론가들은 1980년대 이래로 인간사를 오로지 문화로만 설명하는 문화주의라는 신조를 수용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더 이상 하나의 종으로 공통적인 필요와 능력을 가진 자연적이고 물질적인 동물이라고 여겨지지 않았고, 대신 시종일관 문화적인 동물로만 파악되었다.

인간이 공유한 필수적 특징들을 공통 인간성으로 나타내는 일은 겉만 그럴싸한 보편성이라는 이름으로 문화적 차이를 억누르는 일이었던 것이다.

문화 상대주의는 아주 믿기 어려운 지점에 위치한다.

대부분의 문화주의자에게 인간 존재에 보편적 토대가 있다는 믿음은 환상이다.

문화는 단독으로 존재한다.

문화는 자신보다 더 근본적인 어떤 것, 즉 신, 정신, 물질, 인간 본성, 생명력, 변증법, 역사의 전진, 우주의 구조 등에 의지하는 것처럼 보여서는 안된다.

하지만 문화보다 더욱 심층적인 것이 있으니, 곧 문화를 가능하게 하고 필연적으로 만드는 역할을 하는 물질적 조건이 그것이다.

인간이 애초에 문화를 탄생시킨 특유한 종류의 물적 존재이고  또한 문화를 탄생하게 만든 것이 바로 이 물적 성질이다.

문화는 너무 광범위한 주제라서 그런지 역시나 어렵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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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란 무엇인가
테리 이글턴 지음, 이강선 옮김 / 문예출판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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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 유럽에서 문화라는 개념이 나왔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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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자 찾는 36가지 기술 - 좋은 사람과 만나고 싶은 당신을 위한 연애 지침서
김다인 지음 / 라온북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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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연애를 하면 그냥 밥먹고 커피 마시는 정도만 생각했는데 에로부부를 보니까 첫날에 뭘 했다고 해서 놀랐다.

요즘은 놀람의 연속이다.

상상연애만 하고 책으로 이론만 알아서 제대로 모르는 것 같다.

저자의 얘기를 들으니까 헌신된 기독교인들은 할 수 없는 것들이 많지만 그래도 도움은 되는 것 같다.

이상형은 따로 없고 사랑에 빠지면 그게 이상형이라고 한다.

이 책을 읽을 때 스탠포드에서 공부한 동생한테 외국의 연애나 성문화는 어떤지 물어봤다.

미국은 고등학교때부터 성이 개방됐다고 했다.

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박,,

저번에 그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그래도 공부 잘하는 애들은 틀리겠지 했더니 명문고등학교에서 여자랑 가장 많이 잔 애한테 상을 줬다고 했다.

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박,,

그 얘기도 들었는데 진짜인가봐,,

그래도 기독교인들은 틀리겠지 했더니 기독교인들이었는데 이성끼리 룸메이트였다고 했다.

이성끼리 어떻게 같은 집에서 살아,,

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박,,

저자는 연애도 자기 계발이라고 하고 연애도 학습과 환경이 필요하다고 한다.

















철벽을 계속 치면 평생 철장 안에 혼자 갇혀 살 수도 있다고 한다.

저자는 꼭 그 남자뿐이고 그 남자만 좋은게 아니라 어차피 남자는 또 있다고 한다.

저자는 잠수를 타거나 연락을 잘 안하는 남자는 걸러내야 한다고 한다.

국제커플에 대한 책을 봤는데 외국 사람들은 연애를 해도 연락을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하루에 정말 많이 한다고 했다.

무슨 얘기들을 그렇게 많이 하는지 궁금하다.

저자는 남녀 사이에 친구가 있을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친구라는 가면으로 한 명은 분명 다른 호감이 있을 거라고 한다.

호시탐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친구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연애 중일 때는 경계를 하는 게 맞다고 한다.

내 연인을 이성 친구 문제로 신경 쓰이게 해선 안 된다.

굳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해할 거리를, 싸움할 거리를 제공할 필요는 없다.

본인의 여사친보다 자신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을 만나야 하는 것 같다.





 

 

세상에 당연한 사랑은 없다고 한다.

저자는 진짜 내 남자를 찾아야 해서 쓰레기 유형의 남자로 시간을 낭비하면 안 된다고 한다.

남자 보는 눈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에 알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고 한다.

우리는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과정을 겪고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가차없이 헤어지라고 한다.

청년부 목사님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항상 이별을 염두에 두라고 하셨다.

저번에 읽은 책도 사랑을 얘기할 때 이별도 함께 생각하라고 했다.

이 책의 저자도 사랑과 이별을 동급이라고 생각하라고 했다.

상대방이 헤어지자고 하면 보내주는 게 맞다고 한다.

상대방이 아름다운 이별을 얘기하지만 그건 자기 합리화라고 한다.

사랑하니까 보내준다 이런 얘기도 거짓말이라고 했다.

이별을 하면 자신의 일상으로 빨리 돌아가라고 한다.

한쪽만의 이별이 아니라 두 사람 모두의 이별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저자는 진짜 내 남자를 만나려면 정신을 차리고 살아야 한다고 했다.

설렘이 사라지는 순간 진짜 사랑이 시작된다고 한다.

자신의 생각이 당연한 것을 상대에게 강요하면 안된다고 한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순간, 서로간에 진짜 사랑을 하게 된다고 한다.

사람은 시간을 누구와 어떻게 견디고 힘내느냐가 중요하다고 한다.

자기 이야기를 다 들어주고 같이 싸워준 남자는 저자가 무슨 짓을 해도 떠나지 않고 저자 곁에 있어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한다.

저자는 남자의 핸드폰을 보면 안 된다고 한다.

그 사람의 프라이버시라고 한다.

사랑할수록 그 사람이 소중하니까 더 지켜줘야 한다고 한다.

사랑할수록 다 알아야 하는 게 아니라고 한다.

그 남자는 자신의 소유물이 아니니까말이다.

의심하는 사람도 잘못이지만 의심하게 만드는 사람도 잘못이라고 한다.

상대방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도 배려이고 사랑이라고 한다.

불안하게 만드는 사람은 만날 필요가 없다고 한다.

믿음이 없으면 사랑도 없는거라고 한다.




















내 남자를 찾는데 지치면 안되고 검증해보고 자신도 그와 맞는 사람인지를 확인해야 한다고 한다.

저자는 운명 같은 건 없고 내 남자를 찾고 검증하는 일에 열정적인 사람만 일생의 한 명뿐인 내 남자를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지치면 다른 인생의 고난과 역경은 극복하기 더 힘들다고 한다.

저자는 그 남자가 그 남자라고 말하는 여자는 거기서 거기만큼만 하고 그 안에서 내 남자 찾는 것에 크게 몰두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저자는 내 남자라고 한다면 그 남자의 조건이 없어져도 극복하고 행복할 수 있는 결혼을 하라고 한다.

지금은 집안끼리 신분에 맞춰 결혼하는 조선 시대가 아니다.

선이나 중매결혼하는 시대도 옛날 말이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 있는 시대라고 한다.

스스로 내 남자를 선택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시대이다.

그런 시대가 주어졌는데도 내 남자 찾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

자신이 어떤 유형의 남자를 좋아하고 어떤 성향의 사람과 만나야 잘 맞고 잘 살 수 있는지는 자신이 가장 잘 안다고 한다.

저자는 그 놈이 그 놈이다가 아니라 그놈은 그놈이 아니라고 한다.

저자가 내 남자 찾는 36가지 기술을 알려주는데 나한테 도움되는 것들만 적용하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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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드시는 하나님 세우시는 하나님 - 팬데믹 이후, 인생 재편의 시작
박종렬 지음 / 패스오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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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흔드시고 그 다음 다시 세우신다.

하나님은 네가 할 수 있는 것만 하고 나머지는 하나님이 해주신다는 얘기가 위로가  된다.

세상을 살다보면 삶의 의지도 꺾는 인생의 위기가 있는 것 같다.

기독교는 부활의 기쁨만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고난을 이겨내면 강력한 믿음의 사람이 된다.

하나님의 움직임을 발견하는 사람은 행복하기는 하다.

인생에서 문제가 생기면 내 인생이 어디가 꼬였는지 생각할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내 인생을 어떻게 되기를 원하시는지 내가 무엇을 깨닫기를 원하시는지를 알아야  한다.

삶의 멘붕에 빠졌을 때 염려를 하지 말고 11차원도 넘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낙망하지 말고 기도의 끈을 붙잡고 있으면 이길 수 있다.

주변에 코로나에 걸린 교수님이 계신데 코로나는 몸살 감기와 같았다고 했다.

코로나로 교회가  침몰하는 것 같은데 이 책에 교회나 사람들이 다시 비상할 수 있는 방법들이 있는지 찾아 보고 싶어서 읽었다.












저자 박종렬은 14년간 공익 공익 분야에서 일했고 1994년부터 온누리교회에서 전임 사역을 시작해 미디어 연관 목회에서 많은 열매를 거뒀다.

안정적 사역을 하다가 50대 중반 2008년 조이어스교회를 개척했다.

난 믿음과 기도에 대해서 가장 관심이 많다.

내가 잘 믿는다면 이 세상에서 어떤 고난에도 끄떡없고 기도생활을 잘한다면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너무 행복하고 즐겁기때문이다.

사람들은 믿음이 있다면 모든 삶에서 형통해야 하지 않느냐고 생각한다.

그런 그렇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다.

오히려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안 풀리고 더 힘들게 살아가기도 한다.

그래서 당황하고 맥이 빠진다.

그러나 기독교의 믿음은, 믿음으로 인한 구원은, 이 구원의 은혜는 형통함으로 인도하지만 형통과 동격은 아니다.

그 본래 의미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삶의 모든 영역을 다스리고 지키고 인도해주시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5)




세상 이치와 기준에 익숙해지면 믿음도 외형적이고 물질적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인간적인 야망과 영적 세계에서 말하는 믿음은 분명 다르다.

믿음의 실체, 믿음의 크기는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느냐에 달려 있다.

믿음은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새기고 또 새기고 하나님을 끝간데 없이 무한대로 신뢰해야 겠네,,

인생이 너무 힘들 때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할 수 있냐고 하는데 죽음직전까지 갔을 때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붙들게 없었다.

난 어쩔 수 없이 하나님만 붙들었고 그런 나를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으시고 나의 손을 붙들어 주셨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믿음으로 요셉은 임종 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받기를 거절하고 (히11;8, 22, 24)









믿음을 빼고 아브라함이나 요셉의 삶을 생각하면 미련하고 바보스러운 인생이다.

자기 꿈과 야망을 따랐다면 더욱 확실하고 유리하게 자기 자리를 찾아 가야 했을 것이다.

믿음의 사람, 믿음의 세계, 믿음의 원리는 세상 원리와는 전혀 다른, 또 다른 세계를 만들고 또 다른 세상에서 살게 한다.

진짜 믿음은 약속의 말씀을 붙드는 것, 그 약속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믿음의 근거는 내가 경험한 것, 내가 본 것, 내가  행한 것에 있지 않고 주님의 말씀에 있다.

겨자씨만 한 믿음 자체로만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믿음 자체가 기적을 만들어내지는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야 한다.

능력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것이다.

겨자씨만 한 믿음은 믿음의 근거, 믿음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말씀하신 것이다.

믿음의 근원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눈을 뜨는 것, 그 예수를 내 삶과 능력의 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주님은 바라신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이 믿음의 근본이다.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골1:10)

기도는 영혼을 살리고 유지시키는 호흡이다.

모든 믿음의 사람에게 기도는 지켜야 할 원칙의 문제가 아니라 삶 그자체이다.

인간은  다른 무엇보다 영으로 사는 존재임을 알게 하고 영의 능력으로 살아야 행복하다는 것을 알도록 한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눅18:1)

기도는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과의 만남이고 대화이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내 안에서 일하시는 생명의 능력을 나타낼 수 있다.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기도는 그  모든 상황, 환경, 인간의 약점, 연약함을 돌파하는 힘을 준다.

사방이 다 막혔더라도 하나님을 찾고 예수께 나아가는 기도의 길은 언제든지 열려 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세계를 마음껏 펼쳐 보여주신다.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이는 변함없는 진리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볼 수 있게 한다.

기도의 열매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특징이 있다.

겉으로 볼 때는 힘도 없고 볼품도 없지만  그 안에는 강인한 힘이 있고 말과 말 사이에 분명한 매듭과 확신이 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주변을 둘러보고 우리 자신을 살펴보아도 믿을 만한 것 하나 없는데 그래서 외롭고 고독하고 두려움과 염려뿐인데 하나님은 늘 그 자리에 계신다.

기도만이 살길이다.

절망적 상황에서 절대자를 놓치지 않는 것이 정의를, 인자를 나타내는 겸손한 자의 영성이다.

하나님앞에 부르짖으며 침묵하며 몸부림치며 해왔던 모든 기도는 영원히 남아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붙잡고 드린 기도는 사라지지 않는다.

기도는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 나라에 쌓아둔 자본금이다.

하나님은 성도가 그렇게 쌓아둔 기도를 세상에서 필요할 때마다 기도자의 삶에 필요할 때마다 크고 놀랍게 사용하신다.

개인에게 응답되지 않은 기도도 있고 상황이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믿음으로 구하는 모든 기도를 하나도 버리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 기도를 당신의 품 안에서 잘 품으시다가 어느 순간 때가 되면 강력한 생명력으로 나타나도록 사용하신다.

이것이 기도의 힘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도의 사람은 절대 죽지 않는다.

불멸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기도는 하면 할수록 아버지의 품을 파고들어 그 품 안에서 둥우리를 만들고 그 안에서 많은 열매와 결과를 낳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로 세상을 다스리시길 원하신다.

기도가 넘칠수록 세상은 좋아지고 아름다워지며 기도가 강해질수록 세상 세력은 약해진다.

하나님 나라 운동은 우리의 기도에 달려 있다.

기도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변함없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로다(시2:8)

이 책은 내가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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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 동반성장, 자본주의 정신
정운찬 지음 / 파람북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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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정운찬은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경기도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미국으로 건너 가 마이애미대학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고 프린스턴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컬럼비아대학에서 교수로 강의와 연구를 하다가 1978년 말 귀국해 서울대 교수가 되었다.

서울대 경제학부장과 사회과학대학장을 거쳐 서울대 제23대 총장에 선출되었다.

대한민국 40대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한국 경제는 70여 년간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룩했다.

눈부신 성장 뒤에는 미래를 위해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

바로 함께 잘사는 사회, 더불어 잘사는 삶이라는 가치이다.

그렇다고 사회주의를 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한국 사회는 산업화를 거치는 과정에서 소수에 의한 소득과 부의 독점과 기회의 불평등 현상이 나타났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지,,

저자는 기회 평등을 바탕으로 하는 사회적인 격차는 용인되어야 하지만 기회가 평등하지 않은 상황에서 발생하는 격차는 수용하면 안 된다고 한다.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지 못한다면 적극적으로 개선해나가야 한다.

불공정한 상태를 방치하여 만들어진 격차, 부정행위로 만들어진 격차도 용인하면 안 된다.

시장경제 체제에서 경쟁이 효과적으로 기능하도록 만들어진 규칙과 감시기구가 중요한 이유는 시장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확보하여 구성원들에게 신뢰를 얻기 위함이다.

지금은 신뢰가 다 깨졌다.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고 경쟁이 공정하게 이루어지더라도 어쩔 수 없이 승자와 패자가 나올 수 있다.

하지만 패한 구성원과 승리한 구성원 사이에 격차가 너무 벌어져 마침내 양극화가 고착되는 것도 용인해서는 안 된다.

경쟁에서 패하더라도 직업 교육과 업종 전환, 개인의 노력으로 재기할 수 있는 유연성과 유동성을 확보해야 한다.

이와 같은 동반 성장을 사회를 위해서는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한국 경제의 활력이 저하된 배경에는 정부정책의 실패와 민간 부분의 소비와 투자 부진에 따른 수요 위축과 고용 및 기술력 둔화에 따른 공급 정체라는 요인이 있다.

저자가 동반성장이라고 해서 사회주의나 반자본주의가 아닌지 의구심이 들었다.

저자는 진짜 그런 이념적 공격을 받았다고 한다.

저자는 동반성장은 좌우나 보수 대 진보라는 이념적 프레임 안에 있는 개념이 아니라 우리 경제의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실사구시적 대안이었고 그동안 제기된 이념에만 치우친 반론은 매우 아쉽다고 했다.

동반성장이 사회주의적이라며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 반대하는 것은 동반성장이 무엇인지 살펴보지 않은 채 그저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격이라고 한다.

동반성장이 반자본주의적이라고 비난하는 것도 자기 스스로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다.

동반성장은 앞서 가는 사람들에게 같이 가자고 말한다.

동반성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같이 가자는 말 속에 앞서 가고 있는 사람들을 뒤로 끌어내리려는 불순한 의도가 숨어 있다고 의심한다.

앞서 가는 사람들을 끌어내리려 한다면 그것이 곧 반자본주의적 사상일 수 있다.

앞서 가는 사람이 있다면 뒤쳐지는 사람도 있는데 왜 앞서 가는 사람에게 같이 가자고 하는가,,

그런 능력의 차이는 하나님이 만들어놓은 타고난 것인데 저자가 뭐기에 하나님이 만든 인간의 능력 차이를 부정하는가,,

그런 사상이 곧 사회주의 사상, 공산주의 사상이 아니고 무엇인가,,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자신의 이기심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저자는 이기심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후생도 같이 생각을 하자고 하는 것 같다.

각자가 이익과 효용을 극대화하면 사회적 후생은 저절로 극대화되고 남 걱정할 필요 없이 자기 이익을 최대로 추구하면 된다.

아담 스미스의 각자의 이익을 극대화하면 그걸로 충분하다라는 식으로 이해한다면 자본주의를 너무 편협하게 해석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상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과 행동 자체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닐뿐더러 인간이 모여 구성하는 사회는 더욱 간단한 원리 하나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면 만사 오케이이다.

다른 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면 경제학을 잘못 배운 것이고 자본주의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난 항상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의 정체가 이기심만 있는지 궁금했다.

자본주의 경제의 최고 이상은 이윤 극대화이며 이윤 극대화를 위해서라면 무한 경쟁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신자유주의이다.

아담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고 사회에 속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경제활동을 연구할 때 개인 내면을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간이 사회 구성원의 하나라는 측면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제활동을 이해하는 데도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개인이라는 측면과 사회 구성원이라는 측면을 동시에 감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이기적인 성향과 사회적 성향을 같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사회적 성향 때문에 인간은 도덕 또는 윤리의식을 가질 수 있다.




















아담 스미스는 인간이란 다른 사람들이 정의를 위반하는 것을 절대로 감수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공공 사법당국은 정의라는 미덕의 실천을 강제하기 위해 영연방의 권력을 행사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예방 조치가 없다면 시민사회는 모든 사람이 상처를 입었다고 믿을 때마다 자기 손으로 보복에 나서는 유혈이 난무하는 무질서한 조직으로 변할 거라고 했다.

아담 스미스는 이기심에 대해서 무한 신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담 스미스는 각 개인의 이기적인 추구는 사회적 다툼의 풍부한 원천이라고 했다.

그래서 정의법칙과 도덕법칙이 필요하다고 했다.

도덕법칙은 완벽하게 강제할 수 없으며 오직 본인 스스로의 절제에 의해 지켜진다.

정의법칙은 부분적으로는 개인들이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절제에 의존하지만 정의법칙이 확실하게 준수되려면 법으로 강제해야 한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정의법칙이나 도덕법칙 같은 제재가 필요한 이유는 인간의 판단은 편파적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한 안 좋은 판단은 실어하고 자기기만을 할 가능성이 높다.

무엇이 맞고 적절한가에 대한 법칙은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계속적으로 관찰한 뒤 이성과 추론의 기술을 사용하여 얻어지는 결과다.

도덕법칙에 대해 아담 스미스는 우리의 도덕적 능력이 지시하는 대로 행동함으로써 우리는 필연적으로 인류 행복 증진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신과 협력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고 우리의 힘이 닿는 한도까지 신의  계획을 시행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스미스의 특징적인 주제인 인간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그의 원래 의도와 관련이 없던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는 견해를 설명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손은 신의 손이다.

신의 손에 따라 인간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가 의도하지 않았던 것을 이루게 되는 경제원론에서는 그것을 효용의 극대화, 이윤의 극대화라고 한다.

스미스가 말했던 것은 인류의 최대 행복이었다.

보이지 않는 손에 따라 자기도 모르게 이루게 되는 것은 인간을 최대한 행복하게 만들고자 하는 신의 계획이다.

신의 손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도덕적 능력을 통해서다.

도덕적 능력이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법칙이 지시하는 대로 움직여야 사회적 후생이 최대화될 수 있다.

도덕 법칙을 따르지 않고 정의 법칙만 따른다면 즉 처벌받지 않을 정도로 최소한의 법률만 지키는 식이라면 그 사회의 행복은 절대 극대화되지 못하는 것이다.

항상 보이지 않는  손의 실체에 대해서 궁금했었는데 저자가 그것을 풀어줘서 좋았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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