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머니멀 - 인간과 동물이 더불어 산다는 것
김현기 지음 / 포르체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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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니멀》은 MBC 창사특집 다큐멘터리로 방영되어 큰 화제가 되었던 프로그램이다. 부끄럽지만 《휴머니멀》의 PD이자 이 책의 저자인 김현기 PD의 이 프로그램을 나는 보지도 못했고 프로그램이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그런 내가 이 책을 보게 된 계기는 자연과 환경에 대한 나의 순수한 관심사 때문이다. 항상 동물에 대한 막연한 부채감을 가지고 있던 나였기에 꼭 읽어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휴머니멀》에서는 야생 동물인 코끼리와 사자, 돌고래와 곰 등 인간의 욕망으로 죽임을 당하는 야생동물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첫 부분은 인간들에게 웃음을 주기 위해 어려서부터 모진 학대 '파잔'을 당한 뒤 서커스와 묘기에 이용되는 아시아의 코끼리와 상아 하나로 밀렵꾼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아프리카 코끼리의 실상을 보여준다. 동남아 관광을 갈 때면 꼭 봐야 하는 코끼리 묘기 뒤에 얼마나 잔혹한 학대가 숨겨져 있는지, 코끼리 본래의 야수성을 제거하기 위한 비인간적인 모습 속에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관람하며 감탄을 터뜨렸던 인간의 모습을 돌아보게 해 준다.


아이들 관람을 위해 몇 번이나 방문했던 아쿠아리움 속에 숨겨진 돌고래의 잔혹사도 마음 아프지만 내게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단순히 레저와 전시를 목적으로 동물을 사냥하는 행위인 "트로피 헌팅" (trophy hunting)의 실체였다. 자금 확보를 위해 동물 사냥 권한을 사고 파는 그들의 행위와 동물을 죽인 뒤 환한 미소를 지으며 사진을 찍고 박제된 동물들을 자신의 집 곳곳에 가득 전시해 놓은 트로피 헌터들의 행태는 감히 충격적이었다. 자신들이 지불하는 돈으로 아프리카의 자연 환경 보호 기금에 쓰인다고 강변하는 그들의 논리를 듣다 보면 과연 인간의 이기심은 어디까지인가 곰곰히 생각하게 한다.



동물들을 사냥하거나 죽이는 사람들에게는 모두 그들만의 변명이 있다. 트로피 헌터들에게는 '자신들의 행위가 자연을 보호한다는' 그들만의 이유가 있었고 무자비로 돌고래를 잡아들이는 타이지 마을 사람들에게는 '전통'이라는 명분이 있었다. 사냥권을 주는 아프리카의 나라에서는 이 돈이 아니면 먹고 살 수 없다는 정치이해관계가 들어있다.

《휴머니멀》은 이들의 논리 속에 단순한 보호가 아닌 근본적인 변화를 모색해야 함을 이야기하며 힘든 여건 속에서도 동물들을 지키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휴머니멀》에서 보여지는 동물과 인간과의 관계는 함께 살아가야 할 관계가 아닌 착취 대상에 불과하다. 인간의 욕망을 위해서, 인간을 위해서 마땅히 죽어도 될 존재에 불과하다. 하지만 인간이 간과하는 한 가지가 있다. 결코 인간은 홀로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한 생태계가 무너지면 도미노처럼 다른 생태계에도 급격한 변화를 일으킨다.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 인간 스스로 자멸을 자초하는 이런 행동이 얼머나 무모한 것인지 동물을 지켜나가는 이들은 강조하여 말한다.


공존을 향한 첫걸음은 동물들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저는 곰의 행동을 연구하면서 녀석들에 대한

시각이 바뀌는 행운을 누렸어요.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은 집 앞에 나타난 곰을 보면 공포에 휩싸이고

그게 반복되면 그들에게 적개심을 갖게 되죠.

동물이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면

그들을 죽이는 것도 서슴지 않게 돼요.

현실적으로 동물이 없으면 인간도 존재할 수 없는데,

그걸 잊고 근시안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언젠가 코로나로 동물원 관람객이 급감해 경영난을 겪는 독일의 한 동물원이 동물들을 돌보기 힘들어 모두 폐사하기로 결정했다는 기사가 떠올랐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동물들을 이용할 때는 언제고 힘들다는 이유로 죽이기로 결정한 그 기사를 보며 왜 인간의 잘못을 동물들에게 부과해야 하는가라는 생각에 마음이 몹시 힘들었다. 인간에 의해 눈 앞에서 가족을 잃고 학대 당하며 전시품이 되어야 하는 당연한 운명이란 없다. 인간의 생명이 소중하듯, 모든 생명이 소중히 여겨져야 한다.


《휴머니멀》을 다 읽고 난 후 프로그램을 늦게 시청했다. 활자로 읽던 이 참혹함이 영상으로 더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멸종되어야 하는 생명이란 없다. 우리는 함께 공존해야 하는 존재이다. 착취가 아닌 함께 하는 존재로 인식될 수 있는 변화의 흐름이 시급함을 알게 해 준 책이다. 정말 모두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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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의 첫문장이었을 때 - 7인 7색 연작 에세이 <책장 위 고양이> 1집 책장 위 고양이 1
김민섭 외 지음, 북크루 기획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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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서비스가 대세인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매달 일정한 비용을 지불하면 내게 배달되는 서비스가 이젠 자연스러워졌습니다. 글의 경우 구독 서비스에 낯설었던 시점에 시작된 이슬아 작가의 <일간 이슬아>는 많은 화제가 되었고 신선하다는 반응과 함께 많은 호응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한 명의 작가가 아닌 7명의 작가가 매일 한 편의 에세이를 읽을 수 있다면 어떨까요? 《내가 너의 첫문장이었을 때》는 일곱 명의 작가가 매일 구독자에게 에세이를 메일로 배달해 주는 서비스를 제안하면서 시작 된 구독 서비스 <책장 위 고양이>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김민성, 김혼비, 남궁인, 문보영, 오은,이은정,정지우 7명의 작가진 또한 화려합니다. 고양이, 작가, 친구, 방, 뿌팟퐁커리,비 결혼,커피 등의 주제를 제시하고 각자 에세이를 배달해 줍니다. 과거의 어느 기억이, 그 경험이 현재에 어떤 경험을 이루게 되었는지 그들만의 스타일과 문체로 이야기 해 줍니다.



첫번째 주제 [고양이]로 시작되는 김민섭 작가의 이야기부터 글은 의미있게 다가옵니다. 20대 젊은 시절, 길가의 고양이를 구하지 못한 이후 삶의 출구를 찾지 못하고 방황했던 작가의 경험 하지만 그 경험에 머무르지 않고 다음에 꼭 구할 것이라는 작가의 글은 제 주위에 나 자신의 무관심으로 아파하는 사람이 없나 돌아보게 합니다.

부모님께 자주 드렸던 안부 전화를 바쁘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기, 바빠서 친구들과 연락이 뜸해지기도 하고 보지 못하는 현실을 떠올리게 됩니다.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로 유명한 김혼비 작가의 에세이 또한 전작 못지 않게 흥미롭습니다. 특히 결혼에 대한 에세이 <합쳐서 뭐가 될래?>는 결혼 전 궁합에 대한 에피소드는 매우 유쾌합니다.

궁합을 봐야 한다는 부모님의 압박에 어디서나 얼마 못 가서 헤어질 거라는 나쁜 궁합 이야기와 이를 극복해 나가 지금의 생활에 이르기까지의 글을 작가 특유의 유머와 함께 이야기해 줍니다.


나쁜 궁합으로 결혼하지 못했던 친한 지인이 생각나서 공감이 되기도 하며 인생을 어떻게 해석하고 바라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음을 말해주는 것 같아서 뭉클한 감동도 있었습니다.



다수의 작가들이 함께 펼쳐 낸 단편 소설집도 좋지만 한 가지 주제로 다양한 문체와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는 재미가 있습니다. 특히 평범한 일상 속에 주제를 포착하여 글을 펼쳐 나가는 작가들의 필력은 매우 반짝입니다.

결혼을 주제로 너무 어렵다고 투덜거리는 김민섭 작가님의 글도 재미있고 주제가 너무 재미없다며 나의 진정한 친구, 뿌팟퐁커리를 제안하는 남궁인 작가님의 글 또한 흥미롭습니다.

에세이를 꿈꾸는 작가 지망생이라면 이 책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다양한 작가의 글은 에세이란 이런 거다라며 작가 본인의 매력을 드러냅니다. 주제에 따라 달라지는 글이기에 기분에 따라 주제 또는 작가별로 골라 읽는 7인 7색 연작 에세이 《내가 너의 첫문장이었을 때》는 분명 읽는 독자들에게 바쁜 일상 속에서 우리에게 휴식이 되어줄 수 있는 에세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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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로 세상을 1밀리미터라도 바꿀 수 있다면 - 공감과 연대의 글쓰기 수업
메리 파이퍼 지음, 김정희 옮김 / 티라미수 더북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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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간 글쓰기 책을 보지 않으려했다. 최근에도 <위반하는 글쓰기>라는 책을 구매했고 책장에 이미 10권 가까이 있는 글쓰기 책을 보며 이제 충분하다고, 실천이 중요하니 쓰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글로 세상을 1밀리미터라도 바꿀 수 있다면》 이라는 제목은 나의 다짐을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글쓰기라니! 이건 꼭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추구하는 선한 영향력을 위한 글쓰기를 가르쳐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의 글로 세상을 1밀리미터라도 바꿀 수 있다면》의 저자 메리 파이퍼는 임상 심리 치료사이다. [나는 내 나이가 참 좋다]. [또 다른 나라],[나는 심리치료사입니다] 등등 자신의 풍부한 치료 경험을 살려 책을 출간했던 저자가 이제 글쓰기를 말한다. 전업작가가 아닌 심리 치료의 대가 메리 파이퍼의 글쓰기 《나의 글로 세상을 1밀리미터라도 바꿀 수 있다면》은 심리 치료와 글쓰기의 공통점을 말하며 글쓰기의 기본부터 형식에 따른 글쓰기 방법까지 모든 지식을 이 책에 알려준다.

저자는 먼저 언어가 폭력이 되는 현실을 우려한다. 타인에 대해 함부로 비판하며 <나와 너>를 잇는 글쓰기가 되어야만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1부 나만을 위한 글쓰기에서 저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해준다. 더없이 평범해 보이고 단조로운 일상이지만 나 자신이야말로 이야기할 소재가 무궁무진함을 저자는 강조한다. 가령 내가 좋아하는 책 또는 물건을 쓸 수 있고 나의 과거 중 아픈 기억으로도 우리는 자유롭게 쓸 수 있다.


우리가 쓰는 글은 우리 자신으로부터 나온다.

자신의 영혼을 더 깊이 탐구할수록 글도 더 깊고 풍성해진다.


글을 쓸 때 가장 필요한 건 바로 글을 쓰는 사람은 누구나 작가라는 사실이다. 등단 또는 출간하지 않아도 글을 쓴다면 우리는 자신을 작가라고 정의를 내려야 한다. 자신을 작가로 인정하며 글을 쓰는 사람과 불확실한 인정 앞에 글을 쓰는 사람의 글은 차이가 크다.



1부에서 자신으로부터 시작하여 책상 앞으로 가게 했다면 2부 헤엄치듯 글쓰기에서는 본격적인 글쓰기 방법을 설명한다. 이 책의 독특한 점은 저자의 심리 치료에 글쓰기를 대입하여 방법을 설명해준다는 사실이다.

심리 치료가 글쓰기와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우선 심리 치료는 상대에 대한 면밀한 관찰이다. 상대를 판단하기보다 그 모습 그대로 인정해주며 존중해주며 공감함으로 관계를 맺는다. 관계 맺기 후 이야기를 하기 보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으며 치료가 시작된다.


고백하자면 내 쌍둥이 딸 중 첫째가 최근 놀이치료를 시작했다. 어린이집에서 적응하지 못한다는 선생님의 전화를 받고 첫째에게 문제가 있는지 알기 위해 테스트를 받았다. 그 결과 아이는 처음부터 친구이자 부모 또는 주변의 사랑을 나누는 쌍둥이 동생으로 인한 소외감, 그리고 첫째이지만 뒤쳐지는 자신감 저하로 심리적 불안정이 크다는 결과를 받았다. 심리 치료가 필요하다는 진단 하에 아이는 치료를 시작했다. 상담 시간 아이에 관해 말해주기 바랬던 나의 바램과 다르게 선생님은 보호자인 내 말을 경청하셨다. 내 안의 이야기를 꺼내게 하셨고 그에 맞는 아이의 태도를 설명해주셨다. 글쓰기 또한 마찬가지다. 먼저 말하지 말고 우리의 주변을 관찰하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주변에 민감해지며 관심을 가지고 보아야 한다. 그 상대를 면밀히 관찰하고 묘사하며 나아갈 수 있도록 저자는 자신의 심리 치료와 더불어 설명해간다.

3부에서는 다양한 형식의 유형별 글쓰기가 소개된다. 연설문, 편지글 등 실제 예문과 경험으로 독자의 이해를 도우며 왜 그 때 그 글이 결과를 도출해 내지 못한 반면 다른 글은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었는지 이야기한다.

특히 에세이에 관한 부분은 그동안 모호하게만 알고 있던 에세이에 대한 개념을 명확하게 해 주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심리 치료는 변화를 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저자는 글쓰기 또한 심리치료처럼 변화를 이끌어내는 걸 목적으로 말한다. 쓰는 이 뿐만 아니라 읽는 이를 변화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더욱 효과적인지 자세하게 설명해준다. 단순한 고객과 은행원의 관계가 아닌 나로부터 시작해 우리로 나아갈 수 있도록 세상을 잇는 글쓰기가 되도록 저자는 격려해준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글쓰기의 방법을 알아야 한다. 이 책은 그에 대한 적절한 방법을 알려준다.


코로나로 인종 혐오 및 사회적 약자들이 더 소외되는 지금이야말로 공감과 연대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 때 우리에겐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공감과 연대의 말과 글이 더 없이 필요하다. 우리가 쓰는 글이 1밀리미터라도 바꿀 수 있다면, 그리고 그 1밀리미터가 모인다면 세상은 분명 따뜻해 질 수 있으리라. 그리고 이 책이 따스한 온기를 더할 수 있도록 도와 줄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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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에 알맞은 걸음으로 - 졸혼, 뇌경색, 세 아이로 되찾은 인생의 봄날
아인잠 지음 / 유노북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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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에 알맞은 걸음으로》를 읽는 내내 망설였다. 서평을 써야 하는데.. 그러자면 솔직해져야 하는데.. 이 익명의 공간이 아닌, 그리고 나라는 실물을 아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를 전혀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솔직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내 감정을 주체할 수 있을까 불안했지만 용기를 내어 글을 쓴다.

《내 삶에 알맞은 걸음으로》의 저자 아인잠씨는 13년의 결혼 생활 끝에 아이 셋과 함께 독립하여 졸혼을 선언하고 자신의 가족과 인생 이야기를 다시 써 내려가는 작가이다. 전 작인 {내 인생에서 남편은 빼겠습니다] 가 남편과의 결혼 생활당시 힘들었던 저자의 시간이였다면 《내 삶에 알맞은 걸음으로》에는 남편으로부터 독립 후 일어난 변화와 홀로 서는 과정을 그렸다.

결혼 13년차, 아이 셋과 간단한 짐만 챙겨 독립한 저자는 남편의 양육비 지급 거절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안고 살아간다. 아이들이 상처 입을까 걱정되고 주변에서 무조건 남편에게 빌고 들어가라는 마이 웨이식 조언들은 힘들게 결정한 저자에게 상처를 받기도 한다. 13년까지 결코 참지 않았는데 더 참으라고 말하는 지인들을 보면서 대체 어디까지 참으라고 말하는 걸까 고민하게 된다.

저자는 이혼 전까지 오후 5시가 불안함의 시기였다고 말한다. 막내가 하원하는 4시 반부터 남편이 퇴근 후 돌아오기까지 집안을 깨끗이 청소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밖에서 더 놀고 싶어하는 아이를 부추기며 집으로 돌아온다. 남편의 비위에 맞추기 위해 허겁지겁 청소하고 저녁을 한다. 돌아온 남편의 표정에 만족하는 미소가 보일 때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지으며 마저 못다한 집안일을 한다. 남편의 퇴근이 가까워질수록 불안해하던 이 오후5시가 독립 후 저물어가는 석양을 바라보며 이 시간이 얼마나 아름다운 시간인지 비로소 깨닫는다.

도시락을 포함해 남편의 삼시세끼를 챙기고 가사와 육아에 힘든 저자에게 독립은 그동안 알지 못했던 지인들의 고마움을 깨닫는 자리이기도 하다. 급성 뇌경색으로 입원했을 때 집으로 음식을 배달해 주는 지인들, 기꺼이 자신의 것을 나누는 지인들을 보며 감사와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저자의 마음과 빈 아빠의 자리만큼 든든한 엄마의 역할을 할 것을 다짐하는 저자의 글이 잔잔하게 그려진다.

저자는 결혼 생활 속에 행복하지 않은 부부가 많다고 말한다. 함께 해서 불행하다면 헤어지는 게 정답이라고 말한다. 사실 많은 부부가 싸우면서 이혼을 거론하지 않는 부부는 없을 것이다. 설사 이혼을 입 밖에 낸 적은 없다고 해도 이혼을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남과 남이 만나 한 가정을 이루는데 갈등이 없는 부부가 없을 것이다. 6년 차인 우리 부부 또한 마찬가지다. 나의 경우 이혼을 생각하고 있을 때 엄마의 병진단을 받았다.

현재까지 치료법이 나오지 않는 엄마의 투병과 내 아이들에게 삶의 희망을 찾는다는 엄마에게서 아이들을 떼어 놓을 수 없었다. 나보다 아이들을 더 좋아하고 아이들을 더욱 끔찍하게 아끼는 남편이 양육권을 내게 줄 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내가 이혼하지 못한 건 솔직히 그 때문이었다. 힘들어하는 엄마에게 즐거움이라고 하는 엄마의 낙을 빼앗을 수가 없었다. 그 점을 정확히 알고 있는 남편은 싸울 때마다 이혼으로 나를 압박했고 나는 부부 사이에 약자가 되어야 했다. 싸울 때마다 남편은 아이들에게서 나를 분리했고 과한 친절을 베풀며 아이들은 자신이 데려간다며 나를 압박했다.

저자가 묘사한 결혼 생활 중 가장 공감이 되었던 부분은 남편이 바라는 여자 상이였다. 바로 "아내가 닮았으면 하는" 어머니의 모습이였다.

살림 잘하고, 부지런하고, 시부모 봉양하며, 아이들을 잘 키워낸,

집안은 항상 정갈하고, 온유하고, 따뜻하고, 친절하며, 인내심이 많으며, 희생적이고, 알뜰하고,

불평하지 않으며, 좋은 것은 자식 주고,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는,

아파도 아프다고 말하지 않고, 남편을 섬기며, 음식을 잘하고, 가족들을 위해 봉사하는....

'아내가 닮았으면 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나는 결코 닮을 수 없었다.

남편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반신 불구가 된 아버지를 간호하면서 삼형제를 키워 낸 어머니를 존경하는 남편은 내게 어머니 =희생이라는 공식을 강요했다. 헌신적인 어머니 밑에서 자란 남편에게 내 고생은 어머니에 비하면 종이 한 장처럼 가볍게 보였다. 그래서 남편은 내가 힘들다고 할 때마다 엄마들은 그런 거야라면서 나의 고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내가 뭔가를 해도 고생했다라는 말보다 당연한 걸 했다는 듯한 태도는 나를 지치게 했다. 여자, 한 개인의 삶보다 그의 삶에 알맞은 장식품으로, 아이에게 필요한 엄마라는 존재로만 있어주길 원했다. 그 압박 속에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사랑과 존중을 잃어갔다.

그래서일까.. 읽으면서 나는 저자에게 계속 반문했다. "정말 나도 행복할 수 있을까요?" "내가 나 자신의 삶을 되찾을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갈수록 힘들어하시는 엄마를 두고 내가 온전히 나만을 위한 선택을 내릴 수 있을까?

저자는 분명 이 책에서 독립을 하며 찾게 된 인생의 봄날을 이야기한다. 가부장적인 남편에 억눌려 있던 저자가 온전한 자신을 되찾으며 아이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일상도 그려내고 있지만 그로 인해 감당해야 할 고민들 또한 진지하게 이야기한다. 가장 큰 문제는 돈이며 부부와의 연은 끊어졌지만 부모로서의 연은 이어지고 있는 관계,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 등은 만만한 문제는 아니였다. 하지만 저자는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극복할 수 있기에, 남편이 아닌 부모님 그리고 자신을 아끼는 지인이 있고 자신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세 아이들이 있어 감당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빈 자리만큼 듬직한 엄마가 되어줄 수 있도록 다시 힘을 낸다.

결혼과 이혼이라는 징검돌을 건너 온 저자의 글을 보며 내 앞의 징검돌을 보며 고민에 빠진다. 내가 과연 행복할 수 있기 위해서 나도 징검돌을 건너야 할까? 6년을 넘어가도 변하지 않는 우리의 도돌이표를 보며 어느 게 최선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저자 또한 이 결정이 쉽지 않았다. 13년이라는 긴 시간만큼 수많은 갈등과 번민 속에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분명한 건 유한한 내 인생, 다시 오지 않을 내 인생을 위해서 나를 위한선택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결정을 위해 철저하게 분석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또한 결혼 생활이 결국 헤어짐으로 마무리 되었지만 결코 헛 된 시간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내 삶에 알맞은 걸음으로》을 읽고 나는 인생 숙제를 만난 느낌이다. 저자의 상황이 나와 다르지 않기에 더욱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나를 위한 선택, 내 행복을 포기하지 않을 선택을 할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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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러시아 고전산책 5
이반 세르게예비치 뚜르게녜프 지음, 김영란 옮김 / 작가정신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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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라는 제목을 들었을 때 대개 독일 작가 괴테의 <파우스트>를 떠올린다. 나 역시 그랬다. 읽지 않아도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소설. 악마와 거래하여 젊음을 되찾는 파우스트와 파우스트의 사랑의 화신 그레트헨 이야기를 그린 파우스트 이야기를 생각했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 이외 러시아 작가에 문외한이었던 내게 이 책을 통해 처음 만나는 이반 투르게네프는 낯선 작가였고 약간의 두려움 속에 책을 펼쳤다.

먼저 이반 투르게네프가 누구인지 설명해야겠다. 이반 투르게네프는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국민 작가이다. 투르게네프는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다. 하지만 어머니 영지의 농노들에게 동정을 느끼고 농노제를 강하게 반대하며 농노의 비참한 생활을 그린 연작 [사냥꾼의 수기]로 문단의 주목을 받으며 등단한 작가이다.

《파우스트》에는 [세 번의 만남] [파우스트] [이상한 이야기] 등 세 편의 단편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첫 번째 소설인 [세 번의 만남] 에는 이탈리아의 소렌토에서 우연히 미지의 여인을 보게 되고 세 번의 우연에 걸쳐 그녀와 만나게 되지만 실연의 아픔에 괴로워하는 그녀를 떠나보낼 수 밖에 없는 남자의 아픔이 그려진다.

이탈리아 소렌토, 러시아 글린노예, 그리고 마지막 페테르부르크에서 그녀를 만나게 되기까지의 여정을 이반 투르게네프는 영화 속 장면을 클로즈업하듯 찬찬히 보여준다. 주인공의 시선에 따라 풍경이 보여지며 그 미지의 여인의 피아노와 음악 소리, 낯선 남자와의 품에서 행복해 하는 여인의 모습, 그리고 가면에 감추인 여인 등의 모습이 섬세한 묘사와 함께 읽는 독자를 작품 안으로 초대한다. 주인공의 심리 묘사에 따라 읽는 이가 함께 움직인다. 미지의 여인을 과연 만날 수 있을까 한껏 애태우게 한 후 마지막은 짙은 안타까움으로 막을 내린다.

나는 달빛과 이슬 가득한 정원 앞에 그렇게 서 있었다. 그리고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부드러운 절반의 그림자 속에서 어슴푸레 빛나는 창문 두 개를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순간 갑자기 저택 안에서 피아노 소리가 되어 퍼져 나갔다…

자극적이고 날카로운 공기는 메아리가 되어 온 세상을 진동시켰다… 나는 돌연 이상한 전율을 느꼈다.

피아노 소리에 뒤이어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표제작이기도 한 [파우스트]는 주인공인 파벨 알렉산드로비치 B가 친구에게 보내는 아홉 통의 편지 형식으로 된 소설이다. 파벨은 젊은 시절 사랑했던 여인 베라 니콜라예브나가 대학 동창 프리임코프의 아내와 한 아이의 엄마가 된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와의 재회에 주인공은 첫만남부터 떠나기 전까지를 회상한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가르침으로 소설이나 시를 읽지 않았던 베라에게 주인공은 소설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며 [파우스트]를 읽어준다. 만남의 횟수와 함께 변해가는 두 사람의 마음의 변화가 매우 압권이다.

흥미로운 건 소설을 읽을 수록 액자 안의 액자 구성을 떠올리게 된다. 괴테의 소설 [파우스트]에서 악마가 파우스트에게 젊음을 주겠다며 유혹하는 내용이 투르게네프의 소설 속에 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문학을 읽지 않는 베라를 유혹하는 장면과 데칼코마니와 되는 듯하다. 문학을 읽으라며 그 아름다움을 알려 주겠다며 설득하는 나는 과연 악마 메피스토텔레스일까 아니면 그레트헨일까 의심하게 된다.

소설 속 나는 베라가 [파우스트]를 읽고 변해가는 걸 보며 돌아가신 그녀의 어머니 초상화 앞에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이제 그녀는 당신에게서 벗어났다며 자랑스러워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악마가 파우스트의 영혼을 자기 것이라고 말하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이 두 사람 안에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가 [파우스트] 작품의 인용문과 함께 더욱 감정을 극대화하며 괴테의 [파우스트]와 투르게네프의 《파우스트》를 하나로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마지막 아홉 번째 편지는 베라와의 짧은 인연을 통해 씁쓸히 인생을 말하는 글은 [파우스트]에서 그레트헨의 사랑을 받아 구원 받고 승천하는 파우스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자신이 베라를 변화시켰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베라가 자신을 변화시켰음을 말하는 게 아닐까 생각된다.

최근 몇 년 간의 경험에서 난 확신 하나를 얻었어. 인생은 농담이나 오락이 아니라는 것,

인생은 유희조차 아니라는 것 …

인생은 힘겨운 노동이라는 것. 금욕, 끊임없는 금욕, 이것이 바로 인생의 숨겨진 의미요,

인생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라네.

투르게네프의 《파우스트》를 읽노라면 괴테의 <파우스트>를 더 풍성히 느끼게 되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소설 속의 소설을 더 깊게 느끼게 하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이반 투르게네프의 서정적이면서도 절제된 듯한 문체를 보며 작가의 묘사 또한 놀랍지만 이 작품을 훼손하지 않기 위한 번역에도 많은 공을 들였음을 짐작케 한다. 옮긴이 후기에서도 투르게네프의 아름다운 문체를 읽는 독자에게 전달하기 위해 많은 고심을 했음을 밝힌다.

이반 투르게네프의 다른 작품들 또한 궁금해진다. 특히 농노제를 강하게 비판한 <사냥꾼의 수기>가 기대된다. 한 작가의 세계를 계속 탐험하고 싶어지는 작가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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