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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공장
엘리자베스 맥닐 지음, 박설영 옮김 / B612 / 2020년 6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형 공장>_ 엘리자베스 맥닐 -화가의 꿈을 이루기 위한 아이리스의 비극적 탈출-
1850년대 산업혁명시기의 영국은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 라는 책에 현실성있게 잘 나와 나와있으며 2005년에 로만 폴란스키 감독에 의해 영화화 되어 전세계에 그 어두운 역사의 기록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제임스 와트가 발명한 증기기관은 산업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초석 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도시로 이주한 서민들의 피와 땀과 목숨이 서려있는 슬픔이 있었습니다. 비단 증기기관 뿐만 아니라 아기 분유의 탄생은 영양 실조로 인해 엄마의 젖이 나오지 않아서 굶는 아기들의 모습을 보며 우유를 건조시켜서 개발을 한 것이었고 우리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설탕은 영양가는 없으면서 고열량이어서 굶주림으로 목숨이 오가던 산업 노동자들에겐 살기 위해 먹을 수 밖에 없었던 끔찍했던 과거를 담고 있는 식료품이 였습니다. 더군다나 상하수도 시설이 없었던 당시에는 길가에 사람들이 배설한 오물들이 그대로 있었으며 여성들의 미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하이힐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오물들을 조금이나마 피하고자 발명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거기서 더해 땅에 비가 내리면 온 세상이 오물 천지였죠. 대규모 전염병이 창궐 했던 것도 어찌보면 그 이유에서 시작된 것이 라고 합니다. 작가 엘리자베스 맥닐 의 소설 <인형 공장> 은 산업 혁명의 시기에 있던 영국의 민낯을 여과 없이 표현했으며 상류층과 빈민층의 삶을 대조하여 보다 사실적으로 묘사했습니다. 인형 공장에서 일하는 아이리스라는 빈민층의 여인과 상류층 화가 루이의 운명적인 만남에서 시작된 로맨스를 그렸으며 동물 박제 수집가 사일러스는 아이리스에 대한 집착과 광기 어린 짐승같던 모습을 매우 자극적이며 소름끼치게 보여줬습니다. 그녀를 사랑하다 못해 망상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했죠. 사랑은 과연 무엇일까요. 사랑은 신성하고 위대하며 아름답고 힘을 지녔다고 생각합니다. 로이와 아이리스의 사랑은 분명 비현실적이고 비도덕적인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두 사람의 사랑도 어떻게 되었는지 소설은 끝을 보여주지 못한 채 끝나버렸구요. 작가 엘리자베스 맥닐을 감동하게 했던 작품 <오필리아> 의 그녀처럼 아이리스는 내용적으로는 비극적으로 끝맺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개인적으로 미스터리 스릴러를 좋아해서 특유의 긴장감 있는 전개를 기대 했었지만 다소 약한 면이 있었고 로맨스라 보기에도 불완전했으며 결국은 작가의 소개글에 잘 나와있 듯이 아이리스라는 여인이 화가의 꿈을 이루기 위한 비극적 탈출을 그린 드라마라고 보는 것이 맞는것 같았습니다. 특이하고 진귀한 물품들의 대규모 전시회인 만국 박람회와 <라파엘전파형제회> 미술가들의 활동. 그들과 함께했던 그림 모델 아일리스는 고급스러웠지만 도시 곳곳에 자리잡은 영국 빈민층의 처절한 삶의 모습들은 마치 내가 그 시대를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아이리스는 어떻게 보면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나타내는 인물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녀와 언니 로즈는 신체적인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었습니다. 아이리스는 아름다운 미모를 가졌지만 태어날 때 쇄골을 다쳐서 비이상적으로 한쪽 어깨가 내려가 있었고 걸음걸이도 어색했습니다. 언니 로즈는 어린 나이에 수두에 걸려서 예뻤던 얼굴에 곰보 자국이 생겼고 한 쪽눈은 하얗게 되어 실명이 되었습니다. 당시 영국 사회는 빈민층의 아기들은 질병없이 온전하게 자라는게 현실적으로 힘든 시기였습니다 그 병 때문에 로즈는 사랑하는 연인으로부터 편지로 이별 통보를 받게 됩니다. 이처럼 겉모습까진 아니더라도 우리는 내면에 말못할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고 생각 합니다. 꿈이 있어도 내면의 상처 때문에 원치 않는 인생에 구속되어 어쩔 수 없이 수긍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사실 참 많습니다. 현실이란 건 결국 먹고 살기 위한 금전적인 수입을 나타내는데 진정으로 꿈꾸던 길을 포기하고 현실에 안주하며 타인을 위해, 그리고 가까이에는 가족들 때문에 다른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형 공장에서의 아이리스는 메마른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단물을 짜내 듯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고 화가의 꿈을 품으며 살았습니다. 가족과 인형 공장으로부터 탈출을 감행하는 모습은 통쾌함과 대리 만족을 경험하게 했던 것 같습니다. 과감하게 현실에서 탈출하여 꿈을 향해 떠나는 모습은 대단히 용기가 있었으며 쉽지 않은 모험이었고 더 나아가 우리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떠나면서도 언니 로즈에 대한 사랑은 변치 않았고 그림으로 큰 돈을 벌게되어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도 그리움에 편지를 하며 재회를 꿈꾸는 순수함도 있었습니다. 짜여진 틀과 익숙해진 삶을 깨고 나오는게 어렵다는 건 대부분의 독자가 공감 할 수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그녀가 집을 나서기 까지 부모가 협박을 하며 내친 건 정말 잔인했습니다. 질투와 무시와 경멸 속에서 그녀는 끝까지 버텨왔던 것입니다. 아이리스는 그 고정된 관념을 깨고 나와서 정말 열심히 화가의 꿈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일면 일식도 없었던 화가 루이가 그리고 있는 작품 <기주마르의 여왕>의 모델로서 선택되어 모종의 거래를 한 뒤에 협력적인 관계로 한 집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물론 그들의 만남에는 사일러스의 역할이 있었습니다. 어쨌든 루이와 아이리스의 만남이 그녀를 인형 공장에서 나오게 했고 나중에는 연인으로 발전 해서 이것이 로맨스 소설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루이는 결국 아내 실비아가 보낸 친아들의 갑작스런 등장으로 숨겨왔던 부부의 존재가 드러났고 그 때문에 믿음을 배신 당한 아이리스는 배신감에 도망치듯 떠나게 됩니다. 사실 유부남과의 불륜은 진부 할 수 있지만 로이와 아일리스가 육체적 관계로 승화되기까지의 심리적인 갈등과 사랑할 듯 말 듯 애매했던 감정선이 있었습니다. 두 인물의 긴장감 속에 채워지는 로이의 자상함과 배려는 상처받은 아이리스에겐 진정으로 꿈을 좇게 되는 촉매제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그 둘의 관계가 흥미로웠습니다. 배신감을 느끼기 직전 아이리스와 루이가 깊은 밤 온 몸을 적시며 호수에서 나눴던 포옹은 마치 고요한 달빛 아래 오묘하고 기운이 넘치는 메밀밭 위에 있는 두 연인의 모습처럼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사실 그 부분이 두 사람의 감춰진 진심이 드러났던 부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두 사람 위주의 전개가 적지 않게 실망이긴 했습니다. 기대를 했던 스릴러의 긴장감이 느껴지질 않아서 처음에는 다소 지루함이 있었고, 소설의 소개글에선 마치 사일러스와 아이리스의 스릴러적 전개가 주를 이룰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소설 중반에는 사일러스가 존재감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아이리스를 구속하게 되는 동기가 생각보다도 약하게 느껴져서 현실성이 떨어져 보였습니다. 사일러스는 그가 어린 시절 좋아했던 플릭과의 추억에서 아이리스를 동일시하여 사랑에 빠지게 되었던 건데 그것만으로는 좀 약했던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사일러스의 인물 설정을 보면 그럴수도 있다고 생각을 다시 바꾸게 되었습니다. 그의 인생엔 친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친구를 간절히 바랬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 좋아했던 플릭은 사일러스를 무시해서 결국은 살인을 당하게 되죠. 소설의 절정으로 치닷게 되면서 사일러스는 아이리스를 납치하는데 성공을 합니다. 타이밍이 절묘하게 잘 맞았는데 루이가 아내 실비아의 임종 임박 편지를 그의 여동생으로부터 받고 떠나야 되는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여기에서는 아이리스의 광기 어린 질투와 루이에 대한 분노, 집착이 폭발을 하게 됩니다. 아마도 이부분에서 아이리스는 분명 악역이었던 것 같습니다. 실비아의 남편으로서의 인간적인 면모와 양심적인 모습과 대조되는 아이리스는 마치 사일러스를 보는 듯했습니다. 결국 루이는 아이리스와의 사랑을 약속하며 떠나지만 그녀는 분노합니다. 그리고 사일러스의 작전으로 그녀가 납치 되면서 전개는 납치극이 되지만 예상과는 달리 납치범답지 않은 선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녀를 죽이는게 목적이 아니라 자기 인생속에 완전하게 사육하고 싶어하는 광적인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에로스적인 사랑이 아닌 아가페적 사랑이였다는 것에서 의외성을 느꼈습니다. 그는 지하 밀실에 그녀를 의자에 묶어 가둬놓고 영원히 친구가 되어주기를 바랬습니다. 결국은 그런 그녀를 바뀌게 해서 내 여자로 만들겠다는 욕망 어린 꿈을 가지고 소설 쓰듯 망상에 빠지게 되지만 그의 현실에선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그 지하 밀실은 1850년대의 영국이었고 아이리스는 사랑과 꿈을 포기하지 않는 서민이었으며 사일러스는 그런 그녀의 꿈을 짓밟고 자기 인생에 가둬 놓으려는 방해꾼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로즈나 그녀의 가족처럼 보여지기도 했습니다. 특히나 여자로서, 인간적으로서 자존심이 짓밟히는 오물을 쏟아내는 장면은 너무나 처절했고 공포 그 이상의 그로테스크였습니다. 사일러스 조차도 아이리스의 그런 모습에 환상이 깨질 정도의 였으니까요. 축축하고 어두우며 더러움과 굶주림의 고통 속에서 그녀는 서서히 지쳐갔으며 죽음과 삶의 이면은 종이 한장 차이처럼 희미해져 갔습니다. 하지만 그녀에겐 루이의 사랑이 있었고 자신의 그림이 영국왕립미술관 전시회에 걸리는 꿈을 끊임없이 꾸며 희망을 져버리지 않았습니다. 여종업원의 죽음때문에 사일러스를 의심하는 술집 마담과 경감의 등장으로 구조의 손길이 미치고 루이와 그녀의 언니 로즈로 인해 구조 될 뻔하는 아슬함이 있었으나 결국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꿈이란건 꺼져가는 목숨을 겨우 이끌어서도 혼자 해내할 것이며, 처절하고 외로운 인생 길이란 것을 느꼈습니다. 첫번째 탈출의 실패와 두번째 시도에서 사일러스는 의자에 고개를 숙이며 창백한 몰골로 있는그녀가 사망했음을 착각하며 굉장히 슬퍼했습니다. 아이리스는 마지막 남은 힘으로 그를 공격하며 탈출을 하게 되고 끝까지 거머리처럼 들러 붙는 사일러스를 박제품 인생에 가둬놓으며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사실 그 이후의 삶이 당연히 행복하게 마무리되는 모습을 기대했지만 작가는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고 독자들에게 상상의 숙제를 맡긴 채 마무리를 지었던 것 같습니다. 소설의 행복한 끝이 아닌 미완성의 비극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물론 그것은 독자의 생각에 따라 다를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흐린 영국의 하늘처럼 우울하며 처철한 느낌이 한동안 가시질 않았고 각 등장 인물의 모습을 하나 하나 떠올려 보면 모두 슬펐습니다. 과연 그들에게 행복이란게 있었을까, 싶었습니다. 작가는 결국 소설속에서 비극의 주인공을 그린 그림 <베아트리체>,<오필리아>를 만들어 냈던 것 같습니다. 너무나 황홀하고 아름다운 여인의 죽음. 이 소설을 완성한 작가 엘리자베스 맥닐의 노고가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예전에 감명 깊게 읽었던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 의 감동과는 다른 매력이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과연 이 이야기의 속편이 나올지 모르겠지만 소설이 드라마화 되어 나온다고 하던데 내심 기대를 하며 기다려 볼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