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디스 워튼의 환상 이야기
이디스 워튼 지음, 성소희 옮김 / 레인보우퍼블릭북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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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_이디스 워튼의 환상 이야기_이디스 워튼



아이보리 컬러의 책표지가 참 고전적이다. 옛 감성이 묻어나는 신문 기사들 같기도 하고, 뉴욕타임스지처럼도 보여지고. 이디스 워튼의 환상이야기, 제목 옆에 스페셜 이슈라는 로고가 또 눈에 들어 온다. 

'이디스 워튼의 환상 이야기'를 읽고나면 스산한 바람이 휘이 하고 내 몸을 스쳐가는 것 같다. 오래된 이 고전 문학의 향기는 핸드 드립 아메리카노 커피처럼 깊고 진하며, 다크하고 시큼한 느낌과 달달함이 있다. 물론 요즘 공포 소설이라고 하면 자극적이고 빠른 전개에 교교하게 스며드는 잔인함과는 좀 달랐다. 고딕 소설 특유의 느낌. 그렇지만 그걸 좋고 나쁨의 차이라고 보는 건아니고 이디스 워튼 작가 특유의 색깔이였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이렇게 소설을 써내는 건 쉽지 않은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드러나지 않는 공포감 말이다. 유령은 분명 존재하는데 실제로 본 사람은 없고 나중에 그 존재를 알게 된다는 설정이 굉장이 독특했고 소설이 끝나는 순간까지도 긴장감을 주었다. 사실 처음부터 유령이 나와서 어쩌니 저쩌니 했다면 뻔했을 터였다. 어린이 소설도 아니고, 클리셰는 곧 읽고 싶은 마음을 반감시킨다. 솔직히 말해 결말의 예상을 맞춰보려고 꽤나 노력을 했지만 역시나 이디스 워튼 작가는 탁월했다. 인물과 인물간의 교묘한 심리 갈등은 진실을 여기 저기 감춰두고 드러낼 듯 말 듯 애타게 했다. 그렇다고 복잡하다는 것도 아니였다. 적당했다. 장황하게 배경 설명도 없고 당시 시대 상황을 적절히 드러내면서 정말로 그럴 법한 상황을 만들어 버린다. 하지만 필자는 정통 추리나 현대 소설에 익숙하기도 해서 빈틈을 안찾을 순 없었다. 그랬다고 그걸 일일이 따지기에도 유치하기도 했다. 소설을 소설로서 이해해야하는 문학적 감각도 때론 필요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의 매력은 등장 인물들이 겪는 섬세한 심리 표현이었다. 상황을 맞으며 고민하고 이유를 찾고 잔풍에 콧잔등을 스치 듯 불편한 감정으로 주인공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은근히 공포감이 밀려왔다. 갑작스런 상황 반전이 생겨서 긴장하게 되고 하나 하나씩 풀려가는 실마리 끝에 전해지는 진실. 그리고 해결점 또한 불편하게 했다. 아무래도 나는 미스터리나, 공포가 체질적으르로 맞는지도 모르겠다. 여담이지만 북미식 개그의 극치를 보여줬다던 '난센스 노벨'은 이해하기가 좀 힘들었다. 문화적 차이도 그랬고 취향에 안맞았다고 하고 싶다. 그래서 이디스 워튼의 환상이야기는 더 기대가 되었다. 모파상 같은 작품을 떠올리기도 했다. 어쩌면 환상이야기의 소설이 작가 자신이 겪었던 아픔과 환각 증세의 경험이었다고 생각하니까 내용적으로 더 현실감 있었다. 소설은 곧 작가의 상상이자 체험이고 무의식과 의식의 조화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독특함이 있었던 흥미로운 소설이었다.

-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

#장르소설#이디스워튼의환상이야기#서평_이디스 워튼의 환상 이야기_이디스 워튼



아이보리 컬러의 책표지가 참 고전적이다. 옛 감성이 묻어나는 신문 기사들 같기도 하고, 뉴욕타임스지처럼도 보여지고. 이디스 워튼의 환상이야기, 제목 옆에 스페셜 이슈라는 로고가 또 눈에 들어 온다. 

'이디스 워튼의 환상 이야기'를 읽고나면 스산한 바람이 휘이 하고 내 몸을 스쳐가는 것 같다. 오래된 이 고전 문학의 향기는 핸드 드립 아메리카노 커피처럼 깊고 진하며, 다크하고 시큼한 느낌과 달달함이 있다. 물론 요즘 공포 소설이라고 하면 자극적이고 빠른 전개에 교교하게 스며드는 잔인함과는 좀 달랐다. 고딕 소설 특유의 느낌. 그렇지만 그걸 좋고 나쁨의 차이라고 보는 건아니고 이디스 워튼 작가 특유의 색깔이였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이렇게 소설을 써내는 건 쉽지 않은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드러나지 않는 공포감 말이다. 유령은 분명 존재하는데 실제로 본 사람은 없고 나중에 그 존재를 알게 된다는 설정이 굉장이 독특했고 소설이 끝나는 순간까지도 긴장감을 주었다. 사실 처음부터 유령이 나와서 어쩌니 저쩌니 했다면 뻔했을 터였다. 어린이 소설도 아니고, 클리셰는 곧 읽고 싶은 마음을 반감시킨다. 솔직히 말해 결말의 예상을 맞춰보려고 꽤나 노력을 했지만 역시나 이디스 워튼 작가는 탁월했다. 인물과 인물간의 교묘한 심리 갈등은 진실을 여기 저기 감춰두고 드러낼 듯 말 듯 애타게 했다. 그렇다고 복잡하다는 것도 아니였다. 적당했다. 장황하게 배경 설명도 없고 당시 시대 상황을 적절히 드러내면서 정말로 그럴 법한 상황을 만들어 버린다. 하지만 필자는 정통 추리나 현대 소설에 익숙하기도 해서 빈틈을 안찾을 순 없었다. 그랬다고 그걸 일일이 따지기에도 유치하기도 했다. 소설을 소설로서 이해해야하는 문학적 감각도 때론 필요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의 매력은 등장 인물들이 겪는 섬세한 심리 표현이었다. 상황을 맞으며 고민하고 이유를 찾고 잔풍에 콧잔등을 스치 듯 불편한 감정으로 주인공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은근히 공포감이 밀려왔다. 갑작스런 상황 반전이 생겨서 긴장하게 되고 하나 하나씩 풀려가는 실마리 끝에 전해지는 진실. 그리고 해결점 또한 불편하게 했다. 아무래도 나는 미스터리나, 공포가 체질적으르로 맞는지도 모르겠다. 여담이지만 북미식 개그의 극치를 보여줬다던 '난센스 노벨'은 이해하기가 좀 힘들었다. 문화적 차이도 그랬고 취향에 안맞았다고 하고 싶다. 그래서 이디스 워튼의 환상이야기는 더 기대가 되었다. 모파상 같은 작품을 떠올리기도 했다. 어쩌면 환상이야기의 소설이 작가 자신이 겪었던 아픔과 환각 증세의 경험이었다고 생각하니까 내용적으로 더 현실감 있었다. 소설은 곧 작가의 상상이자 체험이고 무의식과 의식의 조화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독특함이 있었던 흥미로운 소설이었다.

-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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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을 봐! 라임 청소년 문학 48
안드레우 마르틴 지음, 김지애 옮김 / 라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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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_내 눈을 봐_안드레우 마르틴_라임



참 흥미로운 소재다. 어쩌면 스마트 폰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 대한 경고의 의미같기도 하다. 뭐랄까. 스마트폰 없이는 못사는 현시대의 사람들에 대한 경고. 어쩌면 가까운 미래에 닥칠 세상 같기도 하다. 참 그럴 법하게 만든 세계다. 스마트 폰이 지배하는 세상. 정부는 스마트 폰 사용 방지법을 통과시켜서 국민들을 스마트 폰 중독에서부터 구제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고 기업은 그 법안이 통과되는 걸 막기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아이들을 스마트 폰 중독으로 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 납치를 하는 세상이라. 사실 납치가 아니라 단순히 시스템에서 벗어나기 위한 행동인데 '내 눈을 봐'의 세계에선 프로그램에서 벗어나면 납치가 되어 버리는 것 같다. 
요즘 ' 팬데믹 코르나19'로 온 국민이 고통받고 있는 지금 유일한 소통의 도구가 스마트폰이 아니던가. 얼마나 사람들이 외로워하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통받고 있을까. 소설의 세계에서 존재하는 메신저에는 가상의 친구가 생성되어 사용자의 친구가 되어주는 인공지능 로봇이 존재하고 있었다. 메신저를 사용하면 가상의 친구가 여럿 만들어지고 로봇이 자동으로 사용자를 분석해서 성향에 맞춰 최적의 대화를 하게 끔 만든다는 것. 참 기발한 상상이었다. 근데 어쩌면 진짜 그런 세상이 올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은 스마트 폰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에 대한 일종의 경고를 담고 있다. 어린이의 감성과 인간미 그리고 기계적 세상이 펼쳐지는 대립적인 상황이 볼만하다. 멀지 않은 미래에 닥칠 세상. 개인정보 마저도 기업에 통제가 되어 사생활이 분석된다. 스마트폰의 중독을 이끄는 기업의 무시무시한 전략이 기가막힐 노릇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소설 속의 세계라지만 작가가 진정으로 바라는 세상은 인간 중심의 탈스마트폰 세상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기술 혁신의 속도가 LTE보다 빠른 5G 인데, 곧 스마트폰의 세상이 가고 뇌파로 조종 할 수있는 세상이 오지 않을까, 하며 개인적인 상상을 해본다. 기계를 만지는게 아닌 뇌파만으로도 통신을 할 수 있고 가상의 세계를 유영할 수 있는 그런 것 말이다. 얘기가 너무 다른 쪽으로 갔다. '내 눈을 봐' 는 미래에 다가 올 세상을 소설로 그린 흥미로운 책이었다.

-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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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여행
김미리 지음, 이지연 그림 / 단한권의책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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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_주말여행_김미리_단한권의책


김미리 작가님의 소설에는 감성이 있다. 인생이 있다. 삶의 소소함이 있고 그 안에 스며드는 서늘한 공포가 있다. 그것이 아름답기도 하고, 때론 불타오르는 저주이기도 하고. 사랑의 전주곡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참 잘 쓴 소설이다. 간결한 문장, 과함 없는 묘사,  그러면서도 세세하게 느껴지는 인물들의 감정선. 그럴 법한 전개는 어색함 없이 끝나는 순간까지 이어진다. 마치 잘 내린 아메리카노 드립커피처럼 말이다. 유능한 바리스타의 솜씨에 독자는 그저 그 맛을 음미하며 인생의 쓴맛, 단맛, 신맛 등을 다양하게 느낀다. 작가님의 소설은 그랬다.

커피예찬? 
호러예찬.

상처받은 인생 속에 우리가 깨우쳐야 할 교훈들도 있었다. 탁월함이 묻어나는 소중한 소설들을 독자는 기꺼이 읽어줘야 할 것만 같다. 사실 너무 지나치게 잔인한 건 무섭기 보단 그냥 짜증이 난다. 이게 소설인지 잔인함 자체를 찬미하는 건지 의심스럽다. 하지만 <주말 여행>은 예리했다. 살육이 마치 화성학의 진행처럼 조화로웠다. 호러 독자들의 니즈를 잘 알고 있는 듯이 말이다. 물론 작가와 독자들 사이의 줄다리기처럼 서로가 서로를 위해 소설이라는 틀 안에서 타협할 필요는 있다. 내가 그랬다. 역시 이 소설은 재미있다.

<주말 여행>을 읽고 무서워서 애인이랑 여행을 가겠나, 싶다. 사람의 이중성은 참 무섭다. 특히나 점잖고 선해보이는 사람이 차갑게 변하면 공포 영화의 한장면을 보는 것 같다. 사랑 안의 배신과 증오, 복수, 살인까지 아주 빠르고 리드미컬한 전개가 압권이다. 물론 시작은 여느 부부와 다름 없었다. 평범했다. 잔소리하는 아내, 그걸 받아주는 남편 그리고 예정에 없던 깜짝 주말 여행. 그런데 남편으로부터 받은 배신감과 신뢰는 이미 바닥에 떨어진지 오래 된 것 같았다. 짜증내는 아내 현주. 남편 인택은 바람도 나고, 주식으로 돈도 날리고, 결혼 3년차면 아직도 신혼이고 풋풋할텐데. 마치 이혼 직전, 위기의 부부였다. 이 소설의 매력은 인택과 현주의 묘한 심리 발등과 긴장감 있는 상황 전개였다. 푸른 숲 펜션 안에서 펼쳐지는  살인의 시간. 어두운 밤 태풍으로 인해 비바람이 몰아치고, 예약자들을 굳은 날씨에 취소를 하고, 물론 그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살인자의 의도대로 만들어진 건지. 아무도 없는 펜션엔 주인 부부와 손님 부부 뿐이었던 것 같다. 따듯한 물에 몸을 담그며 하루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내는 현주 그리고 살인의 파티를 준비하는 인택. 그들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 피 튀기는 살육의 현장, 마치 스릴러 영화의 한 장면을 보듯 생생한 상황 묘사가 탁월했다. 그리고 당연할 것만 같았던 결말은 생각지도 못한 반전으로 치닫는다. 보통 표지 그림 외에는 내지에 삽화를 넣는 경우가 흔치는 않은데 범행의 현장을 그린 일러스트가 있어서 긴장감을 더했다. 그리고 머릿 속에 그릴 수가 있어서 한편으론 삽화를 넣는 것도 이해를 돕기위한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읽고나니까 섬뜩했다. 어쩌면 정말 그런 일이 있을 법했으니까, 말이다. 뉴스 매체를 통해서도 심심치 않게 접했던 어떤 살인 사건이 떠오르기도 했다. 인터넷의 세계는 마치 흥신소처럼 없는게 없다. 의지만 있으면 사람 목숨을 어찌저찌 하는 건 일도 아닌 듯하고 그 방법까지 상세하게 나와있으니까 말이다. 원한 관계의 사람들 사이에 벌어지는 살인의 참극. 뿐만 아니라 치정 관계나 금전 문제의 경우가 다반사지만 가족, 친척이라도 사람일은 모르는 것 같다. 그거야 말로 그 어떤 공포 소재보다도 소름끼치고 무서운 것 같다. 가까이에 있고 일상적인 공포. 요새 주목받는 공포 소재가 이런 것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김미리 작가님의 <주말 여행>은 읽을 땐 긴장하며 읽었지만 그 뒤에 은근히 스며드는 공포감이 압권인 소설이었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평범한 일상. 그러나 갑자기 찾아오는. 그것이 진정한 공포라고 생각한다. 
-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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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자나무
아야세 마루 지음, 최고은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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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_치자나무_아야세 마루_현대문학



아름다운 로맨스의 선율이 느껴졌던, 그러나 작가가 그리는 독특한 세계관이 매력적이었다. 오묘하면서도 잔잔한 전개 그리고 심리적 긴장감은 더욱더 <치자나무>에 몰입되었다. 소설의 규칙성이 이제는 의미가 없게 된 걸까, 싶었다. 그렇다면 개연성을 따지지 않고 예술 소설이라고 치부해버린 다면 어떨까. 아니면 작가만의 개성이라고 해둔다면. 그 어떤 이야기라도 독자 스스로가 이해해버리면 될 것 같다.
이 소설은 첫 문장을 읽는 순간 집중되어 버리는 묘함이 있었다. 해괴망측한. 그리고 자연스레 남녀간의 불륜의 결말을 얘기하는 중인데 충격적인 상황이 벌어진다.
이별의 댓가로 여자가 원한 게 돈이 아니라 남자의 팔이었다니. 그런데 남자의 반응은 더 기가막히다. 
나는'제 정신인가? 팔을 달라니, 이 무슨 그로그테스크함인가.' 하며 당황했다. 근데 진짜로 팔을 준다. 어떻게? 그냥 몸에서 떼어 준다.
소설의 세계에선 그게 가능한 걸까, 싶은. 독자는 그저 읽으라는 건가.
팔의 특정 부분을 손가락으로 누르고 뚜둑 하고 뼈가 분리되면 돌려서 뽑아낸다. 이 때 독자들은 고통스런 비명과 피가 분수같이 뿜어져 나오겠지, 하겠지만 그런 건 없었다.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지 않고 작가 의도대로 독자에게 이야기를 주입시키는 것이 독특했다. 물론 상징적인 표현이라고 하고 싶다. 그만큼 이 소설은 특이하고 매력적으로 다가 왔다. 뭐랄까, 클래식 음악으로 치자면 조성음악이 깨어져 버린 자유 형식의 무조 음악이라고 하면 될까, 아무튼 당황스러웠다.
분명히 팔을 뽑아내는 건 공포스럽다. 그러나 마치 선물을 주고 받는 듯한 전개는 자연스러웠다. 이 두가지 심리적인 대비가 굉장했다. 결국 그 팔은 여자에겐 사랑했던 남자의 최후의 흔적이자 추억을 간직한 존재였다. 괴기스럽게도 그 팔은 살아움직이는 생명성이 있었다. 남자의 습성을 그대로 갖고 있었고 여자에게 남자의 숨결과도 같은 사랑을 주었다. 보고, 듣고, 행동하는 팔.
그걸 유리 화병에 담아 물을 채워 놓고 담그면 신선함을 유지했다. 
<치자나무>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될 건 팔이라는 존재였다. 남자의 팔을 찾으러 오는 부인. 다툼 끝에 거래를 하는데 남편의 팔을 돌려주고 부인의 팔을 받는다. 거기서 또 느껴지는 부인에 대한 남편의 마음을 또 그 팔을 통해 느낀다. 
공원에서 마주친 치자나무. 그리고 그곳까지 여자를 이끈 부인의 팔. 그것들의 관계는 무엇일까.

-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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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해변
이도 게펜 지음, 임재희 옮김 / 문학세계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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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_예루살렘 해변_이도 게펜_문학세계사

참 독특한 소설이다. 92년생 작가 의 인생 안에서 어떻게 이런 소재의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하며 감탄했다. 예루살렘엔 바다가 없다. 허나 그건 주인공 내면의 바다요, 무의식의 세계 속에 존재했던 것 같다. 그리고 왠지 모를 추억으로의 여행이었다. 과거 젊은 시절의 새미와 60년후 노인이 되어 다시 찾은 새미의 현재. 세월에 농익은 마음가짐과 노쇠해버린 신체. 그리고 젊은 청년들을 향한 불편한 심기와 함께 잦아드는 즐거움. 그 즐거움은 젊음을 바라보면서도 내 추억을 그들에게 심어놓는 듯 했다. 노인도 머나먼 과거엔 청년이었고, 아이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해변>은 노인 요양원에 가기 전날 아내 릴리안과 존재하지 않는 예루살렘의 바다를 찾아 남편 새미와 도시 여행을 떠나는 로드무비 형식의 소설이다. 나는 아직 노인은 아니지만 웬지 모를 세월의 무상함을 느꼈다. 결국 나도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될 것이고 지금도 서서히 늙어가고 있는 건 진리이기 때문이다. 짧은 소설이었지만 묘한 그리움을 느꼈다. 어느덧 청년기가 저물어 청년, 중장년, 노년이 되기까지 우리는 저마다 다양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새미의 아내 릴리안의 머리가 바람결에 날리자 휑하니 들어나는 정수리. 그걸 얼른 가려주는 남편의 모습을 보면 안쓰러우면서도 남일 같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버스 안에서 폰으로 시끄럽게 음악을 트는 청년 무리를 향해 당차게 음악을 꺼달라고 하는 새미의 모습은 영락없는 노인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는 바다가 없음에도 아내를 위해 기꺼이 상점 직원에게 당당하게 바다가 어딨냐고 묻는 새미. 그 어이없는 질문에 상점 직원은 말문이 막혀 버리지만 거기에 더해 릴리안은 남편의 편을 든다. 왜 대답을 하지 않냐고. 그 모습에서 노인 부부와 사회의 묘한 긴장감을 느꼈다. 노인이니까, 나이 많은 어르신이니까, 아니면 노망 든 노인들이 미친 소리를 하는구나 치부해버리는 사회. 그래도 결국 노인은 꿋꿋하게 자기 의지대로 밀고 나갔다. 더 이상해지는 분위기를 얼른 끊고 새미는 아내를 이끌어 그곳을 벗어났다. 
어느 학교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공차는 모습을 보며 박수치고 환호하는 릴리안. 그러나 곧 아이들이 모르고 찬 공에 머리를 맞아버렸다. 새미는 놀라며 아내를 보호했고 분노에  찬 마음으로 과일을 썰던 과도로 아이들의 공을 찢어버리고 바람을 빼며 돌려준다. 
새미의 아내 릴리안은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었다.

알츠하이머: 
치매를 일으키는 가장 흔한 퇴행성 뇌질환으로 서서히 발병하여 기억력을 포함한 인지기능의 악화가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병.
출처: 네이버 사전.

곧 아내의 기억은 상실되며 이곳이 어디인지 조차 모르게 되지만 여전히 부부는 바다를 찾고 있었고, 릴리안은 기대하고 있었다. 
바다.. 새미가 만들어 낸 바다는 놀라웠다. 
사실 별 것 아니었지만.

예루살렘에는 바다가 없다. 그런데 소설 속에서 바다는 어디에 있었을까. 그건 노인들의 추억 속에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사회와는 동떨어진 내  존재. 그러나 함께하는 이가 있다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있다는 것. 그리고 같이 바다를 공유하는 부부는 아름다웠다. 

이 책은 <예루살렘 해변>을 비롯하여 다양한 소설이 엮인 단편집이다. 이 작품집으로 이스라엘 문화부 장관상을 수상했으며 몇몇 작품은 판권이 팔려 영화화 될 것이라고 한다.
이도 게펜이 차기작을 출판하면서 꼭 한국을 방문하고 싶다고 했는데 내한하면 그를 보러 꼭 가고 싶다. 한국음식을 참 좋아하는 분이셨다.
이 책을 온 열정을 쏟아 번역하신 임재희 번역가님의 후기가 글의 뒷면에 있는데 그 부분을 참고해서 읽고 싶은 단편부터 읽어도 좋을 것 같다.

-공정거래위원회에서 '추천 보증심사지침' 개정안에 따라 명확하게 경제적 이해관계를 밝힙니다.-

-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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