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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한가운데 영원의 길을 찾아서 - 100세 철학자 김형석 교수의 신앙 에세이
김형석 지음 / 열림원 / 2020년 1월
평점 :
절판

엄마의 롤모델이 모지즈할머니랑 시바다 도요시, 김형석교수님, 김동길교수님이라고 하신다.
그 분들의 특징은 100세 가까이 살면서 일을 하고 깊이가 있는 삶이다.
김형석교수님은 외적으로 보면 80대도 안 보이신다.
엄마한테 김형석교수님얘기는 귀가 따갑게 계속 들었다.
그래서 더 끌리고 책을 읽어 보고 싶다.
내가 엄청 사랑하고 깊이 만나고 있는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궁극적인 이유를 알려 주신다고 하니까 더 읽고 싶은 책이었다.
소유물은 우리를 떠나가서 허무해지고 인간은 소유물보다는 영원에 대한 염원이 있고 갈망이 있는 존재라고 하는데 동의한다.
철학과 종교의 접목, 과학과 종교의 접목, 종교와 법의 접목이라는 분야는 정말 끌린다.
압도적 지식의 우위에 있는 분의 지식적인 언어는 나에게 엄청난 매력적인 것으로 다가온다.
그런 분의 책을 읽으면 간접적으로라도 그분을 만나는 효과가 난다는 생각이 든다.
100세 교수님의 깊이 있는 삶과 신앙은 누구나 궁금해할 것 같다.
이 책은 100세의 철학자 김형석 교수의 신앙 에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들은 많다.
희망의 이야기, 사랑의 철학이야기...., 그리고 우리에게 남은 단 하나의 삶의 과제가 있다면 그것은 ‘영원에의 길’일 것이다.
톨스토이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고 질문했듯, 나는 왜 고통투성이 삶을 사는지 하나님에게 이따금 묻는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 묻는지 궁금하다.
김형석 교수는 이 질문에 답하면서, 종교를 넘어선 ‘신앙’ 에 대해 말한다.
사람들은 교회를 떠났고, 예배당은 적막하다.
이 적막의 시대, 철학계의 거장이 우리에게 전하는 신앙 이야기는 새벽별처럼 고요하며 강렬하다.
새벽별을 보면 큰 감동은 없지만 작은 울림이 있다.
다른 종교에 대한 부정적 비판이나 배타적 교리를 지양하는 김형석 교수의 신앙론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의 인간다운 삶을 약속해 줄 수 있으며, 어떻게 해야 자유와 평화를 중대시킬 수 있을지 종교 스스로 제시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일의 가치에 대해서는 너무 생각을 안 한다.
그래서 일은 이런 것이다하는 많은 생각 가운데 한 가지쯤은 젊었을 때부터 뜻을 가져야 한다. 50대, 60대가 됐을 때 직장 생활에 대해서 이런 것은 알아야겠다 것이 있어야 한다.
사람은 살아 보니까 이런 생각쯤은 하나 해야겠다는 게 있다.
모든 사회가 다 겪어야 하는 사회적 과제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저자는 30대 중반에 연세 대학교에 교수로 갔다.
그때는 대학의 교수직이 되면 기초 생활을 하는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기초 생활이라 함은 크게 먹고사는 것과 자녀를 교육시키는 것, 이 두 가지를 말한다.
그런데 저자는 대학에 교수직으로 갈 때 그렇게 되지 못했다.
그래서 몹시 가난하게 대학 교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 원인은 3.8선을 넘어서 탈북해 올 때 완전히 빈손으로 왔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없이 와서 6,7년 동안 겨우 중 고등학교 교사, 교감으로 있으면서 조금씩 자리를 잡았다가 6.25전쟁 때 다 없어지고 말았다.
더 큰 걱정은 고등학교 교감으로 있을 때는 학교에 사택이 있어 집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는데, 연세대학교로 가니까 사택이 없으니, 머물 곳이 없어진 것이다.
셋집도 못 얻고 정말 고생했다.
또 한 가지 고생하게 된 것은 그때는 '아들 딸 가리지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하던 때이다. 이것이 가족계획이라고 하는 인구 정책이다.
인구가 빨리 늘어나게 되면 국민들이 더 가난해진다.
그건 어느 나라나 경험한다.
중국도 인구가 많으니까 법적으로 자녀를 하나만 낳게 했었다.
그때 우리 부부는 6명을 낳아 키웠다.
지금 같으면 정부에서 표창을 줄 만하지만, 그때는 자녀가 6명이라고 하면 챙피할 때다.
6.25전쟁이 끝날 무렵 동생 셋과 어머니도 북한에서 다 피난을 나왔다.
그때 동생들이 전부 고등학교, 대학을 갈 나이였다.
10여명 식구가저자 혼자 봉급을 받아 살기는 무척 힘이 들었다.

저자는 암만 어렵더라도 경제적인 생활은 가장인 저자는 책임을 져야했다.
그렇다면 개인적으로 어떤 경제관념을 가지고 살아야 할까?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보면 개인의 경제관도 그런 식으로 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남들은 연세대학교 교수로 갔으니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셋방 구할 돈도 없을 만큼 경제적 곤란을 겪기도 했다.
그 뒤 또 세월이 흘러서 80이 넘고 보니 가치관이 또 달라졌다.
그전까지는 백 사람이 백 가지 일을 하면 목적이 백가지인 줄 알았다.
그런데 살다 보니 그게 아니었다.
백 사람이 백 가지 일을 하는 것 같은데 일의 목적은 똑같다.
모두가 다른 일을 하지만 목적은 똑같다.
그런데 진정한 일의 목적이 무엇인가하고 물어봤을 때는 같다.
왜냐하면 일을 함으로써 그 사람들이 좀 더 인간답게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일의 목적은 그렇다.
일을 함으로써 경제적인 안정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의 목적은 똑같다.
과거에는 수입 때문에 일을 했는데, 이제는 자신이 자기 돈을 좀 쓰더라도, 자기가 비용을 내더라도 가서 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예전엔 돈이 목적이었던 것이 지금은 돈은 하나의 수단이 되었고, 다른 사람들의 행복이 일의 목적이 되었다.
그러니까 이제는 베풀 수 있게 되었다.
아직도 우리나라에서는 절에 열심히 나와 불공을 자주 드리는 사람이 신앙이 좋다고 평하며, 교회에 열심히 참여하여 신앙적 행사에 많은 정성을 쏟는 사람을 모범적인 크리스천이라고 자타가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지성적이며, 지적 수준이 높은 사회서는 그런 평가를 내리지 않는다.
우리 사회도 그렇게 되면 사찰을 찾거나 불교행사에는 동참하지 않아도 석가의 교훈과 불교의 정신을 자신의 인생관과 가치관으로 삼고 따르는 사람을 소망스러운 불교도로 보게 될 것이다. 신부나 목사가, 교회에 잘 나오기보다는 성실한 삶을 살며 이웃에게 봉사하는 사람이 참된 크리스천이라고 가르칠 때가 오는 것이다.
인생의 목적은 우리가 하는 일의 사회적 의미를 남기는 데 있다.
물건은 그 물건의 값을 해야 하고, 생명 있는 것은 그 생명의 뜻을 채워야 하듯이 인간은 우리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그 사회에 의미를 남길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우리가 공자, 석가, 예수 같은 분을 가장 위대한 인물로 존경하는 것을 그들이 인간의 봉사를 누구보다도 지성스럽게 가르쳐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그 분들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선하고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일깨워 나감이 중요한 줄은 모르고 공자께 제사를 드리는 것이 중요한 것으로 착각하곤 한다.
석가는 많은 불상을 원하지도 않았고 큰 사찰을 반가워할 스승이 아니다.
공감과 사랑이 있는 인간관계를 원했고, 타인의 고통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며 다 같이 삶의 번뇌를 극복하기 위해 몸소 고난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물론 예수도 그렇다.
그 분은 자신을 희생시킴으로써 인간의 구원을 염원했던 것이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어야 열매를 맺듯이 자기희생이 없이는 인간의 완성과 구원은 불가능하다고 가르쳤고 그 모범을 보여 주었다.
아인슈타인은 공자보다 위대한 과학자였다.
그러나 공자가 인류의 스승이 된 것은 그 인간에의 봉사 정신때문이다.
괴테는 석가보다 훌륭한 예술가였다.
그러나 불교가 태어난 것은 석가의 인간애때문이다.
루터가 천주교에서 파문을 당했던 역사가 존재했기때문에 저자가 대학에 있는 동안 기독교는 하나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적어도 교회주의자나 신부, 목사가 아닌 지성인들은 다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개신교와 천주교의 벽이 높았던 데는 두 가지 신앙관이 깔려 있었다.
성직자와 교리주의자들은 천주교와 개신교의 차이점이 너무 강하므로 그 차이를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며, 기독교를 다른 종교와 비교하여 바라보지 못하는 폐쇄성이 있다.
만일 기독교를 인간 문제와 그 해결을 위한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면 천주교와 개신교의 구분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좀 더 넓은 위치에서 다른 종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을 고찰했다면 둘은 한 나무의 두 줄기, 또한 한 가정의 형제와 같은 위상을 차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신과는 무관하게 살고 있는지 모른다.
신은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다.
혹시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자신에게는 별로 큰 문제가 아니라는 듯이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신의 계심이 가장 근본적인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기 혼자 살고 있는 양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고 있다.
신을 자신의 성실한 문제로 삼지 않으면서 호기심의 대상으로 논해 볼 필요가 없다.
어쨌든 신 같은 것은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라는 태도의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의 대부분은 실리적인 현실주의자들이다.
의식주의 문제가 인생의 대부분이며, 물질에서 얻을 수 있는 육체적 행복이 그대로 인생의 전부라고 믿고 사는 사람들이다.
신에 대한 철학적인 해석을 위하여 이신론이나 범신론을 택하는 사람은 많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신, 스피노자의 범신론은 각기 그 대표적인 내용이 될 것이다.
그들은 열심히 신을 논한다.
독일 철학자 야코비의 말을 빌린다면 스피노자는 신에 취해서 신을 잃어버릴 정도였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네 신들을 믿지 않는다.
생활보다는 학문을 위하여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도를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기도는 명상의 잘못되고 유치한 형태에 지나지 못한다.
그들은 죽음에 임박했을 때에도 신을 찾을 필요가 없다.
신은 특별한 보호나 구원의 손길을 펴지 않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신론자는 오늘날에도 많이 있다.
과학자들의 신, 불교도와 비슷한 성격의 범신론자들이 이에 속한다.
과학자 아인슈타인, 철학자 화이트헤드의 신관도 이런 부류에 속하고 있을 정도다.
자기 인생에 대한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 교육인 것이다.
저자가 중학교 다닐 때 부러워했던 친구들이 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윤동주 시인이다.
윤 형은 중학생 때부터 “나는 이 다음에 시인이 되어 50이 되고 60이 되도 시인으로써 내 인생을 살 것”이라는 뜻이 뚜렷한 사람이었다.
50-60대쯤 되었을 때 어떤 직업을 가지고 사회생활을 이끌어 갈 수 있을까 하는 꿈을 가진 사람하고 그것을 못 가진 사람은 다르다.
그 꿈이 있는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보람 있게 산다.
그 꿈이 없는 사람들은 평범하게 살다가 인생을 끝내고 만다.
저자는 윤해환 (윤동주의 아명)을 옆에서 보면 지금은 병아리 시인이지만 이다음에 큰 닭이 되면 사회에 울림을 줄 것이다라고 생각하곤 했다.
현대에 살면서도 종교는 필요하며 신앙생활은 건설적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을까?
개인에게 있어서도 그렇다.
종교가 있는 곳에 미신이 따르기 마련이며 잘못된 미신 속에도 종교적 요소는 잠재하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미신의 과오와 죄악성을 아는 사람들은 종교의 필요성보다는 탈종교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보는 사람이 적지 않다.
심지어 종교는 신앙대신에 과학적 사고와 도덕적 신념이 더 중요하며 휴머니즘의 개발은 탈종교 시대를 가져올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어떤 사람은 종교 기관과 행사 때문에 쓰이는 경제적 소비를 가난한 사람들과 소외 계층을 위해 쓰는 것이 더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종교 국가로 자처하는 한국 사회에서도 같은 주장을 갖는 이들이 있다.
문제는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잘못된 종교적 신앙 때문에 파생되는 사이비 종교와 미신적 행위는 줄어들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종교를 위해 쏟는 경제력, 시간, 노력을 과학과 도덕을 위해 바치며 교육발전에 쓸 수 있다면 개인과 인류는 훨씬 더 행복해질 것이라는 판단이 일반화되어 가고 있다.
종교인들이 자기가 믿고 있는 종교와 신앙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있으나 그런 사고는 보편적인 것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종교를 바탕 삼는 진리는 수학이나 논리 또는 자연과학의 진리가 아니다.
그런 사물에 관한 것은 과학적 진리로 족하면 된다.
종교나 윤리, 역사적 진리는 우리들의 삶과 인격적 체험에 관한 것이다.
인간은 묻고 그 가치와 본질을 알며 그 운명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삶에 있어서의 진리의 뜻과 본질을 깨닫게 된다.
저자는 100살을 사신 지식인이라서 들을 가치가 있다.
난 책에서밖에 진리와 의미를 차지 못하기 때문에 저자같은 분의 얘기는 나에게 너무 소중하고 귀를 갖다대고 기울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