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말 없이도 어색하지 않은 게 친구 사이라고들 한다. 그래서 인지, 아니면 유교 문화 탓인지 한국인들은 느낌이나 감정을 대놓고 드러내는 일이 드물고, 논쟁을 피하는 편이다. 민감한 주제는 친구 간에는 말을 아낀다. 보기에 적잖은 한국인이 상대가 감당하지 못할 말을 쏟아내지 않으려고 자제하는 것 같다. 따라서 생각을 표현하고 의견을 주고받고 속내를 털어 놓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내심 서운한 수도 있다. 따라서 이따금 적막이 흐르는 이 같은 ‘자체 검열’ 에 적응하는 편이 나은데, 말하지 않아도 마음을 다 알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아도 어떻게 마음을 안다는 건지 잘 모르겠다.
한국인들은 종이에 글자를 쓸 때 새끼손가락을 바닥에 괴고 쓴다. 그건 나도 그렇게 쓰는데 저자는 자세히도 본 것 같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한글의 네모난 형태로 인해 손목의 균형을 잡아야 해서 그런 것 같다. 새끼손가락으로 받쳐주면 아무래도 안정감이 생기기 때문이다. 어느 대학이든 복도를 지나가면 느릿느릿, 아니면 잽싸게 신발을 끌고 가는 소리가 들린다. 젊은이들, 그중에서도 특히 여학생들이 곧잘 그런데 하이힐 제외하고 어떤 종류의 신발이든 마찬가지다. 저자가 지방에 강연이 있어 KTX를 타고 가는데, 사십 대로 보이는 두 여자가 통로를 지나면서 또 운동화를 질질 끌고 가는 걸 봤다.
한데 이 사람들만 그런 게 아니다, 더 나이 든 사람들도 길에서 똑같이 하고, 동네 슈퍼에 가는 할머니도 슬리퍼를 찍찍 대며 간다. 그런데 남들이 다 보는 데서도 이렇게 신발을 끌고 다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게 기운이 없는 걸까? 아니면 발을 질질 끌고서라도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는 의지를 보여 주려는 걸까? 그런 의미에서 조신함을 강요하는 유교 전통에서 벗어나 이제는 자유롭게 행동하고 싶다는 마음의 반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맞을 것 같다. 어쨌든 여기에는 한 가지 분명한 장점이 있는데, 한국 여성이 뒤에 오면 신발 소리 때문에라도 모를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나도 운동화를 질질 끄는데 그건 편해서이다. 운동화를 슬리퍼화해서 금방 벗고 끼지 않아서 편해서 그렇게 신는 것이다. 저자가 잘 관찰하고 표현한 것 같다.
옛날 한국 사람들은 몸을 숙여 인사를 했고, 서로의 신분에 따라 인사법이 달라졌다. 고관대작은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들 앞에서 고개만 까딱하는 정도였지만, 아랫사람은 허리를 굽혀 존경을 표시해야 한다. 위계의 표상이다. 신분제가 존재했던 옛날 한국에서는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귀족 계층인 ‘양반’이 있었고 맨 아래는 ‘천민’이 존재했다. 그 사이에 ‘중인’과 ‘상민’이 있었다. 사회적 지위가 낮을수록 몸을 깊이 숙여야 했다. 노비의 경우 무릎을 구부리기까지 했다.
정치인, 고위공무원들, 고위공무원중, 판사도 그중에 들어가는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까 이들 모두가 쓰레기 중에 쓰레기 거지판사들이었다. 물론 정치가들은 억대로 받는 인간 이하라는 것은 예전부터 알았다. 유교적 관습에 따라 준수하는 여러 가지 의례 중에는 오늘날 더 이상 지키지 않는 것도 있고, 세월이 흐르면서 잊힌 것은 바로 ‘제사’다. 조선왕조 때부터 가정에서 제례를 지낼 수 있게 되었고, 그 뒤로 집에서 제사를 드린다. 이를 위해 처음부터 끝까지 예전에는 꼬박꼬박 제사를 모셨지만, 오늘날은 그때그때 다른 것 같다.
제사상은 유교 전통에 따라, 특히 진설도에서 정한대로 차린다. 어떤 음식은 서쪽에 놓고, 다름 음식은 앞 둘이나 뒤 줄에 놓아야 한다는 규칙이 있는 것이다. 상에는 국이나 생선처럼 생전에 고인이 좋아한 음식을 올린다고 했다. 위패나 지방을 써서 상 가운데 세워 놓고 쌀밥 한 그릇도 올리는데, 밥공기에 수저를 꽂는다. 고인이 편하게 드시기 위해서라고 한다. 밥그릇에 수저를 꽂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다. 그러고서 절을 하는데 청주나 백주를 올리고 사진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린다. 이때 계절에 상관없이 문이나 창문을 살짝 열어두어야 한다.
고인의 혼백이 집 안에 들어와 음식을 드실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체로 장손이 진행하지만, 음식은 큰며느리나 어머니가 장만한다. 고생은 왜 늘 여자 몫일까? 양구 근처의 어느 음식점에서 있었던 일이다. 제법 늦은 시간 이었고 저자까지 포함해서 모두 다섯 명이 모인 자리였다. 식사를 마치지 않았지만 곧 그칠 것 같지 않았다. 나가지도 못하고, 다시 식탁에 앉지도 못한 채 현관에서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주인아주머니가 잠깐 기다려보라면서 바깥양반 깨우러 가겠다고 했다. 일찌감치 들어가 곤히 자고 있던 아저씨는 마나님의 부탁에 군말 없이 나왔지만, 아직 잠이 덜 깬 표정이었다.
헌데 가늘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이면 전날 카센터에 수리를 맡겨 차를 못 쓰는 상황이었다. 아저씨는 잠시 당황한 듯 했으나, 이내 뒷마당으로 가서는 먼지 쌓인 용달 트럭을 몰고 나타났다. 그러면서 여자 둘은 앞자리에 앉고, 남자 셋은 짐칸에 타라고 했다. 부슬비가 계속 내려 주인아주머니가 우산을 빌려주었다. 한국의 서비스는 과연 어디까지 가능한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는 거의 ‘무제한 ’인 듯싶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