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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지 않게 슬픔을 이야기하는 법
마실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8월
평점 :

각자에게는 자신만의 판도라 상자가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는 여자 인간 판도라를 만들고 상자를 준다. 제우스는 판도라에게 상자를 주며 절대 열어보지 말 것을 당부한다. 하지만 인간의 호기심은 금기의 대상에 더 강한 욕구를 느끼는 법. 판도라는 제우스의 명령을 어기고 상자를 열며 상자 속에 갇혀있던 재앙과 재악이 뛰쳐나온다.
에세이 『슬프지 않게 슬픔을 이야기하는 법』을 읽으며 나는 판도라 상자를 떠올렸다. 물론 신화처럼 불행이 튀어나오진 않지만 판도라가 상자를 열듯 마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 끝까지 숨기고 싶었던 자신의 마음의 상자를 열었기 때문이다.
『슬프지 않게 슬픔을 이야기하는 법』에서 떠오르는 첫 번째 단어는 '가난'이다. 저자를 포함한 삼남매가 모두 독립한 후 지금까지 월세 신세로 가난을 짊어지고 사는 부모님, 총 십팔번의 이사를 하며 유랑해야 했던 저자 가족의 '집의 역사'는 '가난'의 역사이기도 했다. 나무집, 징검다리집 등을 거쳐 지금의 반지하 집에 이르듯 가족 형편에 따라 이 가족의 회식도 무한 리필에서 양식으로 또는 가족의 별미로 바뀌곤 한다.
가난은 삶에서 불편함 뿐만 아니라 생활 양식 또한 바꿔간다. 바퀴벌레가 수시로 침범하고 욕실과 주방의 경계가 없는 집, 저자가 성인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한 엄마의 아울렛에서의 89000원 쇼핑, 부모님의 노후 적금 하나 없는 대책 없는 가난들은 시시때때로 저자를 짓누른다. 성인이 되어 웹툰 작가로 활동하면서 여전히 부모님이 자신보다 못한 환경에 있다는 사실에 저자는 마음이 편치 못한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계속 고민하며 죄책감을 느낀다. 자신의 힘으로 지금까지 올라왔건만 무엇이 저자를 편하게 누리지 못하도록 만들었을까.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님의 어깨에 짊어진 가난때문이다.
부모님은 너만 잘살면 된다,
우린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을 버릇처럼 했지만,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숨이 턱 막혔다.
나는 그들이 신경 쓰지 말라고 해서 단번에 등 돌릴 만큼 완벽한 썅년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내내 신경 쓸 만큼 완벽한 효녀도 아니었다.
물론 이 가난이 책 속에 생생하게 묘사되지만 저자의 가족은 이 가난 속에서도 최선의 행복을 한다. 축하할 일이 있을 때마다 등장하던 핑크 바가지, 생리 파티, 아빠와의 드라이브 등등 그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가난의 그림자로부터 해방된 건 아니지만 결코 행복을 포기하지 않는다. 상황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끝까지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게 유일한 정답이란 걸 알아서일까. 저자는 이 짓눌림 속에서도 결코 침몰되지 않고 계속 물장구쳐나가겠다고 다짐한다.
가난이 저자 인생의 한 부분이였다면 인생의 전환점은 저자의 유방암 조직검사였다. 가벼운 마음으로 검진차 간 유방외과에서 조직검사를 권하며 저자는 처음으로 죽음을 생각한다.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일주일 동안 저자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본다. 악성일 경우 치료비부터 버킷 리스트 등을 돌아보며 목표를 수정해나간다. 다행히 악성이 아닌 섬유선종으로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저자에게는 '좋은 죽음'을 위한 삶의 의미를 재정의해나간다.
조직검사를 받던 날 그리고 최종 섬유선종 판정을 판던 날 저자는 똑같은 시래기국밥 집에 들른다. 국밥을 먹으면서 시래기와 자신을 비교한다. 겨울바람을 이겨내고 바짝 마른 후에야 새로운 모습으로 식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시래기처럼 자신의 인생 역시 이겨낼 것이라며 다짐해 나간다.

『슬프지 않게 슬픔을 이야기하는 법』에서는 저자의 짧은 2년 동안 직장 생활 뿐 아니라 자신의 직업을 함부로 이야기하는 사람들, 자신이 상처를 주고 상처 받은 관계 등을 솔직하게 풀어낸다. 경제력이 없었을 때 돈이 생기면 꼭 하고 싶었던 유럽 여행도 감행해보고 저자가 겪은 데이트 폭력으로 인해 평범한 사랑이 어려운 상처 또한 이야기한다. 어쩌면 행복보다 어려운 일들이 더 많았던 시간일 수도 있지만 저자가 깨달은 건 꿋꿋하게 자신의 방향으로 자신의 길을 가는 것만이 유일한 정답이라는 것이다. 서로에게 중요한 건 현재이므로 과거가 아닌 오늘의 안부를 묻고 서로를 격려해주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임을 저자는 알아간다. 그렇게 저자는 과거와 화해하고 오늘의 자신을 힘껏 껴안게 된다.
이 책 에필로그에 저자의 아버지는 출간을 반대하셨다고 한다. 자신의 가난이 공개되고 가난이라는 편견에 둘러싸인 시선을 받을 딸에 대한 걱정이였다. 자신을 걱정하며 말리는 아버지에게 저자는 :저는 그냥... 살고 싶어요..."라고 이야기한다. 저자에게 숨기고 싶었던 판도라의 상자는 책이라는 형태를 통해 열려졌다. 그리스 신화의 판도라가 상자를 열었을 때 재앙과 재악이 나왔지만 마지막에 나온 건 바로 '희망'이라고 한다. 나는 이 책에서 저자의 판도라의 상자 속에서 나온 '희망'을 본다. 부끄럽진 않지만 남에게 쉽게 말할 수 없었던 자신의 마음, 상처등을 꺼내 마주하며 비로소 저자는 자신을 용서한다. 용서는 저자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며 새로운 희망을 품게 해 준다. 저자의 판도라의 상자 속에 나온 이 희망이 저자를 끝까지 지켜주길 간절히 기도해 본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