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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기억을 지워 드립니다 - 기시미 이치로의 방구석 1열 인생 상담
기시미 이치로 지음, 이환미 옮김 / 부키 / 2020년 2월
평점 :

누군가가 당신에게 "나쁜 기억을 지워드립니다."라고 말한다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대게 그 사람이 사기꾼이나 또는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을 하는 사람이 철학자이자 『미움받을 용기』와 『마흔에게』의 저자인 기시미 이치로가 말한다며? 그렇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우리는 이미 기시미 이치로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가 결코 허튼 소리를 하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나쁜 기억을 지워드립니다》는 기시미 이치로가 한국 독자만을 위해 쓴 심리학 책이다. 한국 영화 속의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자신의 고민을 들고 와 철학자와 상담을 하며 기시미 이치로가 조언을 해주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봄날은 간다>의 상우와 은수부터 <건축학 개론> <수상한 그녀> <버닝> <동주> 등등 우리에게 익숙한 등장 인물들이 나와 삶의 문제들을 이야기한다.
영화 속의 인물들 중 완벽한 인물은 없다. 모두 자기 나름대로 고민을 안고 있다. <봄날은 간다>의 상우는 은수와의 장밋빛 미래를 꿈꾸지만 느닷없는 은수의 이별통보로 힘들어한다. "사랑이 변하니?"라고 말하며 은수에 대한 원망과 헤어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은수 또한 자신이 헤어짐을 통보했지만 행복하지 못했던 옛 결혼과의 잔상에서 그녀는 앞으로 다가가지 못하고 끝내 헤어짐을 택한다.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뿐인 아들의 석방을 위해 모든 걸 다 하지만 결국 아들로부터 면회를 거부당한 아들로 인해 힘들어하는 영화 <마더>의 엄마, 한순간에 몰락한 자신을 호주에 있는 아내와 자녀가 받아들여주지 않을 거라며 실패한 인생이라고 자책하는 <싱글라이더>의 재훈 등등.. 그들은 철학자와 상담을 하면서 묻는다.
"과거에 부모님으로부터 좀 더 사랑을 받았더라면..."
"과거에 아내의 수줍은 모습이 남아있었더라면... " "결혼 전에 남편은 참 다정했어요..."
과거의 향수에 젖은 인물들은 그 때로 돌아가고 싶은 바람을 철학자에게 털어놓지만 철학자는 단호하게 진실을 말한다.
과거는 더 이상 없습니다.
원인을 과거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를 바꿀 수 없다. 부모님에게 학대 당한 경험, 자립되지 못한 경험, 버림받은 경험 등등 철학자는 모두 내려놓으라고 말한다. 우리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아내의 결혼 전 모습, 남편의 결혼 전 다정함 또한 과거일 뿐이다. 지금 우리의 변한 모습을 인정하지 않고 과거만 그리워하는 사람에게 결코 만족함이 있을 수 없다. 단지 우리에게 필요한 건 지금의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에 맞춰 우리의 행동을 변해가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를 살아갈 수 없으므로 지금 이 곳에 인생에 앞으로 어떻게 할 지를 주목해야 한다. 결혼 전의 그 사람과 지금의 남편은 똑같을 수 없다. 우리는 과거로 회귀할 수 없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현재를 인정하며 바꿔나가는 것이다.그리고 "나쁜 기억"을 지워나가는 마법 역시 바로 "지금"에 있다고 말한다.
'지금'이 바뀌면 과거의 기억은 필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언뜻 볼 때 이해가 쉽게 되지 않는다. 우리는 잊었다고 생각하지만 살아가다 보면 그 아픈 기억, 나쁜 기억이 문득 문득 떠올라 우리를 힘들게 하곤 한다.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우리가 과거를 진지하게 대면하고 지금의 행동과 생각을 재해석해가면 과거의 '나쁜' 기억은 더 이상 '나쁜' 기억이 아닐 수 있게 될 수 있다.
과거에 사로잡혀 자신을 괴롭히면 앞으로 결코 나아갈 수 없다. 원망과 회환보다는 지금의 자신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에게는 과거로부터의 자유로울 수 있게 된다.
《나쁜 기억을 지워드립니다》는 우리에게 익숙한 영화 속 인물들, 단 한 명의 인물이 아닌 같은 영화의 두 명의 인물들의 심정을 대비시켜주며 읽는 독자들에게 공감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들이 내뱉는 고민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없는 과거에 집착하는 대신 지금을 인정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행복해 질 수 있다고 말한다.
나에게는 많은 인물들 중 <내 아내의 모든 것>의 부부 두현과 정인의 모습을 비추어 현재 나의 결혼 생활에서의 모습을 비춰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부부사이에서 '완전한 평등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저자의 글 속에서 아이를 키우며 일하기 때문에 우쭐해 하는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그로 인한 남편의 마음도 느낄 수 있었다. 한 상대방이 일방적으로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는 관계에서 서로의 입장이 되어보며 서로의 행동을 개선해 나갈 걸 조언하는 저자의 글로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나쁜 기억을 지워드립니다." 라는 기시미 이치로의 말을 믿을 수 있을까?
기시미 이치로는 자신있게 말한다. 먼저 지금을 바꿔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