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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쓴 것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21년 6월
평점 :

최근 여성 서사를 다룬 수많은 소설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여성 서사들이 쏟아져 나온 시점이 꽤 됐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는 여자들의 삶. 무엇이 이렇게 많은 여성들의 삶을 만들어냈는가. 왜 여자들은 남자들에 비해 아지도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가.
나는 조남주 작가의 신작 소설집 『우리가 쓴 것』에서 바로 그 해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베스트셀러 『82년생 김지영』이 82년생을 중심으로 한 여성들의 이야기였다면 『우리가 쓴 것』은 10대부터 7,80년대까지의 여성들의 삶이 다채롭게 펼쳐진다.
총 8편의 단편이 실린 이 소설집에서 가장 큰 특징은 단 한 세대의 여성이 아닌 삼 세대의 여성의 삶이 그려진 단편소설이 많다는 소설이다. 《오로라의 밤》 과 《여자아이는 자라서》는 다루는 주제는 다소 다르지만 삼대의 이야기를 통해 각 세대의 여성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준다.
《오로라의 밤》에서는 학교 교감으로 일하며 정년을 7년 정도 남겨둔 나, 아들을 잃고 며느리와 단둘이 살고 있는 80대 시어머니, 그리고 워킹맘으로 육아와 일을 병행하느라 지친 딸 지혜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일을 하는 자신을 위해 당연히 엄마와 할머니가 육아를 도와주기 원하는 딸 지혜.
딸을 아끼지만 여전히 이루고 싶은 꿈이 있고 자신의 삶을 살고 싶은 50대의 나.
그리고 손녀를 맡아 키웠고 며느리의 일을 도왔지만 며느리의 성공이 마냥 달갑지 않았던 80대 어머니.
이 세 명의 여성에게는 하고 싶은 일들이 있었다. 딸 지혜는 일과 육아 잘 해나가고 싶고 50대의 나는 어린 시절의 꿈이었던 오로라를 꼭 보고 싶다. 그리고 어머니 또한 늦게나마 자신이 원하는 걸 해 나가고 싶다.
하지만 이들이 자신의 꿈을 이뤄가기에는 여성이라는, 엄마라는, 돌봄이라는 이름으로 수없이 미뤄져간다.
하지만 계속 '언젠가'에 머물렀다.
아직 학생이었다가, 돈이 없다가, 아이가 생겼다가, 아이가 어렸다가,
모든 문제가 해결된 후에는 시간이 없었다.
한없이 자신을 희생할 것을 요구하는 여성들의 삶. 늙어서 자식들이 결혼한 후에도 돌봄 대상의 주체로 여겨지며 소모되는 여성들의 삶이 《매화나무 아래》와 《오로라의 밤》 그리고 《여자아이는 자라서》에서도 드문드문 드러난다. 육아의 비주체인 남성에 비해 여성은 현실을 더 버티기 위해 발을 동동거리고 사람을 써야 하며 모든 마음의 짐을 감당해야만 했다. 이 모든 육아의 부담은 세대가 지나도 할머니에게서 엄마에게 그리고 딸에게 그대로 전이된다. 하지만 사회는 그저 여성의 몫이라며 당연하게 책임을 전가한다.
어머니는, 어쩌면 가족들 모두 내가 무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아무도 말리거나 돕지 않았다.
감수해야 한다고 여기는 듯했다.
우스운 것은 나조차도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남성에 비해 육아라는 짐을 떠맡은 상태에서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힘든지 이 《오로라의 밤》은 잘 드러내준다. 잘 해내고 싶지만 한 발짝 나아가기 힘든 여성의 이야기가 잘 드러난다. 개인적으로는 쌍둥이라는 사실을 알고 양가 어머니가 내게 "아이는 못 키워준다"며 선을 긋던 말씀이 떠올랐고 아이들을 키우며 일을 하기가 여전히 녹록지 않은 현실이 떠올라 많은 공감을 했던 소설이다.
조남주 작가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지만 그럼에도 이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은 이 불리한 환경에서도 서로 이해하기를 멈추지 않고 조금씩 나아가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 여자아이는 자라서 》는 학교에서 딸 친구 은비가 당한 몰래카메라를 계기로 이 일에 대한 세 모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남자아이들에게 당하지 않기 위해 남자 아이들의 만행을 찍어 학폭위에 고소한 딸 은비와 조력자 딸 주하, 그 주하를 안절부절 바라보며 성폭력 등에 분개했던 20대의 자신 또한 기득권과 같은 생각을 하는 건 아닌지 고민하는 40대의 나, 그리고 성폭력상담소를 운영하다 손녀 주하를 키우기 위해 일을 그만 두었던 친정 어머니 등 이들은 세대가 다른 만큼 서로 이해의 폭이 다르다. 딸은 남학생의 부모와 같이 생각하는 엄마에게 실망하고 엄마는 자신에게 말해주지 않는 딸에게 속상하다. 딸이 괜한 일에 휩쓸린 게 아닌가라는 생각마저 든다.
하지만 이들은 끝까지 서로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학폭위 고소 사건이 여자 아이들의 반격이라는 사실을 밝히며 우리는 확신할 수 있다. <여자아이는 자라서> 분명 할머니가 성폭력 상담소를 열어서 다른 여성을 도왔듯, 40대의 엄마가 20대에 성교육 캠프에 다니며 책 모임을 만들었듯 이 여자 아이들은 자라서 또 다른 여성을 도울 것이다.
가정 폭력의 상처를 커서도 가지고 있는 여성들이 얼마나 많은지, 가정을 위해 자신을 소진하다 생을 마감하는 80대 할머니의 이야기도, 코로나로 빈부 격차가 심해지고 사랑하기도 쉽지 않은 요즘의 십대 이야기도 마냥 해피엔딩을 그려내지는 않다. 하지만 이 소설의 글대로 한 명 한 명의 여성들의 삶은 그대로 쓰여져 이 책의 제목대로 《우리가 쓴 것》이 된다. 비록 상황은 많이 변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쓴 것들이 하나씩 모여 천천히 변화를 이루어간다.
밑줄 친 문장들을 다 소개할 수 없음이 안타까운 소설집이다. 읽는 내내 너무 공감이 된 나머지 숨을 고르며 읽었던 작품이다. 아직도 힘든 우리 모두에게 말하고 싶다. 계속 써 내려가주라고. 계속 나아가 주라고. 힘내주라고. 결국 우리는 나아질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이 책을 모든 여성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