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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일은 여자가 필요해 - 268년 된 남자 학교를 바꾼 최초 여학생들
앤 가디너 퍼킨스 지음, 김진원 옮김 / 항해 / 2020년 9월
평점 :
절판

우리나라에서는 하버드가 제일 유명하고 그 다음이 예일대학이 유명한 것 같다
미국친구말로는 우리나라 서울대에 해당하는 게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이고 연세대에 해당하는 게 스탠포드, 서강대에 해당는 게 시카고대학, 경희대에 해당하는 게 포댐대학이라고 했다.
1968년 여름, 전미의 여학생들이 처음으로 예일 대학에 지원서를 넣을 수 있었다.
예일대학은 여자를 받은 게 얼마 안 된 것 같다.
매년 ‘1000명의 남성 지도자’를 졸업시키는 데 전념하던 아이비리그 중에 하나인 예일이 마침내 미국의 뛰어난 여학생들에게 문을 연 것이다.
이 일은 양성평등을 위한 교육상의 큰 진전이었다.
그러나 이해 예일 대학에 최초로 입학한 여성 학부생들이 맞닥뜨린 것은 압도적 남성 문화였다.
268년 된 남성의 성역에 들어선 여학생들은 섬처럼 고립되었고, 자신들이 예일이라는 엘리트교육이 제공하기로 되어 있던 수많은 특권에서 제외된 이방인임을 점차 깨달았다.
나도 물리학과에 다닐 때 여학생이 4명이고 전부 남학생이니까 사람들은 공주 대우 받지 않는냐고 하는데 투명인간 취급 받는다.
여학생들의 의견은 반영이 안 된다.
이 책은 수세기 동안 이어진 명문 교육기관의 후진적 전통에 맞서 싸운 젊은 여성들의 이야기이자, 그들이 여성에게 미래의 기회를 만들어냈는지에 대한 얘기이다.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고투한 이들의 노력은 오늘날까지 울려 퍼지며 힘과 회복력, 용기에 대한 영감을 준다.
여학생을 받기 전에 예일 대학에는 남학생뿐이었다.
여자 친구를 사귈 수 있는 길이라고는 바사나 스미스 같은 일류 여대에서 주말마다 버스를 타고 오는 여학생들과의 사교 모임에 얼굴을 자주 비치는 방법 밖에 없었다.
버스마다 여학생들이 50명 정도 타고 있었다.
그녀들은 자정이 되면 왔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이 네 시간 남짓 동안 예일대 남학생들은 짝을 찾았다.
이미 여자 친구가 있는 남학생은 토요일이 되면 연인과 팔짱을 끼고 자랑스레 미식축구 경기장에 들렸다가 학생 식당이나 인근 레스토랑으로 가서 의기양양하게 식사를 했다.
그러나 나머지 주중 내내 예일대 남학생은 오로지 한 가지성만 존재하는 세상에 살았다.
당시 예일 대학을 그대로 그려보려면 남성만 사는 마을을 상상하면 된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학생들은 남성만 있는 교실에서 수업을 듣고 남성만 있는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남성끼리만 과외활동을 학고 남성만 있는 기숙사로 돌아왔다.
예일 대학은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남성만 존재하는 학교였다.
여자 친구는 남학생의 재산 중 가장 귀한 물건이었다고 한 예일대 남학생이 말했다.
여자 친구를 물건이라고 표현을 하네,,
그렇지만 여학생들이 다 그런 대접을 받은 건 아니었다.
한 남학생이 아리따운 여학생을 예일대 학생 식당으로 데려오면 동기들은 유리 물컵을 숟가락으로 탕탕 치며 인정의 뜻을 표했다.
유치한 표현 방식이다.
예일대 남학생들의 남녀공학에 대한 시각은 시어러가 신입생으로 예일대교정을 처음 밟은 이래 4년이 흐르는 동안 차츰 변해갔다.
몇몇 예일대 남학생은 여전히 남학생뿐인 학교의 끈끈한 형제애 속에서 만족스러워했다.
만족스러워 하는 이유는 이성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압박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1968년 무렵에는 대다수 예일대 남학생이 덫에 걸린 듯 남성만 사는 마을에 묶여 학창 시절을 보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이들은 연애를 고파했다.
한 가지 성만 있는 생활을 부자연스럽게 여겼다.
그저 여자 친구를 사귀고 싶어 하는 이들도 있었다.
물리학과 다닐 때 그저 연애가 하고 싶어서 그런지 저번 주에 나한테 고백했던 애가 이번주에는 4명 중에 다른 애한테 고백하는 걸 물리학과에 다니는 내내 겪었다.
나만 빼고 3명은 캠퍼스커플이 됐는데 그때부터 애들이 나만 보면 수근거렸다.
별로 신경 안 썼는데 경영학과로 과를 바꾼 뒤에 내가 물리학과에서 남자를 싫어하는 레즈비언이라고 소문 난 걸 알았다.
사람들은 자기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으면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한다.
누군가 한 명이 거짓말로 시작했을거고 거기에 동조를 하는 사람들이 불어나면서 그게 기정사실화되는 것이다.
박근혜대통령도 그럴지 모른다.
어떤 기자가 박근혜대통령 섹스비디오가 나오고 독일에 몇 조가 있다더니 언제 나오는데,,
다 거짓말이었어.
박근혜대통령이 집에서 혼자 불어나 영어공부하고 하루종일 책만 본다고 했다.
책 몇 권만 봐도 친구들 전화 받을 시간도 없고 친구 만날 시간도 없고 텔레비전의 존재는 잊고 딴 짓할 시간이 전혀 없다.
인터넷 잠깐잠깐 보는 것만 빼고는,,
시간이 모자라는데 박근혜대통령이 이상한 짓을 했다고 하는 건 거짓말이었다.
공부나 책을 전혀 안 읽는 무식한 좌파들이 하는 거짓말,,
그래서 소문의 진위를 정확하게 끝까지 밝혀야 한다.
예일대는 전국에서 가장 우수한 남학생이라면 인종, 계층, 종교와 무관하게 입학을 허용했다.
예일 대학에서 오랫동안 다수를 차지해온 사립 고등학교 남학생은 더 넓은 장을 두고 경쟁을 벌여야 했는데 이들의 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이를 메우려고 예일 대학은 공립학교 학생을 점점 더 받았는데 아주 드문 예외를 제외하고 이 학교들은 대개 남녀공학이었다.
남학생뿐인 앤도버나 엑서터 출신에게는 남학생만 있는 예일 대학이 자연스러웠지만 공립고등학교 출신 남학생에게는 그렇지 못했다.
시어러가 졸업반으로 올라갈 무렵 예일 대학의 네 개 학년 학생 가운데 절반은 클라크가 뽑은 학생이었다.
남학생뿐인 예일 대학의 상황을 끝내려고 이전 학생들이 기울인 노력과 마찬가지였다.
예일대 총장인 브루스터는 정치적으로 보수 성향을 띠었지만 여러 문제를 열린 마음으로 대했다.
뉴잉글랜드의 지체 높은 명문가 출신이면서도 타인에게 배움을 구할 때는 출신을 따지지 않았다.
그런데 남녀공학 문제에 관한 브루스터와 예일대 남학생은 팽팽한 입장 차이를 보였다.
브루스터를 규정하는 양면성 가운데 인종, 종교, 계급에 대한 진보적인 태도와 성에 대한 보수적 관점 사이의 대조를 보였다.
브루스터는 흑인이나 유대인을 차별하는 모임에는 발길을 피했고, 흑인 학생 및 과거였다면 자식을 예일 대학에 보낼 엄두도 못 내던 집안 출신 학생에게 문을 활짝 열어, 대학 운영에 뚜렷한 변화를 몰고 왔다.
그런데 여성에 관해서 한 브루스터는 세상 모습 그대로에 만족했다.
점심시간이면 여성에 관한 한 브루스터는 여성을 받지 않는 클럽의 메인 식당에서 식사를 즐겼다.
1968년 무렵에 예일대 남학생들은 남녀공학 문제에 답변을 달라고 브루스터에게 계속 요구하고 있었다.
데이비스라는 사람이 1966년 <예일 데일리 뉴스> 편집장이 되고 2년이 넘도록 답보 상태였다.
데이비스는 첫 사설에서 남녀공학은 더는 논쟁거리가 아니다라고 못 박으며 남학생만 있는 예일 대학의 비현실적이고 인위적이고 억압적인 사회 환경을 종식할 시기가 지나도 한참 지났다고 했다.
브루스터는 여성을 별개의 존재로 여겼고, 자신과 동등한 지위를 가진 여성을 낯설어 했다라고 존 윌킨슨 부사감은 말했다.
남녀공학을 반대하는 브루스터의 입장 한가운데는 이런 인식이 있었다.
브루스터가 볼 때 여학생을 받아들이면 예일 대학의 미래 지도자를 배출하는 일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브루스터는 남학생이 사회지도자가 되는데 방해가 되고 여학생는 사회지도자가 도리 수 없다고 생각한거다.

1968년 무렵 예일 대학은 대법관, 미국 대통령, 소수의 상원의원, 주지사, 최고 경영자를 배출했다.
하버드 대학, 프린스턴 대학과 더불어 예일대학은 국가 지도자를 배양하는 훈련소로 바라보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예일 대학은 20년 뒤 이 평판을 입증했다.
1989년부터 2009년 사이 미국 대통령이 모두 예일대 출신이었다.
브루스터는 노련한 정략가였다.
2년 내내 내리 데이비스가 사설을 통해 맹공격을 퍼부었지만 그는 여학생을 입학시키기는커녕 그녀들을 뉴헤이븐으로 데려오는 데 불과한 자매 학교의 가능성을 흘리며 예일대 남학생들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남녀공학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남학생에게 예일 대학은 남성만 사는 우울한 곳이었다.
대학은 여성을 주변부에서 맴돌게 했다.
난 어떤 사람이든지 들러리, 주변인, 잉여인간, 히키코모리로 만들려고 하는 걸 지지하지 않는다.
1968년 예일 대학에는 여성 종신 교수가 두 명 있었다.
반면 남성 종신 교수는 391명이었다.
예일 대학만 남성 교수를 선호한게 아니었다.
오랫 동한 남녀공학이던 대학에서도 여성 교수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미시간 대학은 전체 교수 가운데 4페센트만이 여성이었고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은 2페센트만이 여성이었다.
나도 대학교 다닐 때 물리학과나 경영학과에 여성 교수님은 1명도 없었다.영문학과에만 여성 교수님들이 좀 많았다.
미시간, 버클리 대학 모두 1870년대부터 여학생을 가르쳐왔음에도, 예일 대학이 남성 위주 문화를 유독 심하게 고수한 건 맞지만 당시 미국 대학들의 상식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브루스터는 뉴욕으로 가서 예일 재단 사람들과 회동했다.
1967년부터 남녀공학 찬성론을 폈던 재단 이사 어윈 밀러는 예일 대학입학의 질은 여학생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오래도록 천천히 하향세를 그릴 것 이라고 경고했다.
브루스터가 마음을 굳히고 대중 앞에 나서기까지 아직 마지막 단계가 하나 더 남아 있었다.
남녀공학 안건을 교수진 앞에 내놓는 것이었다.
남녀공학 투표결과는 200대 1로 거의 만장일치 찬성이었다.
유일한 반대표는 역사학 교수인 조지 피어슨이 던졌는데, 그는 1922년 열일곱 살에 신입생 자격으로 예일대 교정을 밟은 이후 46년이 지나도록 예일 대학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었다.
브루스터가 남녀공학 발표를 하고 나흘도 채 지나지 않아 예일대학은 여학생들에게 800통에 이르는 입학 문의서를 받았다.
남학생뿐이던 교육기관에서 남녀 학생을 동등하게 대우하는 교육기관으로 변모하기 위해 진정한 변화를 모색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었다.
그러한 변화를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브루스터가 서둘러 조직한 남녀공학위원회는 가능한 현 상태를 최대한 깨뜨리지 않으며 여학생을 받아들이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현 상태를 깨뜨리는 것은 예일 대학에 처음 발을 디딘 여학생들 몫이 되었다.
그러려면 먼저 예일 대학에 들어와야 했다.
예일 대학은 미국에서 음악 활동이 가장 활발한 대학이었다.
세계 최상급 음악당도 있었다.
예일대 여학생들은 표면상 서로 여학생들의 친구도 아니었다.
각 기숙사에 몇 안 되는 여학생 수가 있었지만 여성이라는 점 말고는 공통점이 거의 없었다.
기숙사에서 마음 맞는 친구를 찾지 못하면 정말 외로움이 사무치게 된다.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여학생 사이의 우정은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분위기도 짙었다.
기숙 여학교 콩코드 아카데미에서 온 한 1학년생은 이를 가리켜 예일 대학의 반여성 길들이기 라고 불렀다.
마찬가지로 콩코드 아카데미 출신인 이 여학생의 동기도 예일 대학에서 이런 태도를 목격했다.
예일대 남학생들은 자신들 무리나 활동은 문제 삼지 않으면서, 여학생이 모이면 딱하게 여기거나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녀들이 들어오기도 전에 정해놓은 결정과 건물 구조와 여학생의 우정은 별거 아니라는 문화 때문에 예일대 여학생들은 흩어졌다.
1월이 되어, 여학생들은 이제 겨우한 학기를 마쳤고 몇몇 교수들은 응큼한 목표가 점점 치밀해졌다.
케이트 필드라는 학생은 시를 가르치는 교수가 상급생과 대학원생이 함께하는 주간 문학 토론을 하는데 참여하지 않겠냐고 물어와서 우쭐해졌다.
케이트는 후서토닉 강이 흐르는 매사추세츠 서쪽 끝 온통 숲과 습지로 둘러싸인 집에서 자랐다.
부모님은 명망 있는 7대 여성 명문 대학 서븐 시스터스중 하나인 웨슬리 대학 입학 요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어린 케이트를 기숙 여학교에 보냈다.
예일 대학 입학 무렵 케이트는 이미 시집을 낸 시인이었고, 케이트의 교수가 자신의 재능을 인정해서 점심 문학 모임에 초대한 거라고 생각했다.
케이트는 매주 문학 모임에 참석한 지 한 달쯤 되었을 때였다.
교수가 예일 대학의 그로브 거리 묘지로 산책을 가자고 권했다.
교수든지 뭐든지 남자와는 단둘이 있는 상황을 만들지 말라고 책에 씌여 있다.
경치도 아름다웠고 유명한 묘지도 있어서 누구나 잘 아는 곳이었다.
케이트는 예일대 생이었지만 아직 열일곱이었다.
교수가 달려들자 케이트는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사람을 한참 잘못 봤다고 케이트는 교수에게 딱 잘라 말했다.
교수가 왜 저려냐,,
좌경화된 교수인가보다.
난 대학교 다닐 때 생각해보면 거의 기독보수교수님들이 많았던 것 같다.
교수님들이 나한테 천재소녀라고 계속 그래서 2년 조기졸업한게 그렇게 천재소녀라고 들을 얘기인가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들어 보니까 내가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나이에 대학을 온 줄 알고 교수님들이 나만 보면 천재소녀라고 했던 거다.
그 교수님들은 만나면 기도해주고 공부 가르쳐 주고 맛있는 거 사주고 책주고 그랬는데 미국 교수는 학생을 건드리려고 하다니 충격이다.
1960년대는 미국도 성의식이 너무 떨어지는 것 같다.
남학생들은 한 가지 성만 있는 게 싫어서 남녀공학을 주장 했는데, 여성 대학원생들은 몇몇 교수의 먹잇감이 되었다.
이들 가운데 한명은 예일대 대학원에 등록하기도 전에 토나오는 사건을 겪었다.
입학심사가 진행되는 동안 작품집을 제출했는데, 마지막 그림 심사가 끝날 즈음 교수가 어깨를 와락 껴안으면서 이것 말고 다른거 보여 달라고 했다고 한다.
생각만 해도 더럽다.
또 다른 여학생은 지도교수가 교수실에 보자면서 불러놓고 거기서 자신의 도착 행위를 하자고 요구했다고 한다.
도착행위가 뭔지 찾아 보니까 성도착증이고 성도착증은 성적 행위에 있어서 변태적인 이상 습성이라고 한다.
성적인 것도 모르는데 변태적인 거는 또 어떻게 안다고 계속 찾아 보니까 소아성애자같은 인간들이 변태에 들어 가는 거였다.
그 뒤 그 여학생은 예일 대학을 그만 두었다.
다른 여학생도 지도교수에게 추행을 당했다.
또 다른 여성 대학원생의 경우 대학원 학과장이 괴롭혔다.
이런 일이 있기 때문에 케이트는 이 학교를 그만두지 않기 위해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했다.
케이트는 교수가 전혀 무섭지 않았다.
다만 전도유망한 젊은 여성 작가를 알아본 예일 대학 교수라는 사람의 행위가 실망스러웠고 분노가 치솟았다.
그런 행동을 하면 교수라도 개로 보이고 난 사람취급을 안 할 것 같다.
2학년인 데니즈 맬릿이라는 학생은 웨슬리 대학에서 예일 대학으로 편입했다.
그녀는 예일대생을 분류하는 인종이나 계층 어느 범주에도 들어맞지 않았다.
데니즈는 어머니 고향인 뉴욕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회사 일로 베네수엘라와 푸에르토리코에서 컸다.
그래서 라틴계 여성은 아니지만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데니즈는 유럽으로 떠났다가, 곧 은퇴 예정인 아버지를 대신해 돈을 벌기 위해서 예일 대학에 다니며 웨이트리스 일을 했다.
데니즈에게는 남다른 지성이 있었다.
고교 시절 내내 주말이면 아버지와 함께 책을 읽곤 했다.
데니즈가 예일 대학에서 보낸 첫 학기는 순풍에 돛 단 듯 순조로웠다.
예일 대학에 들어올 때 그녀는 이미 남자 친구가 있었다.
남자 친구는 4학년으로 유명한 위펜푸프스의 단원이었고, 데니즈가 위즐리 대학 1학년일 때 크리마스 방학을 보내다가 만났다.
주말이면 남자 친구와 함께 위펜푸프스 공연을 보거나 파티에 가거나 미식축구 경기를 응원했다.
데니즈는 다른 여학생들처럼 동성 친구가 거의 없었다.
임자 있는 몸이었기 때문에 맞닥뜨려야 했던, 남학생들의 알방적 관심을 피할 수 있었고 그들과 더 수월하고 편안히 우정을 쌓을 수 있었다.
교수 한 명이 밤에 데니즈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데니즈는 대학에서 드물게 기숙사 1인실을 쓰고 있었다.
그때는 전화기가 울리면 부모나 친구, 데이트 중인 상대일 거라고 여기며 수화기를 들던 시절이었다.
그 교수는 밤에 전화를 걸어서 데니즈에게 무슨 잠옷을 입고 있는지, 감촉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몸에 꽉 끼는지 따위를 묘사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난 생각만해도 징그러워서 바로 전화를 끓을 것 같다.
그 교수는 남학생과 다른 과제와 시험을 내줬고, 내용은 온통 성과 관련된 것뿐이었다.
그 교수의 수강을 그만 두기는 너무 늦어 버렸다.
데니즈는 봄에 교내위원회에서 일했는데 예일대 관리직이 위원장으로 있었다.
어느 날 위원회에서 진행하는 일을 상의해야 하니 만나자고 한 위원장은 그녀를 강간하려 했다.
그는 아내와 아이들 사진도 벽에 걸어 놓고 있었다.
데니즈는 가까스로 벗어났지만 그 이후로 자신이 나약하다는 기분을 떨 칠 수 없었다.
나머지 학기 내내 데니즈는 푸에르토리코 집으로 내려가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예일 대학에서 성희롱이 일어나면 대개는 지도교수를 바꾸고 강의를 바꾸고 교수를 피해 다녔다.
여학생들에게 남학생 수를 줄이자는 말은 하면 안 된다고 주의를 주었다.
남학생 자리가 줄어들어 자기 아들이 예일대 입시에 떨어지면 졸업생들은 일제히 여학생 탓을 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며, 그렇게 되면 신입생 지원이 축소될 수 있다고 했다.
엘가라는 기숙사 사감은 예일대 여학생들에게 지지를 보냈고 그들의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엘가는 가장 어른스러운 여성이었고 여성을 위해서 일하는 역할을 해냈다.
과거의 예일대는 성범죄자가 왜 이렇게 많았냐,,
그 범죄자가 교수나 교직원이었다.
예일대의 우수한 남학생을 유치하고 그들이 연애를 할 수 있게 하려고 여학생을 받은거네,,
여학생을 완전히 연애 수단화를 한 거다.
예일녀들처럼 투쟁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지금처럼 조금은 안전하게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된거다.
교회언니도 여자는 꼭 성공을 해야 한다고 했다.
여자는 20대때 결혼해야지 잘하는 거라고 하더니 언니들을 보니까 완전 거짓말이었다.
언니는 자신이 사회적으로도 성공하고 결혼도 잘한 건 리스크가 낮고 자신을 격려해주고 같이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서라고 했다.
언니 얘기를 잘 참고해야겠다.
예일은 우수한 남학생유치때문에 여자가 필요하다고 했는데 여자들은 깊은 학문과 성공을 위해서 예일이 필요하고 이용하려고 간거다.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