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식기
아사이 료 지음, 민경욱 옮김 / 리드비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업체로부터 해당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아사이 료의 소설 『생식기』를 읽게 된 배경은 책 표지 뒷면의 한 줄 이었다.


정해진 길을 벗어난 삶은 실패작인가요?


이제껏 인간 이외 다른 종(種) 들이 인간을 탐구하는 인간탐구하는 소설은 많았다.

동물 또는 사물의 입장에서 인간의 행동을 통해 말하는 소설들이었다.

하지만 이 소설 『생식기』 처럼 한 남성 생식기, 더구나 동성애자 남성의 생식기가 화자가 되어 인간을 말하는 소설은 이 소설이 최초가 아닐까?


먼저 나를 이 책으로 유혹한 한 문장을 생각해본다.

정해진 길을 벗어난 삶은 실패작인가요?

소설 속 화자인 남성의 생식기의 역할을 생각해보자. 이성과 관계를 맺고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사람이 자신의 재능에 맞게 그 재능을 쓸 수 있다면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피아노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도 그 재능을 쓰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생식기의 역할 또한 마찬가지다. 특히 동성애자로 태어난 생식기의 주인공 다쓰 쇼세이에게 생식기는 본래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특히 한국이나 일본과 같이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곳에서 동성애자 남자의 생식기는 정해진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쇼세이의 생식기는 묻는다. 정해진 역할을 벗어난 삶은 실패작인 거냐고 말이다.

어린 시절부터 타인과 다른 삶들을 실패작으로 여겨지고 거부되어 온 다쓰야 쇼세이. 그가 택한 길은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행동하고 관심있는 척 '의태'하는 것이다. 동성애자라는 개체를 거부하고 혐오하는 이 시대에 굳이 헌신하고 싶지 않는 그는 열심인 척, 또는 봉사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 그는 자문한다.

내가 왜?

이 사회가 나를 인정하지 않는데 내가 왜 이 사회를 위해 공동체에 열심히 해야 하는데?

그래서 그는 최소한으로 일한다. 그저 자신의 정체성을 들키지 않고 먹고 살 경제적인 자립심이 있을 수 있을 정도로만 말이다.


아사이 료의 『생식기』 는 다쓰 쇼세이가 이 공동체의 발전에 헌신하지 않기로 한 배경을 상세히 설명한다. 쇼세이의 생식기의 설명을 따라가다보면 나라도 나를 거부한 이 사회를 위해 나를 바치고 싶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더 놀라게 하는 부분은 나도 그들의 다양성을 인정한다하지만 내가 인정한다고 하는 부분마저도 이성애자의 우월권이며 특혜라는 부분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그들 자체의 존재가 왜 인정해 줘야 하는가?

소수자들은 이미 존재하는데 다수를 차지하는 이성애자들이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거나 부인하는가?

이 강력한 질문 속에 나 역시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인정한다는 것조차도 철저하게 이성애 중심이었다는 것을 알려줌으로 나 역시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현재 조금씩 '다양성'을 말하며 소수자를 용인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지만 그 역시 소수자가 만들어낸 분위기가 아닌 신의 역할을 하려하는 이성애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일 뿐이다. 그 분위기에 소수자들은 그에 맞춰 행동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었다.



만약 이 소설이 소수자인 다쓰야 쇼세이의 존재를 거부하는 사회라서 공동체에 봉사하지 않는 쇼세이의 행동을 합리화하는데 그쳤다면 이 소설은 그저 그렇고 그런 소설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아사이 료는 쇼세이와 같은 동성애자이면서 정반대의 행동을 택하는 직장 동료 '소우'의 존재를 통해 반전을 드러낸다.

부정형의 의사 표시는 아무도 안 봐 줘요.


비록 주변에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라 하더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결국 달라질 수 없다는 것.

그래서 비록 그들이 미울지라도 끝까지 노력하고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라도 공동체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소우의.

소우의 주장은 단지 소수자의 개념에서만이 아닌 이 사회의 무기력함과 불의에 진절머리내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이 아닐까?

이 사회가 우리를 구원해주지 못하지만,

정치가들이 다 그놈에 그 놈이지만, 어차피 이 사회의 불의는 뿌리뽑기 힘들지라도 단지 절망함으로 의사 표시를 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봐 주지 못한다. 최소한의 의사 표시라도 하지 않으면 철저하게 없는 존재로 보여질 뿐이다.

이 책을 읽은 이후 한 가지 질문만이 남는다.

[온전함] 속에 살 수 있으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과연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혜윤 작가의 에세이 <책을 덮고 삶을 열다>에서 이자크 디네센의 <바베트의 만찬>을 이야기한다. 젊은 시절 젊은 장교 로렌스와 사랑에 빠질 수도 있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은 마르티네, 

프랑스의 파리로 건너가 유명한 프리마돈나로 성공할 수 있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던 필리파. 마르티네와 필리파 자매에게 동화 속 해피엔딩과 같은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이야기들을 보며 작가는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떤 일인가 일어날 줄 알았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이것도 인생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그것이 인생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계속 맴돌았다. 

그거야말로 내 인생 아닌가. 

늘 읽고 쓰고 아둥바둥 살아가고 있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드라마라면 너무 지루한 이 인생도 인생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까? 


<2025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읽는다. 

















블라인드 심사로 이루어진다는 이 문학상에 최은미 작가의 <김춘영> 이 대상을 수상하였다. 

화운령에서 있었던 사건을 조사하는 소설 속 나는 김춘영을 인터뷰한다. 구술자 김춘영과 마지막 면담을 남겨두고 있는 날, 4월에 눈이 쏟아진다. 구술자와 면담자와의 오붓하고 그들이 진정 원하던 내용을 풀어내려고 했건만 갑자기 내린 폭설 때문에 난데없는 불청객이 들어온다. 

등산하던 중 갈 곳을 잃은 부부, 정체 불명의 물체를 쫓다가 들어온 군인 2명. 


문제는 구술자 김춘영이 면담 한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부부는 김춘영이 이 마을의 역사적 현장의 당사자, 즉 중요 인물인 것처럼 질문을 쏟아붓는다. 김춘영으로부터 역사 소설속에서나 볼 수 있는 신화적인 이야기들을 기대한다. 그런데 김춘영은 그 역사 현장에서 한 발짝 떨어진 술을 파는 여자였을 뿐이었다. 화운령이라는 동네의 역사의 당사자가 아닌 김춘영은 사람들 앞에서 당황해하며 사람들을 피해 방으로 들어가게 된다. 


소설에서 면담자 박선생은 김춘영 할머니의 생애를 인터뷰하면서 조직의 압력을 받는다. 


박선생, 우리가 쓰는 건 라이프 스토리가 아니라 라이프 히스토리야. 



김춘영씨의 인생은 라이프 히스토리가 되지 못했다. 


대부분의 인생에서 라이프 히스토리가 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위인전에 나올 수 있는 인물들은 소수인데 반해 이름 없이 살아가는 라이프 스토리는 넘쳐난다. 


<책을 덮고 삶을 열다>에서 정혜윤 작가가 말한  '어떤 일도 일어날 줄 알았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그런 라이프 스토리가 대부분이다. 


이게 인생이야기라 말할 수 있을까라고 우리가 묻는 건 '라이프 히스토리'만을 우선시하기 떄문이다. 그래서 개개인의 고유한 라이프 스토리가 묻혀버린다. 김춘영씨도 비록 술집 여자로 살아왔지만 한 여성으로서 그 시대를 살아낸 이야기는 라이프 히스토리를 원하는 사람들에 의해 묻혀버린다. 우리 또한 화려한 인생들만을 바라보다가 열심히 살고 있는 우리의 라이프 스토리를 초라하게 여겨버린다.  


그러므로 우리도 말해야 한다. 

일어날 줄 알았는 데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그것도 인생 이야기라고. 

결국 라이프 히스토리는 라이프 스토리가 모여서 라이프 히스토리가 되는 것이 아닌가? 


어제 미팅을 위해 광화문을 지나치던 중 교보문고에 붙은 한 문구를 발견했다. 




살아있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란다. 


난 이 문장을 모든 라이프 스토리는 아름다운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라이프 히스토리가 아닌 라이프 스토리 자체가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 

완전하게 아름답지 않지만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라는 건 살아왔다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움에 다다를 수 있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아마 나는 라이프 히스토리를 만드는 주인공은 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만의 라이프 스토리는 아름답게 만들어 갈 수 있다.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라이프 스토리.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지만 그래도 해나가고 있다는 나만의 라이프 스토리로 오늘도 아름다움의 한 조각을 맞춰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수와 0수
김영탁 지음 / arte(아르테)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나를 구해내는 소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수와 0수
김영탁 지음 / arte(아르테)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 




내게는 쌍둥이 딸이 있다. 신기하게 두 딸 중 첫째는 나를 꼭 닮았고 둘째는 아이 아빠를 빼닯았다. 언젠가 가족들이 한 지인의 전시회에 참석했을 때 한 분이 첫째와 나를 보고 한 마디 하셨다. "어머~ 리틀 사라네~" 

그 말이 기분이 좋았던지 첫째는 나를 보곤 말한다. "엄마, 나는 리틀 사라에요." 아이의 말을 들을 때마다 혹시 내가 잘 못 되면 아이도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닐까 하고 겁이 나곤 한다. 아이가 지금은 나를 닮은 걸 좋아하지만 성장하면서 나와 닮았기 때문에 나를 원망하면 어쩌나 하는 우려는 항상 나를 두렵게 한다. 


영화감독이자 작가인 김영탁 작가의 장편소설 『영수와 0수』에서는 이런 나의 상상을 확장시킨다. 대부분의 SF소설이 그렇듯  『영수와 0수』 에서도 디스토피아 미래를 그린다. 


바이러스가 판쳐서 방호복을 입고서야 외출할 수 있는 시대, 

AI로 인간들이 살아갈 의미를 잃어 자살이 급증하는 시대,

서로의 기억을 팔고 사며 자신에 맞게 편집해서 살아간느 시대,  

그리고 또 하나, 불법이긴 하지만 돈만 있으면 나와 똑같은 복제인간을 만들어 필요할 때 장기를 꺼내 쓸 수 있는 시대. 


그런 시대에 살아가는 영수가 있다. 자살하고 싶지만 가족들에게 부담을 줄 수 없어 삼십년을 꾸역꾸역 살아가는 존재이다. 죽지못해 살아가는 인생인 그에게 솔깃한 제안이 온다. 복제인간을 만들어주는 브로커를 연결해주겠다고 말이다. 그 제안을 강하게 거부하던 그는 자신은 죽고 복제인간인 0수에게 대신 죽게 하자며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이제 복제인간 0수가 대신 자신의 삶을 살게 되었으니 이제 죽을 일만 남았다고 생각한 영수. 하지만 일주일 후, 죽음을 시도하기 직전, 0수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전화를 받는다. 기가 막힌 현실에 불량품 아니냐고 따지는 영수, 하지만 브로커의 대답은 말을 못 잇게 한다. 


"복제 인간이 지 인간 닮은 게 불량인 거냐고?" 


 영수가 죽기 위해서 자신의 분신 0수를 살려야 한다. 그래서 영수는 0수를 만나 밥을 먹이고 기운을 북돋워준다. 그리고 문제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그들은 다른 일행들과 함께 먼 여행을 떠난다. 



소설에서 영수에게 브로커를 연결해주었던 기억편집가 오한은 묻는다. 


기억을 사고 파는 시대에 어떤 기억이 가장 값이 나가는지 말이다. 


과연 사람들은 어떤 기억에 비싼 값을 치룰까. 이 질문은 소설을 읽는 내내 끝까지 이어져오는 질문이다. 


소설이지만 소설 속 인물들에게 드라마틱한 일상은 없다. 감명 깊은 순간도 없다. 여행을 떠나면서 밝혀지는 진실도 별로 색다른 게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무엇이 0수를 일주일만에 죽고 싶을만큼 공허함을 느끼게 했나 라는 질문이 또 다시 생겨난다. 


무엇으로 0수를 살게 해야 하는가? 


처음 값을 나가는 기억을 찾으려고 했다면 0수를 무엇으로 살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다. 값이 나가는 것보다 영수와 0수가 처음 만나 서로 챙기며 기억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일상들이 있다. 



 비싼 기억들은 0수를 살리지 못한다. 

 하지만 인생의 기억들을 이루는 작은 에피소드들이 서로를 살린다. 

일방향으로 살리는 게 아닌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것. 

그건 작은 것들의 힘이었다. 


영수와 0수 둘 중 누가 실제로 살아남았는지 중요하지 않다. 


소설 말미. 


살아남은 자의 한 마디가 묵직하다. 


나는, 

나를 구해내는 나를 봤어요. 


인생을 끝까지 살아나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그건 결국 내가 나의 인생을 구하는 것 아닐까? 


추석 연휴 부모님을 뵈었다. 자신의 병에 대해 원망을 쏟아내는 엄마를 보며 나는 『영수와 0수』를 생각했다. 

아... 엄마는 엄마를 구해내고 있지 못하구나... 


잊을만하면 '엄마, 나는 리틀 사라에요'라고 말하는 딸을 보면서 생각한다. 

내가 꼭 힘을 내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리틀 사라로 사는 삶이 나쁘지 않다고. 

나를 구해내는 것이 바로 리틀 사라인 첫째를 구해내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묵직한 소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수와 0수』라는 재미있는 소설책을 읽고 있다. 
영수와 0수, 똑같이 발음되는 이름인데 차이가 뭘까? 바로 0수가 영수의 복제인간이기 때문이다. 

『영수와 0수』 는 먼 미래를 그린 SF소설이다.  먼 미래라고 했지만 어쩌면 조만간 있을 이야기이기도 하겠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고 먼 미래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현재 일어나고 있으니까.

 대부분의 SF소설이 그렇듯 『영수와 0수』 에서 보여지는 미래도 그닥 좋지 않다. 바이러스가 퍼져서 두꺼운 방호복을 입고 외출해야 하고 AI 기술의 발달로 인간은 거의 일 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허무와 공허가 판치는 세상. 그래서 자살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시대. 자살에 연좌제가 붙는 미래. 

소설 속에서 그려지는 시대에는 자신을 대신할 복제인간도 살 수 있다. 그래서 복제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인생을 대신 살게 합니다. 어디 그 뿐인가. 살기 위해서 자신의 기억도 팔고 타인의 기억도 살 수 있는 그야말로 기상천외한 시대이다.

소설 속 주인공 영수의 꿈은 '영원한 퇴근'이다. 하지만 자살을 하면 가족들에게 무시무시한 벌금이 붙기 때문에 죽을 수도 없는 인생. 마지못해 사는 삶을 살고 있는 그에게 직장 상사인 오한이 제안을 한다. 

복제인간을 파는 브로커를 알고 있다. 
복제인간을 사서 그 복제인간에게 네 인생을 살게 해라. 

처음에는 거절하던 영수 어쩔 수 없이 마음이 동한다. 자살이 금지되어 있으니 복제인간은 자신인 척 살아가게 하고 진짜 자신은 몰래 삶을 끝내는 것. 그렇다면 자신의 가족에게 벌금이 부과되거나 괴로운 일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막상 일을 벌이려고 할 때 사건이 터지는 법. 

자신의 복제인간 0수가 직장에서 자살을 시도했다는 점. 
그것도 진짜 영수가 매달고 싶었던 22번 케이블에서 자살을 시도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어이가 없는 현실에 영수는 브로커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나요? 
복제인간이 불량품 아니냐고 따집니다. 그러자 브로커의 대답도 재미있습니다. 

"복제인간이 지 인간 닮은 게 불량인 거냐고?" 

그 말에 영수는 할 말을 잃습니다. 복제인간은 단지 생김새만 복제한 게 아닌 마음 속 상태까지 똑같았던 것이었습니다. 복제인간을 폐기할까 묻는 브로커. 하지만 영수는 살고 싶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복제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인생을 살게 하고 싶습니다. 브로커는 복제인간을 설득하라고 말합니다. 

"걔를 자살 안 하고 살도록, 설득을 하라고, 그럼 되잖아." 

자신이 죽기 위해서 복제인간을 살려야만 하는 영수. 그는 자신이 안전하게 죽기 위해 복제인간 0수를 살리기 위해 0수에게 다가간다. 

진짜 인간 영수와 복제 인간 0수가 마주합니다. 자신이 복제인간인 걸 모르는 0수. 그는 진짜 인간 영수가 자신의 복제인간이라고 생각하고 훌쩍훌쩍 울며 하는 말. 

"불쌍해. 나 같은 걸 복제까지 해서 또 니가 태어났다니까, 
나는 니가 너무 불쌍해." 


복제인간이 진짜 인간의 삶도 불쌍히 여기는 현실.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는 웃픈 현실입니다. 

복제인간이 나를 닮은 것. 그걸 보면 인간은 역시 변할 수 없다라는 말이 어쩌면 맞지 않을까
 
어르신들이나 주변에서 흔히 말하는 것. 

인간 쉽게 안 변한다. 
인간은 쉽게 안 바뀐다. 

그 말처럼 소설의 복제인간마저도 바뀔 수 없다라는 게 진실인 것 같아 씁쓸해진다.  그렇다면 정말 인생은 살아봐야 소용없는 걸까?  고쳐쓰지도 못하고 복제인간도 똑같은 거라면 인생은 희망이 없는 것 아닐까? 
노래가사처럼  너무 진한 잉크로 써서 지워버릴 수 없는 걸까?











인생을 고쳐쓸 수 없는 것일까? 라는 질문에  소설 『복미영 팬클럽 흥망사』에서 방법을 제시해준다.

덕질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복미영씨. 
이제 연예인이 아닌 자기 자신을 최애로 삼고 팬클럽을 탄생시킨 복미영씨. 

복미영은 어떻게 자신의 인생을 바꿔 쓰고 있을까? 
바로 '버리기' 이다. 일명 자신을 '버리기 아티스트'라고 말하는 복미영씨. 

그렇다면 뭘 버린다는 걸까? 
제일 먼저 자신을 실망시킨 최애들을 과감히 버린다. 열렬히 최선을 다해 좋아한 만큼 버릴 때에도 미련없이 버린다. 한정판 최애 굿즈도 버리고 마음까지 버린다. 그 뿐 아니다.
 과거의 자신을 괴롭게 했던 삶도 버린다. 

그 중 가장 잘 버리는 건 바로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의 단어입니다. 

친척조카 현주의 집에 입주하면서 아이를 돌봐주는 대가로 용돈을 받던 시절. 
현주와 현주 남편 이 소장은 애 봐주는 주제 수전 손택의 책을 읽는다며 말하며 뒤의 수식어를 암시하는 말을 종종한다.

이모님 (주제에). 이모님 (깜냥에). 

공공근로를 하는 분홍씨가 복미영씨에게 하는 말. 

우리 같은 처지에. 

그리고 최애 굿즈를 당근하려고 하자 열혈팬이 비아냥 대며 말한다.

 까짓 것. 

자신이 입버릇처럼 하는 혼잣말. 

나는 아마 안 될거야. 



한 단어씩을 버리니 전혀 다른 뜻을 가진 문장이 된다.
(주제에)를 버리니 이모님이라는 정중한 뜻이 되고 (처지에)를 버리니 우리 같은 동질감을 주지만 부정적인 뜻은 사라진다.
(안)을 빼니 될 거야 라는 긍정의 뜻이 되고 (네)를 빼니 '까짓것'이라는 용명하고 경솔하게 시작해 볼 수 있는 뜻이 된다.

한 단어씩을 빼면서 시작된 복미영씨의 인생 수선기는 그렇게 한 단어씩을 버린 후 부터 시작된다.

어쩌면 통상적 복미영과 관념적 복미영의 차이는
자신을 구속하는 한 단어를 버리느냐 버리지 못하느냐의 
차이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자신을 '버리기 아티스트'라고 말하는 복미영씨. 

쓰레기를 잘 버리고 재활용을 잘 하는 복미영씨의 특기 마냥 인생 또한 잘 버린다. 그냥 잘 버리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을 구속하고 억압했던 인생의 한 글자도 잘 버린다.
 그래서 네 까짓 것이 까짓것인 되고 안 될 거야를 될 거야로 바꾸어냅니다. 

그러니 56세 복미영씨가 자신만을 위한 자신의 팬클럽을 생각해낸 것도 바로 이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네 까짓게 팬 클럽을 만들어가 아닌 까짓것 내 팬클럽 만들어보자. 
안 될 거야 라는 말 대신 될 거야 라고 생각하며 시도하는 복미영씨.

그러니 자신의 인생이 더 이상 불쌍하지 않다. 
인생은 한 글자를 버리면 바뀌는 것이니까.

 『영수와 0수』  에서 복제인간마저 인생을 불쌍히 여기는 불쌍한 영수. 
그 영수에게도 복미영씨의 한 글자 버리기를 가르쳐 주고 싶다. 
그 한 글자를 버렸을 뿐인데  한 글자를 버리지 못하는 것. 
복미영씨의 버리기 기술이 영수의 삶을 바꾸어낼 수 있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