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은 이 시대의 최고의 지성인들이 모여서 만든 책이다.
광주트라우마치유센터가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정말 자신의 정치적인 이권을 차지할려고 한 도시를 쓸었다는게 정말 놀랍다.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이 정말 중요하다.
그런 인식이 없고 사람들을 자신의 정치적인 도구로만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도 대통령에게 엄청난 배신과 폭력을 당하고 있는데 민주주의는 국민이 주인이라고 하는데 다 거짓말이었다.
촛불시위를 해도 촛불은 끄면 그만이라고 하고 독제자의 마인드를 가져서 그런 것 같다.
그리고 뇌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지금 정세가 이렇게 됐을 까라는 생각이 든다.
인문학적인 소양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조금이라도 의문을 가지고 인과관계나 나중에 어떻게 될건지 생각을 했더라면 지금의 상황이 되었을지 모르겠다.
요즘은 서열사회라서 자신의 능력이나 출신에 따라서 차별을 받기는 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인간의 존재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있다면 안하무인으로 대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페미니즘에도 관심이 많은게 여성에 대한 차별이 장애인 빈민자에게까지 확장이 되니까 그런 것을 차단할 수 있는 의식이나 방법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이 책을 읽었다.
시스템의 문제라고 하는데 그 시스템을 어떻게 고쳐야 하는 것인지 이런 지성인들에게 배워야 하는 것 같다.
인문학은 인간과 인간의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게 하는 학문이라고 하고 천재가 되는데 인문학이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하는데 그래서 꼭 읽고 싶어서 읽었다.
경제적인 케어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케어, 정신적인 케어를 진정으로 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이 책을 읽었다.
아직은 아니지만 나에게 그런 아이디어가 생겨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아야 상처가 반복되지 않는다.
빛고을 광주는 이름과는 달리 슬픈 역사, 아픈과거를 지닌 곳이다.
사건은 역사가 되고 과거가 되었지만, 그 날의 고통과 상처는 지금까지 현재의 진행이다.
36년 전 광주에서 발생한 일은 그것을 보지 않거나 듣지 않을 수 없는, 이 곳에 있던 사람 모두에게 크나큰 상흔을 남긴 트라우마 였다.
트라우마(trauma)는 일반적인 의학용어로는 '외상(外傷)'을 뜻하나, 심리학에서는 '정신적 외상', '(영구적인 정신 장애를 남기는) 충격'을 말하며, 보통 후자의 경우에 한정되는 용례가 많다.
트라우마는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를 동반하는 일이 극히 많으며 이러한 이미지는 장기기억되는데, 트라우마의 예로는 사고로 인한 외상이나 정신적인 충격때문에 사고 당시와 비슷한 상황이 되었을때 불안해지는 것을 들 수 있다.
광주는 트라우마 공동체다.
센터는'치유의 인문학'을 통해 트라우마 공동체 광주를 '치유의 공동체'로 만들고 싶었했다.
아픔을 겪어 보았기에, 고통을 겪어 보았기에 다른 모든 고통 받는 것들을 보듬고 쓰다듬는 인문학은 광주의 공동체를 성찰하게 한다는 점에서 인문학 공부는 곧 치유의 여정, 이라고 할 수 있다.
광주 트라우마센터는 '치유의 인문학'을 통해 앞으로도 우리 사회의 이야기, 나의 이야기, 관계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철학은 해결이 아닌 해소다.
철학을 '치유'라는 개념으로 생각한 사람이 있었다.
루드비히 비트겐 슈타인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언어 철학자이다.
그는 '철학의 문제라는' 것은 모두 사이비 문제라고 했다.
진짜가 아니라 '가짜 문제다' 라고 생각한 것이다.
무슨 이야기인지 잘 와닿지 않는 얘기다.
특정한 맥락에서만 사용되는 어법을 여기저기 엉뚱한 맥락에 옮겨 놓으면 이상해져 버린다.
그래서 비트겐 슈타인은 철학적인 문제는 '문법적 오류' 에서 비롯된 가짜 문제라고 본 것이다.
아이들이 말을 배울때 보면, 끝없이 '왜'라고 묻는다.
예를 들어, 원숭이는 바바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이제 막 말을 배우는 아이들은 계속 '왜' 라고 묻는다.
왜 좋아해? 맛있으니까, 왜 맛있어? 이러면 우리는 할 말을 잃게 된다.
이제 막 말을 배우는 아이들은 '왜' 라는 낱말을 사용하는 맥락을 모르기에 그 말을 아무데나 막 사용 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지적하는 것이 그것이다.
철학자들이 하는 짓이 이제 막 말을 배우는 아이들이 하는 짓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데카스르트는 몸이 약해서 일찌기 일어나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 계속 책을 보거나 계속 생각을 하는데 끝없는 의심과 왜라는 질문을 계속 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시간'과 같은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우리 모두가 아는 뻔한 개념을, 엉뚱한 맥락에 집어 넣으니 졸지에 도저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되어 버린다고 한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철학적인 문제가 바로 이런 성격의 물음이라는 것이다.
철학에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면, 언어분석을 통해서 왜 자신이 그 병에 걸렸는지 점검하는 것 뿐이라는 것이다.
이 시대의 철학적인 상담은 철학을 다시 일상의 영역으로 가져온 것이다.
우리도 일상에서 굉장히 많은 문제에 부딪친다.
어떤 사람들은 현명하게 잘 헤쳐 나가지만 어떤 사람은 좌절하는 경우가 많다.
그때 철학자들이 와서 제3자의 입장에서 냉정하게 때로는 따뜻하게 '이 문제는 이렇게 해결하고 저 문제는 저렇게 해결하는게 현명하다'라고 해결하고 조언해 줌으로써 사람들이 문제를 잘 해결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철학적인 인간의 지향점은 회복탄력성이 뛰어난 인간을 만드는 것 같다.
어떤 실패하고 좌절한 상황에서도 회복탄력성만 있으면 금방 일어 나서 성공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철학은 그런 인간을 만드는데 일조하는 것 같다.
우리 자신은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삶을 살아가는데 힘들어 한다.
자신이 의식하지 못할 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데 하는데 이런 것을 치유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그래서 신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는 한국 사람들에게 치유라는 화두가 철학은 물론이고 예술의 영역에 까지 확산되고 있다.
치유가 일종의 정신문화의 주류로 떠올랐다고 할 수 있다.
치유는 원래 종교 영역에서 나왔다.
진중권씨 아버지는 목사님이셨다.
그래서 어렸을 때 부터 '종교가' 왜 필요한가를 고민했다고 한다.
저자의 아버지는 다른 아버지 처럼 회사에 다니면서 월급을 가져오면 좋을 텐데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저자는 어린 생각에도 기도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후일에 분석을 해 봤다고 한다.
목사의 설교에는 힐링의 효과가 있다고 한다.
성경 자체에 힐링적인 요소가 많기 때문에 설교에도 힐링적인 요소가 전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 말씀이 어렵기 때문에 목사님이 쉽게 성경을 설명하는 일을 맡아야 한다.
성경이 쓰였을 때는 지금과 완전히 다른 시대, 전혀 다른 삶인데다, 정치적, 사회적, 상황도 다르기 때문에 목사가 성경의 진정한 의미를 이 시대의 상황에 맞추어 해석해 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목사님들이 잘 못하는 것 같다.
사실 사회적 트라우마는 산업화 이전에도 존재했다.
최근의 힐링은, 정말 필요한 사람에 대한 힐링이 아니라 만인을 위한 힐링이 돼 버렸다.
예를 들면 안철수씨, 박근혜씨, 강신주씨 같은 분들이 왜 나왔을까?
물론 아버지나 어머니에 대한 것들을 포함한 상처들이 있을 수 있다.
자신의 상처를 끌어 안고 어찌할 줄 모르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상처가 치유되는 과정을 보면서 대리 충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힐링 관련 프로그램들이 인기리에 방영되고, 철학적 멘토들이 치유 전도사로 등장하게 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자유권이 가장 중요했다면 그리고 이 자유권은 누가 보장하는 것인가,,,,
지난 대선전까지 우리사회에서 '민주화' 하면 '정치적 민주화' 를 의미했고 그 중에서 표현의 자유와 같은 '자유권'이 중요했다.
자유권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1970년대 유신체제 시절엔 남성의 두발의 자유가 없었다.
장발을 한 남성들은 경찰관이 붙잡아 갔다.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진 것 같다.
그리고 미니스커트를 입은 젊은 여성의 다리에 자를 대고 재어서 짧으면 경찰들이 잡아가서 유치장에 가두었다.
이것은 분명히 여자에게 성희롱이다.
지금같으면 유치장에 갇힐 사람들이 엄청 많은 것 같다.
그때는 황당한 법령으로 자유권을 짖밟은 것이다.
요즘 학생들에게 이야기해도 잘 믿지 않는다고 한다.
'긴급조치' 제9호는 유신법을 비판하고 개헌을 하자고 주장하면 범죄자로 처벌된다는 것이다.
이 긴급 조치를 비방하면 또 범죄가 돼어 처벌된다.
자유권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 것은 분명히 자유권을 침해하는 것인데도 또 다른 침해라고 처벌 받는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민주주의도 인권도 보장 받지 못하고 살았던 것 같다.
여기서 처벌된다는 것은 수사를 받고 재판을 받는다는 것 외에 고문을 당한다는 것을 포함하는 말이다.
조국교수님은 프렌치남같은 분위기가 난다.
세상을 전부 가지신 분이다.
로스쿨계의 연예인이시다.
잘생기시고 지적인 부분도 높고 눈빛도 우수에 젖어 있는 것 같다.
교수님이 유신시대의 얘기를 지금 법대생들에게 말해주면 이해를 못한다.
직접 체험하지않은 것은 이해하지 못하는게 맞는 것 같다.
교수님이 대통령살인 교사범으로도 고발되었다는 예에서 보듯이, 퇴행의 징후가 곳곳에서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것은 '자유권' 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과거 박정희 정권이나 전두환 정권 시절로 돌아 갈수 없을 것이다.
주권자가 참을 수 없으니까말이다.
요즘 국민들은 똑똑하고 의식이 있다.
그런데 자기 나라에 대한 것이나 우리의 역사(국사)를 학생들에게 가르치지 않는다는게 말이 안된다.
나라가 없다면 아무리 많이 알고 많이 가져도 비참해지는 것이다.
1987년 '정치적 민주화'를 이룬 세력이 재벌개혁 등 '경제적 민주화' 를 추진했더라면 IMF경제위기는 닥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현실은 반대로 가서 아쉽다.
사실 '경제적 민주화'는 지난 대선 이전까지 대중에게 생소한 개념이었다.
시민들이 장롱에 보관해 둔 금반지, 금숟가락 등을 모으고, 정부가 대규모 구조 조정을 실시한 결과 IMF경제 위기는 끝났다.
그리고 IMF 경제 위기 종료 이후 부익부, 빈익빈, 양극화는 더 심해졌다.
그리하여 교육, 주택, 보건, 의료, 경제, 문화, 일자리등이 위협받고 있다.
그런데 자신의 '사회권' 이 위태로워지는데도 시민들은 크게 분노하지 않고 있다.
시민들의 사회권이 얼마나 위기에 처해 있는지 몇몇 통계를 보면서 확인히 알 수 있다.
국세청이 발표한 통계를 보면 (동아일보) '20%가 소득 71%가져가 20대 80이 사회 현실화 이다.
2011. 4. 26 종합소득세납부자 상 하위 20%의 부의 차이가 1990년대 부터 점점 더 벌어져서 2011년 시점에는 상위 20% 9천만원 하위 20% 200만원이 안되는 것으로 바뀌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정부의 약속 불이행은 어제 오늘이 아니다.
지난 대선 시기에 박근혜 후보건 문제재인 후보건 모두가 경제 민주화와 복지국가를 약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13년 6월 소득세법을 개정했다.
건설근로자는 시쳇말로 '노가다'라고 하는 분들이다.
시쳇말은 그 시대에 유행하는 말이다.
우리사회에서 가장 어려운 분야에서 일하는 분들이다.
건설 근로자들이 받는 퇴직공제금이 있는데, 이전까지는 여기에 과세를 안 했다.
이 분들을 위한 사회보장이 약하기 때문에 퇴직공제금에 과세를 안 했는데, 이제 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2013년 5만4967명의 퇴직 일용근로자로 부터 소득세 11억5천 4백만원을 징수했다.정말 벼룩의 간을 빼먹는 정책이다.
맨 처음 집단적으로 꿈 세계의 동요를 경험한 사건은 여배우 최진실의 죽음이었다.
자살 사건이 있자 바로 다음날 부터 사람들의 꿈이 난리통이 되었다.
대다수 국민들이 이 배우한테 투사하는 부분이 굉장히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다음으로 꿈 세계가 크게 요동쳤던 사건은 노무현 대통령 서거였다.
두 주검 모두 자살이었다는 사실 또한 '자살 공화국' 에 사는 우리에게 커다란 충격타가 되었다.
국민 여배우이든 국민을 대표하던 정치인이든 꿈세계에서 관찰한 바로는 이 사건들이 비단 전체에 미치는 파장이 어마어마하다는 사실이었다.
4대강 개발 사업이 진행되는 때도 꿈 세계는 난리가 났다.
아무도 꿈을 기억해 내지 못했다.
그러고는 하는 말이 악몽같은 것에 시달리는데 깨면 전혀 이미지가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뭔가 이미지가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뭔가 이미지가 있었던 것 같은데 뭔지는 모르겠고 무서워서 다시 잠들 수가 없었다.
뭔가에 눌린 것 같아 괴로워서 깼는데 시간은 새벽 세 시경이었고 방에서 뭐가 나올 듯해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런 현상이 일주일 넘게 지속 되었다.
이 상황은 마치 블랙홀 같았다.
꿈을 기억해 낸다면 무의식의 내용이 일부 의식으로 올라오는 상태다.
더 이상 부인하거나 모르쇠로 일관하지 못할 것이다.
이론적으로 꿈을 기억한다는 사실은 이미 꿈에서 제시하는 상황을 다룰 능력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꿈조차 기억해 내지 못하는 이 상황은 우리 각자가 바꾸며 각성해야 할 이슈가 이정도로 깊은 혹은 근본적인 차원의 변화라는 반증이다.
먼저 이탈리아에서 제자의 날아온 꿈이 빈다.
꿈에 노무현 대통령이 나왔다고 한다.
춘향전에 나올 법한 동그랗게 휘어지는 다리 중간에 서서 대한민국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아서 저승으로 가지 못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제자는 이 꿈을 꾸고 학교에 갔더니 동급생들이 너희 나라 난리 났다면서 세월호 소식을 들려 주었다고 한다.
꿈에서 등장하는 특정인이 반드시 그 사람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 꿈의 기본 상식이다.
대통령은 집단 전체의 의식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다른 꿈은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제자가 보내왔다.
꿈에 포탄을 공중으로 쏘아 올리는데 한 흑인이 맞아 사람 몸이 산산조각이 나면서 동생이 생각나 고개를 들고 보니 동생이 의연하게 피비를 맞고 있어서 자기도 그 비를 맞으며 조각난 신체 파편들이 피로 바뀌는 장면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지금 그 땅은 하늘에서 피비가 내려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전장에 있는 심정이다.
세상 모두가 울음 바다로 변해 있었다.
내일의 나라 일군이 한꺼번에 죽어가는데 피비가 내리며 울음을 참을자가 없을 것이다.
포탄이 떨어져 몸이 찢기고 피가 산천을 물들이지는 않지만 우리 안의 아픔과 절규, 눈물이 기화해 구름이 된다면 이렇게 피비도 온 땅을 뒤덮을 것 같다.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만으로 꿈을 기억 할 수 있는 안전이 확보되는 것 같다.
세월호 이미지자체를 꿈이라 상상해본다.
압도하는 이미지에 모두가 사로잡혀 있으니, 누군가 매의 눈으로 집단의 이미지를 꿰뚫어 보아야 할 듯하다.
세월호와 함께 이 땅에서 침몰한 것들이 많은 것이 함께 가라 앉았다.
세월호와 이 땅은 안전하지 못하다는 현실을 더는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안전사고 불감증인 사람들이 일으킨 사고야 단속을 강화하면 개선되겠지 선진국이 될수록 이런 후천성은 사라질 거야 이렇게 되뇌이며 만연한 안전 불감증을 애써 부인해 왔다.
자신이 사는 터전이 안전하지 못하면 근원적으로 '집에' 대한 느낌에 손상을 입는다.
안전한 집과 고국에 대한 열망이 가장 간절한 사람이 난민일 것입니다.
난민 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 나라 국민도 마찬가지로 그런 열망이 있다.
세월호 전복의 원인은 한마디로 과적이다.
과적은 화물의 적재정량을 초과하여 실은 것이다.
그것때문에 꿈많은 젊은이들, 내일의 주역들이 그렇게 많이 수장을 당한 것이다.
그 때 그 시간에는 하늘도, 땅도 , 온 국민도 다 울었을 것 같다.
교수님의 글을 읽으면서 가슴이 멍해지는 느낌이었다.
과적으로 인해 이런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
'잘살아보세' 를 노래하며 달려오는 동안 물질적 풍요 GNP숫자, 물질 숭배에만 매달려 왔다. 전일적인 건강이나 삶의 질은 배부른 자들의 호사 정도로 취급했다.
전반적으로 가시적인것 측량 가능한 것만이 세계의 전부인 양 살아왔다.
내면의 건강도 안위도 무시되었다.
한마디로 '의식의 세계' 만을 세상의 전부라 이해했다.
이는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현대라는 문명의 특징이고 과적으로 인해 빚어진 균형감 상실은 현대인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천민자본주의는 과적을 당연히 했고 내면의 치유에 대해서는 관심도 가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는 관심을 내면의 치유에 돌려야 할 때이다.
이 책은 그런 면에서 도움을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